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LAB2022-04-01 15:24:25
원서만 넣으면 합격하는 대학교, <억셉티드>
배우 저스틴 롱 & 애덤 허쉬만
오늘의 영화는 바로,
만우절에 보기 좋은 <억셉티드>입니다.
출처: 네이버 영화
정보
개요 코미디 | 미국 | 90분
감독 스티브 핑크
출연 저스틴 롱, 애덤 허쉬만 등
등급 12세 관람가
줄거리
지원했던 8개 대학에서 모조리 입학 불합격 판정을 받은 고교졸업반 바틀비 게인스, 일명 'B'는 비슷한 처지의 친구들과 고민에 빠진다.
어떻게 이 난관을 극복하여 대학 커리어도 쌓고 여자친구에게도 당당해 질 수 있을 것인가? 이들이 내린 결론은 단 하나.
직접 대학을 설립하는 것이다! 단순히 자신들을 위해 '사우스 하몬 기술대학교'라는 가짜 대학을 오픈한 첫날,
B와 친구들은 깜짝 놀랄 사실을 발견한다. 자기들처럼 대입 불합격 통지서를 받았던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이 대학 입학을 위해 찾아온 것이다.
이제 상황은 겉잡을 수 없이 돌아가고, 주위의 명문대학생들이 의혹의 눈초리를 보내는 가운데,
B와 친구들은 '학생이 곧 교수'라는 황당한 룰을 설정해 이 가짜 대학을 유지해 가는데...
"대학생이라면 꿈꿔본 이상적인 대학교"
출처: 네이버 영화
사우스 하몬대학교는 바틀비 게인스가 만들어낸 가짜 학교이지만 꽤 이상적인 교육관을 가진 학교를 만들어냈는데요.
'학생이 교수인 대학. 배우고 싶은 과목을 배우는 대학'이라는 슬로건 아래에 대학교를 운영합니다.
사실 한국의 대학교는 그러지 못하는 경우가 많죠.
취업을 위해 자신이 관심 있는 분야가 아닌 학점이 잘 나오는 강의를 선택하거나,
경쟁률이 너무 치열해 원하는 수업을 듣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우스 하몬 대학교는 자신이 배우고 싶은 것을 칠판에 적고,
그 강의의 교수가 자신이 되어, 그 분야를 학습하고 성장해나갑니다.
물론 진짜 대학교처럼 전문적인 지식을 얻기는 힘들겠지만,
주입식 교육보다 더 좋은 영향을 학생들에게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진짜 대학교보다 더 의미 있는 경험을 만들어주고, 성장을 하게 만드는 사우스 하몬 대학교.
이것이 바로 앞으로 대학교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 아닐까 생각한다.
"한국에 더 알맞았던 영화"
출처: 네이버 영화
미국에서 유명한 영화 정보·리뷰 사이트인 'IMDB' , 'Rotten Tomatoes'에서 <억셉티드> 평가를 보면
굉장히 부정적이고 낮게 평가가 되었습니다. (IMDB - 6.4 / 10 , Rotten Tomatoes - 신선도 38%)
하지만, 한국의 대표 포털인 '네이버'와 '다음'의 평점을 보면 각각 8.14, 8.7으로 높은 점수를 받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국과 미국의 대학교 시스템 차이로 인해 이렇게 극과 극의 평점이 나온 것으로 보이는데요.
미국 영화이지만, 미국인보다는 한국인의 공감을 받았던 영화였습니다.
"명장면, 명대사"
출처: 네이버 영화
저는 교육위원회에서 바틀비 게인스가 연설하는 장면을 명장면으로 꼽고 싶은데요.
↓ 이 장면은 아래 링크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y0eGGtt1KWA
진정한 교육이란 무엇인지 생각하게 만들어준 영화.
지금까지 <억셉티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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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랩 에디터 cammie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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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별한 시선으로 특별하지 않음을 말하다.
<디어 에반 한센(Dear Evan Hansen)>, <나, 다니엘 브레이크>, <말아톤>, <7번방의 선물>과 같이 장애를 겪고 있는 주인공을 중심으로 한 영화는 비록 상업영화에 비해 현저히 적은 수이기는 하지만, 국내외 영화계에 꾸준히 등장하고 있다. 앞서 예시를 든 영화들처럼, 장애와 같은 사회적 약자에 대해 이야기하는 영화들은 흔히 사회적 약자의 위치에 놓인 인물을 주인공으로 설정하고, 해당 인물이 어려움과 고난을 겪게 되는 모습을 통해 ‘사회적 약자인 주인공의 고난→ 조력자 혹은 특정 사건과 만남→ 주인공의 극복/ 희망’과 같은 클리셰를 사용해 이야기를 전개한다. 이러한 영화의 전개는 관객에게 직접 경험해보지 못한, 혹은 상상해보지 못한 상황을 이해하고, 몰입해볼 기회를 제공하며, 영화에서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는 인물에 대한 이해와 통찰을 강화한다. 그러나 이러한 진행방식은 영화의 전반을 중심인물을 중심으로 생각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어, 때로는 영화의 중심인물이 아닌 주변 인물들이나 그들이 겪는 사건, 영화 전반에 걸쳐 숨겨져 있는 의도와 영화의 주제에 대한 이해도와 관심도를 하락시킨다는 단점을 보이기도 하며 ‘주인공의 고난과 극복’이라는 전형적이고 반복적인 클리셰에 관객이 흥미를 잃게 될 가능성 또한 있다. 이런 ‘사회적 약자’라는 같은 소재를 가진 영화들의 어떤 공통적인 이야기 전개 방식 속에서 영화 <나는 보리>가 갖는 시선은 특별하다. <나는 보리>는 농인을 바라본다. 소수가 아닌 다수로서, 장애인 가족이 아닌, 비장애인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한 가족으로서, 고립된 존재가 아니라 소통하는 존재로서, 그리고 농인과 청인을 다르지 않은 시선에서 말이다.
1. 경계를 허무는 시선
‘코다(CODA:Child Of Deaf Adult)’는 농인인 부모님 사이에서 태어난 청인 자녀를 뜻하는 용어로, 2020년에 개봉한 김진유 감독의 <나는 보리>는 ‘코다(CODA)’인 소녀 ‘보리’의 일상과 그런 보리를 통해 바라보는 세상을 담은 영화이다. 김진유 감독은 실제 농인인 부모님 사이에서 태어난 ‘코다(CODA)’로, 영화<나는 보리>는 김진유 감독의 유년기를 바탕으로 한 자전적인 이야기로부터 시작되었다. 때문에 <나는 보리>의 주인공이자, ‘코다(CODA)’인 소녀 보리는 김진유 감독의 어린 시절이 투영되어있는 인물이라고도 볼 수 있다. <나는 보리>의 주인공인 11살 ‘보리’는 어린 시절 김진유 감독처럼 농인인 부모님을 대신해 은행 업무를 보고, 음식을 주문하고, 물건을 구매하는 등 주로 가정 내에서 아이보다는 어른들이 하게 되는 일들을 도맡아 한다. 영화 속 “나는 누나 귀 안 들리는 거 싫어. 치킨 못 먹어.”라는 농인 동생 정우의 대사를 통해서, 아침에 혼자 알람을 듣고 일어나 가족들을 깨우고 등교하는 보리의 모습을 통해서, 보리가 “내일 할아버지 집에 갈거야.”라는 갑작스러운 엄마의 말에도 따라나서 엄마와 동생의 몫까지 기차표를 구매하고, 택시 앞자리에 탑승해 길을 안내하고, 수어를 사용하지 못하는 할아버지와 농인인 엄마 사이에서 수화를 통역해주는 장면을 통해서 보리의 가족들이 생활의 얼마나 많은 부분을 보리에게 맡기고 의지하고 있으며, 보리가 가족들 사이에서 어떠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을지 짐작해볼 수 있다. 그렇지만 영화는 보리가 이러한 책임들을 도맡음으로써 결코 불행하다거나 힘겹다거나, 가족들이 보리에게 과도하게 의존하여 보리가 없이는 아예 생활이 불가능하다는 식으로 묘사하지는 않는다. 분명히 불리하고 힘든 요소를 지니고 있음에도 영화에서 보리네 가족은 따스함과 서로에 대한 사랑과 관심이 넘치는 화목한 모습으로 그려진다. 어떻게 보면 가족 구성원 내에 농인이 없는 일반 가정보다 더욱 화목한 모습으로 말이다. 이는 은정이가 자신의 부모님은 항상 바쁘고 매번 걸려오는 전화와 부모님의 심부름은 다 자신의 몫이라고 투덜대며 보리를 부러워하는 장면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데, 이렇게 화목하고 따뜻한 가족의 묘사는 농인인 부모님과 청인인 자녀로 구성되었지만, 보통의 가족들처럼 따뜻하고 화목했던 김진유 감독의 가정환경이 반영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렇게 화목한 가족 내에서도 왠지 모르는 소외감을 느끼는 인물이 있는데, 바로 ‘보리’이다. 들리지 않는 부모님 혹은 동생 정우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다수에 속하는 청인 ‘보리’ 말이다. 이러한 설정은 <나는 보리>가 농인의 문화와 세상을 특별하지 않게 바라봄으로써 가지는 미덕을 돋보이게 해준다. 보리는 가족들 사이에서 생활하며 느끼는 알 수 없는 소외감에 매일 아침, 자신도 부모님과 동생처럼 소리를 듣지 못하게 해달라는 소원을 빌기도 하며, 심지어는 소리를 잃기 위해 MP3를 최대 음량으로 키워 이어폰을 귀에 바짝 꽂은 채 음악을 듣거나 물에 귀를 자주 담그면 청력이 감퇴한다는 TV 속 해녀의 인터뷰를 보고 직접 바다에 뛰어들기도 한다. 이러한 보리의 행동과 소외감은 일반 청인 관객들이 보기에 이질적이고 쉽게 공감할 수 없으며 한편으로는 충격적이라는 평가도 받는다. 그러나 이런 보리의 심리와 행동, 영화의 설정이 <나는 보리>의 진정한 가치를 드러낸다.
