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LAB2022-07-08 06:05:50
[N년전 오늘의 영화] 소년시절의 너
영화 <소년시절의 너>가 궁금해?
안녕하세요!
영화/OTT 콘텐츠 큐레이션 웹 매거진 '씨네랩'입니다.
이번 주 바로 N년 전, 오늘 개봉한 영화에 관해 이야기해보는 시간을 가져볼까 합니다.
오늘은 2년 전에 개봉한 증국상 감독의 <소년시절의 너>에 대해 이야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 네이버 영화
영화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를 연출한 증국상 감독의 두 번째 장편 연출작인 <소년시절의 너>는
79개 부문에서 노미네이트 되었으며, 61개 부문에서 수상하였는데요. 중국 개봉 당시, 예매 7시간 만에
170억 원의 실시간 예매량을 기록하였고, 개봉 5일 만에 수익 1,400억 원을 돌파하였으며 3주 연속 박스오피스 1위 유지하였습니다.
깊은 감정 연기와 통통 튀는 매력으로 국내 관객을 사로 잡은 저우동위와 중국 인기 아이돌 그룹 TF BOYS의 이양천새가 출연하며 화제를 모았습니다.
특히 이양천새 배우는 장편 영화 첫 주연 작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양하고 복잡한 내면 연기를 표현해내며 열연을 펼쳤습니다.
이전까지 중국에서 주로 나왔던 청춘 로맨스 영화가 아닌 사회적 문제를 다루었기에 작품성에 대한 호평으로 이어질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영화 <소년시절의 너>는 왓챠에서 시청할 수 있으며,
웨이브, seezn, U+모바일tv, 티빙, 네이버 시리즈온에서 대여하여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소년 시절의 너>의 T.M.I
1. 홍콩 금상장 영화제에서 8관왕 달성
ⓒ 네이버 영화
<소년시절의 너>는 제39회 홍콩 금상장 영화제에서 최우수 작품상, 감독상, 여우주연상 등
총 8개 부문에서 수상하였습니다.
2. 저우동위의 눈물 연기
ⓒ 네이버 영화
영화에는 저우동위 배우가 우는 장면이 많이 나옴에도 불구하고 매번 다른 눈물 연기를 선보인 저우동위.
실제 관계자가 말하길 영화 속에서 저우동위가 등장하는 18번의 눈물 연기 장면에서 평균 7.5분이 소요되었다고 한다.
3. 삭발
ⓒ 네이버 영화
저우동위와 이양천새 두 배우 모두 실제로 삭발을 하였으며, 두 배우를 응원하기 위해
감독과 제작진도 함께 삭발을 하였다고 한다.
4. 이양천새 배우가 가장 많이 NG를 낸 장면
ⓒ 네이버 영화
이양천새 배우가 가장 NG를 많이 낸 장면은 사과를 깎아서 첸니엔에게 주는 장면이었다고 한다.(삭제된 장면)
사과를 깎다가 껍질이 계속 끊기는 바람에 여러 번 촬영했다고 한다.
5. 면회 장면에서 이양천새의 웃음
ⓒ 네이버 영화
두 사람이 눈물을 흘렸던 면회 장면에서 증국상 감독이 웃음을 지어보라고 디렉션을 주었고,
이를 듣고 저우동위 배우가 입모양으로 '바보'라고 했고, 이를 본 이양천새 배우가 웃음을 지은 것이었다.
<소년 시절의 너>가 좋았다면?
<소년시절의 너>의 여운에서 헤어나오지 못하시는 분들, 영화를 좋게 보신 분들은
동일 감독인 증국상 감독의 영화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를 추천드립니다!
유수 영화제에서 러브콜을 받았으며, 중국의 대표 영화제 금마장에서도 2관왕을 수상한 작품입니다.
<소년시절의 너>는 왓챠에서 시청할 수 있습니다!
씨네랩 에디터 cammie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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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멈출 수 없는 마음 속 ‘둠둠’
- 우리나라에 다섯 군데뿐인 돌비 시네마관에서, 듣는 경험이 인상적인 영화 한 편을 감상했습니다. 돌비 시네마는 돌비 비전 HDR 영상과 돌비 애트모스 음향을 사용하는 돌비(Dolby) 사의 상영관입니다. 색다른 극장 경험을 제공하는 이곳에서 디제잉을 소재로 한 영화 <둠둠>을 만났습니다.<둠둠>은 ‘디제잉' 하면 떠오르는 강렬한 사운드가 러닝타임 내내 귓가에 울리는 영화입니다. 하지만 토해내듯 터져 나오는 사운드와 달리, 그 소리를 만들어내는 인물은 하염없이 말을 삼킵니다. 여타 음악 영화와는 다른 분위기가 맴도는 <둠둠>. 이 작품은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을까요?※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아 9월 6일(화)에 진행된 <둠둠>의 시사회를 통해 영화를 감상했습니다. <둠둠>은 2022년 9월 15일 국내 개봉 예정작입니다.둠둠Doom Doom<둠둠>은 DJ 출신 미혼모 ‘이나'가 엄마 ‘신애'에게서 벗어나 음악을 향한 열정과 자신의 아기를 되찾는 여정을 그린 작품입니다. ‘이나'에게 엄마 ‘신애'는 끊임없이 반복되어도 절대 정지 버튼을 누를 수 없는 음악 같은 존재입니다. 지진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달리는 안전 염려증 환자 ‘신애'는 밤낮 가리지 않고 타카질을 하며 벙커를 만듭니다. ‘이나'는 동네 주민의 원성에도 으름장을 놓아버리는 엄마가 답답하지만, 어찌하지는 못합니다. ‘이나'는 끝없이 걸려 오는 안전 염려증 엄마의 전화를 무시하지만, 어찌하지는 못합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엄마는 미혼모 ‘이나'의 아기를 입양 보내고 음악을 그만둘 것을 강요합니다. 이때도 ‘이나’는 어찌하지 못합니다. 결국 음악을 관두고 상담원으로 일하며, 엄마 몰래 위탁 가정에서 아기를 돌보죠. 그렇게 엄마를 견뎌오던 ‘이나’는 마지막으로 디제잉 대회에 도전함으로써 견딜 수 없는 ‘엄마'라는 음악을 꺼버리고, 음악과 아기를 되찾으려 합니다.<둠둠> 속 모녀 관계는 얼마 전에 감상한 <경아의 딸> 속 모녀 관계와도 비슷합니다. 딸의 비극을 딸의 탓으로 몰아세우는 엄마와 그런 엄마에게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딸. <경아의 딸>의 딸은 갑갑한 엄마와의 연을 끊어버렸지만, <둠둠>의 딸은 엄마를 견뎌냅니다. 웃어 보이지는 못하더라도, 엄마가 원하는 삶을 살아주죠. 생각해보면 엄마의 막말에 상식적인 대응을 한 건 <경아의 딸> 속 딸입니다. 하지만 현실 속엔 엄마의 막말을 견디며 살아가는 <둠둠> 속 ‘이나’ 같은 딸들이 더 많습니다. 엄마 ‘신애'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도 말을 삼키는 ‘이나’가 답답하면서도 한편으로 공감이 가는 이유입니다.딸 ‘이나'와 엄마 ‘신애'의 뿌리 깊은 갈등은 의외로 한순간에 해소됩니다. 엄마 ‘신애'의 팔에 못이 박히는 사고가 발생하면서 말이죠. 태국에 있는 딸을 데려와 준다는 교회 사람들의 사탕발림에 ‘신애'의 집에서 하녀처럼 부림 당하던 이주 노동자 여성의 분노에 의한 사고였습니다. 이주 노동자 여성에게 엄마의 부정을 전한 '이나'는 엄마를 다치게 했다는 죄책감에 사로잡히고, ‘신애'는 이주 노동자 여성의 분노로 말미암아 딸과 함께할 수 없는 ‘이나'의 고통을 이해합니다. ‘이나’는 이 순간을 기점으로 엄마를 조금씩 용서하기 시작합니다. 엄마의 목소리가 담긴 음악을 만들며 갈등은 완전히 해소되죠.영화를 보면서 러닝타임 내내 고통을 겪은 ‘이나'가 너무 갑작스럽게 엄마를 용서해버린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것이야말로 리얼리티가 살아있는 이야기더군요. '애증'으로 묘사되는 모녀의 싸움은 언제나 그렇듯 칼로 물 베기니까요.