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드레2022-07-15 10:35:56
무질서에 기우는 정의의 병폐 속 무기력한 개인
영화 <뉴 오더> 리뷰
끔찍한 비명과 혼란스러움이 가득한 바깥과는 달리 고급 저택에서는 호화로운 결혼 파티를 펼치고 있다. 녹색과 빨간색으로 점점 물들고 있는 세상은 내부에 신호를 주지만 그저 불안의 기우일 뿐이라고 넘긴다. 한편 유모가 위독하다는 소식에 마리안느는 유모를 돕기 위해 집으로 향한다. 마리안느가 나간 사이 들이닥친 시위대는 집 안의 곳곳을 무너뜨리기 시작하고 믿었던 집안의 피고용인들이 합세해 혼란과 피바람이 몰아친다. 이유 없는 폭력의 시위에 의문을 가지기도 전에 영화의 모든 장면에서 참혹한 폭력이 끊이지 않는다. 그리고 하나의 희망도 보이지 않는 끝없는 절망 속에서 또다시 절망을 바라보며 새 질서를 거듭한다. 하지만 새 질서를 가져올수록 부패와 부조리함이 반복될 뿐, 더욱 혼란에 빠지며 폭력과 희생이 당연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 수많은 혼란 속에서도 다른 계급을 돕기 위해 노력하는 이는 마리안과 마르타 모자뿐이다.

영화의 무자비한 폭력에 어떤 사회에서도 공평함을 발견할 수 없는 절망에 빠질 수밖에 없다. 체제 변환 이후의 모습이 아닌 파국 이후의 새 질서를 그리면서 최악을 생각했지만, 그 보다 더 최악인 순간에서 끊임없이 총구를 머리에 들이대고 배신과 폭력의 연속은 체제 변환의 전쟁일 뿐이다. 무채색과 유채색의 대비는 또 다른 대비를 불러와 거꾸로 비치는 제목이 머지않은 미래를 비추듯 관객을 비춘다. 부패가 청산되고 갈등이 해소되는 대신 “오직 죽은 자만이 전쟁의 끝을 볼 수 있다.” 이 말과 함께 그저 이름뿐인 전쟁 같은 새 질서가 펼쳐진다.
*멕시코의 국기는 초록색, 하얀색, 빨간색 그리고 가운데엔 멕시코의 국장이 그려져 있다. 초록색은 독립과 대지, 하얀색은 순결과 통일, 빨간색은 백인과 인디오, 메스티소 등 인종의 통합과 국가 독립을 위해 바친 희생을 상징한다고 한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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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많은 여성 예술가는 어디로 갔을까?
‘힐마 아프 클린트’. 이 예술가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서양미술사와 친하지 않은 이들은 물론, 이 분야에 박식한 사람들도 이 예술가의 존재를 알리 없다. “20년 동안 내 작품을 공개하지 마라”라는 유언으로 100여 년간 미술계에서 사라졌다가 이제야 세상에 나온 화가이기 때문. 실제 존재했던 예술가임에도 왜 우리는 그녀의 존재를 이제야 알았을까? <힐마 아프 클린트-미래를 위한 그림>은 그 이유를 소개하는 작품이다.
다큐 <힐마 아프 클린트 - 미래를 위한 그림> 스틸 / 마노엔터테인먼트 제공
한 여성 예술가는 이런 유언을 남긴다. “20년 동안 내 작품을 공개하지 마라!” 이후 100년 동안 그녀의 작품은 봉인되었다. 이후 1,500여 점의 그림과 2만 6천 페이지의 작업 노트가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 19세기 말에 활동한 힐마 아프 클린트라는 이름의 독일 예술가의 이야기다. 칸딘스키, 몬드리안보다 앞서 추상회화를 선보인 이 여성 예술가의 등장은 그동안 우리가 알고 있는 서양미술사를 다시 돌아보게 한다.
다큐 <힐마 아프 클린트 - 미래를 위한 그림> 스틸 / 마노엔터테인먼트 제공
<힐마 아프 클린트-미래를 위한 그림>은 알려지지 않았던 한 여성 예술가의 작품과 삶을 소개하는 다큐멘터리다. 귀족 가문 출생 엘리트로서, 꾸준히 그림을 그린 힐마는 추상회화의 선구적인 역할을 한 예술가다. 그녀의 추상회화 시작점은 19세기 말 과학이 발전한 시대상에 있다. 과거 기독교적 관점에서 벗어나 원자, 우주 등 과학의 발달로 인해 더 넓은 세계가 펼쳐진 상황 속에서 그녀는 자신만의 세계관을 창조한다.
단순히 북유럽 자연의 아름다운 경관을 그리는 게 아니라, 그 자연을 이루는 가장 작은 단위의 것들을 그려내는 것에 집중한다. 그녀의 그림을 보면 나선형, 원형의 선과 면이 특징인데, 생명체의 본질을 우주적 관점에서 이해하고 이를 그림으로 옮기려는 부분이 돋보인다. 더불어 신지학 운동 등의 영적 연구까지 예술로 승화하려는 힐마의 노력도 나온다.다큐 <힐마 아프 클린트 - 미래를 위한 그림> 스틸 / 마노엔터테인먼트 제공
이 다큐는 단순히 알려지지 않은 여성 예술가를 수면 위로 끌어올리는데 그치지 않는다. 왜 그녀가 살아 생전에 빛을 보지 못했고, 이제야 그녀의 이름과 작품이 알려지게 되었는지 소개한다. 19세기 말. 힐마 또한 그 시대를 산 여성들처럼 양지가 아닌 음지의 삶을 살아간다. 능력이 있고, 누구보다 자신만의 특색을 담은 작품을 그렸지만, 사회는 그녀의 진출을 반기지 않는다.
아무리 좋은 작품이라도 갤러리에 전시해야 하고, 예술적 동지들과의 교류가 활발해야 하는 등 제반 여건이 갖춰져야 했는데, 힐마에겐 그런 기회가 좀처럼 찾아오지 않았다. 물론, 고흐 등 사후에 인정받은 예술가들도 있지만, 힐마의 경우에는 ‘가난’이 아닌 ‘여성’이라는 점 때문에 기회가 박탈되었다는 차이가 있다.다큐 <힐마 아프 클린트 - 미래를 위한 그림> 스틸 / 마노엔터테인먼트 제공
감독은 힐마가 남긴 작업 노트와 그녀의 작품과 자료를 보관하고 있었던 조카의 증언을 토대로 재능을 발휘하지 못한 한 예술가의 고뇌와 좌절을 소개한다. 여기서 더 나아가 미술 및 미술 산업 관계자들을 통해 과거 재능있는 여성 예술가들이 많았지만, 주목받지 못하고 아스라이 사라진 이유, 그리고 힐마 아프 클린트의 출현으로 서양미술사는 다시 작성되어야 한다는 이야기까지 전한다.다큐 <힐마 아프 클린트 - 미래를 위한 그림> 스틸 / 마노엔터테인먼트 제공
이런 점에서 ‘미래를 위한 그림’이란 부제는 사뭇 다르게 다가온다. 그녀의 그림이 시대를 앞선 추상회화라는 점에서의 ‘미래’라는 의미는 물론, 과거와 달리 앞으로 더 많은 여성 작가가 자신의 재능을 펼칠 수 있길 바라는 ‘미래’라는 의미도 느껴진다. 힐마 아프 클린트 뿐만 아닐 것이다. 과거 사회의 장벽에 부딪히면서도 자신의 작품 세계를 견고하게 가져갔던 여성 예술가들은 지금도 누군가 그 봉인을 풀어주기를 바라고 있을지 모른다. 아무쪼록 이 작품이 그 봉인의 첫 열쇠가 되길 바란다.
