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필 K2022-03-26 03:03:06
레오스 카락스의 스타일 총집합, 황홀한 눈과 귀!
<아네트> REVIEW
필자는 레오 카락스 감독의 전작인 홀리 모터스를 본 사람인지라, 이 영화에서의 뮤지컬 씬을 알기에 "이 감독이 뮤지컬 영화를 만든다니 대체 어떤 걸 보여줄 생각이지?" 라는 기대감과 호기심을 가지고 아네트를 관람했다. 그렇게 처음 관람하는 아네트를 보면서 놀랐던 점은 영화가 상당히 대중적이었다는 점이다. 난해하거나 그런 부분이 특별히 없어 뮤지컬 영화 답게 누구나 노래와 함께 서사를 편하게 따라갈 수 있다. 연출들이 다양한 스타일로 나오는데, 여러 장르를 해온 레오스 카락스 감독이 지금까지 보여준 기교를 실험적으로 총집합한 느낌이 들었다. 필자가 개인적으로 최고작으로 뽑는 홀리 모터스 보다는 아니지만, 난 여전히 레오스 카락스 감독을 좋아하는 것 같다.
*이 글은 원글 없이 새로 작성된 글이며, 출처란에는 작성자의 인스타그램 주소를 기재하고 있습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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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 서울독립영화제 후기 (2)
4.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 감독 하마구치 류스케)
국내에선,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여자 없는 남자들> 이 원작인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로 가장 잘 알려진 감독 하마구치 류스케.
타 작품들을 워낙 재미있게 봤던 터라, 기대를 안고 가장 먼저 티켓팅에 도전한 영화이다. 역시나 좋았고, 전작들과는 색다른 느낌을 주는 이야기였다.
영화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가 끝난 후 진행된 시네토크에서, 이 영화는 ‘다큐멘터리에서 시작해서 픽션으로 끝나는 영화’라고 하신 평론가님의 말씀이 기억난다. 이보다 이 영화를 더 잘 설명할 수는 없는 것 같다.
자연을 보호하고자 하는 거주민, 그리고 그 반대쪽에 서서 어떻게든 글램핑장을 건설하려는 회사 직원들의 이야기. 와중에 한 사건이 발생하게 되고, 엔딩에 이르러서는 충격적인 장면이 묘사된다. 어떠한 순간순간들이 문학적으로 다가와 좋았다. (스포일러 방지를 위해 말을 아껴야겠다. 정보없이 봤을 때 오는 놀라움이 크다)
광활한 풍경, 유머러스한 대화, 그리고 오프닝이 정말 볼만하다.
그리고,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5. 백탑지광 (감독 장률)
영화 <군산:거위를 노래하디>, <경주>, <춘몽>으로 잘 알려져 있는 영화감독 장률. 이번 영화 <백탑지광>은 한 편의 시를 닮았다.
영화 <군산>과 <경주>
영화 <춘몽>과 <백탑지광>
백탑은 그림자가 지지 않아요
영화 제목 '백탑지광'에서의 백탑은 베이징에 있는 탑으로, 그림자가 지지 않는다. 이는 곧 한 등장인물이 '우리에겐 그림자가 없다'라고 상대에게 말하는 것과 연결된다. 각자의 아픔과, 말 못할 서러움들을 내면에 꾹꾹 눌러담고 있어서일까.
속에 자리한 그늘을 안고 살아가는 인물들은 각자의 힘으로 묵묵히 생을 버텨내고 있다.
내가 안아줘도 될까요?
용기내어 이렇게 물어보며 자신의 그림자를 꺼내 보인다. 조금은 다른 모양일지라도,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포갠다.
너의 그림자와 나의 그림자를 겹쳐본다.
괴로움, 죄책감, 고독감 모두. 나의 아픔과 너의 아픔까지도.
그 순간에는 조금 쓸어내릴 수 있을 것만 같다.
마음껏 봤고 마음껏 좋아했다.
12월의 압구정 cgv의 온기를 그리워하게 될 것 같다. 영화인들 틈에 끼어 12월 4일부터 7일까지, 4일간 출석했던 서울독립영화제. 2024년에는 또 어떤 좋은 영화들을 만나게 될까. 영화가 가진 힘을 믿으며 앞으로의 2024년도, 좋아하는 것을 꾸준히 좋아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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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별하지 못한 첫사랑과 다시 헤어지기 위해 떠난 여행
여행길에 나서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여행을 떠난 남자 지미(허광한)다. 혼자 집에 돌아온 지미. 가족들이 안쓰러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다. 지미는 가족들에게 "혼자 여행을 떠나려고 한다"라고 말한다. 이제 어엿 중년이 된 지미. 쓸쓸한 눈빛에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무언가가 담겨있다. 우두커니 서서 길을 바라보니 왠지 모르게 놓고 온 것이 있는 듯하다. 생각에 잠기는 지미. 지난 기억들이 서서히 생각난다. 애써 떠오르는 옛 생각을 뒤로하고 그냥 걷는다. 어느새 도착한 지하철. 지하철에 타려니 예전 생각이 난다. 그 애도 그냥 여행 삼아 여기저기를 떠돈다고 했었지. 10대 때 만났던 아미(키요하라 카야). 지미와 아미는 18년 전 대만의 노래방에 처음 만나 운명 같은 만남을 시작한다.