⊙ ⊙ ⊙무릇 힘든 일은 한꺼번에 찾아오곤 합니다. ‘엎친 데 덮친 격’이라는 속담이 괜한 말이 아니죠. 주인공 ‘이나'도 그런 상황에 부닥친 인물입니다. 딸을 데려오지 못하는 미혼모, 안전 염려증에 사로잡힌 엄마, 엄마로 인해 음악을 그만둔 DJ, 좋아하는 테크노 장르보다 화려한 EDM 장르가 인기인 시대, 자신의 오리지널 곡을 빼앗은 옛 동료, 귓가에 맺히는 이명. 이 모든 것이 <둠둠>의 주인공이 겪는 시련입니다.이러한 역경들은 ‘이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자꾸만 피어나는 비극적 상황을 묘사합니다. EDM의 시대에 비주류 음악인 테크노를 한다는 설정은 미혼모 '이나'의 소수자성을 부각하는 장치로 쓰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한 인물에게 너무 많은 시련을 부여하는 바람에, 음악과 아기를 되찾는 ‘이나'의 여정에 집중하기 어려웠다는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옛 동료와의 갈등과 갑작스러운 이명은 ‘이나'를 불행하게 만들기 위한 장면들이라고밖에 느껴지지 않았죠.영화 말미, 온갖 시련을 무릅쓴 ‘이나’는 이제 도망치지 않겠다고 선언합니다. 현실로부터, 편견으로부터, 그리고 엄마로부터 도망치지 않겠다고요. 교회에서 아기를 품에 안은 엄마 ‘신애’와 교회 신도들을 앞에 두고 디제잉을 하는 마지막 장면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이나'의 모든 시련과 제 아쉬움이 한 방에 해소되는 장면이기도 했습니다.(종교가 없는 저는 이게 교회에서 실제로 가능한 일인지 궁금했습니다. 현실에서 벌어질 만한 갖은 역경들을 지나칠 정도로 가득 담은 영화의 결말이 과하게 비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하지만 종교인 친구는 개방적인 교회에서는 충분히 가능할 것이라는 팩트 체킹을 해주었답니다.)⊙ ⊙ ⊙<둠둠>은 듣는 매력이 있는 영화입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둠둠거리는 비트가 고막을 자극하죠. 하지만 ‘둠둠’은 단순히 강렬한 사운드만을 묘사하는 말은 아닙니다.‘둠둠’은 마음 깊은 곳에서 피어오르는 음악을 향한 ‘이나'의 열망, 그리고 언제나 마음 한구석에서 아려오는 엄마의 존재를 상징합니다. 실제로 몇몇 장면에서 둠둠거리는 비트와 엄마 ‘신애'의 타카질 소리가 교차되어 들려오기도 하죠. 마음 깊은 곳에서 울리는 '둠둠'을 더는 감내하지 않는 ‘이나'의 여정은 사운드 그 이상의 울림을 전합니다.Summary자신에게 집착하는 엄마 때문에 전부였던 음악을 놓아버린 DJ '이나'. 길을 걷다 우연히 들려온 비트에 디제잉을 다시 하기로 결심하고, 베를린에 갈 수 있는 오디션에 참가하는데... "두려워도 도망치진 않을 거야" (출처: 씨네21)Cast감독: 정원희출연: 김용지, 윤유선, 박종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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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포와 클리셰가 합쳐진 변신
공포영화는 사실 거대한 스크린으로 보는 것을 무서워 하는 편이어서 영화관에 잘 안가는 편인데, 의도치 않게 영화관에서 보게 된 영화 <변신>. 기대를 했던 작품이었으나 생각과는 다르게 클리셰 덩어리어서 실망감이 컸던 작품이었다.
영화 <변신> 시놉시스“어제 밤에는 아빠가 두 명이었어요”
사람의 모습으로 변신하는 악마가 우리 가족 안에 숨어들면서 기이하고 섬뜩한 사건들이 벌어진다. 서로 의심하고 증오하고 분노하는 가운데 구마 사제인 삼촌 '중수'가 예고없이 찾아온다. 절대 믿지도 듣지도 마라.
해당 내용은 네이버영화를 참고했습니다.
이 이후로는 영화 <변신>에 대한 스포일러가 존재합니다.
무섭긴 했던 영화 <변신>
무서운 걸 좋아하지만 무서운 걸 잘 못보는 사람으로서,,, 옷으로 다 가리면서도 영화 <변신>을 꾸역꾸역 봤다. 청각적인 요소도 정말 잘 이용했고, 갑자기 악령에 빙의된 사람이 등장을 한다던지 아니면 피가 막 천장에서 비처럼 쏟아진다던지 그로테스크한 지점도 꽤나 있어서 무서움이 배가 되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이해가 되지 않았던 장면
그 무서움 속에서도 영화를 이해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이해가 되지 않는 지점이 한 군데가 있었다. 바로 강구의 집 맞은 편에 살고 있는 이상한 남자의 죽음이다. 십자가가 거꾸로 메달려 있고, 염소의 사체와 각종 동물들이 사체가 집안에 널부러져 있는 아주 기괴한 집의 주인이었다.
그 이상한 남자는 중수가 방문을 했을 때 이미 죽어 구더기들의 밥이 되고 있었다. 그 순간 플래시백이 되면서 그 남자를 아내가 죽인 것처럼 보여주다가 다시 자신의 시체를 바라보고 있는 이웃집 남자가 나온다. 본인이 본인을 죽인 것인지,, 아니면 살해를 당한 것인지 제대로 이해가 되지 않는 장면이었다.
가족들의 내면 심리를 집중적으로 다뤘다면 명작이 되지 않았을까?
사실 영화 <변신>은 가족 내면의 심리를 보여준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가족이라고 하더라도 서운한 부분이 있을 것이고, 말하지 못한 것을 변신이라는 소재를 이용해서 풀어낸 것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이 지점을 조금 더 심도 있게 그려냈더라면 가족 스릴러로 굉장히 밀도 있는 작품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 작품이었다.
이러한 가족 간에도 말하지 못하는 생각들을 그저 소재로만 이용을 하고 악령에 빙의되어서 그 악령만 없앤다면 모든 것이 해결되어 버린다는 방책은 굉장히 아쉬웠다. 그리고 그 해결에 있어서 삼촌이자 구마사제인 중수가 십자가에 찔리면서 굉장히,,, 틀에 바긴 클리셰로 끝이 나는데 이 장면 역시 굉장히 당황스러웠다.
막판의 클리셰만 아니었다면 그리고 그 내면 심리를 제대로 표현했더라면 한국 공포영화의 걸작이 될 수 있었을지도 몰랐던 영화 <변신>. 아쉬움이 남는 작품이지만 공포영화의 매력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던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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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능성의 우주 속 현대인의 우울, 그리고 자기혐오
Ⅰ. 모든 것이 가능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2022년 개봉한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은 모든 것이 가능한 세상 속에서 무력감을 느끼는 현대인의 모습을 다중우주라는 SF적 요소를 통해 환상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전세계에서 제작비의 4배가 넘는 1억 달러 이상을 벌어 들이면서, 명실상부 올해 ‘예술영화’계의 다크호스로 부상했다. 주·조연 배우 모두 동양인으로 가득 채운 신인 감독의, 난해하다면 다소 난해한 SF 영화가 이다지도 평론과 대중의 눈길을 사로잡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 ‘모든 것이 가능한’ 에블린과 조부 투파키가 겪는 멜랑콜리가 세대와 성별, 국적을 가로질러 신자유주의 시대를 사는 관객의 마음을 관통했기 때문일 것이다.
