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end Choice Movie2022-11-24 16:38:50
11월 4주 최신 개봉영화
11월 4주 최신개봉영화
2022년 11월 3주 개봉영화!
올빼미 he Night Owl , 2022
영화 "올빼미"는 밤에만 앞이 보이는 맹인 침술사가 세자의 죽음을 목격한 후
진실을 밝히기 위해 벌이는 하룻밤의 사투를 그린 스릴러입니다.
조선왕가의 의문사인 소현세자의 죽음에 새로운 캐릭터를 가미하여 완성한 영화입니다.
인조실록에 "마치 약물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 같았다" 로 기록된 역사적 미스터리에서 출발하여
'맹인 침술사'라는 신선한 설정을 결합해 색다른 재미를 안길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습니다.
믿고 보는 배우 유해진과 류준열의 세번째 만남인데요
유해진은 이번 작품을 통해 연기 인생 처음으로 '왕' 역할에 도전하며
새로운 캐릭터를 탄생시켰습니다
영화에서 처음 다뤄지는'주맹증'
어디서도 본 적 없는 소재 '맹인 침술사'
충무로 베테랑부터 블루칩까지 완벽한 캐스팅 라인업으로
폭발적인 시너지 예고하는
이번 주 THIS WEEK MOVIE "올빼미"입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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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플루언서는 유명세의 주인일 수 없다
7★/10★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한 글입니다.
‘무색무취’의 여성이 우연히 SNS에서 관심을 끈 후 여기서 느낀 쾌락을 극단적으로 추구하는 과정을 그린 〈해시태그 시그네〉는 무척 인상적인 영화다. 이 영화는 SNS 관심경제 시대에 ‘관종’이 어떻게 탄생하는지를 짚는다. SNS 팔로워, 조회수, ‘좋아요’ 등의 숫자가 개인의 매력과 동일하게 여겨지는 사회에서 이들 숫자는 자연히 자존감으로 이어진다. 자존감의 사전 정의가 ‘스스로 품위를 지키고 자기를 존중하는 마음’이라는 점을 상기하면 기이한 일이지만, 어쨌든 우리는 남들의 인정에서 스스로를 존중하는 마음을 길어올 수밖에 없는 사회를 살고 있다. 그러나 매력 자본을 갖지 못한 사람은 이 경쟁에서 뒤처지기 쉽다. 관종은 바로 여기서 등장한다. 그의 자극적인 행위가 매력 자본의 공백을 메우는 것이다.
〈해시태그 시그네〉에서 관종 탄생의 일그러진 메커니즘을 보여준 크리스토퍼 보글리 감독이 〈드림 시나리오〉로 돌아왔다. 영화는 이번에도 우리 시대에 ‘유명세’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시니컬하게 질문한다. 폴은 따분한 남자다. 그뿐 아니라 소심하고 평범한 남자다. 늘 우유부단하고 의기소침한 목소리와 말투다. 눈을 부릅뜨고 찾아봐도 매력을 발견하기가 영 쉽지 않다. 그런 그가 하루아침에 화제의 중심에 선다. 동시다발적으로, 불특정 다수의 꿈속에 폴이 나타났다는 증언이 잇따른 것이다. 인기 없는 진화생물학 교수인 그의 강의실에 학생들이 가득 찬다. 인터뷰 요청이 쇄도한다. 늘 자신에게 시큰둥하던 두 딸도 친구들에게 아빠 이야기를 하고 다니고 아내도 남편의 유명세를 계기로 직장에서 원하던 프로젝트에 들어간다. 늘 끼고 싶어 했던 사교 모임에도 초청받는다. 유명 음료 회사의 광고 제안, 버락 오바마 딸과의 만남 등이 추진된다.
그리고 이 모든 게 또다시 하루아침에 뒤바뀐다. 폴이 사람들의 꿈속에 처음 등장했을 때 그는 방관자였다. 딸이 하늘로 붕 떠올라도, 누군가가 괴물에게 잡아먹혀도, 교통사고로 길가에 쓰러진 사람을 봤을 때도 폴은 태연자약한 표정으로 멀뚱히 그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즉, 첫 번째 꿈에서 폴은 선한 남자는 아니었을지언정 무해한 남자였다. 사람들이 기꺼이, 적당히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는 그런 인물 말이다.
폴이 모두의 꿈에 두 번째 등장했을 때, 그는 더 이상 무해한 남자가 아니었다. 해로운 남자였다. 그것도 압도적으로. 제자의 꿈에 나타나 강간하려 들고, 또 다른 학생의 꿈에서는 둔기로 그를 내리친다. 첫 번째 꿈에서 그랬듯 이번에도 증언이 쏟아진다. 다만 그 내용은 천양지차다. 사람들은 꿈속 트라우마로 폴의 얼굴을 쳐다보는 것조차 힘들어한다. 학교는 폴의 등장으로 ‘피해를 당한’ 학생들을 위한 심리상담을 제공한다. 두 딸과 아내는 학교와 직장에서 곤란을 겪는다. 폴이 기대하던 유명인과의 만남은 취소되고 취소 문화를 조롱‧비난하는 극우 방송인의 섭외만 줄 잇는다.
유명세의 본질이 이렇다. 긍정적일 때든, 부정적일 때든 폴은 단 한 번도 유명세의 주인인 적이 없었다. 그는 내내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유명세의 수동적 객체였다. 그의 유명세에 자신의 의지가 개입될 여지는 없었다. 첫 번째 꿈 이후, 폴은 이 기회에 전공 관련 책을 집필해 동료에 대한 열등감을 떨쳐내려 한다. 하지만 매니지먼트 회사는 시큰둥하다. 사람들이 그에게 원하는 것은 진화생물학 책이 아니기 때문이다. 폴은 그저 이해할 수 없는 신기하고 재밌는 일로 소비되는 일에 기꺼이 ‘동의’할 때만 유명세를 유지할 수 있다. 그가 ‘흉악범’이 된 후에도 마찬가지다. 영화의 마지막, 폴은 원하는 대로 책을 내긴 하지만 그의 책은 진지한 학문적 연구가 아닌 기괴한 사연의 남자가 쓴 책으로만 여겨진다. 폴도 마지못해 이를 수용한다. 이제는 유명세가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하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는 대중들이 그를 기억하고 소비하는 동안 그들의 요구에 맞춰 자기 욕망을 숨기고 대중이 원하는 것을 제공해야 한다는 사실을 안다. 아주 가끔, 그 사이로 자기 욕망을 약간이나마 드러내고 만족하는 것이 최선임이라는 점 또한.