덧붙이는 말: 힐마 아프 클린트의 작품은 영화에서도 사용되었다. 아리 에스터 감독의 <미드소마> 중 춤추는 주민들의 동심원은 힐마 아프 클린트의 그림에서 착안되었고, 올리비에 아사야스 감독의 <퍼스널 쇼퍼>에서도 작가의 그림이 등장한다. 이 다큐를 보고, 힐마 아프 클린트 작품에 매료되었다면 두 영화를 만나보길 바란다. 더불어 과거 인정받지 못한 여성 예술가의 고뇌를 담았다는 점에서 다큐 <밤쉘>도 함께 보는 걸 권한다.
평점: 3.0 / 5.0
한줄평: ‘그 많은 여성 예술가는 어디로 갔을까?’에 대한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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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장 속 물고기
줄거리
산에서 추락한 한 남자의 사체. 담당 형사인 해준은 사망자의 아내인 서래를 만나게 된다. 중국인이라 한국말이 어색하다는 서래는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에도 좀처럼 눈물을 보이거나 동요하지 않는다. 그저 '마침내'라는 단어를 쓰며 피식 웃을 뿐.
어딘가 미심쩍인 남자의 죽음에 해준은 그녀의 주변을 맴돌며 잠복근무를 한다. 그러는 사이 자신도 모르게 그녀에게 서서히 빠져들게 되는데…
감상포인트
감독이 원래 산과 바다라는 챕터로 영화를 나누려고 했다는 점을 기억하자.
초밥을 사준다는 건 분명 스윗한 행동이지만, 그 이후에 오는 상징들은 전혀 스윗하지 않다.
어장 속 물고기가 생각나는 건 왜일까.
감상평“축하해. 살인 사건이래.”생선의 배를 가르던 해준 대신 전화를 받은 아내 정안은 이야기한다. 그러자 해준의 눈동자에는 생기가 돈다. 우습게도 그의 눈은 죽은 시체와 참 비슷하다. 눈을 뜨고 죽은 시체들처럼 파리가 달라붙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해준은 인공눈물을 넣는다. 겉으로는 살기 위함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너무나도 죽음을 갈구하는 자의 모습이다. 물고기 주제에 ‘인공’눈물을 넣어 삶을 연명하느니 차라리 죽음이 낫기 때문에, 그는 자꾸만 죽음을 쫓는다.“한 칸, 한 칸, 마치 초밥을 집어먹는 것처럼 쉽습니다.”해준이 서래의 행적을 따라가며 계단을 오를 때, 그의 전 남편인 기도수가 했던 말이다. 이 말 때문에 해준의 위치는 명확해진다. 그는 바다 위로 올라온 물고기다. 그는 잘게 썰려진 채로 스스로 서래의 밥상 위에 오른다. 그래서 서래는 밥을 먹을 필요가 없다. 해준이 자진해서 밥상 위로 올라오기 때문이다.“그냥 초밥 같은 거 시켜 먹자니까.”정안은 남편이 밥상을 차려주자 이렇게 말한다. 해준은 아내에게 자신을 내어줄 마음이 없다. 그런 남편의 마음을 떠보듯이 정안은 생선 눈알을 콕콕 찔러본다. 그러곤 곧바로 물티슈를 꺼내 손을 삭삭 닦는다. 마치 못 만질 것을 만진 것처럼. 우습게도 해준이 손가락을 물린 대가로 받아온 자라는 바다에서 서식하지 않는다. 자라는 민물이나 늪에 사는 생물이다. 정작 정안이 관심 있었던 것은 바다 물고기가 아니라 민물 자라였다. 해준은 그 자라에게 대차게 물렸고.“난 당신의 미제 사건이 되고 싶어요.”서래의 ‘헤어질 결심’이란 영원히 해준의 사랑을 탐하는 일이다. 서래는 해준이 죽음을 쫓기 때문에 자신 주변을 서성인다는 것을 잘 안다. 죽음을 택한다는 것은 곧 해준이 사랑하는 대상이 되는 일이다. 서래의 죽음은 엄마를 닮은 것처럼 보이지만 전혀 다르다. 서래의 엄마는 그녀가 자신을 떠나길 원해서 죽음을 택했지만, 서래는 해준이 자신에게 머무르길 원해서 죽었으니까.“깊숙한 바다에 던져버려요. 아무도 찾을 수 없게.”첫 번째 죽음은 산, 두 번째 죽음은 수영장, 세 번째 죽음은 마침내 바다. 마지막 장면에서 해준은 바닷가를 서성이며 애타게 서래를 찾는다. 해준이 바다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아는 서래는 영리하게도 그가 영원히 쫓아다닐 수 있게 바다로 도망간다. 해준이 바다로 걸어갈 때, 서래의 손바닥 안에 있는 것처럼 오버랩되는 장면이 있었다. 어쩌면 해준은 영원히 서래의 어장 속에 갇혀버린 것이 아닐까.사실 영화를 보고 나와서 아주 찝찝했다.
나는 서래가 물에 잠기는 직접적인 장면은 나오지 않았기에 그녀가 구덩이에서 나와 도망갔을 것이라 생각한다. 구덩이 자체가 함정이고 해준은 그 함정에 걸려들었다. 하지만 오히려 해준은 그 함정을 즐기는 것 같다. 구덩이 속에 들어간 서래나, 녹음 파일을 듣고 바다를 헤매는 해준이나 내게는 다 변태스럽게 느껴졌다.
사람들이 누구나 ‘헤어질 결심’을 하고 살아가지는 않는다. 오히려 헤어지지 않으려는 결심을 하기 때문에 삶은 고달프고 사랑은 아프다. 해준과 서래는 진실을 몽땅 바닷속에 던져버리고 다시 찾으려 하지 않는다. 정직하고 진실되게 살아가기보다 도피와 외면을 택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쉽다. 영화는 선택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길이 없는 것처럼 행동한다. 어쩌면 그런 부분이 나에게는 아름답게 다가오지 않은 이유였을지도 모르겠다.
별점★★★(3.0 / 5.0)
섬세하게 만들어진 영화이긴 하나,
때론 그 섬세함이 독이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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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나 아렌트가 자랑스럽게 생각할 '존 오브 인터레스트'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강력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독일인 부부 루돌프 회스(크리스티안 프리에델)와 헤트비히 헤스(산드라 휠러)다. 세계 2차 대전 중이다. 일에 충실하는 루돌프 회스. 아예 집 옆에 일터가 있을 정도로 일에 진심이다. 조용한 일상. 아내와 귀여운 아이들과 함께 사니 두려울 것이 없다. 다만 본능적으로 거부하는 것이 있을 뿐이다. 사는 집 옆에 있는 것이 아우슈비츠 수용소고, 루돌프는 히틀러의 명령에 따라 유대인들을 학살하는 임무를 받았다는 것이다.
우선 이 영화를 보고 가장 먼저 생각난 건 가까스로 다 읽은 한나 아렌트의 책 두 권이다. 영화나 드라마를 보다 보면 한나 아렌트가 제시한 개념 ‘악의 평범성’에 대해 손쉽게 접할 수 있다. ‘악의 평범성’은 평범한 사람에게도 누구나 악한 본성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기도 하지만 더 본질적인 함의를 품고 있다. 바로 누구나 악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떻게? 가 중요한데, 생각하거나 관심 갖지 않고 그냥 흘러가는 대로 살아가다 보면 악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 그녀가 제시한 ‘악의 평범성’이다. 한나 아렌트는 이 성격을 설명하기 위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책에서 한 남자를 조명한다. 바로 아돌프 아이히만이다. 아이히만은 재판 중에서 당당하게 “나는 조직이 시키는 일을 했을 뿐”이라고 답했다고 한다. 이 남자의 궤변에 격분한다. 하지만 서서히 관찰하면 관찰할수록 아이히만이 우리 평범한 사람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는 걸 깨닫는다. 발상의 전환이 일어난 한나 아렌트. 한나 아렌트는 이 아이히만의 모습을 포착하며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타인의 입장에 대한 무사유(Thougtlessness) 하나만으로도 평범한 직장인이 역사에 남는 전쟁범죄자가 된 것이다.
