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er_IN2022-07-21 17:12:19
아주 매력적이지만 다소 조화롭진 못한 영화
<외계+인> 호불호 Point & TMI
1. 영화 <외계+인>의 좋았던 점
1) 대한민국스러운 판타지 SF영화
- 도술이라는 소재가 잘 들어난 아주 매력적인 영화였습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다양한 도술에 긴장감을 느끼기도 했고, 그동안 상상했던 모습들을 스크린을 통해 보니 굉장히 재밌게도 느껴졌습니다. 특히나 염정아, 조우진 배우님의 후반부 도술 액션은 이 영화에서 가장 매력적인 장면이라고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2) 다양한 배우님들의 케미스트리
- 김태리, 류준열, 김우빈 배우님 등 한국 앞으로 영화계를 끌고 가실 젊은신 배우님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는 점에서 충분히 주목해볼 만한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단순히 모이기만 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은 아니고 각 배우님들의 연기력이 아주 상당했습니다. 오글거리고 유치할 수 있는 상황이나 대사를 배우님들의 연기력이 많이 커버합니다. 배우님들의 조합 역시 말할 것이 없었고요. 이런 와중에 다소 혼자 서사를 이끌어가시는 김우빈 배우님의 연기가 개인적으로 가장 눈에 띄었습니다.
3) 화려한 액션과 CG
- 그동안 한국영화에선 보지 못 했던 독특하고 참신한 액션이 펼쳐집니다. 고려시대에 권총을 쏘며 외계인과 대결하는 모습은 그 어느 영화에서도 보지 못한 매력을 자랑하죠. 최동훈 감독님이 그동안 상상하시던 모든 영화적 상상력이 한 곳에 모인 기분이 들어 영화 감상 내내 소재와 연출의 참신함에 큰 매력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CG역시 조금 티나는 부분이 더러 있기는 했지만 요즘은 마블 영화에서도 CG가 티가 난다고 느낀 적도 많이 있어서 <외계+인>만의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2. 영화 <외계+인>의 아쉬웠던 점
1) 다소 독특한 서사 진행 구조
- 영화의 시간적 배경은 크게 두가지로 (1) 과거 _ 고려시대 (2) 현재 _ 2022년 입니다. 다만 영화의 서사 진행 구조는 현재 2022년에 일어난 사건 이후 과거 고려시대의 이야기로 흘러가죠. 서사의 진행 구조가 다소 복잡하다는 점은 아쉽습니다. 타임 워프에 익숙한 관객들도 많지만 그게 아닌 사람도 정말 많습니다. 텐트폴 영화로 무려 700만 관객이 손익분기점으로 잡은 영화치고는 서사진행 구조가 복잡하다는 점은 전 연령대의 많은 관객들이 찾기는 다소 어렵게 만들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영화의 재미 여부를 떠나서요.
2) 많은 캐릭터 + 많은 소재 = 많은 관객?
- 포스터만 봐도 알겠지만 등장하는 캐릭터가 정말 많습다. 거기에 소재 역시 '판타지'라는 장르 아래 정말 많은 장르적 요소들이 섞여 있습니다. 다만 이 모든 요소들이 조화롭진 않습니다. 이런 많은 요소 덕에 영화 타임라인이 142분이지만, 의도된 142분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모든 캐릭터의 특징은 살리고 각 장르의 특징도 살리다 보니 142분이 된 것 같은 기분이들어요. 142분이 마냥 즐겁진 않습니다.
3) 좋은 말론 '키치'한데..
- 영화의 분위기가 의도적으로 가볍고 키치합니다. 이런 분위기를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편이 아니기도 하지만 이번에 나온 영화 <토르 : 러브앤 썬더>를 보는 기분과 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무거워질법한 모든 순간에 시종일관 가벼운 대사와 BGM이 나오니 참 힘이 빠집니다. 영화 내내 이 가벼움이 유쾌함으로만 이어지진 분명 않습니다. 완벽하게 웃기지도 못했지만 그렇다고 완벽하게 영화에 빠져들게 하지도 못했어요.
3. <외계+인> TMI 알아보기
1) '썬더'의 정체는?!
- 이번 영화에서 귀여움을 담당한(?) 가드 김우빈의 도우미 '썬더'는 배우 김대명 님이 나레이션을 하셨습니다. 여오하 내내 AI스러운 목소리를 잘 표현하셨으며, 매력적인 감초역할을 해주셨죠.
2) 김해숙 배우님과 최동훈 감독님의 인연..
이번 영화에서도 어김없이 등장한 김해숙 배우님은 2012년 최동훈 감독님이 연출하신 <도둑들>에서 부터 지금까지 쭉 감독님의 작품에 지속적으로 출연하시고 있으십니다. 이번 영화에서는 나름 반전 있는 역할을 또 맡으셨죠! (못 듣는 게 아니었죠!)
총평을 짧게 하자면 썩 만족스럽진 않으나 진심으로 이 영화를 응원합니다. 언제든 새로운 시도는 처음에는 빛을 발휘하기 쉽지 않은 법이죠. 익숙하지 않을 뿐 이번 영화는 분명 특유의 매력이 분명 존재합니다. 2부가 나온다면 이 대서사가 어떻게 끝나는지 반드시 극장에서 확인할 예정이에요 :)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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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장은 어떻게 거장이 되는가?
이 시사회는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아 참석하였습니다.
천재에 대한 일화는 언제나 대중의 흥미를 불러 일으킨다. 그가 다다른 '거장'의 지위가 눈부셔서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이러한 천재들이 그 나름대로의 탁월한 방식으로 한 분야의 새 지평을 여는 순간들이 짜릿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새로움을 추구하는 그들의 남다름은 매력적이고, 그들의 열정은 경탄을 자아낸다. 대개 그들의 삶에는 혁신이 있고, 약간의 과장을 덧붙이자면, 그 삶의 흐름은 혁명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엔니오 모리꼬네는 그러한 천재의 반열에 오른 거장 중의 하나다. 그가 영화에 담아낸 음악들은 너무나도 유명해서, 그의 이름을 들어 본 일이 없더라도 그의 음악을 들어보지 못한 이는 없을 것이다.(사실, 내가 그랬다.) 거친 황야 너머로 울려퍼지는 팬플루트 소리라든가, 낯선 남미 땅에서 울려퍼지는 제레미 아이언스의 오보에 연주('넬라 판타지아'라는 음악으로 더 알려져 있다.)는 한국인들의 귀에도 너무나도 익숙한 곡들이 아닌가. <시네마 천국>, <황야의 무법자>, <피아니스트의 전설> 등 제목만 말해도 '아!'하고 탄성이 절로 나오는 영화들 역시 그의 음악을 말미암아 빛을 발했다.
이쯤되면 궁금해진다. 엔니오는 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이런 불후의 명곡들을 만들었을까? 우리는 운 좋게도 오는 7월에 나오는 영화, <엔니오: 더 마에스트로>에서 이 궁금증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는 엔니오 모리꼬네라는 거장의 삶을 추적하며 그가 음악사적으로 어떠한 의미를 가진 사람이었는지를 조명한다. 그와 동시에, 거장이 거장으로 불리기까지 그의 삶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준다.
영화 속에서 그는 천재이자 혁신가이고, 또 한편으로는 한 인생을 꿋꿋하게 살아낸 개인이기도 하다. 천재를 감히 평범하다고 일컫어도 될지 모르겠지만, 그의 삶은 분명 눈부셨지만 사람다운 구석이 있었고, 바로 그 점이 관객들을 매료시킨다. 스크린 너머에서 엔니오 모리꼬네라는 거장은 그저 거장으로 태어나 거장으로 존재한 것이 아니라 끝없는 노력과 열정, 실험 정신, 그리고 좌절을 말미암아 진정한 '마에스트로'로 거듭난다.
조용하고 소극적인 성격이었다던 그의 삶은 놀라울 정도로 도전의 연속이었다. 그는 그에게 주어진, 혹은 정해진 길만을 걷기를 거부했다. 트럼펫 연주자가 되라는 아버지의 말을 어기고 작곡가가 되었고, 현대 음악을 경시하던 기존 클래식 학계에 기꺼이 반기를 들었다.
그는 나아가 그 당시로서는 지나치게 '상업적'이며 음악의 고유한 가치를 떨어트린다는 평을 받던 영화 음악을 작곡하기 시작했다. 그가 대중으로부터 사랑을 받을수록 클래식계에서의 비난은 거세어졌지만 그는 꿋꿋이 그의 길을 걸었고, 마침내는 클래식계와 영화계 양쪽 모두에게서 인정 받는 음악가이자 영화인으로 자리매김하였다.
그는 언제든지 거만해질 수 있었고, 언제든지 그가 뿌리를 둔 고전 음악계나, 그에게 명성을 가져다 준 영화 음악을 뿌리칠 수 있었지만 그는 그렇게 하는 대신 젊은 날의 그 자신이 그러했던 것처럼 매순간을 절실하게 살았다. 그는 혁신과 변화, 새로움을 꿈꾸는 자였지만 그와 동시에 음악 선배들이 수 백년에 걸쳐 전해 온 규칙을 계승하고자 했고, 바로 이 점이 그를 한 사람의 위대한 음악가가 되게 했을 것이다.
