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n0932022-12-20 20:56:33
넷플릭스 섹시한 자동차 강도영화 베이비 드라이버
넷플릭스 영화 추천 <베이비 드라이버>
제가 오늘은 조금 신나고 빠른 음악과 스피드의 환상의 콜라보를 가진
영화 베이비 드라이버를 가지고 왔어요!~
요즘 추워서 집에 꽁꽁 싸매고 있을 때 경쾌한 음악과 드라이브를 대신 만족할 수 있는
대리만족 영화! 베이비 드라이버
스토리는 별로이지만, 음악과 액션이 적절하게 잘 어우러져 많은 분들이 좋아할 거라고 생각해요!
그럼 한번 영화 베이비 드라이버 줄거리부터 결말까지! 살펴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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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이드가 아니라고
이번 주에는 미국을 배경으로 한 소수자들의 이야기가 개봉했다. 흑표당의 대표자로 활동하다가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한 프레드 햄프턴(다니엘 칼루야 분)과 흑표당 내부의 스파이 이야기를 그린 <유다 그리고 블랙 메시아>, 아시아계 미국인으로서 농구선수를 꿈꾸는 부기의 이야기인 <부기>다. 두 영화 모두 미국 내에서 아직도 주류로 인정받지 못하는 흑인과 아시아인을 다뤘다는 점에서 유의미하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떨떠름한 기분이 지워지지 않았다. 소수인종들의 대표자는 늘 남성이어왔고 두 영화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나 흑인 여성들의 이야기는 <헬프>나 <히든 피겨스> 등을 통해 조명된 적이 있지만 아시아계 여성의 이야기는 다뤄진 적이 거의 없다. 두 영화에서 특히나 답답했던 건 여성이 소비되는 방식이다. 단순히 비중의 문제가 아니라 여성 캐릭터들이 남성의 시선에서 바라본 대상에 머물러 있다는 점은 아직까지 영화 제작에 여성의 비중이 크지도 않고 의견이 반영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유다 그리고 블랙 메시아>에 등장하는 흑표당의 여성 당원들은 성희롱의 대상이거나 연애 대상으로 다뤄진다. 총을 들고 싸우는 여성 당원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크게 부각되지 않으며 메인 타이틀롤인 프레드 햄프턴과 내부 스파이가 된 빌 오닐(러키스 스탠필드 분)의 존재감에 비하면 없어도 될 만한 캐릭터들이다. 유일하게 높은 비중을 자랑하는 데버라(도미닉 피시백 분)조차 등장부터 프레드에게 관심을 보이다가 결국 프레드의 아이를 임신하고 영화 마지막에는 프레드 햄프턴 주니어의 어머니로 서사를 마감한다. <부기>의 여성 캐릭터들은 더 심각하다. 엘레노어(테일러 페이지 분)는 운동을 하러 간 곳에서조차 부기(테일러 타카하시 분)의 성희롱 대상이 되고 이는 10대 소년의 치기로 묘사될 뿐 문제의식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애초에 엘레노어의 운동 장면을 조명할 때 관음적인 시선으로 엘레노어를 훑는 카메라 자체가 남성들의 시각을 투영한 부기의 시선이다. 관심이 있으면 놀려도 되고 성희롱을 해도 된다는 20세기적 발상을 21세기 서구권 영화에서 봐야 한다니 관객으로서 그저 불쾌할 따름이다.
사회적으로 큰 역할을 하거나 차별받는 입장에 놓인 남자 주인공의 여자친구가 임신했을 때 단골로 등장하는 대화가 있다. 여성 캐릭터는 남성 캐릭터가 가족에 집중해주길 바라지만 남성 캐릭터는 그럴 여력이 없다고 대답한다. 그리고 대화의 끝은 자연스럽게 여성 캐릭터가 임신을 하는 바람에 남성 캐릭터의 발목을 잡거나 여성 캐릭터가 사회적인 의제보다는 자신과 아이에 집중하는 이기적인(?) 모습을 드러낸다. <유다 그리고 블랙 메시아>의 영화 말미에는 데버라 또한 흑인 인권 운동의 중요한 한 축이었음을 드러내는 글귀가 등장하지만 정작 영화 서사에서 데버라는 프레드의 이상에 현실을 끼얹는 존재로 그려진다. 데버라는 스크린에서 프레드의 연애 상대이자 프레드의 아들의 어머니 이상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서사의 절반 이상을 임신 상태로 소비당한다. 데버라 존슨이 흑인 인권 운동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전혀 그려지지 않은 채 마지막 한 줄로 변명하듯 데버라의 서사를 남겨줄 뿐 영화는 데버라의 서사에 책임을 지지 않는다. 데버라와 프레드의 연애 서사는 흑표당의 역사에서 정녕 그렇게 중요한 부분이었나?
부기에게 엘레노어는 연애 대상인 동시에 남성성을 재확인시켜주는 도구로 소비된다. 엘레노어가 자신의 숙적인 몽크(팝 스모크 분)와 연애한 과거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부기는 엘레노어와 대화하는 대신 분노한다. 엘레노어와 교감하는 시간에도 엘레노어를 기쁘게 해주기 보다는 자신의 남성성을 끊임없이 확인받으려 드는 부기는 엘레노어와의 대화에서 단 한번도 성인다운 대화를 보여주지 못한다. 엘레노어뿐만 아니라 가족, 코치와도 이런 대화를 나누지 못하며 그게 부기의 캐릭터성이라 한다면 할 말은 없겠지만 부기가 친구인 리치와 나누는 대화와 비교해 보면 엘레노어와의 대화가 더 극단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부기는 리치와 농구를 하며 대화를 나누고 조언을 주고받지만 엘레노어와는 누가 더 비참한지 싸워 이기려 든다. 자신을 괴롭히는 5000년의 중국 역사를 들먹이는 부기에게 엘레노어는 자신에게는 역사가 없다고 응수한다. 흑인이나 아시아계나 미국에서는 소수인종에 해당하는데 애초에 누가 더 바닥인지를 따지는 게 의미가 있기나 한가 싶을 만큼 부기와 엘레노어의 언쟁은 소수인종 간의 논쟁으로서도, 연인의 애정 싸움으로서도 별 기능을 하지 못한다. 부기에게 엘레노어는 소수자성을 강화시키는 동시에 남성성을 확립시켜 주는 도구에 불과하다.
프레드 햄프턴에게 데버라 존슨은 결국 서사의 비극성을 극대화시켜주는 존재일 뿐이며 데버라 존슨 자신에게 임신이라는 상황은 약자의 상황에서 더한 약자로 치닫는 도구로 변질되어 버린다. 영화 말미 흑표당 당사에 들이닥친 경찰은 임산부가 있다는 말에 데버라를 향한 총질은 멈추는 대신 데버라의 배에 총구를 들이댄다. 데버라는 태어나지 않은 아이의 보호자로서 경찰에 굴복할 수밖에 없다. 부기는 중국에 가느냐 미국에 남느냐의 상황에서 중국행을 택하고 엘레노어에게 말하지 못한다. 그리고 엘레노어도 몽크와 교제한 과거를 말하지 않았으니 서로 거짓말한 것은 마찬가지 아니냐고 변명한다. 엘레노어가 몽크와 연인이었던 것은 부기를 알기 전이었고 현재 부기와의 관계에 있어 영향이 없다. 하지만 부기는 미래에 대한 논의를 엘레노어와 하지 않음으로써 관계에 큰 파장을 불러올 수 있는 부분을 감추고 엘레노어를 자신과 동등하게 시간을 보낼 주체로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부기와 프레드 모두 자신의 연인을 삶에 대한 주체성을 가진 인격체로 대하지 않고 자신의 비극 서사에 매몰되어 이해하지 못하는 타인으로만 치부한다는 점에서 두 영화는 여성 캐릭터를 다루는 방식에서 크게 실패했다.