우연처럼 만나
이 영화에서 우연은 두 인물을 묘사한다는 점에서 굉장히 중요하다. 우선 첫째. 아미의 관점에서 받아들이는 우연이다. 아미는 여행 중이다. 여기저기 돌아다닌다. 왜? 여행하며 살고 싶으니까. 이유가 간단하다. 이 관점에서 보면 대만이라는 나라를 고른 것도, 지미를 만나게 된 것도 전부 다 우연처럼 느껴진다. 더 나아가 아미 입장에서 대만이란 나라를 굳이 처음으로 고를 필요가 없다. 대한민국의 서울에서 대만으로 건너가도 세계일주라는 목적에는 전혀 거리낌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 목적에 관한 부분을 영화가 어떻게 묘사하는지가 중요하다. 세계일주라는 목적이 중요하지 않다. 그 세계일주 동안 우연히 '어떤 것'을 통해 '무엇을'느끼는지가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이 느끼는 것들을 아미가 '특정 방식'으로 표현한다는 것이 영화에서 굉장히 중요하게 밑줄 쳐져 있다. 이 매개체('특정 방식')의 속성을 생각해 보면 영화가 기획의도를 잘 살렸다고 생각한다. 이 매개체는 받아들이고 느낀 것들을 각자의 방식으로 보여줘야 한다는 점이 굉장히 중요한데, 우연이라는 특정한 상황과 어떻게 관련이 있는지를 연출로 보여준 촘촘함이 돋보였다.
다른 캐릭터 지미가 받아들이는 우연 역시 중요하다. 이 영화에서 지미가 여행하며 만나는 사람들은 어느 관점에서 보면 좀 이상하다. 소위 말하는 개연성의 측면에서 '이게 말이 되나?' 싶다. 지미가 대중적으로 인지도가 있는 인물이라고 해도 말이다. 하지만 역시 지미의 우연은 영화에서 핵심으로 작동한다. 왜? 그것은 글쓴이가 바로 윗문단에 쓴 내용 때문이다. 지미의 우연은 지미의 어떤 것으로 치환된다. 그리고 그 어떤 것은 아미의 '무엇'과 관련이 있다. 단지 이 영화가 아미의 우연을 돌아보는 지미의 이야기로 구성된 것이 아니다. 당연히 지미의 최종 목적지가 아미와 관련한 무언가라는 것이 핵심이라서가 아니다. 지미가 그 여행을 통해서 하나하나 얻었던 것들이 아미가 대만에 있으면서 느낀 감정들과, 또 여주인공이 표현하는 무언가와 등치 되는 지점이 있다. 18년의 시간이 엇갈렸지만 남, 녀가 여행을 떠나 공통적으로 느낀 것들이 우리에게 전달하는 바가 있는 것이다. 이게 로맨스 영화의 낭만적인 성격을 강화하는 역할도 하지만 이야기의 주제 측면에서도 좋은 선택이었다.
지우고 싶지 않은 흔적
이 영화가 기존에 오마주한 작품이 있다는 건 양날의 검처럼 느껴진다. 우선 변주하고 있는 것. 영화의 내실이다. 이 영화가 인물들에게 남은 사랑의 흔적을 보여주기 위해 전면에 내세우는 단어가 있다. 이 단어는 굉장히 중요하다. 과거의 첫사랑과 현재의 지미와의 관계는 시차가 18년이나 나고, 그 사이에 어떤 인생은 바뀌고도 남는다. 그리고 우리가 아는 사랑의 힘을 생각해 보면 이 결과는 당연하다. 다들 첫사랑을 만나고 나서 인생이 바뀐 기억이 하나쯤은 있잖아? 영화는 지미의 여행으로 둘의 사랑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그 사랑이 두 사람에게 어떤 영향이 갔는지를 섬세하게 묘사한다. 사랑이 가진 보편적이면서도 낭만적인 속성을 영화의 특이점을 잡은 영리한 선택이다.
하지만 이야기의 구조가 비슷하다는 건 초반만 봐도 후반이 예상된다는 점에서 아쉽게 느껴진다. 어떤 점에서는 변주를 더 뒀어도 큰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편지 중요하고. 시차 중요하고. 후반부 중요하고. 이런 것들이 원작을 아는 사람이라면 너무 예상이 되는 플롯이다(심지어 본작에 제목이 직접 등장하기도 한다). 예술가가 어떤 영화를 오마주해서 무엇을 만들지 말라는 법은 없다. 하지만 이런 사소한 소재까지 겹치게 보여줄 필요 있을까? 이는 후반부 아미가 보여주는 장면과도 이어지는 단점이다. 이 장면들은 원작과의 관계를 위해 의도적으로 등장한 것처럼 보인다. 이 장면이 오마주 원작과 공통점을 만들어주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이 인물이 가진 내면을 이렇게까지 보여주지 않고, 그냥 스스로 생각하게 만들었다면 이 영화만의 인장이 더 선명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인물이 어떤 사정이었는지는 오리무중 하더라도, 더 지미의 입장을 부각함으로써 이야기의 날카로움을 깎는 것이다.
글쓴이가 생각하는 가장 큰 단점은 또 다른 영화와의 오마주다. 어떤 영화의 오마주? 한국 기준으로 작년에 개봉했던 영화다. 이 영화와 본 작의 관계를 생각해 보면 어느 게 모체인지 너무 딱 알 것 같았다. 뭐 비단 나쁜 것만은 아니다. 박찬욱 감독도, 홍상수 감독도, 이창동 감독도 이 영화와 비슷한 입장에 놓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감독의 색채가 너무 최근이라서 겹쳐 보인다. 구체적으로 이 영화는 후반부에 힘을 줬다. 당연하다. 아니면 이 영화를 만들 이유가 없을 것이다. 이 장면에서 쾌감 내지는 감동이 커야 할 텐데 그냥 작년에 개봉했던 영화가 생각나서 김이 샌다. 왜? 작년 개봉작인 영화와 공통점을 찾으면 쉽다. 이 영화에서 남자 주인공은 인생의 목적을 잃은 남자다. 애써 쌓아 온 직업인으로서의 커리어가 위기에 처했고, 첫사랑에 실패했다는 아픔이 인물을 관통하고 있다. 반대측면에서 여자 주인공은 사연이 후반부에 드러난다. 그 사연을 뒤로하고 여주인공이 사랑을 만난다는 설정이 있다. 물론 작년 개봉작과 지금 이 영화에 대해 생각할 때 번작이 더 좋은 영화다. 인물의 당위성이라는 측면에서 전작보다 성실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성실함에 기대어 줄거리를 거의 똑같이 가져가는 이 영화가 게으르다고 느끼는 건 어쩔 수 없다. 전작과의 차이점? 90년대에 개봉했던 레전드 멜로. 90년대 그 멜로와의 차이점? 작년에 개봉했던 멜로 영화. 감독이 이야기를 보여주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특정 장르의 클리셰를 보여주고 싶었던 걸까?