나는 음악을 듣는 것은 좋아하지만 내로라하는 작곡가들의 이름이나 아주 단순한 화성학이니 뭐니 하는 음악 용어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다. 사실 영화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러한 분야의 전문가가 아닐지라도 그의 삶은 충분히 눈부시고, 그가 기울인 탁월하고도 성실한 노력들을 본받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영화를 보고 나서 한 동안 나는 나의 삶은 어땠고, 앞으로는 어떻게 살아야할지에 대해 생각했다. 나는 그처럼 천재가 아니고 그만큼 탁월하거나 성실한 사람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매일매일을 처음 이 일을 시작한 사람처럼 열정적으로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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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엔니오: 더 마에스트로>는 엔니오 모리꼬네의 삶 뿐만 아니라 그의 아름다운 작품들을 영화관에서 즐길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시간이 난다면 가능한 음향 시설이 좋은 시설에서 마음껏 그의 음악을 즐겨보는 것도 이 영화를 즐기는 탁월한 방법 중 하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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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임스 본드 게섯거라 시에라 식스가 나가신다
당당당당~ 다니엘 크레이그가 저벅저벅 걸어서 갑자기 총 쏘는 자세를 취한다. 카메라는 남자 주인공에게 집중된다. 작년 <007 : 노 타임 투 다이>가 기억난다. 그 전 주까지 <007 : 스카이폴>까지의 정주행을 완료하고 극장에 들어갔던 기억이 있다. 물론 영화는 지금 생각해보면 아쉬운 감이 있다. 인트로와 엔딩 빼고는 기억에 하나도 안 남는다. 엔딩도 초반 보자마자 '아 이렇게 될 듯' 싶은 게 적중해서 기억에 남는 것이다. 아. 하나 더 있다. 후반부쯤에 본드가 무릎을 꿇는데 이게 굳이 필요한가? 싶었다. 나중에 후기를 찾아보니 많은 분들이 이 부분에 대해서 비판을 하고 있었다;
007 시리즈의 팬 까지는 아니었어도 나름 정주행을 마친 나. 이 시리즈물에 대한 기억은 작년 12월 15일로 옮겨간다. <스파이더맨 : 노 웨이 홈>, 지금 생각하면 엔딩이 참 좋았다. 이제는 다들 알고 있을 '두 인물의 등장'을 그렇게 마무리 지은 것 자체는 좋았다. 그 둘이 뭐 또 멀티버스를 연 채로 MCU 세계관에 자리 잡아 숙식하면 좀 깼을 것 같다. 그리고 MCU 피터 파커의 새로운 시작이 색다른 인연으로 인해 벌어진다는 설정은 소년의 성장 서사로서 깔끔한 편이라고 생각한다. 반대로 '스파이더맨' 시리즈의 팬이었던 나. 왠지 모르게 가슴이 시원섭섭해서 VOD로 2,3회 차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캡틴 아메리카 : 시빌 워>에서 버키와 샘을 상대하던 장면이 시원시원해 기억에 남았다. 물론 <노 웨이 홈>이 끝나고 생긴 뭉클한 감동도 좋았지만 그런 소소한 액션 신도 시리즈물을 보는 이유이기도 했다. 뭐가 더 중요하고 별로고 할 게 있을까? 영화 왜 보나? 친구들이랑 이야기해서 감상 나누려고 보는 거지. 그리고 그 정말 재밌는 순간들을 만들려면 세계관 연동이라는 방식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미국에서 어떤 남자가 훈련을 받고 있다. 이 사람은 살인 면허 소지자도 아니고, 강화 인간도 아니며, 외계 종족도 아니다. 이름은 식스. 007은 누가 써서 식스라고 지었댄다. 치앙마이로 날아가 이 남자와 함께 모험을 떠나보자.
예상치 못했던 손님
시에라 식스. 본명은 코트 젠트리. 그는 일을 하고 있다. 일의 정체는 암살이다. 상관 데니 카마이클의 명령에 따라 한 인물을 저격해야 하는 식스. 사람 북적이는 나이트클럽 아래층에서 총구를 겨누고 있다. 카메라가 연결되어 있어서 위층 상황을 확인할 수 있다. CIA의 안보를 위해 일하는 식스. 그에게 주어진 임무는 미국의 안보에 위협이 가는 인물을 제거하는 것이다. 길지 않은 시간 동안 대기한 덕에 저격을 할 타이밍이 왔다. 근데 그때 하필이면 민간인 어린이가 목표 앞에서 얼쩡거린다. 고민하는 주인공. 동료였던 미란다와 이야기도 하지 않고 단독행동을 한다. 은근슬쩍 목표를 암살하랬더니 그냥 대놓고 동네방네 소문을 내버린다. 대놓고 아수라장을 만드는 식스. 총기 없이 맨몸으로 들어가 목표와 대면한다. 암살 대상을 맨몸으로 제압하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된다. 암살 대상 캘런 멀베이는 예상하지 못했던 사실을 고백한다. 자기 역시 시에라 프로젝트의 구성원 중 하나였다고 말하는 멀베이. 금세 코트의 상관 도널드에 대한 정보를 말한다. 또 시에라 프로젝트에 영입되기 전에 어떤 처지에 있던 인물이며 비밀임무 수행을 위한 훈련장소가 어디였는지까지 말해준다. 내부자가 아니면 절대 알 수 없는 정보에 흔들리는 식스. 캘런 멀베이는 식스에게 암살당하며 여러 메시지와 물건 하나를 전한다. 데니 카메이클은 쓰레기이며, 네가 모르는 CIA의 정보가 있다는 말을 귀띔하며 최후를 맞는다. USB를 확인하는 주인공. 그렇게 CIA에게 비밀을 서서히 알아가고자 할 때, 식스는 위기에 봉착한다. 이 비밀의 공개 여부를 두고 전직 CIA 요원 로이드 핸슨의 추격을 받게 된다. 사람 죽이는 것으로는 특화되어있는 로이드. 로이드는 식스와 함께 유럽 전역에서 대결을 펼친다.
무려 제작비 2억 달러
일단 이 영화는 장소를 많이 바꾼다. 치앙마이, 방콕, 프라하, 비엔나 등등 세계 각국을 로케이션 삼아 영화를 제작했다. 단순히 이사만 잘 다닌 게 아니다. 영화 전반적으로 여러 장소를 부순다. 일단 초반부 식스가 캘런 멀베이를 암살하는 신에서는 그 큰 파티장을 묵사발을 내버린다. 다른 지역에 가면 더 창의적으로 무언가를 부수기 시작한다. 아예 연립으로 주어진 주택(들)을 폭탄으로 콰콰쾅 부숴버린다. 비싸 보이는 차를 부수는 건 일도 아니다. 식스가 하는 직업의 성격상 위험한 일을 하기 때문에 이는 당연하다. 그래서 뭐 유리창이 깨지고 차가 파손되고 이런 건 기본이다. 액션이 쉴 새 없이 계속 이어지는 탓에 일단 지루할 일은 없다.
근데 이런 쉴 틈 없이 파괴되는 건물이 아니더라도 맨몸액션 역시 뛰어나다. 일단 크리스 에반스 액션 잘하는 건 다들 알 것 같다. 기계로 된 수트를 입고 빌런들을 상대하던 아이언맨과는 달리 캡틴 아메리카는 맨몸으로 적을 상대해야 했다. 이 덕에 캡틴 아메리카 시리즈의 맨몸 액션이 굉장히 호평을 받았다. 루소 형제와 함께하던 합이 있던 탓인지 하이라이트 신에서 몸을 쓰는 연기는 이 기라성 같은 배우들 중에서 가장 돋보였다고 말할 수 있다. 또 라이언 고슬링은 대사 칠 때보다 액션 연기가 더 멋있었다. 이게 나만 그런 건지 모르겠는데 고슬링 어깨가 좀 좁아 보였다. 그래서 격투 전에는 뭔가 멋이 안 났다. 그러나 액션 연기에 들어가면 역시 명품 배우다 싶다. 극 중에서 기억나는 이 인물의 설정은 정이 많다는 것이다. 은혜를 갚으려고 하고, 민간인은 피해 가지 않으려고 하는 둥 여러모로 '나쁜 놈만 벌하는' 강박적인 면모가 돋보인다. 이를 위해 처리해야 하는 인물(들)에 대한 감정연기가 필수적이다. 어쩔 땐 인간적인 면모가 드러나야 액션 연기에 힘이 실리기 때문이다. 이 역할이 되게 쉬워 보일 수도 있으나 이 어렵지 않은 줄거리를 이끌기 위해서는 이 배우의 호연이 필수적이었다. 총기, 맨몸, 카체이싱, 폭발물 등 다 잘하는 이 배우의 연기는 넷플릭스 구독료가 아깝지 않다. 괜히 비싼 돈 들여서 액션 잘하는 배우 섭외하나 싶다. 이러니까 돈 주고 쓰는 거지.