이 ‘악의 평범성’을 제시한 것은 후대에 엄청난 파급력을 낳는다. 당연하다. 원래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하잖아? 이긴 자들은 승자의 입장에서 상대방, 그러니까 악의 근원을 “이 집단이 이래서 문제야!”로 퉁칠 수 있다. 아니면 인간이란 원래 그런 존재라고 규정하면 쉽다. 잔다르크가 마녀로 지목당해 화형 당하는 과정을 생각해 보면 종교라는 잣대가 명확하다. 또 서양의 기독교나 동양의 맹자가 인간에겐 원죄/악한 본성이 있다고 해석한 것도 악이라는 개념이 특정한 상황 하에 만들어진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그리고 그게 되게 대단한 거라고 생각할 수 있다. 우리 인류 역사상 히틀러 같은 존재는 흔하지 않다. 이런 측면을 고려해 보면 악은 특정한 무언가에 의해 결정되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한나 아렌트는 이를 전적으로 거부한다. 특정한 무언가가 있기에 대단하다던가 굉장히 특이한 게 아니다. 그냥 전적으로 평범한 사람일 뿐, 생각 없이 산 것의 총합체라고 정의한 것이다. 물론 한나 아렌트 이전의 역사가들이 악에 대해 이렇게 규명한 것은 나름대로 합리적인 것처럼 보인다. 이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서도 그 악의 형태가 구현되고 있다. 가령 영화에서 온갖 비명소리가 들리는데도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하는 회스 부부의 모습은 분명한 악이다. 아니면 유대인의 코트를 빼앗아 입는 헤트비히의 모습 역시 분명한 악이다. 하지만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한나 아렌트가 제시한 ‘무사유’의 과정을 두 측면에서 보여준다. 어떻게?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의 아이히만이 보여주듯, 조직에 흘러가는 남자(루돌프)와 타인에게 무관심한 여자(헤르비히)를 통해서. 또 <인간의 조건>에서 한나 아렌트가 역설하듯 인간과 인간사이의 관계에서 중요한 것을 강조한 방식을 그대로 계승하면서다.
가장 먼저 탐구해야 할 인물은 루돌프 회스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루돌프 회스가 조직 내에 꽉 박혀있는 인물이라는 것을 영화 연출을 통해 보여준다. 이 연출은 꼭 필요했다. 왜? 루돌프 회스가 실존인물이기 때문에. 한나 아렌트가 제시한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역사적인 상황과 결부시켜 강조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래야 이 영화가 비판하고자 하는 악의 속성이 더 설득력을 얻는다. 영화는 이를 위해 건조하게 그의 직장인으로서의 일상을 보여준다. 가령 외부 협력업체가 와서 회스에게 뭔가를 설명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이 장면 속 두 남자는 그냥 대표자들끼리의 대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 장면을 기점으로 영화는 그가 직장인으로 얼마나 자기 하는 일에 투신하는지를 묘사한다. 좀 필요 없어 보이는 전화 장면이 여러 번 들어간 이유는 여기에 있다. 여기에 특별한 설정이 영화에서 빛을 발한다. 아우슈비츠 옆에 사무실이 있고 거기서 산다는 특징은 가정적이면서도 열심히 일하는 루돌프 회스의 모습을 보여주기 쉽다. 열심히 일하고 난 다음 아이들에게 동화를 읽어주는 아버지 회스의 모습은 지극히 평범한 악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만든다.
하지만 이 루돌프라는 인물에게 가장 첫 번째로 수행해야 하는 과제는 직장인으로서의 업무나 가정의 안녕이 아니다. 나치라는 조직이다. 나치의 일원으로서 소속됐다는 한 가지 사실이 이 사람 인생에서 제일 중요하다. 왜? 초반부터 영화가 이 인물의 내면을 이미지로 강조하고 있다. 루돌프 회스가 누군가에게 축하받는다. 그런데 그 축하를 해주는 사람들이 나치 조직원들이다. 얼핏 보면 회색 옷 입은 사람이 떼거지로 몰려들어 누가 누구인지 구분이 안 된다(심지어 배경도 회색 저택이다). 영화가 고의적으로 카메라를 멀리 떨어트려서 누가 루돌프 회스인지 알 수 없게끔 묘사하는 것이다. 축하받는 사람과 하는 대상이 구분되지 않는다는 것. 이것은 명백하게 수신자와 발신자가 정해진 행동을 흐려놓겠다는 감독의 의도를 읽을 수 있는 부분이다. 개인보다 조직을 강조한 것이다.
또 이 인물이 직장인으로서의 활동반경과 쉴 수 있는 집의 바운더리가 그렇게 선명하지 않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옆에 산다는 것도 이상한데 거기서 일을 한다는 건 더 기괴하다. 자연인으로서의 모습이 조직에 잡아먹힌 루돌프의 모습을 보여주는 설정이 되는 것이다. 영화 후반부에 루돌프가 전출을 가니 마니 하는 설정이 들어간 것도 흥미롭다. 사실 이 에피소드 자체가 굳이 영화에서 중요하지 않다. 어쨌든 안 간 거라서 굳이 알 필요도 없고, 갈등이 격정적이지도 않다. 영화의 기-승-전-결이 이 전출 여부를 두고 쌓아 올린, 소위 ‘빌드업’ 한 것도 아니라 맥 빠지게 느껴진다. 하지만 이 일이 이 가족에게 끼친 영향이 중요하다. 조직이 루돌프 회스의 가족공동체를 해체시킬 정도로 주인공(회스)에게 절대적이었다는 의미다. 나치와 히틀러의 말이라면 뭐든 다 줄 수 있는 사람이다. 엔딩신에서 헛구역질이 날 정도로 내면의 무언가를 갖고 있지만 결국 어둠 속으로 걸어가는 그의 모습 역시 인물의 이런 부분을 설명하고 있다. 그의 무의식이 영화의 플롯에 그대로 나타난 것이다. 이렇게 루돌프의 내면을 보여주는 연출은 후반부에서 다시 반복된다. 초반 루돌프가 축하받는 장면과 후반부 나치 조직원들끼리 회의하는 장면은 수미상관처럼 반복된 것 같다. 왜? 회의를 주체하는 장면을 가장 첫 신에선 보여주지 않는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찍는 부감 숏으로 화자를 숨긴 것이다. 이다음 장면을 보면 영화 안의 회의 주제에는 회스가 제시한 근거가 중요하게 설정되어 있다. 다음 장면은 회스가 자기 의견을 역설하는 장면을 넣으면서 회의의 끝을 분명하게 보여주지도 않는다. 루돌프 회스가 회의에서 중요하다는 것만 묘사하고 그 안의 내용을 보여주지 않는 것이다. 루돌프 회스가 이 당시 나치라는 조직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컸기 때문에도 근거를 찾을 수 있으나, 영화 초반부를 생각해 보면 수미상관처럼 조직 안의 루돌프 회스를 강조하기 위함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단지 사운드의 힘만 믿은 게 아닌 비주얼의 힘이 조직에 휩쓸리는 루돌프의 모습을 보여줬다. 악의 평범성을 드러내는 연출인 것이다.