소수자를 다루는 이야기는 언제고 필요하다. 흑표당의 역사에서 크게 부각되었던 많은 인물들과는 달리 프레드 햄프턴이 서사의 주체가 되어 주목받은 것은 <유다 그리고 블랙 메시아>가 최초라고 한다. <부기>는 실화 기반 영화는 아니지만 미국 내 현재 아시아인들의 위치를 재확인하는 동시에 이민자 2세로서 두 문화 사이에서 겪는 고민을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하지만 두 영화의 의의에도 불구하고 서사에서 한 성별이 의도적으로 대상화되고 주변부에 머무른다면 결국 소수자가 소수자를 만들어내는 아이러니가 탄생하고 만다. 관객의 절반이 데버라와 엘레노어의 성별을 공유한다면 그들의 이야기도 제대로 들려줄 필요가 있다. 단 어머니나 연인으로서의 서사가 아닌 데버라와 엘레노어 그 자신들의 이야기를.
*이미지 출처는 모두 네이버영화입니다.
* 본 콘텐츠는 브런치 레이 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원 게시글은 아래 출처 링크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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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금 부족한 서사, 하지만 여전히 압도적인 영상미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결혼이라는 제도를 통해 같이 생활을 하게 된다. 서류적은 부분을 떠나서 서로 이어진 두 사람은 ‘사랑’이라는 인체의 화학 작용을 통해 많은 것을 공유하고 주고받는다. 그런 달콤한 시기에 아이를 낳으면 아이와 함께 가족이 된다. 두 사람만 생활할 때와 아이가 생긴 이후의 생활은 다르다. 서로에 대한 걱정과 관심을 가졌던 두 사람은 이제 아이에 대한 걱정과 관심을 꽤 강하게 쏟아내고 이런저런 크고 작은 사고와 위험에도 대처하게 된다.
이 모든 과정은 대체적으로 우리가 주변에서 많이 경험했던 일들이다. 우리를 키워낸 부모님 세대를 봐도 그렇고 지금 막 부모가 된 젊은 사람들의 모습에서도 볼 수 있다. 서로 돌보고 지켜줘야 할 대상이 늘어났다는 건, 무언가를 같이 공유할 존재가 늘어났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희생과 배려를 더 신경 써야 한다는 의미도 된다. 또한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상대방을 보호해야 하는 의무도 추가된다. 그래서 위협적인 것이 주변에 있으면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거나 좀 더 좋은 환경을 찾아 헤매기도 한다. 인류의 역사에서 집단의 이동은 어쩌면 좀 더 나은 환경을 찾아다니는 인간의 본성 때문인 지도 모르겠다.
13년 만에 돌아온 <아바타>
최근에 개봉한 <아바타: 물의 길>은 전편에서 연인이 된 제이크(샘 워싱턴)와 네이티리(조 샐다나)가 가족을 만들고 지켜내는 과정이 담겨있다. 13년 만에 속편으로 돌아온 이야기에도 그런 시간의 흐름이 반영되어 있다. 제이크와 네이티리는 직접 낳은 아이들인 네테이얌(제이미 플래터스), 로아크(브리튼 달튼), 투크티리(트리니티 블리스)와 입양한 아이들인 키리(시고니 위버), 스파이더(잭 챔피언)를 키우고 있다. 한 부족의 리더로서 큰 문제없이 아이들을 키우고 부족을 이끌 수 있었던 제이크는 어느 날 지구인들이 다시 판도라 행성에 대규모로 돌아오고 있는 것을 알게 되고 부족을 떠날 준비를 한다.
사실 제이크는 이 부족에서 투르코 막토 라는 구원자로 불렸다. 과거에 볼 수 없었던 강력한 리더이자 부족을 지키는 존재였지만 자신이 지켜야 할 가족 앞에서는 그저 평범한 아빠일 뿐이다. 좀 더 공격적인 부분을 보강하고 돌아온 지구인들을 본 제이크가 처음 느끼는 건, 바로 두려움이다. 자기 자신의 죽음 때문이라기보다는 자신의 가족과 부족들이 감당해야 할 위험이 그에게 두려움을 느끼게 했다. 그 두려움의 감정이 <아바타: 물의 길>의 이야기를 만들어냈으며 영화 내내 이어진다.
제이크와 네이티리는 그 두려움을 느낀 후, 부족을 떠나기로 마음먹는다. 그들이 결정한 건 일단 위험을 피해 보이지 않는 곳에 숨는 것이다. 그래서 바다의 부족에 찾아가 조용히 숨어 지내려고 한다. 실제로 그건 꽤 긴 시간 동안 효과가 있었다. 조용히 살며 그의 가족들은 바다라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했으며 영화는 그들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을 천천히 보여준다. 바닷속의 새로운 생명체들과 아름다운 풍경은 그들이 느낀 두려움을 어느 정도 희석시킬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준다.
이번 영화의 중심은 제이크 가족 이야기
제이크 가족이 바다 부족과 관계를 형성해나가는 과정도 담긴다. 특히나 에테이얌이나 로아크 등 성장기에 있는 아이들이 바다 부족의 아이들과 신경전을 벌이고 다투는 과정도 꽤 디테일하게 담겨있다. 그러니까 전편이 제이크와 네이티리의 사랑을 보여주었다면 이번 2편에서는 제이크와 네이티리의 가족들의 삶과 적응하는 이야기가 중점적으로 담겨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 지구인들의 침공은 이야기의 긴장감을 위한 양념 정도로 활용되고 있다.
1편에서 사망한 군인인 쿼리치(스티븐 랭)도 다시 등장한다. 이미 지구인 쿼리치는 죽임을 당했기 때문에 그의 기억과 습성이 이미 만들어졌다고 알려진 아바타에 전송된 것이다. 그래서 이번 영화에서는 아바타 모습을 한 쿼리치의 부대원들이 제이크 가족을 추적하는 모습이 담겨있다. 이 영화에서 유일한 빌런이고 쿼리치라는 인물의 카리스마도 여전하지만, 전편과 동일한 인물들이 단지 아바타의 모습으로 바뀌어 재등장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조금은 동어반복처럼 느껴지는 부분도 있다.
영화 속 제이크는 전편에서는 인간과 아바타 사이에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다. 하지만 이번 영화에서는 어떤 식으로 가족을 지켜야 하는지 혼란스러워한다. 언젠가 다시 찾아올 줄 알았던 위협이 현실로 다가왔고 이번 이야기 속에서는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든 피하려고 하지만 영원히 그것으로부터 도망치면서 살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제이크의 성장은 이번 이야기에서도 볼 수 있는데, 여기에 아이들이 판도라 행성의 바다 생명체들과 교류하고 위협에 맞서는 것을 통해서 성장하는 이야기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니까 제이크와 네이티리 가족 전체의 성장기로 봐야 할 것 같다.
