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LAB2023-02-02 16:02:19
영화를 더 가까이, [CLOSER TO CAROL] 텀블벅 오픈
안녕하세요!
영화/OTT 콘텐츠 큐레이션 웹 매거진 '씨네랩'입니다.
여러분, '겨울'하면 혹시 떠오르는 영화가 있으신가요?
저희는 추운 계절이 찾아오면 어김없이 너무나 사랑스러운 영화 <캐롤>을 떠올리곤 한답니다.
오늘은 이런 <캐롤>을 테마로 기획된 프로젝트를 소개해 드리려고 해요.
바로바로... 이름부터 설레이는
[ CLOSER TO CAROL ]
이라는 프로젝트인데요~ 지금부터 클로저 투 캐롤에 대해 씨네랩이 자세히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취향 커머스 플랫폼 [클로저]
<클로저 투 캐롤>은 영화 취향 커머스 플랫폼 [클로저]의 첫번째 프로젝트입니다.
먼저 [클로저]를 소개해 드릴게요.
"Hello, stranger?"
영화 <클로저>(2004)의 첫 대사였던 '나탈리 포트만'의 대사를 기억하시나요?
정적인 영화였던 만큼 '데미언 라이스'의 ost "The Blower's Daughter"가
더 기억에 남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I can’t take my eyes off you”
영화를 볼 때만큼은 철저히 관객의 입장에서, 이방인의 시선으로 바라봄에도
영화는 끊임없이 관객을 끌어당기고, 우리는 속절없이 관계의 틈으로 빠져듭니다. 이것이 영화의 매력이고, 저희가 영화를 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클로저 프로젝트는 영화를 보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영화를 만지고, 향을 맡고, 맛을 보기도 하며, 일상에서 사용할 수 있는 물건들을 나누어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영화를 더 가까이 더 오랫동안 즐길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시작되었어요.
영화 <캐롤>

줄거리
1950년대 뉴욕, 맨해튼 백화점 점원인 테레즈(루니 마라)와 손님으로 찾아온 캐롤은 처음 만난 순간부터 거부할 수 없는 강한 끌림을 느낀다. 하나뿐인 딸을 두고 이혼 소송 중인 캐롤과 헌신적인 남자친구가 있지만 확신이 없던 테레즈, 각자의 상황을 잊을 만큼 통제할 수 없이 서로에게 빠져드는 감정의 혼란 속에서 둘은 확신하게 된다. 인생의 마지막에, 그리고 처음으로 찾아온 진짜 사랑임을…
CINE PICK!
제88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6개 부문에서 노미네이트 되었고, 호주와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노미네이션되며 작품성을 인정 받았습니다. 타임즈 선정 20세기 100대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캐롤>은겨울만 되면 국내에서 재상영을 할 정도로 팬층이 두터운 작품이기도 해요.
<클로저 투 캐롤>
클로저 팀에게 <캐롤>은 선물 같은 작품이라고 해요.
좋아하는 영화 속 장면들을 선물하고 싶은 마음에서 갖고 싶은 물건들을 만들고 싶었으니까요.
<클로저 투 캐롤>은 클로저 팀의 이러한 마음을 듬뿍 담아서 구성품 하나하나가 소중하고 특별해요.
영화 <캐롤>의 팬이라면 누구나 소장하고 싶을 상품들을 지금부터 자세히 보여드릴게요 :)
시그니처 박스
테레즈가 일하던 장난감 코너 한 켠에 놓여 있던 박스를 기억하시나요?
영화의 배경이 되는 1950년대에 판매된 "Carol・Sue"라는 인형 박스인데요, 소품의 디테일까지 살아 있는 이 작품을 더 가까이 느낄 수 있도록 클로저의 무드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광택이 없는 고급 재질을 통해 빈티지 무드를 살린 박스는 "캐롤"의 시그니처 컬러이자 원 박스의 색감을 최대한 살려 디자인 하였습니다. 박스 상단에는 CLOSER TO CAROL 금박 로고가 박혀 있으며, 패키지 옆면에는 <캐롤>을 드러내는 아이콘이 담겨 있습니다.
흑백 일회용 카메라
<캐롤>에서 카메라는 매우 중요한 소품입니다. 사람을 찍는 것이 어쩐지 프라이버시 침해 같다고 말하던 '테레즈'가 '캐롤'이라는 인물을 찍기까지. 그 심정의 변화가 고스란히 느껴지니까요.
Some people change your life forever.
영화 포스터에 쓰인 글귀처럼 테레즈의 인생이 바뀌게 된 그 순간을, 우리 인생의 찰나를 간직할 수 있도록. '테레즈'의 카메라 Argus C3를 그대로 담아낸 흑백 일회용 카메라입니다.
디셈버 노트
한 글자씩 소중히 담아낸 '캐롤'과 '테레즈'의 약속처럼, 모두의 일상에 설레는 계획과 약속이 가득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테레즈와 캐롤의 첫 약속이 적힌 1952년 12월 21일 페이지가 내지로 담긴 노트입니다.
명대사 각인 연필
캐롤과의 약속을 써내려가던 장면, 테레즈에게 보낼 편지를 써내려갔을 마음을 더 가까이 느낄 수 있도록.
추억의 도구로 전락해버린 연필의 가치를 재해석하는 '작은연필가게 흑심'과의 협업을 통해 '캐롤' 시그니처 컬러 Cherry Red 색상으로 제작된 연필이에요.
두 사람의 사랑이 돌고 돌아 모두에게 닿길 바라는 마음에서 '캐롤'과 '테레즈'의 약속의 날 "DEC 21, 1952"와 클로저 투 캐롤 프로젝트가 기획된 날 "CLOSER TO CAROL, 2022"를 각각 연필에 새겼답니다.
패턴 편지지 세트
Red & Green 은 크리스마스 대표 컬러인 만큼 겨울에 특히 자주 사용되는 색상입니다. 2016년 이후, '겨울' 하면 떠오르는 대표 작품이 된 <캐롤>에서도 '캐롤'과 '테레즈'의 첫 만남 장면을 비롯하여 의상, 소품 등 전반적인 분위기에서 이 색감을 느낄 수 있죠.