〈해시태그 시그네〉가 유명세를 갈구하는 우리의 욕망을 대변한다면, 〈드림 시나리오〉는 시그네가 삶이 파괴되는 일도 불사하고 갈구한 유명세의 본질이 텅 비어 있다는 점을 들춘다. 그리고 바로 그 텅 비어 있음으로 인해 유명세는 다시금 욕망의 대상이 된다. 내가 그 빈 곳을 채울 수 있다는 착각 혹은 잠시나마 그 공간에 안착해 유명세의 달콤함을 맛보겠다는 전략적 접근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어찌 됐든 우리가 유명세의 주인일 수 없다는 점은 마찬가지다. 그저 잠식되거나 편승할 수 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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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순 | 운전대 주인이 바뀌는 과정을 차분히 쫓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견과류 식품 공장에서 일하는 '정순'(김금순)은 외롭다. 남편과는 사별했고, 딸 '유진'(윤금선아)은 결혼을 앞두고 있으니까. 그런 그녀 앞에 '영수'(조현우)가 나타난다. 공장에서 같이 일하고, 동료들과 등산도 같이 하면서 정순은 그에게 빠져든다. 정순은 주변의 시선을 걱정하며 더 나아가지 못하지만, 영수의 거듭된 구애에 마침내 마음을 연다.
그러나 행복은 잠시뿐, 정순의 일상은 이내 파괴된다. 영수가 공장 직원들 사이에서 알량한 자존심을 지키겠겠다며 정순과 찍은 은밀한 영상을 젊은 관리자 '도윤'(김최용준)에게 보여준 것. 영상이 일파만파 퍼져나가면서 정순은 충격에 빠지고 칩거한다. 유진이 엄마를 대신해 가해자들을 경찰에 신고하지만, 정순은 딸을 만류하다. 자기만의 방식으로 상처를 추스르고 새로운 내일을 열기 위해서.
세련된 범죄 드라마, <정순>
범죄, 특히 성범죄 사건을 소재로 삼는 영화는 두 가지 문제를 마주한다. 성범죄를 어떻게 묘사할지, 그리고 피해자의 서사를 어떻게 구성할지가 관건이다. 범죄의 양상과 경과를 관객에게 전달할 필요성을 인정하더라도 얼마나 구체적으로 보여줄지, 어느 정도의 자극까지 허용할 지에 대한 판단이 늘 애매하기 때문.
이에 더해 피해자에게 어떤 서사를 부여할 지도 문제다. 만약 피해자를 단순히 수동적으로 묘사한다면 범죄 피해자에 대한 고정관념과 편견을 강화한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더 나아가서는 범죄 사건과 수사 과정으로부터 쾌감과 재미를 끌어내기 위해 피해자를 플롯의 도구로만 활용한다는 지적도 나올 수 있다. 박훈정 감독의 <브이아이피>처럼 해당 이슈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작품이 등장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매혈기>와 <버티고>로 주목받은 정지혜 감독의 신작 <정순>은 흠잡을 데가 많지 않다. 주인공 정순의 성범죄 피해를 직접적으로 묘사하지 않으면서도 그 심각성을 명확히 인지시키는 연출이 인상적이기 때문. 그뿐만이 아니다. 중년 여성 피해자의 감정선을 우직하게 쫓으며 그녀의 고통뿐만 아니라 재기 과정까지도 놓치지 않는다. 즉, <정순>은 세련됐다는 표현이 과하지 않은 드라마다.
엄마, 아줌마, 노동자의 틀을 깨다
<정순>은 크게 두 파트로 나뉜다. 우선 전반부는 정순의 일상을 비춘다. 정순이라는 인물이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어떤 모습인지를 약간의 거리를 둔 채로 차분히 포착한다. 이때 정순의 일상 속에 정작 '정순'의 모습은 없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그녀는 직원, 엄마, 아줌마의 탈을 쓰고 바쁘게 살아간다. 공장에서는 다른 여직원의 화장이 너무 진한 거 아니냐고 참견하는 오지랖 많은 아줌마다. 그러면서도 친한 동료들과는 등산도 같이 가는 활달한 직원이다. 또 집에서는 평범한 엄마다. 결혼을 앞둔 딸이 결혼식 준비는 잘하고 있는지 걱정을 놓지 못한다. 그 사이에서 한 개인이자 주체로서 정순의 모습은 많지 않다.
하지만 영수가 공장에 취직하면서 상황이 바뀐다. 정순이 영수의 작업을 도와주면서 그들은 서로에게 호감을 갖고, 그들의 관계는 연인으로 발전한다. 물론 엄마로서 결혼을 앞둔 딸과 예비 사위의 반응을 걱정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이 흉을 보지 않을까 우려도 한다. 하지만 그 걱정마저 떨쳐내면서 정순은 영수 앞에서 온전한 자기 자신을 되찾는다. 그 순간 엄마, 아줌마, 노동자로서는 맛볼 수 없는 짜릿한 행복이 그녀를 감싼다.
천국에서 지옥으로
그러나 <정순>의 분위기는 일순간 전환된다. 영수 앞에서 찍은 은밀한 영상이 주변인들에게 유포된 것. 대명사로만 불리던 그녀가 '정순'을 맛본 바로 그 순간이 동의 없이 타인에게 공개되어 버렸다. 그녀가 가장 행복해야 할 순간은 이제 그녀에게 가장 큰 고통과 수치를 안긴다.
그녀의 일상으로 가득한 전반부가 평화와 행복으로 가득하다 보니 정순의 추락이 초래한 분위기 전환은 유달리 날카롭고 뼈아프다. 이는 카메라의 구도와 움직임에서부터 느껴진다. 사건 이후부터는 전반부와 달리 핸드헬드를 적극적으로 사용한다. 또 대상을 보다 가까이에서 포착하며 인물들의 호흡과 변화를 보다 역동적으로 담아낸다. 그 덕분에 혼란상도 더 자세히 느껴진다.
특히 정순의 심경 변화를 포착하는 대목이 인상적이다. 범죄 해결보다는 피해자에게 철저히 초점을 맞추면서 자칫 그저 변덕처럼 보일법한 괴로움을 절절하게 묘사한다. 정순을 온종일 누워서 집에 칩거하다가도, 경찰 수사에 협조하기도 하고, 이내 빨리 일을 끝내고 일상으로 돌아가려 한다. 그러다가도 특정한 계기로 인해 참아둔 분노와 한을 토해내기도 한다.
이러한 묘사 덕분에 <정순>은 평범해 보이면서도 세련됐다. 범죄 자체의 잔혹함을 강조하고, 선정성을 윤리적 경계선까지 끌어올리면서 범죄의 심각성을 강조하는 일반적인 화법을 피해 가기 때문. 오히려 피해자의 심경 그 자체에 집중하다 보니 관객 뇌리에 경각심이 더 강렬하게 각인되기도 한다. 애써 일상으로 돌아오던 정순이 엄마를 목놓아 오열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정순이 운전대를 잡는 방법
이에 더해 <정순>은 정순을 피해자라는 틀에 가두지 않는다. 그녀가 스스로 틀을 부수고 나오는 모습까지 놓치지 않았다. 그 과정은 고정관념을 역이용하기에 더 인상적이다. 영화는 고장에서 일하는 중년 여성이라는 설정을 살려 정순으로부터 주체성을 계속 뺏으려 한다.