부족한 서사, 그 단점을 잊게 만드는 뛰어난 영상미
1편이 우리에게 그 당시 최고 기술력을 화면으로 보여준 것처럼, 이번 후속편에서도 최고의 영상과 특수효과를 영상에 담았다. 이번엔 바닷속으로 카메라를 옮겨 아름다운 바다 생명체들을 보여주고 주인공들이 그들과 교류하는 과정을 꽤 디테일하게 보여준다. 마치 해상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만든다. 마치 눈앞에 실제로 있을 것만 같은 화면은 이것이 컴퓨터 그래픽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것을 잊게 만든다. 그야말로 지금 우리가 영화관에서 볼 수 있는 최고의 효과가 눈앞에 펼쳐진다.
화면만큼은 최고 수준이지만 이 영화의 이야기는 조금 아쉽다. 제이크와 네이티리의 가족 서사로 이이기의 규모 자체가 조금은 축소된 느낌이 있고, 192분이라는 긴 러닝타임 동안 그렇게 빠르게 이야기가 전개되지는 않아서 조금 지루하다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제이크 가족이 위협을 피해 숨었다가 위협에 대항하는 이야기 정도로도 설명할 수 있을 만큼 1편에 비해 좀 더 단순해진 서사는 이야기를 따라가는 재미까지 축소시킨다.
전체 이야기 자체는 한 가족이 겪는 혼란과 성장 서사다. 최소 3편까지 제작 중이고 시리즈가 성공적으로 흥행한다면 몇 편이 더 제작될 가능성이 있다. 이번 <아바타: 물의 길>은 앞으로 이어질 대서사의 발판을 차곡차곡 쌓아간다는 느낌이 강한 영화다. 1편에 비해 서사는 조금 부족하지만 화면으로 느낄 수 있는 현실적은 감각은 뛰어나다. 체험형 영화로서 3D나 아이맥스, 4D, 돌비 사운드관 같은 다양한 특수 상영관에서 체험하면서 보기 좋은 영화다. 이렇게 시각적 만족도가 주는 장점이 다른 단점을 상쇄하고 더 높은 평가를 하게 만든다.
영화에 등장하는 배우들인 샘 워싱턴, 조 샐다나, 시고니 위버, 스티븐 랭 등도 전편과 같이 훌륭한 연기를 보여준다.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캐릭터들이어서 크게 새로운 느낌은 없지만 전편의 연기톤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영화에 몰입하게 만든다. 영화를 연출한 제임스 카메론 감독은 속편을 만드는데 13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최근에 많이 등장하고 있는 슈퍼히어로 영화의 CG와 비교했을 때, 너무나 완성도 높은 화면을 보여주면서 급하게 찍어내는 것이 아닌 장인이 만들어낸 영상과 영화가 어떤 식으로 완성되는지를 몸소 보여줬다. 그가 앞으로 계속 이어나갈 <아바타> 시리즈의 다음 서사와 영상이 궁금해진다.
*영화의 스틸컷은 [다음 영화]에서 가져왔으며, 저작권은 영화사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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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차피 일어날 일 따위는없다
이 영화를 보긴했는데, 리뷰를 쓸까 말까 고민했던 이유는 내가 이 영화를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이 영화가 던진 떡밥에 대한 글은 충분히 많으니까, 이 글은 그저 어려운 영화 좀 봤다고 누군가가 주절주절 떠드는 것을 글로 옮겨온 거라고 생각해주시면 감사하겠다.
이 영화의 시작은 미국의 특수부대 요원들이 한 남자를 구하는 임무를 맡고, 임무 수행 중 밀고를 한 사람에 의해 임무가 발각되고, 고문을 당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 모든 고문들을 견뎌낸 남주는 테넷 작전에 합류하게 되고, 그 때, 인버전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는 닐을 소개받는다. 두 사람은 미래를 보는 기계를 가졌다는 한 남자, 사토르의 행방을 찾고, 그가 시간의 흐름을 뒤집는 능력을 이용해 세상을 멸망하게 하려는 계획을 막기 위한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과연 그는 마지막까지 살아남아, 악당 사토르의 계획을 저지할 수 있을까?
영웅과 조력자 포맷
이 영화는 세상을 지켜내는 영웅 남주와 인버전에 대한 지식이 전무한 그가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닐의 버디물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하지만 두 캐릭터의 차이점이 있다면, 남주는 임무수행에 있어서 인버전이라는 개념을 이해하고, 움직여야 하는데, 본인이 어떤 행동을 했을 때, 본인의 행동이 인버전된 상황에서 어떤 영향을 끼칠까에 대해서 깊게 고민하지 않고,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면 불가능해보여도 정면돌파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에 반해, 닐은 인버전에 대한 지식이 해박(물리학 박사랬나)하기 때문에 현재에 행한 일들이 인버전된 상황에서 어떻게 작용해 현재에 어떤 결론을 도달하게 할지 이성적으로 판단한다. 둘의 관계는 흡사 유비와 제갈공량 혹은 아이언맨과 자비스 정도의 관계라고 할 수 있겠다. 스토리 포맷에서 조력자들은 이성적인 판단에 의해, 통계적으로 확률이 높은 선택을 리더에게 제시하지만 리더는 남들이 잘 하지 않는 선택, 위험 가능성이 높은 선택들을 하고, 결론적으로 그 선택들을 성공시켰을 때, 비로소 그 리더는 영웅이 되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남주는 현재에서 가장 불리했던 상황(인버전에 대한 지식 전무, 사토르에 대한 정보 전무, 사토르의 계획과 그를 잡으려고 하는 단체의 존재 여부에 대한 지식 전무)에서 시작했지만 닐과 그 외 수많은 조력자들의 도움으로 위험한 선택들을 했음에도 그 선택들을 모두 성공시켜 다가올 미래에 테넷 작전의 주도자가 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미래의 남주가 과거의 남주에게 닐을 보내서 테넷 작전을 성공시키는 데에 그를 잘 인도하도록 명령한 것을 암시하는 대사가 마지막에 나온다.
"내 우정은 여기서 끝이지만 자네의 우정은 이제 시작이야"
이 대사는 닐이 주인공과 같은 시간대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서 주인공에 의해 인버전되어 과거로 온. 인물이 아닐까 예상해 볼 수 있는 대사였다. 닐은 미래에서 과거로 온 사람이기 때문에 마지막 클라이막스 장면에서 주인공이 사토르 일당과 최후의 싸움을 하던 그 상황에 주인공의 눈을 사로잡은 가방고리는 그 상황 속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닐의 가방 고리임이 밝혀지며, 닐이 작전 도중 인버전해서 주인공을 도왔고, 끝까지 주인공을 무지의 상태를 유지하도록 유도해서 최종적인 작전 성공의 키를 쥐고 있던 캐릭터였음을 증명해냈다.
"무지가 우리의 무기야."라고 믿었던 그의 대사처럼 말이다.