팀 클로저가 작품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한 6가지 패턴은 <캐롤>을 더 가까이 느낄 수 있도록 영화 속 장면과 분위기를 가득 담아 제작되었습니다.
이외에도 패턴 마스킹 테이프, 떡메모지, 판 스티커, B&W 스티커팩, 파자마 세트 등 다양한 구성품이 준비되어 있으니 평소 <캐롤>을 좋아해 주셨던 분들이라면 꼭 한번 둘러보시는 걸 추천드려요.
아래 사이트에 접속하시면 더 많은 상품사진과 구성품을 확인하실 수 있답니다 :)
https://tumblbug.com/closertocarol
생각을 얼릴 만큼 찬 공기와 성냥 냄새, 날리는 눈을 맞으며 빨갛게 언 손으로 필름카메라를 감는 장면 등 "겨울"과 매우 맞닿아 있는 영화 <캐롤>.
좋아하는 영화를 물건으로 소장하는 건 정말 특별한 경험일 게 분명해요.
이번 겨울 나에게, 또는 소중한 사람에게 선물해 따뜻한 마음을 나누어 보는 건 어떨까요?
지금까지 씨네랩 에디터, Yumi였습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 :)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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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어 너머의 언어로
언어를 배운다는 건 단지 말의 외형만을 익히는 일이 아니라, 다른 층위의 세계관을 맛보는 일이 아닐까. 프랑스어를 배우면 자동차, 달, 바다는 여성이 되고 비행기, 해, 땅은 남성이 된다. 모국어가 한국어인 사람으로서는 참으로 낯설게도, 사물에 성별을 붙여 규정하게 되는 것이다. 프랑스어를 배우기 이전과 이후의 관념은 은근하게 달라진다.
한편 일본어를 배우면 존댓말의 형태는 두 갈래로 번져간다. 자신을 낮추는 겸양어와 상대를 높이는 존경어. 우리말에서도 ‘나’를 ‘저’로 부르는 등 낮춤말이 있지만 상대적으로 적다 보니, 동사를 3개씩 외우는 일이 힘든 건 둘째치고 마음이 갑갑하다. 결재 도장까지 깍듯하게 상사 이름 쪽으로 기울여 찍는 문화를 얼핏 느낀다.
언어는 사회성과 역사성을 갖기에, 쓰는 사람들에 의해 규정되고 변형되기 마련이다. 언어의 층위는 그렇게 오랜 시간의 마디마디가 쌓여 이루어진 것이다. 한 인물이 시간과 성별을 뛰어넘어 존재한 400년의 시간을 담아낸 영화 <올란도>는 그 모양을 잘 보여준다.
영화는 자못 간단한 구조로 보인다. 한 젊은 귀족 올란도가 여왕에게 찬사를 보낸 후, 여왕이 저택과 함께 내려준 ‘영원히 죽지도 늙지도 말라’는 말이 고스란히 이루어졌다. 영화에 담긴 400년의 시간은 연극 막처럼 명확한 텍스트 제목으로 나뉘어 있으며, 각 타이틀은 올란도의 삶에서 주요 화두가 어떻게 이동하는지를 보여준다. 올란도를 둘러싼 세상의 언어가 어떻게 변화하는지 살펴보자.
영화가 시작되면 수직적인 관계를 고스란히 담아낸 언어들이 눈에 띈다. 여왕이 올란도의 아버지에게 “그대의 것은 이미 내 것이었다”라고 말할 때도 그렇지만, 올란도를 지칭하는 말은 모두 소유격이 도드라진다. “내 아들, 수족, 마스코트”이자 “나의 승리”. 변하지도, 병들지도, 늙지도 말라는, 말도 안 되는 명령이 실제로 이루어진 것은 그래서였을까? 이 말은 단지 물리 법칙을 어겨서 이상해 보일 뿐, 말도 안 되는 명령들이 ‘까라면 까야지’ 안에서 이루어지는 현실과 그렇게 다르지도 않다.
이 수직성은 훗날 러시아 대사의 딸 사샤를 사랑하게 된 올란도에게서도 보인다. “내가 너를 사랑하기에 너는 내 것”이라는 말에 사샤의 주권은 들어있지 않다. 사샤를 만나기 전 약혼했던 상대가 올란도의 “배신”을 탓할 때는 “남자는 자기 마음을 따를 줄 알아야 한다”라고 가뿐하게 넘겼으나, 얼음이 녹기 전에 돌아가야 한다고 분명하게 피력했던 사샤가 나타나지 않았을 때는 “여자a woman가 배신했다”라고 한다. 고유명사였던 사샤는 일반명사가, 수많은 여자 중 하나가 된다. 소유도 박탈도 올란도의 의지로만 이루어졌다.
훗날 올란도에게 청혼하는 해리와의 대화에서도 비슷한 대사가 재현된다. 여왕이 했던 “집을 주겠다”는 말이나 “내가 곧 영국이고 너는 내 것”이라는 말. 올란도가 했던 “I’m offering my hand”라는 말. 해리뿐이 아니다. 남성 귀족들의 대화는 허세와 과시, 권위로 꽉 차 의미나 감정이 들어갈 여지가 없다. 다리가 아프다는 말을 들어도 공감과 위로는 없고, 과학이나 예술에 대해 이야기할 때마저 성별에 비유한다. 폄하하고 재단하며, 자신이 조금이라도 더 수직적 우위를 점하고자 끊임없이 재배치를 꾀하는 대화다.
이러한 세상에서, 올란도는 소통의 가능성을 간직한 인물이다. 그래서 그는 세상과 공명할 수 있었다. 러시아어에서 프랑스어로, 프랑스어에서 영어로 언어를 바꾸며 사샤가 소통을 모색할 때 “그냥 영어를 더 크게 말했”던 대부분의 귀족과 달리, 올란도는 사샤와 프랑스어로 대화하며 둘만의 공간을 만든다. 사랑이 끝난 후 잠에 빠졌다가 새로운 챕터로 나아갈 때도 마찬가지다. 시를 탐구하고, 정치의 세계로 나아가 향한 오스만 제국에서도 아랍어 인사말을 익혀 시장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정중하게 인사를 건네고 있다.