가족 내 유일하게 들을 수 있는 존재로서, 사회적으로 우리가 흔히 다수라 말하는 청인에 속함에도 보리가 농인으로 사는 삶을 원하는 모습을 통해 <나는 보리>는 장애인은 약자, 청인은 일반인이라고 흔히 우리가 말하는 이분법적 사고와 농인의 삶을 남다르게 바라보고 불편할 것이라 섣불리 동정하는 우리의 선입견을 깨트려주기 때문이다. <나는 보리>에는 농인을 바라보는 시선이 특별하지 않기를 바라는, 있는 그대로의 농인을 보여주고 싶은 감독의 의도가 그대로 드러난다. 앞서 말했듯, 보리는 물품을 구매하고, 음식을 주문하고, 은행 업무를 보는 등 흔히 보호자가 해줄 법한 일들을 모두 맡아 하는데, 이렇게 가족들의 생활편의를 도울 뿐 아니라 보리는 사회로부터 가족들을 보호하기도 한다. 이는 보리가 동생 정우의 축구경기 출전과 엄마와 함께 옷을 사는 장면을 통해 알 수 있다. 동생 정우 역시 농인인데, 정우는 축구 실력이 뛰어남에도 귀가 들리지 않아 경기 수행이 어려울 것이라는 이유로 출전선수가 아닌 후보 선수로 지목된다. 이에 정우가 후보선수라는 것을 알게 된 보리는 이장님인 아버지를 둔 친구 은정이를 통해 정우가 축구경기에 출전할 수 있도록 돕는다. 또한, 보리가 엄마와 단둘이 옷가게를 방문한 장면에서 보리는 옷가게의 직원들이 자신과 엄마가 소리를 듣지 못한다는 이유로 무시와 비하를 서슴지 않고, 옷 가격 또한 원가보다 높게 책정해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데, 이후 보리는 잘못된 거스름돈을 점원에게 돌려주며 엄마에게 부당한 대우를 하는 모습을 목격했고, 자신은 들리지 않는 척하고 있었을 뿐 사실은 우리에게 어떤 행동과 말을 했는지 다 보고 들었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표현한다. 이렇게 보리는 가족의 도우미와 더불어 보호자의 역할도 소화한다.
그렇다면 청인인 보리는 다른 이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을까? 가족들의 도움 없이도 모두 스스로 잘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보리가 가족을 돕듯, 보리 또한 가족의 도움과 관심, 사랑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은 영화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보리는 불꽃놀이를 보러 가족과 함께 시장에 나가 즐거운 시간을 보내던 중 잠깐 한눈을 판 사이에 부모님의 손을 놓친다. 안내방송을 해도, 전화를 걸어도 들을 수 없는 부모님과 동생이기에 이들을 찾을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 보리는 막막하기만 하다. 이 순간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내내 밝고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던 보리는 처음으로 11살 제 나이 또래처럼 어린아이 같은 울음을 터뜨린다. 영화는 이렇게 가족 내에서 보호자의 역할을 하는 보리 또한 가족들의 보살핌과 도움이 필요하며, 우리가 사회적 약자라고 생각하는 농인도 도움을 일방적으로 받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누군가에게는 큰 힘과 도움이 되어 주는 존재라는 걸 알려준다. 다음 소주제에서 더 언급하겠지만, <나는 보리>와 유사한 작품으로 미국에서 개봉한 <코다>라는 음악 영화가 있는데, 이 작품에서도 ‘코다(CODA)’인 주인공 소녀가 “지금까지 가족 없이 뭘 해본 적이 없어요.”라며 망설이는 모습을 통해 <나는 보리>와 마찬가지로 평소에는 자신이 가족들을 도와야 하지만 역으로 자신도 가족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걸 보여준다. 이렇게 영화 속에서는 청인과 농인이 모두 도움이 필요한 존재이기도,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 만큼 강한 존재이기도 함을 보여주는데, 결국 <나는 보리>가 이야기하는 바는 이러한 영화의 장면들과 보리의 아빠가 보리에게 반복해서 뱉는 말을 통해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들리든, 들리지 않든 우린 똑같아.” <나는 보리>가 바라보는 청인과 농인은 연약한 존재이자 때론 강한 존재로서 장애의 유무와 관계없이 그저 똑같은 한 사람일 뿐이다.
2. 다르고도 같은 소녀들– 영화 <코다>의 루비, <나는 보리>의 보리
<나는 보리>의 보리와 유사하게 ‘코다(CODA)’ 주인공을 중심으로 한 이야기를 그린 영화가 있는데, 바로 2021년 미국에서 개봉한 <코다>이다.