그리고 이 영화의 호화 캐스팅이라고 할 수 있는 다른 지점이 있다. 바로 미란다 역의 아나 데 아르마스다. 일단 처음 등장할 때 꽃무늬로 된 수트를 입고 나온다. 솔직히 쉽지 않다. 이 배우는 좋은 비율과 아름다운 미모로 이를 소화한다. 등장부터 기억에 남을 것이다. 근데 미란다는 곧이어 액션 영화를 보는 많은 분들의 로망을 실현한다. 슈트 입고 맨몸액션을 벌이는데 우리가 홍콩영화를 보며 주윤발이 쌍권총을 날리는 것만큼이나 고대해왔던 장면이다. 되게 잠깐 짧게 샤샥 지나가는데 그 장면 되게 잘 찍었다. <007 : 노 타임 투 다이>에서 잠깐 총기 액션을 보여준 신스틸러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는 분이 많이 있을 것이다(나도 영화보다 아나 데 아르마스 분량이 더 기억에 남는다). 이 영화에서도 역시 좋은 액션 연기를 보여줬다. 또한 카메라 구도, 아나의 몸 쓰는 각도, 심지어 괴랄한 의상까지 시너지가 있어 액션 연출에는 도가 튼 루소 형제의 실력을 확인할 수 있다.
납작한 이야기에 부여한 개성
이 영화는 액션이 중요하다. 루소 형제가 감독이고 크리스 에반스와 라이언 고슬링이 나오는 액션 영화면 사실 당연한 말이다. 그런데, 이 문장에는 사실 이중적인 의미가 담겨있다. 영화의 이야기는 사실 그렇게까지 개성이 있는 편은 아니다. 솔직히 영화 보면서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생각났다. 또 있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랑도 살짝 비슷하다. 뭔가 <아저씨> 느낌도 있다. 또 있다. <캡틴 아메리카 : 윈터 솔저> 느낌도 있다. 얼핏 보면 뻔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내러티브를 선택하며 전개하는 이 영화. '이건 몰랐지 이 녀석들아'같이 신선한 이야기가 펼쳐지지는 않는다. 그러기 때문에 캐릭터들의 뚝심이 정말 중요했다. 그냥 무난하게 싸우는 영화 볼 거면 리암 니슨 아저씨 나오는 액션 영화가 더 박진감이 넘칠 것 같다. 단순히 액션 영화이기 때문에 이야기에 뇌를 비우고 박진감만 있으면 된다? 뭐 당연한 이야기다. 영화 왜 보나? 재밌는 거 보려고 보는 거지. 그러려면 뭔가 기억에 남는 게 있어야 한다. 이 점에서 이 영화가 다른 영화들과는 갖는 강점이 있다면!
바로 크리스 에반스의 연기다. 일단 로이드가 처음 등장할 때 캡틴 아메리카가 생각 안 났다면 거짓말이다. 난 크리스 에반스를 MCU와 <판타스틱 포> 시리즈에서 알고 있었다. 정의로운 슈퍼 히어로서 열일했던 크리스 에반스. 한 편이 아니라 여러 번 반복되면 얼굴을 기억하는 일도 무리는 아니다. 그렇게 씌여있는 이미지를 일단 코디에서 확 바꾼다. 슈퍼마리오 같은 헤어스타일에 콧수염을 기르고 나타났다. 금발에 덩치 좀 있던 근육질의 캡틴 아메리카가 점점 옅어지기 시작한다. 또 감정적으로도 변화된 인물을 연기하기도 한다. 캡틴 아메리카는 진중하다. 어벤저스의 리더로서 영웅들을 이끌어 타노스와 상대해야 하는 입장이다. 반대로 <나이브스 아웃>의 랜섬은 진중한 나쁜 놈이다. 익살스럽거나 가벼운 느낌이 없지는 않은데 랜섬의 감정선을 효과적으로 보여주는데 집중했기 때문에 행동과 대사 하나하나가 그 인물을 보여준다. 그래서 후반부에 비교적 힘이 많이 들어갔다고 생각한다.
이 로이드는 다르다. 이 배역은 말이 많다. 이상한 유머도 날린다. 식스를 보고 '예쁜이'라고 한다던가 하는 농담을 자주 던진다. 사람 죽이는 게 아무렇지도 않다. 이런 맥락에서 소시오패스라는 인물의 성격을 보여주는 장면도 묘사가 된다. 그러나 이 인물 특성 중 중요한 건 감정을 쉽게 휙휙 드러낸다는 점이다. <나이브스 아웃>에서 흑막이 밝혀지고 랜섬의 입장 변화는 영화에서는 잘 볼 수 없던 방식이었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는 화나면 화내고 조롱하고 싶음 조롱한다. 그래서 인물의 순수하게 못돼 쳐 먹은 본성이 잘 드러난다. 이 크리스 에반스의 인물 해석은 이 영화 전반적인 톤을 형성한다. 얼핏 보면 <다크 나이트>의 '조커'와 유사하다. 조커의 광기를 받아치는 브루스 웨인의 리액션이 영화의 줄거리가 된 것처럼, 하나 딱 잡고 그거만 집요하게 파는 인물의 내면을 지루하지 않게 만든다. 가벼울 땐 인물의 성격을 바탕으로 가볍고, 무거울 때는 크리스 에반스의 맨몸액션 덕에 진중하다. 순수한 악이라고 해서 클리셰를 빗겨나간 것은 아니다. 인물들이 고르는 선택지의 결과는 뻔하다. 그런데 그 과정을 전개하는 방식이 뭔가 다르다고 느껴진다는 것은 분명 이유가 있다. 나는 이것이 크리스 에반스가 캐릭터 해석을 잘해서 갖는 이점이라 생각한다. <범죄도시>의 '장첸'이 시리즈를 대표하는 광기의 아이콘이 됐다.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영화에서의 로이드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광기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소화해낸다.
엥 이거 아는 맛인데
앞에서 이 이야기는 어디서 많이 봤다고 서술했다. 여기에 한 영화를 뺐다. 바로 <범죄도시>다! 루소 형제가 범죄도시 시리즈를 참고해서 이 영화를 만든 건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여러 부분이 <범죄도시> 시리즈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우선 싸움 잘하는 주인공(마석도-식스)은 공통점이 있다. 식스가 마석도처럼 초반부부터 강하다고 묘사되는 건 아니다. 그러나 마석도와 비슷하게 기시감이 든다. 또 말장난하는 신이 있다. 어떤 인물이 식스에게 '왜 식스예요?'라고 묻자 '007은 누가 쓰고 있거든'이라고 대답한다. 또 이런 식으로 로이드나 식스가 말장난을 계속한다. 유머가 뜬금없이 만들어진다던가 그런 건 아니지만 왠지 모르게 이건 마석도와 전일만이 했던 말장난 같은 느낌이다. 또 빌런 캐릭터 둘이 해당 영화의 아이덴티티를 공유한다는 점(장첸-손석구) 역시 공통점이 있는 부분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역시 이 영화가 <범죄도시> 시리즈와 비슷하다고 느낀 점은 따로 있다. 바로 후속작이 나올 것이라 예상하기 때문이다. 일단 영화의 감독이 루소 형제다. 바로 전작에서 영화 시리즈의 선장이었던 두 사람을 섭외했다. 또 시에라 포도 있고 식스도 있다. 이건 007 시리즈의 역대 제임스 본드가 바뀌어왔다는 점을 연상케 한다. 또 조직 내부에 있는 의문의 인물은 캡틴 아메리카 시리즈의 '하이드라'를 연상케 한다. 단일한 작품이 아닌 캡틴 아메리카 시리즈 3편을 할애해서 하이드라 분량을 나눈 만큼 이 부분은 루소 형제가 뭔가를 구상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충분하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으로 영화 예고편에도 나오는 대사 '007은 누가 쓰고 있어서'와 '비공식 임무'라는 단어는 '우리 넷플릭스 판 <007>, <미션 임파서블> 만들 거야!'라고 동네방네 소리 지르는 것 같다. 그래서 이 영화가 일단 액션에는 힘주고 내러티브에 모험수를 두지 않은 것도 이해가 되긴 한다. 시리즈의 정체성을 규정짓고 시작하기 위해서, 식스(고트)의 성격, 성장배경 묘사와 화려한 액션을 보여주는 게 일차적인 목표일지도 모른다고 생각이 들었다. 이 영화를 후속작의 전초전으로 생각한다면 사실 그만큼의 역할은 충분히 한다.
그냥 잘 만든 액션 영화
근데 이러나저러나 그건 루소 형제와 넷플릭스 사정이다. 우리는 관객이다. 이 영화를 보는 입장에서는 그냥 재밌으면 최고다. 예술 영화 보고 싶으면 넷플릭스에 들어가서 <파워 오브 도그>와 <이제 그만 끝낼까 해>를 보는 게 낫다. 그게 더 걸작이고 좋은 작품이니까. 어차피 액션 영화 보려고 보는 거잖아? 그럼 멋지게 싸우고 이야기는 쉬우며 캐릭터들이 개성 넘치면 그만이다. 영화는 자기 역할에 충실하다. 아나 데 아르마스는 아름다우며, 레게 장 페이지는 섹시하고, 크리스 에반스는 (사견으로) 커리어 하이의 퍼포먼스가 나왔으며 라이언 고슬링은 멋있다. 그럼 뭐 말이 필요한가? 7월 20일 넷플릭스 정식 공개 이후 여러분이 모바일 환경에서 부담 없이 즐기기 좋은 영화가 되는 셈이다. 아. 내가 오늘 이 영화를 보고 온 것처럼 일부 극장에 상영관이 잡히기도 한 것 같다. 웬만하면 극장에서 보시는 걸 추천한다. 사운드 연출에 나름 힘을 준 것 같다. 에어팟으로 듣기에는 좀 아쉽긴 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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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 안의 아이는 어떻게 괴물이 되었나
*스포 포함
평범한 가정집 안으로 경찰들이 들이닥친다. 소년에게 총이 겨눠지고 소년의 가족 모두가 경찰서로 향한다. 곧이어 원테이크로 진행되는 장면들은 보는 청자에게조차 당혹감을 준다. 그리고 아주 평범하고 어린 소년의 죄목이 나오면서 모두가 경악을 감추지 못하게 된다. 고작 13살의 어린아이가 저지른 살인, 폭력 그리고 그 내막이 4화에 거쳐 한 시선을 따라 천천히 전개된다.