올란도가 간직하고 있던 소통의 가능성은 전쟁을 겪으며 뜻밖에도 성별 전환이라는 방식으로 발아한다. 쓰러져 죽어가는 이를 “적”으로 규정하는 해리와 달리 올란도는 그냥 죽어가는 사람으로 바라보았다. 이것은 균열의 조짐이다. 피아의 위치와 높이가 ‘명징하게 직조’되어 있는 세상의 균열. 아기 울음소리와 비명 같은 고통의 소리들 사이, 전쟁이 낸 균열 사이로 걸어가며, 올란도는 이제 또 다른 언어의 세계로 건너간다.
먼지가 축복처럼 빛나며 내리고, 물과 볕이 얼굴을 적시는 모습은 마치 세례라도 받는 모양 같다. 프랑스어로, 아랍어로 타인과 계속 대화를 시도해왔던 올란도는 이제 전쟁과 지배의 언어를 버렸다. 그때 여성이 되었다는 점은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는 책 제목을 떠올리게 한다. 단지 성별만 다른, 여전히 같은 사람이다. 평소 큰일이 있었을 때처럼 7일 간 자고 일어난 점도 같다. 그러나 이제 사회가 그를 다르게 대한다. 올란도는 언어의 수직선에서 자신을 끌어내리려는 끊임없는 도전을 받는다. 그 도전을 피하는 길은 남편, 아들처럼 사회가 정한 우산 아래로 들어가는 길이라는 종용을 받는다. 이에 올란도는 자기 자신으로 굳게 서는 방법으로 응전한다. 설령 자신과 닮아 있고 이해의 구석이 있는 셜머딘이 상대라 해도, 올란도는 타인의 일부가 되길 택하지 않는다.
그 무엇의 곁에도 머물지 않고, 올란도는 계속해서 박차고 달린다. 그가 박차고 달리는 것은 과거에 버리고 온, 전쟁과 지배의 언어다. 미로 같은 정원을, 안갯속 들판을 계속 달리며 그는 새로운 세상으로, 새로운 언어의 세계로 나아간다. 영화의 초입부터 불을 든 사람들의 반대 방향으로 걷고 뛰고 있었던 그는, 이제는 임신한 몸으로 전쟁의 포화 속을 달린다. 전쟁의 이름은 밝히지 않는다. 시기의 힌트조차 주지 않는다. 이건 보통 전쟁이 사용하는 언어와는 반대 방식이다.
전쟁은 전쟁만을 명시한다. 보불 전쟁이라든지 펠로폰네소스 전쟁 같은 식으로 승자와 패자를 딱 잘라 명시하고, 뒤켠에 있던 민간인과 피해자들의 기록은 남기지 않는다. 그렇게 모두를 익명성에 가두고 만다. 이 영화는 넘어지면서도 포화를 뚫고 가는 올란도만을 오롯이 비추고, 역으로 전쟁을 익명성에 가둔다. 이는 올란도의 달리기와 나란한 방향이다.
그렇게 영화 <올란도>는 시간을 따라 촘촘히 배치한-사회성과 역사성을 가진- 지배의 언어를 역방향 달리기로 틀어버린다. 억압적인 층위 안에서 유린되어 온 언어의 사필귀정을 꾀하는 시도다. 동시에 이 시도는 자체로 완성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점임을 명확히 한다. 출판사에 건넨 두툼한 원고 더미가, 딸의 손에 들려 있는 카메라가 그 방향성을 드러낸다. 일방적이고 수직적인 소통의 수단으로만 기능하던 언어는 소통을 풍성하게 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제 예술의 경지로 나아간다. 거기서 생명은 피어난다. “더 이상 운명에 붙들리지 않”고, “삶이 시작되는 것”이라는 대사는 그래서 유의미하다.
오토바이 사이드카에 딸을 태우고, 한때 자신의 것이었던 저택에 유유히 걸어 들어서는 올란도의 모습. 그 걸음은 딱딱한 액자 프레임에 갇힌 초상화와는 달리 분명하게 살아있다. 초상화 바깥의 인간 올란도의 얼굴. 남자의 얼굴도 여자의 얼굴도 아닌, 천사의 노래 가사처럼 “인간의 얼굴”이었다. 딸이 손에 든 카메라 속의 천사. 400년을 살아온 이는 앞으로도 “영원히 죽지도 늙지도 않”을 테고, 언어도 그러할 것이다. 발화와 문자 그 너머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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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 너머의 당신에게, 마음을 담아
기적을 바라는 마음
매년 연말, 사람들은 ‘메리 크리스마스’를 외치고, 새해의 카운트다운을 외친다. 지친 일상에 나를 설레게 할 무언가가 찾아오기를, 전과는 다른 기적 같은 일상이 펼쳐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일 것이다.
세기말, 새로운 천년의 해가 뜨는 때에도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더 간절한 마음을 담았을지 모른다. 지나간 역사에 남긴 힘듦을 지우고자 하는 마음, 새로움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마음은 뉴 밀레니엄이라는 이름 아래 모두의 마음속에 자리 잡았을 것이다.
우리는 왜 이토록 기적을 바라며, 우리가 바라 마지않는 기적이란 무엇일까.
영화를 보다 보면 기적은 별다른 것이 아닌 듯이 느껴진다. 시간을 넘어 전달된 편지는 기적이라 불릴 만했다. 그것은 인간의 이해를 넘어선 사건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이 일은 해프닝으로 지날 수 있는 일로 느껴지기도 한다. 이상한 일로 치부해 버리고 돌아서면 그만인 해프닝. 그렇기에 성현과 은주가 편지를 주고받으며 일상과 마음을 나누는 행위는 기적을 만드는 힘이 오히려 다른 데 있다고 느껴지게 만든다. 나와 꼭 맞는 사람을 만나는 것, 나의 고민을 위로하고, 상황을 이해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 이를 통해 일상의 소소한 즐거움을 만드는 일 같은 것들 말이다.
상처를 위로하는 일
‘우편함’이라는 뒤틀린 시공간이 전달해 준 편지 한 통은 전혀 다른 삶을 살던 두 사람을 연결해 준다.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그 말도 안 되는 일을 통해 그들이 나눈 마음은 진짜 ‘기적’이었다.