하지만 정순은 그 요구에 순응하지 않는다. 기꺼이 대항한다. 이 대목에서는 김금순 배우의 열연이 특히 두드러진다. 그녀는 노래 '지나가'를 반복해서 부르는데, 노래 가사와 노래 속에 담긴 정순의 감정선 변화만 따라가도 영화 전체를 이해하는 데 무리가 없을 정도다.
정순의 변화는 다른 장면에서도 감지할 수 있다. 운전대를 잡는 사람이 달라지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중반부까지 정순은 운전을 할 줄 모른다. 영수나 유진이 운전하는 차에 전적으로 의존해서 출퇴근을 한다. 그러나 운전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그녀는 달라진다. 가해자를 피하거나 숨는 대신, 당당하게 맞서는 법을 깨우친다. 엄마, 아줌마, 공장 노동자라는 역할과 지위에 갇혀 있다가, 자기 힘으로 탈출하는 법을 익힌다.
비슷한 장면은 또 있다. 영수가 머무르는 모텔 앞에는 노숙자가 한 명 있다. 처음에 정순은 그 노숙자를 경계한다. 모텔을 드나들 때마다 그녀가 혹시 자기 얼굴을 알아보고 소문을 내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한다. 그러나 종국에는 자기 힘으로 술 한 병, 담배 한 개비도 구하지 못하는 그녀를 안쓰러워한다. 이처럼 커져가는 정순의 주체성은 다른 피해자에게 전하는 희망과 격려의 메시지처럼 보인다.
단 한 가지 옥에 티
다만 <정순>에도 옥에 티가 존재한다. 흡입력이 다소 부족하다. 독립영화임을 감안해도 관객을 휘어잡는 힘이 약하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특히 초반부에서 문제가 두드러진다. 정순의 일상을 자연스럽게 제시하는 화법은 필연적으로 관객을 휘어잡는 힘이 떨어지기 때문. 기술적인 문제도 발목을 잡는다. 특히 음향이 아쉽다. 대사와 주변 소음이, 혹은 대사끼리 겹친 나머지 극장에서도 대사가 안 들리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목도가 떨어지는 중년 여성의 일상 공간을 스크린 위에 비범하게 재구성하는 힘만큼은 확실히 남다르다. 제23회 전주국제영화제 한국경쟁 대상 수상, 제17회 로마국제영화제 2관왕인 이유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그러다 보니 늦은 개봉이 꽤 아쉽다. 영화제 출품과 수상이 대체로 작년, 재작년에 이뤄졌다 보니 화제성 면에서 손해를 볼 수밖에 없으니까.
Acceptable 무난함
담백하게 불타며 빛을 발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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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바로 여기가 지옥이야
<지옥> 시즌1은 마치 재난 영화처럼 이야기를 시작한다. 갑작스럽게 특정인들에게 지옥의 사자가 고지를 하고, 죽는 날을 지정한 뒤 그 날이 되면 지옥의 사자들이 나타나 죄인이라고 지칭된 당사자를 지옥으로 데려간다. 이러한 일들이 점점 많아지면서 사람들은 혼란에 빠지고, 공포에 질리기 시작한다. 그 혼란이 극에 달할 때쯤 종교적인 인물인 정진수(김성철)가 등장한다. 그는 새진리회의 의장으로서 사람들에게 이러한 고통을 신의 의도로 포장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화살촉이라는 지옥 추종자들이 생겨나 또 다른 혼란을 일으킨다. 그리고 그 혼란 속에서 사람들을 구하려는 소도라는 집단이 등장하며 이야기는 더 복잡해진다.
<지옥> 시즌1은 지옥 고지와 시연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태도를 그리고, 각자의 입장에서 그것을 해석하며 더 큰 혼란을 만들어 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현대 사회가 갑자기 중세 사회 속으로 돌아간 것처럼 종교가 지배하는 세상을 연상시키며, 막을 수 없는 재난에 대한 대처 방법으로 종교적인 마음을 이용해 세력을 늘려가는 새진리회가 등장한다. 시즌1이 정진수 의장의 시연과 고지를 받은 갓난아이를 살리려는 현실적인 과정을 그려냈다면, 시즌2는 더욱 혼란스러워진 사회와 갈라진 집단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첫 번째 감정] 정진수의 공포
시즌2에서는 부활자의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다뤄진다. 특히 시즌1 중반에 시연을 당해 지옥으로 갔던 정진수 의장이 시즌2 초반에 부활한다. 그의 부활은 여러모로 큰 의미를 가진다. 각 집단들이 그를 이용해 자신의 힘을 강화시키는데 부활자를 이용하기 때문이다. 그가 없던 동안 새진리회는 새 의장을 뽑았지만, 그 힘을 제대로 이어받지 못했고, 그 사이에 화살촉의 세력은 더 커졌다. 소도 역시 자신들의 세력을 확장하기 위한 시도를 계속해 왔다. 정진수 의장의 부활뿐만 아니라, 시즌1에서 공개 시연을 당했던 박정자(김신록)도 부활하게 되면서, 두 부활자는 상반된 상황을 보여준다.
정진수 의장은 부활한 이후에도 불안한 상태를 지속한다. 그는 사실 지옥 고지를 받은 첫 번째 희생자였다. 어린 시절, 불우한 환경에서 고지를 받았던 그는 자신이 왜 죄인으로 지목되어야 했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아마도 그때부터 가졌던 의문과 공포가 그를 지금의 위치에 오르게 했을지도 모른다. 정진수 역시 다른 사람들처럼 아무런 죄 없이 시연을 당한 사람이다. 그는 오랜 시간 강력한 공포 속에서 살아왔고, 그 공포는 그가 부활한 이후에도 계속된다.
그를 부활한 메시아로 보는 시각도 존재하지만, 정진수는 전혀 그 위치에 갈 생각이 없다. 그는 자신의 유명세를 이용해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 싶을 뿐이고, 다른 부활자들도 동일한 경험을 하고 있는지 궁금할 뿐이다. 이번 시즌2에서 등장하는 정진수는 시즌1에서처럼 안정적인 인물이 아니다. 오히려 공포에 짓눌려 온전한 자신을 잃어버린 허약한 인물로 그려진다. 그래서 그가 엄청난 파급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파급력은 자신의 궁금증을 해소하는 데 쓰인다. 그리고 그 공포는 이야기를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끌고 간다.
[두 번째 감정] 각 집단의 혼란
부활자가 등장하면서 새진리회, 화살촉, 소도는 모두 바빠진다. 각자는 자신들이 신의 의도를 알고 있다고 주장하며, 자기 조직만이 유일하게 신의 의도를 따르는 집단이라고 주장한다. 소도는 새진리회와 화살촉과는 완전히 반대편에 서 있지만, 결국 그들도 신의 의도에 대한 자신들만의 해석을 가지고 활동한다. 시즌2에서는 또 하나의 집단이 등장하는데, 바로 정부다. 정부의 대표자로 등장하는 이수경 정무수석은 점점 혼란에 빠지는 사회를 바로잡기 위해 새진리회, 소도, 화살촉 등 각 세력을 만나며 힘의 균형을 맞추려 노력한다.