하지만 여전히 미스터리한 닐의 대사 중에
"또다른 과거를 구하러 가야지."는 닐에게 있어서 이 여정의 끝이 주인공 시점에서 바라본다면, 닐과 주인공이 처음 만나는 인도에서의 첫 만남 씬이 되겠구나 예상해볼 수 있게 한다.
테넷과 비슷하지만 비슷하지만 아주 다른 포맷의 영화 "나는 내일 어제의 너와 만난다'
일본 영화 중에서 "나는 내일 어제의 너와 만난다"라는 영화가 있다. 이 영화는 장르가 로맨스인만큼 테넷과는 연관없는 영화같아 보이지만 이 영화의 여주인공도 테넷의 관점에서 보면, 인버전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남자 주인공이 과거에서 미래로 향해 가는 사람일 때, 여주인공은 미래에서 과거로 향해가는 시점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같은 원리를 가지고도 이렇게 다른 영화를 만들어낼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비교하자면, 테넷에서 닐의 역할이 일본 영화에서는 여주인공이 처한 상황과 같고, 일본 영화 속 남자 주인공은 테넷 속 주인공과 같은 시간 차원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이 일본 영화에서는 이런 시간 차원의 뒤바뀜이 애절한 사랑의 기폭제가 되지만 테넷에서는 악당을 막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된다. 일본 영화에서 인물들의 시간 차원이 뒤바뀌는 설정은 일반적인 러브 스토리 포맷에 시간 차원만 비틀었는데도 주인공들 사이의 사랑의 애절함의 크기가 커지는 효과를 보여주고, 테넷의 경우는 일반적인 어벤져스 영화같이 영웅이 악당이 해치우는 스토리 포맷에 시간 차원이 자유자재로 뒤바뀌게 만드는 설정은 영화의 결말을 위한 도구로 이용된 것이다.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인버전이라는 단어가 등장하고, 인물들도 각기 다른 차원에 시간에 살고 있고, 그 시간 차원을 필요에 따라 바꾸기도 하기 때문이다.
영화가 주는 메시지(뇌피셜)
이미 일어날 일이 일어난 것 뿐이야.
영화 속 주인공은 인버전하는 능력과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 캣을 이용해 미래를 바꾸려고 하는 사토르의 계략에 당한다. 그 결과, 캣은 중상을 입고, 작전은 수포로 돌아갈 위기에 처한다. 그러면서 닐과 했던 대화 중에서 닐은 "이미 일어난 일이 일어난 것이다."라며, 미래를 바꿀 수 없다는 입장을 보이고, 주인공은 이미 일어날 일도 과거를 어떻게 바꾸냐에 따라서 충분히 바뀔 수 있다."라고 주장한다. 닐의 주장은 시간을 뒤바꿔서 과거-미래 순이 아니라 미래-과거 순으로 시간이 바뀌어서 과거를 바꿀 수 있다고 해도 결국 똑같은 결말이었을 거라고 이야기하는 반면, 주인공은 인버전되어 과거를 바꿀 수 있다면, 미래도 바뀔거라고 믿었기 때문에 영화의 결말로 미루어보아, 두 사람 중에서 주인공의 말이 이긴 것이 아닐까 예상해본다. 이 영화는 결국 테넷 작전을 주도한 최종보스는 주인공인 것으로 밝혀졌기 때문에 과거를 바꿀 수 있다면 미래도 충분히 바뀔 수 있다고 우리에게 희망을 전하는 것만 같았다. 물론 끊임없이 그에게 반론을 제시하며, 그의 행동을 제어하려고 한 닐의 행동이 있었지만 아마 닐은 그에게 위험하다고 말려도 자신의 뜻대로 강행했을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그렇게 해야 테넷 작전이 성공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 테니, 어차피 발생할 운명이라면 어떻게든 바꿔보려고 발버둥쳐도 일어날 것이라고 말하는 장면은 결국 주인공의 미래를 바꾸고자 하는 의지를 더 다지고, 그게 과거를 바꾸는 것에 박차를 가하도록 묘하게 자극한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이다. 주인공이 테넷 작전의 주도자였다면, 닐은 이 테넷 작전이 무사히 마칠 수 있게 중도를 지키며, 성공을 향해 항로를 조종하는 항해사, 설계자 같은 존재라고 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
결국 이 영화가 어려운 과학적 개념들까지 동원해 가며 말하고자 했던 바는 아마도 발생할 일은 발생할 거다라는 운명론 같은 건 믿지 말고, 당신이 지금 현재 어떤 행동을 하는지에 따라 미래는 충분히 바뀔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운명의 개척자가 되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조심스레 예상해본다. 우리는 영화에서처럼 인버전할 수는 없지만 미래에 뭐가 될지 모르기 때문에 현재를 충실히 살아놔야 한다는 미션을 안고 살아가는 것만이 우리가 가진 정답이 아닐까. 그러니 모두들 하루하루 너무 우울하지도 않고, 적당히 행복하게, 그리고 하루를 알차게 보내시라는 말밖에 할 수 없을 것 같다. 오늘이 쌓여 마일리지가 되면 그 마일리지들이 쌓여 다른 내일을 만들 거라고 이 영화가 보여주고 있으니, 혹시라도 나쁜 버릇을 가지고 있다면 고치려는 노력을 한다든지 새로이 배우고 싶은 것이 있다면 배워보는 것도 내일을 변화시키는 키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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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부한데 나 왜 울고있냐
이 글은 영화 [웨스트사이드 스토리]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마케팅의 후발 주자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것 중 하나는 이미 사람들의 머릿속에 각인된 첫 번째의 이미지를 지워내는 것이라 한다. 주방 세제라는 단어를 퐁퐁이라고 대체해도 어색함 하나 없이 알아들을 수 있는 것처럼, 나중에 사업에 뛰어든 사람은 이 "퐁퐁"을 대체하지 못하면 결국 사장되는 길을 걸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제아무리 손만 대면 졸업 작품으로 쉰들러 리스트를 가지고 오는 스필버그 감독이라 해도(참고 1). 1957년 초연한 이래 세계적인 인기를 끈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지워내는 것이 쉬운 작업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감독은 영화 [웨스트사이드 스토리]가 자신의 "훌륭한"작품들 중 하나가 되길 바라는 다짐과 소망으로 무장한 채 작업에 몰두했고, 결국 많은 리스크를 가진 작품으로 관객들에게 다시 인사를 건네고 있다.
이제 백발이 성성하지만 아직도 소년의 마음으로 첫 뮤지컬 영화에 도전하는 그의 마음에 결국 백기를 들고 영화관으로 향해야만 했다. 그가 이 뮤지컬을 접하고 느꼈던 가슴 뒤는 감정을 영화에 어떻게 담아냈을지 눈으로 보고 확인해야 할 것만 같아서.
색으로 보여주는 인물들의 위치;이걸 보는 것만으로도 즐겁다.
사진 출처:다음 영화
영화는 두 편으로 나뉘어 세력 싸움을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두 집단의 갈등과 불화를 극대화하는 수단으로 감독은 색깔을 선택한다.
푸에트리코에서 온 이민자 출신 사람들은 웜톤(붉은 계열)으로.
뉴욕 토박이들은 쿨톤(푸른 계열)로 보인다.