두 영화의 주인공 보리와 루비는 모두 코다 중에서도 가족 내에서 유일하게 소리가 들리는 자녀 'OHCODA’이자, 미성년자 코다 ‘KODA’에 속한다는 점, 그리고 영화가 청인과 농인의 화합을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유사하나, 두 영화 속 소녀의 가정 환경이나 농인의 세계를 묘사하는 방식, 그리고 인물의 선택에서는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나는 보리>에서 보리의 관심이 가족들과 보내는 크고 작은 이야기들과 학교, 친구들과의 관계에 집중되어 있다면, <코다>의 루비는 졸업과 성인을 앞둔 나이로 진학과 가족의 생계 등 자신의 삶과 가족으로부터의 독립을 고민하는 데에 몰두한다. 두 영화에서 내가 가장 주목했던 차이는 보리는 가족들과 동일시 되어 자신도 소속감을 느끼기를 바라는 반면, 루비는 가족의 품에서 벗어나 자신의 꿈을 향해 나아가기를 원한다는 점이었는데, 이는 단순히 졸업 학년과 11살이라는 인물의 나이 차이 때문에 나타난 차이 만은 아닐 것이며, 두 소녀의 가정 환경과 제작자(감독)의 배경과 우리 사회에 깊게 자리 잡은 문화적 배경 또한 영화의 관점과 주인공의 선택에 크게 작용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루비의 가족은 아빠와 오빠가 운양하는 어선으로 근근이 생계를 유지해 가는데, 일정치 않은 수입과 틈만 나면 중간에서 이익을 떼가는 중개업자들 때문에 루비의 진학비용 걱정은 물론, 늘 생활비 걱정을 안고 지낸다. 또한, 루비의 가족은 가족 내의 강한 유대와 결속을 강조한다. 예를 들어, 루비의 엄마가 식사할 때 다른 행동을 하지 못하게 이야기하는 장면이나 가족의 일에는 꼭 모두가 함께 자리하게 하는 장면을 통해 루비의 엄마가 가족의 소통과 결속을 강조하는 인물로 그려지는데, “그거 알아? 엄마도 세상 밖으로 나와야 해.”라는 루비의 대사와 “들리는 년들은 나랑 말 안 해.”라는 엄마의 대사에서 유추해볼 수 있듯, 사실 엄마의 이러한 행동은 청인과의 교류는 두려워하며 피하고, 농인에 공감할 수 있는 가족 내에서 소속감과 안정감을 유지하려는 엄마의 방어기제이다. 그리고 이렇게 가족 내의 유대를 강조하는 엄마의 행동과 자신도 부양의 대상이라는 인식이 저절로 심어지게 되는 루비네 가정의 분위기와 환경은, 루비가 가족에게서 벗어나 세상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열망을 더욱 부추겼을 것이다. 반면, 보리의 가족은 루비네 가족과 같은 입장으로, 농인으로서 겪는 불편함과 어려움이 분명 있음에도 따뜻하고 화목한 가정의 본보기라고 표현해도 어색함이 없을 정도로 따뜻한 모습을 보인다. 오히려 <나는 보리>에서 보리의 부모님은 큰 부담이 될 수 있는 수술비조차도 전혀 상관없다며 정우와 보리의 귀를 위해선 큰 비용지출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보이고, <코다>에서는 가족의 생계수단이던 낚시도 <나는 보리>에서는 보리 아빠의 오랜 취미이자, 어린시절부터 아빠의 유일한 친구가 되어 준 존재, 아빠와 보리가 속마음을 교감하게 되는 시간과 배경으로 나타난다. <코다>는 미국에서 제작된 영화이며 원작 영화인 <미라클 벨리에>는 프랑스에서 제작되었고, <나는 보리>는 우리나라의 감독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바탕으로 국내에서 제작되었다. 이에 루비와 보리의 선택 차이에는 우리나라보다 비교적 이른 나이의 면허취득과 독립을 맞이하는 서양의 문화와 개인주의, 그리고 한국의 가족공동체 정신과 협동, 한국의 ‘정’이라는 이데올로기 또한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가정과 사회에 대한 루비와 보리의 관점과 선택에서는 차이를 보이지만, 두 영화 모두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농인과 청인의 경계를 허물고, 화합과 이해에 도달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점은 같다. <코다>의 경우 영화의 후반부. 음악 영화답게 음악을 통해 주제를 드러낸다. 루비의 오디션과 대학 진학을 내내 반대하던 루비의 부모님은, 교내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는 루비의 모습과 루비의 노래에 환호하는 관객의 모습, 그리고 그 누구보다 노래를 사랑하는 듯한 루비의 태도를 보고 오디션 당일 아침, 직접 운전을 해 오디션장까지 함께 간다. 오디션장에서 루비가 부르는 노래는 “Both sids now”. 앞서 말했듯, 영화의 메인 사운드 트랙이자 주제를 나타내고 있기도 한 이 루비의 오디션 곡은 “하려던 일들이 많았지만 구름이 내 앞을 막았지. 이제 구름을 양쪽에서 보게됐어. 위와 아래에서”, “이제 사랑을 양쪽에서 보게 됐어. 주는 쪽과 받는 쪽에서”, “이제 인생을 양쪽에서 보게 됐어. 이기는 쪽과 지는 쪽에서”와 같이 성장하며 주변에 있던 것들에 대해 달라진 이해와 시선에 대한 가사를 담은 곡으로, 루비가 ‘코다(CODA)’로서 살아가며 때로는 농인인 가족이 자신의 인생의 장애물이라고 생각했던, 때로는 농인 가족 속에 속한 유일한 청인이 자신이 소외된 존재인 것처럼 느껴졌던, 때로는 다른 가족들과 다른 자신의 가족이 부끄럽고 이해할 수 없었던 루비가 이제는 농인과 청인의 입장 양쪽 모두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게 되었으며 가족을 이해하게 되었음을 노래한다. 그뿐만 아니라, 오디션 현장에 몰래 들어온 가족들을 위해 루비는 노래를 부름과 동시에 가사에 맞추어 수화를 하는데, 이 장면을 통해 영화 <코다>는 루비의 성장과 이해, 농인과 청인의 교류와 화합을 완벽히 실현시킨다.
<코다>가 서로 다르다고 생각했던 이들의 이해와 화합에 중심을 두었다면 <나는 보리>는 서로 간의 이해와 더불어 ‘코다(CODA)’로서 살아가는 보리의 자아정체성 확립과 농인과 청인과의 경계를 허무는 것을 중점적으로 다루며, 농인도 청인과 다를 것 없는 평범한 한 사람이라는 점을 더 강조해 말한다. <나는 보리>의 미덕은 바로 이렇게 농인 가족이 등장하지만, 비장애인 가족과 다르지 않은 보편적 정서를 다룬다는 점에 있다. 다름보다는 같음을 느끼게 하고,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경계를 자연스럽게 허물게 한다. 실제로 나는 보리의 김진유 감독은 “처음부터 장애를 어떻게 다루겠다는 거창한 목표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보리의 감정에 집중했고, 그 감정선을 따라 보리 가족의 모습을 묘사하다 보니 결과적으로 기존의 장애를 다룬 영화와 차별점을 갖게 된 것 같다.”라며 특별한 의도를 담기보단 오히려 그저 농인을 향한 시선이 특별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을 뿐이라고 인터뷰에서 말한 적이 있다. 영화 <나는 보리>의 후반부에서, 보리는 시장에서 구매했던 부적인 ‘악마의 눈’을 바다에 던지는데, 이러한 보리의 행동을 통해 일시적이지만 농인의 입장을 직접 체험해보고 사회의 차별적인 시선을 경험해본 보리가 더 이상 가족에 대한 타인의 차별적인 시선이나 편견을 의식하지 않게 되었으며 ‘코다(CODA)’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인정하고, 타인의 시선이 어떻든, 자신에게는 그 누구보다 평범하고 소중한 가족의 의미를 확립하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나는 보리>는 보리가 도로와 바다 사이 좁은 방호벽 같은 길 위를 양팔을 벌린 채 균형을 잡으며 걸어가는 모습이 배우들의 이름과 함께 등장하며 마무리되는데, 도로도 바닷가도 아닌 사이 도로 방호벽 위를 조심조심 걸어가는 보리의 모습을 통해 농인과 청인 사이에 놓여있는 ‘코다(CODA)’ 보리의 정체성과 농인과 청인의 경계를 허무는 시도를 완성한다.
3. 보리가 보여주는 농인의 세상
<나는 보리>에서 보리는 가족들과 같아지고 싶다는 마음에 농인이 되기 위한 노력 중 하나로, 물에 귀를 자주 담그면 잘 들리지 않는다는 TV 속 해녀의 말에 직접 바다에 뛰어들며, 이상 없이 무사히 구조되었음에도 보리는 이후로 계속 소리가 들리지 않게 된 척, 자신도 농인이 된 척 행동하는데, 이렇게 농인으로서 생활하는 동안 보리는 농인을 향한 사회의 시선을, 가족들이 농인으로서 겪었을 어려움과 외부에서 받았을 차별들을 경험하게 된다. 앞서 <나는 보리>의 미덕은 농인 가족이 등장함에도 비장애인 가족과 전혀 다른 바 없이 느껴지는 보편적인 정서를 다룬다는 점이라고 하였는데, 이렇게 영화 전반에 걸쳐 경계를 허물고, 보편적인 정서를 다루지만, 보리가 직접 농인의 입장으로 살아가는 생활들을 담음으로써 일상 속에서 농인이 겪게 되는 불평등한 차별과 시선 또한 짧은 내에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것 또한 <나는 보리>의 또 다른 미덕이라고 볼 수 있다.