혼란스러운 현재를 바로잡기 위해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은 각 세력이 가진 힘의 균형을 맞추는 것뿐이었다. 국민은 공포 속에 살아가고, 각 세력들이 대립하면서 사회는 점점 무정부 상태로 흘러간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부의 등장은 그나마 사회가 안정될 수 있다는 희망을 준다. 하지만 이러한 정부의 모습은 현재 한국 사회의 상황과 비교해 씁쓸함을 남긴다. 현실에서 혼란을 방치하고 있는 현 정부와는 달리, <지옥> 속 정부와 관료들은 적어도 해결하려는 의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새진리회, 소도, 화살촉 내부에서도 신의 의도를 해석하는 방식은 제각기 다르다. 각 조직 내에서도 방향성에 대해 갈등이 존재하며, 내부의 혼란은 더욱 가중된다. 새진리회는 부활자 박정자를 이용해 신의 의도를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발표하려 하지만, 그 과정에서 화살촉과 소도의 방해로 인해 제대로 진행되지 못한다. 정진수 의장의 예측할 수 없는 행동과 이야기 말미에 닥쳐온 또 다른 재난은 이러한 혼란을 극대화시킨다. 흥미로운 점은 수습하려 할수록 더 많은 변수들이 등장하고, 이로 인해 내부 분열과 사회 시스템의 붕괴가 가속화된다는 것이다.
[세 번째 감정] 민혜진 변호사의 따뜻함
<지옥> 시즌2는 전반적으로 무척 어둡다. 마치 세상의 멸망을 보고 있는 것처럼, 분열과 혼란, 정치적 모략이 가득하다. 그래서 이야기를 보며 불편함을 느끼고, 절망적인 기분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중심을 잡고 있는 인물이 있다. 바로 민혜진 변호사(김현주)다. 그녀는 기본적으로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 그녀에게 신의 의도는 중요하지 않으며, 고지를 받은 사람이 죄를 지었는지도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고지는 무작위적으로 이루어지며, 죄를 짓지 않은 사람에게도 찾아온다는 점이다. 민혜진 변호사는 그 점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으며, 그로 인해 신의 의도를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민혜진 변호사는 기본적으로 따뜻한 마음과 측은지심을 지닌 인물이다. 그녀는 그 마음에 따라 본능적으로 행동하며, 일종의 모성애 같은 감정을 가지고 고지를 받은 사람들을 보호하려 한다. 시즌2에서도 이러한 모습은 반복된다. 그녀는 규모가 커진 소도라는 조직에 속해 있지만, 조직의 이익보다는 당장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돕는 것을 우선시한다. 그래서 전체 이야기를 다 보고 나면, 민혜진은 어떤 집단과도 다른 가치관을 지닌 인물임을 알 수 있다.
그녀는 이 시리즈에서 유일하게 사람 자체를 생각하는 인물이다. 시즌1에서 혼자 살아남은 아이를 키우는 과정이나, 부활자 박정자를 구출해 그녀의 아이들에게 데려다주는 과정 등을 통해, 이렇게 혼란스러운 사회 속에서도 옳은 방향으로 갈 수 있다는 희망이 느껴진다. 이는 민혜진 변호사가 가진 따뜻함의 온기 덕분일 것이다. 결국 사회를 안정시키고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동력은 차가운 이성만이 아니라, 따뜻한 감성이 동반되어야 한다. 민혜진이라는 인물은 <지옥>의 세계관에서 실낱같은 희망으로 보인다.
<지옥> 이 훌륭하게 담아낸 혼란
<지옥> 시즌2는 현재의 정치적 혼란을 확장시킨 것처럼 보인다. 각 집단들이 균형을 잡고 나아가지만, 엄청난 혼란과 재난이 닥치면 그 균형은 쉽게 흔들린다. 이 상황에서 누군가는 이 혼란을 이용해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려 하겠지만, 국민 개개인을 설득하지 못하면 그것은 공허한 권력에 불과할 것이다. 실제로 <지옥>에서도 다양한 인물들이 권력을 쥐려 하지만, 시즌2에서는 어느 누구도, 어느 집단도 사회를 안정시키거나 권력을 확립하지 못한다.
이 드라마는 매우 현실적인 재난을 다룬다. 지옥 고지와 시연 장면은 무척 인상적이고, 특히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벌어지는 혼란과 액션은 마치 실제 지옥에 온 것처럼 공포감을 자아낸다. 시즌2의 메시지는 시즌1보다 더 구체적이고 깊이 있는 내용을 다루며, 관객들에게 더욱 흥미롭게 다가온다. 이 작품은 사회 고발적 성격을 지닌 종교적 문제를 다루며, 연상호 감독은 자신만의 독창적인 세계관을 더욱 확립했다. 다작을 해온 그에게 <지옥>은 여전히 대표작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정진수 역을 맡은 김성철 배우는 시즌2부터 새롭게 이 역할을 맡았다. 시즌1의 유아인 배우와는 다른 느낌이지만, 회차가 거듭될수록 김성철만의 정진수를 설득력 있게 그려낸다. 민혜진 역의 김현주 배우는 따뜻함을 감추고 있는 이성적인 연기로 깊은 인상을 남겼다. 특히 박정자 역의 김신록 배우의 연기는 매우 인상적이며, 그녀가 보여준 절망과 고통의 감정은 드라마의 몰입도를 높였다.
<지옥> 시즌2는 사회적 혼란과 종교적 광기를 통해 우리가 마주한 현실을 날카롭게 비판한다. 다양한 집단이 각기 다른 신념으로 움직이며, 그 속에서 갈등과 분열이 심화되는 모습은 현실 세계의 복잡한 문제들과 맞닿아 있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민혜진과 같은 인물이 주는 작은 희망은 우리가 결코 놓치지 말아야 할 가치임을 일깨운다. 이 드라마는 단순히 공포를 넘어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복잡성과 인간 본연의 모습을 직시하게 만든다. 마치 지금, 바로 여기가 지옥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이 작품을 통해 관객들은 단순한 오락을 넘어서, 사회와 인간에 대한 깊은 고민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지옥> 시즌2는 단순한 드라마 이상의 가치를 지니며, 반드시 한 번쯤 볼 만한 작품이다. 혼란 속에서도 희망을 찾고자 하는 이들에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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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이재킹 | 역사와 상상 사이에서 항로를 지켜내는 뚝심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969년, 동해 상공을 비행하던 공군 파일럿 '태인'(하정우)은 비상사태를 맞이한다. 남파 간첩이 납치한 한국 민항기가 휴전선을 넘기 직전이 되자 민항기를 사격해 엔진을 멈추라는 명령이 떨어지는 것. 하지만 그는 전역한 자기 사수가 파일럿임을 확인한 후, 승무원과 승객의 안전을 우려해 상부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 결국 비행기는 그대로 북한에 억류되고, 태인은 군복을 벗는다.