체육관 안에서 벌어지는 댄스파티의 현장은 서로 다른 목적을 가진 두 패거리들의 갈등이 최고조가 되는 장면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이 부딪치는 모든 장면들은 이런 색의 대비로 인해 아름답다는 말 외에는 대체할 수 있는 단어가 없어 보인다.
두 주인공도 다르지 않다.
토니는 자신의 앞날만큼이나 창창하고 푸른색을 띠고, 마리아는 토니에 대한 사랑의 색만큼이나 붉디붉다.
흥미로운 점이 있다면 마리아는 영화의 후반부로 갈수록 붉은색과 푸른색을 혼용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토니는 여전히 푸른색의 연못에 머물러 있음을 볼 수 있다. 마치 토니가 가진 많고도 복잡한 카르마를 영화 내내 완벽하게 처리하지 못했음을 알려주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 속 모든 사람들은 자신들이 결국은 벗어날 수 없는 운명 같은 색에 갇혀 울고 웃는다. 그들은 노래와 춤을 마치 이 힘든 시간을 견디기 위한 약처럼 남용하지만, 이 싸움을 스크린 너머로 지켜보는 관객들에겐 그저 탄성을 내지르게 하는 수단일 뿐이다.
마치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 한 것처럼. 결국 이 아이러니는 나를 울게 했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사람들.;결국은 다름이 부른 참사.
사진 출처:다음 영화
의도적으로 스페인어는 자막을 달지 않았다고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자막으로 새겨 박을 만큼. 영화는 한 쪽의 언어를 완벽하게 지워버렸다. 영어가 아닌 낯선 언어이기에, 간간이 들리는 이름과 뉘앙스 위에는 그 어떤 것도 정확하게 알아들을 수 없다. 단지 영화가 진행되는 흐름상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이 지점은 푸에트리코인들이 미국 시민들에게 어떻게 보이는지를 매우 정확하게 알려준다. 이민자이면서 동시에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이기에 토종 미국인들에게 늘 배척당하기 일쑤다.
그렇기에 붉은색에 속한 사람들은 미국 시민으로 인정받기 위해, 동향 사람들끼리도 영어를 사용하는 모습을 보인다. 자신들은 미국에 왔고, 정식으로 파란색 집단에 속하고 싶음을 드러낸다.
얼핏 보면 이민자 출신들만이 그런 인정받음에 목마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영화 속 등장인물들이 뉴욕이라는 곳에서 그 "인정"이라는 단어를 위해 싸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뉴욕 시민으로 인정받기 위해, 혹은 이 구역의 진정한 갱단으로 인정받기 위해. 또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의 가족이 되기 위해 모두 사력을 다하지만. 각자가 처한 그 경계는 매우 크고 넓어 아무리 마음을 먹어도 뛰어넘을 수 없다.
영화 속 모두는 자신들이 살고 있는 철거촌처럼 위태롭고 처량하다. 그들은 철거된 후의 멀끔하고 새로운 도시가 자신들의 미래라 믿어 의심치 않지만. 그들의 미래는 끽해야 보조금 몇 푼 손에 든 채 등 떠밀릴 뿐일 것이다.
이 기묘함은 영화 [기생충]과도 닮아있다.
당사자들, 그러니까 생존과 인정의 기로에 있는 사람들만이 죽자 사자 싸우고 있는 모습 말이다. 그들은 어딘가에 소속감을 느끼고 싶었고, 평온함을 원하고, 꿈이 있었지만. 결국 그 모든 꿈들은, 그러니까 영화에 나오는 모든 사람들의 닿을 수 없는 그 무언가는 그 다름을 품지 못한 반대편에 의해 말살되어 버린다.
스필버그의 숙원은 성공했는가.;영화를 받아들이게 하는 포인트마저도 사람마다 다를 것 같다.
사진 출처:다음 영화
스필버그의 숙원사업이었던 뮤지컬의 영화화는, 앞서 잠시 언급한 것처럼 위험 요소가 많았다.
첫 번째는 의심할 필요 없이 닳고 닳은 이야기의 재림에 있다.
로미오와 줄리엣 정도에 비유할 수 있는 두 주인공의 이야기가 불러오는 진부함은, 누군가에겐 영화관에서 하품을 하게 하는 주요 원인이 되게 할 것이다.
눈과 귀가 즐겁다는 상투적인 표현 아래의 뮤지컬 영화라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물론 그런 행복감을 영화 내내 얻을 수도 있지만, 거의 모든 장면들을 음악으로 풀어내는 것 또한 몰입감을 방해하는 요소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미 결말이 뻔히 보이는 영화를 보겠다고 앉아있는 내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울게 된 이유는. 아마도 이 명감독이 작품의 중심 메시지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보이지 않는 차별.
사회의 분열.
그리고 그것마저 잊게 하는 사랑의 힘.
다시 한번 감독의 집념과 순수한 열정에 대해 감사의 말을 전하게 되는 순간이다.
마치면서;엉엉.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이 영화가 왜 나를 울렸을까. 생각해 보았다.
아마도 내가 영화 속 사람들처럼 한 번쯤은 배척당했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문득 그때의 나를 등장인물들과 비교해 보았다.
나는 그때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며 울부짖을 수 있을 만큼 그 상황에서 최선을 다했는지. 그 사람들 만큼 진심으로 그 문제를 부여잡고 있을 근성이 있었는지 말이다.
영화는 이렇게 치열한 삶 속에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삶의 어려움 속에서도 노래를 부를 베짱이 있는 모든 사람들.
그들의 모습은 대단하면서도 처연하다. 뮤지컬이 아닌데도 작은 박수와 환호를 그들에게 던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셈이다.
참고 1
스티븐 스필버그의 학사 졸업 논문이 무려 [쉰들러 리스트]였다고 알려짐.....어우야.
[이 글의 TMI]
1. 삼겹살 구워 먹음.
2. 후식으로 와플 먹음.
3. 다이어트? 몸무게 앞자리 바꿈. 훗.ㅋ
4. 두 주인공의 사랑 이야기는 뺐음.
#웨스트사이드스토리 #안셀엘고트 #마이크파이스트 #스티븐스필버그 #영화추천 #최신영화 #브런치작가 #네이버인플루언서 #영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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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쁜 것을 보면 정화되는 것처럼
어림잡아보니 10년이 넘었더라. 내가 영화관에서 로맨스를 본 지가.
