김성혁2023-03-06 02:09:26
그래서, 이게 뭐?
#대외비 / The Devil's Deal, 2020
영화의 제목 "대외비"를 직역하면 '외부적으로 공개되길 꺼리는 비밀'쯤으로 해석할 수 있는데, "스포일러"로 볼 수 있지 않을까?
<대외비>는 하루아침에 "순태"에게 지역 공천에 떨어진 국회의원 후보 "해웅"이 조폭 "필도"와 함께 복수를 하는 내용을 작품이다.
개봉일 국내 박스오피스 1위와 함께 현재까지 239,671명(03.02 기준)을 불러 모았지만, 이내 <귀멸의 칼날: 상현집결, 그리고 도공 마을로>에게 1위를 내줄 만큼 반응이 좋지 않다!
과연, 그 이유가 뭘까?
1. 마동석이 안 나오는 게 문제?
영화 <대외비>에는 마땅히, 선역이라고 칭할만한 인물들이 없다.
흔히, '악당'으로 분류되는 '빌런'들이 나와 '누가 누가 더 나쁜지?'를 보여주는 '피카레스크'로 정의된다.
조직폭력배 "필도"와 공천과 같이 뒤에서 모든 일들을 자신의 마음대로 주무르는 "순태"는 말할 것도 없으며, 주인공 "해웅"도 앞에서는 주민들을 위한 정치를 표방하나 뒤에서는 돈과 같은 온갖 향음으로 주민들을 매수하려 든다.
이렇게, 영화는 뻔하다면 뻔한 이미지들을 연쇄적으로 보여준다.
이를 "클리셰"로 받아들일 수도 있겠지만, 2시간 내외의 한정적인 분량에서 관객들을 설득하려면 <대외비>가 아닌 여타 작품들의 이야기가 필요하다.
하지만, 이것들만 있다면 굳이 <대외비>를 볼 이유가 없으니 그만한 "시그니처"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관객들이 <대외비>를 기억할 수 있는 순간이 있긴 할까?
결과부터 말하면, <대외비>를 다른 작품들과 비교해 기억할 수 있는 장면은 부재하다.
앞서 말한 주인공들의 모습부터 이야기의 과정, 그리고 결말까지 영화 <대외비>는 모두가 예상하는 방향에만 그친다.
특히, 이번 <대외비>를 연출한 "이원태"감독의 전작이 <악인전, 2019>임을 생각하면 더더욱 아쉬움이 남는다.
물론, <악인전>이 잘 만든 작품은 아니었지만 "마동석"배우의 이미지에 걸맞은 호쾌한 액션을 앞세워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음을 생각하면 말이다!
2. 안일했던 짜깁기
이렇게, 정리하면 배우들의 매력 부족으로 받아들이겠지만 영화 <대외비>의 문제는 이야기에 있다.
이번 <대외비>를 본다면, 전작 <악인전>과 장르는 물론이고 캐릭터들의 구도까지 동일한데 느껴지는 재미의 편차가 심한 이유에는 동기에 있다.
<악인전>에서 "동수 - 태석"이 각자 저마다의 이유로 "경호"를 노렸던 것과 다르게, 이번 <대외비>의 "해웅 - 필도"에게 이런 시너지를 기대하기엔 계기가 없다. - 이게, <악인전>과의 결정적인 차이이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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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묘〉는 장재현 감독의 진일보가 아니다
6★/10★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한 글입니다.
어느 부유한 집안에 불운이 연달아 생긴다. 아버지, 아들, 손자에게로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이 이어진다. 의학이 해결하지 못하는 곳은 무당의 자리다. 두 무당 화림과 봉길은 괴로워하는 가족에게 조상의 묫자리를 옮겨야 한다고 제안하고, 여기에 풍수사 상덕과 장의사 영근이 결합한다. 의뢰인 조상의 묫자리는 좀처럼 무덤이 있을 만한 곳으로 보이지 않는다. 화림, 봉길, 상덕, 영근은 이 일이 그리 간단치 않을 것이라는 걸 직감한다.
이 첫 번째 이야기가 펼쳐지는 동안 영화가 자아내는 긴장감은 상당하다. 감독이 이미 전작 〈검은 사제들〉, 〈사바하〉에서 선보인 바 있는 능숙한 솜씨로 사건의 비밀을 향하는 여정을 채운다. ‘미신’으로 불리는 일에 종사하는 캐릭터와 배우들의 연기도 몰입감을 강화한다. 훌륭한 배우들이 나름대로 표현한 개별 캐릭터를 한국의 케이퍼 무비에서 본 능청스러운 호흡으로 엮어내 오컬트 장르 영화에 익숙하지 않은 관객도 쉬이 몰입할 수 있게 해준다.
그러나 여기까지다. 영화의 중반, 의뢰인 가족의 사연이 갈무리된 후 영화의 두 번째 이야기가 시작하면서 영화는 고꾸라진다. 의뢰인 가족 조상의 관 아래에서 수직으로 박힌 거대한 관이 발견된다. 크기와 묻힌 방향 모두 기괴한 이 관은 말뚝의 형상이다. 묫자리는 한반도의 척추에 해당하는 곳이다. 때문에 관은 척추를 부러뜨리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그 관 속에 든 것이 일본 다이묘(무사)라는 것이 금세 밝혀진다. 의뢰인은 친일파로 고위 관료였는데, 다이묘의 관을 파헤치지 못하게 고위 관료의 관을 그 위에 덮어 위장한 것이었다.
일제강점기, 한반도 지도가 호랑이 모양인지 토끼 모양인지를 두고 다툼이 있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누가 각각의 의견을 지지했는지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민족의 가능성과 미래를 낙관하는 사람들은 한반도를 도약하는 호랑이로, 민족의 기질을 유약하고 보호받아야 할 것으로 본 사람들은 토끼로 보고자 했다. ‘여우가 범의 허리를 끊었다’는 영화의 대사는 이 영화가 전자의 관점을 취했다는 점을 알려준다. 요컨대 개인적 비극을 파헤쳐보니 민족의 비극이 보였고, 파묘를 통해 호랑이의 끊어진 척추를 되살려내 민족정기를 회복하자는 것이 영화의 메시지다.
그러나 두 번째 이야기는 완전한 실패로 보인다. 두 가지 이유가 있다. 먼저 미스터리의 대상이 너무 빠르게 정체를 드러낸다. 우리의 능력으로는 해석할 수 없는, 미스터리한 대상의 정체가 무엇일지에 대한 궁금증은 오컬트 장르가 긴장감을 자아내는 핵심 장소다. 그러나 영화는 이를 따르지 않고, 무당 일당이 어떻게 민족정기를 억누른 괴수를 퇴치할 것인지를 관객에게 몰입감을 유지하며 보여줘야 한다는 어려운 싸움에 자발적으로 뛰어든다. 장르 영화가 반드시 장르 공식을 따를 필요는 없지만, 스스로 오컬트 장르의 재미 요소를 부정하고 시작하는 건 영리한 선택이 아니다. 장르의 문법을 넘어설 만한 분명한 장점이 있는 게 아니라면 더욱 그렇다. 개인적으로, 〈파묘〉가 후반부에서 선보인 도전은 전반부와 달리 참을 수 없이 지루했다.