모든 차별이 철폐된 건 아니지만, 신자유주의의 물결은 적어도 표면적으로라도 ‘모든 것이 가능한’ 세상을 상정한다. 성별에 따라, 인종에 따라, 계급에 따라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이 명확히 구분되었던 과거와 달리, 현대인들은 ‘노력과 의지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있다. 하지만 이 가능성의 우주 속에서 사람들은 오히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 휩싸이곤 한다. 이들에겐 세탁기 속 옷처럼 소용돌이치는 세상에서 중심을 잡아줄 그 어떤 대책도, 계획도, 보호 장치도 없기 때문이다. 한병철 교수는 이러한 가능성의 사회를 ‘피로사회’ 규정하면서, 현대인들이 흔히 겪는 무력감, 자기 소진 등을 “긍정성의 과잉에서 비롯된 병리적 상태”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긍정의 세계는 부정의 변증법, 즉 적대성을 전제하지는 않지만, 대신 ‘내재성의 테러’라는 눈에 띄지 않는 방식으로 사회를 좀먹는 새로운 폭력을 양산한다. 달리 말해, “긍정성의 과잉 상태에 아무런 대책도 없이 무력하게 내던져져 있는 새로운 인간형은 아무런 주권도 지니지 못한 채, 자발적으로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따라서, 면역학적 도식 바깥에 존재하는 우울은 “아무것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믿는 사회”에서만 가능하다.
웨이먼드를 따라가면 연을 끊겠다는 아버지의 불호령을 무시하고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며 미국에 온 지도 벌써 수십 년째건만, 오프닝 시퀀스 속 에블린의 삶은 여전히 고난의 연속이다. 철저히 관찰자 시점에서 카메라는 국세청 세무 조사를 위해 책상을 모두 덮을 만큼 쌓인 영수증과 자꾸 대화를 보채는 남편, 아픈 아버지와 여자친구를 데려온 딸, 세탁소 손님들의 각종 요구를 응대해야 하는 에블린의 일상을 훑는다. 각박한 에블린의 삶은 젊었을 적 꿈꿨던 아메리칸 드림과는 멀어도 한참 멀지만, 에블린은 아버지에게 조이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애써 숨기고, 남편의 대화 요청을 무시하면서 꾸역꾸역 자신의 환상 속 정상 가족을 유지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러나 이미 삐걱거리는 에블린의 가족상은 에블린 혼자만의 노력으로는 ‘다시 돌아가기’ 쉽지 않다. 이것은 미래를 위해 현재를 유예하는 피로사회의 모습과도 닮아있지만, 동시에 ‘잔혹한 낙관주의’의 결과이기도 하다.
로랜 벌랜트는 “실현 불가능하여 순전히 환상에 불과하거나, 혹은 너무나 가능하여 중독성 있는 타협된 가능성의 조건에 대한 애착 관계”를 ‘잔혹한 낙관주의’라 명명하면서 애착 대상이 “심지어 자신의 안녕을 위협할 때조차 대상의 상실을 견디지 못한다는 점에서 잔혹하다”라고 설명한다. 에블린의 애착 대상은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끊임없이 광고하는 신자유주의적 ‘아메리칸드림’이다. 에블린을 여태껏 버티게 한 이 환상은 아직 상실되지 않았지만, 상실한다는 상상만으로도 에블린의 삶 자체를 무너뜨릴 만한 강한 정동을 유발하기에 에블린은 ‘가능성’의 조건에 집착한다. 언젠가는 자신의 환상이 성취될 수 있으리라 생각하며 현실의 고통을 인내하지만, 세상은 에블린이 원했던 성취의 결과를 가져다주지 않는다. 오히려, 아메리칸드림 -그리고 정상 가족-에 대한 에블린의 집착은 남편과 대화를 거부하게 만들고, 딸의 여자친구를 아버지에게 소개하지 못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가족의 균열을 심화시킬 뿐이다.
벌랜트는 잔혹한 낙관주의가 ‘정치적 우울’을 유발한다면서, 잔혹한 낙관주의로 인한 정치적 우울은 “다루기 힘든 세상의 난관에 대한 냉담, 냉소, 무관심 등의 정동적 판단 속에 집요하게 남아있다” 라고 설명한다. 영화의 초반부 에블린이 모든 사람에게 무뚝뚝하고 불친절해 보이는 것은 견디기 힘든 난관을 헤쳐나가는 에블린 나름의 방어 기제이자, 잔혹한 낙관주의가 유발하는 우울이 초래한 것이다. 우울증은 이렇듯 개인에게 부과되는 원칙적인 제약이 없을 때만 발병한다.
계급, 인종, 성별에 따라 차등적인 가능성을 부여받았던 과거와 달리, 현대인은 법적으로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있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이러한 가능성을 다중우주라는 과학적 개념을 통해 극단적으로 확장한다. 영화 속 등장인물은 ‘버스 점프’ 라는 기술을 이용해 다중우주, 그러니까 드넓은 ‘가능성’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데, 이 다중 우주는 수천, 수만 명의 에블린 중 최악의 삶을 사는 중인 우리의 에블린에겐 기회의 땅이지만, 조부 투파키에겐 긍정성의 과잉이 초래한 병리적 허무주의의 세계에 불과하다.
SF가 과학적 외삽을 통해 현재의 사회 규범을 재고하도록 유도하는 것처럼, 버스 점프 기술은 에블린의 삶을 중지시키고,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버스 점프는,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했던 세무 조사를 한순간에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고, 그 누구보다 가깝다고 여겼던 가족과의 관계를, 더 나아가 나라는 사람이 현존하는 시공간 자체를 낯설게 만든다. 영화는 에블린의 시점 쇼트를 의도적으로 회피하고, 숏-역숏 기법을 사용할 때도 늘에블린의 뒷모습을 프레임에 넣으면서 관객이 에블린과 동일시하는 것을 방해한다. 이렇듯 버스 점프라는 기술이 촉발한 중지의 사유는 관객이 철저히 에블린의 삶을 ‘관찰’함으로써 관객자신의 일상에 ‘노붐 Novoum’을 가져오는 효과를 낳는다.
타자의 이미지를 통해 나 자신을 성찰한다는 관점에서, 영화 속 거울 이미지는 라깡의 거울 단계를 떠올리게 한다. 거울 속 나의 이미지는 외형적으로 ‘나’와 닮았지만, 현존재로서 ‘나’와는 다르다. 거울 단계를 거치면서 아이는 사실 타자적 이미지인 거울 이미지를 진정한 자신으로 착각하며 살아간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첫 장면은 함께 행복한 웃음을 터뜨리는 에블린 가족의 거울 이미지로 시작한다. 에블린은 이 거울 이미지, 그러니까 정상 가족이라는 자신의 환상이 투사된 이미지를 현실이라고 믿지만, 불이 켜지고 반사된 이미지 속엔 가득 쌓인 영수증을 정리하는 고단한 에블린만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내, 진짜 남편인 웨이먼드와 알파버스의 웨이먼드가 거울 속에서 불쑥 나타나 에블린을 부른다. 거울 이미지는 에블린의 현실이 아니라고, 그래서 이제는 잔혹한 낙관주의로부터 깨어나야 한다고. 그러므로 에블린과 관객 사이의 동일시를 방해하는 미묘한 어긋남은 거울 이미지가 사실 환상에 불과함을 폭로하는 장치이다. 영화가 선사하는 중지의 미학은 ‘모든 것 everything’의 세상에서 중심을 잃고 방황하는 관객에게도 경종을 울린다.
Ⅱ. 상실이 유발하는 자기 혐오적 멜랑콜리
프로이트는 우울을 사랑하는 사람, 또는 사랑하는 사람 대신 들어선 어떤 추상적인 무언가의 상실에 대한 반응으로 규정한다. 흔히 우울을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느끼는 감정으로 착각하기 쉽지만, 우울은 사람뿐만 아니라 사물, 심지어는 실존하지 않는 추상적인 무언가를 잃었을 때도 나타날 수 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삶은 필연적으로 상실을 수반한다. 어쩌면 삶 자체가 무언가를 상실해가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영화 속 모든 등장인 물은 무언가를 상실하고, 그래서 슬퍼한다. 커다란 모자 속에 너구리를 숨기고 함께 요리하던 요리사는 너구리를 뺏기고, 국세청 직원은 남편과 이혼하며, 손이 소시지로 변해버린 평행 우주 속 에블린은 연인과 이별한다. 가족에게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받을 수 없는 조이는 정체성을, 그 모든 평행 우주 속 가능성 속에서 조부 투파키는 삶의 목적을 상실한다.
