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드레2022-05-30 16:56:20
꿈을 꾸는 현재를 놓지 않겠다는 과거와 마주하는 순간
영화 오마주
쉽게 쓰이지 않은 글, 쉽게 만들어지지 않은 영화는 흥행하지 못하면 좋은 영화가 아닌 걸까. 좋아하는 마음에서 시작한 일이 어려움으로 다가와 내려놓게 되는 현실을 마주한다. 깨진 문 사이의 바람처럼, 끝끝내 틀린 맞춤법과 같은 딜레마에 빠져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 빠진 지완. 그는 어느 날, 아르바이트 삼아 두 번째 여성 영화감독인 홍은원 감독의 작품 <여판사>의 음향 복원하는 일을 하게 된다. 중간중간 사라진 필름, 들리지 않는 소리, 바래진 장면으로 가득한 영화 속에서 흔적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홍은원 감독의 마지막 행적을 따라가는 길목마다 그 영화와 관련된 사람들을 만나며 어떤 여성의 그림자를 만난다. 어떤 장소에 빛만 바래진 채, 사라지지 않는 마음이 각자 다르지만 비슷한 형태로 펼쳐지고 있는 영화인들을 발견하며 들게 만든 소중한 작품들이 빛을 받지 못했던 과거의 순간과 현재의 순간이 겹치며 어둠이 그림자를 흡수하듯 앞으로 나아가는 지완의 발걸음이 조금씩 가벼워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자넨 끝까지 살아남아”
하나, 둘씩 떠나가는 주변과 영화 그만하라는 말 가운데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에 이런 말을 듣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어떤 변화를 겪어야만 벌어지는 상황을 어떻게 이겨나가냐에 따라 달라지는 수많은 상황 속에 놓였다. 한때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하지 못했고 또 검열되었던 수많은 것들이 제자리를 찾아가기 시작하면서 불협화음을 내기도 했다. 하지만 힘들게 필름을 복원하듯 먼지를 털어낸 자신의 꿈을 다시 바라보는 순간을 맞이 한다.
포기에도 용기가 필요하다. 어떤 어려움 앞에서도 오랫동안 그 꿈을 포기하지 않았는데, 경제적인 문제로 인해 놓아주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어도 포기는 쉽지 않은 법이다. 좋아하는 것을 평생 할 수 없었지만, 그때의 순간들을 찍어둔 앨범, 커피에 달걀을 넣어 마시던 다방, 고이 넣어둔 영사기처럼 영화에 대한 마음을 놓지 않았던 마음이 여전히 남아있었다. 끝끝내 자리를 지켜 소중한 영화들을 펼쳐낸 누군가의 작품이 그림자처럼 흔적을 남기고 커피에 달걀을 넣어 먹던 그때의 다방이 빛바래지지 않은 채, 빛나고 있었다.
Relative contents
-
- [DMZ Docs] 전쟁 속 묻혀있던 개인을 만나다
[DMZ Docs] 전쟁 속 묻혀있던 개인을 만나다
영화 <고지 위의 소년들> 리뷰
감독] 이미진, 김세미
출연] Charles PRONAFEL, Rick WAUTERS, Tommy CLOUGH, Tommy TAHARA
시놉시스] 열 아홉 살에 고향을 떠나 이름도 모르는 미지의 나라에 온 청년들이 있다. 세계 각국에서 모여 한반도의 전쟁터로 향하는 배를 탄 UN군 청년들. 모험심으로 가득 찼던 그들은 한국전쟁에서 열 아홉 살에 보지 말아야 할 것들을 목격한다. 아흔 살이 넘은 노병들이 인생의 마지막에 평생 잊을 수 없었던 한반도의 고지들을 떠올린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아름다운 풍경이 지나가는 언덕 위에서 그들은 보았고 무엇을 잃었던 것일까. [출처 : 제16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스포일러 유의
이념이 아닌 개인의 역사에 집중하다
사실 한국전쟁에 대한 영화나 다큐멘터리는 많이 봐왔었다. 그래서 과연 고지 위의 소년들이라는 작품이 한국인에게 한국전쟁에 대해 얼마나 다른 정보를 줄 수 있을지 기대와 우려가 섞인 채 영화관으로 들어갔다. 그런 나에게 영화는 한국어가 아닌 영어로 말을 건넨다. 나레이션이 깔리면서 순간 고지 위의 소년들이라는 영화 소개글을 내가 잘못 읽고 들어온 것이 아닐까 싶었다. 분명 한국전쟁에 대한 내용이었는데 왜 나레이션이 영어로 깔리는 것일까 하는 의문 속에서 노병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UN군으로서 한국전쟁에 참여해 수많은 전선을 지켜냈던 먼나라의 사람들. 그들은 벌써 90살이 되어 카메라 앞에 앉았다. 90살이 넘은 그들이었지만 카메라 속에 비춰진 그들은 아직까지도 한국전쟁이 바로 엊그제에 있었던 것처럼 생생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다.
딱 UN군으로 참전한 노병들의 이야기만 담겼다면 이 작품에 대해 박수를 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제까지 많은 한국전쟁에 대한 다큐멘터리와 영화 속에서 개인의 역사를 담아낸 방식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지 위의 소년들은 여기서 변주를 준다. 바로 중공군으로 참가한 중국 노병의 인터뷰가 바로 이어지면서 이제까지 한국전쟁을 다룬 작품에서는 들어볼 수 없었던 존재의 이야기를 듣게 된 것이다. 물론 나는 반공세대에 태어나지도, 그런 교육을 받고 자라지 않았다. 하지만 학교 역사시간에는 우리가 북한을 대해왔던 방식에 대해서는 상당히 이념적인 부분이 들어갈 수밖에 없었던 세대이기도 하다. 이런 이념적인 갈등의 끝이었던 한국전쟁에 대해 다룬 영화, 서적, 논문들을 볼 때면 UN군에 대한 군사적, 경제적 도움에 대한 부분은 굉장히 깊게 논의되고 있는 반면, 북한군과 중공군, 소련군에 대한 내용은 굉장히 미진했었다. 그리고 그들 개인의 역사에 대한 부분은 큰 관심도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고지 위의 소년들은 중공군으로서 참전한 중국 노병의 개인의 이야기도 담아낸다. 그들이 중공군으로 참여했지만 그들 역시 같은 사람으로서 전쟁에 대한 두려움, UN군으로 인해, 국군으로 인해 자신의 친구가 죽었을 때 느끼는 상실감 등 인간으로서 똑같은 공포에 사로잡힌 그저 한 개인에 불과한 사람들이었다. 이처럼 이념에 사로잡히지 않고 그저 한국전쟁에 참여한 개인으로서 다양한 나라의 다양한 사람들을 인터뷰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엮어낸 점에 있어서 그동안의 한국전쟁에 대한 다큐멘터리 및 학계의 논의 범위를 확대시켜준 작품이 아닐까 싶다.