두 번째는 감독이 전작 〈검은 사제들〉, 〈사바하〉에서 보여준 치밀하고 깊이 있는 윤리 의식이 사라졌다는 점이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아이를 위해 모든 걸 던지는 두 신부의 이야기를 담은 〈검은 사제들〉, 영생을 위해 누군가의 생명을 착취해야 한다면 그 존재가 불사의 존재라도 ‘신’일 수는 없다는 메시지를 던진 〈사바하〉와 달리, 〈파묘〉에는 우리가 일상으로 끌어올 만한 윤리적 고민이 없다. 그저 우리 민족을 억누른 일제와 그에 동조한 친일파를 처단해야만 한다는 당위와 그 당위가 달성됐을 때의 통쾌함만 있다. 앞서 언급한 한국 케이퍼 무비의 능숙한 호흡과 더불어, 더 많은 관객이 쉽게 감정을 이입할 수 있는 소재를 영화에 들여왔다는 점에서 이는 흥행에는 도움이 될지 모른다. 그러나 오컬트 장르를 크리처물로 바꾸고, 민족 감정으로 지금껏 감독이 던져온 윤리적 화두를 대체한 결과가 과연 얼마나 의미 있을지는 모르겠다. 이 모든 걸 ‘의도하고 밀어붙였다’*는 감독의 말은 아리송하다. 지금껏 보아온 그의 뚝심이 이 작품에서는 적당한 볼거리를 만들어내는 데만 쓰인 것 같아서다. 그럼에도 나는 그의 다음 영화를 기다릴 테지만.
*https://sports.khan.co.kr/entertainment/sk_index.html?art_id=202402260903003&sec_id=540401&pt=n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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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찾아온 토네이도와 함께 옛 기억을 쫓다
다시 찾아온 손님
이 영화의 주인공은 기상청 직원 케이트(데이지 에드가 존스)다. 평범한 직장인인 케이트. 하지만 이런 케이트에게는 거대한 상처가 있다. 어렸을 때 케이트의 꿈은 토네이도를 공부하는 일이었다.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거라 믿었던 케이트. 하지만 토네이도에 친구들을 잃고 나서 케이트의 마음에는 거대한 폭풍이 있었다. 하지만 애써 눈 감는다고 해서 뉴스를 안 볼 수가 있나? 여기저기에 들이닥치는 토네이도들. 불현듯 떠오르는 기억과 함께 케이트의 마음을 무겁게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케이트에게 손님이 찾아왔다. 손님은 친구 하비(앤서니 라모스)다. 토네이도에 대해 이야기하는 케이트. 하비에겐 빵빵한 팀이 있다. 본인과 함께 토네이도를 연구하자고 제의하는 하비. 케이트의 마음이 흔들리고 오클라호마로 향한다. 거기서 만난 토네이도 인플루언서 타일러(글렌 파월)와 함께 사소하게 부딪히는 케이트 일행. 이런 세 사람에게 초거대한 토네이도가 주인공 일행을 습격했다. 토네이도 전문가 세 사람과 각 팀원들은 이 자연재해에 맞서기 시작한다.
반복과 차이
이 영화는 훌륭한 재난물이면서 따뜻한 내면을 다룬 휴먼드라마이기도 하다. 우선 첫째. 영화 자체가 과거라는 모티브를 다뤘다는 점에 있다. 우선 케이트. 케이트는 과거의 트라우마에 휘둘리는 인물이다. 이 설정은 누구나 납득할 수 있다. 어렸을 때 친구들을 토네이도에 의해 잃었으니까. 그럼 극복하고 싶은 내지는 여전히 큰 상처로 남은 과거가 있다. 우리는 영화를 보고 있으니 이걸 극복해야겠지? 그런데 영화는 판에 박힌 듯 공식을 따르지 않았다. 성장물로서의 장르적인 특성을 잘 살리기 위해 영화는 여러 요소를 덧붙였다. 이 성장서사가 1차원적이었으면 영화의 몰입감이 분산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 뻔하다고 볼 수 있는 부분을 재난이라는 배경 하에 섬세하게 붙여놓았다. 글쓴이는 인간관계를 서로 엇갈리게 묘사한 것이 인상 깊었는데, 토네이도를 다루면서 인간 내면에 있어서도 탄탄한 근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영화의 온기가 느껴지는 부분이었다. 이 인간 관계성 묘사는 <미나리>가 연상되는 부분이기도 한데 불의 이미지를 가족 간의 연대와 병치시킨다는 점에서 극이 문학적으로 느껴지는 이유이기도 했다.
둘째. 이 영화는 인간관계성을 묘사하는 것에서 머무르지 않는다. 여러 가지를 덧붙여 관객을 격려한다. 어떻게? 이 영화는 현재의 나를 통해 과거의 나를 극복하는 영화다. 한 마디로 성장서사다. 이 성장서사가 굳이 이런 플롯으로 이어져야 할 필요가 있을까? 이 영화와 다른 예시인 <데드풀과 울버린>도 일종의 성장영화다. 둘은 과거와 유사점이 없는 사건을 마주하고 진짜 슈퍼히어로가 된다(MCU에 편입한다). 이 <트위스터스>는 <데드풀과 울버린>과 다르다. 오클라호마로 돌아온다는 공간적 설정, 케이트가 과거에 했던 시도, 케이트-타일러의 관계, 다시 찾아온 친구 하비, 어머니의 대사들까지 과거와 묘하게 다른 차이를 반복으로 받아들이는 내용이 인물의 핵심이다. 그러니까 과거를 현재로 돌아와 다시 겪는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 지점은 정말 중요하다. 왜? 데이비드 흄이 말했듯 필연적으로 과거의 일이 맞는다는 보장이 없다. 영화는 이 간단한 명제를 관객에게 보여주기 위해 토네이도도 휘몰아치고 두 남자도 등장시키고 하비를 핵심인물로 내세우며 과거의 일과 현재의 일 사이의 상관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사실 토네이도도 이런 우리의 모습과 별 다르지 않다. 토네이도가 인류에 등장한 지 굉장히 오래됐을 것이다. 그 원인을 몇 백 년 동안 조사해 온 인류라면 그걸 막고도 남았어야 했다. 하지만 그런 건 없다. 자연재해에 피해를 입는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다. 이런 토네이도의 속성은 글쓴이가 앞에 쓴 영화의 핵심과도 닿아있다. 과거에 겪어 다 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오늘은 다르다는 것이다.
보고 듣고 느낀 것
이 영화를 보며 느낀 것은 정이삭 감독의 덕업일치가 느껴진다는 점이다. 어렸을 때 보고 듣고 느낀 것이 이야기 외 내적으로 핵심이 된다는 점이 흥미롭다. 첫째. 외적인 부분. 어떤 영화 든 간에 연출자가 지닌 과제는 그 이야기를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라는 점이다. 글쓴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어떻게’다. 이 영화는 전체적으로 고전적인 향취가 느껴진다. 대표적으로 재난을 보여주는 카메라가 그렇다. 영화 중후반부에 숙박업소에서 일어나는 일이 있다. 이 장면은 스필버그의 <쥐라기 공원>과 <죠스>에서 봤던 연출법이다. 뭔가 기괴한 이미지를 보여준다던가 사운드로 관객들을 휘어잡기도 하지만 정말 중요한 건 클래식한 이미지들이다. 무언가를 꽉 잡고 있는 두 남녀의 모습을 <타이타닉>에서 봤던 기억이 있는데 이런 이미지를 2024년에 구현했다. 그리고 영화의 두 주인공 중 하나인 타일러를 묘사하는 방식도 고전적인 섹시가이(?)다. 이 고전적인 섹시가이가 무슨 말이냐. 뭔가 비주얼이 깔끔하지 않다(대표적으로 수염자국). 성격도 잘난 체가 덕지덕지 붙어있다. 나르시시스트다. 하지만 그 내면을 보면 여주인공을 단단하게 사로잡으며 스트레이트로 직진한다. 겉으로 단단한 내면을 그대로 노출하며 직진하는 서양 사나이들의 성격을 그대로 보여준 것이다. 글쓴이는 <매그놀리아>, <탑건>에서 톰 크루즈나 <델마와 루이스>에서의 브래드 피트를 떠올렸다. 두 영화를 참고한 것 같지는 않아 보이지만 당시 시대상을 대표하는 이미지를 가져왔다는 점에서 감독이 과거의 것들을 가져온 근거가 된다.