사람은 누구나 상실을 겪지만, 누구나 우울한 것은 아니다. 프로이트는 슬픔과 우울의 유일한 차이점을 자애심(自愛心)의 추락으로 설명한다. 슬픔을 느끼는 사람에게는 ‘세상’이 빈곤하고 공허해지지만, 우울증에 걸린 사람에게는 “자아가 빈곤해지고 공허”해진다. “쓸모없고, 무능력하고 도덕적으로 타락한” 자아. 그래서 “비난하고 처벌하고, 추방”해야 하는 자아. 영화속 등장인물들을 불안, 분노, 좌절과 같은 다른 부정적 감정이 아닌 ‘우울’로 설명하는 것은 바로 이런 자기 혐오적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이들은 “상실의 리비도를 자아에 통합하고 결국에는 자기 자신을 공격” 한다는 점에서 ‘우울’하다.
국세청 직원은 욕을 섞어가면서까지 자신이 받은 상을 과시하고, 과도할 정도로 깐깐하게 세무 조사를 진행한다. 하지만 과시는 결핍이라고 했던가.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지 떠들어대는 인물의 내면에는 자기 자신을 향한 혐오가 자리한다. 조부 투파키는 가능성의 우주 속에서 비난의 화살을 자기 자신에게로 돌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심리를 교묘하게 이용할 줄 아는 인물이다. 4655번째 평행 우주에서 국세청 직원은 조부 투파키의 열렬한 신자로, 에블린을 찾아 죽이려고 한다. 그녀의 이마엔 방금 ‘진짜’ 에블린의 세상에서 영수증에 싸인 펜으로 그린 원이 그대로 그려져 있다. 4655번째 평행 우주의 에블린을 때려눕힌 국세청 직원은 조부 투파키가 “사람들의 본질과 그들의 자존감(self worth)이 얼마나 취약한지 알고 있다”라고 말한다. 모든 것을 알고 어디에도 있을 수 있는 전지전능함 앞에서, 쓰러진 에블린 앞에 인질로 잡힌 직원들은 나약한 ‘찰나의 순간’에 불과하다. 조부 투파키는 자신이 선택할 수 있었던 모든 가능성 앞에서 한 개인의 무력함을, 자기 자신의 쓸모없음을 이해해 줄 단 한 명의 에블린을 찾아 수많은 사람을 학살한다.
미친 사람처럼 우주를 누비며 학살을 일삼는 조부 투파키는 단순히 자신을 이렇게 만든 에블린에게 화가 난 것도, 이 세상에 절망한 것도 아니다. 모든 것이 무인 세계로 돌아가려는 조부 투파키의 자기 파괴적 ‘열광’은 가능성의 세계 속에서 삶의 목적을 잃어버린 우울증 환자의 조증과도 같다. 조부 투파키는 마치 구원을 원하는 듯이 자신의 우울을 이해할 수 있는단 한 사람, 에블린을 애타게 찾아다닌다. 그리고는 마침내 찾은 ‘그’ 에블린에게 자기와 함께 베이글 속으로 들어가자고 말한다. 세상을 호령할 수 있음에도 무의 세계로 자멸하려는 조부 투파키의 모습은 무엇이든 할 수 있음에도 오히려 무기력증에 빠지고 마는 현대인과 닮아있다. 그의 멜랑콜리는 평행 우주 속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지만, 무엇이든 ‘될’ 수는 없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진화 과정에서 인류의 손가락이 소시지가 될지언정, 어떤 평행 우주에서도 ‘나’는 그저 나일 뿐이다. 가능성의 우주에서조차 나는 ‘고작’ 내가 될 수밖에 없다는, 자기혐오. 조부 투파키는 자기의 삶이 거대한 세상 속 찰나의 순간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허무나 좌절의 외침이 아니다. “어디든 갈 수 있잖아. 그냥 가 버려. 딸이 ‘이것’보다는 더 나은 세계로.” 모든 것이 가능해서, 바로 그 이유로 우리는 상실을 경험할 때마다 세상을 탓하는 대신, 자기 자신을 비난한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특별함은 엄마를 영웅으로, 딸을 빌런으로 내세운 줄거리에서 모성애의 아름다움이나 애증의 모녀 관계를 넘어, 현대인의 고질적인 자기 혐오적 멜랑콜리를 그려냈다는 데 있다. 그러나 영화의 클라이맥스 장면에서 ‘이것’보다는 딸을 찾아 떠나라고 외치는 조부 투파키의 멜랑콜리는 조이의 문화적 우울과 겹쳐 새로운 정동의 물결을 만들어낸다. 버틀러는 젠더 이상과 현실적인 젠더 사이의 차이에서 젠더 규범을 전복할 수 있는 저항성을 찾아냈지만, 동시에 그런 저항은 우울증의 형태로 드러나게 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상실의 내면화는 상실의 부인이 되고, 상실의 거부는 우울증이 된다. 만약 상실의 대상이 동성애라면, 동성애적 리비도 집중은 죄의식을 수반한다. 이렇듯 우울증적 주체는 상실의 대상이 무의식화되어 있으므로 드러내는 애도를 통해 상실을 ‘해소’할 수 없다.
할아버지에게 여자친구를 ‘좋은 친구’라고 설명하는 에블린에게 화가 난 조이는 차를 타고 세탁소를 떠나려고 한다. 에블린은 조이를 불러 세우지만, 옴싹달싹 움직인 입에서 내뱉은 말이라곤 ‘살 좀 빼’라는 핀잔뿐이다. 조이는 평생을 중국에서 살아온 할아버지에게 거리낌 없이 자신의 동성애 성향을 드러냄으로써 이성애 중심의 ‘정상 가족’에 끊임없이 저항한다. 그러나 버틀러의 지적처럼, 고착화된 젠더 규범에 균열을 내려는 시도는 자기혐오적 멜랑콜리를 수반 한다. 에블린의 아버지에게 에블린은 늘 ‘무엇 하나 제대로 끝내지 못하는 변변찮은 딸’이었 고, 따라서 퀴어라는 정체성은 에블린에게 있어 숨겨야만 하는, 수치스러운 존재이기 때문이 다. “나르시시즘과 죄책감, 수치심”을 동반하는 자기혐오는 오랜 시간 “성적 타자로서 차별적 배제와 억압적 대우를 받은 결과”이다.
조이의 문화적 우울과 성적 타자로서 자기혐오는 조부 투파키의 자기혐오와는 분명 다르다. 조부 투파키는 가능성의 세계에 속해 있지만, 조이는 주체의 세계에서 배제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영화는 이 둘의 우울을 한 장면에 겹쳐 놓는다. 데칼코마니처럼 수미상관을 이루는 두 장면은 차 문을 열고 떠나려는 조이를 에블린이 붙잡는 구도로 촬영되었다. 파란 옷과 붉은 옷, 대낮과 한밤, 우울과 열광. 동전의 양면처럼 조부 투파키와 조이는 이어져 있다. 그래서 우리는 똑같은 경험을 겪지 않고도 소외되고 차별받고 배제되는 타자에게 먼저 손내밀 수 있다. 그들이 느끼는 우울과 자기혐오의 감정을 우리도 충분히 느끼고 있으므로. 상대방이 우울하다는 사실, 그 자체를 온몸으로 맞이할 때, 비로소 타자를 향한 손짓이 시작될수 있다.