매번 극장에서 볼 영화는 블록버스터이거나 영화관에서 볼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는 독립영화들이었다. 그렇다고 상업영화를 안 본 것도 아닌데, 로맨스는 특히 영화관까지 가서 보지는 않았었다. 내가 여태껏 리뷰해온 로맨스 서사들은 ott로 접했던 영화나 드라마였다. 그런 내가 정말 뜬금없이 현재 상영중인 로맨스 영화를 영화관에서 보았다. 이 영화를 선택한 이유는, 내가 정말 응원하는 젊은 배우들이 주연을 맡았기 때문이고, 아주 오래전에 본 대만 영화의 리메이크이기 때문에 내용에 크게 실망할 만한 지점이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1. 한국의 여름과 대만의 여름이 다르듯이
내 기억 속 대만판 '청설'은 대만의 습한 여름을 잘 표현했던 영화였다. 그런데 한국판 '청설'은 대만보다는 한결 싱그러운 한국의 여름을 잘 표현해내었다. 물론 한국의 여름도 습하고 무덥지만 축축한 느낌보다는 파릇파릇한 나무가 많은 그런 여름을 잘 그려냈다는 뜻이다. 그런 여름의 정서와 이 풋풋한 두 배우의 조합이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청설'에 나오는 모든 인물들은 모두가 판타지 속 인물들이다. '저렇게 착한 사람이 어딨어'라고 할 만큼 모두들 순딩이들이다. 영화는 픽션인만큼 적당한 현실성과 적당한 판타지가 잘 조합되어야 하는데, 이 영화 속에서의 현실적인 모습이 있다면, 용준이가 취준생이라는 것과 여름이가 동생을 보살피느라 자신의 삶을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모습 등을 보여주며 현대의 불안한 청춘의 모습을 담았다는 것이다. 그 이외의 모습은 사실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만큼 훈훈하다. 누군가는 이런 내용을 순 거짓말이라고 할지도 모르겠으나 픽션을 소비하는 사람들이 어떤 극을 볼 때 일말의 판타지도 없으면 다큐를 소비하는 것과 뭐가 다른걸까 라고 생각한다. 다큐와 같은 현실적 지점도 어느 정도 보유하면서 적당히 억지스럽지 않은 판타지를 섞어 '나의 삶에도 저런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혹은 '저런 훈훈한 상황이 있었으면 좋겠다'라고 상상할 수 있게 되어야 성공적인 픽션이라고 생각하는데, 이 영화가 그 지점을 나쁘지 않게 구현한 영화였다고 생각한다. 그저 두 주인공을 보는 것만으로도 흐뭇한 지점이 있다. 영화에 빌런이 없고, 그들이 겪는 갈등도 다 착해서 생기는 것들이라 분노하게 되지 않고 마음 편하게 볼 수 있어서 좋았다.
2. 소리는 없지만 눈이 호강하는 색감
이 영화의 키워드는 '수화'이기도 한데, 그래서 주인공 커플은 말을 하지 않는다. 계속 수화로만 대화하기 때문에 고요한 사운드가 오히려 인상적이다. 그래서인지 이번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여름과 용준이 데이트를 했을 때, 가을이 집에서 자고 있다가 불이 났는데, 경보 소리를 듣지 못해 연기가 가득한 집에서 깨었던 장면이다. 그 때, 흠칫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가을이는 못 들으니 소리로 표현하는 위험은 전달될 수 없다는 것을.... 나에겐 당연한 것이 가을이 같은 사람들에게는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잠시 반성하게 되더라. 사회에서 소수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간접적으로라도 이해하기에 영화만큼 좋은 매개체가 없다는 것을 다시 느끼기도 했다. 비슷한 감정을 어떤 영화를 보면서 느꼈었나 회고해보니, '코다'라는 영화를 볼 때도 비슷한 것을 느꼈었다. 코다인 딸이 노래하는 모습을 농인인 가족들은 들을 수 없어 농인의 입장에서 경험하게 되는 음악이란 이런 것이구나 라는 것을 느꼈던 장면이었다. 그들은 딸의 공연에 호응을 하려고 해도 주변 사람들의 반응을 볼 수 밖에 없고, 그들의 눈치를 보며 적당히 박수를 쳐야하는 모습이 참 아팠는데, 이번 영화도 가을이의 시점에서 소리가 없을 때 위험을 감지하는 속도가 느릴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다시금 알게 되었다.
그리고 용준이 가을과 여름과 놀러가는 장면에서 굳이 클럽을 데리고 가는 장면도 인상적이었다. 소리를 못 듣는데, 왜 클럽을 간 건가 생각했었다. 소리를 물리적으로 들을 순 없어도 소리의 진동을 느낄 순 있구나 라고 생각하니 굳이 농인들이라고 음악이 있는 곳을 기피하는 것도 과도한 배려일까 라는 생각이 스치기도 했다.
하지만 소리적인 측면에서는 다양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것과는 별개로 시각적으로 참 예쁜 영화다. 우리 나라의 여름의 싱그러움을 잘 표현했고, 모든 것이 푸릇푸릇한 계절이지만 더위를 견뎌내야 하는 여름처럼 청춘을 견뎌내고 있는 인물들의 모습이 잘 담기어 그들을 담아내기에 적절한 계절이었다고 생각한다. 뭐, 그렇게 대단히 예쁜 옷들을 걸치고 있지도 않은데, 그저 평범한 일상을 담아내었는데도 모든 인물들이 밝게 웃고 있으니 그걸 보는 재미도 분명 있었던 것 같다. 연출자의 입장에서 뭐가 제일 중요했을까 고민해본다면 빛이 참 중요했겠다고 생각했다. 인물들의 초롱초롱한 눈빛도 일종의 빛이고, 그들을 조명하는 밝은 햇빛, 나무의 파란 빛, 물의 투명한 빛 등을 정말 적절히 잘 사용한 영화가 아닌가 생각한다. 이와이 슌지 감독의 일본 영화들이 빛을 잘 사용한다는 인상을 받을 때가 많은데, 이 영화도 혹시 빛의 사용에 있어 그런 영화들이 레퍼런스로 참고가 되었던 걸까 싶었다.
3. 총평
이 영화의 장점은 편안함이다. 하지만 단점도 편안함일 수 있다. 인물 간의 관계도 분명 갈등이 존재하지만 그렇게 긴장감 있지도 않고, 영화라는 특성상 언젠가 풀리겠지 싶은 수준이기 때문에 혹자는 지루하다, 너무 뻔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로맨스 영화를 이끌어가는 것에 있어 내용은 30% 정도 중요하고 배우의 연기와 얼굴합이 70% 정도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 영화는 배우들의 청량한 조합이 참 잘 어울려 뻔한 느낌도 어느 정도 상쇄된 것 같다. 홍경 배우의 필모그래피에 의외로 말랑말랑한 장르가 없어서 참 안타까웠었는데, 비로소 청춘을 표현하는 배우 중 한 명으로 생각될 것 같아서 조용히 응원하는 사람으로서 뿌듯했고, 노윤서 배우도 뭐 말할 것도 없다. 그리고 의외로 크게 기대를 안 했는데, 김민주 배우도 참 수수하게 나오니 가수였을 시절보다 더 예쁘다고 느꼈다. 뭔가 여름이보다 덜 종종거리고, 쿨하고 시크한 가을이 캐릭터에 참 잘 어울리는 마스크였달까. 오히려 캐릭터의 멋있음은 여름보다는 가을이 쪽에 한 표를 던진다. 그리고 용준이 친구로 나오는 배우도 자주 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만큼 능청스러운 연기가 참 보기 좋았다. 약간 그 옛날에 건축학개론에 나오던 조정석 배우를 봤을 때의 신선한 느낌이었다. 물론, 건축학개론처럼 살짝 도라이같은 대사는 없었지만 그 신선한, 새로운 배우를 봤다는 느낌이었다는 말이다.
한참 전에 봐놓고 이제 리뷰하는 거긴 하지만...
아직 상영하니 관심있으신 분들은 보러 가세요.
이상 총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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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로 개수작을 부리는 감독이 있다?