두 사람은 모두 상처를 안았다. 성현은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았다. 성현의 아버지는 어린 시절 그를 떠났다. 건축가인 아버지와 같이 ‘건축’을 하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는 그는 학교도 휴학해 버리고 토목 공사 현장에서 일을 한다. 일마레에 건축가로서의 성현을 가둔 채 말이다. 그리고 은주는 남자 친구에게 버림받았다. 은주의 남자 친구는 은주의 꿈이던 성우를 포기하고 함께 유학을 가자고 말했다. 하지만 거절의 의사를 밝히자 그는 은주를 떠났다.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며 혼자서 밀레니엄을 맞이하게 되었다.
하지만 편지를 통해 서로의 상처를 보듬는다. 편지는 이상한 용기를 준다. 누구인지도 모를 편지 너머의 사람을 믿는 것은 퍽 이상한 일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미묘한 거리감은 으레 서로의 친한 친구에게도 전하지 못하는 말을 기꺼이 할 수 있게 만든다. 두 사람은 역시 그 거리에 기대 서로가 받은 상처를 공유한다. 그리고 ‘사랑’에 대한 생각을 나누며, 서로를 위로한다.
이는 본인을 위로하는 듯하다. 상처를 극복하는 가장 첫 번째 방법은 상처를 마주하는 것부터라고들 말한다. 두 사람은 서로가 가진 상처는 달랐지만 사랑에 버림받았다는 점에서 같았다. 그렇기에 서로의 이야기를 듣는 일과 서로를 위로하는 일은 자신을 위로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소소한 행복을 공유하는 일
‘우울할 땐 요리를 하세요.’
성현은 은주에게 파스타를 만드는 법을 알려준다. 자신만의 기분 전환하는 방법을 공유하며, 다른 시간 속 같은 행위를 통해 서로 공감대를 형성한다. 편지를 통해 일상을 공유하던 두 사람은 시공간을 초월해 서로를 만날 방법을 찾는다. 과거와 미래의 한 지점에서 서로 만날 수 있도록 말이다.
서로를 마주칠 방법을 찾은 두 사람은 우편함을 통해 녹음기를, 손 장갑을, 선물과 도움을 주고받으며 서로를 연결한다. 그리고 일상을 공유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일상을 함께 하는 방법을 찾는다.
‘우선 편의점에 들어가세요.’ / ’보문리로 가는 버스를 타세요.’
무료하고 외로운 일상을 행복하게 만드는 일은 특별하지 않다. 일상을 벗어나 전과는 다른 경험을 하는 일이면 충분할지 모른다. 은주는 성현에게 놀이동산을 즐기는 법을 알려준다. 성현은 전에 라면 시도해 보지 않았을 방법으로 일상을 채운다. 성현 역시 은주에게 산책과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는 법을 알려준다. 처음 가보는 공간에서 은주는 과거의 성현이 전한 와인을 마신다. 그렇게 두 사람은 다른 시공간의 서로와 함께한다.
고독으로 채워진 두 사람의 삶에 새로운 빛이 들기 시작한다. 안개 덮인 일마레를 벗어나 하나둘 쌓는 둘만의 추억은 서로를 따사로운 햇살 아래로 이끈다. 상처를 보듬고 일상을 회복하는 것, 더 나아가 새로운 추억을 만드는 것은 아주 사소한 일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아픔은 두고 좋은 기억만 담아 미래로 나아가는 것
영화는 그렇게 만든 일상을 쌓아 미래로 나아가라고 말한다. 전과는 다른 선택을 해야 한다고.
성현은 과거에 있는 사람이다. 미래에 있는 은주에게 이끌려 미래로 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은주는 성현과 반대로 계속해서 과거를 돌아볼 수밖에 없다. 그녀를 발목 잡는 아픈 상처들이 모두 그곳에 있음에도. 그래서일까 은주는 나아가지 못하고 과거의 선택을 바꾸려고 한다. 과거를 변화시키고 나아가고자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남자 친구와 헤어진 그곳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성현에게 남자 친구와 헤어지지 않게 도와 달라고 부탁한 은주는 자신의 부탁으로 성현이 사고를 당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과거는 변할 수 없다. 하지만 오지 않은 미래는 바꿀 수 있다. 성현이 사고를 당한 것은 은주에게 먼 과거였다. 하지만 동시에 미래이기도 했다. 혹시나, 그리고 아직은 닿을 수 있는 편지 한 통이 남아있는 성현의 미래. 그렇게 은주는 성현의 미래를 바꿨다. 이는 은주의 미래를 바꾼 일이기도 했다. 그렇게 성현은 바뀐 미래에서 은주의 앞에 나타난다. 그리고 그들은 새로운 미래를 시작하고자 한다.
과거를 변화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과거가 나에게 얼마만큼의 상처를 줬든 간에 그것은 과거의 일이다. 하지만 미래를 바꾸는 일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은주의 절박함이 성현에게 닿았듯, 우리가 간절히 바란다면, 새로운 기적을 만들어 줄 것이다.
영화가 로맨스를 앞세우고 있기는 하지만 모두가 보편적으로 느끼는 지난날의 후회,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마음은 별반 다르지 않다. 새천년의 미래를 앞둔 성현과, 지난 과거에 마음을 둔 은주가 편지를 통해, 서로를 통해 보여주는 모습이 그러하다. 우리는 두 사람을 통해 과거를 과거에 두어야 한다는 것, 미래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시공간을 초월한 사랑
“일마레는 때로는 사람을 너무 외롭게 만들어요.”
일마레의 뜻은 바다다. 모래사장 한가운데 지어진 집은 아름답지만, 얼핏 고독 보인다. 바다의 한가운데 지어져 마치 외딴섬처럼 보인다. 성현과 은주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랑에 상처받은 그들은 누구도 자신에게 다가오지 못하도록 벽을 치고, 스스로를 한없이 외롭게 만들었다. 하지만 잘못 전달된 ‘편지’ 한 통은 그들의 삶을 변화시켰다. 지난 발자국의 흔적을 지우는 파도처럼 그들은 서로 편지를 주고받으며 서로의 일상에 출렁였다. 그렇게 새로운 모래를 덧입혀 그들의 상처를 덮었다.
성현과 은주는 사랑에 지치고 아픈 사람들이었다.