Ⅲ. 우연의 접촉이 만들어낸 정동의 이행
영화는 말한다. 세상 사람들이 자기 혐오적 우울에 찌들어 있다고. 그래서 어떻다는 말인가?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가 현대인의 멜랑콜리를 드러내는 데 그쳤다면 이렇게 호평받지는 못했을 것이다. 3부 ‘올 앳 원스’는 모든 것, 모든 곳에서 너와 내가 만나는 찰나의 순간이 소중함을 설파하면서, 몸과 몸의 ‘접촉’을 통해 자기혐오로부터 타인을 구원하는 몸짓을 선보인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 ‘몸짓’은 언어로는 포착될 수 없다. ‘손가락이 소시 지인 인간이 발로 피아노를 치는 장면’이라는 설명은 엽기 코믹 영화를 소개하는 것처럼 느껴지겠지만, 사실은 영화의 가장 감동적인 장면 중 하나이다. 이는 영화가 서사 매체로서 앞뒤 문맥에 따라 관객이 느끼는 감정적 반응과는 별개로, 언어적 묘사나 대사 사이를 빠져나가는 정동적 ‘잉여’가 존재함을 의미한다.
스피노자와 들뢰즈에서 기원한 정동은 세 가지 다른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다. 첫째는 전이 로서의, 그리고 우리가 휘말리게 되는 비인격적, 또는 전인격적(pre-personal) 힘의 운동으로, ‘인간이 인간 아닌 모든 것과 공유하는 것의 한계 표현, 즉 사물에 자신을 포함하도록 하는 것’으로서 정동이다. 두 번째는 좀 더 인격적인 정동으로, 정동적 강도들이 신경계로 들어와 종국에는 인지하게 되는, 즉 인격체의 표상으로서 정동이다. 세 번째로 정동은 “정동을 촉발하고, 정동이 촉발될 수 있는 능력”이다. 이때 정동은 끊임없는 변주 속에서 “전이”하며 고정된 상태가 아닌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가는 과정’이다. 그러나 정동은 무엇보다, 몸과 몸의 마주침을 통해 촉발되는 강도 또는 힘을 의미한다.
조부 투파키가 보여준 베이글과 마주한 에블린은 자신의 인생이 빙빙 도는 무의미한 하루에 불과함을 깨닫는다. 사소한 선택이 쌓여 만들어진 인생의 궤적은 어느 우주에서는 중요하게 느껴지지만, 다른 우주에서는 ‘바다에 휩쓸릴’ 모래 알갱이일 뿐이다. 에블린은 베이글이 촉발한 이 모든 우울과 공허함, 자기혐오의 감정을 타인에게 쏟아낸다. 모든 것이 무상한 세상에 서는 타인의 의견과 감정 모두 무가치한 것이 된다. 그래서 에블린은 이혼 서류에 서명하고, 너구리를 고발하고, 웨이먼드를 유리 조각으로 찌르고, 세탁소를 부수고 결국엔 돌이 되기를 택한다.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세상 모든 것이 무의미함을 깨달은 자의 첫 발걸음이 고작 타인을 향한 공격이라는 게? 인생의 경로를 마구잡이로 활주하는 조부 투파키와 달리, 우리가 고작 '이따위’로 살게 된 데엔 차마 인간의 힘으로 통제할 수 없는 전인격적 정동이 작용한다. 운명과도 같은 전인격적인 힘에 계속해서 부딪히면서, 인간은 또한 언어로 굳어진 감정을 인지한다. 아마 에블린은 베이글을 보면서 좌절과 혼란과 절망과 분노와 환희를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삶은 차마 언어로 포착될 수 없는 이 영화처럼, 몸과 몸의 우연한 접촉을 통해 끊임없이 변화하는 어떤 힘의 연속체이기도 하다. 세탁소를 압류하러 찾아온 국세청 직원은 웨이먼드와 몇 마디 나눈 후, 난동을 피운 에블린을 풀어주라고 말한다. 에블린이 어떻게 했냐고 묻자, 웨이먼드는 그냥 얘기했을 뿐이라고 답한다. 조부 투파키는 갑작스러운 인생의 흐름이 단지 확률적 결과일 뿐이라고 주장하지만, 웨이먼드의 울음기 어린 눈망울에서, 지친 듯 떠나는 국세청 직원의 발걸음에서, 아무렇지도 않은 척 에블린이 깨뜨린 유리 조각을 치우며 웨이먼드가 부르는 노래에서 에블린은 운명의 장난에 불과할지도 모르는 지금 이 순간이, 곧 있으면 휩쓸릴 모래 알갱이에 불과한 찰나의 순간이 소중한 이유를 발견한다.
세상은 전례 없이 넓어졌다. 버스 점프라는 기술 없이도 누구든지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삶을 엿볼 수 있게 되었고, 역경을 딛고 성공한 사람의 사례는 매일같이 SNS와 인터넷을 떠돈다. 에블린이 겪는 우울과 절망은 타인의 삶을 속속들이 들여다볼 수 있게 된 우리가 느끼는 우울과 절망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같이 싸우고, 욕한 뒤, “이 모든 것이 내 잘못인 것처럼” 느낀다. “친절해야 한다”라는 웨이먼드의 외침은 알파버스의 웨이먼드가 거울 속에서 에블린을 부름으로써 촉발했던 중지의 사유가 관객의 삶을 새로운 방식으로 바라보게 했던 것처럼, 내가 혼란스럽다는 이유로 남을 공격하는 이상한 작태를 성찰하게 한다. 그러나 이 ‘친절’은 표면적인 다정함이나 기계적인 배려를 의미하지 않는다. 웨이먼드의 친절은 조부 투파키의 자기혐오적 우울까지 모두 끌어안을 수 있을 만큼 당신을 사랑한다는 표현이자, 타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몸짓이다. 영화 속에서 웨이먼드가 국세청 직원에게 정확히 무슨 뭐라고 말했는지는 묘사되지 않지만, 타인을 존중하는 웨이먼드의 태도가 잔혹한 낙관주의의 냉소를 끊어낼 만큼 강력하다는 사실만은 분명하게 드러난다.
베이글을 마주한 조부 투파키와 그의 추종자, 그리고 에블린은 모두 우울의 정동에 속박되어 있다. 무엇을 상실했는지도 모른 채 욕망하기를 포기하고 자기 파괴의 충동으로 나아가는 조부 투파키는 이 모든 가능성 속에서 인간은 한낱 미물에 불과하다고 외친다. 그러나 이는 달리 말하면 그 모든 가능성 속에서 우연히도 너와 내가 지금, 바로 여기에서 마주하고 있음을 경탄하는 표현이다. ‘모든 가능성’은 행복을 줄 수 없다. 전지전능한 조부 투파키는 불행하지만, 현재에 집중하는 웨이먼드는 행복하다. 괴롭다는 이유로 타인을 공격하는 조부 투파키는 불행하지만, 괴로워도 타인에게 다가설 줄 아는 웨이먼드는 행복하다. 그게 웨이먼드가 이 험난한 세상을 살아온 방식이다.
조부 투파키와 거의 비슷할 정도로 전지전능한 힘을 가진 에블린은 웨이먼드에게 부와 명예, 권력을 주는 대신, 웨이먼드를 안아준다. 몸과 몸의 접촉. 그 사이를 흐르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어떤 힘. 변주하고 흐르고 이행하는 정동의 물결. 혼란스럽고 무서운 세상에서 벗어나 차라리 돌이 되기를 택한 에블린처럼, 우연의 접촉이 행복을 향한 열쇠였음에도 우리는 꿋꿋하게 거리 두기를 고집해 온 것은 아닐까? 단지 포옹 한 번이면 해결될 일을 애써 말로, 문자로 표현하려고 했던 건 아닐까? 몸과 몸의 접촉만큼이나 타인을 향한 사랑을 드러내는 것이 또 있을까. 에블린은 영화가 시작한 지 장장 두 시간 만에, 처음으로 미소 짓는다. 에블린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행복은, 조부 투파키가 그토록 갈구하던 삶의 의미는 타인과의 우연한 접촉에 있다.
