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드레2022-05-30 16:56:20
꿈을 꾸는 현재를 놓지 않겠다는 과거와 마주하는 순간
영화 오마주
쉽게 쓰이지 않은 글, 쉽게 만들어지지 않은 영화는 흥행하지 못하면 좋은 영화가 아닌 걸까. 좋아하는 마음에서 시작한 일이 어려움으로 다가와 내려놓게 되는 현실을 마주한다. 깨진 문 사이의 바람처럼, 끝끝내 틀린 맞춤법과 같은 딜레마에 빠져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 빠진 지완. 그는 어느 날, 아르바이트 삼아 두 번째 여성 영화감독인 홍은원 감독의 작품 <여판사>의 음향 복원하는 일을 하게 된다. 중간중간 사라진 필름, 들리지 않는 소리, 바래진 장면으로 가득한 영화 속에서 흔적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홍은원 감독의 마지막 행적을 따라가는 길목마다 그 영화와 관련된 사람들을 만나며 어떤 여성의 그림자를 만난다. 어떤 장소에 빛만 바래진 채, 사라지지 않는 마음이 각자 다르지만 비슷한 형태로 펼쳐지고 있는 영화인들을 발견하며 들게 만든 소중한 작품들이 빛을 받지 못했던 과거의 순간과 현재의 순간이 겹치며 어둠이 그림자를 흡수하듯 앞으로 나아가는 지완의 발걸음이 조금씩 가벼워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자넨 끝까지 살아남아”
하나, 둘씩 떠나가는 주변과 영화 그만하라는 말 가운데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에 이런 말을 듣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어떤 변화를 겪어야만 벌어지는 상황을 어떻게 이겨나가냐에 따라 달라지는 수많은 상황 속에 놓였다. 한때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하지 못했고 또 검열되었던 수많은 것들이 제자리를 찾아가기 시작하면서 불협화음을 내기도 했다. 하지만 힘들게 필름을 복원하듯 먼지를 털어낸 자신의 꿈을 다시 바라보는 순간을 맞이 한다.
포기에도 용기가 필요하다. 어떤 어려움 앞에서도 오랫동안 그 꿈을 포기하지 않았는데, 경제적인 문제로 인해 놓아주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어도 포기는 쉽지 않은 법이다. 좋아하는 것을 평생 할 수 없었지만, 그때의 순간들을 찍어둔 앨범, 커피에 달걀을 넣어 마시던 다방, 고이 넣어둔 영사기처럼 영화에 대한 마음을 놓지 않았던 마음이 여전히 남아있었다. 끝끝내 자리를 지켜 소중한 영화들을 펼쳐낸 누군가의 작품이 그림자처럼 흔적을 남기고 커피에 달걀을 넣어 먹던 그때의 다방이 빛바래지지 않은 채, 빛나고 있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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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MZ DOCS] 자유를 뺏긴 그들에게 남은 단 한가지 방법
자유를 뺏긴 그들에게 남은 단 한가지 방법
영화 <에틸라트로즈: 아프간의 기자들> 리뷰
감독] 압바스 리자이
시놉시스] 2021년 8월 15일, 탈레반에 의해 카불이 함락되고, 아프가니스탄의 일간지 에틸라트로즈 소속 기자들은 기로에 선다. 이대로 피신할 것인가, 탈레반의 만행을 고발할 것인가. 결국 신문사 대표는 탈레반에 저항하는 시위를 취재하기로 결정을 하지만, 혹독한 시련에 직면한다. 다섯 기자가 체포되고, 두 명이 끔찍한 고문을 당한 것. 영화는 그렇게 탈레반의 거짓 약속과 아프가니스탄의 비통한 현실을 고발한다.
작년 카불공항에서 IS테러가 일어나면서 전세계는 충격에 빠졌다. 사실 개인적으로 IS라는 무장단체의 테러 자체는 그렇게 충격적이지는 않았다. 그들의 무자비함은 지속적으로 봐왔던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항에서 아프가니스탄을 탈출하려는 사람들이 활주로까지 가득차있었고, 비행기 바퀴와 날개를 잡아서라도 이곳을 떠나려는 저 간절함과 극박함이 굉장히 충격적이고 안타깝게 다가와서 아직도 카불공항 테러는 머리 속에서 잊혀지지 않는다. 이번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의 <에틸라트로즈: 아프간의 기자들>은 탈레반의 아프가니스탄 점령에 관한 이야기를 잘 담아내고 있었다.
리더의 존재
영화 <에틸라트로즈: 아프간의 기자들>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인물은 바로 편집장이다. 이 팀의 리더였던 그는 굉장히 현실적이면서도 언론에 대한 사명감이 높은 사람이었다. 이 두 가지 원칙이 동시에 지켜지기는 솔직히 어렵다. 현실적인 판단에 따른다면 기자의 사명감이 뒷전으로 밀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편집장은 솔직하게 말한다. 아프가니스탄에 남아서 이 현실을 계속해서 취재하고 기사를 써야하는 것이 아니냐는 질문에 왜 그래야 하죠?라고 반문한다. 탈레반 하에 있는 언론사는 그들에게 이용될 뿐 언론의 기본적인 원칙조차 지켜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끝까지 아프가니스탄을 지키며 남아있는 것은 허영심에 불과하다는 것을 꼬집은 것이었다. 현재 아프가니스탄의 비통한 현실을 보도할 수 있는 방법은 아프가니스탄 내부가 아니라 외부이기에 편집장은 어떻게 해서든 기자들을 무사히 다른 나라로 망명을 보내려 한다.
직원들을 안전하게 망명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관련 기관에 직원들의 서류를 등록시키고, 우선적으로 비행기를 배정받을 수 있도록 노력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신들을 점점 압박해오는 탈레반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국제기구 및 단체들과 화상미팅을 가지며 현재의 상태와 보급, 망명에 대한 도움 요청을 지속적으로 한다. 탈레반이 카불을 점령하고, 직원들이 탈레반에게 잡혀들어갔다가 고문을 당하고 돌아올 때에도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하던 편집장이 회의에서 자신의 직원을 살리기 위해 눈물을 흘리며 도움을 요청하는 모습을 보면서 리더의 무게와 책임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아프가니스탄에 남겠다는 직원을 제외하고, 마지막으로 아프가니스탄을 떠나는 편집장의 모습은 끝까지 직원의 안전부터 생각한 이 시대의 참리더가 아니었나 싶다.
가장 두려웠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이 그토록 카불공항을 향해 달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비행기표를 구하지 못해 비행기 바퀴에, 날개에 매달리면서 까지 아프가니스탄을 벗어나고자 한 이유는 무엇일까? 가장 표면적인 이유는 안전일 것이다. 내일의 내가 죽을 수도 있다는 그 두려움이 컸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를 보면 사람들이 아프가니스탄을 떠나는 이유는 안전 문제도 있지만 가장 큰 원인은 자신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탈레반은 굉장히 엄격한 규율을 강조하는 것이 특징이다. 같은 코란을 보지만 자유로운 해석이 가능했던 기존 아프가니스탄과는 달리 탈레반은 엄격한 잣대로 코란을 해석했고, 이로 인해 일상생활 속에서 굉장히 큰 제약이 따랐다. 사람들이 자유롭게 옷을 입을 수 없었고, 여성들의 경우에는 직업을 가질 수도, 눈을 제외한 몸의 모든 부분을 가려야 하는 등 일상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 개인의 자유와 선택이 용납되지 않는다. 아프가니스탄 국민들은 그동안 누려왔던 자유와 선택을 지키기 위해 아프가니스탄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자신의 인생을 주체적으로 선택하고 책임을 질 수 있었던 환경이 파괴되면서 그들은 기본적인 자신들의 인권을 보장받을 수 있는 다른 나라로의 망명을 원한 것이었다. 자신의 인생을 자신의 선택으로 이뤄질 수 없다는 자유의 부재는 인간에게 있어서 죽음의 공포와 비슷하다는 것을 이 작품은 잘 보여주고 있었다.