다른 부분. 글쓴이는 이 영화가 자연에 대해서도 어떤 걸 말하고 싶었던 작품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이 영화에서는 정이삭 감독이 어렸을 때 경험했던 두 가지가 그대로 핵심이 된다. 첫째는 어렸을 때 구경했던 토네이도다. 이 문장에서 중요한 건 ‘어렸을 때 구경했던’이라는 뜻이다. 좀 찾아보면 정이삭 감독이 어렸을 적 미국에서 유년시절을 보낼 때 토네이도를 구경했던 기억이 선명하기도 했고 어느 정도는 동경했다고 전해진다. 이 관점이 영화 안에 그대로 들어가 있다. 토네이도에 도전하는 인간들이라는 점에서도 그렇지만 자연재해의 공간적 배경인 오클라호마가 <미나리>의 일부 공간과 겹쳐진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리고 그 토네이도에 대한 경외감은 엔딩 하이라이트 신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토네이도가 이 공간을 공격하고 이 영화를 만든 사람이 영화감독이라는 점은 창작자가 ‘이곳’과 토네이도를 동일시시킨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둘은 하나가 되어 <트위스터스>를 보고 있는 관객에게 도착했기 때문에.
토네이도가 뭐게
이 영화에서 글쓴이가 가장 좋았던 부분은 장르적인 재미다. 기본적으로 이 영화는 재난영화다. 그럼 그 재난을 묘사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그 몫을 철저하게 해낸다. 이게 토네이도를 실제로 만들었을 리는 없다. 그건 크리스토퍼 놀런 할아버지가 와도 불가능하다. 그럼 VFX로 구현했다는 의미인데. 이 자세한 부분들을 어떻게 구현했는지는 관객들이 다 다른 장점을 말할 것 같다. 정말 잘 만들어서 토론의 여지가 다분한 토네이도였다는 뜻이다. 글쓴이가 생각하는 장점은 물건이나 사람이 날아가는 방향이다. 이게 터무니 없으면 맥없이 날아갈 것 같은데 빠른 속도와 정확한 방향으로 설정되어 있어 아주 생생하다. 이 토네이도가 인물들의 절체절명의 위기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재난 외적인 이야기도 잘 만들었지만 내적인 이야기도 잡았으니 장르물로서 제 역할을 다한다.
하지만 이 장르적인 재미로서의 토네이도는 후반부에 이르러 어떤 변화를 표현한다. 글쓴이가 생각했을 때 이 영화에서의 토네이도는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를 암시하고 있다. 어리면 잘 모른다. 저거 할 수 있겠는데? 객기 부린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가면서 상처가 늘어나고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 감이 잘 잡히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은 사람에게 치유받는다고 했던가. 과거에도 ‘이 것’이었고 지금 현재도 ‘이 것’을 만났지만, 또 둘 중 뭐가 더 가치 있는 것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이번에는 다를 것 같다. 이 모든 것이 토네이도처럼 피할 수 없이 사람에게 다가오고 강력한 상처를 만든다. 미래를 예측하는 건 당연히 불가능하다. 영화를 다 본 글쓴이의 입장에서는 토네이도와 ‘그 어떤 것’ 역시 위의 문장에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영화 엔딩에서 특히 이것을 강조하고 있기도 하고. 이 연출이 이물감이 없이 자연스럽다는 점은 재난영화로서의 특징과 변화구를 둔 영화의 선택 둘 다 빛내는 좋은 선택이었다. 흐뭇한 웃음이 저절로 지어진다.
아는 것 그 자체
글쓴이가 생각하는 이 영화의 단점은 타일러 일행 묘사다. 구체적으로 영화가 이 인물의 설정을 잘 살린 편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타일러는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고 있는 크리에이터이면서 섹시가이다. 그럼 뭐가 필요할까? 비전문가가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전문성 중 하나인 경험이 부각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동시에 영상을 라이브로 송출하는 준비단계에 대한 부분이 더 들어갔어야 했다. 만약 글쓴이가 이 영화의 각본을 썼다면 카메라 장비에 관한 부분을 더 보여주면서 타일러의 과거 서사를 더 넣었을 것 같다. 영화가 불필요한 걸 다 잘라내고 간단한 플롯으로, 고전적인 영웅서사로 질주하기 때문에 이 선택은 당연하게 따라오는 단점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글쓴이는 이런 초거대한 자연재해에도 의외로 무덤덤한 타일러의 행보가 의아하기도 했다. 또 섹시하다는 이미지도 정이삭 감독이 자기 것이 아닌 걸 만들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만약 글쓴이라면 영화에서 타일러의 피지컬적인 능력이나 리더십을 더 부각하는 장면을 넣었을 것 같다. 인물의 개성이 납작하기 때문에 초반부가 진부해진다는 점에서도 그렇고, 후반부의 장르 변주가 이 인물의 다양한 내면에서 온다는 점을 생각해 봐서도 그렇다.
영화 잘하시네
<트위스터스>에 대한 글쓴이의 총평은 좋은 장르영화라는 것이다. 초반부가 납작해서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영화 전부를 보는 데에는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미나리>처럼 소담한 이야기를 바란 관객이 있을 수도 있다. 글쓴이는 이 영화가 <미나리>와 비슷하면서 아예 다른 점이 재미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미나리>를 넘은 정이삭 감독의 연출력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만족스러웠다. 8월 14일 4편의 영화가 대규모로 개봉하며 빅매치가 예고된다. 이 빅매치에서 의외의 복병이 되기 충분한 <트위스터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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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결국 다시 혼자가 될 것이란걸 알기 때문에
업보. 불교에서 쓰는 말이다. 선악의 행업을 말미암아 삼은 과보를 뜻한다. 이 업보의 주체는 상황마다 다르다. 인간관계에 정답이란 없으니 당연하다. 내가 업보를 돌려받을 수도 있고 타인이 누군가에게 줬던 상처를 내가 입힐 수도 있다. 불교를 정의하는 또 다른 가치관이 있다. 윤회다. 생명은 계속해서 반복된다. 내가 지금 태어났다고 한 건 언제쯤 죽는다는 걸 의미할 것이다. 또 나는 다른 무언가로 태어날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도 좋은 일 나쁜 일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지금 하품을 크게 하며 글을 쓰고 있는 나도 업보가 돌아가고 있을 것이다. 알게 모르게 누군가에게 크게 준 상처의 대가를 돌려받고 있는 셈이다.