목소리로 담아낸 노병의 이야기
영화 고지 위의 소년들은 배우 유태오가 나레이션을 맡았다. 알고 본 것은 아니었다. 마지막 크레딧이 올라갈 때 ‘유태오’ 이름을 발견하고 ‘아,,! 담담하면서도 처연한 느낌이 너무나도 잘 느껴진 이유가 여기 있었구나’하고 깨달았다. 고지 위의 소년들은 실제 한국전쟁에 참전한 노병들의 인터뷰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흘러간다. 그러면서 그들의 에피소드나 전쟁에 대한 묘사들이 애니메이션으로 구현되고, 그들이 실제 싸웠던 황량하고 공포스러운 고지가 이제는 너무나도 아름다운 산맥으로 다시 바뀐 광활한 자연이 나올 때엔 어김없이 나레이션이 깔렸다.
나레이션은 담백했다. 하지만 감정이 폭발하는 느낌은 아니었다. 현실에서의 노병들은 인터뷰를 하며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며 감정을 쏟아낸다. 한국전쟁이 자신에게 드리운 트라우마를 말하면서 자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현한다. 하지만 그에 반해 그들과 같이 한국전쟁에 참여한 한 인물의 이야기를 1인칭의 시점으로 풀어내고 있는 나레이터는 뭐랄까 나의 이야기를 그저 기억해줬으면 하는 담담한 일기장을 구두로 듣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젠 돌이킬 수 없기에 처연한 마음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알려주고 있었다. 다양한 감정들이 오가는 인터뷰이들 사이에서 이 담담하고도 처연한 나레이터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묘한 이질감이 들면서도 계속해서 영화에 집중을 하게 되었다.
그 이질감이 드는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이 비밀은 영화 후반 풀린다. 노병들은 살아서 각자의 조국으로 귀국한다. 하지만 나레이터가 읊은 이야기 속 ‘나’는 수많은 고지 어딘가에 묻혀 고국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1953년 7월 27일 그들은 고지에 잠든 채 함께 온 친구들처럼 돌아가지 못했다. '우리는 여기에 묻혔다’라는 나레이션을 듣는 순간 이 묘한 이질감이 해소되었다. 살아있는 노병들의 이야기와 전사한 노병이 이야기를 인터뷰와 나레이션으로 교차하면서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면서 생과 사라는 그 간극을 영화에서 내내 잘 보여준 작품이었다. 그리고 그 묘한 이질감을 유태오 배우의 나레이션을 통해 잘 구현되어서 다큐멘터리에서 나레이터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한국전쟁에 대한 개인의 역사를 잘 담아낸 영화 고지 위의 소년. 앞으로 남아있는 다양한 프로젝트를 기대하게 만들었던 작품이었다.
<상영시간표>
2024. 9. 29. (일) 14:30 롯데시네마 주엽 2관
2024. 9. 30. (월) 13:30 롯데시네마 주엽 5관
-
- 복권 당첨자의 추락으로 인한 부서진 삶의 파편들을 주워담다
시놉시스
싱글 맘인 레슬리는 펍에서 산 복권에 당첨되어 19만 달러를 받는다. 레슬리가 복권에 당첨되어 하고 싶은 일은 집을 사는 것과 락스타가 꿈인 자신의 아들 제임스를 위해 헌신하는 것이다. 하지만 몇 년이 지난 후 레슬리는 복권 당첨금을 다 잃고 방세도 못내는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집주인에게 쫓겨난 레슬리는 아들인 제임스에게 전화를 건다.
그리고는 제임스의 집에서 머물지만 알코올 의존증으로 인한 술 마시는 버릇 때문에 아들인 제임스에게도 쫓겨나게 되고 더치와 낸시의 집에서 신세를 진다. 결국 그곳에서도 쫓겨나게 되고 어느 모텔 바깥에서 노숙을 한다. 그 광경을 본 모텔 관리인 스위니는 레슬리에게 일자리를 주는데... 과연 앞으로의 레슬리의 인생은 어떻게 될까?
레슬리에게 복권이 당첨되는 커다란 행운이 있었지만 술과 마약으로 모두 날려버렸다. 그렇기에 그 버릇을 고치지 못해서 아들인 제임스가 13살일 때 혼자 두고 떠나게 됐다. 제임스는 웨일런과 같은 락스타가 되는 게 꿈이었지만 자신의 엄마인 레슬리 때문에 그 꿈을 접고 공사장에서 일을 하게 되었는데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는 레슬리를 보고 새로운 인생을 살라고 권한다.
그런데도 레슬리가 하는 건 제임스의 방에서 숨겨진 돈을 훔쳐서 술을 마시는 것과 담배를 피우는 것 밖에 없었다. 레슬리에게는 도벽 행위도 있었고 노숙 생활은 기본이었다. 그렇지만 자신의 고향으로 가게 되어 굴러들어 온 복을 얻게 되는데 그건 바로 모텔 관리인 스위니와 로열을 만난 것이다.
그런 레슬리를 보며 안타까움을 느낀 스위니는 모텔 청소를 하면 1시간에 7달러를 준다고 하지만 처음에는 일을 열심히 안 하나 자신의 여행 가방에 있는 어린 제임스의 사진을 보고 전보다 더 열심히 일을 하게 된다.
인생의 목표가 없었던 레슬리는 복권에 당첨되어도 막 살았지만 모텔 관리인 스위니를 만나고 점차 변하면서 부서진 식당을 복원하고 10개월 후 식당을 차리게 된다. 그리고 앙금의 사이였던 낸시에게도 사과를 받고 제임스를 만나게 된다. 아들인 제임스가 원했던 건 알코올 의존증으로 아무렇게 살았던 자신의 엄마인 레슬리가 새 인생을 사는 것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결국에는 아들과 엄마의 만남으로 영화는 감동적인 엔딩으로 끝나게 된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메세지는 무엇일까? 그건 바로 제2의 레슬리가 있을 수도 있는데 그런 사람들도 실수로 인해 망가졌어도 다시 복구할 수 있다는 메세지이다. 아무리 망가진 인생이라도 차근차근 목표를 세우고 노력하면 100% 원상복구는 안되어도 어느 정도는 복구가 될 수 있다.