보리가 가족들처럼 농인이 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친구들은 학교에서 이전과 확연히 다른 태도를 보인다. 보리와는 상의 없이 보리에게 화장실 청소 당번임을 통보한다던가, 은정이와 보리가 나란히 앉아있는 모습을 보았음에도 보리를 투명인간처럼 쏙 빼놓고 은정이에게만 반갑게 인사를 건네는 식으로 말이다. 학교와 또래 친구들 내에서뿐만 아니라 보리는 주변 어른들에게서도 평소에는 보지 못했던 모습들을 보게 되는데, 부모님 대신 정우와 농인이 된 척하는 보리를 데리고 병원에 간 고모가 ‘착한 거짓말’이라는 명분으로 병원에 다녀온 후 엄마, 아빠에게 수술하게 되면 정우가 앞으로 축구를 하지 못할 것이라는 의사의 말을 전하지 않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또한, 엄마가 함께 간 옷가게에서는 보리와 엄마가 소리를 듣지 못한다는 이유로 몰래 점원들끼리 상의하여 더 높은 가격으로 옷을 판매하는 것을 보게 되며, 지나가는 보리를 본 동네 어른들이 “어린 것이 딱해서 어떡해.”라며 들리지 않게 된 보리를 안타까워하며 안쓰러운 시선으로 자신과 자신의 가족들을 바라보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이렇게 보리가 농인인 체를 하며 겪게 되는 주변의 변화와 상황들은 우리가 영화 밖 현실사회에서 농인을 바라보는 태도를 잘 반영하고 있다. 모두가 그렇다고 말할 순 없겠지만, 우리 사회는 흔히 장애를 섣불리 안타깝다는 식으로 바라보거나 ‘힘들겠다’라는 식으로 동정 같은 공감을 한다. 작은 시선, 별 의미 없는 말 한마디일 수 있지만, 때로는 이렇게 무의식적으로 툭툭 나오는 시선과 말들은 당사자의 마음에 꽂히기도 한다. 이렇게 영화 속에서 11살 소녀가 특별히 큰일 없이 지나가는 소소한 일상 속에서 차별을 경험하도록 한 것에도 농인을 바라보는 시선이 특별하지 않았으면 하는 김진유 감독의 바람과 유년 시절 감독이 겪었던 감정, 그리고 그의 자전적인 이야기들이 바탕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김진유 감독은 “제가 만났던 농인 부모 중 60% 정도가 자녀가 농인으로 태어나길 바랐다. 농인이라는 것 자체가 불편하지 않고,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인터뷰한 바 있는데, 이를 통해 사회에서 우리가 농인을 볼 때 무의식적으로 우리의 관점에서 생각하고 판단하는 경향이 개입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감독이 영화에서 보리가 직접 농인을 체험하게 함으로써 농인이 일상 속에서 빈번하거나 흔하게 겪게 되는 어려움을 보여주고, 그 어떤 가정보다 따뜻하고, 온전하고, 화목한 가정의 분위기를 그림으로써 현실에서의 농인을 향한 특별한 시선을 제거하고자 했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
4. <나는 보리>에 대한 글을 마치며
영화 <나는 보리>는 농인의 삶을 이야기함과 동시에 ‘코다(CODA)’라는 익숙하지 않은 용어와 존재를 알리고, 이런 ‘코다(CODA)’ 소녀를 주인공으로 설정함으로써 단순히 농인의 생활을 보여주는 것을 넘어 농인과 청인,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구분하는 경계를 허물고 농인 가족이 특별하지 않은 보통의 가족임을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또한, 보리가 농인이 되고 싶어 하는 바람을 통해 관객들에게 보편적인 사고에서 전환된 시각과 관점을 제공한다는 점에서도 큰 의의를 지닌다.
<나는 보리>의 김진유 감독은, “장애인 가족도 비장애인과 다르지 않다는 식의 묘사도 하고 싶지 않았고, 특별한 사건이 아니라, 농인 가족의 평범한 일상과 자신이 살았던 모습만을 보여줘도, 대중이 농인을 조금 더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라고 인터뷰에서 생각을 밝힌 바 있다. 이러한 감독의 애정 어린 시선이 영화 <나는 보리>와 그것을 보는 관객에게도 통한 것일까. <나는 보리>의 보리네 가족은 보는 사람의 마음도 더불어 따뜻해질 정도로 그 누구보다 화목하고 행복해 보이며, 영화를 통해 그들의 삶과 ‘코다(CODA)’로서 살아가는 보리의 삶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그들을 더 이해하고, 그들과 더 가까워지고 싶다는 마음이 저절로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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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슬픔의 삼각형/Triangle of Sadness, 2023>
<더 스퀘어>에 이어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은 루벤 외스틀룬드 감독의 신작 <슬픔의 삼각형>을 보고 왔습니다. 다소 충격적인 포스터처럼 이런저런 괴소문이 자자한 영화 중 하나인데, 오늘 리뷰에서는 영화는 어떤지부터 시작해서 영화가 담고 있는 것들과, 또 이 영화를 어떻게 봐야 하는지, 볼 때 어떤 점을 주의해야 하는지에 대한 것들을 다뤄볼 예정입니다.
우선 전작인 <더 스퀘어>가 예술가의 위선과 특권의식을 다뤘다면 <슬픔의 삼각형>은 조금 더 넓은 범위의 젠더와 계층을 다루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제목의 삼각형은 마치 계급을 나타날 때 삼각형을 떠올리게 하는데, 영화는 내내 이것을 전복시키면서 대담하고 강렬한 풍자를 이어갑니다. '온갖 위선과 무지로 뒤덮인 상류층이 계급이 전복된 사회가 찾아온다면 과연 어떤 행동을 하고 어떤 표정을 지을 것인가?'라는 흥미로운 질문을 독특하고도 과감하게 바라보는 영화의 시선이 인상적입니다. 더불어서 영화는 마르크스 등의 어록을 언급하는 등의 방식으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에 대한 개념을 직접적으로 이용해서 현대 사회의 아이러니를 탁월하게 드러내기도 합니다.
하지만 영화가 매우 심오하다거나 이해하기 어려워서 재미없지 않습니다. 저도 영화 내내 몇 번이나 웃었던 것 같은데, 그 정도로 굉장히 독특하고 흥미로워서 재밌게 볼 수 있습니다. 영화 러닝타임이 세 개의 챕터로 나누어진 2시간 반으로 꽤나 긴 편인데,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볼 수 있게 됩니다. 시사회에서도 정말 많은 분들이 웃는 모습을 자주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주의할 점이 하나 있는데, 영화 중반부에 그 유명한 구토 장면이 나옵니다. 이 구토는 상류층의 위선을 가장 강렬하게 풍자하는 요소로 영화적으로 굉장히 중요하지만 비위가 약하신 분들이라면 보기 힘들 수도 있습니다. 저도 반쯤 스크린을 바라보지 못한 것 같은데, 빈속에 보시는 걸 추천드립니다. 그 장면만 주의하신다면 영화 전체적으로 큰 어려움 없이 보실 수 있어요.
배우들의 연기도 굉장히 훌륭합니다. 우디 해럴슨부터 시작해 해리스 디킨슨, 샬비 딘 모두 훌륭하지만 영화 3장부터 등장하는 돌리 데 레온의 연기가 특히나 인상 깊습니다. 스포일러로 자세히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영화가 어떠한 지점에 다다랐을 때 그녀는 말로는 형용하지 못하는 표정을 짓는데, 그 장면에서 이어지는 엔딩은 강렬합니다.
영화가 함유하고 있는 주제가 최근 많은 영화들에서 다뤄지고 있기도 하고, 본 영화에서 어떠한 독특한 지점이 있는 것도 아니라 그리 색다르게 다가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다만 많이 다뤄진 것뿐이지 여전히 유효한 주제기 때문에 독창적인 변주만 있다면 저는 만족이네요. 감독의 전작인 <더 스퀘어>를 보고 가는 걸 추천드립니다. 루벤 외스틀룬드 특유의 유머 스타일이 있는데, 그걸 알고 보면 더 재밌어요.