“사랑한다는 건 스스로 가슴에 상처를 내는 일인 거 같아요.”라고 은주가 편지에 적었던 것처럼 연인과의 사랑에서, 부모와의 사랑에서 스스로를 달래지 못하고 하염없이 고독한 사람이었다. 상처를 극복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우연히 닿은 편지를 통해, 그들은 서로의 상처를 보듬었고, 일상을 나누며 행복을 쌓았다.
“지금부터 아주 긴 이야기를 할 텐데 믿어줄 수 있어요?”
그리고 성현은 믿기지 않을 긴 이야기를 시작한다. 은주는 꿈에도 모를 테지만 우리는 안다.
서로에게 닿아 변화시킨 일상의 기적을, 미래를 변화시키고자 한 마음이 닿은 기적을.
나 역시 과거는 과거의 일로 남겨 놓은 채, 내 앞에 놓인 미래를 변화시킬 일상을 기대하며,
2000년에서 보내온 영화를 통해, 2025년을 기대해 본다.
Editor. Hann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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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토리텔링은 이렇게 하는 것
<행복의 노란 손수건>, 담백한 스토리텔링의 정석
오는 4월 2일, <행복의 노란 손수건>이 재개봉한다. 1977년 개봉한 야마다 요지 감독의 이 작품은 당시 일본 아카데미에서 8개 부문을 석권하며 높은 평가를 받았다. 최근 과거 명작들의 재개봉이 이어지는 가운데, 이 작품 역시 그 흐름에 합류했다.
세 인물의 교차된 서사, 그리고 중심이 되는 유사쿠
<행복의 노란 손수건>은 세 인물, '하나다 킨야(타케다 테츠야)', '오가와 아케미(모모이 카오리)', '시마 유사쿠(타카쿠라 켄)'의 이야기로 구성된다. 서사는 킨야가 여자친구에게 이별을 통보받고 홧김에 신차를 몰고 홋카이도로 떠나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는 유쾌하면서도 한심한 모습으로 영화의 분위기를 환기한다.
아케미는 열차 내에서 간식을 파는 일을 하는 도중에 남자친구의 배신을 알게 된다. 배신의 상대가 자신의 지인이었으며, 그 사실조차 또 다른 지인을 통해 듣게 된다는 점에서 그녀의 상처가 더욱 두드러진다. 충격에 빠진 아케미 역시 홋카이도로 향한다.
한편, 유사쿠는 신비로운 인물이다. 자신의 과거를 직접적으로 밝히지 않으며, 영화 역시 관객에게 전지적 시점을 제공하지 않는다. 유사쿠의 서사는 점진적으로 전개되며, 이를 통해 관객은 캐릭터와 함께 정보를 습득하게 된다.
흥미로운 점은 세 인물의 이야기가 개별적으로 전개되다가 홋카이도라는 공간에서 조우하며 하나의 이야기로 결합된다는 점이다. 처음에는 킨야의 서사가, 이후 아케미의 서사가 더해지며, 마지막으로 유사쿠의 이야기가 중심이 된다. 서사의 무게는 유사쿠에게 집중되며, 킨야와 아케미는 비교적 가볍게 그려진다. 그러나 이들의 존재는 단순한 조연이 아니다. 코믹한 장면을 통해 극의 분위기를 조절하고, 유사쿠의 서사가 전개될 수 있도록 보조 역할을 한다.
특히, 카메라의 움직임은 이러한 구조를 효과적으로 뒷받침한다. 유사쿠가 먼저 들어간 음식점에 킨야와 아케미가 들어오고, 카메라는 이들의 대화를 포착하다가 자연스럽게 유사쿠에게 시선을 옮긴다. 인물 간 관계성을 구축하는 동시에, 유사쿠의 미스터리한 분위기를 강조하는 연출이 돋보인다.
아케미의 서사 부족, 그리고 시대적 한계
그러나 아케미의 서사는 아쉬움이 남는다. 영화는 그녀를 '남자친구에게 배신당한 여성'이라는 틀 안에 가둔 채, 이후 그녀의 내면을 깊이 탐구하지 않는다. 극 중 아케미는 유사쿠의 과거를 듣고 공감하며, 그의 용기를 북돋우는 역할에 머문다. 그녀의 이야기가 보다 주체적인 서사로 발전하지 못했다는 점은 아쉽다.
이러한 한계는 당시의 시대적 배경과도 맞닿아 있다. 영화 초반부부터 여성에 대한 경멸 어린 시선이나, 성적 불쾌감을 유발하는 장면들이 등장한다. 당시에는 이러한 요소가 코믹한 장면으로 소비되었지만, 현대의 관점에서 보면 문제적 요소로 해석될 수 있다.
결국 아케미는 극의 후반부에서 유사쿠의 서사를 지탱하는 인물이 된다. 그는 유사쿠의 행동과 선택을 평가하고, 그의 변화를 돕는다. 그러나 정작 아케미 자신이 어떤 인물인지에 대한 설명은 부족하다. 그녀가 유사쿠에게 공감하는 이유와, 그의 변화에 동참하는 과정이 보다 설득력 있게 그려졌다면 영화는 더욱 힘 있는 서사를 구축할 수 있었을 것이다.
유사쿠의 서사와 자기연민의 문제
이러한 아쉬움을 지적하는 이유는, 결국 영화가 품고 있는 문제의식이 유사쿠의 자기연민과 이를 정당화하는 서사에 있기 때문이다. 유사쿠는 자신의 과거를 회고하며 스스로를 합리화하고, 극 중 인물들은 그의 변화에 힘을 실어준다. 킨야 역시 이러한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다.
특히, 유사쿠의 연민이 강조될수록 아케미의 역할이 단순한 조력자로 축소된다는 점이 문제적이다. 만약 영화가 그녀의 서사를 보다 깊이 다루고, 그녀가 유사쿠를 이해하는 과정에 대한 서사적 근거를 제공했다면, 결말은 더욱 강한 울림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그러한 기회를 놓쳤다. 그 결과, 극의 후반부는 다소 공허하게 느껴진다.