2년 후 민항기 부기장이 된 태인'(하정우)은 기장 '규식'(성동일)과 함께 속초 공항에서 김포행 비행에 나선다. 승무원 '옥순'(채수빈)의 안내에 따라 승객들이 탑승한 후 이륙한 비행기. 그러나 '용대'(여진구)가 사제폭탄을 터뜨리자 기내는 아수라장이 되고, 용대는 조종실을 장악한 후 북으로 기수를 돌리라 협박한다. 폭발 충격으로 규식마저 한쪽 시력을 잃은 가운데, 태인은 비행기와 승객을 지키기 위한 사투를 시작한다.
과거의 힘을 살린 항공영화
하이재킹. 운항 중인 항공기를 불법으로 납치하는 행위. 미 연방항공청에 따르면 하이재킹은 1968년부터 1972년까지 유난히 자주 발생했다. 5년간 325건에 달할 정도. <1987>의 김경찬 작가가 각본을 맡고, 당시 조감독이었던 김성한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영화 <하이재킹>은 바로 그 시기에 발생한 '대한항공 F27기 납북 미수 사건'을 바탕으로 제작됐다.
1971년 1월, 속초공항발 김포공항행 여객기가 이륙 30분 만에 홍천 상공에서 납치범 김상태에게 납치당했고, 이강흔 기장과 전명세 조종사는 협박범의 요구대로 기수를 북쪽으로 돌렸다. 하지만 비행기는 강원도 고성 바닷가에 무사히 비상착륙했고, 승객도 전원 생존했다. 이강흔 기장이 대한민국 공군 전투기를 북한의 미그기라고 속이는 기지를 발휘하고, 전명세 조종사가 폭탄을 몸으로 덮는 희생정신을 보여준 결과였다.
<하이재킹>의 가장 큰 특징이라면 <1987> 느낌이 물씬 나는 역사적 상상력이다. 사람보다 이념이 우선시되던 시대의 그림자와 과거라서 오히려 신선한 당시 시대상을 버무려 기존 항공 영화의 한계를 피하려 했다. 과하지 않게 감정선을 살짝 '넛지(Nudge)'하는 화법도 관객을 승객 중 하나로 만드는데 탁월한 효과를 발휘했다. 그 덕분에 <하이재킹>은 난기류를 만나고도 목적지까지 비행하는 데 성공했다.
역사의 것은 역사에게, 상상의 것은 상상에게
실화 사건을 다룬 작품의 관건은 각색의 정도와 방향성이다. 상상과 왜곡은 한 끗 차이니까. 그런데 <하이재킹>은 그 어려운 일을 비교적 잘 해냈다. 역사적 사실을 부각하는 대목과 상상력을 발휘할 대목을 철저히 분리한 선택이 장르적인 측면과 스토리텔링 양쪽에서 득이 됐다.
사실 항공 영화는 상상력이 끼어들 여지가 많지 않다. 시간대가 현재에 가까워질수록 더욱 그렇다. 숱한 사고를 겪으면서 보안 규정이 나날이 철저해졌기 때문. 한재림 감독의 <비상선언>만 해도 '류진석'(임시완)이 비행기 표를 사는 첫 장면부터 기내에서 범죄를 저지를 때까지 전개가 어색하다는 평가를 피하지 못했다.
<하이재킹>은 오히려 과거로 돌아가 함정을 피했다. 항공 보안 관련 규정이 미비했던 70년대를 배경 삼아 자칫 억지스러울 상황을 납득시켰다. 선착순으로 비행기 자리를 고르거나 용대가 보안 검사를 뚫고 폭탄을 반입하는 장면은 신선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면서도 역사의 빈틈은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실제로는 없었던 민항기 격추 명령, 알려진 바 없는 범인의 범행 동기 등을 잘 짜 맞춰서 태인과 용대 사이에 진한 감정선을 불어넣었다. 그 덕분에 다큐멘터리가 될 수 있었던 이야기에서는 생동감이 느껴진다. 이는 '이한열'(강동원) 열사와 '이연희'(김태리) 사이의 가상 로맨스를 활용해 6월 민주 항쟁을 피부로 느낄 수 있게 한 <1987>의 장점과도 유사하다.
피해자 VS 피해자
그 덕분에 <하이재킹>은 단순한 항공기 납치 스릴러 이상의 이야기를 보여줄 수 있다. 전혀 접점이 없는 태인과 용대의 이야기는 대조될 때 함의가 드러나기 때문. 용대는 가해자가 된 피해자의 전형이다. 6.25 전쟁 때 북한 인민군 장교가 된 형 때문에 반공분자로 몰려서 감옥에 들어갔다 나왔다. 그 사이에 어머니까지 죽은 그는 2년 전 납북 사건 주동자가 북한에서 영웅 대우를 받는다는 소식에 착안해 하이재킹 범죄를 저질렀다.
반면에 태인은 피해자이지만 가해자는 되지 않았다. 그는 2년 전 휴전선을 넘어가는 민항기의 엔진을 쏴서 착륙시키라는 명령을 거부했다. 군에서 사수였던 파일럿과 승무원, 승객 모두가 죽을 수도 있으니까. 그 대가로 강제전역 당한 후에도 그는 군복을 벗긴 휴머니즘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전투기 사격을 피하고, 한쪽 손만으로 비상착륙을 시도하면서 2년 전과는 달리 승객도, 승무원도, 자기 부사수도 지켜냈다.
이렇게 보면 두 주인공의 공통점과 차이는 분명하다. 국가 권력의 횡포로 인해 피해자가 됐지만 전혀 다른 답을 볼 수 있으니까. 용대는 피해의식과 정부를 향한 불신에 사로잡혀 자기 인생은 물론 무고한 이들의 인생까지 파괴하려 든다. 반면에 태인은 그 불이익을 오롯이 감내하면서 자기 신념을 증명해 보인다. 북한에서 송환을 거부한 파일럿 사수의 가족을 자기 자족처럼 돌보고, 부기장으로서의 임무에 충실하면서.
그래서일까? 두 주인공이 마지막으로 대면하는 순간은 <하이재킹>에서 볼 거라 예상한 장면과는 거리가 멀다. 자기처럼 피해자로서 고통받은 이를 마주한 후에야 가해자가 된 피해자는 마침내 자기 잘못을 깨닫는다. 누구의 말도 듣지 않던 용대는 자기처럼 무고한 피해자는 없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태인의 설득에 비로소 흔들린다. 여기에 다소 잔인한 과감한 연출이 더해지면 둘의 관계는 의외로 가슴 아리게 다가온다.
압축과 절제의 미학
다른 길로 빠지지 않고 사건에만 집중하는 구성도 두 주인공의 이야기에 담긴 감흥을 극대화한다. <하이재킹>은 압축과 절제의 미학을 살려 이야기를 러닝타임 100분 안에 눌러 담고, 빠른 템포로 전개하면서 사건과 주인공 둘에게만 시선이 쏠리게 한다.