두 번째로 이야기할 수 있는 인물은 루돌프의 아내 헤트비히 회스다. 이 인물이 이 영화에 차지하는 물리적 비중은 굉장히 많다. 하지만 그 비중치고 영화 안에서 유효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인물은 아니다. 오히려 이 인물은 플롯 전면이 아닌 영화가 만들어지기 이전의 이야기를 담당한 캐릭터처럼 보인다. 근거는 간단하다. “내가 이 집을 가지려고 17년 동안 고민해 왔다!”라는 대사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시에 강조하고 싶은 것. 이 인물의 동선이다. 이 인물은 집 밖에 멀리 나가지 않는다. 루돌프가 타 지역으로 나가거나 헤트비히 어머니가 그녀의 집으로 도착한 것과는 대비된다. 전업 가정주부인 것으로 보이는 헤트비히. 남편 루돌프에게 ‘아우슈비츠의 여왕’이라는 말을 듣는다. 후반부 루돌프와의 갈등에서도 이 사람은 집 밖에 나가기 싫다. 남편을 속여서라도, 유대인들 고용해서라도 만든 집이니 만큼 애착이 강한 것이다. 이렇게 집에 박혀있는 헤트비히. ‘아우슈비츠의 여왕’이면 자기 집 안에 일어나는 것들에 대해 능통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이 영화가 이 인물을 어떻게 그리고 있는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인물은 집안사정에 그렇게 밝은 인물이 아니다. 오히려 관심이 짧은 것처럼 느껴진다. 첫 번째 근거. 이 사람이 집 안에 일어나는 상황을 통제하지 못한다는 증거는 대놓고 드러난다. 이 영화의 사운드 지분 중 크다고 볼 수 있는 아기의 울음소리도 그 예시 중 하나다. 그냥 ‘왜 이렇게 울까?’ 한 마디면 엄마로서의 역할이 끝나나? 후반부에 남자 형제들끼리 비닐하우스 같은 곳에서 다투다 형이 동생을 장난으로 가두는 상황이 벌어진다. 여기서 동생이 울고불고 소리 지르지만 어머니 헤트비히는 알아채지 못한다. 중후반부 폴란드 소녀가 사과를 수용소 근처에 묻는 장면이 있다. 그때도 이 헤트비히는 인기척을 느끼지만 구체적으로 알려고 하지 않는다. 강가에 재가 떠다니는 것도 헤트비히가 아이들을 씻는 장면은 있지만 원인을 예방한 다 던가 하는 진단이 없다. 어머니로서의 역할에 취해있기만 하지 실질적으로 ‘일 잘한다’라는 말을 듣기엔 어려운 것이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으로 영화 후반부에 묘사되는 루돌프 회스의 불륜은 이 인물(헤트비히)의 무능력함을 암시하는 대표적인 사건이다. 어디 다른 곳에서 바람을 피우는 것이 아니다. 루돌프의 집 근처에 있는 사무실에서 불륜이 이어진다. 루돌프의 아이가 “아빠 땀 냄새나!”라고 말할 정도로 이 남자의 불륜은 이 가정과 분리된 것이 아니다. 철저하게 남편이 속였기 때문에 불륜을 저지른 것 아니냐?라고 생각할 수 있다. 물론 루돌프 회스는 실제로도 가정적이지 않은 인간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헤트비히 의 대사 “오래전에 (전출이) 결정 난 것으로 보이는데 왜 말하지 않았냐”라는 말은 과연 그녀가 남편에게 어떤 존재였을까? 생각하게 만든다. 이 집안이 화기애애하다는 시각적인 만족감에 도취되어 가정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자각하지 못한다는 건 그녀의 분명한 패착이다. 마치 나치 독일과 히틀러가 집권하고 난 다음의 모습이 1차 대전 전후의 독일을 재건하고 있다고 믿었을 독일인들처럼 말이다. 글쓴이가 헤트비히가 2차 대전 당시의 독일인들을 비유하고 있다는 건 여기에서 온다. 나의 행동이 독일의 재건을 위해서라는 자기기만, 가정에 착실한 어머니라는 자기기만이 나치당의 지지자들과 헤트비히에 중요하게 작동하는 것이다. 이 비유에 의미를 부여하니 영화 안의 두 대사가 더 와닿는다. 유대인 학살이 기본적으로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은 채, “너희들(유대인)은 나 덕에 편하게 사는 거야”라며 남편이 널 재로 만들어버릴 수 있다고 폭언을 하는 것. 그녀가 가진 모순을 이 영화가 폭넓게 묘사하는 것이다. 또 후반부에 루돌프가 헤르비히에게 “우리의 성과”라는 식으로 “우리”를 강조하는 것이 흥미롭다. 당연하다. 자국민들을 속인 나치의 군인들도 당연히 문제가 있지만, 심정적 동조자로서 학살에 ‘무관심’과 ‘자기기만’으로 참여한 당시 독일인들도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그냥 단지 일상만 보여주는 줄 알았는데 그 이면에 담긴 의미가 무시무시한 좋은 각본의 힘이다.
두 캐릭터 말고 이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 중요한 것은 카메라와 사운드다. 우선 카메라. 이 영화가 카메라로 일상을 담는 방식이 특별하다. 그냥 일상적인 걸 담으면 모르겠는데 어디에서 훔쳐보는 것처럼 화면을 담았다. 실제로 검색해 보면 어렵지 않게 이 영화의 촬영 기법을 찾을 수 있다. 세트장을 만들고 카메라를 많이 설치한다. 대신 카메라가 어디에 있는지 말해주지 않는다. 이건 중요하다. 억지로 드라마를 배격했기 때문이다. 카메라가 대놓고 있다. 그럼 그건 대놓고 영화다. 배우들이 서로 얼굴 보면서 연기한다. 감정의 이입을 유발하고 곡진한 무언가를 탐구한다는 것. 이건 한나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에 대치되는 부분이다. 관심을 떼는 것이다. 그리고 이야기의 응집성을 위해서라도 감정이입을 유발하면 하고 싶은 걸 보여주기 어렵다. ‘얘 나쁘지?’가 되는 순간, 인물의 표정이 보이는 순간 비명의 의미가 옅어진다. 영화가 그은 선을 스스로 넘는 것이다. 촬영 구도만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를 명확하게 만드는 연출이었다.
하지만 이 카메라를 활용한 연출 중에 정말 중요한 것은 뭐니 뭐니 해도 시각적인 것으로 사방이 막힌 이미지를 강조한 것이다. 모든 샷에서 벽이 강조되는 건 아니다. 그런데 벽이 필요하지 않은 장면에서 굳이 벽을 보여준다는 게 핵심이다. 중후반부에 어떤 남자가 벽 너머의 풀숲에 어떤 것을 뿌리는 장면이 있다. 일반적인 카메라워킹이라면 벽을 등지고 찍는 게 맞다. 그런데 굳이 이 장면에서 벽과 남자, 풀숲이 같이 등장한다. 벽을 보여주고 싶었던 감독의 의도가 읽힌다. 더 나아가 청각적인 요소는 벽과 충돌하며 영화에 균열을 낸다. 남자가 숲에 무언가를 뿌리는 장면에서 들리는 소리. 어떤 남자가 비명인지 절규인지 질문인지 모를 소리를 지른다. 곧바로 총성이 들린다. 카메라는 여기서 총에 맞는 사람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벽만 보여준다. 마치 소리가 벽에 부딪힌 것처럼. 그 대신 관객들은 상상력이라는 게 있어서 벽과 소리만 보여줘도 이 상황이 어떤 일인지 대충 예상할 수 있다. 굳이 이렇게까지 사운드를 강조하는 이유? 아니 그 이전에 사운드를 어떻게 강조했을까? 벽의 이미지를 강하게 보여줘서 이 영화 안에 쳐져있는 벽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사실 이 영화를 본 사람에게 벽의 의미는 간단하다. 무관심이라는 벽이다. 계속해서 안에 있는 야채니 꽃이니 라일락이니 수영장이니 하는 것들을 보여주지만 무관심이라는 벽이 인물의 상황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벽의 의미는 앞에서 언급한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과 닿고 있다. 악의 평범성을 이 영화가 사운드와 카메라의 존재로 보여준 것이다. 이 벽의 존재 덕에 카메라는 무엇을 찍을지에 대한 고민도 끝냈다. 분명한 악에 대해서는 카메라로 찍고 희생자들은 사운드를 통해 표현한다. 이 영화의 인물들은 악에 익숙한 악인이 되는 셈이다. 이 맥락에서 열 카메라로 표현한 소녀를 설명할 수 있다. 악이 아닌 무언가의 존재, 그러니까 유대인에게 사과를 주는 따뜻한 마음이 이 영화의 카메라에 담기지 못한 선의가 된다. 사운드만 부각되는 것이 아닌 촬영에 의한 연출이 영화의 주제를 강조했다.