담백한 스토리텔링, 완급 조절이 돋보이는 영화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의 노란 손수건>은 담백한 스토리텔링과 뛰어난 완급 조절을 통해 높은 완성도를 갖춘 작품이다. 세 인물의 이야기는 하나의 점에서 만나고, 그 점에서 출발한 선은 '노란 손수건'을 향해 나아간다.
특별한 사건이 벌어지는 영화는 아니지만,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이 치밀하다. 캐릭터를 쫓는 카메라의 움직임, 노란색을 활용한 색채 연출, 감정을 과하게 조율하지 않는 플롯의 전개 방식 등은 이 작품이 왜 명작으로 평가받는지를 보여준다.
재개봉 이후, 이 작품이 현대의 관객들에게 어떤 울림을 줄 것인지 궁금해진다. <행복의 노란 손수건>은 결국 스토리텔링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하나의 답이 될 수 있는 작품이다. 오는 4월 2일, 그 답을 다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 씨네랩 크리에이터 자격으로 초청받은 시사회를 다녀온 뒤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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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연한 사랑이 부재한 자리에
영화 <수연의 선율>은 당연한 사랑을 바랐던 두 아이 수연과 선율의 이야기다. 영화는 수연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하나뿐인 가족인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수연은 고아가 된다. 보육 시설에 보내질 위기에 처한 수연은 그것만은 피하고자 새로운 가족을 직접 찾아나선다. 그때 발견한 것이 또다른 주인공 선율을 입양한 가족의 유튜브 채널이다. 영상 속에서 선율을 입양하여 키우는 기쁨에 다른 아이를 입양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말에 수연은 이들의 가족이 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한다. 수연은 동네에서 우연히 발견한 선율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한다. 수연은 선율과 점차 가까워지고 선율의 집에 초대받기에 이른다. 가족에 편입되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하는 수연. 어느새 네 사람은 가족의 형태를 갖춰나간다.
유튜버인 카메라에 담기는 네 사람의 행복한 이야기. 그러나 카메라 뒤에는 또다른 이야기가 있다. 카메라 뒤에서 두 아이의 연기를 한다. 보호자의 존재가 절박한 수연의 경우 가족에 편입되기 위한 연기는 필수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선율의 연기는 분명 문제적이다. 선율은 유튜브 영상 속에서 표면성 언어장애를 앓는 아이로 등장한다. 주로 말이 없는 선율의 모습. 그러나 수연의 앞에서 선율이 보여주는 모습은 다르다. 선율은 언제나 자신의 의사를 뚜렷이 표현할 줄 아는 영리한 아이다. 수연이 왜 부모 앞에서는 다른 모습을 보이냐고 묻자 선율은 간단히 대답한다. “엄마가 좋아하니까”. 선율은 자신을 입양한 부모와의 관계에 있어 그들의 관심을 받을 수 있는 전략을 탐색하고 학습한 것으로 보인다. 선율이 보이는 모습은 가족 내에서 살아남기 위한 전략이다. 그렇게 영상 속에서 선율은 장애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거둬키우는 부모의 선량함을 보여주기 위한 도구로 기능한다. 결국 조건부로 주어지는 관심과 사랑 속에 아이들은 본모습을 잃어간다. 그렇게 최선을 다했음에도 아이들은 어른들에게 버려진다. 그렇게 남겨진 아이들. 수연은 선율의 보호자가 되고, 두 아이는 삶을 버텨나간다.
물론 두 사람의 위태로운 생활은 오래 가지 못한다. 선율은 수연에게 언니가 엄마가 되어주면 되지 않느냐 애원하지만 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결국 아이들을 보호할 의무를 지닌 국가는 제도 속으로 두 아이를 포섭한다. 수연은 떠돌이 생활을 하던 할아버지의 가족으로 선율은 보육원에 맡겨진다. 이들은 국가가 허락한 보호자의 품으로 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겪는 돌봄 공백은 여전해보인다. 가족이라는 형태에 우겨넣어진 수연은 외려 할아버지를 돌보고, 선율은 보육원에서 기댈 곳을 찾지 못하고 수연을 그리워하는 듯하다.
‘수연의 선율’이라는 제목의 의미를 되짚어본다. 어른들이 두 아이를 버리자 선율은 수연의 책임이 된다. 어른이 떠난 자리에서 수연은 선율을 키우고 지킨다. 그렇게 ‘수연의 선율’은 수연에 기대어 살아나간다. 그러나 또다른 어른들에 의해 두 아이의 삶은 재배치된다. 그들은 그것만으로 제몫을 했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러나 여전히 아이들은 외롭다. 이 상황에 죄책감을 느껴야 할 사람은 어른들일테다. 그러나 죄책감을 느끼는 것은 수연이다. 선율이 맡겨진 보육원을 찾아가 멀찍이 선율을 보며 눈물을 흘리는 수연. 어른들의 돌봄이 여전히 필요한 나이에 일찍이 철이 들어버린 수연은 자신을 탓하는 듯하다. 당연한 사랑이 부재한 자리에 외로이 남아있는 아이들을 떠올려본다. 제도가 해결하지 못하는 돌봄의 공백. 이들이 사랑받을 권리를 지켜나갈 방법이 무엇인지에 대해 질문을 던지며 영화는 우리의 손을 떠난다.
[본 리뷰는 씨네랩의 초청으로 시사회를 통해 관람한 작품을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서 작성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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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영화 워크 잇 Work It 후기 / 댄스 영화
넷플릭스에 새로 올라온 작품들을 찾아보다가 이번에 선택한 영화는 <워크 잇>이다.
오랜만에 보는 유쾌한 하이틴 댄스 영화다.
댄스 영화는 한참 좋아했지만 한동안 보지 않고 있었던 장르이다.
<워크 잇>은 다른 댄스 영화와 비슷한 형태의 이야기 구조를 그대로 따라하는 뻔한 줄거리를 가지고 있다.
특히, 주인공이 훈련을 통해서 실력을 향상하는 부분이나 특정 부분의 특기를 가진 멤버를 모아서 스페셜 팀을 구성하는 형태의 이야기는 댄스 영화에서 많이 나오는 방식이다.
하지만, 유쾌하고 밝은 분위기와 중간중간의 유머는 이야기의 전개를 예상하면서도 재미있다.