이 가정을 계속해서 곱씹다 보면 인생이 허무해진다. 공감을 못 받으면 어떡하지. 이겨내도 막상 같은 시련이 덮치면 어떡하지. 시간이 지나면 다 없어지는 일인데. 이러다 내가 받은 상처가 세상의 기준에 끼지 못한 게 된다면 참 외롭지 않을까. 이 감정이 내가 단 1마디도 반박할 수 없는 고통이라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내가 잘못한 거니까 그런 거겠지. 바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총동원해 상대를 모욕할 방법을 고민한다. 그리고 알게 된다. 일어날 일이 일어났고, 나 역시 어떤 것에 대한 책임이 있으며 주변인들에게 더 감사해야 한다는 걸. 갑자기 나더러 화려하다고 했던 내 스승 중 한 명의 얼굴이 떠오른다. 잘 지내고 계신가요. 연락할 일은 없어 마음으로만 그분의 행복을 기원한다. 나는 내가 성공했던 일들보다 훨씬 더 초라한 사람이다. 내가 생각하지 못한 무언가에 휘둘리는 인간이기도 하고.
<밤의 해변에서 혼자>는 아무것도 없는 영화다. 영화는 1부와 2부로 나눠진다. 한국의 인기 여배우가 유명 영화감독과 불륜설이 난다. 국내 여론은 당연히 난리가 나고 베를린으로 도피한다. 그리고 아는 언니랑 대화를 나눈다. 1부 끝. 2부는 여배우가 한국으로 돌아온다. 불륜이 났던 남자 감독과 만난다. 2부 끝. 이 영화는 줄거리만 단출한 게 아니다. 영화의 화법도 조용하다. 플롯이랄 게 없다. 조명도 제대로 안 된 것 같고. 인물 갑자기 튀어나오고. 대화도 사실 의미가 없다. 난 왕가위를 좋아한다. 왕가위 영화의 핵심은 때깔이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는 왕가위의 감성과는 전혀 딴판이다. 왕가위는 스트릿룩으로 멋을 뽐낸 사람쯤 된다면 (이 영화에서의) 홍상수는 맨투맨에 슬랙스만 입었는데 신발이 짚신인 사람이다. 난 난해한 옷차림인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이 사람이 하고 싶은 말은 뭘까. 이렇게 평범한 일상을 비춰서 과연 뭘 말하고 싶은 걸까.
없다. 이 사람이 말하고 싶은 건 없다. 2021년 오늘 영화를 다시 보고 나서 알았다. 이 사람은 우리에게 하고 싶은 말이 없다. 딱히 우리에게 무슨 말을 걸고 싶은 사람이 아니다. 혼자 밤 해변에서 느끼는 감정들을 공유하고 싶었던 거라고 생각한다. 말이 아니라 상황을 보여주려고 했다. 감독은 어떤 감정을 생각하고 이 영화를 쓴 걸까? 난 외로움과 후회라고 생각한다. 주인공 영희가 유일한 속마음을 털어놓는 공간은 해변이다. 그녀는 애인을 좀 많이 신경 쓴다. 친한 언니에게도 애인 이야기를 한다. 지인들과 술 먹을 때도 애인 생각을 한다. 해변에서도 애인의 얼굴을 그린다. 그러다가 해변에서 잔다. 시간이 지나고 한국으로 돌아온다. 한국에 어떻게 돌아왔는지는 묘사되지 않는다. 그냥 그녀는 그러고 만다. 아무 일 없는 듯이. 시간이 지나 그녀의 그리움이 어떻게 됐는지는 보여주지 않는다. 2부를 보자. 바다에서 지인들끼리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는 게 전부다. 근데 이건 꿈이었다. 영화가 보여주는 건 결과적으로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데 2부가 끝났다. 영화 안에서 사랑하는 애인을 만났던 건 시간이 지났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근데 아니다. 모든 게 꿈이었다. 결국 그녀는 혼자서 길을 걷는다. 영화의 시작은 친구와 함께 대화하는 장면이었는데 끝은 혼자다. 갈등의 해결? 그런 것 없다. 주인공의 해피엔딩? 없다. 새드엔딩? 당연히 없다. 아무것도 없다. 이 상황은 우리가 외로움을 느끼는 것과 비슷하다.
외로움이란 무엇일까. 이 세상에 나밖에 없는 것 같은 기분이 외로움이다. 아무도 나를 이해하지 못할 거라는 그런 막연함이 외로움이라 생각한다. 영희는 혼자서 소리친다. 나는 사람들에게 상처만 주냐고 주변인들에게 묻는다. 근데 이게 꿈이다. 내가 진짜 나쁜 년이라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것 마저도 혼자만의 착각으로 끝났다. 그뿐일까? 영희의 애인인 감독은 여자를 사랑하지 않는다. 본인만 사랑하는 나르시시스트다. 결과적으로 비행기 타고 13시간이나 걸리는 베를린에서 남자를 생각했던 것이 헛수고로 돌아가버렸다. 시간이 모든 걸 해결할 거라 생각했는데 그녀의 그리움은 꿈으로 매몰됐다. 남는 게 없는 셈이다. 이게 홍상수가 말하고 싶었던 감정이다. 외로움이다. 우리는 초입 10분 만에 이 영화가 이러다가 끝날 거란 걸 알고 있다. 감독이 홍상수니까. 근데도 이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밤 해변을 보는 것처럼 멍하니 앉아있다. 어차피 세상에 나를 공감할 수 없는 건 나밖에 없단 걸 우리 모두 알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외로움엔 이유가 없다. 그냥 이 세상에 혼자라는 생각이 문득 들 때 가장 외로워진다. 그리고 그게 내가 만든 이유 때문이란 걸 알면 걷잡을 수 없이 후회가 커진다. 바닷가에 홀로 누워서 잠을 자고 싶다. 그냥 멍하니 시간만 지나면 좋을 테니까. 좌절과 외로움을 겪는 사람들, 그러니까 나 포함한 모든 이들이 어려움이 있으면 시간이 해결해줄 것이라 믿는다. 아무것도 없을 땐 진짜 아무것도 하기 싫어진다. 마지막 엔딩신 바로 전까지를 보니 아마 홍상수 감독도 그런 것 같다. 외로우니까. 이 모든 게 내가 자초한 일이라고 하더라도 결국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라고 믿나 보다.
근데 마지막 엔딩신을 보자. 영희는 일어나서 똑바로 걷는다. 이 모든 게 꿈이었단 걸, 다 의미가 없어서 외로워하고 있단 걸 아는데도 앞을 보며 걸어간다. 외롭다는 뜻이다. 근데 1부에서 남자 등에 업혀 가던 모습이 아니었다. 2부는 혼자서 걷는다. 이제 더 이상 후회하지 않는 것 같다. 난 이 영화의 그녀 모습에게서 무언가가 느껴졌다. 외롭지 않은가 보다. 아무도 찾지 않아도 될 정도로 씩씩해졌나 보다. 영희는 후회를 받아들이기로 한 것 같다. 후회는 어차피 우리의 곁에서 영원히 떠나가지 않는다. 결국 모든 게 꿈처럼 사라진다. 타인은 나를 이해할 수 없어서 용서를 해주지 않을 때가 많다. 이 영화도 마찬가지다. 그녀를 이해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영희는 이 모든 게 허상임을 알고도 이제 누군가의 도움 없이 앞으로만 걷는다. 난 이런 그녀의 모습이 우리의 삶에서 후회가 작동한 후의 방식과도 닮았다고 생각한다. 누군가에게 받은 상처. 나라는 인간이 비호감 덩어리라 멀어질 수밖에 없던 모순적인 순간들. 뭐 그런 순간이 우리의 일생에서 끊임없이 반복된다. 그리고 그걸 벗어나지 못하면 후회가 된다고 생각한다. 또 막상 그걸 세상이 이해해주지 못할 때도 있다. 그러면 그냥 방 안에서 가만히 있어야 하나. 우리는 걸을 수밖에 없다. 어찌 보면 이기적일지도 모른다. 세상에게 상처를 주고도 앞으로 걷는다는 건 받은 이들의 입장에선 피가 거꾸로 솟는 셈일 테니까. 현실의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다. 홍상수는 부인에게 큰 상처를 줬다. 사실 어찌 보면 질이 안 좋은 사람이다. 그는 이런 자기의 모습을 영희에 투영해 우리의 한 모습을 관객에게 보여주고 있다. 그래. 알아. 아무도 날 이해할 수 없단 걸. 그리고 내 애인도 이해할 수 없겠지. 내가 누리던 인기 영희의 주변인처럼 다 꿈처럼 사라지겠지. 사랑도 언젠가 실패할 테고. 그럼에도 영희는 벌떡 일어나서 앞으로 걸었다. 외로움과 후회를 보여줘도 사실 자기는 선택지가 없단 걸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이건 홍상수라서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니다. 당연하다. 사실 어쩔 수 없다. 내가 잘못한 일에 내가 외로움을 느끼던 타인이 나에게 가한 이기심이던 우리는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이게 인생사의 전부라고 생각했다. 그는 어쩔 수 없다. 이 모든 상황이 모순이고 후회 속에 갇혀 나를 이해할 수 없더라도 내 인생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지켜볼 수밖에 없다고 변명한 셈이다. 나도 외롭고 후회한다고. 이게 내가 느낀 감정들이라는 걸 보여줬다. 그러니까 구체적으로 말하는 바도 없이 자기 인생의 한 부분을 완벽하게 비유했다.