거 어디 허씨요
허광한 배우는 다양한 얼굴을 담았다는 점에서 뛰어난 연기를 보여줬다. 글쓴이는 허광한 배우가 대만의 송중기 배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왜? 이 사람이 미소년 타입이라서? 물론 비주얼적으로도 공통점이 있다. 송중기 배우가 최근에 나온 <화란>은 특유의 소년스러움이 이야기의 핵심으로 작동한다. 85년생의 중년이지만 소년의 얼굴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허광한 배우 역시 마찬가지로 소년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 이 영화에서의 허광한 배우는 10대의 내면을 표현하는데 거리낌이 없다. 대표적으로 과거의 지미가 첫 등장하는 장면에서 “엄마 왜 저 안 깨웠어요?”라고 말한다. 이 장면부터 시작해 아미를 만나기 전의 모든 상황은 10대의 모습 그 자체였다. 외모만 10대인 것이 아니라 행동도 10대다. 이걸 10대와 30대간의 거리감을 멀리 떨어트려서 묘사했기 때문에 생생한 측면도 있다. 그러나 10대의 행동거지를 생생하게 포착한 허광한 배우의 노력도 대단했다.
허광한 배우는 시간을 18년을 빨리 감기해 청년이 된 지미의 모습도 능숙하게 묘사한다. 지미가 지하철에 있는 모든 장면은 정말 굉장하다. 촬영부터 이 인물이 고립됐다는 걸 보여준다. 그런데 촬영에 인물이 호응하지 않으면 안 되겠지? 생동감이 넘치는 10대의 지미와는 다르게 30대의 지미는 사람을 대하는 것을 불편해하는 듯하다. 허광한 배우는 지미의 닳고 닳은 내면을 포착해서 이 감정을 중심으로 인물을 표현한다. 10대의 지미를 생동감으로 보여준 것과 대조적으로 인물의 특성을 간결하지만 깊게 보여주는 것이다.
이별하기 싫다면
가끔 그런 이야기들을 만난다. 이건 진부하다. 하지만 분명 내 마음 속에 다가오는게 있다. 이 영화는 분명 그런 영화다. 익숙한 작법에 편승한 영화. 그리고 그 작법을 영화 안에서 대놓고 티 내는 영화. 하지만 이 영화에서 지미가 떠난 여행은 각자 이별하지 못했던 사랑과 몇 순간을 떠올리게 만드는데 충분하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그대로, 우리 일상의 많은 분들은 이 세상과 빛을 내는 것 같다. 그 빛 한가운데에 우리가 있는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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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욕 한가운데서 길을 잃어버린 별을 위해
사실은 위험해
이 영화의 주인공은 얼굴 없는 가수 그레타(키아라 나이틀리)다. 어느 날의 공연장. 친구 스티브(제임스 코든)가 노래를 끝냈다. 마이크를 넘기는 그레타. 사람 앞에 나서는 게 싫다. 싫다고는 말하지만 시선이 집중됐기 때문에 자리에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노래를 부르는 그레타. 사람들은 그럭저럭 잘 듣는 것 같다. 군중들 속에 눈이 반짝이는 남자가 있었다. 그 사람은 다른 주인공 댄(마크 러팔로)이다. 음반 제작자인 댄. 예전에는 그래미 상까지 받았지만 현재의 그는 그냥 술주정뱅이다. 오늘을 받아들일 수 없는 남자 댄. 하지만 그레타를 바라보는 안목 자체는 녹슬지 않았다고 확신한다. 그레타에게 명함을 건네는 댄. "네 앨범을 만들어 줄게"라고 접근한다. 하지만 그레타는 음악에게 상처를 입었다. 거절하는 그레타. 하지만 댄과 술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니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다. "음반 제작, 내일까지 고민하고 답 줄게요"라고 말하는 그레타. 그레타는 상처 입은 마음을 뒤로하고, 댄은 스스로를 위한 노래를 만들어야 한다. 다시 시작하는 음악에 뉴욕 시가 반응한다.
음악의 의미
글쓴이가 영화를 보면서 가장 좋았던 것. 음악의 의미를 영화가 플롯 안에서 구현했기 때문이다. 주인공 댄이 직접 “음악은 지루한 일상에 의미를 부여하지”라고 말한다. 글쓴이가 중요하게 생각했던 건 '의미를 부여한다'라는 점이다. 이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일상과 인간과의 관계에만 국한 짓는 것이 아니다. 1차적으로 이 영화가 음악으로 뉴욕이라는 도시를 재구성하기도 하지만 인간과 인간사이에도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 이 영화에서 어떤 인물들은 음악으로 소통한다.