사실 <하이재킹>의 구성은 자칫 익숙한 신파로 빠지기 십상이었다. 갑작스레 납치된 승객 하나하나의 사연을 풀어놓으면 눈물을 짜내는 게 어렵지도 않았다. 신혼여행 가는 부부, 아픈 딸 병간호를 위해 서울로 올라가는 할머니 등. 하지만 영화는 승객에게 그다지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대신 필요한 타이밍마다 장면 하나하나를 알뜰하게 활용하면서 분위기를 고조한다.
감정을 강요하는 대신, 관객이 그들에게 공감할 수 있는 상황만 조성하고 뒤로 물러나는 셈이다. 사법고시 붙은 아들과 어머니가 대표적이다. 검사가 된 아들이 자랑스러운 어머니와 수화 쓰는 어머니를 창피해하는 아들. 납북을 대비해 신분증을 파괴해야 상황에서 아들은 차마 검사 신분증을 버리지 못한다. 그러자 어머니는 오히려 신분증을 찢으려 하고, 잘 찢어지지 않자 아예 삼켜 버린다.
부메랑이 된 상상력
다만 이야기를 풍성하게 만든 상상력은 부메랑이 되기도 한다. 특히 과욕처럼 보이는 볼거리가 적지 않다. 물론 인상적인 대목도 있다. 용대가 폭탄을 터뜨려 조종실을 장악하는 장면은 마치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2> 속 뉴욕 타임스 스퀘어 장면을 연상시키는 슬로 모션 효과로 시선을 사로잡는다. 비록 같은 퀄리티는 아닐지언정 한계를 극복하려는 대담한 시도 자체는 놀랍다.
하지만 비행 시퀀스로 서스펜스를 쌓는 장면은 다소 무리수처럼 보이는 게 사실이다. 기체에 구멍이 나서 비행기가 급낙하 할 때나, 한국 공군이 민항기를 사격하고 이를 피하는 장면이나, 여객기가 배면비행을 보여주는 것까지. 영화적으로는 긴장감을 극대화하지만, 잠깐이라도 현실성을 따지는 순간에는 맥이 뚝 끊길 수 있는 상황이다. 마치 <비상선언>에서 항공자위대가 민항기에 위협사격을 가하는 순간처럼.
또 비행기 내부 전개에서는 한계가 명확하다. 승객들이 용대를 덮치고, 부기장이 휴전선을 넘은 척 용대를 속이고, 어떻게든 난기류를 이용해 보려는 식으로 여러 사건을 만들어내고자 애쓴다. 하지만 결국 큰 틀에서는 겁에 질린 승객과 난폭한 납치범이라는 구도를 벗어날 변곡점이나 제3의 인물을 만들지는 못한다. 그러다 보니 중반부는 같은 장면이 반복되어서 비교적 지루할 수 있다.
배우들의 퍼포먼스도 기대에는 미치지 못한다. 그나마 하정우와 성동일만이 이름값을 해냈다. 배우만의 문제는 아니다. 그보다는 극본의 한계가 드러난 지점에 가깝다. 여진구가 맡은 용대의 경우 태인과 대조되는 사연만 돋보일 뿐, 악역으로서의 카리스마나 매력은 크게 느껴지지 않는다. 채수빈이 연기한 옥순은 단순히 시나리오의 도구에 불과하다. 없어도 이야기 전개에 문제가 없을 정도다.
이에 더해 <하이재킹>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기술적인 아쉬움도 크다. 대사가 잘 안 들리는 한국 영화의 고질병을 피하지 못했다. 특히 비행기 외부 소음과 대사가 섞이거나 파일럿끼리 무전을 할 때는 OTT 자막 기능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국내 배급사가 아닌 컬럼비아 픽처스가 직접 배급하는 작품인데도 고쳐지지 않은 문제라 더욱 안타깝다.
Acceptable 무난함
실화에 상상을 더해 어찌어찌 목적지에는 착륙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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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느리지만 특별한 궤적을 그리는 곤돌라
곤돌라 (Gondola, 2025)
느리지만 특별한 궤적을 그리는 곤돌라
개봉일 : 2025.04.23.
관람등급 : 12세 이상 관람가
장르 : 멜로/로맨스
러닝타임 : 82분
감독 : 바이트 헬머
출연 : 니노 소셀리아, 마틸드 이르만
조지아의 깊은 산맥, 곤돌라 두 대가 푸릇한 산맥 위를 천천히 가로지른다. 세월을 그대로 품은 거대한 바퀴가 일을 시작하면 케이블에 매달린 곤돌라가 천천히 움직인다. 곤돌라는 일정한 속도와 궤적을 유지하며 시작점과 정상을 오간다. 올라갔다 내려갔다, 다시 올라갔다 내려갔다. 안정적이고 느긋한 움직임이다.
영화의 주인공인 젊은 여성 ‘이바’는 오랜만에 고향으로 돌아와 이 느릿한 곤돌라에 몸을 싣는다. 그는 곤돌라 승무원이 되어 유일한 동료이자 사수인 ‘니노’와 함께 곤돌라를 운행한다. 두 대의 곤돌라와 두 명의 승무원. 탑승객은 몇 되지 않는 산골 마을 사람들이 전부다.
누군가 전원을 켜면 곤돌라는 돌아간다. 케이블이 있고 전원이 켜진 이상 곤돌라는 계속해서 같은 움직임을 반복해야 한다. 곤돌라와 우리의 삶은 닮아있다. 시작된 이상 마음대로 바꿀 수도 멈출 수도 없고, 멀리서 보면 매일 비슷해 보인다는 점에서 말이다.
실제로 영화 속 곤돌라의 움직임과 그 위에 올라탄 승무원들의 일상은 매일 비슷해 보인다. 하지만 바이트 헬머 감독은 이 지루한 반복 위에 익살스러운 상상력을 얹어 특별한 궤적을 만들어낸다. 곤돌라가 왕복 운동을 마칠 때마다 새로운 추억이 그려지고 그것은 주인공 니노와 이바의 마음을 단단히 채우는 나이테가 된다.