# 제이미와 인셀
제이미(극 중 가해자)는 극 중 "인셀"이라는 단어로 대표된다. 한국에서는 조금 생소할 수 있는데, Incel, Involuntary celibate의 줄임말로서 비자발적 순결주의자, 즉 인기 없는 사람쯤으로 해석된다. 대부분은 여성의 마음을 갖지 못하는 독신의 늙은 남성을 의미한다. 한창 미국과 유럽 쪽에서도 이 비자발적 독신 남성의 범죄가 보도되었던 적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인셀이라는 용어를 잘 쓰지 않지만 그럼에도 "여자가 나를 사랑해 주지 않아서", "나는 슬픈데 저 여자는 행복해 보여서" 혹은 "내 고백을 감히 받아주지 않아서" 등의 이유로 여성 혐오 범죄들이 여러 매체에서 끊임없이 보도된다. 특이하게 시리즈에서의 제이미는 13살로 어른의 시선에서는 고작이지만, 제이미의 세계에서 제이미는 이미 도태자 혹은 실패자이다.
그런 인식에 동조하듯이, 제이미는 자신이 못생겨서 여자에게 인기가 없는 것에 심한 열등감을 느끼고 '20:80 법칙' 즉 80프로의 여성이 20프로의 남성에게 끌린다는 그 이론을 맹신한다. 진실을 보라는 "빨간약" 이모지도 그를 화나게 만든다. 특히 제이미는 3화에서 심리상담사를 상대로 "내가 무서워요? 고작 난 13살인데?" 하며, 자신이 성인 여성을 겁먹게 했다는 사실에 우쭐거리는 표정을 짓는다. 제이미는 자신이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사랑받지 못한다 생각하며, 그 비틀린 남성성을 폭력으로 내비친다. 그러면서도 여성이 자신을 사랑해 주기를 바라고, 아버지 즉 강한 남성에게 인정받고 싶어 한다. 고작 어린애인데도 징그러울 정도의 연기였다.
# 어른의 시선
극 중에서도, 실제로도 어른에게 인셀이란 용어와 그들의 심리는 그들을 비추는 프레임처럼 낯설다. 현 사회 오물의 근원이라고 불리는 커뮤니티 그리고 sns에서 발발한 용어들. 극 중 나온 "20:80 법칙"이나 이모티콘을 이용한 대화 그 사이 미묘한 혐오와 비틀린 남성성 또한 아날로그 세대인 어른들은 알기 어렵게 교묘하게 아이들 사이에서 퍼져있다. 이미 학교를 졸업한 지 오래인 형사들은 한 소년이 한 소녀를 살해한 사건을 흔한 치정 싸움, 혹은 학교 폭력 정도로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은 개인 대 개인의 감정싸움이 아니다. 어른들은 모르는 그들의 세계에만 존재하는 서열이다. 그래서 케이티(극 중 피해자)의 나체 사진이 아이들 사이에서 뿌려질 때, 제이미는 '케이티의 평판이 엉망이 되었으니, 이제는 나 같은 못생긴 80프로의 남자에게도 자격이 있겠지. 걔가 감히 날 거절하겠어?'는 생각으로 케이티에게 데이트를 신청한다. 그리고 케이티가 거절하자 그의 마음속에는 이미 더럽혀진 걔가 날 감히? 하는 울분이 차오른다.
형사에게 이 실마리를 전해준 것은 형사의 아들인 애덤으로, 애덤은 이것을 알지만 동조하지 않는 아이들 중 하나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이 사건의 진실(20:80 법칙, 빨간약 등)을 알려줄 때, 형사는 "그래서 괴롭히는 거야? 근데 너무 약하지 않아?" 하며 묻는다. 아마 이 OTT를 보는 사람들도 대부분 같은 감상일 것이다. 고작 그 이유로 사람을 죽일 수 있어? 고작? 하지만, 이 프로그램은 어른들이 보기에는 그 고작인 것이 한 소년을 어떻게까지 몰고 갔는지 말한다. 그럼에도 어른들은, 그리고 우리는 그 일이 왜 그리고 어떻게 그렇게 진행되었는지 끝끝내 이해할 수가 없다. 그 비틀린 남성성과 열등감이 암세포처럼 그리도 조용히, 하지만 요란하게 자라날 수 있었는지.
# 방 안 아이들과 방 밖의 부모
제이미의 아버지인 에디는 4화에서 말한다. "우리 아빠가 날 이렇게 만들었다면, 난 어떻게 (제이미를) 그렇게 만든 거지." 제이미의 어머니도, 아버지도 제이미가 어떻게 그렇게 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제이미는 겉돌고 어울리지 못했지만, 그래도 나름 다정했고 똑똑한 아들이었기 때문에. 부모는 회상한다. 내가 문제인 것일까. 우리는 좋은 부모였는데, 제이미가 어울리지 못해 축구장도 보냈고, 복싱장도 보냈는데. 어떻게 그렇게 된 걸까. 제이미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괴로워하면서도 끝끝내 "하지만 우리가 그 애를 만들었어." 하고 인정한다. 무엇을 인정하는지도 희미하게.
한국에서 이런 사건이 없다고 할 수 없다. 기억나는 것만 해도 자신의 부모를 죽인 청소년이나 조부모가 잔소리를 했다고 죽인 백수 등 한국 사회를 충격으로 빠뜨린 사건이 여럿 기억난다. N번방의 조주빈 같은 경우도, 바깥에서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키보드로는 뭐든지 할 수 있는 이른바 "인셀"이었다. 이 인셀은 부모의 교육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우리가 아는 활발한 사교활동으로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 인셀은 방 안에서 부모를 등지고 조금씩 자란다.
제이미의 부모도, 그리고 우리 세대의 부모들도 디지털 시대에 아이들이 그 방 안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기 어렵다. 그저 밖에서 공을 차고 돌아다니거나 불량배 행세를 하는 것이 아니니 안전하려니 여긴다. 그래도 방 안에서는 겉도는 아이들이 화색을 찾고 그들의 시간을 즐기기 때문이다.
그 시간이 아이들을 괴물로 만드는 것은 미처 모른 채.
# 소년들의 시간
이 드라마의 원제는 "Adolescence"로 번역하면 청소년기다. 이 드라마가 처음 나올 때 제목 번안을 참 잘했다는 호평이 많았다. 나도 드라마를 다 보고 나서는 한국판 제목이 더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이 드라마는 이 소년을 어떻게 다시 되돌려놓을 수 있을지, 혹은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지 말해주진 않는다. 대신 우리가 간과하고 있던 방 안 아이들의 시간을 조명하며 우리에게 진짜 문제를 보게 한다. 너무 빠르게 변해버린 시대와 용어들 속에서 방 안의 아이들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지는 여전히 제시되지 않지만 그래도 마음속에 자리한 위기감이 계속해서 빨간 불을 울린다.
넷플릭스 시리즈인 이 드라마는 영국에서 정부의 지원으로 모든 중고등학교 내에서 시청이 가능하다고 한다. 다만 10대들의 범죄, 인셀 문화, 비틀린 남성성은 비단 영국만의 문제는 아니다. 미디어 시청 하나가 세상을 바꿀 수는 없지만 지금 우리 안에 켜진 비상등이 제2의 제이미를 더 빠르게 방 안에서 꺼내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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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팬데믹 속에 열리는 제26회 부산국제영화제
아시아에서 가장 큰 영화제인 부산국제영화제는 더 넓은 아시아 지역에서 더 많은 연대를 강조하는 동시에 지역 사회와 더 많은 접촉을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밝혔다.
올해는 팬데믹 이전 시대에 비해 영화제 규모가 축소되었다. 그러나 2021년 부산국제영화제는 여전히 70개국지역의 223편의 영화(장편과 단편)를 상영한다.
모든 장편영화는 총 29개의 스크린을 가진 6개 상영관에 걸쳐 여러 차례 상영될 것이다. 영화가 극장에서 한 번만 상영되었던 작년과 달리 상영 횟수가 늘었지만, 각 상영관 전체 좌석은 50%로 제한되며 모든 티켓은 온라인 및 사전 예약해야 한다고 밝혔다.
올해 26회 부산국제영화제는 2021년 10월 6일부터 15까지 열릴 예정이다.
제26회 부산국제영화제 포스터
남동철 수석프로그래머는 갈라프레젠테이션 섹션의 상영이 3회로 제한되는데, 두 명의 외국 감독만이 방문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바로 칸국제영화제 개막작이자 감독상 수상작인 "아네트"의 프랑스 감독 ‘레오 까락스’와 칸국제영화제 각본상 수상작인 "드라이브 마이 카" 의 일본감독 '하마구치 류스케'이다.