에틸라트로즈는 과연 다시 아프가니스탄으로 돌아가 카불의 일간지로서 아프가니스탄 독자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아프가니스탄은 다시 자유를 회복할 수 있을까? 에틸라트로즈의 기자들이 다시 한 데 모여 보도를 할 수 있는 날이 오길 바란다.
제14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상영시간표
2022-09-24 11:00
메가박스 일산벨라시타 103호
209
2022-09-28 10:30
메가박스 백석점 2관
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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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회가 연결해 준 두 남녀의 끝
삶은 늘 의도한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신이 추구하고자 했던 방향으로 가려고 애쓰지만 그것은 조금씩 틀어져 어느 정도의 시점이 지나고 돌아보면 예상하지 못했던 위치에 서있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한다. 그때 그 상황에서 벗어나려 애써도 그 방향은 잘 틀어지지 않는다. 정말 운이 좋다면 방향을 틀어 조금 더 자신이 바라던 삶으로 나아갈 수 있겠지만 대부분은 여러 예상하지 못한 일들로 그 자리에 머무르거나 혹은 더 안 좋은 일들을 경험하며 더욱 위축되게 된다. 이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삶의 한 모습이다. 누구나 자신이 바라는 삶의 방향을 바라보고 현재의 삶을 지탱해가지만 어떤 시점에서는 실패를 각오하면서 바라보는 방향을 바꿔야 하는 때가 온다.
그렇게 자신이 어떤 방향을 바라보는 그때, 옆에는 가족이 있다. 힘든 시기를 지날 때 가족은 그것을 버틸 수 있는 힘을 준다. 그리고 그 어려운 상황에서 자기 자신의 본모습을 잃지 않게 해주는 것도 가족이다. 따뜻한 마음으로 서로에게 기운을 주는 그 가족 앞에서는 어려움을 감추고 웃는다. 그렇게 가족들과 좋은 시간을 보내고 나면 바라보는 삶의 방향이 비록 어려울지라도 나아갈 동력이 생긴다. 그래서 더욱 가족을 지키려 하고 자신이 하는 일과는 분리시키려 한다. 그렇게 삶과 일을 분리하면서 자신의 길을 나아가는 것이 어쩌면 가장 좋은 모습일지 모른다.
영화 <낙원의 밤>은 누아르 장르를 통해 삶의 방향이 완전히 틀어져 버린 한 사람의 이야기를 다룬다. 태구(엄태구)는 한 조직에서 꽤 오래 일을 해온 인물이다. 조직 내에서 중간 정도의 계급으로 보이는 그가 병원에서 누나(장영남)와 조카를 만나는 장면으로 영화가 시작된다. 가족을 만나고 맞이하는 그의 모습에서 그가 얼마나 가족을 아끼는지 볼 수 있다. 조카와 이야기를 나누고 장난을 치는 그는 퉁명스러운 누나의 태도도 잘 받아주면서 따뜻한 태도를 유지한다. 어떤 질병으로 인해 시한부 선고를 받은 누나에 대한 연민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그가 가진 가족에 대한 사랑이 그런 따뜻함을 불러왔을 것이다. 비로소 누나와 조카가 차를 타고 출발했을 때, 그의 얼굴은 어둡게 변한다. 그 표정이 바로 그가 일을 처리하고 대하는 모습일 것이다. 그리고 그가 하는 일이 얼마나 어두운 일인지를 보여주기도 한다.
그는 철저히 그의 일과 가족을 분리시키면서 삶을 살아왔다. 하지만 병원에서 집으로 가던 누나와 조카가 차량 사고로 유명을 달리하면서 그가 보는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없어져 버린다. 그렇게 그에게는 일만이 남았고 그것이 조직싸움 과정에서 누군가에 의해 살해당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가 보는 삶의 방향은 완전히 틀어져 버린다. 영화 속에서 태구가 가족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하는 장면은 매우 건조하고 빠르게 연출되었다. 즉 이 영화가 복수의 카타르시스를 전달하는 이야기라기보다는 복수를 한 이후 태구가 받는 여러 가지 리액션을 보는 것에 좀 더 무게를 두고 있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태구가 속한 조직과 관련하여 양사장(박호산)은 태구가 지지하는 중간보스이며 그 대척점에 서있는 마이사(차승원)는 태구가 피해야 하는 인물이다. 자신의 복수가 마무리된 후, 태구는 제주도의 무기밀매상 쿠토(이기영)와 그의 조카 재연(전여빈)의 집에서 머무르게 되는데 태구의 목적은 이제 조직의 일에서 벗어나 한국을 떠나는 것이다. 쿠토의 집에서 만나게 되는 재연은 태구의 누나와 비슷하게 치료가 어려운 질병에 걸려 곧 죽음을 맞이하는 시한부 캐릭터다. 그는 태구를 환영하지는 않지만 아주 밀어내지도 않는 인물이다.
영화의 대부분은 제주도에서 도피생활을 하는 태구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이제 자신이 바라보는 삶의 방향이 없는 듯 그저 공허한 눈빛으로 제주를 돌아다닌다. 시한부 소녀 재연과 태구가 대화를 하고 관계를 만들어나가게 되는 것은 어쩌면 필연적인 것 같다. 재연과 그의 삼촌 쿠토는 서로에게 유일하게 남은 가족으로서 서로를 굉장히 의지한다. 무기밀매 일을 하고 있는 쿠토가 못마땅하지만 재연은 한 편으로는 삼촌을 잃을까 걱정을 하는 인물이다. 쿠토는 조카의 질병을 낫게 하려고 해외의 유명 병원에서 수술을 시키려 무던히 애쓴다. 이 가족에게 갑자기 나타난 태구는 어찌 보면 불청객이다. 반대로 태구가 재연을 볼 때는 누나와 조카가 떠오를 수밖에 없다. 시한부였던 누나처럼 재연도 삶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고, 위험한 일을 하는 삼촌의 일은 싫어하지만 삼촌을 의지하는 재연의 모습에서 태구의 어린 조카가 떠오른다.
영화 <낙원의 밤>에서 관심을 기울이는 건, 태구와 재연의 관계다. 전혀 연결점이 없을 것 같은 그들이 서로 만나 대화하면서 상대방에게 가족의 모습을 본다. 물회는 영화 안에서 꽤 의미 있는 음식이다. 삼촌과 함께 생활하면서 먹게 된 물회는 재연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며, 태구에게도 어릴 적 엄마가 해줬던 음식이어서 엄마의 맛이 담긴 음식이다. 그래서 그들은 맛있는 것을 먹을 때 물회 집에 가서 음식을 먹으며 가족의 맛을 느낀다. 그 맛에서 두 주인공이 서로에게 의지할 수 있는 작은 연결고리가 생긴다. 어찌 보면 태구와 재연은 연인의 감정보다는 삼촌과 조카의 모습을 서로에게서 보는 것 같다. 영화가 후반부로 갈수록 그런 연결된 감정은 더욱 강해지고 서로를 유사가족처럼 느끼고 서로에게 기대도록 만든다.