<곤돌라>는 모든 게 풍부한 이 시대에 보기 힘든 영화다. 이 영화는 인물들이 대사를 단 한마디도 하지 않는 ‘무성영화’고 그렇기에 처음부터 끝까지 집중해 보기 어려운 영화이기도 하다. 누구도 속시원히 목소리를 내지 않는 스크린을 보며 속이 끓거나 또는 지루하다 싶은 순간이 올 수도 있다. 하지만 잠시 힘을 빼고 기다리다 보면 어느 순간, 그 답답함이 전복되는 즐거움과 더불어 충만한 행복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 아래 내용부터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 ‘곤돌라’는 양면적인 의미를 갖는다. 곤돌라는 마을 사람들의 유일한 대중교통이자 첫 경험과 죽음까지- 다양한 삶의 순간을 담는 특별한 그릇이 되기도 하고 어느 순간엔 ‘부당함을 견디는 수동적인 삶’이라는 부정적 의미를 갖기도 한다.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 ‘니노’는 권태로운 일상과 사장의 몰지각한 행동, 말도 안 되는 임금에 지쳐있는 인물이다. 그는 하늘로의 행복한 탈출을 꿈꾸며 항공사에 지원서를 넣는데 그때, 니노의 권태를 깨는 인물 이바가 등장한다. 차후 니노는 항공사로부터 답신을 받지만 끝내 하늘로 날아가는 것 대신 곤돌라에 남는 것을 선택한다.
니노가 더 이상 하늘로의 탈출을 꿈꾸지 않게 된 이유는 반복되는 삶 속에서도 행복을 찾는 법을 알았기 때문이다. 영화의 초반부에서 니노와 이바는 사장이 지시한 곤돌라 승무원의 역할(손님을 태우고 돈을 받고 곤돌라를 운행하는 것)만을 수행한다. 하지만 뒤로 갈수록 두 사람은 곤돌라의 문을 열고 연주하기, 곤돌라 꾸미기 등을 통해 매일 다른 하루를 만들어간다.
비행기, 버스, 배 등 다양한 모습으로 변화하는 곤돌라의 겉모습과 누군가 정상에 도착할 때마다 모습을 바꾸는 체스판은 두 사람의 하루가 ‘단순한 반복’이 아닌 ‘작은 변화들’로 채워지고 있음을 상기시키고, 두 사람은 곤돌라에 다양한 삶의 순간들을 담으며 권태를 극복해간다.
니노와 이바는 곤돌라 위에서도 삶의 순간들을 즐기려 노력한다. 하지만 그들의 노력을 방해하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부당함으로 똘똘 뭉친 인물. 그들의 사장이다. <곤돌라>는 두 종류의 탈출을 그린다. 앞서 언급한 권태로부터의 탈출, 두 번째는 반복되는 부당함으로부터의 탈출이다.
곤돌라 사장은 말 그대로 ‘나쁜 놈’이다. 여성 직원의 탈의 장면을 훔쳐보려 하는 건 기본이고 임금도 제대로 지불하지 않으며 지위를 이용해 애정과 관심을 갈구한다. 그리고 정당한 이유 없이 휠체어를 탄 남성을 차별하고 계단 아래로 밀어버린다.
니노는 얌전히 케이블을 따라 도는 곤돌라처럼 이 부당한 인물의 지시에 따라 매일 같은 하루를 반복해왔다. 하지만 이바가 등장하고 그와 상호 작용하며 천천히 사장이 정해둔 선을 벗어난다. 니노는 이바와 함께 곤돌라의 문을 열고 그다음엔 곤돌라를 멈추고 이후엔 곤돌라의 지붕까지 올라탄다. 그리고 마지막엔 함께 곤돌라를 탈출해 허공이 아닌 땅을 밟으며 당당히 걸어간다.
극 중엔 니노가 사장이 건넨 꽃다발을 곤돌라 밖으로 버리고 그걸 본 사장이 니노와 이바의 체스판을 엎어버리는 장면이 있다. 이때 체스판이 난간 쪽으로 엎어지고 받침으로 쓰이던 나무 박스만 남게 되는데 그 위에 검은색, 흰색 체스 말이 하나씩 남아있는 걸 볼 수 있다. 이는 사장이, 부당한 사회가 아무리 큰 충격을 준다 해도 니노와 이바는 끝까지 함께 살아남을 것임을 의미하는 장면이라 할 수 있겠다.
니노와 이바는 곤돌라를 운행하며 식료품을 배달해 주거나 장례식을 함께하는 등 주민들과 다정하고 건강한 공동체를 형성한다. 두 사람은 이후 곤돌라가 추락할 때, 앞서 식료품 배달을 위해 깔아 놨던 짚에 안착하며 목숨을 건진다. 반대로 사장은 그 누구와도 제대로 된 관계를 형성하지 않았고 마지막엔 이성을 잃고 홀로 자멸한다.
‘다정한 이들은 아름다운 결말을, 욕심쟁이는 최악의 결말을 맞이한다’ 케이블이 끊어짐과 동시에 경로를 벗어난 곤돌라는 이러한 올바른 엔딩을 향해 마음껏 내달린다. 그리고 곤돌라의 충돌은 큰 통쾌함과 대리만족을 선사한다.
현실에선 여기저기 이어진 선 때문에 ‘인과응보’ 엔딩을 보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모두 함께 탈출을 꿈꾼다면 언젠가는 이 부당한 선들이 모두 곤돌라 케이블처럼 뚝- 끊어지는 날이 오지 않을까. 나는 그런 희망을 가져보고 싶다.
* 본 리뷰는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서 시사회 참석 후 작성하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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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들의 천국은
자유와 번영의 나라가 반듯하게 서 있는 곳. 이곳은 불과 몇 백 년 전까지 황량한 땅이었다. 신앙의 자유를 찾아온 이들 바로 뒤에는 경제적 자유를 찾아온 이들이 있었다. 미국은 그렇게 태어났다. 다른 모든 건국처럼 이 건국에도 명과 암이 있었다.
자유와 금을 향한 거침없는 행보는 명암 모두 강렬했다. 역사책뿐 아니라 영화사에도 깊은 흔적을 남겼다. 서부의 휑한 땅에 있는 마을, 주로 보안관으로 묘사되는 총잡이 히어로, 문제를 일으키는 무법자, 풀이 굴러가는 벌판에서의 결투,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다시 여유롭게 휘파람을 불거나 술잔을 들이키거나 석양 너머로 떠나는 히어로…
역사는 흘러가고 영화도 그렇다. 카우보이나 보안관이 총을 쥐고 나서는 서부극은 이미 클리셰가 되다 못해 비틀고 뒤집는 것조차 유형화되었다. 서부극에서 새로운 것이 더 나올 수 있을까 싶지만, 서부극의 영향은 여전히 어딘가에서 점점이, 새로이 흐르고 있다. 서부극의 장르적 재미를 영화사에서 제할 수는 없지만, 서부 개척시대 자체에 대해서는 생각이 많아지는 이들의 눈에는 반가운 흐름이다. <노매드랜드>나 <미나리>에서 서부극의 냄새를 (기존 서부극에서라면 절대 등장하지 못했을 이들의 얼굴이기에 더욱) 신선하게 맡을 수 있다. 그리고 여기, 서부극이라는 장르에 부드러운 우유를 붓는 <퍼스트 카우>를 만난다.
영화는 서부 개척시대를 정면으로 마주본다. 하지만 여기에 낭만의 색깔은 한 겹 사라져 있다. 서부 개척시대는 황금과 총으로 거침없이 나아간 이들만 존재한 시대가 아니다. 광야에 가까운 땅을 밟는 이들의 신발 밑창이 진흙탕뿐 아니라 어떤 이들의 삶까지 짓밟는 시대였다. 기존 서부극에서는 진흙탕보다 크지 않은 존재감으로 그려지던 이들의 삶.