조부 투파키는 그 접촉마저도 금방 사라질 것이라며 비웃는다. 에블린은 공격을 멈추고 ‘이 멍청한 세상에서도 언제나 사랑할 존재가 있다’라며 모든 우주의 국세청 직원을 껴안는다. 총알은 곧 철없는 남편이 세탁소 곳곳에 붙여 두던 눈알 스티커로 변하고, 에블린 자신의 이마와 조부 투파키의 추종자에게 스티커를 쏜다. 생채기를 내거나 박히지 않고 찐득하게 들러붙는 스티커의 감촉은 웨이먼드의 친절함과 맞닿아 있다. 타인이 접촉을 거부하는 그 순간에도 타인을 향해 나아가는 접촉의 몸짓. 영화는 그제야 에블린의 시점에서 조부 투파키의 추종자들을 훑는다. 그러나 이 시점은 에블린의 두 눈이 아닌 멍청함으로 가득한 찰나의 순간에도 사랑을 찾을 줄 아는 ‘스티커’의 시점이다.
이마 한가운데 눈알 스티커를 붙인 에블린은 자신을 공격하는 추종자들과의 신체적 접촉, 즉 몸과 몸의 마주침을 통해 긍정의 감정을 이행(移行, passage)한다. 이 장면에서 접촉은 그것이 키스이든, 골절된 뼈의 접합이든, 향수의 감각이든 간에 신체의 오감을 포함하는 감각의 이행으로 확장된다. 에블린과 접촉한 사람들은 싸우려는 의지를 잃고 일종의 환각 상태에 빠지는데, 이때 그들이 느끼는 정동은 손으로 움켜쥔 모래처럼 감정을 표현하는 단어 사이로 빠져나간다. 영화 속 등장인물만 에블린의 정동을 경험하는 건 아니다. “우리는 영화를 단지 눈으로만 보지 않는다”라는 비비안 섭책의 말처럼, 관객은 배우의 표정과 음악, 조명, 미쟝센, 촬영, 편집, 그리고 이 모든 게 뒤섞인 영화의 쇼트를 “자신의 몸을 통해 직접적으로 경험한다.”
Ⅳ. 모든 것이 가능해도 변하지 않는
세탁기 안에서 빙글빙글 돌아가는 옷가지와 영수증 위에 어지럽게 그려 놓은 동그라미, 그리고 조부 투파키의 베이글까지. 1부 ‘모든 것 Everything’을 상징하는 ‘원’은 영화의 형식과 내용을 관통한다. 형식적인 측면에서, 수미상관을 이루는 결말은 처음과 끝이 이어져 있는 원과 같다. 잔혹한 낙관주의에 빠졌던 에블린은 여전히 낙관주의에 골몰한다. 그러나 에블린이 낙관적으로 붙잡고 있는 대상은 에블린이 손을 놓으면 언제든 깨져버릴 유약한 환상이 아니다. 에블린의 아빠는 “너는 내 딸이 아니”라며 에블린을 무시하지만, 에블린은 아빠가 자신을 자랑스러워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한다. 에블린 스스로 마침내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에블린은 조이가 자신처럼 자기혐오의 늪에 빠지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아빠가 했던 것처럼 조이를 에블린의 시선에서 재단하고 ‘정상’과 ‘행복’의 범주에 끼워 맞추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에블린은 자신의 전지전능한 힘 대신, ‘끌어안음’을 통해 조부 투파키를 베이글로부터 구원한다. 조부 투파키/조이는 이 마지막 접촉조차 거부하지만, 에블린은 그런 조부 투파 키/조이에게 다가가 조이에게 ‘살 좀 빼’라고 잔소리를 퍼붓는다. 에블린이 미치광이 같은 조부 투파키의 눈에서 ‘나를 구원해 달라는’ 외침을 읽은 것은 에블린 역시 똑같은 상처를 아버지에게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는 무한히 반복하는 우리의 일상처럼, 처음과 끝이 이어져 있다. 그러나 똑같아 보이는 원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곳엔 울퉁불퉁한 굴곡이 있다. 의미 없이 반복되는 원에 티끌 같은 점이라 해도, 우연의 접촉이 낳은 에블린과 조이의 관계는 특별하다. 에블린이 그 티끌 같은 순간을 소중히 간직하겠다고 말하자, 허무주의의 베이글 속에서 손을 뻗는다. 손과 손, 눈빛과 눈빛, 사과와 사과, 돌과 돌, 행성과 행성. 때로 몸과 몸의 접촉은 지옥과도 같은 끔찍한 형상이지만, 이 끔찍한 세상을 살아가게 해주는 강력한 힘이기도 하다.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삶의 조건은 변하지 않았고, 여전히 쌓여 있는 영수증을 제출해야 하며, 에블린은 잔소리를 퍼붓고, 조이는 여자친구를 사귄다. 원처럼 다시 돌아온 시작점에서 영화는 모든 것이 가능해도 변하지 않는 무언가를 노래한다. 그것은 에블린의 잔소리처럼 쌉싸름하고, 웨이먼드와의 키스처럼 달콤하며, 국세청 직원의 핀잔처럼 짜다. 그 무언가는 모든 가능성의 확률을 뚫고 지금, 바로 여기에서 너와 내가 만났기에 가능한 기적이다. 붉은 옷 대신 푸른 옷을 입고 다시 돌아온 국세청 사무실에서, 에블린은 다시 한 번 묻는다. “죄송해요. 방금 뭐라고 하셨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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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봇이 찾은 작은 희망
누군가를 돌본다는 것은 모든 동물의 본능과도 같다. 아주 가까운 자식은 그런 돌봄을 받는 가장 기본적인 존재다. 아이를 키우고 자라는 모습을 보면서 가장 기본적으로 의식주를 챙겨준다. 그리고 정서적으로 교류하면서 서로에 대한 신뢰와 정을 쌓아간다. 그 모든 과정은 아이가 성인이 되면서 끝이 나는 듯 하지만 그 아이가 또 다른 가정을 만들면서 다시 비슷하면서 다른 과정이 시작된다. 세대와 세대를 지나면서도 변하지 않는 이 과정은 아마도 모든 동물들이 자라면서 교류하는 과정에서 보이는 모습들이다.
무엇보다 자신이 지키고 돌보려고 하는 존재가 밥을 먹고 자신과 시간을 보내면서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어떤 심적인 안정감을 주기도 한다. 그래서 살아있는 동안 계속 그 어떤 존재를 돌본다. 아이가 자라면 강아지나 고양이 같은 동물을 키우거나 식물을 키우며 무언가와 끊임없이 교류한다. 그렇게 무언가를 돌보는 행위 자체가 인간이 가진 하나의 본능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다 큰 자식이 자신의 품을 떠나 독립할 때, 약간의 허무함과 아쉬움을 느끼게 되는 것일 것이다.
오존 파괴로 혼자 살아남은 주인공 핀치와 로봇 제프의 이야기
영화 <핀치> 속 주인공 핀치(톰 행크스)는 지구 오존 파괴로 거의 파괴된 지구에 살아남은 사람이다. 영화 초반 화면 속의 핀치는 낮에 특수한 장비를 입고 밖에서 활동을 하고, 밤에는 그나마 안전한 실내에서 생활한다. 주변에 다른 사람은 보이지 않고, 작은 로봇과 개 한 마리가 그와 함께 생활하고 있다. 그리고 과거 개발자였던 그는 제프(칼레 랜드리 존스)라는 새로운 로봇을 개발한다. 그 외에 등장인물은 나오지 않는다. 그야말로 지구 종말의 상황 속에서 겨우 살아남은 핀치의 생활이 영화에 담긴다.
새로운 로봇인 제프는 많은 지식을 전송받긴 했지만 실제로 걷고, 활동하는 것에 아직 교육이 필요한 존재다. 핀치는 제프를 교육시키고 알려주면서 폐허가 된 세계에서 그가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 존재가 되길 희망한다. 그러니까 제프는 핀치에게 남은 마지막 희망인 셈이다. 그리고 따뜻한 온기를 나눌 수 있는 개를 돌보면서 남은 삶을 겨우 살아내고 있다.