주인공의 춤 실력은 영화의 설정 그대로 그다지 훌륭하지 않지만 연기는 좋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Positive.1. 주인공인 모범생 퀸을 연기한 사브리나 카펜터의 연기가 좋다.
디즈니 채널 출신 답게 연기가 좋은데 춤을 못 추는 몸치 연기는 아주 그럴 듯하다.
과장되지 않으면서 진지한 듯 코믹한 연기도 웃음을 준다.
2. 이야기 전개가 빠르고 특정 장면을 지루하게 가져가지 않는다.
3. 중간 중간의 유머가 과하지 않으면서 재미를 준다.
4. 춤을 배워가는 과정이 어울리는 음악과 함께 유쾌하게 그려진다.
5. 줄리아드는 개성 있고 실력도 있고 독재적인 댄스 팀 리더를 잘 표현하고 있다.
팔다리가 길어서인지 춤추는 모습도 멋지다.
| Negative.
1. 댄스 영화임에도 주인공 팀의 댄스 안무는 조금 실망스럽다.
특히, 마지막 공연 장면은 우승팀이라고 하기에는 많이 실망스러울 정도이다.
준우승한 팀의 안무가 차라리 낫다.
2. 마지막에 줄리아드가 갑자기 변한 것은 뜬금없다.
별다른 계기도 없고, 갑자기 성숙해졌다.
끝까지 악해야 통쾌함이 있을 텐데, 갑자기 모두가 착하게, 모두가 잘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3. 지나치게 자기 중심적인 퀸을 끝까지 도와주는 재스는 비현실적으로 착하다.
줄리아드가 목표인 댄서이면서도 퀸을 위해 최고의 댄스팀을 나와 미래가 불확실한 팀에 합류한다.
퀸이 자기 때문에 만들어진 팀을 버리고 자신을 위해 돌아섰다가 돌아왔을 때도 다시 도와준다.
4. 운전 못하는 퀸이 운전하는 장면은 그다지 보기 좋은 장면은 아니었다.
5. 새로 구성한 댄스 팀 멤버들의 역할과 비중이 너무 적다.
팀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댄스 대회 이야기이지만, 팀원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 총평
가벼운 마음으로 유쾌하게 볼 수 있는 댄스영화이다.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줄거리를 지루함 없이 재미있게 끌어가고 있다.
워크 잇 평점 7.0 (작품 7, 재미 7)
 ̄
워크 잇 예고편
* 본 콘텐츠는 블로거 네레이드 제이 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원 게시글은 아래 출처 링크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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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야 정상궤도로 돌아온 레전드 SF 호러
이제야 정상 궤도로 돌아왔다. <에이리언: 로물루스>는 시리즈의 장점과 향수를 자극하며 작품 본연의 재미를 견고하게 다지는 데 성공한다. 개봉 전 이 영화의 완성도는 반신반의했다. 그 이유는 리들리 스콧 감독이 구축한 <에이리언>의 세계관이 시리즈를 거듭할수록 그 힘이 떨어졌기 때문. 하지만 새롭게 조종석에 앉은 페데 알바레즈는 보란 듯이 성공적 도킹에 이른다.
2142년, 거대 기업 ‘웨이랜드 유타니’의 우주 식민지화 사업은 가열차게 돌아간다. 사업이 확장할수록 죽어 나가는 건 노동자들이다. 우주 식민지에서 기업의 노예처럼 사는 레인(케일리 스패니)는 친동생처럼 여기는 합성 인조인간 앤디(데이비드 존슨)와 낙원과도 같은 식민지 이비가 행성을 가려 한다. 노동시간을 채우면 행성 이동이 가능한 시스템을 활용해 이를 신청한 레인은 영문 모를 이유에 거절당하고, 좌절한다. 그러던 그에게 친구들이 찾아와 더 나은 삶을 찾기 위해 식민지를 함께 떠날 계획을 들려주고, 이들은 바로 행동에 옮긴다. 그 첫 목적지는 버려진 우주기지 ‘로물루스’. 이곳에서 동면용 장치와 연료를 가져오려는 레인과 친구들은 굳게 닫힌 문을 연다. 그 안에 에이리언의 무자비한 공격이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 채.
<에이리언: 로물루스>는 새로움을 적극적으로 가져오는 대신 익숙하지만 멋들어진 오마주를 펼친다. 스토리 라인도 곁가지를 다 쳐낸 듯 매우 단순하다. 희망을 찾기 위해 길을 나선 청춘들이 버려진 우주기지 안에서 미지의 외계생명체와 사투를 벌인다는 내용이다. 기존 IP가 가진 가공할 힘에 기댄 듯한 영화의 전략은 주요하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이번 영화에서 제작자로도 참여한 리들리 스콧 때문인 동시에 덕분이다.
2012년, <에이리언> 시리즈를 다시 회생시키기 위해 리들리 스콧은 다시 도킹을 시도했다. 숨겨진 에이리언의 기원을 소개하는 <프로메테우스>를 비롯해 2017년 <에이리언: 커버넌트>를 내놓은 것. 시리즈의 팬들이 그토록 궁금해한 외계생명체의 비밀을 알게 되었다는 점에서 두 영화의 의의를 둘 수 있지만, 영화 고유의 끈적끈적한 공포의 맛은 덜해졌다. 또 다른 동력으로 불멸의 시리즈를 이어 가기 위해 그 기회를 엿봤던 리들리 스콧에게는 다소 아쉬운 선택이 된 것.
어느 순간 목적지 없이 유영하는 우주선이 된 이 시리즈의 굳게 닫힌 문을 연 이는 <맨 인 더 다크>로 유명한 페데 알바레즈다. 감독은 이야기의 깊이와 넓이의 확장 대신, 에이리언 고유의 재미와 매력을 살리기 위한 심폐소생술에 집중한다. 에이리언의 광팬이라 밝힌 감독은 우주선 밀실 공포와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인간과 에이리언의 대결에 초점을 맞춘다. 특히 1편의 초기 설정처럼 의문의 외계 생명체의 출현과 어떻게든 살아남으려는 인간들의 모습, 페이스허거를 시작으로 체스트버스터, 제노모프 등 에이리언의 성장 단계별 모습과 공격 등 상세히 설명한다. 그동안 우리가 잊고 지냈던 미지의 공포를 수면 위로 끌어올린 듯한 느낌이 강하다. 이런 부분은 기존 팬들에게는 향수로, 이 시리즈를 새롭게 볼 신규 관객들에게는 이 세계관의 친절한 입문서로서 읽힌다.