알코올 의존증이었던 레슬리도 해냈듯이 과거의 실수로 인해 많은 걸 포기하지 말라는 게 아닐까? 그래서 필자는 이 영화를 보고 실패를 한다 해도 다시 일어나는 꺾이지 않는 정신을 키워야겠다고 생각했다.
모든 삶을 포기했던 레슬리에게도
한 줄기 희망은 있었다.
※ 씨네랩의 크리에이터로서 영화 시사회에 초대받아 작성한 영화 리뷰입니다.
-
- 미지에 대한 공포
30년간 계속된 일가족 연쇄 살인 사건. 유일한 증거는 피해자의 생일이 14일이라는 것과 ‘롱레그스’라는 서명이 적힌 암호 카드뿐. 영원히 미제로 남을 뻔한 사건에 남다른 능력의 FBI 요원 ‘리’가 투입되고 지금껏 아무도 알아내지 못한 암호를 해석하는데... 모든 프레임에 악마의 단서가 심어져 있는 지난 10년간 가장 무서운 영화
<롱레그스> 줄거리
이질적일 만큼 새하얀 장소에 나타난 차. 혼자 집 밖으로 나온 아이. 나오는 인물은 아이 하나지만 비워져 있는 차 안, 뒤쪽에서 들려오는 뻐꾹뻐꾹 소리로 아직 드러나지 않은 인물이 공간에 존재함을 인지시킨다. 4:3 비율로 보이는 장면에서 이는 보는 이로 하여금 불안하고 스산한 기분을 안기며 시작한다.
주인공 ‘리 하커’는 FBI 요원으로 뛰어난 직감을 인정받고 연쇄 살인 사건에 투입된다. 용의자가 있는 장소를 특정하고 알 수 없는 그림들에게서 정답을 유추해 내는 리의 직감은 기이할 정도다. 단순히 ‘직감이 좋음’이라는 특성으로 치부하기엔 초자연적인 현상 같은 리의 직감.
FBI의 유능한 요원들조차 밝혀내지 못했던 살인사건의 진상은 리의 직감으로 서서히 밝혀지기 시작한다. 하지만 리조차 누군가에게 끌려가듯이 풀어나가고 있기에 분명 사건을 수사하고 있는 주인공을 따라 영화가 진행됨에도 불구하고 살인사건에 대한 의문을 풀 수 없다.
그런데 이러한 의문은 범인에 대한 것이 아니다. 수사 시작부터 우리는 연쇄 살인 사건의 범인이 롱레그스임을 알고 있으며, 심지어 얼마 지나지 않아 롱레그스의 얼굴도 알게 된다. 영화 속에서 궁금한 점은 이제 어떤 방식으로 살인을 저질러 왔냐는 것이다. 롱레그스는 어떻게 집에 침입했고 아무 흔적도 없이 빠져나갈 수 있었던 걸까.
<롱레그스>는 얼핏 보면 수사물 형식을 띄고 있다. 신입 요원 리 하커가 연쇄 살인 사건을 수사하는 게 영화 중후반부까지의 내용이니까. 하지만 초반에 미약하게 보여주던 리의 개인적인 이야기가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드러나면서 살인 사건, 그리고 롱레그스가 리와 연관이 있음이 보여진다. 리는 그렇게 살인사건에서 한 발짝 떨어진 수사관이었다가 어쩌면 연쇄 살인사건에서 살아남은 생존자일지도 모르게 되며 리의 개인사는 곧 살인사건의 핵심이 된다.
과거를 4:3 화면 안에서 비추며 이해할 수 없는 기괴한 분위기를 한껏 살렸으며, 사건을 풀어가는 요원들도 이 사건을 벌인 롱레그스도 설명하지 못하고 설명해도 이해하지 못하는 악마의 존재는 오컬트적인 측면을 강화한다. 잦은 점프 스퀘어로 놀래키기 보다는 영화 자체에 우리가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존재, 즉 악마에 대한 공포를 퍼뜨려 놓으며 불길한 분위기를 영화 진행 내내 유지한다.
아무것도 모르지만 자신의 기억과 주변에 대해 찜찜해 하는 리 하커를 마이카 먼로의 연기가 몰입감을 확 살려준다. 니콜라스 케이지의 기괴한 인물, 롱레그스 역시 <롱레그스>가 악마라는 알지 못하는 존재에 대한 공포감을 상승시킨다. 그렇지만 롱레그스가 직접적으로 나타나는 장면들은 오히려 불길하고 사람이 해결할 수 없는 사건일지도 모른다는 미스터리한 감정을 반감시키는듯해 아쉬웠다. 하지만 기이한 분위기의 오컬트 영화를 보고 싶다면 추천한다.
그런데 15세인 것치고는 꽤나 끔찍한 장면들이 있으니 못 보는 사람들은 유의하길.
*이 글은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아 참석한 <롱레그스> 시사회에서 관람 후 작성하였습니다.
-
- 사실적 토대 위에 구축한 새로운 세계, <언컷 젬스>
1. 들어가며
조쉬 사프디와 베니 사프디는 근래 들어 가장 주목받는 뉴욕 출신의 영화 연출가들이다. 사프디 형제의 주요 작품들에선 상당히 독특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사프디 형제는 사실적 질료를 가공하여 영화를 만든다. 각본에 자전적인 경험을 반영하기도 하고, 현장감을 위해 로케이션 촬영을 선호하는 이들의 영화에선 존 카사베츠나 다르덴 형제,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영화와 유사한 분위기가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데 사프디 형제는 이처럼 사실주의적 토대를 기반으로 하면서 한편으로는 그러한 기초를 교란하는 형식주의적인 스타일을 다양하게 활용한다. 바로 이 점이 이들의 영화를 전형적이지 않게 만들어준다.
형제의 공동 연출작 중에서는 2014년 개봉한 <헤븐 노우즈 왓(Heaven Knows What)>부터 본격적으로 전자 음악의 과도한 배치, 다채로운 질감의 조명을 활용하는 미장센 등 특유의 접근법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굿타임(Good Time)>(2017)의 놀이 공원 시퀀스, 극 전개를 보조하는 전자 음악의 활용을 떠올려 보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넷플릭스(Netflix)가 배급을 맡은 <언컷 젬스(Uncut Gems)>(2019)는 숱한 단편과 굵직한 장편 등을 통해 쌓아 온 사프디 형제의 연출력이 집약된 작품이다.