핀치가 키우는 개는 '굿이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굿이어는 우리가 아는 여느 개처럼 정이 넘치고 인간 주변을 맴돌며 온기를 만든다. 핀치는 그를 돌보는 일에 최선을 다한다. 핀치가 로봇 제프를 만들어낸 궁극적인 이유 자체도 자신이 세상을 떠난 이후에 굿이어를 돌볼 수 있는 존재를 만들기 위함이었다. 제프는 그런 핀치의 기대에 한참 못 미치지만, 핀치는 자신이 만든 로봇이 올바른 길을 갈 수 있도록 가르치고 또 돌본다. 그저 바보 같은 인공지능 로봇에 불과했던 제프의 변화과정이 영화의 중반 이후부터 담긴다.
사실 영화 <핀치>의 중심인물은 핀치가 맞지만, 영화 후반부에는 핀치보다 제프의 영화로 보인다. 제프의 탄생부터 그가 배우고 성장하는 과정을 하나씩 보여주는 영화 속에서 제프는 그저 감정 없는 로봇이라기보다 하나의 인간이 탄생하고 성장하는 존재로 보인다. 그가 무언가를 배우고 성장하고, 또 실수하는 과정을 보는 것이 이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감정이자 서사이다. 제프는 뭘 해도 서툴러 보인다. 실수하고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하는 그의 모습에서 오히려 더욱 인간미가 느껴진다. 이 영화에서 온기가 느껴진다면 그건 모두 제프의 서툴고 어색해하는 그 모습에서 오는 것일 것이다.
로봇 제프의 따뜻한 성장기
이 영화에는 악당이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조금은 심심하게 느껴지는 면이 있다. 영화에서 가장 무서운 적은 바로 보호막이 사라진 지구의 환경이다. 환경이 만들어낸 토네이도와 폭풍은 아주 짧은 시간 이어지지만 아주 무서운 파괴력을 보여준다. 영화는 악당 캐릭터를 등장시키기보다는 핀치가 그토록 보살피고 지키려는 노력에 대한 이유를 설명하는데 좀 더 관심이 있다. 마치 부자 관계처럼 보이는 핀치와 제프가 서로 주고받는 대화들이 조금은 척박한 화면과 영화에 생동감을 불어넣는다.
주인공 핀치 역을 맡은 톰 행크스는 따뜻한 인간미를 가진 인물을 다시 한번 연기한다. 과거 <캐스트 어웨이>에서 그랬던 것처럼 혼자 등장해 개와 로봇과 벌이는 그의 연기는 부드럽게 느껴진다. 이번엔 로봇 제프라는 존재가 있어 어느 정도의 상호작용을 보여주고, 유머도 포함되어 있어 시종일관 편안하게 영화를 볼 수 있게 만든다.
이 영화를 연출한 미구엘 사포크닉 감독은 과거에 <리포맨>(2010)이라는 SF 영화를 연출한 적이 있다. 또한 <얼터드 카본> 같은 드라마 에피소드 연출하는 등 SF 장르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감독이다. 그가 연출한 <핀치>는 지구 종말의 분위기 속에서 따뜻함을 담았는데 그 따뜻함이 누구도 아닌 차가운 이미지의 로봇에게서 느껴진다는 점에서 특이한 점이 있다.
영화 속 핀치가 돌봐주었던 굿이어를 위해 만든 로봇 제프는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로봇이 되어간다. 그가 핀치에게 배운 것처럼 그는 어떤 존재를 똑같이 돌보면서 살아갈 것이다. 그가 과연 굿이어와 교류를 하게 될지, 굿이어가 로봇이라는 차가운 존재를 받아들일지는 영화에서 직접 확인하면 좋을 것 같다. 영화 <핀치>는 애플 TV에 공개되어 있다.
*영화의 스틸컷은 [IMDB]에서 가져왔으며, 저작권은 영화사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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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시지가 옥천 허브에 간선 하차 되었습니다
이 글은 영화 [미키17]과 원작인 소설 [미키7]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본론부터 말하겠다.
이 영화는 봉준호 감독의 영화 중 가장 호불호가 갈리는 영화가 될 것이다. 그리고 영화가 말하려는 메시지는, 안타깝게도 목적지인 내게 오지 않고 엉뚱하게 옥천 허브에 가 있다는 것도. 말해야겠다.
영화 타이틀이 나오기 전 까지의 시퀀스에서는 전율이 일었다. 원작보다 더 어두운 분위기로 컨셉을 잡았다는 것을 느끼게 되자마자. 슬그머니 입꼬리가 올라갔다. 아무리 숨기려 해도 숨길 수 없는, 감독 특유의 코미디적인 요소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 장면들은 꽤 희귀한데다잘 해내고 있다는 생각까지 들었으니까.
원작에서 이름을 개자식으로 바꾸어도 별 이질감이 없을 것 같은 베르토(참고 1)를 티모(스티븐 연)로 바꾸어 연출한 것에서는 조금 의아했지만. 아마도 같은 “처지”출신의 친구들이 직업적인 차이에 의해 어떻게 변해가는지를 보여주는 것도 좋은 변주가 될 것이라 생각하며 뭐 그러려니 했다. 마샬 부부를 아예 대놓고 용산 부부가 생각나게 할 정도로 풍자하면서 그 모습 또한 극적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라고 쓰고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까 이것들이 해놓은 짓거리가 영화가 아니라 현실이라니)에서도 아마 말하려는 것이 명확하니, 그 두 사람이 ”그런 꼬라지“로 존재하는구나. 를 느낄수도 있었다.
원작자도, 그리고 봉준호 감독도. 영화로 만든다면 무조건 들어가게 할 것이라 말했다는 바이러스 실험 장면도 좋았다(참고2). 원작에서처럼 나샤의 존재로 인해 그 애틋함도 잘 살린데다 익스펜더블의 삶을 살고 있는 미키들의 실상을 정말 우울하고도 잔인하게 확인할 수 있었으니까.
그렇다.
어떻게 보면 아주 기본적인 틀은 원작과 엄청 크게 다르지는 않다(?)단지 그 대비효과를 극대화 하기 위해 감독이 설정에서 조금 더 매만졌다 정도로 느끼게 하거나. 그정도로 생각하고 “넘어갈 수 ”있을 정도의 수준에 머물렀으니까. 물론 앞부분에서.
안타깝게도 내가 느낀 영화의 문제점들은 이 원작부분을 제외한 곳에서 시작된다. 더 정확하게 이야기 하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부분이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이 문제점은 감독이 원작에 끌린 이유와도 맞닿아 있다.
이 영화, 그리고 원작에는 감독이 좋아하는 모든 것들이 다 들어있다. 극단적으로 이야기 하자면, [미키 17]은 설국열차처럼 자원이 한정된 공간에서설국 열차와 기생충에 등장하는 지도층(부유층)의 우월의식 때문에 아무 계획이 없는 송강호 가족 같은(?) 미키들이 뛰고 구르다가 괴물인줄 알았던 옥자 덕에 목숨을 구하는 영화라고 할 수도 있다. (게다가 금방이라도 따끈한 양갱이 나올 것 같은 용광로(?)까지 나온다!!)
그렇다.
감독이 해왔던 전작들의 거의 모든 세계관이 다 담겨 있는데 웅장하다고 느껴지기는 커녕 산만하고 이리저리 부딪치는 바람에, 안그래도 식량 배급이 여유롭지 않은 미키17의 살이 더 빠질 것만 같이 혼란스럽고 진빠지게 만든다. 원작에서 느꼈을 문제의식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감독이 해답으로 내어 놓은 영화 중반부의 변주는 그 어떤 감흥도 만들어내지 못한다. 게다가 초반부에 진지 노선을 타겠다고 꿋꿋하게 선언을 해 버린 탓에. 미키의 얼빠진 표정은 이제 웃음을 짓게 만들지도 못한다.
중반부가 만들어 낸 설정으로 메시지를 주는 것에 급급하려다보니, 정작 강조되었어야 할 “나는 누구인가”는 먼 발치에서 미키 18과 나샤를 쳐다보는 미키 17마냥 발만 동동 구르며 어찌할 바를 모른채 덩그러니 놓여져 있게 된다. 후반부가 되어서야 잊고 나온 가스렌지 불 처럼 아맞다! 모드가 되어 미키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노력하지만. 그마저도 본질이 많이 흐려져 있다.