나는 가끔 글을 쓸 때 힘이 들어간다. 그러니까 어떤 주제로 쓸 때 이건 나만 할 수 있는 이야기여야만 한다. 정성일 씨가 와도 절대 쓸 수 없는 그런 것을 추구한다. 근데 막상 까 보면 타인의 것들과 별 다를 것 없다. 예를 들어 <밤의 해변에서 혼자>를 리뷰한 글을 보자. 나는 이 영화를 '아무것도 없는 영화'라고 썼다. 정말 솔직히 말해보자면 나는 이 문장을 쓰고 '와 진짜 전다. 내가 천재긴 해. 이거 아무도 생각 못할 듯. '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사실 확인하고 싶었다. 다른 사람이 쓴 거 읽고 싶었는데 무서워서 안 했다. 이미 알고 있거든. 영화 보고 느끼는 감정이야 사람들 간에 별 다를 바 없고, 홍상수 감독도 이걸 의도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내 글은 별로 특별한 것 없을 거라는 그런 불안감 때문에 타인의 리뷰들을 읽지 않았다. 내 글이 특별하다고 생각한 이유는 오로지 내 욕심 때문이었다. 이렇게 실제로는 그럴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나 스스로가 특별해지고 싶은 순간을 나는 찌질함이라 부른다. 이 감정은 멀지 않은 곳에서 또 찾을 수 있다.
난 어디에서 자기 계발서를 대차게 깐 적 있다. 근데 사실 내가 영화를 보고 쓰는 글은 크게 보면 자기 계발서와 다를 바가 없다. 사람이라 느끼는 외로움이나 자아 찾기 뭐 그런 것들을 주제로 삼기 때문이다. 이런 장르의 책들 중 몇몇 권은 이런 것들을 토픽으로 삼지 않는가? 또 나는 1달 전에 카네기의 인간관계론을 읽었다. 일상 속 대화에서 소통능력이 구린 나는 이 책을 읽고 새로운 사람이 된 것처럼 굴었다. 인스타그램에 스토리를 올리면서 양심에 심각하게 찔린 나다. 그래도 나는 이 책이 좋다고 주변인에게 칭찬했다. 이렇게 나에게 합리화의 이유를 붙인다는 걸 뻔히 아는 것 역시 찌질함이라 부른다. 가끔 내 머릿속에서 내가 해온 허튼짓들에 대해 생각한다. 그럼 머릿속에 딱 들어오는 생각이 있다. 나에게서 이 두 가지의 찌질함을 빼놓으면 시체라는 것이다.
<옥희의 영화>는 찌질함에 관한 영화다. 영화는 네 개의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주문을 외울 날>, <키스왕>, <폭설 후>, <옥희의 영화>다. 이 네 편에 세명의 주연인 정유미, 이선균, 문성근 배우가 나온다. 지금이야 정유미-이선균 배우가 인기도 제법 있고 우리에게 친근하지만 이때의 이들은 풋풋한 모습이다. 풋풋함. 감독 홍상수는 이 풋풋함이라는 감정 머리 위에서 관객을 갖고 논다. 네 편의 단편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20대거나 대학 교수같이 사회적 지위가 있는 사람이지만 행동하는 건 초등학생의 풋풋함이 느껴진다. <주문을 외울 날>을 보자. 주인공 영화감독 진구는 송 교수에게 '당신 소문이 안 좋은 걸 아느냐?'라고 묻는다. 근데 곧이어 있을 GV에 누가 나타나서 '당신이 내 친구의 인생을 망쳤다. 어떻게 생각하냐'라고 질문을 듣는다. 전자 상황에서 진구는 '혹시나 해서 여쭤본 겁니다'라고 합리화를 하지만 후자의 경우에선 '이 상황에서 이 질문이 맞냐?'라고 역정을 낸다. 자기 자신을 위해 합리화를 한 것이다. 두 번째. 키스왕이다. 친구 옥희를 좋아하는 진구. 진구는 연애를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숙맥이지만 아무튼 옥희가 좋다. 옥희는 이런 진구의 마음을 전해 듣는다. 송 교수와 진구 사이에서 고민하는 옥희. 친구에게 송 교수와 함께 있을 때 즐겁다고 말해 이쪽을 택할 것으로 보였지만 결국 진구와 함께한다. 엔딩부에 둘이 함께 있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때 옥희가 진구에게 말하는 대사가 압권이다. '나는 네가 착해서 좋아'라는 말에 '착할게'라고 답한다. 아무튼 나는 너를 위해 착해질 것이라고 답하는 것이다. 이 쪽도 자기 스스로를 위해 합리화를 했다. 세 번째. 폭설 후는 굉장히 짧다. 송 교수는 누구보다 수업에 진심인 것으로 보이지만 막상 학생이 안 오니 우웨엑 토와 함께 애정을 뱉어낸다. 이 단편에도 스스로를 위한 합리화가 이뤄진다. 네 번째. 이 영화의 제목이 된 <옥희의 영화>다. 주인공 옥희는 젊은 남자와 산을 오르락내리락하며 나이 든 남자와의 추억을 떠올린다. 하지만 옥희는 나이 든 남자를 고르지 않았다. 산을 왔다 갔다 하는 거 빼곤 별거 없었던 추억이지만 옥희는 함께 했던 시간을 굉장히 특별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렇지만 우리 관객이 보기엔 그냥 진구와 송 교수 이상도 이하도 아닌걸. 떠나가는 추억을 회상하며 영화는 끝이 난다. 옥희는 스스로에게 특별했으면 하는 순간을 작품으로 만들었다. 이렇게 영화는 4편의 이야기를 연달아 붙이며 인간이라면 있을법한 찌질함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것도 타 감독들이 하지 않았던 방법으로 말이다.