이 글은 <언컷 젬스>에서 독특하게 드러나는 사프디 형제의 접근법을 관찰하려는 시도이다. <언컷 젬스>는 사실주의적인 토대에 기초한 영화다. 각본, 촬영 장소 등을 살피면 현실적 질료를 기본으로 삼고 있다는 걸 파악할 수 있다. 그런데 사프디 형제는 이러한 영화 요소들을 전형적인 방법으로 활용하지 않고, 어딘가 독특한 방식으로 영화에 활용한다. 이들은 단순한 현실의 재현을 넘어 현실과 허구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새로운 영화적 현실을 창조해냈다. 이 글은 그러한 작업들이 어떻게 진행됐는지 살피는 시도이다.
2. <언컷 젬스>의 사실적 영화 요소
우선 주목할 점은 이 작품이 형제의 자전적 요소를 반영한 작품이라는 점이다. 사프디 형제는 유대계 혈통이고, 뉴욕에서 나고 자랐으며 그들의 아버지는 보석상 관련 업종에 종사했던 경력이 있다. 사프디 형제는 영화의 주인공인 뉴욕에 몸담은 유대인 보석상 하워드 래트너 역에 아담 샌들러를 내세운다. 자전적 경험을 각본에 녹여냈다는 점은 이 영화를 사실적으로 보이게 만든다. 실화를 기반으로 영화를 만들거나 이 영화처럼 자전적 요소를 살려 영화적 소재로 활용하는 방식은 사실성을 강화하는 접근법이다.
<언컷 젬스>에서 하워드 역을 맡은 아담 샌들러. 그는 실제로도 유대인이다.
또한, 이 작품에서 미국의 유명 배우인 아담 샌들러는 여러 비전문 배우와 호흡을 맞춘다. 하워드의 내연녀 역의 줄리아 폭스(Julia Fox)는 <언컷 젬스>가 첫 연기 데뷔작이며, 극 중 이름 줄리아는 실제 배우의 본명이기도 하다. 하워드가 운영하는 보석상 직원 중에 여시라는 인물이 있는데, 이 배역은 실제 주얼리 관련업에 종사했던 막수드 아가자니(Maksud Agadjani)가 연기한다. 실제 삶의 경험을 반영할 수 있는 비전문 배우의 기용은 사프디 형제의 영화의 주요한 특징 중 하나다. 이 영화에서 전문 배우와 비전문 배우가 주고받는 호흡으로 빚어내는 전개 양상은 극을 효과적으로 지탱하기도 한다.
한편 사프디 형제는 현장 로케이션 촬영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형제가 각각 대학 시절부터 연출한 단편부터, 공동 장편 데뷔작인 <아빠의 천국(Daddy Longlegs)>(2009) 등을 거쳐 <언컷 젬스>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현실 속 뉴욕을 무대로 삼아 영화를 만들어냈다. 현장 촬영이 불러오는 효과는 익히 알려져 있다. 생생한 현장감을 스크린으로 구현할 수 있고, 실제 삶의 단면과 맞닿은 이야기를 풀어내기에도 적합한 환경을 조성할 수 있기도 하다. <언컷 젬스>는 정밀하게 세트로 구현된 하워드의 보석 가게를 제외하면, 전부 현장 로케이션을 바탕으로 기획된 작품이다. 그마저도 형제가 원하는 조건에 맞는 실제 점포를 찾지 못해서 어쩔 수 없이 세트를 활용하게 되었다.
3. <언컷 젬스>의 세계: 사실적 토대 위에 구축한 새로운 세계
<언컷 젬스>에서 사프디 형제가 구축한 세계는 현실을 재료로 하지만, 온전한 현실 세계가 재현되는 곳이 아닌, 새로운 개념이 정립되는 공간이다. 영화에서 중계되는 전 NBA 선수 케빈 가넷(Kevin Garnett)의 농구 경기는 사프디 형제가 지은 각본이나 촬영한 필름들과는 사실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런데 그 경기가 영화에 사용되면서 서사가 굴러갈 수 있게 만들어준다. 스크린 외부에서 실제로 벌어졌던 과거의 일(실제 농구 경기)이 스크린 내부에서 현존하는 영화적 세계와 호응하게 된다. 즉, 이런 연출은 사프디 형제가 실험적인 시도에 목말라 있다는 걸 드러내는 증거로 볼 수 있다.
가넷은 이 영화에서 본인 역을 맡아 연기한다. 즉, 영화의 배역을 맡아 본인을 연기하는 가넷과 실제 선수로서의 가넷, 중계 속의 가넷이 공존하는 기이한 상황이 펼쳐진다. 그런데 이런 방식으로 기용된 배우는 가넷 외에도 몇 명 더 있다. 영화에는 미국의 알앤비(R&B) 가수 위켄드(The Weeknd)도 본인 역으로 출연한다. 위켄드 역시 극 중 DSLR 카메라에 찍힌 사진 속의 위켄드, 자신을 연기하는 위켄드와 실제 가수 위켄드 사이를 기묘하게 유영하는 존재다. 래퍼 캐시 아웃(Ca$h Out)도 본인을 연기하며 하워드의 가게에서 보석류를 구매하고자 한다. 한편 하워드가 줄리아와 살던 아파트에 아들과 함께 찾아가는 신에서도 흥미로운 점이 드러난다. 화장실이 급하다는 아들을 데리고 하워드는 옆집을 찾아가 화장실을 쓰게 해달라고 부탁하는데, 이때 하워드가 아들에게 옆집 이웃을 왕년에 유명한 작품에 출연했던 코미디 배우라고 소개한다. 출연진 정보에는 33F의 이웃으로만 나오는, 존 아모스(John Amos)라는 배우는 실제로 하워드가 영화에서 언급한 작품에 출연했다.[1] 존 아모스도 본인을 연기한 셈이고, 하워드의 대사는 허구적인 각본이 실제 현실과 상호작용하는 매개로 작용한다. 현실과 영화 사이의 경계가 이렇게 독특한 형태로 허물어진다.
<언컷 젬스>에서 본인 역을 맡은 농구 선수 케빈 가넷
이제 사프디 형제가 뉴욕이라는 공간을 무대로 삼는다는 사실이 영화 내적으로 크게 강조되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비록 도입부에 ‘2012년의 뉴욕’이라는 시공간적 배경을 명시하는 문구가 삽입되기는 하지만, 영화 자체는 뉴욕을 배경으로 삼는 수많은 영화들(<스파이더맨> 시리즈, 우디 앨런의 작품이나 각종 로맨스 영화 등)과 비교했을 때 공간 특성을 전혀 살리지 않는다. <언컷 젬스>에선 맨해튼(Manhattan)의 다이아몬드 지구(Diamond District)가 뉴욕이라는 장소 정보를 제공하지만, 이는 사전 정보 없이 영화를 접하는 관객은 주의 깊게 살피지 않고서는 파악하기 힘든 요소들이다. 뉴욕 맨해튼에 자주 갔거나 그곳에 거주한 경험이 있는 관객은 논외로 하자.