이 영화도 좋았습니다. 개인적으로 전작인 <더 스퀘어>보다 좋았네요. 시사회에서 나눠준 굿즈도 전부 마음에 들었고요. ㅎ
+) 샬비 딘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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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IFF 데일리] 탱고의 도시, 부에노스아이레스
<부에노스아이레스여 안녕>
시놉시스 : 2001년 11월, 위기의 부에노스아이레스. 반도네온 연주자 훌리오 파베르는 경제적 어려움과 싸우고 있다. 탱고 밴드를 이끌고 있지만 공연 수입은 갈수록 줄어들고, 가족이 운영하는 신발 가게도 위기에 처한다.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떠날지 고민하던 중 정부가 은행 계좌가 동결되고, 화끈한 성격의 택시 운전사 마리엘라와의 우연한 만남이 그의 운명을 바꿔 버린다.
폼페이의 이웃들
부에노스아이레스는 '탱고의 도시'라고 불린다고 한다. 영화는 제목에 걸맞게, 근로자 탱고 밴드 '폼페이의 이웃들'이라 불리는 그룹(?)이 연주하는 밴드다. 영화의 주인공, 훌리오 파베르는 반도네온 연주자이다. 그와 그의 친구들은 밴드를 운영하고 있지만 경제적인 어려움에 마주한다. 심지어 그들의 문제는 하나. '보컬'의 부재. 그들은 병원에 있던 '마에스트로'를 찾아간다. 하지만 그들의 답변에 단호하게 거절하는 '마에스트로'. 모두가 포기하던 찰나, '마에스트로'가 리허설 장소로 등장한다.
역경과 고난 -1
하지만 이야기는 그저 탱고 밴드 이야기로 흘러가진 않는다. 영화 속 주인공 그리고 그의 밴드들에겐 여러가지 문제들이 닥쳐온다. 훌리오 파베르에게 닥쳐온 첫 번째 시련. 택시 기사와의 사고. '독일' 이민을 계획하며 독일어 라디오를 들으며 가던 훌리오. 그런 훌리오의 차를 택시기사, 마리엘라가 빨간 불 확인을 하지못하고 결국 사고가 난다. 화가 난 훌리오는 마리엘라에게 가 보험증서를 요구하지만, 그녀는 남성우월주의라며 욕을하고 도망간다.
훌리오는 택시회사로 가, 택시회사 사장에게 사고에 대해 설명한다. 하지만, 장애가 있는 아들을 혼자 키우고 있는 마리엘라. 마리엘라 역시 경제적 어려움의 주인공이다. (게다가, 보험증서도 위조 문서) 결국, 수리비는 할부로 갚기로하고 훌리오가 필요할 때마다 기사 역할을 하기로 합의를 본다.
역경과 고난 -2.
이 뿐만이 아니다. 그들에게 닥친 고난은 하나 더 있다. 바로 정부의 경제 위기로 '은행 계좌'가 동결된 상황. 독일로의 이민을 준비하던 훌리오에겐 청천벽력이다. 그는 집과 아버지의 가게를 팔아 현금으로 마련하여 은행에 다 넣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춘기 딸은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며 이민을 거부하기까지. 그러던 그에게 밴드의 공연 기회가 생긴다.
바로 정부에서 일하는 사촌의 부탁으로 국회의원 아내의 생일파티 공연. 경제적 어려움에 처한 그들에겐 새로운 기회다. 그렇지만 다른 위기가 또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
탱고의 매력
사실 탱고는 경험해보지 못한 영역이다. 그저 아 이런 느낌이 탱고구나! 만 아는 정도. 근데 이 영화를 통해서 탱고의 매력에 푹 빠졌다. 노래 가사가 오른쪽 자막을 통하여 나오지만, 자막은 보지 않는다. 밴드 연주자들의 표정만 봐도 행복하다. 귀는 탱고를 듣고 눈은 그들을 본다. 그럼 그 순간 스크린에 현혹된다. 내가 음악 영화를 좋아했었나?
영화를 보고 나서 한 생각은 '폼페이의 이웃들'의 연주 장면을 실제로 보고 싶다. 물론 이뤄질 수 없는 꿈이겠지만.
영화는 탱고를 통해서 그들의 연대와 어려움을 헤쳐나가는 모습을 보여주며 감동까지 선사한다. 앞으로 탱고 연주를 찾아 보게 해준 좋은 영화.
EDITOR_RIA
상영스케줄
2024.05.04(토) 14:00 CGV전주고사 2관
2024.05.07(화) 13:30 CGV전주고사 7관
2024.05.09(목) 14:40 CGV전주고사 1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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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판 모르는 사람의 여행이랑 졸업식 참가하기
필자는 금빛 모자이크 시리즈를 단 한편도 안 본 사람이라, 관람 전에 메가박스나 네이버 영화 같은 곳을 봤는데 줄거리가 그냥 수학여행 가는 내용 이 정도로만 등재되어있어서 나무위키 같은 위키 사이트에서 이 작품 포지션을 찾아봤는데, 최종장 같은 느낌의 작품이라는 것을 알게되었다. 일상물 특성상 타 TVA 시리즈인 귀멸의 칼날, 주술회전 같이(한국에서 최근에 큰 규모로 개봉한 TVA 연계 극장판이기에 예로 들었다) 장기적으로 꼼꼼히 이어지는 느낌보다 파편적이고 얇게 이어지는 느낌의 일상물이라 전작을 안 본다 해도 내용이 이해가 안 가진 않았다. 다만, 내용이 이해가 간다는 거지 재미가 있다는 얘기는 아니다. 인물 소개를 해주는 것도 내 친구는 A, B, C, D 고 학교 쌤은 E, F다 이 정도로만 끝나서, A는 B와 어떠어떠한 관계이고, C는 D를 좋아하고 이런 자세한 설정들이 없다보니 쟤는 왜 저러지? 같은 의심을 계속 들게 만든다. 그리고 일본 애니에서 자주 나오는 츳코미식 개그가 정말 호불호가 갈리는 요소인데, 필자는 이러한 요소가 정말 맞지 않아 보는 내내 부담감을 느꼈다. 타 흥행 애니메이션 극장판인 귀멸의 칼날이나 주술회전에서도 이런 개그 스타일은 안 맞았는데 이 작품에서도 역시 안 맞았다. 또한 애니메이션 하면 작화나 영상미를 중점으로 보게 되는데, 본 애니메이션은 흔히 모에계 애니메이션에서 쓰이는 인물 형태에다가 연출에서도 특별히 애니메이션에서만 보여줄 수 있는 움직임의 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고, 영상미도 특별히 좋은 풍광 같은 것도 보이지 않았다. 말 그대로 시리즈의 팬만을 위한 영화다. 시리즈를 안 봤다고 이해가 안 가는 영화는 아니지만, 시리즈를 안 봤다면 굳이 볼 필요가 없는 영화기도 하다.
*이 글은 원글 없이 새로 작성된 글이며, 출처란에는 작성자의 인스타그램 주소를 기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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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와 함께 했던 영화는 환한 꽃이었어
나는 어떤 사람일까? 어떤 사람이 나더러 '쟤는 아쉬운 애'라고 말할까? 이불킥 뻥뻥 흑역사를 만들어나가고 있을 때, 누가 나더러 그런 이야기를 내 뒤에 했을까? 내가 아는 한 난 욕먹은 게 전부지만 왠지 모르게 그런 사람도 있지 않았을까 생각이 들었다. 나도 내가 모르는 재능이 나에게 있었으면 좋겠다. 이왕이면 공부하는 쪽으로. 공부머리가 좋으면 엄청 편할 것 같다!