그래서 이 영화에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많을 거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끊임없는 루틴의 반복 속에 산다. 반복되는 일상 속 비호감 덩어리인 나. 이 세상에 나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한때의 나만 있진 않을 것이다. 우리는 알고 있다. 지나간 세월을 돌이켜보면 이 모든 게 꿈같아서 즐거웠던 시간은 우리를 아프게 만든다. 그러면 어때. 이 세상은 모순덩어리다. 내가 보이는 것들이 타인은 눈치 못 채는 순간의 연속이다. 타인과 교감하는 순간까지 심지어 꿈같이 사라질 때가 부지기수다. 이건 결국 후회나 외로움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잠에서 깨어난 영희처럼 앞에서 걸어갈 수밖에 없다. 시간 속에 우리의 삶을 가만히 놔둘 수밖에 없다. 회의감이 가득한 게 우리의 삶이라고 한들 홍상수는 이 감정 속에서도 자기의 내면세계를 솔직하게 드러낸다. 여러모로 제정신이 아닌 감독이다. 홍상수를 좋아하지 않았던 나지만 나도 그에게 설득당해버렸다. 처음엔 양홍원의 <오보에>를 리뷰하려고 시작했던 글이 점점 길어졌다. 굉장히 중요한 기획서를 써서 모 교수님에게 내야 하는데 한 3시간 동안 이 글만 썼다. 이제는 해변에서 혼자 배회하지 않아야 할 텐데. 공부도 다시 시작해야 할 텐데. 7월 말의 밤이 조용히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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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당 | 도구로 버려지기 싫었던 야당의 복수극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익숙함 속 틀린 그림 찾기
한국 범죄 영화에는 익숙한 그림이 있다. 검사와 경찰은 항상 싸우기 마련이다. 검사의 일방적인 수사 명령에 끌려다니는 경찰은 한탄을 멈추지 않는다. 과거 시점이라면 검사가 경찰의 횡포에 짜증 내는 정반대 상황도 볼 수 있다. 정치인, 검사, 언론인의 회동도 빠지지 않는 광경이다. 서로가 서로의 약점을 가려주고 더 많은 권력과 부를 위해 끌어주는 이 그림은 <내부자들>을 비롯한 여러 영화에서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근래에 유독 핫한 그림도 있다. 마약이다. 버닝썬 게이트 전후로 한국 범죄 영화나 드라마에서 마약이 등장하지 않는 경우는 드물다. 마약이라는 소재를 활용하는 방식도 대동소이하다. 연예인이나 인플루언서의 마약 투여 사건을 수사하던 경찰은 재벌 및 유력 정치인 자제와의 연관성을 찾아내고, 마약 수사는 부패 사건 수사로 전환되는 식이다. <베테랑>, <더 킹>, <모범택시> 등 많은 작품이 정형화된 패턴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얼핏 보기에는 <야당>도 익숙한 그림으로 가득하다. 정치인, 검사, 언론, 마약 조직의 연계와 부패, 비리를 고발하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수사기관 간의 갈등, 연예인 가십 등도 빠지지 않고 활용된다. 그런데 보다 보면 <야당>은 뭔가 다르다. 익숙한 그림 구석구석에 틀린 그림이 숨어 있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 사건이 아닌 인물, 특히 같은 듯 다른 두 '야당'이 대조되는 지점에서 예상치 못한 감정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수단과 목적 사이
야당은 마약사범들 중 경찰이나 검찰 등의 수사 기관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범죄자들을 일컫는 은어다. 수사 기관과 범죄 조직 양쪽에 한 발씩 걸치고 있는 일종의 이중첩자인 셈이다. 자연히 그들의 성격도 이중적일 수밖에 없다. 수사기관에게 그들은 수단이자 동시에 목적이다. 기본적으로는 수사를 위한 도구이지만, 그들에게 인간적인 신뢰감을 불어넣어 주지 못하는 한 그들은 도구로써 기능하지 않으니까.
<야당>의 오프닝과 초반부는 수단과 목적 사이에서 줄을 타는 야당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강수는 경찰에게 마약 조직 정보를 주고, 검거에도 참여한다. 경찰은 강수의 조력을 받아 실적을 올리고, 강수는 체포된 마약 사범의 형량 거래에 참여해 수수료를 받아간다. 둘 모두 서로 이익이 맞으니까 협력하는 경찰과 야당은 꼭 악어와 악어새를 보는 듯하다.
한편으로는 악어와 악어새의 우정도 보여준다. 과거 마약 판매 누명을 뒤집어쓰고 감옥에 간 강수. 관희는 그에게 자신의 야당이 되라고 제안한다. 마약 조직에 잠입해 정보를 알아내면 감형해 주겠다는 것. 강수의 노력 덕분에 마약 조직을 소탕한 관희는 승진 가도를 달리고, 강수는 출소 후에도 야당 일을 하면서 떼돈을 번다. 그렇게 관희의 수단이었던 강수는 그의 목적이 된다. 커플 시계를 나눠 끼는 의형제로 발전할 정도로.
수단과 목적이 전복되다
바로 이 대목에서 <야당>은 자신만의 개성을 갖춘다. <야당>은 수단과 목적의 관계를 전복하면서 예기치 못한 감정적 동요를 선사한다. 마약 파티 현장을 급습한 관희와 강수. 그런데 대통령 후보 아들 '조훈'(류경수)이 파티에서 발견된 순간, 그들의 관계는 급반전된다. 관희는 권력을 위해 강수를 내친다. 관희의 목적이 된 줄 알았던 강수는 강제로 마약을 투약당해서 중독자가 되고, 다리에도 화상을 입은 채 도구로서 버려진다.
또 다른 야당과의 대조를 이루면서 강수의 비참한 처지는 더 강조된다. 상재는 마약 수사 중 입건된 '엄수진'(채원빈)에게 거래를 제안한다. 마약 공급책, 마약 파티 일시와 장소를 알려주면 풀어주겠다고. 하지만 거래는 수포로 돌아간다. 상재가 쫓던 용의자를 관희와 강수가 가로챈 것. 결국 수진은 마약 사범이 되고, 상재는 검찰과의 갈등으로 인해 소송에 시달리게 되면서 그들의 관계는 끝나는 듯 보인다.