원작에서의 미키는 돈도, 쥐뿔도.게다가 가오도 없는 밑바닥 인생이지만.영화에서 묘사한 테세우스의 배에서 부서지면서도 계속 살아남은 벽돌 한 조각 같은, 자신의 정신(영혼)을 지키기 위해서 잘난 친구 베르토보다도 더 확실하게 목적을 쟁취하려 애썼다.
그러나 미키 17은 그 마지막 남은 영광마저도 여자친구 나샤로 대변할 수 있는 새로운 권력층에 위탁해버리는 양상을 보인다. 베짱좋게 마샬과 반물질 버블로 딜을 치던 그의 모습도 볼 수 없고, 싹퉁바가지 베르토의 눈탱이에 주먹을 꽂는 모습도 볼 수 없다. 미키는 여전히 조금은 쭈글쭈글하고, 비실비실한 채로 이제 자신을 옥죄던 것이 없어졌다고 웃지만. 그 행복은 그가 온전히 만들어내지 못한 탓에 언제든 변질될 수 있는 불안감을 안은 것 처럼 보인다.
분명 내게 오기로 약속된 메시지이건만. 안타깝게도 모든 것이 얽혀 언제 내게 올 지 도통 알 수 없다는 옥천 허브에 갖혀버린 것 처럼. 영화의 진짜 메시지는 다른 것들에 둘러쌓여 찾아내기 힘들어진 채 여전히 나를 기다리게만 하고 있는 기분이다.
참고 1. 원작에서 베르토는 모든 것에 만능이면서 신체적으로도 우월한 존재로 나온다. 미키가 그에게 느끼는 열등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 베르토는 미키들의 죽음에 대해 거짓말을 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어마어마한 샹놈임.
참고 2. 영화화 된다는 말이 돌자마자 출판된 개정판에는 원작자와 감독의 대담이 함께 실려있는데, 두 사람 모두 바이러스 실험 관련에 대해 기술하고 있는 14장(기억이 맞다면)을 넣을것이라 했다고 한다. 나도 그랬어. 왜냐면 어떤 바이러스인지 나도 알고 싶었거든(직업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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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
음악영화 좋아하시나요?! 예전에 음악영화 뭘 좋아해요?! 라고 물어보면 비긴 어게인, 라라랜드, 위대한 쇼맨?! 이 정도가 다였다면?! 여기에 하나 더 넣을 수 있는 보헤미안 랩소디가 나타났어요! 많은 사람들의 눈과 귀가 즐겁게 해줄 수 있는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 살펴볼게요!
기본 정보
장르 : 전기, 드라마
감독 : 브라이언 싱어
각본 : 앤서니 매가튼
출연진 : 라미 말렉, 루시 보인턴
개봉일 : 2018년 10월 31일
평점 : 9.45
스트리밍 : tvN , 디즈니 플러스
기획 의도
공항에서 수화물 노동자로 일하며 음악의 꿈을 키우던 이민자 출신의 아웃사이더 '파록 버사라' 보컬을 구하던 로컬 밴드에 들어가게 되면서 '프레디 머큐리'라는 이름으로 밴드 '퀸'을 이끌게 된다. 시대를 앞서가는 독창적인 음악과 화려한 퍼포먼스로 관중들을 사로잡으며 성장하던 '퀸'은 라디오와 방송에서 외면을 받을 것이라는 음악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무려 6분 동안 이어지는 실험적인 곡 '보헤미안 랩소디'로 대성공을 거두며 월드 스타 반열에 오른다
그러나 독보적인 존재감을 뿜어내던 '프레디 머큐리'는 솔로 데뷔라는 유혹에 흔들리게 되고 결국 오랜 시간 함께 해왔던 멤버들과 결별을 선언하게 되는데...
세상에서 소외된 아웃사이더에서 전설의 록밴드 '퀸'이 되기까지, 우리가 몰랐던 그들의 진짜 이야기가 시작된다!
OST
Part 1. Somebody to Love
Part 2. Doing All Right
Part 3. Keep Yourself Alive
Part 4. Killer Queen
Part 5. Fat Bottomed Girls
Part 6. Bohemian Rhapsody
Part 7. Crazy Little Thing Called Love
Part 8. We Will Rock You
Part 9. Another One Bites the Dust
Part 10. I Want To break Free
Part 11. Under Pressure
Part 12. Who Wants to Live Forever
여담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의 경우 국내와 해외를 막론하고 관객 평점이 상당히 좋은 편에 속한다.
음악영화의 특성상 사운드가 풍부한 영화관에서 듣게 된다면 퀸의 음악을 좀 더 직관적으로 훌륭한 공연을 감상할 수 있다.
영화의 번역에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데드풀 번역가 '황석희'가 번역하여 작품을 높은 퀄리티로 감상할 수 있었다.
후기 및 결말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 결말을 살펴보자면...
솔로를 원했던 머큐리는 결국 Queen의 멤버들이 없으면 안된다는 것을 알고 사과를 구하며 대망의 라이브 에이드 공연에 들어간다. 하지만, 이미 몸이 망가질 대로 망가져 연습을 할 때도 삑사리가 나며 아슬아슬 준비를 하면서 공연에 오르게 되면서 본연의 Queen으로 돌아오며 성공적으로 마무리가 된다.
전설적인 밴드 퀸을 영화 스크린으로 소한시켜 내가 관객이 된 것 같이 눈과 귀가 즐겁게 해줬던 영화였다.
영화를 봤다면, 당신의 플레이 리스트에 한 곡은 꼭 들어가는 노래! 아! 이 노래 알아! 하면서 따라 부르고
혼자서 흥얼거리게 되는 마법 같은 영화~
한줄평 : 에오! 에에에에오!!! 에에에에에에에에~~~~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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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날 리뷰 - 아버지 부조금으로 장례식장을 노름판으로 만든 불효자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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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의 전성기는 반드시 온다!
한때는 잘나가던 큰형님 `호성`(손현주).
8년 만에 출소해 보니 남보다 못한 동생 `종성`(박혁권)은 애물단지 취급이고,
결혼을 앞둔 맏딸 `은옥`(박소진)과 오랜만에 만난 아들 `동혁`(정지환)은
`호성`이 부끄럽기만 하다.
아는 인맥 다 끌어 모은 아버지 장례식에서
부조금을 밑천삼아 기상천외한 비즈니스를 계획하며 제2의 전성기를 꿈꾸는데…
그런데…! 하필이면 세력 다툼을 하는 두 조직이 이곳에 함께 있는 것이 아닌가!
때마침 눈치라고는 1도 없는 `호성`의 친구 `양희`(정석용)가
술에 취해 오지랖을 부리는데...
일촉즉발! 수습불가!
과연 X버릇 남 못 준 `호성`에게 봄날이 찾아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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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도그데이즈> 메인 예고편
사람도, 강아지도 '개' 귀엽다! 행복만 가득해지는 [도그데이즈] 메인 예고편 공개? 2024년 기분 '개' 좋은 영화 2월 7일은 극장에서 [도그데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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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선 브라더스> 공식 예고편
피는 못 속인다. 강력한 대만 삼합회 수장이 의문의 암살자에 의해 총격당하자 그의 장남 찰스(저스틴 첸)는 곧바로 로스앤젤레스로 향한다. 그곳에 자신이 보호해야 할 어머니 아일린(양자경)과, 가족의 실상은 전혀 모른 채 온실 속 화초처럼 살아온 순진한 남동생 브루스(삼송 리)가 있기 때문. 하지만 타이베이의 무시무시한 조직들과 신흥 파벌들이 지배권을 차지하기 위해 정면 대결을 벌이는 상황. 찰스와 브루스는 누군가의 손에 처치당하기 전에 형제애와 가족의 진정한 의미를 찾아야 한다. 2024년 1월 4일 스트리밍 시작. 오직 넷플릭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