영화 전반적으로 밤에 벌어지는 일은 거의 없다. 영화의 제목이 <낙원의 밤>인 것은 휴양지인 제주도에서 벌어지는 나쁜 일들을 담았기 때문인 것 같다. 또한 우리가 아는 제주의 아름다운 모습을 화면에 거의 비추지 않는다. 그저 바닷가 어딘가의 휴양지라는 느낌이 강하다. 태구와 재연은 가족의 맛이 나는 음식을 먹고 바닷가 옆의 휴양지에서 나쁘지 않은 시간을 보내지만 그들의 삶에 더 이상 밝은 낮은 없다. 그런 상황으로 인해 태구의 삶도, 재연의 삶도 더욱 어두운 밤으로 계속 빠져든다. 태구는 질병으로 인한 시한부는 아니지만 외적인 영향으로 삶이 얼마 남지 않은 것처럼 느껴지며 모든 것을 내려놓은 듯한 그의 눈빛에서도 그것을 알 수 있다. 다소 어둡고 정적으로 촬영된 제주도의 풍경은 이런 두 주인공들의 비극을 느낄 수 있게 깨끗하고 조금은 건조하게 찍혔다.
영화 <낙원의 밤>은 범죄 조직에서 일하는 한 남자가 겪는 일들을 담고 있기 때문에 조직에서 발생한 범죄, 복수극을 기본적으로 담고 있다. 하지만 영화는 초반 이후 태구와 재연의 관계에 좀 더 초점을 비추고 있어 누아르 장르의 분위기가 많이 퇴색되었다. 또한 비극적인 상황에 두 사람을 넣어 감정적인 부분을 관객에게 전달하려 하지만 이 두 사람의 관계가 가까워지는 과정이 관객들에게 잘 전달된다고 볼 수는 없다. 즉, 영화 속에서는 두 사람이 서로 의미 있는 관계가 되지만 관객에게 두 사람이 느끼는 감정이 완전히 전달되지 않아 공허하게만 느껴진다. 또한 범죄물과 복수 물이라는 긴장감 역시 잘 전달되지 않아 결말부에 다다를 때까지 영화가 산만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영화의 모든 인물이 알고 보면 각자의 접점이 있어 연결되고, 영화의 말미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정리되지만 그런 정리의 깔끔함이 잘 이해되지 않는다.
조직 내에서 태구와 대척점에 있는 인물은 양사장이라기 보다는 마이사일 것이다. 마이사는 양사장의 계획 때문에 태구를 죽여야만 하는 그 상황에 대해 계속 투덜대는데, 정작 영화에는 양사장을 죽일 수 없는 이유가 명확하게 제시되지 않으면서 조직에서 큰 힘이 없는 태구를 희생시켜서 얻는 것이 얼마나 큰 것인지 잘 드러나지 않는다. 또한 마이사가 영화에 등장하는 중반부터 영화에 긴장감을 넣으려 애쓰지만 그것이 크게 효과적으로 발휘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어디선가 본 듯한 기시감이 드는 배우 차승원의 연기는 그동안 관객들이 많이 보아왔던 차승원의 농담 반 진담 반인 예능 캐릭터와 겹쳐 보인다. 그래서 오히려 얄미운 역할을 맡은 배우 박호산의 연기가 더 악독하게 느껴진다.
주연을 맡은 배우 엄태구의 연기는 좋지만, 그가 가진 특유의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것처럼 대사를 하는데, 이 대사가 너무 작아, 관객들에게 한 번에 잘 전달되지 않는다. 재연 역을 맡은 배우 전여빈은 비극적인 상황에 놓여 결국 자신의 분노를 표출하고 마는 캐릭터를 인상적으로 연기했다. 이 영화의 연출을 맡은 박훈정 감독은 데뷔작 <신세계>로 앞으로가 기대되는 감독이었다. 하지만 <VIP>, <대호>, <마녀> 등의 영화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였고, 이번 신작도 호불호가 많이 갈리는 상황이어서 향후 연출작에 어떤 변화가 있을지 궁금해진다.
*영화의 스틸컷은 [다음 영화]에서 가져왔으며, 저작권은 영화사에 있습니다.
[간단한 리뷰가 포함된 movielog를 제 유튜브 채널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
주로 말 위주로 전달되기 때문에 라디오처럼 들어주셔도 좋을 것 같아요.]
유튜브 Rabbitgumi 채널 구독과 좋아요도 부탁드립니다!
<낙원의 밤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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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살인 내가 깨어나 보니 37살?!
안녕하세요!
영화/OTT 콘텐츠 큐레이션 웹 매거진 '씨네랩'입니다.
45편의 작품에서 감독을 맡은 알렉스 하드캐슬 감독과 믿고 보는 배우 레벨 윌슨의 만남!!
바로 <시니어 이어>입니다.
'아는 맛이 제일 무섭다'는 말이 이 영화를 나타내기 딱 좋은 표현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전형적인 하이틴물이지만, 정말 가볍게 보기 좋은 2022년 버전 하이틴 영화입니다.
누가 출연하나요?
스테파니 | 레벨 윌슨
FILMOGRAPHY
시니어 이어 (2022)
어쩌다 로맨스 (2019)
캣츠 (2019)
AWARDS
CinEuphoria Awards, 2021
MTV Movie+ TV Awards
AACTA, 2020
어떤 내용인가요?
치어리더팀에서 단장을 맡고 있으며, 멋진 남자친구까지 있는 스테파니!
이루고 싶은 걸 모두 이룬 스테파니의 마지막 소원은 바로 졸업 파티에서 퀸이 되는 거였습니다.
경기 전, 멋진 치어리딩을 선보이는데, 하이라이트 부분에서 착지 사고가 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스테파니는 20년동안 코마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스테파니가 깨어나고 나서 낯선 얼굴, 낯선 환경에 혼란을 겪게 되는데요.
스테파니는 다시 학교에 돌아가기로 결심하고,
학교 교장이 된 친구에게 말해 고등학교에 돌아가게 됩니다.
20년이나 지났기에 많은 변화가 일어난 학교에서 스테파니는 잘 적응하고,
졸업 파티 퀸이 될 수 있을까요?
Reviews
"2022년 버전 하이틴 로맨스"
유명한 하이틴 영화를 보면 대부분 2000년대 초반에 나와 현 시대에 보면 조금 이해가 안 가는 부분도 있는데
<시니어 이어>는 2000년대 초반에 이야기와 2022년 현재의 이야기까지 담아 시대 변화에 따른 사회 변화, 학생들의 변화 등을 비교하면서 보는 재미가 있었습니다.
미국 영화 <21 점프 스트리트>와 한국 드라마 <서른이지만 열일곱입니다>까 떠오르는 이야기였습니다.
"기대되는 신예 배우들의 대거 등장"
<시니어 이어>의 조연 배우로 신예 배우들이 대거 등장하는데요.
물론 해외에서는 많은 활동을 하였지만, 한국에서는 처음 보는 배우들도 있었고요.
레벨 윌슨이 원탑 주인공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배우들이 기억에 남을 정도로 매력적인 연기를 펼쳤습니다.
"추억의 팝송"
주인공이 2002년에 고등학교를 다녔다 보니 그 시절 팝송이 OST로 많이 나왔는데요.
신나는 추억의 팝송과 함께 영화를 즐길 수 있어 더욱 재밌었던 것 같습니다.
(추억의 팝송 뮤비 패러디도 보실 수 있답니다!)
지금까지 <시니어 이어>를 간단하게 살펴보았는데요.
어떠셨나요?
<시니어 이어>에는 패션과 하이틴 영화를 좋아한다면 알만한 특급 카메오가 등장하는데요.