결국, 피상적으로는 사프디 형제의 뉴욕이 현실을 옮겨놓은 듯한 현장감 있는 장소로 보일 수 있겠으나, 이들 영화의 뉴욕은 극도의 사실성 재현을 위한 공간보다는 극적 효과를 불러오는 서사적 도구로서 작용한다고 보는 편이 설득력 있다. 게다가 잦은 비전문 배우의 기용 역시 얼핏 보기엔 영화를 통한 사실주의적 재현을 위한 노력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들의 영화 속 비전문 배우는 앞서 언급했듯 대개 자신을 그대로 재현하지 않는다. 자신의 경험을 살려 연기에 활용할 뿐이지 궁극적으로는 각본에 구현된 캐릭터를 표현하는 작업을 수행 중인 셈이다. 이는 사프디 형제가 이전에 연출했던 <헤븐 노우즈 왓>의 홈즈(아리엘 홈즈)도, <굿타임>의 닉(베니 사프디)의 치료 의사도, <언컷 젬스>의 아가자니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언컷 젬스> 속 비전문 배우의 기용(특히 본인을 연기하게 하는 방식) 및 현실을 스크린에 재소환하는 방식을 다른 영화와 유사한 전형적인 접근으로 받아들여야 할까? 이렇게 생각할 수 있겠다. <언컷 젬스>의 가넷과 위켄드를 유사한 특성을 가진 다른 사람―예를 들어, 농구 선수 코비 브라이언트(Kobe Bryant)나 알앤비 가수 크리스 브라운(Chris Brown) 등―으로 교체한다고 해서 극의 흐름이 달라지거나 영화를 지탱하는 요소가 사라지는가? 그렇지 않다. 결국, 저들은 본인을 연기할지라도, 영화적 허구에 구속된 캐릭터들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다.[2] 그런데 허구의 인물을 연기한다고 해도 자기 자신이 본인을 연기한다는―일종의 정체성에 관한―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게다가 가넷의 실제 경기나 카메라에 찍힌 위켄드의 모습은 허구적 특성을 살려 연기하는 인물과 같은 영화에서 공존한다. 즉, 영화에 현존하는 인물들은 영화를 통한 현실의 사실적 재현의 주체도 아니고 허구적으로 표현된 내러티브에 종속된 도구도 아닌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독립적인 개체로서 발현된다.
4. 나가며
현실과 허구라는 이분법으로는 <언컷 젬스> 속 등장인물이 자리 잡은 뉴욕의 특성을 규정할 수 없다. 즉, 이런 모호한 인물들이 유영하는 사프디 형제의 뒤틀린 뉴욕은 전통적인 유형으로 범주화하기엔 상당히 어렵다고 볼 수 있다. 사프디 형제의 뉴욕은 뉴욕이지만 뉴욕의 특성이라고는 딱히 찾아볼 수 없는, 일종의 영화 서사를 위한 공간으로 작용한다. 가넷이나 위켄드는 본인을 연기하는데, 이는 실제 현실에서의 본인과는 다른 속성을 지닌 존재로 묘사되지만, 이들이 각각 중계화면에서 경기를 뛰는 모습과 셀러브리티(Celebrity)로서 카메라에 찍힌 모습은 그 자체로 이들의 현실성과 맞닿아 있기도 하다.
사프디 형제는 영화 속 현실에 종종 허구적 요소를 첨가하여 스크린과 삶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전략을 보여준다. 단편 <검은 풍선(The Black Balloon)>(2012)에서 자의로 움직이는 풍선이 그러하고, <헤븐 노우즈 왓>에서 일리야(케일럽 랜드리 존스)가 던진 휴대폰이 폭죽이 되어 터지는 쇼트 편집을 예로 들 수 있다. <언컷 젬스>는 단순히 현실에 허구를 더하는 시도를 넘어선다. 사실적 요소들에 충실하고, 현실성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영화적으로 표현되는 것들은 현실과 허구를 모두 점유하는 기이한 방식으로 전개된다. 사프디 형제는 활발히 작품 활동에 전념하는 재능 넘치는 젊은(두 사람 모두 아직 삼십 대 중반이다) 영화 연출자들이기 때문에, 추후 제작될 영화들에서 <언컷 젬스>의 독특한 접근을 어떤 방식으로 변주해나갈지 기대가 많이 된다. 이들의 영화 세계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언컷 젬스>에 출연한 배우들의 모습. 좌측부터 줄리아 폭스, 케빈 가넷, 아담 샌들러, 위켄드
[1] 극 중 하워드는 코미디 영화 <구혼 작전(Coming To America)>(1988)과 텔레비전 시트콤 <굿 타임스(Good Times)>(1974-1979)를 언급한다.
[2] 이와 관련해서는 다음의 문헌을 참고하라. 오몽(J), 베르갈라(A), 마리(M), 베르네(M), 『영화미학』, 이용주 옮김, 동문선, 2003, pp.89-90.
사진 출처: IMDb
* 본 콘텐츠는 브런치 드플레 작가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원 게시글은 아래 출처 링크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 의지라는 기적
*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 해당 영화는 씨네랩 크리에이터 활동의 일환으로 시사회 참석 후 작성된 글입니다
국내에서는 <러브 액츄얼리>를 비롯해 <브리짓 존스의 일기> 등 로맨스 장인으로 더 잘 알려진 배우 휴 그랜트의 신작 <헤레틱> 이 4월 2일 관객들을 찾게 되었다. 아니, 관객들이 그를 찾게 되었다 말해야 할까. 영화 <헤레틱>은 몰몬교 전도사로 활동하고 있는 두 소녀를 따라가며 시작된다. 영화는 조금은 생뚱맞게도 콘돔을 비롯해 포르노 스타의 이야기까지 단순 두 주연의 수다로 시작하나 이는 영화가 내포하고 있는 중요한 메세지를 암시한다. 바로 맹목적인 믿음, 이다. 광고를 비롯해 성인물까지 종교 뿐만 아니라 현대를 살아가는 무수한 이들이 접하는 것들을 통해 영화는 극초반부터 말하고자 한다. 과연 우리는 생각이 거세 된 채 살고 있는 건 아닌지 말이다.