그러나 역시 살아본 결과 난 공부머리보다는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적는데 숙련도가 있다는 결론이다. 뭐 공부머리가 좋을 수는 있겠지만 이제까지의 삶을 반추했을 때 그렇지 못할 확률이 높다는 건 너무나도 잘 안다. 매일 두 편씩 쓰는 수기. 이 수기야 말로 나의 재능일지도 모른다. 누가 보면 성실한 축에 속하기 때문이다. 근데 이런 글쓰기도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를 쓰고 있을까?라는 마음이 든다. 사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내가 좋아하는 취향과 비슷한 수다이기 때문이다. 내가 어느 부분에서 웃었고, 화가 났나 하는 일들이다. 주변인에게 미주알고주알 털어놓기엔 내가 봐도 쓸데없어서 싫을 것 같다. 이 잡듯 뒤져도 만나기 어려웠던 그 사람. 언젠가 나도 그를 위해 할 말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럴 때 난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아무도 모르는 이방인처럼
여자는 누군가의 책방에 도착한다. 스카프를 꼼꼼하게 두르고 나타난 여자. 이 가게의 주인과 잘 아는 사이인 것 같다. 안에 있는 것들을 몇 번 뒤적거리다 밖의 테라스로 나온다. 전자담배를 피우는 여자. 가게 직원이 나와 ‘필요한 건 없나요?’라고 묻는다. 담배를 피우러 왔다고 대답하는 여자. 직원이 다시 가게로 들어서고 이곳의 주인이 나타난다. 언니! 두 여자는 오랜만에 만난 것 같다. 서로의 근황을 묻는 두 사람. 같은 직원이 어떤 사람이냐 묻는다. 동생이에요. 아는 동생. 아. 너 글은 쓰니? 아뇨. 아마 앞으로도 안 쓸 것 같아요. 너 살찐 것 같아. 맞아요. 저 10kg 쪘어요. 너무 쪄서 맞는 옷이 없네요. 그렇게 서로의 근황을 묻다 책 이야기로 향한다. 가게 주인은 손님에게 “얼마 전에 낸 책 읽었어요”라고 답한다. 그 질문을 듣고 본론을 물어보는 손님. “너, 왜 연락을 안 하니? 연락하는 게 부담스러웠어?”
책방 주인은 숨어 지내고 싶었나 보다. 사람을 만나는 게 어려웠던 주인. 주인은 손님이 어떻게 왔을까 궁금해졌다. 손님은 주인에게 ‘너 보러 왔다’고 답한다. 그렇게 솔직해진다. 솔직한 마음은 금세 책으로 옮겨간다. 이제 내가 읽고 싶은 것에 집중하게 됐다는 가게 주인. 세 사람의 대화는 직원의 수어로 이어진다. 날이 아직 밝지만, 날은 곧 저문다. 날이 좋을 때, 실컷 다녀보자. 금세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손님. 그렇게 우연처럼 만나 새로운 말을 배웠다.
저도 여기 처음 왔습니다
여자는 다시 이방인이 되어 전망대에 도착한다. 망원경으로 무언가를 관찰하는 여자. 갑자기 어떤 사람이 스윽 나타나서 인사를 한다. 저 모르세요? 영화감독이랑 같이 사는 사람. 우연 덕에 아는 사람을 만난 것이다. 여자는 같이 사는 영화감독인 남자를 소개한다. 진짜 카리스마 있으세요. 뭔가 영혼이 없어 보이는 말 몇 마디를 한 후에 카페로 향한다. 저기서 뭐 마시도록 하죠. 손님은 영화감독의 영화를 본 적이 없다고 한다. 같이 온 여자는 감독의 영화가 달라졌다고 한다. 맑아졌다고 한다. 뭐가 맑아졌어요? 영화 만드는 마음이 달라졌어요. 그게 영화로 나타나는 것 같아요. 제작에 대한 강박을 떨쳐냈다고 말하는 남자. 사는 태도를 고쳐야 영화를 만드는데 도움이 된다고 믿고 있다. 사는 걸 달라지게 한다라.. 말은 쉽지만 역시 어렵다.
감독은 여자가 썼던 소설을 가지고 영화로 만들고 싶었나 보다. 무기력하게 엎어졌던 지난 이야기를 꺼낸다. 왠지 모르게 영화 만드는 데 영화 외적인 것이 작동하는 것 같다. 이야기가 무르익고 남자에게 무언가를 배우는 손님 준희. 준희는 카메라 작동법에 대해 배우고 직접 써보기까지 한다.
소설가가 만든 영화
일행은 밖으로 나온다. 어? 저 사람 누구였더라? 그 사람 아냐? 그 배우? 우연히 영화감독과 배우, 소설가와 감독의 부인이 만나고 있다. 여배우 길수와의 근황을 이야기하는 중이다. 길수는 이제 더 이상 영화를 찍지 않으려고 한다. 우리나라 독립 영화 몇 편 나오다가 이제는 그 바닥을 떠나려고 하는 것 같다. 길수 씨가 아까워요. 감독은 한 명의 팬으로서 아쉬움을 토로한다. 길수 씨가 아까워요. 근데 준희는 감독의 이런 말이 듣기 싫었나 보다. “뭐가 아까운데요?” 답답해 돌아가실 것 같은 네 사람. 우연히 사람들을 만나 이상한 주제로 말싸움하고 있다. 이 꼴이 웃긴다. “자기가 하고 싶은 걸 하는 거죠.” 이죽거리는 답을 내놓자 두 사람은 후다닥 도망친다. 두 명만 남았다. 어색한 분위기의 두 사람. 한, 두 마디 대화를 하다 또 지인을 만난다. 그 사람은 영화를 공부하는 사람이다. 준희와 길수는 경우와 영화를 만드려고 한다. 난 있는 그래도를 소재로 한 영화를 만들고 싶어요. 그럼 다큐멘터리가 되겠네요? 아니오. 그런 건 아니에요. 아. 그럼 뭘 만들지 기대가 되네요.
비스듬히 겹쳐 보이다
비교적 순한 맛의 홍상수다. ‘그 일’이 공개된 후의 홍상수는 매웠다. 아예 죽음이 소재였던 <강변 호텔>이나 <풀잎들>과는 다른 소재를 갖고 왔다. 그 소재는 창작론이다. 영화 전반적으로 ‘하고 싶은 일’과 ‘어떻게 창작할 것인가’가 끝까지 반복된다. 소설가 준희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담으려고 하고 있다. 근데 갑자기 불현듯 이상한 느낌이 들면 그건 맞는 것 같다. 이 ‘소설가’라는 직업을 ‘영화감독’으로 치환하면 누가 봐도 홍상수 본인의 이야기다. 영화감독이나 소설가 둘 다 뭔가를 창작한다는 점이 이에 대한 근거다. 있는 그대로를 묘사하려고 하는 준희의 말이나 <밤의 해변에서 혼자>에서의 인물의 모습은 겹쳐 보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거의 러닝타임의 1시간을 투영해서 자기가 하고 싶었던 말을 한다. 나, 영화 만드는 방식을 달라지게 할 필요가 있는 것 같아. 인위적인 방식으로 영화를 만들었던 자기의 모습을 극 안에 투영하기 시작한다. 이런 영화의 화법은 준희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영화감독은 길수에게 '아깝다'라고 답한다. 길수는 이에 대답한다. '시나리오는 들어오지만 그냥 독립영화 몇 편 나왔어요. 사람이 귀찮아서요.’ 이건 김민희 배우의 현재 입장과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어느덧 그녀가 홍상수 이외의 영화에 나온 지가 꽤 됐다. 김민희 배우는 <화차>와 <아가씨>로 만개했던 포텐을 뒤로 한지 오래다. 이런 나는 김민희 배우를 보며 솔직히 아깝다고 생각했다. 천우희 배우만큼이나 카리스마가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뭐 자의 반 타의 반 이런저런 여론 때문에 복귀가 성사될 때 반응이 쉽게 예상이 된다. 전국적인 대스타가 되어 우리나라 충무로를 반으로 쪼개기 충분한 김민희 배우. 그녀의 현실은 평단의 호평과는 별개다.
그게 실패한 삶이라고 볼 수 있을까? 아닐 수도 있다. 적어도 홍상수는 이 연인의 처지와 입장을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다. 넌 재능이 있어. 근데 단순히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사는 것뿐이니까. 이런 위로 아닌 위로는 영화의 후반부로 향할수록 처연해진다.