후자부터. 영화에서 중요한 관계 네 개만 뽑으라면 댄과 바이올렛 부녀, 댄과 그레타, 댄과 콜, 그레타와 세상과의 관계다. 이 네 관계가 공통적으로 공유하는 단점은 서로를 잘 모른다는 점이다. 이 네 관계 중 단점을 가장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댄-바이올렛 부녀다. 댄과 바이올렛은 서로를 잘 모른다. 초반부에 나오는 장면을 보면 아버지는 딸의 나이조차 모른다. 딸도 아버지가 뭘 하고 다니는지 모른다. 돈이 있는지 없는지 몰라서 무기력하게 도망 다니는 장면도 있다. 이렇게 서로 멀리 떨어진 것 같은 부녀가 가까워지는 계기가 영화 안에 두 장면이 있다. 이 요소가 동일시되는 지점이 어느 순간 등장하는데 영화가 음악을 바라보는 관점을 그대로 보여준 장치라고 생각한다. 대화 대신 음악을 등장시키는 것이다. 음악이 아니라면 서로 아는 척도 안 했을 댄과 그레타가 처음으로 만나는 과정, 마음을 여는 계기 등등 영화 안에서 어떻게 묘사되는지도 이것의 연장선상이다. 그리고 가장 기본적으로 이 영화의 과제가 뭘까? 바로 프로듀서 댄이 그레타의 프로듀서가 되어 그녀가 세상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부터 그레타가 음악을 통해 세상과 대화하고 싶어 한다는 걸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설정이다. 영화는 이런 식으로 타인과 타인과의 관계를 음악으로 이어 낭만적으로 표현한다.
이런 설정은 영화가 장르적인 성격을 강화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이 영화는 음악영화이기 이전에 영화다. 적어도 이야기가 들어가야 음악이 들어가는 데 있어 연출적으로 중점을 둘 수 있다. 영화는 이 연출을 위한 이야기를 잘 짰다. 인물도 섬세한 성격으로 설정해서 음악에 따른 리액션 차이를 선명하게 보여줬고 노래하는 인물들을 아름답게 보여준다. 그레타와 콜이 교감하는 모든 장면이 그렇다. 음악으로 인물들이 교감한다는 전제 하에 예술을 받아들이는 캐릭터들의 리액션을 보여준다. 충분히 낭만적이고 사랑스러운 영화라고 부를 만 한 지점이다.
뉴욕 여행기
또 이 영화는 뉴욕 시의 일상을 보여주는 일종의 로드무비이기도 하다.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 '그레타의 앨범 만들기'에는 특징이 있다. 바로 도심 한가운데에서 음악을 만든다는 것이다. 이 설정의 배경에 결함이 있어 보이는 거 같긴 하지만 이건 음악영화다. 도심 한가운데에서 음악 만든다면 멋있잖아? 실제로도 영화가 이 광경을 멋있게 그 의미를 충실히 구현한다. 그리고 어떤 논리적 결함을 감수하고서도 이 영화가 정말 하고 싶었던 게 있다. 뉴욕에는 사람이 바글바글하다. 그리고 사람에겐 누구나 마음속 하나 상처가 있다. 이 영화는 이 상처 가득한 도시의 일상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 배경을 뒤로하고 음악을 녹음한다. 그레타의 이야기를 담은 앨범인 것과 동시에 뉴욕 시민들을 위로하고 싶었던 댄(내지는 감독)의 의도가 들어간 것이다. 'A Step You Can’t Take Back'같은 삽입곡의 가사를 보면 지하철이 등장한다. 그리고 영화는 공교롭게도 일상적인 일들이 벌어지는 지하철을 수시로 등장시킨다. 심지어 세상에게 상처받고 지하철에 탑승한 댄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장면도 있다. 더 나아가 그레타와 댄이 함께 뉴욕의 시민들을 바라보는 장면까지 있다. 이 장면에서의 사람들은 그냥 아무 생각 없이 걷는다. 영화가 고의적으로 일상을 사는 사람들을 비춘 것이다.
이것은 음악영화의 장르적인 특성을 하나 더 강화시킨다. 왜 영화가 뉴욕 시민들을 보여줬을까? 에 대한 당위성을 덧붙이는 것이다. 음악으로 무언가를 설명하는 것. 이것이 음악영화 장르에서 음악이 차지하던 방식이기도 하다. <사랑은 비를 타고>라는 영화를 본다. 이 영화는 시간적 배경이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로 전환되던 때다. 유성영화라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하는 인물들이 영화 제작을 위해 노래를 연습한다. 이것은 단지 극적 요소가 아니라 당시 시대상을 보여주는 장치이기도 하다. 동시에 이 <사랑은 비를 타고>에서 인물의 내면이 노래와 춤으로 표현된다. 이것은 시각적, 청각적으로 보다 색다르게 접근했다는 점에서 혁명적인 연출임과 동시에 이야기가 아닌 것이 어떻게 플롯에 틈입할 수 있는가라는 점에서 중요했다. '음악으로 인물의 내면을 보여주겠어!'라는 고민이 극 중 안으로 구현된 것이다. <비긴 어게인> 역시 어떤 목적을 가지고 음악을 삽입했는지를 알 수 있는 장면이 몇 나온다. 그것은 위에서 언급한 '그레타와 댄이 뉴욕 시민들을 바라보는 장면'이나 '생활소음을 영화가 활용하는 방식'과도 관련이 있다. 이 모든 뉴욕의 단면이 그레타 앨범의 하나라는 것, 이들의 일상 역시 예술의 한 단면이라는 것을 암시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후술 하겠지만 이런 도시, 일상, 예술을 한 번에 결합시킨 존 카니의 연출법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원스>도 더블린이라는 장소가 중심이다. 여주인공(그녀)의 집을 비롯한 더블린 구석구석을 보여주며 도시를 배회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보여준다. <싱 스트리트>도 음악을 통해 개인적 성장, 그러니까 살던 고향을 벗어난다는 성장서사를 플롯으로 삼았다(이것은 가장 최신작 <플로라 앤 썬>에서도 구현된다). 존 카니 감독이 잘할 수 있는 방식의 화법을 두 번째 영화에서 확립한 것이다.
복사+붙여 넣기?