두 소녀가 찾은 집에서 푸근한 노신사 리드(휴 그랜트) 종교에 무척이나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며 그들을 맞이한다. 하지만 그렇게 찾은 집은 무언가가 이상하다. 그들이 안내받은 소파가 놓인 '거실'이어야 할 것 같은 공간이 그보다는 조금 더 응접실의 형태를 띄고 있는데, 무언가 이질적이다. 리드가 오가는 복도 그리고 반스 자매(소피 대처)의 시선을 따라 간접적으로 그 공간을 체험하다보면 느껴지는 것이 있다. 바로 다른 공간을 의도적으로 감추고 있다는 것. 불 꺼진 어두운 복도 외엔 모든 정보가 차단되어 있는 그야말로 교차로의 역할만 하고 있는 공간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영화는 말한다, 리드와의 만남은 미궁으로 향하는 함정 그 자체라고 말이다.
사실 길거리에서 누군가에게 전도 당하는 경험은 그닥 희귀한 경험이 아니다. 길 찾기를 핑계로 기운 얘길 하는 사람들을 우린 번화가에서 종종 마주한다. 이들이 가진 공통적인 특징이 있는가 하면 바로 대화 주도권을 뺏는 것이다. 자리를 뜨기 위한 핑계를 막기 위함도 있겠지만 이들은 포교를 위해 단시간 안에 자신들의 이야기를 듣게 해야 하는 목적을 갖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아예 말을 섞지 않거나 대답하지 않는 사람들 역시 많을 것이다. 여기 이 자매들 역시 그러하다. 반스 자매에 비해 경험이 없어 보이는 팩스턴 자매(클로이 이스트)는 무언가 께림칙함을 느끼는 반스와 달리 리드의 말에 맞장구 치며 열심히 전도를 이어 나가려 한다. 하지만 이때 공간 외로도 기묘한 일이 한 가지 더 벌어진다. 단순 반스가 발견하는 블루베리 향초의 섬뜩함이 아니다. 리드는 두 소녀들에게 계속해서 질문을 퍼붓고 있다. 그리고 그 면면을 살펴보면 종교에 대한 관심보다 두 소녀의 의견을 묻는 것이며 더 나아가 어떠한 대답이 이미 준비되어 있음이 느껴진다. 리드의 몰몬경은 인덱스와 노트로 빼곡하며 종교에 대한 자신만의 시각이 있음이 분명해보인다. 이는 단순 광신이 아닌 그들이 몸담고 있는, 관객이 몸담고 있는 현대사회와 연결된 '믿음'에 대한 시각이다.
이는 본격적으로 리드가 만들어둔 가짜 예배당에서 더욱 심화된다. 두 자매가 믿음과 불신 중 하나를 강요 받는 것과 더불어 리드는 몰몬교 뿐 아니라 3대 종교라 칭해지는 것들이 모두 고전에서 파생된 것임을 밝히며 이는 보드게임 모노폴리의 변형과 다름 없다 비유한다. 특히 그는 몰몬교인 후기성도교회의 창시자인 조셉 스미스가 한낱 인간에 다름 없으며 그저 자신의 편의를 위해 교리를 수정했다 말하며 두 자매가 어떠한 신념 아래 이러한 종교를 영업(sale) 하고 있는지 되묻는다. 관객은 이때 압도적으로 긴 리드의 대사량에도 불구하고 종교에 대해 사고 하게 된다. 신도를 바탕으로 하는 종교들, 매일같이 불행과 기적이 공존하는 세계 그리고 그걸 따라도 따르지 않아도 종교와 마찬가지인 각종 변형들과 대기업의 광고를 맹목적으로 믿는 사람들 다시 말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간선을 말이다. 이때 두 자매는 상반된 문 앞에 서게 되는데 리드의 농간이나 다름 없는 이론에 정면으로 대항하며 자신의 종교적 신념을 지키는 반스와 그가 끼칠 피해를 걱정하며 마치 그의 의견에 설득 당한듯 구는 팩스턴의 선택에 있어서 관객은 마치 리드의 미궁과도 같은 종교로 대표되는 현 시대의 믿음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무엇이 진짜이고 가짜인지 판단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당신의 믿음은 특정 이론에 선동 된 것은 아닌가?
비록 영화는 이 부분을 끝으로 종교에 대한 설전보단 다소 <나이브즈 아웃> 같은 추리물의 전개로 나아간다. 밀실에서까지 자매에게 어떤 선택과 추리를 강요하는 부분에서는 <셜록 홈즈>의 유명 에피소드인 '주홍색 연구' 의 흔적 역시 가득하다. 그도 그럴 것이 '주홍색 연구' 에피소드 역시 후기 성도 교회를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진정한 신의 목격자나 시체 바꿔치기 등과 같은 추리소설 속 장치를 써가며 영화는 종교인인 두 자매를 대상으로 하는 리드의 연구가 팩스턴의 자매의 추리를 통해 결말부에서 그가 믿고 있는 신이 다름 아닌 '통제' 였음이 밝히는데, 이때 계속 언급하고 있는 관객에게 던지는 메세지 맹목적인 믿음과 최종적으로 연결지어진다. 조던 필의 작품을 비롯해 다양한 할리우드 작품들이 소재로나 장치로나 사용하고 있는 미국 정부의 국민 통제 괴담은 시기를 막론하고 미 전역에 퍼져있는 하나의 사상과도 같다. 정부가 수돗물을 통해, 안테나를 통해 국민들을 조종하고 통제하려 한다는 공포는 누구나 알고 있는 음모이나 정작 광고를 보고 구매를 결정할 때 영상 속 연기하는 배우를 볼 때 무언가를 지시 받고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한다. 즉 현대 사회를 살아가며 우리는 보편적인 통제 속에서 선택적인 의심만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특정 종교를 사이비라 칭하기도 하고 도믿걸이라는 호칭을 사용하기도 하며 누군가의 믿음을 비난하곤 한다. 자유의지 없이 보편적이지 못한 단편적인 믿음을 가진 이들이 자유를 되찾길 바라면서 말이다.