궁금하다면 넷플릭스에서 <시니어 이어>를 시청해보세요!
씨네랩 에디터 Hiz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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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퍼블릭 도메인의 활용 가능성이 기대될 뿐
스크림, 할로윈 시리즈와 같이 시리즈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공개 전부터 화제가 되었던 슬래셔 영화라하면, <곰돌이 푸: 피와 꿀>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A. A 밀른의 곰돌이 푸의 저작권 만료로 퍼블릭 도메인이 되었기에 등장한 슬래셔 영화 <곰돌이 푸: 피와 꿀>.
크리스토퍼 로빈에게 버림받은 곰돌이 푸와 피글렛이 잔혹한 학살로 복수를 벌인다는 무시무시한 재해석으로 개봉전부터 대중들에게 많은 화제를 모았다.
그러나 이런 곰돌이 푸의 슬래셔 장르 컨셉은 아이디어가 좋지만, 아이디어'만' 칭찬하고 싶다.
영화는 84분이라는 짧은 러닝타임에도 불구하고 깊이없는 캐릭터들의 단순 사살만이 반복될 뿐이다.
게다가 슬래셔물의 꽃인 사살까지 이르기까지의 예열이 길고 따분하다는 것도 큰 흠이다.
그리고 그 사살마저도 곰돌이 푸와 피글렛만이 보여줄 수 있는 사살이었냐에 대해서는 아니라고 답할 수 있다.
흔하게 보는 슬래셔식 사살 장면이지만, 거기에 곰돌이 푸와 피글렛을 얹은것 뿐이다.
저예산 영화임을 감안하더라도 연출이 상당히 낙제점이라는 것이 아쉬웠고, 아이디어만 빛난 영화였다는 생각이 든다.
다만 흥행은 대박을 쳐서 이미 후속편도 확정되었다던데, 후속작에서는 이 좋은 아이디어를 살릴 좋은 연출을 보길 바래본다.
여담으로 올해 프리츠 랑의 "메트로폴리스"와 프리드리히 빌헬름 무르나우의 "선라이즈"도 퍼블릭 도메인이 되었다고 한다.
곰돌이 푸: 피와 꿀이 이런 고전들이 퍼블릭 도메인이 되면서 새롭게 재해석해 재탄생하는 신호탄이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도 든다.
*이 글은 원글없이 새로 작성된 글이며, 출처란에는 작성자의 인스타그램 주소를 기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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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드러운 거부로서의 애도, <당신과 함께한 순간들>
2015년 퓰리처 희곡 부문 최종 후보에 오른 『Marjorie Prime』은 유족의 기억을 통해 망자의 정체성을 재현하는 인공지능 홀로그램, ‘프라임’을 중심으로 디지털 시대 죽음과 애도의 의미를 날카롭게 질문하는 작품이다. 동명의 희곡을 각색한 영화, <당신과 함께한 순간들 Marjorie Prime> 또한 기억이라는 삶의 요소가 어떻게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과 맞물려 다양한 애도의 방식으로 분화되는지 다룬다.
그러나 '디지털 부활'은 더이상 픽션의 영역이 아니다. 2016년, 러시아 기자였던 Eugenia Kuyda는 사랑하던 연인을 잃고 그와 나눈 메시지를 모두 모아 구글 기반의 신경 네트워크(neural network)를 활용하여 그를 챗봇으로 부활시켰다. 챗봇 버전의 연인은 정말 사람 같아서 Kuyda는 챗봇과 과거와 미래에 관한 얘기를 나누며 연인을 잃은 슬픔을 해소했고, 더 나아가 모든 사람이 쓸 수 있는 대화형 챗봇, ‘Replika’를 만들었다. 한국에서도 2020년부터 매년 사망한 가족을 딥페이크, VR, 인공지능 등의 기술을 활용하여 ‘부활’시키는 <VR휴먼다큐멘터리-너를 만났다> 프로그램이 방영되었다. 2025년 현재, 구글 플레이 스토어 기준 ‘Replika’의 다운로드 수는 천만 회를 넘어섰고, <너를 만났다> 프로그램 시즌 1 유튜브 클립 영상 조회 수는 3천 6백만 회를 기록하는 등, 디지털 부활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날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인공지능을 활용하여 망자를 시청각적으로 재현하는 '디지털 부활'이 점점 현실화되고 있는 것이다.
고인이 된 이후에도 사랑하는 사람과 닿고 싶은 인간의 욕망은 디지털 기술을 통한 부활을 가속화하고 있다. 조형래는 “망자를 기리는 첨단의 기술적 방식이 막대한 규모의 사회적 정동의 재구성을 초래하고, 죽음에 대한 사회적 태도 및 문화적 관행 전반에 영향을 초래할 것임이 분명”하다면서, “이러한 초혼(招魂)의 테크놀로지가 프로이트적 의미의 애도를 불가능하게 만들고, 더 나아가 유족들에게 끊임없는 추모의 고통을 유발”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반면 디지털 시대 죽음의 의미를 연구하는 심리학자인 일레인 카스켓은 디지털 기술을 통한 애도가 지속적 결속(continuing bonds)의 한 종류라고 주장하면서, 고인과 유대 관계를 끊지 못하는 이들을 우울증 환자로 취급하는 경향을 문제시한다. 카스켓에 따르면, 고인과 유대 관계를 유지하려는 사람들은 사랑하던 고인과 맺은 심리적, 정서적 유대를 소중히 하거나 심지어 더 강화하고자 하는 오래된 충동에 따르는 것뿐이다.
영화는 마조리가 월터 프라임, 그러니까 15년 전 사망한 자신의 남편을 홀로그램으로 재현한 인공지능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월터 프라임은 자신이 청혼하던 날 함께 봤던 영화,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 얘기를 꺼내고, 치매에 걸린 마조리는 이를 기억하지 못한다. 중요한 기억을 잊어버린 자신을 원망하던 마조리는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 대신 “<카사 블랑카>를 보고 돌아온 날 청혼했다면?”이라고 묻고, “다음에 우리가 (청혼) 얘기를 나눌 때는 이게 사실이 되는 거야.”라고 말한다. 어차피 거짓된 기억을 말해도 치매로 인해 사실 여부를 제대로 판단할 수 없는 마조리는 이후로도 종종 월터 프라임에게 왜곡된 기억을 요청함으로써 망상적 위안을 얻는다.
생의 끝자락, 기억을 왜곡해서라도 숨기고 싶은 과거는 월터 프라임이 예전에 키우던 강아 지인 토니 얘기를 꺼내면서 분명해진다. 월터 프라임은 마조리에게 ‘자식이 없던 한 연인이 토니라는 이름의 검은색 푸들을 키웠는데, 토니가 죽고 나서 낳은 딸-테스-도 검은색 푸들을 골랐다’라는 이야기를 해준다. 마조리가 두 번째 푸들에게 ‘토니 2세’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설명하자, 월터 프라임은 두 번째 푸들도 금방 ‘토니’라고 불렸다며, 두 강아지가 완전히 똑같지는 않았음에도 나중에는 토니와 토니 2세를 구분하는 의미가 없어졌다고 말한다. 여기서 토니는 -2막에서 등장하는 앵무새와 마찬가지로-망자와 망자를 재현한 프라임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첫 번째 토니를 죽이고 자살한 마조리의 아들, 데미안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월터 프라임이 토니의 죽음을 설명할 때 마조리가 흘리는 눈물은, 키우던 강아지에 대한 그리움이라기보다는 아들의 자살이라는 트라우마를 대면한 자의 눈물로 해석할 수 있다.