글쓴이가 몇 년 만에 이 영화를 다시 보며 느낀 것. 기존 존 카니 감독 영화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는 점이다. 우선 영화의 축을 이루고 있는 것은 크게 세 가지다. 1) 아버지로서는 낙제점인 댄 2) 그레타의 앨범 제작기 3) 그레타와 댄의 관계다. 4) 도시 활용하기다. 1번. 최신작 <플로라 앤 썬>에서 주인공 플로라는 아이를 대하는 법을 몰라 전전긍긍하는 인물이다. 또 <싱 스트리트>에서 주인공의 친형으로 나오는 캐릭터는 내면에 거대한 상처를 품고 있지만 형제로서의 유대감이 극 안에서 강렬한 카타르시스가 된다. 2번. 그레타가 앨범을 제작하는 과정에 대한 부분은 <원스>라는 영화에서 직접적으로 나타난다. 전작의 모티브를 <비긴 어게인>에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3) 그레타와 댄의 관계. 이 부분을 직접적으로 쓰긴 어렵지만 존 카니의 네 영화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음악만 다르지 영화의 어떻게에 해당하는 부분이 자가복제 쪽에 가까운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소규모든 대규모든 공연장을 활용하는 방식이 존 카니의 영화들과 크게 차이가 없다. 특히 <플로라 앤 썬>에서 사용된 연출이 <비긴 어게인>에 그대로 드러난다는 점은 본작(<비긴 어게인>)이 평범해지는 계기가 된다. <원스>에서 'falling slowly'라는 불후의 트랙을 남긴 것 말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시선을 있는 그대로 섬세하게 묘사한 건 존 카니의 데뷔작이라 신선했던 걸까? <비긴 어게인>이 전작의 공식을 답습했고 이후에도 감독은 비슷한 화법을 구사했다는 것이 치명적으로 느껴진다.
부족한 상상력
글쓴이가 생각하는 이 영화의 가장 아쉬운 점은 섬세함이다. 영화를 잇는 연결고리'만' 존재하고 나머지가 부실한 것이다. 그레타의 앨범 제작기가 영화의 가장 중요한 과제다. 그럼 이 방식에 있어 전문적인 지식이 조금 더 나왔어도 크게 이질감이 들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이야기를 다룬 예술로서 창의성이 생겼을 것이다. 대표적으로 극후반부 그레타의 선택과 댄의 직업에 대한 부분이 그렇다. 그레타가 그런 선택을 고른 이유가 내적으로 다 근거가 있다. 그것까진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그게 전부일까? 다른 대안을 고른다거나 하는 방식은 없었을까? 단순히 내적 논리만 따라가기엔 현실적인 부분을 고려하지 않고 쉽게 판단하는 것 아닌가? 영화로서의 창의성을 고려하지 않고 낭만적인 음악의 속성만 강조하니 빈 부분이 많아 보인다. 부족한 상상력이 현실에 찌든 주인공과 낭만적인 영화가 충돌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또 댄의 직업에 대한 부분은 영화의 반을 포기한 듯하다. 이 영화에서 댄은 음악'만' 만드는 인물이다. 인간관계가 굉장히 좁은 인물로 묘사된다. 댄이 음악인으로 활동하면서 아는 아티스트와 행정가가 이렇게 적을 일인가? 영화에 나온 것처럼 이 <비긴 어게인>과 댄이 아예 한 길만 우직하게 팠으면 '이 인물이 이렇게 생각할만한 근거는 다 있다'라고 생각할 법하다. 그렇다기엔 이 영화는 그런 부분을 염두한 흔적이 보인다. 염두했으면 확실하게 그 길로 트는 것도 나쁘지 않았을 텐데 100%중 65%만 써 애매하게 마무리짓는다. 이 영화는 뮤지컬 공연이 아니라 전적으로 영화다. 러닝타임을 길게 가져가는 한이 있더라도 이야기를 확실하게 끝낼만한 수가 있어야 이야기로서의 강점을 가질 것이다. 애매하게 끝낸 덕에 그냥 앨범에 대한 이야기'만'하고 끝낸 감이 있어 이야기가 전달하는 쾌감은 부족하다.
'Lost Stars'
이 영화에 대한 총평은 사랑스러운 작품이라는 것이다. 그레타라는 여성을 한 번도 본 적도 없고 이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지만 괜히 그녀를 응원하게 된다. 또 어느새부턴가 비호감 그 자체인 댄에게 마음이 가고 입체적인 콜에 대해 여러 관점에서 생각하게끔 만든다. 사실 영화가 이거면 역할을 다했다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살아 넘치는 생동감으로 잠시나마 환하게 웃게 만드는 것. 그리고 그런 우리를 'lost stars'로 데려다주는 것이 존 카니가 이 영화를 기획한 의도 그 자체라고 생각한다. 이후 존 카니의 두 영화에 대한 예고편이 됐다는 점에선 아쉽지만 'Lost stars'를 위시로 한 수많은 명곡들을 품은 영화라는 점에서는 충분히 좋은 영화라고 생각한다. 후에 호크아이가 되는 헤일리 스타인펠드와 이미 헐크인 마크 러팔로가 부녀관계로서 연기한다는 점 역시 소소한 재미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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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월 3주 차, 최신 씨네 뉴스
영화 '파묘'와 '핸섬가이즈'가 제57회 시체스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각각 심사위원 특별상과 관객상을 수상했습니다.
1968년에 시작된 시체스국제판타스틱영화제(Sitges - International Fantastic Film Festival of Catalonia)는 스페인의 카탈루냐 지방에 위치한 시체스에서 매년 개최되는 영화제입니다.
영화제는 주로 판타지, 호러, 스릴러 등 다양한 장르의 영화들을 선보이며, 벨기에의 브뤼셀판타스틱영화제, 포르투갈의 판타스포르토영화제와 함께 세계 3대 판타스틱 영화제로 불리고 있습니다.
영화 '파묘'는 2024년 국내에서 천만 관객을 돌파하며 오컬트 장르의 역사를 새로 쓴 작품으로, 시체스에서 심사위원 특별상을 받으며 글로벌 화제작으로 떠올랐습니다.