이 영화의 사운드는 영화의 핵심을 담는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단란한 가족들의 일상 속 비명이 틈입한다. 이 비명이 가지는 임팩트는 영화를 본 모든 사람이 다 같은 의견을 말할 것 같다. 비명도 비명 나름이다. 어떻게 기괴한 소리만 다 골라서 삽입했는지 이런 요소들도 다 감독의 감각이 크게 주요한 것으로 보인다. 전작 <언더 더 스킨>에서 외계인(스칼렛 요한슨)이 지구인들과의 교감을 표현하는 방식이 이 영화에서 사운드로 치환된 셈이다. 이 선택은 아주 좋았다. 학살의 진상을 원초적인 방식으로 다가가게 한다. 원초적인 기억으로 남았다? 우리 일상 속에서 비슷한 것만 보면 생각난다는 의미다. 이 의미는 중요하다. <헤어질 결심>에서 감정적인 임팩트로 관객에게 큰 효과를 낸 것과는 다르게 신기한 방식으로 관객에게 영향을 준다는 점에서 청각을 아주 잘 활용했다. 이 영화 예술의 근본에는 무성영화라는 게 있다. 이 말은 즉슨 영화라는 예술 자체가 시각적인 걸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 인지심리학에서 인류는 시각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연구도 있다. 이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영화라는 예술이 가진 두 특징을 과감하게 무시하며 청각적인 요소를 강조한다.
하지만 영화가 청각적인 것을 활용하는 방식의 화룡점정은 오프닝과 엔딩에 있다. 이 영화의 청각적인 요소에는 뭐가 담겨 있을까? 비명이다. 유대인들의 절규가 담겨있다. 오프닝을 본다. 오프닝은 검은색 화면인 채로 음악을 크게 틀어놓는다. 첫 장면부터 청각적인 것이 중요하다고 힘을 꽉 주는 것이다. 이 기점으로 영화의 청각적인 것에 대해 연이어 생각해 보면 이후에 비명소리가 들린다. 대신 시각적인 부분이 청각적인 장면과 먼저 시작하지 않는다. 그럼 비명소리가 이 이야기의 이전에 깔려있다는 의미처럼 들리기도 했다. 그리고 영화의 엔딩으로 날아간다. 루돌프가 헛구역질을 한다. 현대의 박물관 노동자가 건물을 닦는다. 닦는 소리가 부스럭거린다. 그리고 다시 영화의 시점으로 돌아와 루돌프 회스가 어둠으로 걸어간다. 시점이 세계 2차 대전 한가운데로 돌아간 것이다. 그다음이 엔딩이다. 이 영화의 엔딩은 오프닝처럼 청각적인 요소만 부각한다. 영화 후반과 초반이 비명소리로 이루어져 있고 그 중간이 직선으로 흘러가는 일상이다. 이 영화는 일종의 타임라인인 것이다. 영화의 과거와 미래, 오프닝과 엔딩이 청각적인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 영화 안에서 비명소리가 청각적인 요소로 강조된다는 것. 그렇다면 영화의 과거와 미래를 이 감독이 어떻게 해석했는지에 대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홀로코스트는 곧 비명과도 같았다는 의미처럼 들렸다. 악인들이 시선을 돌리지 않아 만든 비극이 홀로코스트라고 말한 셈이다.
괴물 같은 영화다. 음향, 촬영, 각본, 연출 모든 부분에서 한 부분의 극점에 다다른 능력을 보여줬다. 심지어 산드라 휠러를 위시로 한 배우들의 연기도 굉장히 뛰어나기까지 하니 무결점의 영화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굳이 꼽자면 극의 재미를 부각한 영화가 아니라서 누군가는 지루하다고 느낄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런 위험부담(?)에도 글쓴이가 장점으로 확신하는 것이 있다. 정말 필요한 인간의 조건이 무엇인지 묻는 것이라는 점이다. 사실 이 영화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만큼 징글징글하고 강박적으로 관객에게 질문한다. 사실 이 사람들이 왜 인간 근처도 가지 못하는지는 영화가 쉽게 설명하고 있다. 이 설명하는 부분은 곧 한나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과도 이어진다. 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이라는 책에서 인간의 관계성에 대해 언급했다. 정치적인 행위부터 시작해 불멸하게 남는 여러 기록까지, 또 공/사적인 공간의 필요성까지 이 세상을 이루는 모든 것들이 다 함께 살아가는 것에서 온다고 역설했다. 이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이 <인간의 조건>에 대한 깊은 통찰을 아주 속 깊게 우려낸 사골국처럼 느껴진다. 이 영화에서 대화하는 사소한 것들, 공간들, 하녀의 움직임부터 루돌프 회스의 동선과 공간까지 이 모든 것이 <인간의 조건>의 목차처럼 느껴진다. 충격적인 영화다. <액트 오브 킬링>과 함께 과거의 비극이 단지 과거에만 국한될 것이 아닌, 날카롭고 깊은 인사이트를 보여주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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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통의 가족, 보통의 뻔뻔함, 보통의 부끄러움
대형사고
이 영화의 주인공은 잘 나가는 변호사 재완(설경구) 부부다. 돈 많이 버는 변호사 재완. 여러모로 부러운 인생이다. 그 부러운 인생을 1000% 누리고 있는 건 젊은 아내 지수(수현)다. 온갖 럭셔리한 와인과 음식으로 매일을 즐기고 있는 지수. 부부사이도 좋아 재완에겐 사실 걱정할 게 별로 없다. 그 적지 않은 걱정거리 중 하나는 딸 혜윤(홍예지)이다. 아낌없는 주는 아버지인 재완. 체크카드건 신용카드건 선뜻 내준다. 심지어 공부까지 꽤나 하는 편에 인간관계도 좋으니 아버지로서의 역할도 그렇게 나쁘지는 않은 것 같다.