<퍼스트 카우>의 두 주인공 쿠키와 킹 루도 어쩌면 그런 존재들이다. 쿠키는 사냥꾼들과 함께 다니며 식사 담당을 맡고 있는데, 사냥에도 그들이 퍼붓는 폭력에도 익숙하지 않은 것 같다. 덫을 놓아 동물을 사냥하기보다는 숲 속을 걸으며 버섯을 딸 때 전심으로 집중한 모습이고, 그때마다 아름다운 음악이 흘러나온다. 러시아 강도들에게 쫓기던 초면의 킹 루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도와줄 만큼 따뜻한 사람이다.
킹 루는 서부극에서는 드문 황인종의 얼굴을 하고 있다. 거기에도 중국인이 사냐는 질문에 "모두가 살지", 사실상 "아무나 다 살지"에 가까운 현답을 덤덤하게 던진다. 인종적으로도 홀로인데다 쫓기는 신세지만, 기회를 보아 영민하게 움직일 줄 알고 강단 있는 성격이다.
쿠키와 킹 루는 어느 마을에서 우연히 다시 만난다. 킹 루는 생명의 은인이 된 쿠키를 자기 집으로 초대한다. 술을 나눠 마시고 묵묵히 집안일을 함께 돌보던 두 사람은 어느새 같이 지내게 된다. 그때 마을의 유지 팩터 대장은 제대로 된 티 타임을 갖겠다고 암소를 데려오고, 쿠키와 킹 루는 거기서 돈 벌 기회를 모색한다. 우유가 없는 마을에서 유일하게 우유를 넣은 케이크라면 떼돈을 벌 수 있겠지. 두 사람은 밤에 몰래 우유를 짜 와서 반죽에 넣고 튀겨 튀김빵 같은 케이크를 만들어 판다. 꼬리가 길어져도 밟히지 않을 수 있을까?
의기투합한 두 사람의 이야기는 얼핏 야심차 보인다. 그러나 백인 남성들이 총 들고 싸우던 배경에서, 케이크를 만들어 파는 비주류 인종의 두 사람이니, (영화에 직접 드러나지는 않지만, 쿠키의 성은 '피고위츠'로 감독은 인터뷰에서 쿠키가 유대인임을 밝혔다.) 사실 그렇게 대단히 야심찬 이야기도 아니다. 게다가 이야기는 잔잔한 우정의 빛깔을 하고 풍광에 스며든다.
“새에게는 둥지, 거미에게는 거미줄, 인간에게는 우정”이라는, 영화 시작 시 나온 윌리엄 블레이크의 구절은 이들의 행동 곳곳에서 묻어난다. 인간에게는 우정이야말로 집이 되어준다는 포근한 구절은 쿠키와 킹 루의 관계뿐 아니라, 쿠키와 젖소 사이에도 존재한다. 사람에게 말을 걸듯 소에게도 다정하게 안부를 묻고 감정을 전하는 쿠키의 다정한 눈은 소의 그것과 닮아 있다.
게다가 영화 중간중간 비춰지는 '인디언' 원주민들의 모습은 착취나 왜곡 없이 잔잔하기만 하다. 말간 눈으로 카메라를 바라보는 어린아이부터 덩치 큰 팩터 대장의 집사까지, 다양한 인물들이 '존재한다'. 이야기 진행을 위한 도구가 아닌, 그 땅의 거주자로.
“런던의 맛”과 “파리의 유행”에 곁눈질하며 몸만 여기 있는 ‘나으리’들의 모습과 대비된다. 이들이 사람을 보는 시선은 딱 두 가지다. 상위의 사람이라면 정치의 상대고, 하위의 사람이라면 그저 당연히 착취할 수 있는 노동력이다. 모두 제 배를 불리기 위한 수단으로만 바라보는 것이다.
돈을 추구하는 것은 킹 루나 쿠키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타인의 자리까지 빼앗으며 돈을 추구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나으리’들은 총과 칼로 황야를 “개척”하고 그 자리에 당연하다는 듯이 군림한다. 팩터 대장의 집이라는 작은 공간에서도 이들이 상위를 차지하고 앉은 계층도가 층층 드러난다.
소를 대하는 태도도 마찬가지다. 런던에서처럼 티 타임을 즐기고 싶다는 생각에, 우유 맛이 그리워서 소를 들여왔지만 팩터 대장에게 그 소는 혈통의 산물이다. 무슨 혈통과 무슨 혈통을 교배한, 우수한 소. 소의 본질은 바라보고 있지 않다. 킹 루나 쿠키, 잠깐씩 등장한 인디언들처럼 자연스럽게 있는 그대로 상대를 바라보는 눈은 이들에게 없다.
무법자outlaw만이 악당은 아니다. 치안이 불안한 서부극의 세계에서 법망을 어그러뜨리고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드는 자들만이 악당은 아니다. 때로 악당은 가장 견고한 치안의 얼굴, 가장 단정한 법망의 얼굴을 하고 올 수도 있다. 이분법적으로 선악을 분류하자는 것은 아니지만, 서부극의 세계에서 배제되던 인물들이 둥실 떠올라 있는 이 영화를 보다 보면 현실의 서부세계에서 과오를 저지른 얼굴들이 떠오른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용서받지 못한 자>에서 토해냈던 마음처럼, 어디선가는 토해져야 할 마음이 여전히 있다는 것을.
이 마음을 그저 서부 백인 남성들의 것만으로 치부하고 마음 편하게 다리 뻗을 수 있을까. 자연스럽게 존재하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이 되어버린, 동물을 혈통으로 이름 붙이는 데 익숙해진 현대인으로서, 19세기 서부극에서 동시대의 무언가를 본다. 이들이 총과 칼로 이룬 “당신들의 천국” 한구석에 나도 살고 있다. 어쩌면 이 당신들의 천국은, 누군가가 바람처럼 가만히 존재하던 자리를 짓누르고 들어왔는지도 모른다. 꿈꾸던 이들이 잠자는 위에 쌓아 올린 것인지 모른다. 발끝을 내려다 본다. 내 디딘 발 아래에는 무엇이 묻혀 있는가.
*온라인 무비 매거진 씨네랩에서 시사회에 초대받아 감상하고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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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몽씨네 디즈니 특집 1편!
영화 알라딘 (Aladdin, 1992) 분석** 영상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올해도 내년도 디즈니꺼!
환몽씨네 '디즈니 라이브 액션' 특집!'알라딘'과 '라이온 킹'에 대해 재밌게 떠들어 봤어요 :)
1편에서는 알라딘 실사화를 기념해,
환몽씨네가 26년만에 애니메이션 알라딘을 이야기합니다.- 승승장구하는 디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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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aladin #영화알라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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