독특한 오컬트 코미디 영화 '핸섬가이즈'는 관객상을 받으며 집행위원장인 앙헬 살라 코르비(Angel SALA CORBÍ)에게 “기발하고 유쾌한 전개가 돋보이는 작품. 원작에 악령 설정을 더한 다양한 장르의 조화와 결합이 뛰어나다”라는 극찬을 받았습니다.
이번 수상을 통해 두 한국 영화는 세계 무대에서 한국 영화의 저력을 입증하며 주목받고 있습니다.
영화 지원 예산 복구 촉구 기자회견 개최
지난 16일 영화인들이 영화진흥위원회 영화제 지원 예산 복구를 촉구하며 기자회견을 열었습니다.
이들은 영화제가 창작자와 관객을 잇는 중요한 플랫폼임을 강조하며, 2024년 지원 영화제가 40개에서 10개로 축소된 것에 우려를 표했습니다.
특히 50주년을 맞았지만, 내년도 예산이 전액 삭감되어 존폐 위기에 처한 서울독립영화제의 예산 복원을 위한 서명 운동 결과도 함께 발표되었습니다. 연명을 시작한 9월26일부터 10월15일까지 175개 단체, 개인 7564명이 서명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나니아 연대기> 감독 맡은 그레타 거윅, 넷플릭스와 갈등 빚어
영화 <나니아 연대기> 연출을 앞두고 있는 그레타 거윅 감독과 제작사인 넷플릭스가
극장 개봉으로 인한 갈등을 겪고 있다고 합니다.
그레타 거윅은 해당 시리즈가 넷플릭스 스트리밍에만 제한되는 것에 대해 우려를 표하며,
극장 개봉을 넷플릭스 측에 요청했지만, 넷플릭스는 이를 거절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그가 해당 프로젝트에서 빠져나올 수도 있다는 이야기까지 들리고 있다고 합니다.
프란시스 코폴라의 대작 <메갈로폴리스> 틱톡에서 화제
프란시스 코폴라의 1천800억 원 대작 <메갈로폴리스 Megalopolis>가 흥행 참패를 겪으며 어려움을 겪었지만, 최근 틱톡에서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영화 속 아담 드라이버의 대사 “Go back to the club”이 특히 인기를 끌며 열렬한 팬층을 형성했습니다.
비평가들의 평가는 엇갈리지만, 틱톡 사용자들은 이 영화를 반복 시청하고 있다고 하는데요.
곧 Z세대의 새로운 컬트 무비로 자리 잡게 되는 것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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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없는 천사> 일제 당시 영화는 ‘역사’ 없이 말할 수 없다.
일제강점기에 제작된 최인규 감독의 영화 <집없는 천사>는 겉보기에는 고아를 구제하고 새로운 삶으로 이끄는 계몽적 드라마처럼 보인다. 그러나 영화를 본 후, 그 역사적 맥락을 되짚어본 뒤에야 비로소 깨달았다. 이는 고아들의 ‘개인적’ 구제를 국가 이데올로기의 ‘집단적 교화’로 치환하는 식민지 파시즘의 내면화 과정을 치밀하게 그려낸 영화였다.
용길, 일남이 등 조선 아이들은 조선 민중을 상징적으로 대변해 제도 밖에서 무질서하고 이기적인 상태로 묘사돼 방 선생으로부터 ‘가르쳐야 할 존재’, ‘국가적 교화의 대상’으로 치환된다. 이때 일본 역사적 정치 방법인 스스로 일본의 규율과 질서를 내면화 당하는 ‘황국신민’의 정치적 방법이 담겨있다. 이때, 방선생이 세운 고아원은 제국이 설계한 새로운 인간을 양성하는 ‘교화의 장’으로 조선의 ‘미성숙한 국민성’을 제거하고 일본적 가치로 뱌꿔놓는 정신적 공장이다. 실제로 영화는 마지막 장면에서 아이들은 일장기 앞에 모여 일본어로 맹세문을 낭독하며 자연스럽게 일본 제국의 규율을 익히고 일본 제국의 충성까지 이어지는 결말로 끝이 난다. 이렇게 어린 아이들을 계속 교화시켜 국가의 충성까지 이어지는 국가 이데올로기의 내면화까지 연결되게 만들었다.
1930년대와 40년대 초반은 한국 영화 산업이 아직 기술적으로 기초적인 단계에 머물러 있던 시기였다. 그래서 <집없는 천사>를 시청하는 내내 음향의 불안정성과 촬영 기술의 한계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장면 곳곳에서 들리는 기계음, 세트장보다는 자연 배경을 그대로 담은 화면 등은 당시 영화 제작 환경의 제약을 여실히 보여줬지만, 그 한계 속에서도 감정선과 서사를 최대한 진실되게 담아내려는 노력이 곳곳에 배어 있었다. 특히 인물의 내면을 표현할 때 자주 사용된 클로즈업, 과장되지 않은 절제된 감정 연기, 꾸며내지 않은 듯한 장면 구성은 영화 전반에 사실주의적 미학을 부여했다. 이러한 연출 방식은 관객으로 하여금 등장인물들의 고통과 순수함을 더 깊이 공감하게 만들었고, 바로 그 사실성 덕분에 아이들이 황국신민으로 변화해 가는 장면은 더 불편하게 다가왔다.
나는 이 영화가 식민지 시대의 고아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수업 시간에 배운 내용을 떠올리면서 식민지 시기 예술이 어떻게 당시의 억압과 이데올로기를 표현했는지, 그리고 그 속에서 저항의 틈을 어떻게 찾아내었는지에 대한 분석이 영화 내내 나를 사로잡았다. 겉으로는 철저히 황민화 이데올로기를 따르며 만들어진 영화 같았지만, 그 속에는 여전히 조선인의 상처와 구제의 욕망, 공동체 회복에 대한 희망이 스며들어 있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일본 당국은 그 영화 속에서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들의 계획 속에서조차 조선인의 자율성과 연대의 기억이 억제할 수 없는 형태로 드러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그런 미세한 저항의 흔적이 위험으로 다가왔을 것 같아 한편으로는 통쾌했다.