이 영화의 다른 주인공은 자상한 소아과 의사 재규(장동건) 부부다. 어느 종합병원의 의사로 근무하고 있는 재규. 불친절한 의사가 아니라 동네 아저씨같이 친근한 사람이다. 아픈 사람의 보호자에게 공감할 줄 알고, 아내에게도 가정적이다. 심지어 강직하기까지 하다. 소속된 병원에서도 뛰어난 업무처리능력과 올곧은 성품으로 후배들의 존경을 받는다. 친형인 재완보다 경제적으로 풍족하지 않을지 몰라도 인간으로선 훌륭한 사람이다. 심지어 아내 연경(김희애) 역시 약자에게 눈물 흘릴 줄 아는 사람임과 동시에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는 모범생이다. 가족 간의 관계도 좋은 편인데, 또 치매에 걸린 재규의 어머니도 정성스레 보살필 정도다. 형만큼은 아니더라도 수입이 안정적인 재규. 역시 별로 걱정할 것이 없을 것 같았다. 몇 안 되는 걱정거리는 아들 시호(김정철)다.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는 시호. 유일한 친구라곤 사촌누나 혜윤이다. 뭐 형제의 자녀들끼리 친하게 지내는 게 문제야? 두 부부가 딱히 이 둘의 사이에 간섭하지 않는다. 그러던 도중 사건이 터진다. 혜윤이 위축된 시호를 위해 친구들이 가득한 파티에 동행했고, 이 두 사람이 술김에 대형 사고를 친 것이다. 나의 자녀들이 사람을 죽였다. 과연 두 부부는 어떤 선택을 보여줄까?
지지부진한 타율 속 안타
글쓴이가 이 영화를 보고 나서 든 가장 첫 번째 생각. 이런 영화를 기다려왔다는 것이다. 어느새부턴가 한국 상업영화에 문학적인 느낌이 별로 없는 듯하다. 올해 흥행했던 한국영화를 보면 다 장르적인 쾌감에 집중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탈주>나 <베테랑 2> <파묘> 같은 영화를 생각해 보면 다 별개의 작품이긴 해도 ‘팽팽한 긴장감이 재미있었어’라고 결론 내기 쉽다. 영화가 종합예술이기 때문에 줄 수 있는 시각적인 쾌감을 영화의 동력으로 삼는다. 이것에 반대선상에 있는 <리볼버> 같은 영화는 사실 사람들이 주연 배우의 기행만 기억하지 많은 사람들이 보지는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본작 <보통의 가족>은 이 영화는 소설을 원작으로 해서 그런지 몰라도 정밀하게 짜여있는 세상을 그대로 바라본 것 같은 느낌이 있다. 글쓴이 머릿속에 생각나는 소설. 김기태 작가의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이란 작품이다. 세계를 그대로 반영하는 김기태 작가의 저널리스트적인 서술이 이야기 전면에 깔려있어서 핵심으로 작동한다. 또 세계를 구성하는 세상에 대해 성실하게 묘사한다. <보통의 가족> 역시 이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이라는 소설처럼 이야기를 보여준다. 이야기를 보여주는 데 있어 어떤 장면은 종교를 끌어온다던가 먼발치서 촬영한다던가 하는 방식으로 너무 내밀한 사연은 쓰지 않도록 유도한다. 또 이 영화를 둘러싼 인물들의 판단과 감정, 세계관들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재완과 재규 형제의 내면을 보여주는 사건이 시간순서로 중요하지는 않지만 소설 초반 설정 설명하듯 핵심이 된다는 점에서 문학적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런데 뭔가 심오한 작품성만 드러낸 영화다? 아니다. 이 영화는 장르적으로서도 뛰어난 스릴러물이다. 빠른 템포로 장면을 쳐내면서 이야기를 힘 있게 전개한다. 또 어떤 장면에서는 배우의 연기와 사건 구성을 기괴하게 보여줌으로써 기이한 동력을 촉발시킨다. 어떤 면에서는 <서울의 봄>이 장르적으로 좋은 영화였다는 점과 공통점을 가지기도 한다.
인간 광기의 근원을 묻다
이 영화에서 ‘보통’의 의미는 러닝타임이 가면 갈수록 변하고 있다. 초반부. 영화가 두 가족을 보여준다. 재완 가족은 쉽게 말해 금수저다. 돈이 많은 재완. 아버지가 잘 나가는 변호사라는 걸 너무나도 잘 아는 딸 혜윤(홍예지). 혜윤은 평범한 사람이라고 보기 어렵다. 외모도 예쁘고 아버지가 돈이 많으니까 평범한 학생처럼 행동하지 않는다. 반대로 재규 부부의 아들 시호는 평범한 아들이다. 평범한 외모와 체형에 학원도 다닌다. 아마 성적도 그렇게 뛰어난 편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시호가 겪는 일은 전혀 평범하지 않다. 이런저런 상황을 겪으면서 인물 내면에 고요한 폭력이 내재되어 있다. 평범하지 않은 가족과 평범한 가족이 대칭을 이루면서 묘사되어 있다. 두 인물 간의 대비가 명확하게 드러나면서 영화가 인물 간의 차이점을 묻는다. ‘어떤 지점에서 두 사람이 이렇게 다를까?’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물론 영화가 단순히 이 대비만 보여주면서 질문하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 반복과 차이라는 방식은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난다. 이 과정이 굉장히 촘촘하게 짜여 있다. 첫째로 반복이다. 영화에서 유튜브라는 매체는 정보를 공유한다는 점에서 정보를 관객에게 전달한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굉장히 중요한 맥락을 가지는 것이 있다. 두 가족 6명의 인물이 갖고 있는 공통점이 있다. 이 영화에서 ‘보통’이라는 테마는 여기서 구현된다. 유전적으로 ‘보통’의 특성이 두 가족에게 그대로 구현되기도 하고, 사회적으로도 이 인물들에게 영향을 주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이 부분은 영화 안에서 굉장히 중요하다. 직접적으로 보여주진 않지만 간접적으로 영화 내내 빼곡히 반복될 만큼 작품이 채택한 모티브이기도 하면서 엔딩을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
거울
이 영화에 등장하는 진짜 형제는 한 쌍이다. 재완과 재규다. 보통 형제라고 하면 피를 나눴다는 말을 쓴다. 이런 생물학적 배경과는 반대로 영화에서 가장 대립각을 세우는 인물은 재완과 재규다. 실리주의자인 재완과 윤리적인/도덕적인 문제를 중요시하는 재규. 두 인물은 이 영화의 윤리적인 딜레마를 정통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영화 후반부가 되면 두 인물은 다시 한번 엇갈린다. 두 형제가 영화 내내 으르렁거림에 따라 둘은 전혀 다른 인물유형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걸 전부 의도하고 묘사한다. 영화가 이 두 남자의 차이점을 부각하면 부각할수록 이 사람들이 유전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일반적으로 ‘보통’하면 여러 사람들이 가진 공통점을 의미하는 단어다. 이 영화에서 두 남자가 공유하고 있는 ‘보통’은 일반적인 한국사회에서 범상치 않은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보통의 의미를 가장 일반적인 ‘가족’이라는 소재로 뒤튼 것이다.
여기서 이 보통의 의미를 뒤틀었다는 의미를 형제에만 국한 지으면 영화의 밀도가 떨어졌을 것이다. 어떤 것을 주장하는 데 있어 이 영화는 여러 근거를 제시했다. 대표적으로 두 형제의 자녀인 시호와 혜윤는 사촌관계지만 영화 안에서는 사실상 형제처럼 묘사된다. 아예 정반대의 상황에서 자랐지만 두 사람은 연대한다. 이 연대의 근거가 ‘두 사람이 친척(가족)이라서’라는 점에서도 중요하다. 하지만 글쓴이가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재완 부부와 재규 부부의 공통점이다. 재완과 재규의 내면이 서로 엇갈리면서 두 사람이 형제인 것을 드러내고, 그것이 보통이라는 특성을 비튼다는 것과는 별개다. 이런 특별해 보이는 사람들이 사실은 일반적이고 보통의 상황 속에서 만들어졌다고 우회적으로 보여준다. 이 대비는 두 가족의 밖과 안에서 반복된다. 수많은 가족들이 영화 안에서 등장하고 퇴장하는데 가족을 넘어 인간 광기의 본질을 다루는 데 있어 적합한 이야기 흐름이었다. 딱 두 사람만 떼서 보여주기보다는 연이어 이어 붙이며 보통의 의미가 여러 방식으로 보여준다는 걸 보여주는 것이다.