<아네트>(감독 레오 까락스)
<드라이브 마이 카>(감독 하마구치 류스케)
부산국제영화제의 개막식과 폐막식, 오픈 토크, 야외 팬 인사 등은 열릴 예정이다. 하지만 주최 측은 부산영화의전당 야외무대에서 열리는 개막식은 1,200명으로 제한될 것이라고 말했다.
작년과 달리, 실제 프레스 센터도 운영될 것이다. 그러나 ACF(아시아영화펀드), AFA(아시아영화아카데미), 플랫폼부산은 올해에도 잠정 중단된다.
개막작은 임상수의 "행복의 나라로’, 폐막작은 렁록만 감독의 홍콩 가수 겸 배우 매염방의 전기영화 ‘매염방’이 선정됐다.
제26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 <행복의 나라로>(감독 임상수)
아시아 콘텐츠&필름 마켓이 다시 한번 올해 온라인으로 열린다. APM과 국내 참가자를 대상으로 E-IP마켓 비즈니스미팅을 운영하며, 온.오프라인 동시 개최와 마켓 현장에서 대면 미팅을 진행한다. 이번 마켓에서는 한국.대만.일본의 원작 45편과 한국.아시아의 장편영화 프로젝트 25편이 소개될 예정이다.
마지막으로 국내영화계의 거장 임권택은 올해의 아시아영화인상에 선정되었고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직접 상을 받을 예정이며 이전에 발표한 대로, 영화제의 또 다른 명예상인 한국영화공로상은 고 이춘연 제작자에게 돌아갈 것이라고 밝혔다.
임권택 감독
씨네랩 에디터 Hez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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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영화 헌트 (Feat. 화려한 카메오)
작년 여름에 Big4영화 개봉이라고 하면서 코로나로 잠시 멈춰있던 영화 개봉작들이 순서대로 개봉한다는 기사를 기억하시나요?!
그때 엄청난 대작인 비상선언, 외계인, 한산 까지 쟁쟁한 볼거리가 가득했었지만... 관람객들의 혹평 속에서 저는 갈팡질팡하면서 결국 영화관에서 못 보고 이렇게 OTT로 나와서 보고 왔습니다~
그 중에서 넷플릭스에 오랜 시간 상위권을 유지하고 있는 영화 헌트! 영화 헌트는 이정재의 첫 연출 작품으로 (소위 말해 입뽕작) 더욱더 유명했던 영화였는데 그 유명함 속에 화려한 출연진과 카메오가 있다는 사실을 아셨나요?!
눈이 즐거웠던 영화 헌트 리뷰 시작하겠습니다~
기본 정보
장르 : 액션, 스릴러, 첩보, 드라마, 느와르, 시대극, 미스터리, 피카레스크
감독 : 이정재
각본 : 이정재
출연진 : 이정재, 정우성, 전혜진, 허성태, 고윤전
개봉일 : 2022년 8월 10일
평점 : 8.46
스트리밍 : 티빙, 웨이브, 넷플릭스
기획 의도
조직 내 숨어든 스파이를 색출하라!
'사냥꾼'이 될 것인가, '사냥감'이 될 것인가!
망명을 신청한 북한 고위 관리를 통해 정보를 입수한 안기부 해외 팀 '박평호'와
국내 팀 '김정도'는 조직 내 숨어든 스파이 '동림' 색출 작전을 시작한다.
스파이를 통해 일급 기밀사항들이 유출되어 위기를 맞게 되자 날 선 대립과 경쟁 속,
해외 팀과 국내 팀은 상대를 용의선상에 올려두고 조사에 박차를 가한다.
하나의 목표, 두 개의 총구
의심과 경계 속 두 남자의 신념을 건 작전이 시작된다.
여담
영화 헌트는 첩보물 답게 1980년대의 제 5공화국 시절을 배경으로 만든 배우 이정재의 첫 연출 작품이다.
헌트는 첫 연출 작품답게 이정재의 그동안의 영화 인맥들을 총출연시킬 수 있을 정도로 아는 사람 옆에 또 아는 사람, 아는 배우 옆에 또 아는 배우! 영화계의 나올 수 있는 배우들은 다 나온 것 같아 눈이 즐거웠습니다.
후기 및 결말
영화 헌트의 결말을 살펴보자면... 하나의 목표를 가지고 서로 다른 신념과 경계 속에서 작전을 펼치지만
서로 각자의 사정과 이유로 결말은 씁쓸한 죽음으로 마무리한다.
개봉 당시 Big4의 대작 중 하나로 선보였지만, 비교적 다른 작품의 호응에 비해 헌트는 큰 관심을 받지 못했지만?! 뚜껑을 열어보자 가장 관람 평이 좋았을 뿐더러 이동진의 후한 평점과 함께 이정재와 정우성의 투 탑 연기를 볼 수 있었습니다.
아직까지도 넷플릭스 영화 순위에 당당하게 상위권의 순위를 지키고 있으면서 멋진 배우들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첩보 영화 헌트!
달콤한 팝콘과 함께 영화 한편 어떠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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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드러운 거부로서의 애도, <당신과 함께한 순간들>
2015년 퓰리처 희곡 부문 최종 후보에 오른 『Marjorie Prime』은 유족의 기억을 통해 망자의 정체성을 재현하는 인공지능 홀로그램, ‘프라임’을 중심으로 디지털 시대 죽음과 애도의 의미를 날카롭게 질문하는 작품이다. 동명의 희곡을 각색한 영화, <당신과 함께한 순간들 Marjorie Prime> 또한 기억이라는 삶의 요소가 어떻게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과 맞물려 다양한 애도의 방식으로 분화되는지 다룬다.
그러나 '디지털 부활'은 더이상 픽션의 영역이 아니다. 2016년, 러시아 기자였던 Eugenia Kuyda는 사랑하던 연인을 잃고 그와 나눈 메시지를 모두 모아 구글 기반의 신경 네트워크(neural network)를 활용하여 그를 챗봇으로 부활시켰다. 챗봇 버전의 연인은 정말 사람 같아서 Kuyda는 챗봇과 과거와 미래에 관한 얘기를 나누며 연인을 잃은 슬픔을 해소했고, 더 나아가 모든 사람이 쓸 수 있는 대화형 챗봇, ‘Replika’를 만들었다. 한국에서도 2020년부터 매년 사망한 가족을 딥페이크, VR, 인공지능 등의 기술을 활용하여 ‘부활’시키는 <VR휴먼다큐멘터리-너를 만났다> 프로그램이 방영되었다. 2025년 현재, 구글 플레이 스토어 기준 ‘Replika’의 다운로드 수는 천만 회를 넘어섰고, <너를 만났다> 프로그램 시즌 1 유튜브 클립 영상 조회 수는 3천 6백만 회를 기록하는 등, 디지털 부활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날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인공지능을 활용하여 망자를 시청각적으로 재현하는 '디지털 부활'이 점점 현실화되고 있는 것이다.
고인이 된 이후에도 사랑하는 사람과 닿고 싶은 인간의 욕망은 디지털 기술을 통한 부활을 가속화하고 있다. 조형래는 “망자를 기리는 첨단의 기술적 방식이 막대한 규모의 사회적 정동의 재구성을 초래하고, 죽음에 대한 사회적 태도 및 문화적 관행 전반에 영향을 초래할 것임이 분명”하다면서, “이러한 초혼(招魂)의 테크놀로지가 프로이트적 의미의 애도를 불가능하게 만들고, 더 나아가 유족들에게 끊임없는 추모의 고통을 유발”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반면 디지털 시대 죽음의 의미를 연구하는 심리학자인 일레인 카스켓은 디지털 기술을 통한 애도가 지속적 결속(continuing bonds)의 한 종류라고 주장하면서, 고인과 유대 관계를 끊지 못하는 이들을 우울증 환자로 취급하는 경향을 문제시한다. 카스켓에 따르면, 고인과 유대 관계를 유지하려는 사람들은 사랑하던 고인과 맺은 심리적, 정서적 유대를 소중히 하거나 심지어 더 강화하고자 하는 오래된 충동에 따르는 것뿐이다.
영화는 마조리가 월터 프라임, 그러니까 15년 전 사망한 자신의 남편을 홀로그램으로 재현한 인공지능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월터 프라임은 자신이 청혼하던 날 함께 봤던 영화,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 얘기를 꺼내고, 치매에 걸린 마조리는 이를 기억하지 못한다. 중요한 기억을 잊어버린 자신을 원망하던 마조리는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 대신 “<카사 블랑카>를 보고 돌아온 날 청혼했다면?”이라고 묻고, “다음에 우리가 (청혼) 얘기를 나눌 때는 이게 사실이 되는 거야.”라고 말한다. 어차피 거짓된 기억을 말해도 치매로 인해 사실 여부를 제대로 판단할 수 없는 마조리는 이후로도 종종 월터 프라임에게 왜곡된 기억을 요청함으로써 망상적 위안을 얻는다.