프로이트는 「애도(슬픔)와 우울 Trauer und Melancholie」에서 애도를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에 대한 반응”으로 규정하고, 여기에는 “사랑하던 사람을 대신할 새로운 사랑의 대상을 찾지 못하는 것, 그리고 사랑하던 이를 생각나게 하는 어떤 행동도 금하는 것, 등이 포함된다”라고 설명한다. 달리 말해, 상실을 경험한 사람은 ‘자아의 억제’를 통해 상실 그 자체 외에 다른 곳에는 관심을 둘 수 없는 상태가 된다. 프로이트는 이러한 슬픔(애도)이 “사랑하던 대상이 더는 존재하지 않음을 인식하고 그 대상에 부과되었던 리비도를 철회”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자연스러운 반발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러한 반발이 너무 강하게 되면 상실을 경험한 사람이 아예 “현실에 등을 돌리는 일이 일어나게 되고, 환각적인 소원 성취의 정신병을 매개로 예전의 그 대상에 집착”하게 된다. 프로이트는 이렇듯 정상적 애도에 실패한다면 상실이 자아를 잠식하고 이것이 자기 혐오적 우울증으로 이어진다고 설명하지만, 대상의 상실이 극단적인 트라우마인 마조리의 경우, 자기 혐오적 우울보다는 오히려 그 대상을 무의식적으로 격리하려는 억압(repression)에 가까운 행동을 보인다.
“정신적 트라우마 현상의 핵심은 기억(표상)과 정동”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트라우마를 유발한 사건에 대한 강한 정동적 반응이 있었는지다. 달리 말해, 외상적 사건이 유발한 정동을 언어, 또는 행동으로 수행하지 않으면 정동의 잔여가 정신적 트라우마를 유발하는 것이다. 따라서 히스테리 환자들은 주로 트라우마적 사건의 상기(회고)로 인해 고통을 겪는다. 데미안의 죽음이 마조리에게 트라우마를 유발한다면, 이는 데미안에 대한 애도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데미안이 사랑했고, 데미안이 죽인 토니를 떠올리는 것만으로 마조리는 강한 정동을 경험한다. 이러한 반복적인 표상(기억)의 회고는 마조리에게 고통을 줄 뿐이다. 그래서 마조리는 데미안을 충분히 애도하는 대신, 데미안의 죽음이라는 표상의 억압을 택한다.
마조리는 지난 50년 동안 데미안의 이름을 한 번도 언급하지 않고, 그와 관련된 모든 사진을 집에서 치운 채 살아왔다. 하지만 치매에 걸린 마조리는 데미안이 죽었다는 사실을 잊고 테스에게 “데미안은 지금 자?”라고 묻는다. 마조리가 치매를 앓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아무렇지도 않게 데미안의 행방을 물은 직후 월터와 공원 벤치에 앉아 사프란 색의 깃발을 바라보던 기억을 생생하게 묘사하는 마조리의 모습은 모순적이다. “(벤치에서) 일어나기 싫었어. 남은 생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으니까”라는 마조리의 대사는 데미안의 죽음 이후에도 삶을 이어나가야 하는 마조리의 처참한 심정을 대변한다. 이것은 데미안의 죽음이라는 표상 (기억)이 사라진 이후에도 지속되는 정동의 잔여를 의미한다.
존은 마조리가 해준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월터 프라임에게 마조리가 사프란 깃발을 바라봤던 날의 추억을 전해주지만, 영화는 플래시백 장면을 통해 마조리가 사실 공원 벤치가 아닌, 거실 소파에 앉아 TV에 나온 장면을 봤던 것임을 밝힌다. 테스의 주장처럼, 마조리는 “원래의 모습이 아니라 마지막 기억을 기억하는 것이며” 따라서 기억은 “되풀이될수록 희미해지는 복사본”과 같은 것이 된다. 결국 프라임에게 주입되는 기억은 “실제 기억이라기보다는 마조리가 기억하거나, 기억하고 싶은 과거”이다. 이렇듯 마조리와 월터 프라임을 통해 재구성되는 기억은 특정 시선에 의해 오염된 기억이며, 따라서 데미안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을 방해한다.마조리에게 데미안의 죽음은 너무도 고통스러운 기억이기 때문에 마조리는 본능적으로 이를 억압하려 하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억압이 “의식과 무의식 사이에 확연한 간극이 생길 때 발생”한다며, “억압의 본질은 자아를 위협하는 본능(충동)을 의식으로 진입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억압의 동기와 목적은 본능이 만들어낸 “불쾌를 피하는 것”이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트라우마가 해소되기 위해선 “억압의 극복과정을 통한 기억의 회복”이 필수적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아들의 자살이라는 트라우마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채 치매에 걸린 마조리는 월터 프라임의 외형을 아들이 자살하기 전인 젊은 시절로 설정하면서 아들 죽음 이전의 과거로 회귀하고자 하는 충동을 보인다. 아들을 충분히 애도하지 못하고 오히려 아들의 죽음을 잊고자 하는 마조리의 태도는 현실 도피적 성향을 띤다는 점에서 월터 프라임이 제공하는 망상적 위안을 통해 유지된다.
월터 프라임을 비교적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마조리조차도 망자와 망자를 재현한 인공지능 사이의 간극이 촉발하는 ‘두려운 낯섦’을 겪는다. 두려운 낯섦은 “공포감(또는 기이한 불안)의 일종으로,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 오래전부터 친숙했던 것에서 출발하는 감정”이다. 이정환은 프로이트가 말한 ‘두려운 낯섦’이라는 개념이 로봇 공학과 관련된 논의에서 흔히 들을수 있는 “불쾌한 골짜기”와 연관이 있다고 설명한다. 두려운 낯섦에 대한 프로이트의 주장 처럼, 불쾌한 골짜기에 대한 많은 비판에도 불구하고, “비인간에 대한 인간의 무의식적 두려움”이 명백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프라임이라는 ‘기술’에 호의적이든, 그렇지 않든,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자신이 사랑 하는 사람을 재현한 프라임과 마주했을 때, 프라임이 자신이 생각했던 망상적 위안을 충분히 제공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절망한다. 왜곡된 기억을 그대로 흡수하고, 젊었을 적 외형이 데미안의 죽음 이전을 상기하는 월터 프라임을 통해 데미안의 죽음이라는 트라우마적 사건을 억압 하는 마조리조차도, 월터 프라임이 월터 그 자체가 아니라는 사실에 불쾌감을 느낀다. 자신이 생각한 실재의 이미지를 프라임이 충분히 재현하지 못할 때, 프라임은 망자의 말을 의미 없이 반복하는 앵무새에 불과한 존재가 된다.
이정환은 대상의 기억을 주입하면, 프라임을 통해 그 사람의 존재가 영원히 지속될 수 있지 만, 이 기억은 살아 있는 자의 욕망이 투영되어 있다는 점에서 실재 망자와는 다른 결핍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생전에 사랑했던, 친숙한 망자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망자와는 다른 프라임의 모습은 유령과도 같은 두려운 낯섦을 유발한다. 허구의 작품뿐만 아니라 현실속 디지털 부활 또한 두려운 낯섦을 유발하는 건 매한가지다. 조형래는 디지털 기술을 통한 망자의 재현은 늘 “고인에 대한 추모와 의미 부여를 둘러싼 다양한 상호작용을 거스르는 미묘한 위화감을 수반한다”라고 설명한다. 이렇듯 작품 안팎에 무관하게, 기술적 한계는 감각적인 측면에서도, 인지적인 측면에서도 대상을 완벽히 재현해낼 수 없다는 점에서 늘 기이한 불안, 두려운 낯섦, 즉 불쾌감을 유발한다.