하지만 되도않는 시뮬레이션 이론을 펼쳐가며 자신이 열세하고 있다는 것을 들킨 리드처럼 영화는 곳곳에 가장 통제 당하고 있는 듯한 두 자매의 자유 의지를 심어 관객들에게 보여준다. 리드의 미궁이 내포하는 것처럼 그 누구도 현대 사회 속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전부 마찬가지이지만 그럼에도 스스로가 선택하는 것들은 존재하기 마련이다. 마치 리드의 계략에 놀아나는듯 그의 미궁 속 가장 어두운 지하까지 스스로 걸어들어간 뒤 탈출에 성공한 팩스턴의 선택부터 결혼 후 가정을 꾸리는 것이 영원의 축복이라 믿는 몰몬교 신자이나 IUD를 삽입한 반스의 선택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조금 과한 연출이라고도 평가되나 죽음의 문턱 앞에서 리드에게 최후의 일격을 날린 반스의 의지 역시 그러한 맥락에서 해석될 수 있다. 너를 살리고자 한 나의 의지야 말로 극강의 통제를 흐트러트리는 타인을 위한 나의 선택이라 말이다. 무엇을 믿고 믿지 않을지 선택하고 있다는 착각 속에 살고 있다는 매너리즘에 빠진 리드는 그러한 인간의 강한 자유 의지를 보지 못한다. 신의에서 파생된 기적을 믿지 않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영화가 이러한 부분들을 세련되게 연출한 작품이라고는 평할 수 없으나 적어도 나의 선택이 뭉개져 보이는 이 현대 사회에서 타인을 살리려는 개인의 의지야 말로 종교에서 묘사하는 기적과 같은 것이라 말하는 작품이었다. 그러니 나 역시 슬픔으로 가득한 현 세계에서 다시 개개인이 만들어낼, 그리고 내가 만들어낼 의지의 기적을 믿어보려 한다.
-
- 사랑, 평등, 존경이 담긴 음식의 맛! <프렌치 수프>
영상으로 음식을 음미한다는 게 바로 이런 걸까? 그것도 길~~게! <프렌치 수프>는 미식의 나라 프랑스 음식을 시청각으로 맛보는 영화다. 보기만 해도 먹음직스러운 음식은 물론, 그 안에 담긴 재료가 어떻게 맛있는 예술 작품으로 탄생하는지의 과정, 그리고 이 음식을 통해 서로의 마음을 전하는 주인공들의 모습까지 코스요리처럼 쫙 펼쳐진다. 이 만찬의 정수는 바로 사랑과 평등, 그리고 존경. 음식에 담긴 이 의미의 맛은 긴 여운을 남긴다.
미식 연구가 도댕(브누아 마지멜)과 함께 음식을 만드는 천재 요리사 외제니(줄리엣 비노쉬)는 아침부터 바쁘다. 도댕의 미식가 친구들이 방문을 하기 때문. 텃밭에서 공수한 채소는 물론, 에피타이저부터 본식, 디저트까지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메뉴와 레시피를 음식으로 구현한다. 도댕 또한 외제니와 함께 독창적인 미식의 세계를 펼친다. 이 집에서 최상의 파트너로 지낸 지도 20년. 서로 사랑과 존경의 마음이 몇 번이고 오갔고, 도댕은 몇 번이고 청혼했지만, 외제니의 거절로 결혼이란 결실을 맺지 못한다. 그러던 어느 날, 외제니는 몸이 아파 쓰러지고, 도댕은 오직 그녀만을 위한 요리를 만든다.
| 음식을 통한 평등한 사랑과 관계의 의미
<프렌치 수프>는 음식을 통한 평등한 사랑과 그 관계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작품이다. 오랜 시간 끓이고 정성을 들여야 맛있는 음식이 나오는 곰국(또는 프랑스 가정식 수프 ‘포토푀’) 것처럼, 영화 또한 오랜 시간을 들여 완성하는 음식들이 가득하다. 이는 사랑도 마찬가지다. 짧은 시간 안에 자극적인 맛으로 만들어 내놓는 음식이 아닌, 오랜 시간을 들여 풍미를 살려 내놓는 음식처럼, 사랑이란 복잡미묘한 감정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위해 긴 시간이 필요하다고 감독은 말한다.
두 주인공을 통해 평등한 사랑이란 건 무엇인가를 재차 강조한다. 외제니는 도댕을 사랑하고 육체적인 관계도 맺는 사이이지만, 그의 청혼을 매번 거절한다. 그를 사랑하지만, 자신을 아내로서가 아닌 동등한 요리사로서 사랑받길 바라는 마음 때문이다. 그 연장선에서 그녀는 되도록 주방을 떠나지 않는다. 요리사로 그 능력을 인정받고 사랑을 느낄 있는 주 공간이기 때문이다.
19세기 후반이란 시대적 배경인 영화에서 남성과 여성의 계급과 역할 차이는 확연하다. 따지고 보면 도댕은 고용주고 외제니는 고용인이라는 갑을 관계다. 게다가 만약 결혼한다면 외제니는 더 이상 요리사로 살기 힘들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요리사로서 평등한 관계를 유지하길 바라며, 존경하는 마음으로 함께 바라보는 사랑의 눈높이가 매번 같아지길 바란다.
| 이렇게 섹시한 음식 조리 과정이라니?
이 영화의 특징 중 하나는 드러내지 않는 섹시함이 가득하다는 것이다. 도댕과 외제니는 함께 음식을 만드는데, 중요한 건 이 자체가 섹시하게 느껴진다. 극 중 이들은 멋진 협업을 통해 음식을 만들면 그날 밤 잠자리를 같이한다. 여느 영화였다면 한 번쯤은 아름답고도 고혹적인 이들의 베드신을 보여줄 법한데, 트란 안 홍 감독은 그 생각을 갖기도 전에 컷을 외친다. 마치 아까 베드신 보다 더 야릇한 장면을 봤는데, 또 찍을 필요가 없다는 식으로 들린다.
그런 의미에서 이들이 음식을 만들며 맺는 관계는 유사 성적인 관계로까지 확장된다. 절묘한 이들의 합, 그리고 이들이 내놓은 결과물은 사랑의 감정을 증폭시키고, 아드레날린이 분출되기까지 한다. 조리 과정 이후의 장면이지만, 도댕이 요리를 연구하기 위해 설탕에 절인 배를 손으로 꺼내어 만진 후, 외제니의 방에 들어가는 장면이 있다. 이때 나체로 누워 있는 외제니의 뒷모습은 마치 도댕이 끈적한 터치가 이뤄졌던 배 모양과 흡사하다. 에로틱함은 물론 한 폭의 그림 같은 이 장면 또한 도댕의 터치 이후 가차 없이 컷 한다.
계절로 따지면 영화는 가을에 가깝다. 설렘과 열정을 지나, 따뜻하고, 사려 깊고, 농익은 사랑의 감정이 곳곳에 묻어 있다. 안 먹어도 그 맛을 아는 것처럼, 영화 또한 굳이 보여주지 않아도, 이들이 나눈 사랑과 그 관계의 농도를 가늠할 수 있다. 감독은 결은 다르지만, 관계 속에서 빗어지는 섹시한 사랑의 맛을 보라고 펼쳐놓는다. 아는 맛이 무섭다는 걸 트란 안 홍도 아는 듯하다.
| 프랑스 주방에서 덕임이를 만나다?