하지만 상재와 수진의 관계는 강수와 관희와는 달랐다. 관희에게 복수하려는 강수가 도움을 요청하자 상재와 수진은 복수심 외의 감정 때문에 그에게 협력한다. 상재는 수진과의 약속을 못 지켰다는 자책감에, 수진은 죄책감을 못 떨치는 상재에 대한 연민 때문에. 도구로서 만났지만 진정으로 아껴주는 목적이 되어주는 관계성의 변화는 수진에게 역경이 닥쳐도 상재가 끝까지 관희에 대한 복수를 다짐하는 원동력이 되어준다.
의외의 특별함
그래서 <야당>은 의외로 감정적이다. 배신당하고 버려진 이의 복수, 서로를 지켜주지 못했던 약자들의 연대에 집중한 덕분이다. 그저 주인공 직업이 검사나 경찰이라서 정치권 및 재계와 엮일 뿐이지, 사회비판적 메시지에 집착하지는 않는다. 그 결과 사람을 목적으로 다루지 않고 수단으로만 이용하는 세태에 대한 비판과 한탄이 사회적, 정치적 교훈보다 중요하게 전달될 수 있다.
이는 관희와 조훈의 관계와 피해자 세 명이 이루는 대조가 흥미로운 이유이기도 하다. 권력욕으로만 뭉친 관희와 조훈은 서로를 전혀 신뢰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조훈의 마약 사건이 대중에게 알려지거나 관희가 상재가 강수를 통제하지 못할 때마다 그들은 갈등을 빚기 일쑤다. 이처럼 불협화음이 가득한 관계성 덕분에 배신당하고 버려진 자들의 연대는 더욱 빛날 수 있다.
주인공들의 관계성에 집중한 덕분에 <야당>은 덜 작위적이기도 하다. 정의를 위해 물불 안 가리는 형사, 맹목적으로 돈과 권력을 탐하는 검사나 정치인 같은 캐릭터는 없다. 대부분의 인물은 적당히 탐욕스럽고, 정의롭다. 이 양면성 덕분에 수단과 목적의 관계가 뒤바뀌는 순간도 자연스럽다. 관희가 한순간에 강수를 내치는 결단을 내려도, 악연으로 만난 강수와 상재의 관계가 동료로 전환되는 과정도 편의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실화를 패러디하는 연출도 연장선상에 있어서 자연스럽다. 사회 비판을 위해 실화 사건을 어설프게 풍자하는 한국 영화의 고질병은 답습하지 않았다. 그 대신 반전을 주는 장치로써 평연하게 활용한다. 강수는 '우병우 황제 조사 논란'을 연상케 하는 방식으로 관희에게 복수한다. 정치 권력과 검찰 권력의 유착 관계를 폭로하는 이 장면은 예측과는 달라서 유효한 반전이고, 그렇기에 억지스럽지 않은 풍자라서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관성을 뛰어넘는 재미
다만 <야당>은 한계도 명확하다. 관성적이라는 인상은 떨쳐내지 못했다. 캐릭터 활용법이 대표적이다. 예를 들어 수진은 더 입체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캐릭터였다. 그녀는 다른 범죄 영화에서 단순히 마약 범죄 피해자로 등장하는 여성 연예인 역할 이상의 존재감을 뽐낸다. 가해자들에게 복수하려고 직접 움직이는 주체적인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 그런데 <야당>은 그녀를 다른 캐릭터를 각성시키기 위한 장치로만 소비하고 말았다.
야당이라는 소재에 집중하기 위해 사회 구조적 측면을 깊이 건드리지 않은 선택 또한 한계로 볼 수 있다. <야당>은 관희와 조훈의 최후만 보여준다. 그들과 결탁한 다른 정치인, 법조인, 언론인들이 어떤 처벌을 받았는지는 관객의 상상에 맡긴다. 눈에 보이는 바퀴벌레만 잡을 뿐, 근원적인 문제까지는 굳이 건들지 않는 셈이다. 그러다 보니 <야당>의 사회 비판은 자칫 얄팍한 인상 비평처럼 느껴질 여지가 충분하다.
그렇지만 <야당>은 여전히 거절하기 힘든 영화다. 익숙한 그림을 차별화시킬 줄 안다는 점에서는 잘 끓인 김치찌개 같기도 하다. 처음에는 기시감이 짙더라도 먹다 보면 의외의 킥을 발견하는 재미가 있으니까. 마약 사건의 자극성이나 사회비판적 메시지에 경도되지 않은 채 소재의 특성에만 집중한 스토리텔링이 되짚을수록 영리하고, 인상적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Acceptable 무난함
익숙한 프레임에서 틀린 그림 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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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1월 셋째 주 씨네랩 홈시네마 추천작 3편
안녕하세요!
영화/OTT 콘텐츠 큐레이션 웹매거진 씨네랩입니다.
2022년 1월 셋째 주 씨네랩이 추천하는 홈 시네마 추천작 3편을 선정하는 콘텐츠입니다.
오늘은 넷플릭스에서 서비스 되고있는 <미션 임파서블1>과
좀비영화의 레전드 작품인 넷플릭스에서 서비스 되고 있는 <새벽의 저주>
그리고 디즈니플러스에서 서비스 중인 <토이스토리 3>입니다.
그럼 씨네랩이 각 작품을 선정 및 추천하는 이유와
간단한 작품소개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씨네랩이 추천하는 홈시네마작을 시청하면서
오늘 하루도 영화로운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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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넷플릭스 <미션 임파서블>
영화 - 액션ㅣ110분
- 콘텐츠 소개 : 지난 2년간 IMF에서 기획 수행하는 작전들의 실패확률이 높아졌다.
IMF 지휘부는 내부에 첩자가 있다고 판단하고 덫을 놓는다.
CIA 해외비밀요원 NOC리스트를 미끼로 하고 의심스러운 요원들로 가짜작전을 수행할 미션임파서블팀을 꾸린다.
이단 헌트는 미션임파서블팀의 팀장으로 임명되고 팀은 미션 수행 중 함정에 빠져 모두 다 죽게 된다.
생존자 이단 헌트는 미션이 가짜였다는 걸 알게 되지만 동시에 스파이로 지목당하고 쫓기게 된다.
- 선정 및 추천 이유 : 스파이 영화에서 <007>시리즈와 쌍벽을 이루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만큼 레전드 작품입니다.
<007> 시리즈는 세월을 오래한만큼 007역할의 배우도 여러번 바뀌었는데요.
하지만 <미션 임파서블>시리즈에는 우리의 톰 아저씨, 톰 크루즈 배우가 굳건히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스턴트 장면을 대역없이 직접 소화하는 걸로 유명한 배우 톰 크루즈.
비행기에 직접 올라타거나 엄청난 고층빌딩에서의 액션, 수중장면 등 <미션 임파서블>에서는
엄청난 스케일의 고난이도 액션 장면이 영화 팬들의 마음을 사로 잡습니다.
그런데 이런 위험천만한 장면을 대역없이 배우가 직접 연기했다고 하면? (물론 전부 다 스스로 하진 않았겠죠?)
더욱 영화에 대한 흥미가 생기기도 하고, 또 고생하고 노력한 배우에게 호감이 가기 마련이겠죠. :)
<미션 임파서블 1>은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 중에서도 가장 사랑받는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톰 크루즈가 연기하는 이단 헌트가 동료들과의 케미에서 엄청난 미션을 수행하는 모습을 보면 흐뭇하고 감동스럽기도 하죠!