생의 끝자락, 기억을 왜곡해서라도 숨기고 싶은 과거는 월터 프라임이 예전에 키우던 강아 지인 토니 얘기를 꺼내면서 분명해진다. 월터 프라임은 마조리에게 ‘자식이 없던 한 연인이 토니라는 이름의 검은색 푸들을 키웠는데, 토니가 죽고 나서 낳은 딸-테스-도 검은색 푸들을 골랐다’라는 이야기를 해준다. 마조리가 두 번째 푸들에게 ‘토니 2세’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설명하자, 월터 프라임은 두 번째 푸들도 금방 ‘토니’라고 불렸다며, 두 강아지가 완전히 똑같지는 않았음에도 나중에는 토니와 토니 2세를 구분하는 의미가 없어졌다고 말한다. 여기서 토니는 -2막에서 등장하는 앵무새와 마찬가지로-망자와 망자를 재현한 프라임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첫 번째 토니를 죽이고 자살한 마조리의 아들, 데미안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월터 프라임이 토니의 죽음을 설명할 때 마조리가 흘리는 눈물은, 키우던 강아지에 대한 그리움이라기보다는 아들의 자살이라는 트라우마를 대면한 자의 눈물로 해석할 수 있다.
프로이트는 「애도(슬픔)와 우울 Trauer und Melancholie」에서 애도를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에 대한 반응”으로 규정하고, 여기에는 “사랑하던 사람을 대신할 새로운 사랑의 대상을 찾지 못하는 것, 그리고 사랑하던 이를 생각나게 하는 어떤 행동도 금하는 것, 등이 포함된다”라고 설명한다. 달리 말해, 상실을 경험한 사람은 ‘자아의 억제’를 통해 상실 그 자체 외에 다른 곳에는 관심을 둘 수 없는 상태가 된다. 프로이트는 이러한 슬픔(애도)이 “사랑하던 대상이 더는 존재하지 않음을 인식하고 그 대상에 부과되었던 리비도를 철회”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자연스러운 반발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러한 반발이 너무 강하게 되면 상실을 경험한 사람이 아예 “현실에 등을 돌리는 일이 일어나게 되고, 환각적인 소원 성취의 정신병을 매개로 예전의 그 대상에 집착”하게 된다. 프로이트는 이렇듯 정상적 애도에 실패한다면 상실이 자아를 잠식하고 이것이 자기 혐오적 우울증으로 이어진다고 설명하지만, 대상의 상실이 극단적인 트라우마인 마조리의 경우, 자기 혐오적 우울보다는 오히려 그 대상을 무의식적으로 격리하려는 억압(repression)에 가까운 행동을 보인다.
“정신적 트라우마 현상의 핵심은 기억(표상)과 정동”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트라우마를 유발한 사건에 대한 강한 정동적 반응이 있었는지다. 달리 말해, 외상적 사건이 유발한 정동을 언어, 또는 행동으로 수행하지 않으면 정동의 잔여가 정신적 트라우마를 유발하는 것이다. 따라서 히스테리 환자들은 주로 트라우마적 사건의 상기(회고)로 인해 고통을 겪는다. 데미안의 죽음이 마조리에게 트라우마를 유발한다면, 이는 데미안에 대한 애도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데미안이 사랑했고, 데미안이 죽인 토니를 떠올리는 것만으로 마조리는 강한 정동을 경험한다. 이러한 반복적인 표상(기억)의 회고는 마조리에게 고통을 줄 뿐이다. 그래서 마조리는 데미안을 충분히 애도하는 대신, 데미안의 죽음이라는 표상의 억압을 택한다.
마조리는 지난 50년 동안 데미안의 이름을 한 번도 언급하지 않고, 그와 관련된 모든 사진을 집에서 치운 채 살아왔다. 하지만 치매에 걸린 마조리는 데미안이 죽었다는 사실을 잊고 테스에게 “데미안은 지금 자?”라고 묻는다. 마조리가 치매를 앓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아무렇지도 않게 데미안의 행방을 물은 직후 월터와 공원 벤치에 앉아 사프란 색의 깃발을 바라보던 기억을 생생하게 묘사하는 마조리의 모습은 모순적이다. “(벤치에서) 일어나기 싫었어. 남은 생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으니까”라는 마조리의 대사는 데미안의 죽음 이후에도 삶을 이어나가야 하는 마조리의 처참한 심정을 대변한다. 이것은 데미안의 죽음이라는 표상 (기억)이 사라진 이후에도 지속되는 정동의 잔여를 의미한다.
존은 마조리가 해준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월터 프라임에게 마조리가 사프란 깃발을 바라봤던 날의 추억을 전해주지만, 영화는 플래시백 장면을 통해 마조리가 사실 공원 벤치가 아닌, 거실 소파에 앉아 TV에 나온 장면을 봤던 것임을 밝힌다. 테스의 주장처럼, 마조리는 “원래의 모습이 아니라 마지막 기억을 기억하는 것이며” 따라서 기억은 “되풀이될수록 희미해지는 복사본”과 같은 것이 된다. 결국 프라임에게 주입되는 기억은 “실제 기억이라기보다는 마조리가 기억하거나, 기억하고 싶은 과거”이다. 이렇듯 마조리와 월터 프라임을 통해 재구성되는 기억은 특정 시선에 의해 오염된 기억이며, 따라서 데미안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을 방해한다.마조리에게 데미안의 죽음은 너무도 고통스러운 기억이기 때문에 마조리는 본능적으로 이를 억압하려 하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억압이 “의식과 무의식 사이에 확연한 간극이 생길 때 발생”한다며, “억압의 본질은 자아를 위협하는 본능(충동)을 의식으로 진입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억압의 동기와 목적은 본능이 만들어낸 “불쾌를 피하는 것”이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트라우마가 해소되기 위해선 “억압의 극복과정을 통한 기억의 회복”이 필수적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아들의 자살이라는 트라우마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채 치매에 걸린 마조리는 월터 프라임의 외형을 아들이 자살하기 전인 젊은 시절로 설정하면서 아들 죽음 이전의 과거로 회귀하고자 하는 충동을 보인다. 아들을 충분히 애도하지 못하고 오히려 아들의 죽음을 잊고자 하는 마조리의 태도는 현실 도피적 성향을 띤다는 점에서 월터 프라임이 제공하는 망상적 위안을 통해 유지된다.
월터 프라임을 비교적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마조리조차도 망자와 망자를 재현한 인공지능 사이의 간극이 촉발하는 ‘두려운 낯섦’을 겪는다. 두려운 낯섦은 “공포감(또는 기이한 불안)의 일종으로,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 오래전부터 친숙했던 것에서 출발하는 감정”이다. 이정환은 프로이트가 말한 ‘두려운 낯섦’이라는 개념이 로봇 공학과 관련된 논의에서 흔히 들을수 있는 “불쾌한 골짜기”와 연관이 있다고 설명한다. 두려운 낯섦에 대한 프로이트의 주장 처럼, 불쾌한 골짜기에 대한 많은 비판에도 불구하고, “비인간에 대한 인간의 무의식적 두려움”이 명백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프라임이라는 ‘기술’에 호의적이든, 그렇지 않든,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자신이 사랑 하는 사람을 재현한 프라임과 마주했을 때, 프라임이 자신이 생각했던 망상적 위안을 충분히 제공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절망한다. 왜곡된 기억을 그대로 흡수하고, 젊었을 적 외형이 데미안의 죽음 이전을 상기하는 월터 프라임을 통해 데미안의 죽음이라는 트라우마적 사건을 억압 하는 마조리조차도, 월터 프라임이 월터 그 자체가 아니라는 사실에 불쾌감을 느낀다. 자신이 생각한 실재의 이미지를 프라임이 충분히 재현하지 못할 때, 프라임은 망자의 말을 의미 없이 반복하는 앵무새에 불과한 존재가 된다.
이정환은 대상의 기억을 주입하면, 프라임을 통해 그 사람의 존재가 영원히 지속될 수 있지 만, 이 기억은 살아 있는 자의 욕망이 투영되어 있다는 점에서 실재 망자와는 다른 결핍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생전에 사랑했던, 친숙한 망자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망자와는 다른 프라임의 모습은 유령과도 같은 두려운 낯섦을 유발한다. 허구의 작품뿐만 아니라 현실속 디지털 부활 또한 두려운 낯섦을 유발하는 건 매한가지다. 조형래는 디지털 기술을 통한 망자의 재현은 늘 “고인에 대한 추모와 의미 부여를 둘러싼 다양한 상호작용을 거스르는 미묘한 위화감을 수반한다”라고 설명한다. 이렇듯 작품 안팎에 무관하게, 기술적 한계는 감각적인 측면에서도, 인지적인 측면에서도 대상을 완벽히 재현해낼 수 없다는 점에서 늘 기이한 불안, 두려운 낯섦, 즉 불쾌감을 유발한다.
테스에게도 데미안의 죽음은 평생의 트라우마이다. 마조리는 평생 데미안의 이름 한 번 꺼낸 적 없지만, 테스는 늘 데미안의 죽음으로 인해 마조리에게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정신적 외상은 테스의 자아에도 영향을 미쳐 영화 내내 테스는 “예민하고 성마른 성격의 소유자이자, 매사에 부정적인” 사람으로 묘사된다. 테스는 월터 프라임에게 질투를 느낄 정도로 프라임에 대해 부정적이지만, 결국 마조리가 사망하자 치유의 도구로서 마조리 프라임을 소환한다.