단 한 명의 사람에게
이야기는 중요하지 않아요. 생일. 뭐 그런 걸 소재로 영화로 만들 수도 있어요. 소설가는 별것도 아닌 이야기를 만들 수 있다고 말한다. 준희는 생일을 소재로 한 이야기를 쭉 말한다. 길
수는 ‘저 진짜로 그런 일 있었어요’라고 답한다. 그리고 길수는 남편이랑 술을 마시지 않는다고 한다. 술자리에서 내면의 이야기를 했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 길수 부부는 더 이상 술자리를 하지 않는다는 것 같다. 누가 봐도 소원해졌다는 걸 알 수 있다. 이는 영화에서 일어나는 내면의 이야기(<소설가의 영화>에서, 길수 부부가 내면의 이야기 '술자리'를 하지 않는다는 것)과 이제 난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말과 유사하다. 그동안 포기할 수 없었던 내면의 욕망, 그러니까 세상이 허락하지 않았던 로맨스를 품고 작품을 찍어내던 예술가의 입장이다. 시간이 지나며 멀어질 수밖에 없어. 그런데 이젠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를 외면하지 않는다. 감독이 ‘준희’고 배우가 ‘길수’라고 가정하면 홍상수는 이제 외면하면 안 될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한다는 비유가 성립된다.
이 비유는 사실 후반부로 갈수록 노골적이다. 간단하다. 극장에서 영화를 볼 때, 누가 들어갈 수 있었음에도 관객은 단 한 명이다. 여배우 길수뿐이다. 또 다른 두 인물의 대화에서 ‘이 영화를 꼭 시간 지나고 나서 봐라’라고 말한다. 그니까 관객 길수가 ‘시간이 지나고 나서 보길 바란다’고 말하는 셈이다. 그리고 단 한 장면에서 흑백이던 색감이 컬러로 바뀐다. 꽃을 든 길수. 화장을 안 한 맨 얼굴로 렌즈를 보며 환하게 웃는다. 슬픈 음악과 함께 길수는 행인과 함께 길을 건넌다. 그렇게 영화 크레딧이 올라간다. 순서 상 단편영화의 크레딧이 올라가도 무방한데 이 영화 전체가 끝났다고 알린 셈이다. 자기가 하고 싶던 이야기가 끝이 났다. 준희는 자기의 작품 세계를 오롯이 반영한 영화를 끝냈다. 그리고 길수는 혼자가 됐다. 심지어 영화관 스태프와 가는 길마저 다르다. 카메라는 길수가 떠난 곳을 비춰준다. 같이 올라가지 않는다. 또 이 길수가 사람들과 함께 있는 모습까지 비쳐주지 않는다. 내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로 만든 영화가 끝나고 여배우는 혼자가 됐다. 영화는 그렇게 감독의 전부였다. 그런데 이제 정말 하고 싶었던 삶에 관한 이야기가 끝나니 길수는 혼자가 됐다. 우리 모두가 예상할 수 있는 한 사람의 미래다. 이제 그녀는 인지도가 너무 높아졌다. 기라성 같은 배우들과의 연애. 두 편의 영화에서 만개했던 연기력. 빼어난 미모까지. 우리나라 영화판이 만든 슈퍼스타인 그녀. 이 여배우는 다시 슈퍼스타로 돌아가기에 너무 멀리 왔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즐거웠던 일상이, 이젠 '정말 하고 싶었던 이야기' 마저 끝나 영화의 제작진 자막이 올라가고 있다. 그리고 실질적인 엔딩이 한번 더 나온다. 굳이 혼자가 된 길수를 조명하는 감독. 그는 이제 인정하는 것 같다. 내가 외면할 수 없는, 이 시간의 끝자락에 서서,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며 웃고 떠들던, 첫 만남의 술자리가 끝나가고 있다는 걸. 그리고 그 속에서 너와 함께했던 시간은 꽃과 같이 웃는 얼굴이었다는 걸. 언젠가 날이 저무는 걸 맞이했을 때 이 영화를 봐달라는 것을. 네 삶은 절대 아까운 인생이 아니고, 나는 그런 너를 아름다운 색감으로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그제야 찾았고 이제야 보이는 것
영화는 홍상수의 창작론을 소재로 이끌어간다. 물론 홍상수가 어떻게 영화를 만들어 왔는지에 대해서도 공부할 수 있다. 그런데 나는 이 영화가 한 명의 연인에게 바치는 영화라고 보는 것이다. 확실한 근거는 앞에서도 쓴 것들이다. 혼자서 보는 영화. 환하게 웃는 미소의 색감. '삶의 이야기'를 끝내고 올라가는 영화의 엔딩 크레디트. 감독 홍상수는 이제야 예술가로서의 창의성이 넓어진 것 같다. 그리고 이 성장을 어두운 환경과 대비시키는 것이야 말로 그가 하고 싶은 말일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 사람이 진짜 하고 싶었던 말이 후반부에 있다고 보는 쪽이다. 환하게 웃는 얼굴. 그 모습이 너무 예뻐서 오래 기억에 남았다. 물론 누군가의 마음에 대못을 박는 일이 절대 잘하는 짓을 아닐 것이다. 내가 뭐 제 3자의 입장이지만 이건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그는 나쁜 인간이다. 그는 머지 않아 상처준 사람에게 반성하는 날이 올 것이다. 그리고 더 많은 것들을 떠나보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연인에게 바치는 감사함의 표시는 큰 반향으로 남을 것 같았다. 이것이야 말로 감독 홍상수의 연출력이 아닐까? 잔잔히 집중하게 만들어 후반부의 터트리는 힘, 그게 그가 가진 장점이 집약됐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소설가의 영화가 아니라 홍상수의 영화다. 이제 보내야 할 것에 대해 당신얼굴 앞에 대고 기억할, 그와 그의 연인을 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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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석이 떨어졌던 그곳에서 '고도를 기다리며'
Asteroid
영화의 공간적 배경이 되는 애스터로이드는 영화에서 만들어진 가상의 도시다. 주민이라곤 87명밖에 없는 작은 마을 애스터로이드. 미국 남서부의 한가운데 자그맣게 위치해 있다. 이 동네 가운데에는 차가 지나갈 수 있는 도로가 있고 음식점이 있다. 차를 정비하는 정비소가 근처엔 주유소까지 있다. 이 외에는 다른 숙박시설이 몇 군데 있다. 하지만 이 도시의 명물은 행성이 충돌한 흔적이다. 우주과학이 발달한 도시 애스터로이드. 이 도시에는 이 크레이터를 연구하는 몇 과학자들이 함께 살고 있기도 했다.
애스터로이드는 한적하다면 한적하다고 볼 수 있는 도시다. 이 도시에 방문객이 왔다. 아이들이 내린다. 이 아이들이 온 이유는 도시에 행사가 있기 때문이다. 미국에 있는 영재들을 모아 장학금을 여는 일정이 있었던 것이다. 어느 음식점에 두 가정이 도착했다. 한 가정은 어머니와 딸이 함께 온 밋지와 디아나 모녀, 또 다른 사람들은 오기와 우드로 부자다. 난데없이 아버지 오기가 밋지와 디아나 모녀를 향해 사진을 찍는다. "왜 허락 없이 사진을 찍는 거죠?" 밋지가 묻는다. 오기의 답은 간단했다. "전 사진작가거든요." 대신 일반적인 사진작가는 아니고, 주로 전쟁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찍는 사람이었다. "좋아요. 사진을 인쇄한 결과를 보고 싶군요. 그 대신 사진이 예쁘게 나오면 다 괜찮아요." 밋지는 유명 배우였기 때문에 여기저기 찍히는 사진이 많이 피곤했다. 이 만남을 시작으로 밋지와 오기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또 동시에 디아나와 우드로의 이야기 역시 펼쳐진다.
액자 안에 액자
영화는 전체적으로 극 중 극형식을 취하고 있다. 감독의 전작 중 하나인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과 공통점을 취하는 부분이 있는 것이다. 다만 전작과 갖는 차이점은 배경으로 어떤 것을 기저에 깔고 있는지에 대한 부분이다. 우선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다. 카메라는 1985년으로 향한다. 한 소녀가 공동묘지 안으로 들어간다. 어떤 동상 앞에 선다. 주섬주섬 책을 꺼내는 소녀. 책을 쓴 작가는 누군가에게 들은 이야기를 전한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무슈'라는 호텔 컨시어저다. 그러니까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구성은 '들었던 이야기를 책에서 읽은' 쪽이 되는 셈이다. 다른 작품인 <프렌치 디스패치>는 기자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기자는 어떤 이야기를 무슨 관점에서 담는가가 핵심인 직업이다. 심지어 이야기의 전제조건 자체가 한 언론사의 발행인이 죽어가며 남긴 유언이다. 그러니까 들었던 이야기를 관점에 따라 풀어냈다는 것이 작품의 핵심이라고도 볼 수 있는 셈이다.