액션영화의 아드레날린을 느끼고 싶다면 다시 한번 <미션 임파서블 1> 시청을 추천드리고 싶습니다! :)
2. 넷플릭스 <새벽의 저주>
영화 - 공포ㅣ100분
- 콘텐츠 소개 : 어느날 새벽, 간호사 '안나'는 느닷없이 나타난 옆집 소녀에게 남편이 물어 뜯겨 죽는 참혹한 광경을 목격한다.
슬퍼하거나 놀랄 틈도 없이 죽었던 남편은 다시 되살아나 안나를 공격하고 안나는 급히 집 밖으로 도망쳐 나온다.
그러나 집밖에도 이미 같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으며, 세상은 순식간에 생지옥으로 변하고 만다.
어디서 왔는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산 시체 들에게 한번 물리면 그 순간 물린 사람도 좀비로 변하고,
이런 연쇄작용으로 인해 도시는 혼이 없는 시체들에게 점령당하고 만다.
필사적으로 도망치던 안나는 몇몇 사람들과 함께 한 쇼핑몰 안으로 피신한다.
- 선정 및 추천 이유 : 좀비영화의 바이블이라고 평가받는 작품.
지금은 좀비를 소재로 한 영화들이 대단히 많이 제작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도 2004년 작의 <새벽의 저주>는 많은 영화팬들에게 회자되고 있는 좀비물의 레전드 작품인데요.
영화라는 매개체는 취향에 따라 주관적인 평가가 많이 다를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좀비/액션 영화를 좋아하시는 영화팬들은 <새벽의 저주>가 지루할 틈이 없는 긴장감과 통쾌하고 잔인한 장면도 여과없이 보여주는 액션,
그리고 스릴이 넘치는 주연배우들의 탈출과정 등을 매력 포인트로 꼽습니다.
아역배우로 시작해 지금은 영화 감독으로도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안나 역의 '사라 폴리'와 <미션 임파서블>시리즈에서
이단 헌트(톰 크루즈)의 조력자인 루터 역을 연기한 '빙 라메스'의 풋풋한(?) 모습을 보실 수 있습니다.
특히 좀비들을 피해 은신하고 있는 쇼핑몰에서 차를 타고 탈출을 강행할때 엄청난 좀비떼들이 차로 모여 길을 막는 장면은
지금봐도 엄청난 명장면인데요!
<새벽의 저주>는 아무 생각없이 좀비/오락액션을 즐기시고 싶을 때 추천드리는 영화입니다.
3. 디즈니플러스+ <토이 스토리3>
영화 - 애니메이션 ㅣ 102분
- 콘텐츠 소개 : 모든 장난감들이 겪는 가장 슬픈일은 바로 주인이 성장해 더이상 자신들과 놀아주지 않는 것.
우디와 버즈에게도 그 위기가 찾아온다. 앤디가 대학에 진학, 집을 떠나게 된 것.
헤어짐의 불안에 떨던 토이들은 앤디 엄마의 실수로 집을 나오게 된 이들은 우여곡절 끝에 탁아소에 기증되는 신세가 된다!
그런데 오마이갓, 어린이집 애들 장난이 아니게 난폭하고 험하다.
그리고 상상도 못했던 거대한 음모까지 숨겨져 있는 어린이집 장난감의 세계.
그러다 앤디가 여전히 자신들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토이 군단은 앤디 곁으로 돌아가기 위해 생애 가장 큰 모험을 결심한다.
우디를 중심으로 똘똘뭉친 토이들 과연 이들의 위대한 탈출은 성공할 것인가!
- 선정 이유 : 83회 미국 아카데미 주제가상, 장편애니메이션상 수상작.
64회 영국 아카데미 장편애니메이션상 수상작. 68회 골든글로브 시상식 장편애니메이션상 수상.
16회 크리틱스 초이스 시상식 장편 애니메이션상 수상 등 다수의 수상작.
<토이 스토리3>는 북미 개봉 당시 픽사 최고의 오프닝 기록을 기록하며 최고의 화제작으로 꼽힌 애니메이션 작품입니다.
픽사가 가장 잘하는 남녀노소 모두를 공감하게 만들고, 감동을 주는 스토리 라인으로 유아부터 어른까지
모두를 사로잡는 재미와 감동으로 애니메이션으로 손에 꼽히는 작품입니다.
메인 캐릭터 '우디'와 '버즈'뿐만 아니라 장난감들 캐릭터 하나하나가 모두 다 개성있고 특색있으며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생생한 애니메이션입니다. 장난감의 세계가 이처럼 장대하고 살아숨쉬고 찬란할 수 있을까?
특히 <토이 스토리3>의 메인 스토리 라인은 장난감들과 주인과의 이별의 순간일텐데요.
담담하면서도 우리 모두에게 공감과 위로를 주는 애니메이션 <토이 스토리3>를 다시 한번 시청해보시는 건 어떨까요?
씨네랩 에디터 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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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용하고 폭력적인 사회, 그 속에서 시끄럽게 서로를 지키는 사람들이 있다
영화 <대도시의 사랑법>
박상영 원작, 이언희 감독
김고은, 노상현 주연* 해당 리뷰에는 영화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누구도 웃어주지 않는 곳에서
영화의 주인공, 재희(김고은)와 흥수(노상현)는 대도시를 살아가는 20대 청년들이다. 인구 밀도 과다, 남에게 관심 많은 사람들 사이 끼어 살아가야 하는 두 남녀. 어느 누군가는 도시가 '시끄럽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도로에 꽉 끼어 클락션을 울리는 차들, 좁은 길을 지나다니며 떠드는 사람들, 하루가 멀다 하고 터지는 각종 사건사고들.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는 시끄러운 것이 당연하다는 듯, 바깥은 소음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시끄러움으로 무장한 도시의 이면에는 조용한 폭력이 있다.
재희와 흥수, 그들이 살아가는 대도시는 조용하고, 폭력적이다. 자유로운 영혼, 재희는 대학교에서 홀로 다니는 동안 여러 동기들의 소문에 시달린다. 눈에 띄는 빨간 니트로 코디한 '유러피안 스타일', 담배를 피우는 여학생, 눈치도 보지 않는 과감한 행동들. 동기들의 입에서 입을 타고, 그리고 눈에서 눈으로, 귀에서 귀로, 재희는 '옷이 저거밖에 없는' 애가 됐다가, '유출된 누드 사진의 주인공'이 됐다가, 문란하다는 소문에 휩싸이기까지 한다. 이 과정 내내, 누구도 재희에게 다가와 알려주거나 직접 부딪히지 않는다. 그저 등을 돌리고 속삭일 뿐이다.
주먹을 쥐지 않고도 가닿는 조용한 폭력. 재희는 그래서 이 사회의 구성원이 되지 못한 채 자꾸만 밀려난다. 해명할 기회도, 설명할 시간도 없이, 재희를 재단하고 평가하는 폭력적인 시선들이 '재희'라는 여성이 어떤 인간인지에 대해 쉽게 정의내리고 말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웃어주지 않는 곳. 그곳에서, 재희는 자신과 너무도 다른, 그러나 어딘가 비슷한 것만 같은 흥수를 만난다.