이 반복과 차이라는 테마를 밀도 있게 보여줄 수 있었던 이유는 인물들의 섬세한 내면을 보여줬던 허진호 감독의 역량 덕이다. 이 영화가 보여주고자 했던 인간 내면의 그림자를 어떻게 보여줬을까? 글쓴이가 위에서 적은 내용을 중심으로 써보자면 반복과 차이, 공통점과 차이점이다. 복잡할 수밖에 없다. 이런 것들을 중요하게 보여주려면 당연히 여러 사람들이 각본 안에서 필요하니까. 하지만 이 영화는 이 복잡한 것들을 인물의 내면을 이해할 수 있게, 간단하게 보여줌으로써 ‘저 사람이 저렇고, 과거에 그 사람이 그랬네’라고 이해하기 쉽다. 이걸 영화가 카메라워크로 왜곡시키면거나 정면으로 보여준다. 또 템포를 짧게 잘라내면서 이야기의 흐름이 풀어지지 않게끔 긴장감을 유지한다. 이 연출이 허진호 감독의 영화들, 대표작이라고 볼 수 있는 <행복>이나 <8월의 크리스마스> <봄날은 간다>와 차이점이 있다고 말할 사람도 있겠으나 글쓴이는 그렇게 생각 않는다. 이영화들(허진호 감독의 영화들)이 가진 감정적 전달력이 본작에서 여지없이 이어진다는 점에서 ‘역시 허진호다!’싶다.
좋은 각본과 연기
이 영화에 대한 총평은 '웰메이드'다. 장르적으로 재미있고, 문학적인 연출로 영화가 확실한 기획의도를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훌륭하다. 또 설경구-수현-장동건-김희애 네 배우의 훌륭한 퍼포먼스를 꺼내는 허진호 감독의 연출가로서의 역량이 돋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그 탄탄한 연출을 타고 도착한 엔딩에서 충격적인 광경을 목격하게 된다. 이 광경까지 보고 나서 드는 생각. 과연 보통의 의미는 뭘까? 우리 안에도 이 영화가 상정한 '보통'이 있지는 않을까? 상업적으로 거대한 성공을 거둘 것 같지는 않지만 2024년을 되돌아볼 때 우선순위에 있을 법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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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IWFF 데일리] 세 여자의 거울치료
제목 : 그렇고 그런 사이
감독 : 김인혜
시놉시스 : 선지는 새언니가 된 친구 진희와 제사상에 올릴 전을 부친다. 분명 결혼 전까진 쿨한 친구였는데, 오늘따라 진희가 엄마 영순을 대하는 태도가 불편하다.
결혼과 파혼, 그 사이
널부러져있는 짐, 그리고 쌓여있는 '선지'의 이름이 적힌 청접장. 이 장면만 봐도 '선지'는 파혼을 하고 본가로 돌아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정말 "급" 짠해보이는 선지의 뒷모습. 그게 영화 <그렇고 그런 사이>의 시작이다.
'선지'는 왜인지 눈치를 보며 거실로 가고, 거실에는 한창 명절 음식 준비를 하고 있는 엄마 '영순'. '영순'은 결혼한 지 6개월이 지났는데도 방문을 안한 며느리 '진희'의 뒷담화를 '선지'에게 늘어놓는다. 그 때 알 수 있는 사실은, '진희'는 '선지'의 오랜 친구이고 '선지'의 소개로 인하여 '선지'의 오빠인 '선호'와 결혼했다는 사실. 정말 결혼과 파혼 사이의 오프닝 시퀀스.
한복을 안입고 왔구나
호랑이도 제말 하면 온다더니, '진희'는 때마침 방문한다. 그때 엄마 '영순'은 "한복을 입..을 줄 알았는데" 라며 말 끝을 흐린다. 요즘도 한복을 입는구나. '진희'는 핫핑크색 트레이닝복을 입고와서는, 일할 때 편한 복장이 최고라며 능글맞게 상황을 넘어간다. 여기서 '영순'의 두번 째 충격. 바로 이어지는 '진희'의 명절선물은 바로 샤인머스캣. 이 장면을 보면 '진희'와 '영순'은 신세대 며느리와 아직 옛날을 살아가고 있는 시어머니의 충돌. 그리고 그걸 얄밉게 지켜보는 남편이자 아들 '선호'.
그리고 2N년째 전 부쳐본 솜씨로 '선지'는 능숙하게 전을 부치지만, '진희'는 이 광경이 낯설다. " 어머니 요즘 사먹는게 최고예요~"를 시전해보지만, '영순'은 칼같이 거절한다. 요즘 쉽게 볼 수 있는 명절의 분위기 아닐까. 그러던 중 '진희'와 '선지' 그리고 '영순'은 각자의 이유로 전을 방치하고, 전은 새까맣게 타버린다. 마치 '영순'의 마음처럼.
세 여자의 거울 치료
'거울 치료'란 즉 역지사지다. '영순'은 '진희'의 시어머니기도 하지만 딸 가진 엄마이기도 하고. '진희'는 며느리이자 '선지'의 새언니이지만 누군가의 소중한 딸이다. 마찬가지로 '선지'도 훗날 누군가의 며느리지이자 '진희'의 아가씨이고, '영순'의 소중한 딸이다. 그들은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다가 어떤 사건으로 인하여 사실을 깨닫는다.
깨닫는 과정이 굉장히 웃기다. 영화관에서 소리내며 웃는 일이 거의 없는데, 오랜만에 웃게된 영화다. 뭔가 정말 있을 법 한 일을 다루고 있고 그 이야기를 있을 법 하게 풀어내서인지 캐릭터의 감정 이입이 잘되었다. 30분의 러닝타임을 세 여자에게 골고루 썼달까. 알차다.
씨네랩 에디터 ria
제24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08.25 - 09.01
'아시아단편 단편선 2' 상영 시간표
2022-08-27 17:00 - 18: 36
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 1관
2022-08-29 19:30 - 21:06
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 5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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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만의 숲
한 아름다운 커플이 결혼을 한다. 그 결혼식의 참석자이자 약간은 얼간이같은 나일스는 사실 남의 결혼식이 열리는 그 날을 반복해 살아가고 있다. 자신의 결혼식도 아니고, 자신의 친구도 아닌, 자신의 여자친구의 친구 결혼식을 어제도 보았고, 오늘도 보며, 내일도 보게 될 것이다. 무한타임루프 세계관에 갇혀버린 것이다. 그렇게 남들에게 지나가는 하루이지만 나일스에게는 똑같이 반복될 그 하루를 사는 와중에 세라를 만나 의도치 않게 그녀를 이 타임루프 세계에 끌어들인다.
나일스와 광란의 밤을 보내다가 타임루프 세계관에 갇혀버려 그의 인생을 망친 대가로 나일스를 끊임없이 괴롭히는 나일스 사냥꾼 로이를 포함해 똑같은 하루가 반복되는 불멸의 저주에 걸린 이들은 과연 이 역경을 헤쳐나갈 수 있을까, 아니, 헤쳐나갈 마음들은 있는 건가??
1. 병맛 코드 속 숨겨진 진지한 메시지
이 영화는 정말 웃기다. 영화 전체적인 분위기는 병맛을 넘어 정말 통통 터진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그런데 이 영화가 주고자 하는 메시지는 결코 가볍지만은 않다.