본작인 <애스터로이드 시티> 역시 액자식 구성을 취하고 있다. 영화 전체적으로 깔려있는 전제조건은 영화의 이야기 배경에 연극이 깔려있다는 점이다. <프랜치 디스패치>가 언론을 소재로 했다는 점과 공통점, 차이점을 동시에 갖는다. 직업인으로서의 특성이 두 작품의 공통점이 된 것이다. 우선 <프렌치 디스패치>에서는 언론인으로서의 특성인 ‘어떤 걸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한 것이 영화에서 핵심으로 작동한다. 이번에는 <애스터로이드 시티>에 나오는 영화와 예술의 관계다.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문장은 극후반부에 반복돼서 나오는 어떤 문장이다. 이 문장이 직접적으로 나오는 것과는 별개로 영화는 한 이미지를 반복하고 있다. 초반부에 제시되는 특정한 사건, 영화에서 인물들이 대화하는 방식, 웨스 앤더슨 특유의 강박적인 미장센, 이상한 유머감각이 그 근거다. 이는 예술과 현실의 관계라는 영화의 핵심 키워드와도 관련이 있다. 다시 영화의 구조로 돌아온다. 창작자가 어떻게 연극을 만들었는가? 가 영화의 핵심으로 들어갔다는 점은 역시 직업인으로서의 특징이 들어갔다고 볼 수 있다.
다음은 차이점이다. 사실 1차적으로 드러나는 차이점은 ‘구체적인 시기를 설정했는가’에 대한 부분이다. 하지만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이 역시 같은 지점을 바라보고 있다는 점이 본작 <애스터로이드 시티>는 1955년이라는 시간적 배경이 의미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프렌치 디스패치>는 가상의 도시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다. 물론 <애스터로이드 시티>도 가상의 도시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애스터로이드 시티>에서 구체적인 시점이 들어갔다는 점은 분명한 특이점처럼 느껴진다. 무슨 말이냐? 당시 브로드웨이, 미국의 연극판은 최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고 한다. 또 있다. 또 흔히 1950년대 중반의 할리우드라고 하면 걸작이 쏟아지던 때였다. 흔히 고전 할리우드라고도 한다. <현기증>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등 여러분들도 흔히 한 번 들어봤을 법한 작품들이 나왔다. 이런 영화들이 개봉하던 때에 이 작품들을 만드는 과정을 이야기로 만들었다는 것은 이 시기의 예술가들이 갖고 있는 관점을 영화에서 다루고 싶어서였겠지? 즉 1950년대의 미국을 영화가 그리워한다는 점이 핵심이 된다고 볼 수 있는 셈이다. 이는 <프렌치 디스패치>에서도 찾을 수 있는 공통점이다. ‘무언가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라는 질문에 고정적으로 깔려 있는 대전제가 뭘까? 바로 과거의 사건은 기억 속에서 마모되지 않다면 가만히 있다는 점이다. 이를 왜 그리워할까?를 스스로에게 반문한다면 그 과거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달려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럼 그 핵심이 저널리스트와 공통점이 있다고 할 수 있는 것 아닐까? 이 공통점은 결국 예술가의 이면에 깔려있다는 점, 현실에서 벗어나 예술을 어떻게 바라볼 수 있는가 와도 닿아있는 셈이다.
흑백과 컬러
이 영화는 전작 <프렌치 디스패치>와 유사하게 흑백/컬러 두 설정을 이어가고 있다. 본작 <애스터로이드 시티>에서 흑백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는 부분은 극에서 현실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반대로 컬러로 이야기를 전개하는 방식은 극 중 극에 관한 부분이다. 이 컬러와 흑백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이어가고 있는가도 영화의 소소한 재미거리가 된다. 그러나 단순히 소소한 것으로 영화를 받아들이는 것을 넘어 큰 줄기로서 연출 방식을 이해할 수 있다. 이 흑백으로 표현한 부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유심히 볼 필요가 있다. 이 흑백 시퀀스 전부가 컬러 시퀀스를 이해하는 거의 모든 가이드라인이다. 대표적으로 초반부에 연극 작가와 배우가 대화하는 신이 있다. 이 부분이 대표적인데, 예술이 현실로 끌고 들어왔다고도 볼 수 있는 셈이다. 이 반복은 영화 중 연극에서, 다시 후반부의 흑백 시퀀스에서, 초반-후반의 수미상관 구조에서 반복된다고도 할 수 있다. 현실과 가상의 대비? 당연히 경계선을 흐려서 영화의 하이라이트 신까지 끌고 가기 위함이다. 전체적으로 난해한 작품이지만 이 색채대비를 서사로 끌고 온 방식을 주의 깊게 본다면 여러분도 이해가 어렵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고도를 기다리며>
영화에서 사용되는 큰 아이러니 중 하나는 '직접 드러나진 않지만 간접적으로는 엄청 중요하게 밑줄 쳐져 있다'라는 점이다. 작품을 보면서 가장 먼저 생각난 사람은 두 사람이다. 바로 레오 까락스와 스티븐 스필버그다. 후자는 <파벨만스> 때문이다. 현실이 어떻게 영화화되는지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펼쳤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 전체적으로 레오 까락스의 <홀리 모터스>와 <아네트>가 갖고 있는 아이러니가 생각이 났다. 전자 <홀리 모터스>는 얼굴을 바꾸는 영화라고 볼 수 있다. 왜 역할을 바꿀까? 바로 영화와 현실의 관계를 묘사하기 위함이다. 역할을 바꾼다는 점을 반복함으로써 영화를 만들고 보는 일이 현실과 얼마나 유사한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반대로 <아네트>에서 쓰인 아이러니는 주인공 부부의 딸과 관련한 부분이다. 딸이 영화에서 굉장히 중요하지만 목각인형으로 묘사가 됐었다. 뭐 이외에도 영화 대사가 매번 노래인 거나 바다를 묘사하는 방식이 누가 봐도 연극적인 것도 작품 자체의 아이러니를 품고 있다고 해도 무방하다. 이는 초반부에 제시되는 한 에피소드와도 관련이 있었다. 이 사건이 품고 있는 거대한 아이러니가 있고, 또 이 일이 갖고 있는 세팅이 있다. 후자의 성격 상 이 일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영화의 제목이 왜 '애스터로이드'인가 와도 관련이 있다. 직접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인물들이 이 일을 어떻게 생각했는지가 공간 설명에서 이미 다 깔려있다.
하지만 영화에서 가장 중요했다고 볼 수 있는 아이러니는 대사에서 나온다. 영화는 <고도를 기다리며>와 비슷한 지점이 있다. 영화에서 인물들이 공통적으로 겪는 고독은 상실이다. 캐릭터들은 각자의 사정에 의해 무언가를 잃어버려 외로워하고 있다. 이를 위해 초반부의 한 사건을 기다리고 있기도 하고, 연극을 만들기도 하며 연극의 주인공이 되기도 한다. 또한 극 중 극에서 이상한 행동을 벌이는 경우도 몇 있다. 이 상실에 대한 리액션은 인물들이 어떻게 대화하는가? 와 관련이 있다. 영화의 난이도를 직접적으로 가장 크게 올리는 요소가 된다. 어느 장면에서는 이게 코미디로 작동한다. 그러나 역시 중요한 건 이 사람들이 초반부의 사건에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가에 대한 부분이다. 글쓴이는 이것이 <고도를 기다리며>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사실 우리 인생은 이런 장면들로 가득 차있다. 시간이 약은 아니다. 정말 모든 걸 다 잊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만 그런 건 없다. 영화에서 보여주는 아이러니는 이런 것들이다. 과연 뭐가 현실이고 뭐가 예술일까? 하지만 무엇이든 지금 보고 듣고 경험하는 것들이 가장 중요하지 않을까. 현실을 위해 예술이 있다. 반대로 예술 덕에 현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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