이 영화를 보면서 나는 식민지 시기의 영화가 항상 그 역사적 배경과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는 필요성을 강하게 느꼈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고아들이 모여 앉아 국수와 엿을 만들고, 도색을 하는 평범하고도 행복해 보이는 장면 속에서 나는 그들이 그저 순수와 평온함을 누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평화로운 순간들 속에서도 ‘일본 제국‘이라는 배경은 그들 하나하나를 교묘히 타락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나 또한 그 당시 그 자리에 있었더라면, 저들처럼 자연스럽게 신민화되었을 것이라는 죄책감이 자연스레 스며들었다.
그들의 일상에서 피어나는 순수함 속에 깃든 어두운 그림자는 바로 제국주의가 어떻게 사람들을 지배하고 변화시킬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그렇게 그들은 어느새 자기 민족의 기억과 자율성을 희생하고, 황국신민으로 거듭나게 된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교묘하게 짜여진 억압의 서사 속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나는 그 시대의 사람들처럼 나 역시 어쩔 수 없이 그 체제 속으로 끌려갔을 것이라는 비극적인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 영화는 우리 모두에게 여전히 존재하는 위험 속에서 점차 잃어가는 자율성과 연대의 기억에 관해 나에게 질문했고, 그리고 나는 그 질문을 마주하며 깊은 성찰의 시간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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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부 애거사 짓이야 | 작품성도 세계관도 챙긴 스핀오프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완다에게 모든 마력을 빼앗긴 후, 기억마저 삭제되어 웨스트뷰에 남겨진 '애거사 하크니스'(캐서린 한). 스스로를 형사라고 착각하며 참견쟁이 이웃으로 살아가던 애거사 앞에 난데없이 소년 마법사 '틴'(조 로크)이 나타난다. 애거사를 감싸고 있던 봉인을 해제한 틴은 애거사에게 '마녀의 길'로 데려가 달라 애원하고, 원치 않던 애거사도 잃어버린 마력을 되찾기 위해 함께 '마녀의 길'을 걸을 다른 마녀들을 찾아 나선다.
애거사의 악명에도 불구하고 '릴리아'(패티 루폰)와 '제니퍼'(사쉬어 자마타), '앨리스'(알리 안)와 '샤론'(데브라 조 럽)까지 마녀들을 모으는 데 성공한 애거사와 틴. 하지만 '마녀의 길'에 들어서자마자 그들은 목숨을 건 장애물을 마주치며 위기에 빠진다. 심지어 애거사와 악연인 죽음의 여신 '데스'(오브리 플라자)가 나타나고, 미지의 마법사였던 '틴'이 완다의 아들 '빌리'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애거사의 집회는 자중지란에 휩싸인다.
마침내 주인공이 돋보이는 멀티버스 사가
개국공신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를 멀티버스 사가의 최종 빌런인 '닥터 둠'으로,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와 <어벤져스: 엔드게임>의 메가폰을 잡았던 루소 형제를 <어벤져스: 둠즈데이>와 <어벤져스: 시크릿 워즈>의 감독으로 복귀시킨 MCU. 팬들의 반응은 열광적이었지만, 마냥 좋은 소식은 아니었다. 그간 멀티버스 사가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는 방증이었기 때문. MCU에서 은퇴했던 영웅들의 도움을 받아야 할 정도로.
멀티버스 사가의 영화 11편과 드라마 10개는 공통적인 문제가 있다. 바로 새 캐릭터를 소개하느라 바쁜 나머지 본래 주인공이 잘 안 보인다는 것. <닥터 스트레인지: 광기의 멀티버스>만 보더라도 새로운 캐릭터인 아메리카 차베즈가 주동인물이었고, 닥터 스트레인지는 그녀의 성장을 도와주는 조력자 역할에 그쳤다. 그 결과 멀티버스 사가에서는 인피니티 사가 속 아이언맨과 같이 관객들의 이입을 도와줄 길잡이를 찾을 수 없었다.
<완다비전>의 스핀오프 <전부 애거사 짓이야>도 겉보기에는 마찬가지다. 이 드라마는 완다에게 마력을 봉인당한 마녀 애거사의 후일담을 보여준다. 완다의 쌍둥이 아들 중 하나인 '빌리', 죽음의 여신인 '데스' 같은 새로운 캐릭터와 함께. 하지만 <전부 애거사 짓이야>는 다행히도 멀티버스 사가의 문제를 피해 가는 데 성공했다. 본편의 메시지를 영리하게 확장하면서 스핀오프 역할에 충실한 결과 주인공이 가려지지 않았으니까.
보이는 것과 봐야 하는 것
<전부 애거사 짓이야>에서는 시나리오가 가장 눈에 띈다. 본편인 <완다비전>의 작법을 똑 닮았기 때문. 특히 반전을 활용하는 방식에 있어서는 <완다비전>보다 진일보한 듯 보인다. <완다비전>은 겉과 속이 다른 드라마였다. 겉으로는 완다와 비전의 일상을 다룬 시트콤이었다. 그들이 이웃들과 시간을 보내고, 두 쌍둥이 형제를 낳으며 겪는 여러 에피소드를 196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의 미국 시트콤 형식을 빌려 보여줬다.
하지만 <완다비전>의 진짜 이야기는 달랐다. 마녀와 로봇 부부의 시트콤은 완다가 마법 장벽 '헥스' 안에서 꾸며낸 환상에 불과했다. 마지막 가족이었던 비전을 잃은 슬픔과 절망을 외면하려는 그녀의 피난처였다. <완다비전>은 이 겉과 속의 괴리를 완다의 환상 속에 침투한 마녀 애거사의 음모를 비롯한 여러 복선을 통해 암시했다. 그렇기에 이 모든 복선을 회수하며 진상을 보여주는 반전의 충격도 그 어떤 MCU 작품보다 강렬했다.