두려움을 마주하는 법
재희가 온갖 소문과 관심에 시달리는 비밀스러운 인물이라면, 흥수는 비밀을 들키고 싶지도, 눈에 띄고 싶지도 않아하는 인물이다. 재희와 흥수는 정반대 지점에 서 있다. 자신의 엄마조차 애써 외면하려 하는 성정체성을 이유로 남들 앞에 떳떳하게 스스로를 드러내지 못하는 흥수, 헛소문에 시달리고 싶지 않아 시험을 보고 나오다 강의실 앞에서 직접 옷을 벗고 해명하는 재희. 스스로 말할 수 있는 무대를 만드는 사람과,스스로 말할 수 있는 무대에 오르기를 꺼리는 사람. 남자를 좋아하는 남자, 남자를 좋아하는 여자. 시선을 두려워하지 않는 재희와 시선을 마주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흥수.
그런 흥수에게, 재희에게 비밀을 들켰다는 사실은 또 다른 두려움을 가져다준다. 하지만 소문을 만들어내던 동기들의 의심의 타깃이 된 순간 재희가 흥수를 구해주면서, 흥수는 재희에 대해 두려움 대신 조금의 신뢰와 흥미를 가진다. 선입견 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 함께하자고 내미는 손. 새학기에 '너는 무슨 아이돌 좋아해?' 를 묻듯, 재희와 흥수는 '술이나 마시러 가자.'는 말로 관심사를 공유하고 함께 이태원으로 향한다.
사랑이 필요한 사람들의 사랑법
서로 사랑할 수는 없지만, 서로의 사랑을 응원해 줄 수는 있다. 영화 내내 흥수와 재희는 대도시의 사람들과 '사랑'을 한다. 눈에 띄고 싶지 않아 더 시끄럽고 반짝거리는 클럽으로 향하면서, 신나게 웃고 싶어서 술에 취해보려 들면서. 그러나 그들이 이어가는 '사랑'은 어딘가 불안정해 보인다. 재희의 애인은 재희를 숨기려 들다 애인이 있는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들키고, 흥수는 당당히 성정체성을 밝히고 싶다는 애인의 뜻을 응원해주지 못하고 화를 낸다. 뜻이 맞지 않는 사랑, 무게가 달랐던 관계. 그 속에서 이 젊은 주인공들은 상처를 받는다.
그리고 함께 공유하는 작은 집, 하나의 공간으로 모인다. 이들에게 '집'이라는 공간은, 다른 이들에게 솔직히 털어놓지 못한 것들을 내려놓을 수 있는 공간으로 작용한다. 애인도 아닌 남녀가 동거한다는 사실, 서로의 연애사, 성정체성까지. 남들이 들으면 웃어주지 않을지도 모를 사실들이, 재희와 흥수가 공유하는 집에서는 그저 공기처럼 당연하게 녹아 있다. 그래서 이들은 서로에게 버팀목이 되어준다. 각자의 사랑을 응원하면서, 서로에게서 '사랑법'을 배우면서.
상처가 난 뒤에는 성장을 향해서
영화가 흘러가는 동안 각자에게 상처를 주는 사회 속에서 서로를 응원해주던 두 주인공이 서로 상처를 주는 장면이 있다. 재희가 믿었던 애인에게 공개적으로 모욕을 당한 날, 그리고 흥수와 재희의 동거를 재희의 애인이 알게 된 순간 재희가 흥수의 성정체성을 '아웃팅'한 날. 재희는 안정적이고 온전한 사랑을 원해온 인물이며, 흥수는 사람들이 자신을 재단하고 함부로 말하게 되는 것을 두려워했던 인물이다. 재희와 흥수도 서로 그 사실을 모르지 않는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사회의 폭력보다 서로가 '알면서도' 그랬다는 사실이, 이들에게는 더 큰 상처로 다가오게 된다.
재희가 흥수에게 상처를 준 날, 그리고 흥수가 재희에게 상처를 준 날. 그들이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면서까지 지키고자 한 것은 결국 '사랑'이었다. 사랑하는 애인을 지키고 싶어서, 숨고 싶지 않아서. 사랑을 위해 우정이 잠시 밀려나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 서로에게 일 순위가 아니라 이 순위가 되는 순간. 두 주인공의 관계에도 균열이 생긴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이 균열은 금방 사그러든다. 싸웠지만, 서로의 말에 상처를 입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이해하기 때문이다. 서운함보다는 상대의 다친 얼굴이, 속상함보다는 상대의 우는 얼굴이 먼저 눈에 들어오는 사이. 서로 화를 내고 나서도 해장 라면 하나를 나눠먹고 나면 다시 이전처럼 일상을 공유할 수 있는 사이. 그리고 애인에게도 말하지 못한 속을 터놓을 수 있는 사이. 그건 이들이 '애인'이 아닌 '친구'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그런 서로가 있었기 때문에 이들은 성장한다. 재희는 안정적인 사랑을 찾아 나아가고, 흥수는 엄마에게 자신의 성정체성을 고백한다. 취업 준비를 하고, 군대를 가고, 다시 그 집에 모여 변한 서로를 바라본다. 술에 취해 이태원 클럽을 돌아다니던 그때와, 멀끔한 정장을 입고 사원증을 목에 건 지금. 누군가는 그때와 지금을 비교하며 어느 한 쪽을 깎아내릴지도 모르지만, 이들에게는 그 순간도, 지금도, 모두 청춘일 뿐이다.
조용한 사회 속에서 시끄럽게 목소리를 내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내 옆에 재희가 있다면, 그리고 내 옆에 흥수가 있다면, 나는 저렇게 대해줄 수 있을지에 대해 생각했다. 나는 재희를 편견 없이 바라보고, 흥수에게 스스럼없이 다가가고, 또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대할 수 있을까. 그 누구도 쉽게 단언할 수 없다. 그리고 그 누구도 떳떳하게 '나는 누군가에게 폭력적이게 굴어본 적이 없다'고 말할 수 없다.
<대도시의 사랑법>에서 재희와 흥수는 각각 폭력의 피해자가 된다. 재희와 흥수의 동거 사실을 안 재희의 애인이 재희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장면에서, 그리고 성소수자를 혐오하는 이들을 막아서던 흥수가 흥수의 애인 대신 폭력의 피해자가 되는 장면에서 우리는 직접적인 폭력을 마주한다.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과장되지도, 억지스럽지도 않은. 우리 사회 어딘가에서 일어나고 있을 것만 같은 폭력들.
하지만 뺨에 손이 닿아야만, 얼굴에 상처가 나야만 폭력이 아니다. 조용하게 입에서 입으로 옮겨지는 말들, 밤이 되면 내 성정체성을 부정하며 조용히 기도하는 목소리, 맞는 말을 해도 예민하다며 궁시렁대는 사람들. 그 모든 것이, 대도시의 '폭력법'이다. 이 도시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리고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조용한 폭력 가운데 이들은 더 크게 목소리를 낼 수밖에 없다.재희는 자신을 '예민하다'거나 '시끄럽다', '튄다', '문란하다' 등으로 깎아내리는 대신 '멋있다'고 말해주는 직장 동료와 사랑을 하고 결혼식을 올린다. 시선을 두려워했던 흥수는 엄마에게 성정체성을 고백하고 재희의 결혼식 축가로 당당히 걸그룹 노래를 선곡해 춤을 춘다. 앞으로 이들에게 또 다른 폭력이 다가올지라도, 이들은 가만히 앉아 스스로를 파먹고 울지 않을 것이다. 목소리를 내고, 누군가와 함께하고, 잘못된 것에 잘못되었다고 소리칠 것이다. 그것이 '대도시의 사랑법'을 배우며 20대를 거쳐온, 젊은 청춘들의 종착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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