마조리 프라임은 테스에게 ‘토니 데리고 해변에 갔던 거 기억하니?’라고 묻는다. 테스는 기억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존이 개를 키우자고 제안했다면서, ‘카타훌라’를 고려하고 있다고 말한다. 생전 마조리는 ‘카타훌라’가 무엇인지 몰랐으므로, 마조리 프라임 또한 테스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 그러자 테스는 마조리에게 “‘카타훌라’를 검색해 보라”고 요청한다. 이는 프라임이 진정한 ‘대상’으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의 환상이 필수적임을 의미한다. 달리 말해, 이것은 프라임의 ‘이용자’가 프라임이 환상에 불과함을 인지하고 있는 한, 프라임과의 대화가 어떠한 치유 효과도 산출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프라임이 환상에 불과하다면, 프라임과의 모든 상호작용 또한 결국 허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마조리 프라임은 테스의 요청에 따라 카타훌라 하운드의 사전적 지식을 로봇처럼 읊고, 테스는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며 ‘(마조리 프라임이 이미지에 불과하다는 사실, 즉 진짜 엄마가 아니라는 사실에 대해) 모른 척을 더는 못하겠다’라고 말한다. 테스는 이어 ‘(마조리 프라임이) 정말 엄마 같다가도, 어떨 때는 (엄마가 아니라는 사실이) 너무도 확연하다’라고 말한다. 이미 지와 실재의 간극은 이렇듯 과거가 아닌 현재의 기억으로 인해 명확해지며, 테스로 하여금 ‘엄마처럼 친숙하지만, 엄마가 아닌’ 두려운 낯섦을 느끼게 한다. 이어지는 장면은 이 두려운 낯섦으로 인해 프라임이 어떻게 치유의 실패로 이어지는지 묘사한다.
표면적으로 테스는 엄마의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했다는 콤플렉스를 갖고 있지만, 그의 근원적인 트라우마는 마조리와 마찬가지로 데미안의 죽음이 원인이다. 마조리 프라임은 ‘진짜 엄마 같지 않다는’ 테스의 불만에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더 해달라고 말하고, 이는 자연스럽게 테스가 엄마의 기억을 회고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여기서 마조리 프라임은 테스에게 결정적인 질문을 던진다. 마조리 프라임이 ‘테스 말고 다른 자식이 있었냐’고 묻자, 테스는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없었다’라고 대답한다. 생전 마조리가 평생 데미안을 언급하지 않았던 것처럼, 테스 또한 데미안에 대한 기억을 숨기면서 자신의 트라우마를 드러내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반드시 생생한 정동적 경험을 포함하여, 망각된 외상적 사건을 기억해 정확히 말로 표현”할 때야 비로소 트라우마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트라우마의 심리적 치유를 위해선 단순한 외상적 사건의 재현을 넘어선 생생한 재경험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프라임은 얼마든지 남아있는 자들에 의해 왜곡된 기억만을 선별적으로 저장할수 있으므로, 치유의 ‘도구’로서 프라임은 제 기능을 다 할 수 없다. 기억의 선별과 왜곡된 기억이 유발하는 이미지와 실재의 간극, 즉 두려운 낯섦은 심리적 치유를 불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라깡은 “욕망의 중심에 놓여있는 결여”를 ‘'대상 a'’라고 지칭하면서, 상상계적 질서 속에서 이 대상은 어떤 욕구도 충족시키지 못한다고 설명한다. 테스는 마조리 프라임을 형성하기 이전부터 자신이 원하는 어떤 환상을 프라임에게 투사한다. 이 환상은 데미안의 죽음을 기억하지 못하는, 그래서 자신에게 늘 다정하고 충분한 사랑을 주는 엄마이다. 그러나 마조리 프라임이 정말 테스에게 인자하게 미소 지으며 다정한 말을 건네자, 테스는 ‘덜 웃어야 엄마 같아 보인다’라고 충고한다. 테스의 '대상 a'-엄마의 사랑이라는 욕망의 결여-를 충족하기 위해서 마조리 프라임은 테스에게 생전에 주지 못했던 사랑과 다정함을 주어야 하지만, 동시에 사랑을 주면 줄수록 ‘진짜’ 마조리와는 멀어진다는 점에서 테스의 환상은 결코 충족될 수 없다.
애증의 대상이자 환상 속 '대상 a'인 엄마의 상실은 테스를 우울로 이끈다. 프로이트는 우울과 슬픔의 차이를 ‘자애심의 추락’으로 설명한다. “우울증 환자는 대상과 관련된 상실감으로 고통을 겪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말을 들으면 그것이 자아와 관련된 상실감이라는 것이다.” 테스는 계속해서 마조리와 존의 입을 빌려 자기 자신을 ‘무너졌다’거나, ‘엄마를 사랑하게 만들 수 없었다’고 표현한다. 마조리에게 향해 있던 애증의 리비도가 마조리의 죽음 이후 갈 곳을 잃고 테스의 자아를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를 눈치라도 챈 듯 마조리 프라임은 테스에게 ‘자기 자신에게 너무 가혹하게 굴지 말’라고 말한다. 그러나 마조리 프라임과 존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애도의 실패-우울증은 결국 테스를 자살이라는 파괴 충동으로 이끈다.
프로이트가 정상적인 애도, 달리 말해 상실을 극복하고 애도를 마무리하는 ‘작업’을 중시했던 까닭은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이 자아를 좀먹고 파괴 충동으로 이끄는 걸 막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데리다는 정상적인 애도와 비정상적 애도를 구분하는 프로이트의 애도 이론을 비판하면서, 죽음이 타자를 잊는 여정의 시작이 아니라, 타자를 기억하는 여정의 시작이라고 주장한다. “데리다가 보기에 프로이트의 정상적인 애도가 갖는 문제는 타자의 타자성을 말살하려 한다는 데 있다. 성공적인 애도 작업을 통해 내면화가 가능해지면, 타자는 나의 일부가 되는데, 그렇게 되면 타자는 더는 타자가 아닌 것이 되기 때문이다.”
마조리에 대한 테스의 정동-상실감으로 인한 우울, 사랑, 증오-은 너무 강력해서 테스는 자신의 편협한 시선에서 기억하는 마조리의 모습-약간 허영심이 있고, 까칠하며, 자신에게 한번도 사랑한다고 해준 적이 없을 만큼 데미안을 사랑한-만을 회고한다. 마조리 프라임은 이렇듯 테스의 내면화된 타자를 온전히 재현할 수 없다는 점에서 테스에게 두려운 낯섦을 유발하고, 프로이트식의 ‘정상적인 애도’를 완수할 수 없게 만든다. 그러나 애도의 실패가 반드시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애도는 “가능성과 불가능성, 성공과 실패의 반복적 진동 속에서 수행 적으로 이루어지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갑작스러운 테스의 자살 이후, 존 또한 테스 프라임 앞에서 두려운 낯섦을 느낀다. 평소에도 프라임에 호의적이었던 존은 테스 프라임을 더 진짜 테스처럼 만들기 위해 적어두었던 테스의 특징들을 테스 프라임에게 읊어준다. 하지만 존 또한 이내 ‘(프라임은) 반사판 (Backboard)에 불과한,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나는 지금) 혼잣말을 하고 있다’라고 말하며, 테스 프라임과의 대화에 회의를 느낀다. 그러나 데리다에 따르면, 이러한 ‘좌절된 내면화’는 “타자를 타자로서 존중하는 것, 즉 부드러운 거부의 자세”를 의미한다. 프라임에게 아무리 왜곡된 기억을 주입한다고 해도, 프라임이 환상 속 ‘대상 a’를 완벽하게 충족하는 것은 아니다. 남아있는 자는 필연적으로 이미지와 재현의 간극으로 인한 두려운 낯섦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두려운 낯섦이 초래하는 애도의 실패는 동시에 ‘타자를 타자로서 받아들이는’ 애도의 시작이 된다.
데리다는 “기억을 통한 내면화”가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자아를 잠식하는 멜랑콜리아를 긍정하는 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멜랑콜리아는 타자를 버려두고 자신에게만 집중하는 일종의 나르시시즘적 퇴행 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데리다는 “애도의 가능성과 불가 능성이 만나는 지점, 애도의 성공과 실패가 같아지는 지점, 애도와 멜랑콜리아가 중첩되는 공간”에 주목한다. 즉, “애도는 타인의 세계가 끝날 때, 타인을 위해 그 끝을 내 안에 담는 것이며, 동시에 관념화, 내면화, 그리고 식민화에 저항”해야 한다. “타자를 관념화하는 내사 (introjection)가 망각의 시작 지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멜랑콜리아는 극복해야 할 질병이 아닌, 내사에 저항하는 힘이 된다.
존이 테스 프라임에게 느끼는 두려운 낯섦은 이러한 멜랑콜리아를, 자기혐오의 감정을 유발한다. 그러나 이 두려운 낯섦이야말로 테스 프라임을 ‘존의’ 테스로 만들려는 시도를 무화하고, “살아남은 자인 존에게 허락된 삶 자체”를 끊임없이 인식하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 존의 삶 속에 공거(cohabitation)하는 테스 프라임은 “우리 안에 사는 ‘목격자’”이다. 존은 마조리처럼 죽음을 망각하는 망상적 위안에 의존하지도, 테스처럼 멜랑콜리아를 견디다 못해 자살에 이르지도 않는다. 대신, 그는 자신의 시선에서 바라본 테스를 내면화하고, 테스와의 기억을 회고하며, 동시에 프라임의 본질적인 두려운 낯섦을 인식하고 절망하기를 반복하면서 테스의 죽음을 애도한다.