나는 이 찌질함과 합리화는 베스트 프렌드라고 생각한다. 남은 이해하지 못해도 나 자신은 이해할 수 있는. 그런 '내로남불'이 찌질함이라는 것의 본원이겠지. 첫 번째 <주문을 외울 날>은 이 자기모순에 대한 이야기다. 소문은 근본적으로 내가 보지 않은 것에 대한 이야기다. 누구나 자기의 소문에 관해 들을땐 이게 뭔 소린가? 싶다. 자기는 자기가 제일 잘 알거든. 근데 또 막상 믿기는 쉬워서 타인을 어렵지 않게 의심한다. 나는 사람이 이런 행동을 보이는 이유는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살 때 특정한 가치관 아래에 모든 것을 결정하며 사나? 아닐 것이다. 내가 직관적으로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살고 거기에 우리 스스로는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면서 산다. 나이가 든다는 건 이런 자기모순에 익숙해지는 것이겠지. 이런 모순은 <키스왕>에서도 나타난다. 어쩔 줄 몰라 옥희의 집 앞에서 소주를 마시는 진구. 이 앞에서 했던 말이 재밌다. '나는 너랑 대화가 잘 통해서 좋아'와 '착할게' 이 두 마디다. 이 말과 진구의 행동은 본질적으로 모순적이라고 생각한다. 대화가 잘 통하는 거면 성격이 잘 맞는 거고. 착할 게는 안 맞는 부분이 있어도 맞춰주겠다는 것 아닌가? 이 말을 들으면 진구는 옥희를 배려해주는 것으로 보인다. 근데 진구는 타인을 존중하고 그런 거 없다. 숨기고 그럴 것도 없이 옥희와 입을 맞춘다. 연애경험이 없다는 점에서 진구의 이런 화법과 행동은 개연성을 갖긴 하지만 그냥 주인공은 무작정 옥희랑 사귀고 싶은 거다. 그래서 앞 뒤가 다른 행동을 일단 저지르고 본다. '내가 이 친구를 어떻게 대해야지'같은 체계가 아니라 생각나는 대로 움직이는 것이다. 이렇게 첫 번째와 두 번째 이야기는 확실히 대비가 된다. 그러니까 소문의 속성과 짝사랑-연애로 이뤄지는 과정을 대치시킨 셈이다. 난 이 지점이 분명한 의도라고 생각한다. 모순을 느끼기 쉬운 소재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원래 앞 뒤 다르다. 신나게 전 애인 험담하다 그들의 전화에 혹하는 게 우리 똑은 우리 친구들의 이야기 아닌가? 또 남을 욕할 때의 우리는 스스로에게 관대하다. 남 험담하는 사람이라고 욕먹는 주위의 이야기는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다. 이 두 가지는 우리가 타인과 갈등하거나 자기혐오의 빠질 때 주요 소재가 되기도 한다. 또 우리가 살다 보면 이 경험들 한 번씩은 해봤다. 영화는 이렇게 우리 인생에서 절대 별개가 아닌 이기심이란 감정을 일상의 에피소드로 표현해 공감을 얻는다. 즉 구로사와 기요시는 인간 내면에 대한 이야기로 <큐어>를 썼고 봉준호 감독은 어머니의 모성에 관한 작품으로 <마더>를 만들어 관객들의 등골을 서늘하게 했다면 홍상수는 인간의 이기심을 통한 코미디를 그냥 배우 세명에 4천만 원 제작비가 든 4편의 단편영화로 끝내버린 것이다. 일상 속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영화로 다가올 때 어떤 느낌인지를 500% 이해하지 않고서는 이럴 수 없다. 완전히 미쳐버린 천재성인 셈이다.
이 천재성은 세 번째, 네 번째 이야기에서 더 뒷받침된다. 진구가 묻는다. '무얼 원하고 사세요?' 송 교수가 답한다. '오늘의 내가 원하는 것과 내일의 내가 원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이것은 앞에서 내가 썼던 이야기와 공통점이 있다. (그러고 바로 다음 장면에 '학교 때려치우기 잘했다'라고 말하는 송 교수의 대사가 웃겼다.) 네 번째 이야기는 젊은 남자와 나이 든 남자에 관한 이야기다. 그냥 산 타고 왔다 갔다 하는 이야기가 끝이다. 근데 이 등산과 하산만으로도 영화라는 예술의 전부를 보여준다. 남이 보기엔 그냥 에피소드인 이야기를 우리는 끊임없이 과거의 무언가와 비교한다. 그리고 항상 무언가를 골라 다른 것과 작별한다. 이걸 겉으로 드러내 '나는 특별한 사람이야!'라고 티를 내면 찌질함이 될 수도 있다. 또, 어떤 것을 보며 '나는 그럴 수밖에 없었지'라며 자위한다. 심지어 이 영화를 보고 공감을 얻는 과정도 이와 비슷하다. 주인공의 행동이 나와 닮았기 때문에 나답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 영화에서 그 인물이 그렇게 행동하는 건 그 상황이니까 하는 것이다. 즉 다른 외적 요인이 작용하지 않는다는 뜻이고 우리라고 해서 꼭 그렇게 행동하리라는 법은 없다. 그런데 우리는 찌질해서인지 그 영화의 장면과 과거의 에피소드 하나를 같다고 여기거나 '내가 저거보다 낫지'라며 조소하기도 한다. 나 자신을 위한 합리화를 해 버리는 것이다. 또 내 어떤 것과 현재의 어떤 것을 비교해서 우선순위를 정한다. 비교는 아무 의미가 없고 그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다는 걸 아주 잘 알고 있는데도 말이다. 이는 네 번째 영화의 등산과 하산을 관통하는 이야기이기도 하고, 왜 홍상수의 영화 내지는 영화라는 장르를 보며 공감하는가?라는 질문과도 닿아있다. 제목이 <옥희의 '영화'>인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세 가지 질문의 답은 굉장히 쉽다. 우리는 대체로 못나고 찌질하기 때문이다. 완벽한 인간은 없고 모두에게 소심한 구석 하나쯤은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우리의 모습을 숨기고 싶어 하거나 남들과 다른 특별함이라고 여긴다. 잠깐, 이거 우리 모르나? 그럼에도 우리는 타인에게 엄격하고 상처를 호소하며 나는 착한 사람이라고 최면을 건다. 그리고 영화를 보면서 공감을 얻는다. 그래. 그땐 그럴 수밖에 없었지. 그렇게 스스로와 합리화를 한 채로 무언가와 사랑에 빠진다. 그리고 또 영화를 본다.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를 비교하기 시작한다. 예전의 것들을 떠나보낸다. 무한 반복이다. 우리는 이 지루하고 귀찮은 일상 속에 산다. 내가 찌질하지 않다는 변명과 함께 말이다. 감독 홍상수는 이렇게 모순적인 우리의 모습을 포착해 또 네 개의 단편영화로 접근한다. '너 이런 거 내가 다 알아!'라는 말과 함께 관객의 마음을 얻는다. 하나의 장편이 아닌 네 가지의 단편을 통해 전체로서의 의미는 버리고 순간순간 느껴지는 공감을 영화로 만들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자면 이 영화는 개수작 같은 영화다. 사실 까고 보면 되게 별거 없는데 그저 이성을 꼬시기 위해 사용하는 개수작 화법인 셈이다. 영화 전면에 주제의식은 사실 별거 없고 느끼는 감정만을 따르라는 대사가 나온다. 난 그것마저도 개수작이라고 생각한다. '나 너희들 마음 다 알아. 왜 영화를 좋아하는지도 안다고. 그러니까 내 영화에 의미 같은 거 찾지 마. 이건 그런 식으로 해석하는 영화가 아니니까. 그냥 니들 이야긴 거 아니까 너희들 마음은 이미 내 거야.' 뭐 이런 식의 개수작인 셈이다. 우리 대부분의 영화 아니 문학작품은 메시지란 게 있지 않은가? 근데 홍상수는 감독이라는 캐릭터를 통해 있어 보이는 말로 주류와는 다른 본인의 세계를 확고히 한다. 내가 만든 세계를 관객에게 주입시켜 '와 이 사람 전다'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건, 우리는 이 논리에 설득당하는 바보들이다. 조명도 별로고 화장도 안되어있고 관통하는 서사도 심심하며 예산도 작은 그의 영화를 보는 우리는 그에게 꼬인 물고기들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이 영화를 볼 필요가 없다. 이기적인 우리는 현재의 나와 과거의 무엇을 비교하지 않으면 온 몸이 쑤신다. 홍상수는 우리에게 좋은 솔루션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지. 진짜 인정하기 싫은데 나도 그에게 설득당했다. 아마 신작을 우리 지역에서 볼 수 있다면 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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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유어 아이즈 텔>
눈을 감으면 더욱 선명해지는 얼굴,
너의 눈이 말하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