테스에게도 데미안의 죽음은 평생의 트라우마이다. 마조리는 평생 데미안의 이름 한 번 꺼낸 적 없지만, 테스는 늘 데미안의 죽음으로 인해 마조리에게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정신적 외상은 테스의 자아에도 영향을 미쳐 영화 내내 테스는 “예민하고 성마른 성격의 소유자이자, 매사에 부정적인” 사람으로 묘사된다. 테스는 월터 프라임에게 질투를 느낄 정도로 프라임에 대해 부정적이지만, 결국 마조리가 사망하자 치유의 도구로서 마조리 프라임을 소환한다.
마조리 프라임은 테스에게 ‘토니 데리고 해변에 갔던 거 기억하니?’라고 묻는다. 테스는 기억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존이 개를 키우자고 제안했다면서, ‘카타훌라’를 고려하고 있다고 말한다. 생전 마조리는 ‘카타훌라’가 무엇인지 몰랐으므로, 마조리 프라임 또한 테스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 그러자 테스는 마조리에게 “‘카타훌라’를 검색해 보라”고 요청한다. 이는 프라임이 진정한 ‘대상’으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의 환상이 필수적임을 의미한다. 달리 말해, 이것은 프라임의 ‘이용자’가 프라임이 환상에 불과함을 인지하고 있는 한, 프라임과의 대화가 어떠한 치유 효과도 산출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프라임이 환상에 불과하다면, 프라임과의 모든 상호작용 또한 결국 허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마조리 프라임은 테스의 요청에 따라 카타훌라 하운드의 사전적 지식을 로봇처럼 읊고, 테스는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며 ‘(마조리 프라임이 이미지에 불과하다는 사실, 즉 진짜 엄마가 아니라는 사실에 대해) 모른 척을 더는 못하겠다’라고 말한다. 테스는 이어 ‘(마조리 프라임이) 정말 엄마 같다가도, 어떨 때는 (엄마가 아니라는 사실이) 너무도 확연하다’라고 말한다. 이미 지와 실재의 간극은 이렇듯 과거가 아닌 현재의 기억으로 인해 명확해지며, 테스로 하여금 ‘엄마처럼 친숙하지만, 엄마가 아닌’ 두려운 낯섦을 느끼게 한다. 이어지는 장면은 이 두려운 낯섦으로 인해 프라임이 어떻게 치유의 실패로 이어지는지 묘사한다.
표면적으로 테스는 엄마의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했다는 콤플렉스를 갖고 있지만, 그의 근원적인 트라우마는 마조리와 마찬가지로 데미안의 죽음이 원인이다. 마조리 프라임은 ‘진짜 엄마 같지 않다는’ 테스의 불만에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더 해달라고 말하고, 이는 자연스럽게 테스가 엄마의 기억을 회고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여기서 마조리 프라임은 테스에게 결정적인 질문을 던진다. 마조리 프라임이 ‘테스 말고 다른 자식이 있었냐’고 묻자, 테스는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없었다’라고 대답한다. 생전 마조리가 평생 데미안을 언급하지 않았던 것처럼, 테스 또한 데미안에 대한 기억을 숨기면서 자신의 트라우마를 드러내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반드시 생생한 정동적 경험을 포함하여, 망각된 외상적 사건을 기억해 정확히 말로 표현”할 때야 비로소 트라우마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트라우마의 심리적 치유를 위해선 단순한 외상적 사건의 재현을 넘어선 생생한 재경험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프라임은 얼마든지 남아있는 자들에 의해 왜곡된 기억만을 선별적으로 저장할수 있으므로, 치유의 ‘도구’로서 프라임은 제 기능을 다 할 수 없다. 기억의 선별과 왜곡된 기억이 유발하는 이미지와 실재의 간극, 즉 두려운 낯섦은 심리적 치유를 불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라깡은 “욕망의 중심에 놓여있는 결여”를 ‘'대상 a'’라고 지칭하면서, 상상계적 질서 속에서 이 대상은 어떤 욕구도 충족시키지 못한다고 설명한다. 테스는 마조리 프라임을 형성하기 이전부터 자신이 원하는 어떤 환상을 프라임에게 투사한다. 이 환상은 데미안의 죽음을 기억하지 못하는, 그래서 자신에게 늘 다정하고 충분한 사랑을 주는 엄마이다. 그러나 마조리 프라임이 정말 테스에게 인자하게 미소 지으며 다정한 말을 건네자, 테스는 ‘덜 웃어야 엄마 같아 보인다’라고 충고한다. 테스의 '대상 a'-엄마의 사랑이라는 욕망의 결여-를 충족하기 위해서 마조리 프라임은 테스에게 생전에 주지 못했던 사랑과 다정함을 주어야 하지만, 동시에 사랑을 주면 줄수록 ‘진짜’ 마조리와는 멀어진다는 점에서 테스의 환상은 결코 충족될 수 없다.
애증의 대상이자 환상 속 '대상 a'인 엄마의 상실은 테스를 우울로 이끈다. 프로이트는 우울과 슬픔의 차이를 ‘자애심의 추락’으로 설명한다. “우울증 환자는 대상과 관련된 상실감으로 고통을 겪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말을 들으면 그것이 자아와 관련된 상실감이라는 것이다.” 테스는 계속해서 마조리와 존의 입을 빌려 자기 자신을 ‘무너졌다’거나, ‘엄마를 사랑하게 만들 수 없었다’고 표현한다. 마조리에게 향해 있던 애증의 리비도가 마조리의 죽음 이후 갈 곳을 잃고 테스의 자아를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를 눈치라도 챈 듯 마조리 프라임은 테스에게 ‘자기 자신에게 너무 가혹하게 굴지 말’라고 말한다. 그러나 마조리 프라임과 존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애도의 실패-우울증은 결국 테스를 자살이라는 파괴 충동으로 이끈다.
프로이트가 정상적인 애도, 달리 말해 상실을 극복하고 애도를 마무리하는 ‘작업’을 중시했던 까닭은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이 자아를 좀먹고 파괴 충동으로 이끄는 걸 막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데리다는 정상적인 애도와 비정상적 애도를 구분하는 프로이트의 애도 이론을 비판하면서, 죽음이 타자를 잊는 여정의 시작이 아니라, 타자를 기억하는 여정의 시작이라고 주장한다. “데리다가 보기에 프로이트의 정상적인 애도가 갖는 문제는 타자의 타자성을 말살하려 한다는 데 있다. 성공적인 애도 작업을 통해 내면화가 가능해지면, 타자는 나의 일부가 되는데, 그렇게 되면 타자는 더는 타자가 아닌 것이 되기 때문이다.”