데리다는 “타자가 타자성을 유지하면서 우리와 대화 관계에 있는 ‘생각하는 기억’을 애도의 본질”로 보았다. 따라서 데리다는 멜랑콜리아와 애도가 분리된 것이 아니라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고, 인식할 수 없는 것은 인식하려는 애도, 달리 말해 애도 가능성과 애도 불가능성 사이의 진동이 애도하는 텍스트의 직물을 짜고, 애도의 성공과 실패 사이의 아포리아가 길을 여는” 멜랑콜리한 애도야말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애도라고 주장한다. 인류 탄생 이래, 현실적으로 망자의 발언이 가능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지만, 최근 디지털 기술의 발전은 망자의 발언을, 망자의 부활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데리다가 만약 살아 있다면, 망자의 동의 없는 기계적인 디지털 부활을 경계했으리라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러한 디지털 부활은 오직 남아있는 자의 나르시시즘적 멜랑콜리아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만 제작되고, 이용된다는 점에서, 기계적 디지털 부활은 너무도 쉽게 프로이트적 애도 작업의 완수를 위한 도구로 전락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앞서 프라임이 어떻게 “멜랑콜리아를 ‘극복’하는” 애도의 실패를 전제하는지 살펴보았다. 특히, 프라임은 남아있는 자가 주입한 ‘기억’과 새롭게 형성된 ‘지식’, 그러니까 다른 프라임과 대화하거나 인터넷에 검색함으로써 얻어낸 지식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애도의 실패와 성공을 오간다는 점에서, 데리다적 멜랑콜리한 애도를 체현한다. 존이 손녀를 테스 프라임에게 소개하는 장면은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멜랑콜리한 애도를 예증하는 장면이다. 존이 테스 프라임에게 ‘손녀가 분류학을 공부하고 있다’라고 설명하자, 테스 프라임은 ‘이분법(Dichotomous)을 이용하지’라고 대답한다. 자연스럽게 분류학에 관한 대화를 이어 나가는 테스 프라임과 달리, 존은 테스 프라임이 분류학에 관한 지식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란다. 존의 시선에서 바라본 테스의 기억과 테스 프라임이 새롭게 얻은 지식의 혼합은 이전 에는 ‘말할 수 없던 것’, 즉 손녀와의 예측할 수 없는 상호작용을 존이 인식하게 한다. 존은 마치 어린아이 다루듯 테스 프라임에게 ‘입양이 무슨 뜻인지 알지?’라고 묻다가도, 이분법을 말하는 테스 프라임에게 놀라면서 애도의 성공과 실패를 경험한다. 테스 프라임은 그런 의미에서, 존의 내면에 식민화될 수 없는 테스의 이미지를 새기고, 테스의 죽음을 인식함과 동시에 존의 내면에 의해 식민화되지 않은 테스 그 자체를 기억하고, 애도하도록 돕는다.
데리다의 관점에서 프라임의 가장 큰 의미는 ‘내면화되지 않는 지속적 기억’에 있다. 프라임은 남겨진 자들의 기억에 의존하지만, 동시에 그 기억은 인간과 달리, 프라임의 내면에 잡아 먹히지 않고 영원히 그 상태를 유지한다. 인간의 기억은 꺼내면 꺼낼수록 희미해지거나 왜곡되지만, 프라임의 기억은 처음 상태 그대로 지속되며, 프라임 자신의 내면에 의해 오염될 가능성도 없다. 인간이 되고 싶은 욕구를 드러내긴 하지만, 프라임에게 인간과 같은 완전한 자아가 있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영화는 이러한 프라임의 기억을 영화에서 다양하게 변주되고 반복되는 ‘물’의 이미지를 통해 시각화한다. <당신과 함께한 순간들>은 희곡인 원작의 특성을 반영하여, 한정된 인물과 배경을 활용한, 절제된 미쟝센을 사용한다. 근미래를 배경으로 하고 있음에도 프라임 외에 다른 기술적인 특징은 눈에 띄지 않으며, 심지어는 기본적인 가구 이외의 소품조차 얼마 등장하지 않는 미니멀리즘적 미쟝센은 프라임과 인물들의 관계에 집중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미니멀리 즘적 집 내부와 대조적인 과잉 생산되는 물의 이미지는 영화의 주제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메타포다.
월터와 마조리의 집이자 테스와 존의 집인 영화의 주된 배경은 바닷가에 위치한다. 그래서 영화는 해변가를 걷는 테스와 존의 모습이라든가, 인물 없이 파도치는 장면이 종종 삽입하거나, 계단 옆에 걸린 파도 그림을 클로즈업하기도 한다. 토니가 해변가 달리기를 좋아했다는 마조리의 대사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데미안을 상징하는 토니가 사랑했던 바다는 영화 내내 ‘죽음’, 또는 일종의 상실을 상징한다. 마조리, 테스, 존이 사망한 이후 파도-또는 파도를 그린 그림-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죽음을 재현한 이미지인 프라임이 등장할 때는-집이 바닷가에 위치함에도- 어둡고 꽉 막힌 실내나, 또는 커튼 뒤로 희미하게 비치는 나무만이 등장한다. 하지만 세 프라임이 모인 마지막 장면에서는 거실 밖 커튼이 활짝 젖혀있 으며, 잔잔한 바닷가의 모습이 포커싱되도록 인물을 모두 같은 방향에서 촬영된 것을 알 수있다. 이는 궁극적인 영화의 주제인 죽음과 애도를 인간이 모두 사망한 뒤에도 프라임이 이어가고 있음을 강조하기 위한 연출로 해석할 수 있다.
두 번째로 중요한 메타포는 ‘비’인데, 영화에서 딱 두 번 등장하는 폭우는 영화의 두 번째 주요 키워드인 ‘인간의 기억’과 연관성이 있다. 희미해지는 인간의 기억처럼, 비는 끊임없이 흐르고, 또 쉽게 휘발되고 만다는 점에서 인간의 기억을 상징한다. 따라서 프라임 뒤에 켜켜이 쌓이는 포근한 눈의 이미지는 인간의 기억처럼 흘러가지 않고 차갑게 냉동되어 켜켜이 쌓이는 프라임의 기억을 시각화한 것이다. 이는 영화 속 첫 번째 폭우 장면에서 존과 테스가 기에 대해 나눈 이야기와도 일맥상통한다. “되풀이될수록 희미해지는 복사본”같은 인간의 기억과 달리, 프라임의 기억은 “뇌 안의 퇴적층”처럼, 모든 기억을 원본 그대로 냉동시켜 저장 한다는 점에서 눈과 닮았다.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에서 얼마가 흘렀는지조차 알 수 없는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월터, 마조리, 테스 프라임은 한자리에 모여 이야기를 나눈다. 그리고 그들 뒤 넓은 창에는 눈 내리는 바닷가의 풍경이 있다. 켜켜이 쌓이는 눈과 파도치는 바닷가가 보이는 통창 앞에서 프라임은 데미안의 죽음을 끄집어 낸다. 유일하게 데미안에 대한 기억을 들은 월터 프라임이 데미안의 죽음을 언급하고, 데미안에 대해 알지 못했던 테스와 마조리 프라임도 월터 프라임과의 대화를 통해 데미안을 추억하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특히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다니 얼마나 좋아’라는 마조리 프라임의 마지막 대사는 수 세기가 지난 뒤에도 바래지 않고 타자를 기억하는 애도의 자세를 체현한다. 그러므로 세 프라임 뒤로 펼쳐진 ‘눈 내리는 바닷가’는 테스, 월터, 마조리뿐만 아니라 데미안과 존까지 프라임이 모든 ‘타자’의 죽음을 인간과는 다른 방식으로 영원히 기억하고 있음을, 서정적인 이미지로 형상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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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퀴어] 끝장리뷰 | 육체와 정신 | 종교적 해석 | 뱀, 죄수복, 권총, 야헤 상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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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어](2025)에 대한 헐거운 리뷰
Chapter 1 육체와 정신
Chapter 2 종교적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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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7 별점 및 한 줄 평
11:36 다음 리뷰 예고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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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범털2: 쩐의 전쟁> 메인 예고편
“돈이 깡패다”
교도소 내 권력의 양대 산맥 폭력방 VS 취사방
유일하게 무기를 소유할 수 있는 취사반장은 숨은 실세로 추앙받으며
폭력방의 범털에게 항상 불만을 품게 되고,
그로 인해 감빵 안에는 극도의 긴장감이 맴돈다.
그러던 중, 부산파 두목 취사반장의 과거 악연 ‘기철’이 폭력방으로 입소하고,
본격적으로 두 방 사이 팽팽한 대립이 시작된다.
교도소를 움직이는 재벌 회장과 보안과장까지 개입된 더욱 거대해진 판 속,
진정한 범털을 가리기 위한 싸움으로 크게 번져가는데….
판은 이미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