<프렌치 수프>는 도댕과 외제니의 평등한 사랑 이야기인 동시에 사랑과 결혼이란 굴레에 저당 잡히지 않으려 하는 한 여성의 몸부림을 담는다. 도댕과 함께하고 싶지만, 자신의 일 또한 소중한 그녀에게 사랑, 그리고 결혼은 얻는 것 보다 잃을 게 많은 게 사실. 그렇기 때문에 외제니는 계속해서 도댕의 청혼을 거절하고 동거인으로서 살아간다. 결국 도댕과의 결혼을 승낙하긴 하지만 말이다.
이런 외제니를 보며 떠올린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의 덕임(이세영)이다. 덕임이 또한 궁녀로서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는 인물이었는데, 이산(이준호)과 운명적인 사랑을 나눈다. 훗날 정조가 된 이산은 사랑하는 덕임에게 승은을 내리지만, 그녀는 무려 두 번이나 거절했다. 이유는 사랑보다 권력보다 자신의 삶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시대와 국가가 다른 이들이지만 사랑 뒤에 감춰진 불평등의 늪에 빠지지 않고 주체적인 삶을 살고자 했던 여성들이었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결은 다르지만, 이들의 마지막 모습, 그리고 도댕, 정조 모두 뒤늦게 이들의 소중한 사랑을 깨닫는 부분도 오버랩된다.
2시간이 넘는 러닝타임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건 평등한 사랑을 나눴던 주방에서 도댕과 외제니의 대화 회상 장면이다. 스포일러라서 자세히 설명할 수 없지만, 이때 그 공간을 채운 이들의 질문과 대답을 찬찬히 음미하길 바란다. 이 세상 다양한 음식들이 존재하는 것처럼, 이 세상 다양한 사랑은 존재하는 법. 급하지도, 빠르지도 않고 천천히 가을 녘에 물든 자연의 아름다움을 보는 듯한 느낌으로 감상하길 바란다.
p/s: 일단 뭘 먹고 영화를 보는 걸 권한다. 빈속에 보면 떨어지는 군침에 스스로 당황할지 모른다. 프랑스 유명 요리사 피에르 가니에르가 요리를 감수할 정도로 음식 퀄리티가 너무 좋아, 영화가 끝난 후에 프랑스 전문 레스토랑을 방문해서 먹어보고 싶은 생각이 절로 든다. 시각이 아닌 청각에 의존해 감상하는 것도 추천한다!
사진 제공: 그린나래미디어
평점: 4.0 / 5.0
한줄평: 사랑, 평등, 존경이 담긴 음식의 맛!
* 〈씨네랩〉 초청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
- [공드리의 솔루션북] 끝장리뷰 | 결말해석 | 상승과 하강 | 공드리월드 분석 | 해결-책(솔루션북) 상징 | 파편화된 의식의 총합
([공드리의 솔루션북](2024)은 씨네랩(cinelab) 측에서 제공한 시사회권으로 관람하였습니다)
[공드리의 솔루션북](2024)에 대한 헐거운 리뷰
Chapter 1 말하는 대로
Chapter 2 상승과 하강
00:00 공드리의 솔루션북
01:10 말하는 대로
03:12 해결-책
04:02 상승과 하강
06:04 결말해석
07:05 별점 및 한 줄 평
07:23 다음 리뷰 예고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공드리의솔루션북 #공드리의솔루션북리뷰 #공드리의솔루션북영화 #공드리의솔루션북해석 #공드리의솔루션북결말 #공드리의솔루션북후기 #영화공드리의솔루션북 #미셸공드리 #공드리월드 #TheBookofSolution #미셸공드리 #MichelGondry #피에르니네이 #PierreNiney
-
- 폭락 - 전세계를 충격에 빠트린 코인 대폭락사태,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나
*해당 리뷰영상은 영화 제작 및 배급사 무암을 통해 저작권 협의가 진행되어 제작된 영상이며
작품 [폭락]은 1월 15일 개봉합니다! 예매는 아래 사이트를 이용해주세요 :)
“기대에 부응해야지?” 엄마 옥자의 열성과 본인의 타고난 욕심으로 교육 1번지 서울 대치동으로 위장 전입한 도현. 벤츠타고 다니는 부자이면서 장애 혜택을 받아먹던 친구에게 교환학생의 기회마저 뺏기고, 그 친구가 진짜 장애인이 아니었단 걸 알게 된 그 때부터 정부 지원금의 맹점에 눈을 뜬다. 대학교 창업동아리에서 만난 동기 지우와 함께 청년·여성·장애 등의 가산점을 악용해 청년 창업 지원금을 수급하고, “창업 지원금은 나랏돈으로 망해 보라고 주는 눈 먼 돈”임을 간파해 의도적으로 고의부도와 폐업을 전전한다. 투자자 케빈에게 억대 후원을 받는 암호화폐 벤처를 창업한 도현은 야망에 이끌려 ‘MOMMY’ 코인을 개발해 역대 최고치의 실적을 내지만, 알고리즘과 불완전 이자 수익 등 금융기관으로부터 모니터가 들어오게 되는데…
-
- 영화 <극장판 짱구는 못말려: 격돌! 낙서왕국과 얼추 네 명의 용사들> 티저 예고편
아이들의 낙서가 사라져 붕괴 위기에 처한 낙서왕국은
낙서 에너지를 모으기 위해 지구 침공을 시작한다.
낙서왕국의 위험한 작전을 막기 위해
지상의 용사로 선택 받은 짱구는
그림에 생명을 불어넣는 ‘미라클 크레용’을 얻게 된다.
쓰윽 쓰윽~ 그려 그려~!
짱구가 미라클 크레용으로 그림을 그리자
브리프, 가짜 이슬이 누나, 부리부리 용사가
스케치북 밖으로 튀어나오는데..!
과연, 크레용 용사 짱구는 낙서 용사들과 함께
위험에 빠진 떡잎마을과 세계를 구할 수 있을까?!
-
- 영화 <라이더스 오브 저스티스> 1차 예고편
최악의 열차 사고, 아내의 죽음 뒤 숨겨진 진실
한 남자의 거침없고 잔혹한 복수가 마침내 폭발한다!가족과 떨어진 채 지내던 현직 군인 마르쿠스(매즈 미켈슨)는 열차 사고로 갑작스럽게 아내를 잃고 실의에 빠져있던 중, 아내의 죽음에 얽힌 사고가 계획된 범죄였음을 알게 된다.
분노가 폭발한 마르쿠스는 범인들을 뒤쫓아 목숨을 건 추격전을 시작하고 자신만의 잔혹한 정의로 그들을 심판하기로 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