마조리에 대한 테스의 정동-상실감으로 인한 우울, 사랑, 증오-은 너무 강력해서 테스는 자신의 편협한 시선에서 기억하는 마조리의 모습-약간 허영심이 있고, 까칠하며, 자신에게 한번도 사랑한다고 해준 적이 없을 만큼 데미안을 사랑한-만을 회고한다. 마조리 프라임은 이렇듯 테스의 내면화된 타자를 온전히 재현할 수 없다는 점에서 테스에게 두려운 낯섦을 유발하고, 프로이트식의 ‘정상적인 애도’를 완수할 수 없게 만든다. 그러나 애도의 실패가 반드시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애도는 “가능성과 불가능성, 성공과 실패의 반복적 진동 속에서 수행 적으로 이루어지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갑작스러운 테스의 자살 이후, 존 또한 테스 프라임 앞에서 두려운 낯섦을 느낀다. 평소에도 프라임에 호의적이었던 존은 테스 프라임을 더 진짜 테스처럼 만들기 위해 적어두었던 테스의 특징들을 테스 프라임에게 읊어준다. 하지만 존 또한 이내 ‘(프라임은) 반사판 (Backboard)에 불과한,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나는 지금) 혼잣말을 하고 있다’라고 말하며, 테스 프라임과의 대화에 회의를 느낀다. 그러나 데리다에 따르면, 이러한 ‘좌절된 내면화’는 “타자를 타자로서 존중하는 것, 즉 부드러운 거부의 자세”를 의미한다. 프라임에게 아무리 왜곡된 기억을 주입한다고 해도, 프라임이 환상 속 ‘대상 a’를 완벽하게 충족하는 것은 아니다. 남아있는 자는 필연적으로 이미지와 재현의 간극으로 인한 두려운 낯섦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두려운 낯섦이 초래하는 애도의 실패는 동시에 ‘타자를 타자로서 받아들이는’ 애도의 시작이 된다.
데리다는 “기억을 통한 내면화”가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자아를 잠식하는 멜랑콜리아를 긍정하는 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멜랑콜리아는 타자를 버려두고 자신에게만 집중하는 일종의 나르시시즘적 퇴행 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데리다는 “애도의 가능성과 불가 능성이 만나는 지점, 애도의 성공과 실패가 같아지는 지점, 애도와 멜랑콜리아가 중첩되는 공간”에 주목한다. 즉, “애도는 타인의 세계가 끝날 때, 타인을 위해 그 끝을 내 안에 담는 것이며, 동시에 관념화, 내면화, 그리고 식민화에 저항”해야 한다. “타자를 관념화하는 내사 (introjection)가 망각의 시작 지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멜랑콜리아는 극복해야 할 질병이 아닌, 내사에 저항하는 힘이 된다.
존이 테스 프라임에게 느끼는 두려운 낯섦은 이러한 멜랑콜리아를, 자기혐오의 감정을 유발한다. 그러나 이 두려운 낯섦이야말로 테스 프라임을 ‘존의’ 테스로 만들려는 시도를 무화하고, “살아남은 자인 존에게 허락된 삶 자체”를 끊임없이 인식하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 존의 삶 속에 공거(cohabitation)하는 테스 프라임은 “우리 안에 사는 ‘목격자’”이다. 존은 마조리처럼 죽음을 망각하는 망상적 위안에 의존하지도, 테스처럼 멜랑콜리아를 견디다 못해 자살에 이르지도 않는다. 대신, 그는 자신의 시선에서 바라본 테스를 내면화하고, 테스와의 기억을 회고하며, 동시에 프라임의 본질적인 두려운 낯섦을 인식하고 절망하기를 반복하면서 테스의 죽음을 애도한다.
데리다는 “타자가 타자성을 유지하면서 우리와 대화 관계에 있는 ‘생각하는 기억’을 애도의 본질”로 보았다. 따라서 데리다는 멜랑콜리아와 애도가 분리된 것이 아니라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고, 인식할 수 없는 것은 인식하려는 애도, 달리 말해 애도 가능성과 애도 불가능성 사이의 진동이 애도하는 텍스트의 직물을 짜고, 애도의 성공과 실패 사이의 아포리아가 길을 여는” 멜랑콜리한 애도야말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애도라고 주장한다. 인류 탄생 이래, 현실적으로 망자의 발언이 가능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지만, 최근 디지털 기술의 발전은 망자의 발언을, 망자의 부활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데리다가 만약 살아 있다면, 망자의 동의 없는 기계적인 디지털 부활을 경계했으리라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러한 디지털 부활은 오직 남아있는 자의 나르시시즘적 멜랑콜리아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만 제작되고, 이용된다는 점에서, 기계적 디지털 부활은 너무도 쉽게 프로이트적 애도 작업의 완수를 위한 도구로 전락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앞서 프라임이 어떻게 “멜랑콜리아를 ‘극복’하는” 애도의 실패를 전제하는지 살펴보았다. 특히, 프라임은 남아있는 자가 주입한 ‘기억’과 새롭게 형성된 ‘지식’, 그러니까 다른 프라임과 대화하거나 인터넷에 검색함으로써 얻어낸 지식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애도의 실패와 성공을 오간다는 점에서, 데리다적 멜랑콜리한 애도를 체현한다. 존이 손녀를 테스 프라임에게 소개하는 장면은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멜랑콜리한 애도를 예증하는 장면이다. 존이 테스 프라임에게 ‘손녀가 분류학을 공부하고 있다’라고 설명하자, 테스 프라임은 ‘이분법(Dichotomous)을 이용하지’라고 대답한다. 자연스럽게 분류학에 관한 대화를 이어 나가는 테스 프라임과 달리, 존은 테스 프라임이 분류학에 관한 지식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란다. 존의 시선에서 바라본 테스의 기억과 테스 프라임이 새롭게 얻은 지식의 혼합은 이전 에는 ‘말할 수 없던 것’, 즉 손녀와의 예측할 수 없는 상호작용을 존이 인식하게 한다. 존은 마치 어린아이 다루듯 테스 프라임에게 ‘입양이 무슨 뜻인지 알지?’라고 묻다가도, 이분법을 말하는 테스 프라임에게 놀라면서 애도의 성공과 실패를 경험한다. 테스 프라임은 그런 의미에서, 존의 내면에 식민화될 수 없는 테스의 이미지를 새기고, 테스의 죽음을 인식함과 동시에 존의 내면에 의해 식민화되지 않은 테스 그 자체를 기억하고, 애도하도록 돕는다.
데리다의 관점에서 프라임의 가장 큰 의미는 ‘내면화되지 않는 지속적 기억’에 있다. 프라임은 남겨진 자들의 기억에 의존하지만, 동시에 그 기억은 인간과 달리, 프라임의 내면에 잡아 먹히지 않고 영원히 그 상태를 유지한다. 인간의 기억은 꺼내면 꺼낼수록 희미해지거나 왜곡되지만, 프라임의 기억은 처음 상태 그대로 지속되며, 프라임 자신의 내면에 의해 오염될 가능성도 없다. 인간이 되고 싶은 욕구를 드러내긴 하지만, 프라임에게 인간과 같은 완전한 자아가 있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영화는 이러한 프라임의 기억을 영화에서 다양하게 변주되고 반복되는 ‘물’의 이미지를 통해 시각화한다. <당신과 함께한 순간들>은 희곡인 원작의 특성을 반영하여, 한정된 인물과 배경을 활용한, 절제된 미쟝센을 사용한다. 근미래를 배경으로 하고 있음에도 프라임 외에 다른 기술적인 특징은 눈에 띄지 않으며, 심지어는 기본적인 가구 이외의 소품조차 얼마 등장하지 않는 미니멀리즘적 미쟝센은 프라임과 인물들의 관계에 집중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미니멀리 즘적 집 내부와 대조적인 과잉 생산되는 물의 이미지는 영화의 주제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메타포다.