기존 시리즈와 동어반복적인 스토리라인에도 기시감을 넘는 긴장감을 계속해서 부여하는 건 멋들어진 오마주 덕분이다. 1편에서 봤었던 우주선 조작키부터 내부 통로, 투박한 모니터와 화질 등 그 시절 리플리(시고니 위버)를 통해 만났던 디자인은 물론, 보기만 해도 고개를 돌릴 정도로 매끈한 빅헤드를 들이밀며, 턱받이가 필요할 정도로 산성 침을 질질 흘리는 얼굴, 그리고 입에서 촉수처럼 또 하나의 입이 나오는 크리처의 향연은 그 자체로 멋지다. 어둠속에서 머리나 꼬리를 살짝 보여주며 공포감을 자아내는 것은 물론, 수평, 수직 공간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공격을 가하는 액션 스타일까지 구현한다. 특히 <맨 인 더 다크> <이블 데드>(2013)에서 보여줬던 분위기와 액션을 잘 활용한 듯한 느낌도 든다. 여기에 CG가 아닌 아날로그 방식으로 크리처를 제작해 연기를 펼쳤다는 것만으로도 감독의 덕심은 영화를 향한 존경으로 바뀐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시리즈의 장점만을 계승한다는 목적 아래 오마주만 바친 건 아니다. 레인과 앤디의 관계성은 그 자체로 새로움을 전한다. 이들의 관계는 창조주(인간)와 창조물(합성 인간)의 관계를 뛰어넘어 유사 남매처럼 보여주기도 한다. 물론, 더불어 로물루스에 올라타며 과거 이 우주기지에 있던 합성 인간의 디스크를 통해 업그레이드 한 이후 180도 돌변하는 앤디의 모습을 통해 극의 긴장감을 더하기도 하지만, 결국 이들은 손을 잡고 연대를 펼친다. 마치 1편에서는 리플리의 적이었다가 2편에서는 동지로 우정을 나누는 합성 인간 비숍(랜스 헨릭슨)처럼 말이다.
더불어 중력을 활용한 액션 시퀀스는 그 자체로 새로움을 준다. 인간이나 에이리언 모두 중력에 굴복하는 생명체라는 점에 착안해 이를 활용한 후반부 액션 시퀀스는 기존과 다른 액션의 묘미를 전하기 충분하다. 더불어 남루한 현실을 어떻게든 벗어나려는 몸부림처럼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레인과 친구들의 모습은 그 자체로 스릴을 맛보게 한다.
앞서 언급한 장점 못지않게 대체로 인물들의 전사가 길고, 기존 시리즈의 스토리라인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며, 인간과 에이리언의 사투가 과거 보다 신선함이 떨어지는 등 영화가 가진 단점도 명확하다. 오마주를 바치고, 향수를 자극한다고 해도 그건 일시적인 충족감을 전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페데 알바라즈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궤도를 벗어난 시리즈를 정상 궤도로 다시 옮긴 작업을 했다고 본다. 오랫동안 우리가 잊고 있었던 <에이리언> 시리즈의 강점과 매력은 무엇인지 인장을 제대로 찍고 싶어 했다는 생각이 영화에 비춰줬다. 단순히 이건 덕심만으로 작동하는 건 아니라고 본다. 이 불멸의 시리즈를 어떻게든 이어 나가겠다는 의지가 엿보인다. 이런 감독의 마음을 알아챈 이들이라면 다음 시리즈가 나올 동안 다들 동면에 취할 듯하다. 기대감에 부픈 미소를 머금고.덧붙이는 말: 영화 제목이기도 한 ‘로물루스’는 쌍둥이 동생 레무스와 함께 로마를 건설한 것으로 알려진 전설적인 왕의 이름이다. 이들은 티베리스강에 버려졌으나 늑대의 젖을 먹고 자란 인물로, 늑대의 힘을 지닌 인간으로 여겨진다. 극 중 우주기지에는 로물루스와 레무스라는 이름이 명시되어 있고, 늑대 젖을 먹는 두 인물의 모습이 담긴 그림이 있을 정도. 웨이랜드 유타니 사가 왜 이런 이름의 우주기지를 만들고, 그 안에서 외계생명체를 통해 어떤 걸 만들려고 했는지를 알게 되면 자연스럽게 제목의 의미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사진제공: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평점: 3.5 / 5.0
한줄평: 침흘리개 친구야! 어디 갔다 이제야 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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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곧 성인이 되어 보육원 퇴소를 앞둔 도윤 앞에 15년 만에 아버지 승원이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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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새로운 우리가 된 줄 알았지만, 여전히 또 다른 우리 안에 갇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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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은 배급사 [콘텐츠패밀리]와의 저작관 협의를 통해 제작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작품 [포에버 퍼스트 러브]는 12월 9일 개봉하는 드라마, 로맨스 영화인데요!
여러분들은 가치관이 맞지 않는 사람과 맞춰가며 관계를 이어나간 적이 있나요?
오늘 이 두 남녀는 보다 사실적이고 현실적인 로맨스를 보여주며
서로 충돌하고 화해하기를 반복하며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요.
무엇보다 어른들을 위한 솔직한 로맨스라는 점이 인상적인 작품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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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겐 압도적인 승리가 필요하다! [한산: 용의 출현] 7월 27일 대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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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 살에 만난 첫사랑 '렌'과 '아오이'
한눈에 서로의 상처를 알아보고 보듬어주며 두 사람의 인연이 시작된다.
함께 있어 즐거웠던 시간도 잠시 '아오이' 가족이 쫓기듯 떠나면서 헤어지고 만다.
"운명의 실"이 있다고 생각해"
'아오이'가 준 소원팔찌를 8년 동안 간직한 '렌'
어느 날 소원팔찌가 끊어지고 두 사람은 운명처럼 재회한다.
그 후 우연한 만남과 헤어짐이 반복되지만 그때마다 서로의 곁에 이미 다른 사람이 있어 엇갈리는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