영화 속에서 타임루프 세계관에 갇힌 나일스, 세라 그리고 로이를 보고 있자면, 하루하루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일상에 지친 현대인들을 보는 것 같았다. 똑같이 반복되는 하루에 허우적대는 그의 모습은 큰 보상없이, 이벤트 없이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똑같이 흘러가는 일상을 그저 흘러가는 대로 살다보니, 어제 내가 저녁으로 뭘 먹었는지, 내가 지인을 만난 게 어제인지, 그제인지 잊는 나의 모습을 보는 듯했다. 일에 치이고, 사람에 치이면서 하루하루 버텨내고 있는 사람들의 체념, 방황에서 비롯된 현대인들의 우울한 정서를 느낄 수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다보니, 분명히 영화는 병맛 코드로 진행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알 수 없는 짠함, 우울함을 느낄 수 있었다.
현대인들, 특히 직장인들의 삶은 큰 변화랄 것이 없다. 그저 오늘도 회사와 집을 오가며, 내일도 회사와 집을 오갈 것이고, 어제도 회사와 집을 오갔을 것이다. 그 와중에 상사에게 스트레스를 받았을 수도 있고, 다른 친구와 비교를 하며 자괴감에 빠졌을 수도 있으며, 자신이 옳지 못한 행동을 저질러 자신을 자책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 그렇게 인생 자체에서 크게 만족감을 느끼지 못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방법을 잊은 사람들이 정말 많다.
"난 과거에 뭘하고 살았는지 잊었어요. 기억이 잘 안나요."
현대인 중에서도 나일스는 이미 인생에서 이렇다할 성과를 이뤄내지 못하고 길을 잃어버렸는데, 다른 길을 찾아가 볼 생각조차 안하고, 체념한 사람을 상징한다. 앞으로 더 나아가볼 생각조차 포기한 사람들, 말하자면 우울증에 빠진 사람들을 생각나게 하는 캐릭터였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마냥 웃고 있지만 속은 문드러진 사람들을 보는 것 같았다. 미래에 대한 기대가 없으니, 과거에 내가 한 실수들을 바로잡을 생각도 못하고, 과거를 잊은 듯한 사람으로 보였다. 그래서였는지, 그냥 그가 처한 상황, 타임루프의 원인도 궁금해하지 않고, 그저 시니컬하게 오늘은 어떤 일을 하면서 어떻게 흘러갈지 다 보이는 결혼식 날을 보내야 할까 고민을 하면서 그저 현실에 안주하는 모습을 보인다. 누군가는 그가 미래를 기대할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으니, 현재라도 충실하게 사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지 않냐고 할 수도 있지만 오히려 타임루프 상황에서 고통받고 있으면서도 타임루프를 벗어나 볼 생각도 없이 체념하고, 안주하는 모습이 더 현실성 있다고 보여진다.
반면, 세라는 나일스와는 달리, 그녀가 처한 이 말도안되는 현실을 바꿔보려고 발버둥치는 의지를 보여준다. 그녀가 이토록 발버둥치는 이유는 그녀의 내면 속에 자리잡은 자기비하적인 감정, 자책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가족에게 도움이 되고 있지 않다고 느끼는 자책감, 나는 사람들에게 온전히 사랑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자기비하적 감정은 그녀를 갉아먹고 있었지만 그녀 내면 깊은 곳에 그녀도 이런 거지같은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은 반작용적 감정도 있음을 보여주며, 그녀의 부정적인 일면이 그녀의 진취적인 면모를 더 부각시킨다.
이 비슷한 듯 다른 두 남녀의 차이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시사점은 모든 사람들이 똑같은 쳇바퀴 같은 일상을 살고 있다고 가정했을 때, 결국 그 상황을 헤쳐나가는 원동력은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의지에 달려있음을 시사한다.
2.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
영화가 진행될 수록 영화 속 캐릭터들은 각자의 의견을 내세우며, 각자만의 인생관을 대표하는 논리를 펼치는데, 그 차이를 비교해보는 것도 재미있다.
나일스의 관점은
"어차피 이 타임루프 세계를 나가도 크게 대단하게 좋은 일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 세계는 이미 내가 익숙해진 세계이고, 크게 부족한 것이 없으니, 예상치 못하게 위험해질 수 있는 타임루프 밖의 세계는 이제 관심없어졌다."
라고 한다면, 세라의 관점은
"그래도 이 타임루프 세계를 벗어나면, 우리는 내일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 있게 되지 않는가, 내가 과거에 행했던 과오들을 털어내지 못한 채 죄책감에 시달리면서 이 똑같은 일상 속에서 새로운 무언가를 시도한들 무슨 큰 의미가 있겠는가, 이렇게 죄책감을 안고, 안정감을 추구하기 보다는 과거를 청산하고, 위험한 불확실성에 배팅을 해보고자 한다."
라는 것이다. 이 비슷한 듯 다른 두 남녀의 차이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시사점은 모든 사람들이 똑같은 쳇바퀴 같은 일상을 살고 있다고 가정했을 때, 결국 그 상황을 헤쳐나가는 원동력은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의지 뿐만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을 시사한다.
이런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는 타임루프 세계관에서 살고 있는 이 두 남녀 뿐만이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적용해 볼 수 있다. 이런 관점은 결국 안정감 vs 도전 정신으로 압축해 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은 어떤 관점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혹은 당신은 어떤 관점에 동의하는지. 나는 개인적으로 세라에 생각에 동감하는 편이다.
3. 당신의 어바인은 무엇인가요
개인적으로 세라의 관점에 동의하지만 로이처럼 타임루프 세계관에서 꾸준히 살아가는 것에 대해 아주 부정하지도 않는다. 어차피 벗어날 수 없는 세계라면, 나만의 안식처를 찾아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하루 중에서 자신이 긍정하고 살만한 이유를 찾는다면 그것도 그것대로 괜찮은 삶일 것이다. 로이가 그러했듯이.
하지만 난 이게 나일스의 시니컬한 체념과는 달리 평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일스는 자신만의 삶의 이유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다가 체념한 것이었다면, 로이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똑같이 진행될 날들이지만 자신의 가족들의 모습을 보면서 흐뭇해하고, 자신의 아내가 더 이상 나이들지 않을 수 있음을 긍정하면서 자신의 삶까지 긍정하니, 더 이상 나일스 사냥꾼 노릇을 하지 않게 되었다. 더 이상 폭력을 행사하면서 자신의 망가진 인생을 책임을 나일스에게 돌리지 않아도 될만큼 행복하게 살 만한 숨통을 찾았기 때문이다.
이런 로이의 삶의 방식을 통해, 누군가는 세라처럼 쳇바퀴 같은 삶을 용기있게 나올 수 없을지라도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해 남탓을 하지 않고, 자신만의 어바인, 즉, 인생의 소확행을 찾고, 긍정적인 마음을 갖고 삶을 살아낸다면, 그 삶을 체념으로 점철된 망가진 삶이라고 누가 평할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처럼 우리 모두 조금씩 우울하고, 자신을 자책하고, 원망하고, 가끔 남도 원망하면서 조금은 찌질하게 살아가고 있지만 가끔 자신을 위로하거나 자신을 기쁘게 하는 당신만의 어바인을 찾아낸다면, 당신은 세라처럼 쳇바퀴 같은 삶을 뚫고 나갈 용기가 없음을 비관하면서 살아갈 필요도 없어질 것이다. 결국 이 영화는 우리 모두 거창한 용기 없어도 되니까 자신만의 숲을 찾아 안정적이고 긍정적인 마음으로 버텨내는 미학에 대해 고찰하는 영화이다.
그래서 묻습니다. 당신은 당신만의 어바인이 있나요?
■ 해당 영화의 시사회는 씨네 랩의 크리에이터로서 참석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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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b 2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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