월터와 마조리의 집이자 테스와 존의 집인 영화의 주된 배경은 바닷가에 위치한다. 그래서 영화는 해변가를 걷는 테스와 존의 모습이라든가, 인물 없이 파도치는 장면이 종종 삽입하거나, 계단 옆에 걸린 파도 그림을 클로즈업하기도 한다. 토니가 해변가 달리기를 좋아했다는 마조리의 대사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데미안을 상징하는 토니가 사랑했던 바다는 영화 내내 ‘죽음’, 또는 일종의 상실을 상징한다. 마조리, 테스, 존이 사망한 이후 파도-또는 파도를 그린 그림-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죽음을 재현한 이미지인 프라임이 등장할 때는-집이 바닷가에 위치함에도- 어둡고 꽉 막힌 실내나, 또는 커튼 뒤로 희미하게 비치는 나무만이 등장한다. 하지만 세 프라임이 모인 마지막 장면에서는 거실 밖 커튼이 활짝 젖혀있 으며, 잔잔한 바닷가의 모습이 포커싱되도록 인물을 모두 같은 방향에서 촬영된 것을 알 수있다. 이는 궁극적인 영화의 주제인 죽음과 애도를 인간이 모두 사망한 뒤에도 프라임이 이어가고 있음을 강조하기 위한 연출로 해석할 수 있다.
두 번째로 중요한 메타포는 ‘비’인데, 영화에서 딱 두 번 등장하는 폭우는 영화의 두 번째 주요 키워드인 ‘인간의 기억’과 연관성이 있다. 희미해지는 인간의 기억처럼, 비는 끊임없이 흐르고, 또 쉽게 휘발되고 만다는 점에서 인간의 기억을 상징한다. 따라서 프라임 뒤에 켜켜이 쌓이는 포근한 눈의 이미지는 인간의 기억처럼 흘러가지 않고 차갑게 냉동되어 켜켜이 쌓이는 프라임의 기억을 시각화한 것이다. 이는 영화 속 첫 번째 폭우 장면에서 존과 테스가 기에 대해 나눈 이야기와도 일맥상통한다. “되풀이될수록 희미해지는 복사본”같은 인간의 기억과 달리, 프라임의 기억은 “뇌 안의 퇴적층”처럼, 모든 기억을 원본 그대로 냉동시켜 저장 한다는 점에서 눈과 닮았다.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에서 얼마가 흘렀는지조차 알 수 없는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월터, 마조리, 테스 프라임은 한자리에 모여 이야기를 나눈다. 그리고 그들 뒤 넓은 창에는 눈 내리는 바닷가의 풍경이 있다. 켜켜이 쌓이는 눈과 파도치는 바닷가가 보이는 통창 앞에서 프라임은 데미안의 죽음을 끄집어 낸다. 유일하게 데미안에 대한 기억을 들은 월터 프라임이 데미안의 죽음을 언급하고, 데미안에 대해 알지 못했던 테스와 마조리 프라임도 월터 프라임과의 대화를 통해 데미안을 추억하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특히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다니 얼마나 좋아’라는 마조리 프라임의 마지막 대사는 수 세기가 지난 뒤에도 바래지 않고 타자를 기억하는 애도의 자세를 체현한다. 그러므로 세 프라임 뒤로 펼쳐진 ‘눈 내리는 바닷가’는 테스, 월터, 마조리뿐만 아니라 데미안과 존까지 프라임이 모든 ‘타자’의 죽음을 인간과는 다른 방식으로 영원히 기억하고 있음을, 서정적인 이미지로 형상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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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다 그리고 블랙 메시아
솔직히 고백하건대 이 영화가 시카고 7인 재판 도중 흑표당의 설립자인 바비 실에게 재갈을 물린 <트라이얼 오브 시카고 7>와 관계가 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블랙 팬서>가 왜 블랙팬서인지는 확실히 알게 되었다.
1966년에 설립된 흑표당(블랙팬서 파티)은 흑백 평등을 추구하고, 공권력에 맞서 무장 방어를 하던 정치정당이자 자경단이다. 1960년에만 17개 아프리카 국가들이 독립할만큼 아프리카 탈식민주의 운동(독립운동)이 활발했던 시기였다. 이 운동의 사상적 기반을 제공한 프란츠 파농의 철학이 흑표당 설립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흑표당의 정보국장 엘드리지 클리버가 쿠바를 거쳐 알제리 민족 해방 전선(FLN)과 연대를 맺으며 방어적 폭력이 아니라 게릴라적 폭력 저항으로 노선을 바꾼다. 실제 클리버는 소련, 중국, 북베트남, 북한과 교류하거나 방문하기도 했다.
한편 J 에드가 후버(마틴 쉰) FBI 국장은 당시 공산주의자를 색출하던 'Cointelpro프로그램'에 흑표당을 추가한다. 그 백미가 ‘프레드 햄프턴 암살사건’이다. 프레드 햄프턴(대니얼 칼루야)은 20살의 대학생으로 단순한 흑인 인권 운동의 차원을 뛰어넘어 다인종을 화합시켜 ‘레인보우 연합’을 창설할 만큼 정치력이 출중했다. 이 암살사건은 나중에 공작정치 혹은 기획수사로 판명받게 된다. 13년간의 법정투쟁 끝에 미국 정부와 FBI가 과잉적 살인이라는 판결을 받아 유족에게 185만 달러를 지급하게 된다.
사캬 킹 감독은 이것을 ‘역사적으로 가장 유명한 정치범 사건’과 결부 짓는다.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교 성직자에게 고발해 신성모독으로 기소되어 유대 지방 최고 의회(성전)에 출두했는데, 속주의 최고 의회에서는 사형을 내릴 권한이 없었기 때문에 성직자들은 예수를 정치범으로 몰아 빌라도의 법정으로 보냈다. 유대 장관 빌라도(폰티우스 필라투스)는 당시 예수 같은 종교지도자는 흔했고, 빌라도 입장에서 유대 지방의 토호와 유대교 성직자들 여론에 따라 처형해버렸다. 당시는 민중 소요가 드물지 않게 일어났으며 이에 대한 진압과 지도자의 처형도 드물지 않았다.
중국의 신장 위구르 탄압, 이스라엘 팔레스타일 분쟁, 미얀마의 학살도 마찬가지 관점에서 현재 벌어지고 있다. 우리나라도 군부독재자들도 정국이 어지러울 때마다 여론을 환기시키기 위해 프락치(내부 첩자)를 심어 학림사건, 부림사건 등을 조작했었지 않았는가? <유다 그리고 블랙 메시아>도 마찬가지다. 제목의 유다는 윌리엄 오닐(라키스 스탠필드)을, 블랙 메시아는 프레드 햄프튼(대니얼 칼루야)을 가리키는 것이다.
영화는 FBI가 심어놓은 내부 첩자(프락치) 오닐의 시선을 따라간다. 언제 자신이 첩자란 걸 들킬까 봐 조마조마하면서도 프레드 햄프턴과 함께 하면서 그에게 동화되고 갈등하는 윌리엄 오닐의 심리묘사가 <무간도>, <도니 브래스코> 등 언더커버물을 연상케 한다. 예수 서사를 따라가면서 배신자의 눈으로 본 위인은 불안과 경탄 사이를 종횡무진 활보한다. 그리스 비극 같은 장엄한 분위기에 다니야 칼루야, 라키스 스탠필드, 마틴 쉰, 제시 플레먼스의 연기가 물 만난 고기처럼 무대를 휘어잡는다. 랩처럼 쏟아내는 연설이나 흑인음악을 적절히 활용해서 영화의 리듬이 처지지 않게 보완한 연출도 좋았다.
실화가 주는 무게감이 상당한 가운데, 우리 영화들 <내부자들>, <변호인>, <1987> 등이 떠올랐다. 그만큼 우리나라, 중국, 이스라엘, 미얀마 어디에 적용해도 먹힐 보편적인 메시지를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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