<전부 애거사 짓이야>도 마찬가지다. 겉으로 보이는 이야기와 실제로 진행시키는 이야기가 다르다. 전자는 애거사가 주인공이다. 완다에 의해 모든 마력을 봉인당했던 그녀는 기억을 되찾은 후 자신만 아는 '마녀의 길'을 통과해 힘을 되찾으려 한다. 하지만 그 이면에서는 다른 이야기가 펼쳐진다. 완다의 아들 중 하나인 빌리가 사실 생존했고, 그가 애거사의 봉인을 풀어 이용했다는 것. 쌍둥이 형 토미를 찾기 위해서.
그러나 '마녀의 길'의 끝에서 토미를 되살리는 데 성공한 빌리는 놀라운 진실을 깨닫는다. '마녀의 길'은 원래 존재하지 않는 장소였고, 단지 본인이 마법으로 만든 가상의 공간이었다는 것을. 이처럼 빌리의 시점에서 모든 복선이 맞아떨어지는 전개는 <완다비전>의 반전을 연상시키에 충분하다. 아니, 그 이상처럼도 보인다. <완다비전>에 비해 <전부 애거사 짓이야>는 명확한 복선을 보여주지 않았으니까.
사랑과 마법
본편 <완다비전>처럼 가족애와 마법의 비틀린 관계를 강조하기에 반전은 더욱 인상적이다. 그 중심에는 애거사와 아들 니콜라스가 있다. 애거사는 니콜라스를 출산한 직후에 그들 앞에 나타난 데스를 만나고, 데스에게 사정해서 간신히 아들과의 시간을 추가로 얻어낸다. 이후 애거사와 니콜라스는 마녀들을 유인해 그들의 힘을 빼앗는 삶을 살았고, 니콜라스는 그들의 일상에 멜로디를 붙여서 '마녀의 길'이라는 노래를 만들었다.
하지만 '마녀의 길' 노래를 완성한 그날 새벽에 데스가 니콜라스를 데려가자, 애거사는 이별의 아픔이 담긴 아들의 마지막 선물을 악용하기 결심한다. 마녀의 길 끝에서 힘을 얻으려면 마녀의 집회를 모아야 한다는 헛소문을 퍼뜨린 뒤, 집회에 모인 마녀들의 마력을 강탈하면서 더 강한 마녀로 거듭난 것. 멀티버스를 엉망으로 만든 완다만큼이나 삐뚤어진 방식으로 가족을 잃은 슬픔에 대처한 셈이다.
사랑이 남긴 아픔을 잘못된 마법으로써 극복하는 이야기는 빌리의 서사에서도 반복된다. 완다가 헥스를 닫을 때 유대인 고등학생인 윌리엄의 몸에 깃들어서 홀로 생존한 빌리. 가족을 포기한 엄마에 대한 원망과 형을 잃은 슬픔을 이기지 못한 그는 자기도 모르게 현실 조작 능력을 활용해 토미를 되살려 낸다. 다만 그 과정에서 다른 마녀들을 희생한 만큼, 빌리의 여정도 사랑 때문에 잘못된 선택을 한 결과물이나 다름없다.
흥미롭게도 그들은 서로를 마주 보면서 아픔을 극복한다. 죽을 위기에 처한 빌리와 아들을 겹쳐 본 애거사는 자신을 희생해 그를 구한다. 완다를 원망하던 빌리는 아들을 만나기가 두려워 죽어서도 유령이 된 애거사를 보면서 모성애의 힘을 배운다. 그렇게 아들을 잃은 마녀와 부모를 잃은 마법사는 둘만의 집회를 만들고 토미를 찾아 나선다. 이는 <완다비전>에서 끝내 혼자가 된 완다와 절묘한 대비를 이루기에 더욱 의미심장하다.
다양성이라는 잔을 반만 채우다
이처럼 <전부 애거사 짓이야>는 본편을 성공적으로 계승한, 착실한 스핀오프라 할 수 있다. 다만 아쉬움이 없지는 않다. 완성도가 만점에 가깝지만, 만점이라고 할 수 없다. 인종, 문화, 성적 지향성 등과 같은 다양성 관련 코드를 다소 편의적으로, 또 도구적으로 이용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지점이 있기 때문이다.
이미 MCU에서는 백인 남성이 아닌 히어로나 조력자들의 수가 늘어났다. 여성 히어로의 수도 늘었고, 중국이나 파키스탄 등 여러 문화적 배경을 활용하고 있으며, 동성애자나 장애인 히어로도 하나둘씩 조명받고 있다. <전부 애거사 짓이야>도 마찬가지다. 단적으로 '애거사의 집회' 구성원만 보더라도 백인, 흑인, 동양인 마녀가 모두 포함됐다. 애거사와 데스, 빌리와 그의 애인처럼 동성애자 커플도 전면에 등장한다.
문제는 <전부 애거사 짓이야>가 다양성이라는 메시지를 보여주는 방식이다. 이번 드라마는 다양성이 중요하다는 신호는 보내고 있지만, 그 신호를 작품 속에 온전히 녹여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인상적인 지점이 없지는 않다. 일례로 애거사와 데스를 레즈비언 커플로 설정한 선택은 효과적이었다. 새로운 캐릭터를 등장시키고, 극적 긴장감을 고조하고, 애거사와 아들의 서사를 비극적으로 만드는 역할과 기능이 분명했다.
그에 반해 빌리와 그의 애인을 등장시킨 의도는 이해하기 어렵다. 빌리의 동성애 성향이 강조되어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없기 때문. 빌리가 애거사를 이용해 토미를 되살리고자 하는 전개에 빌리의 애인은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그러다 보니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는데도 빌리의 이야기와 애거사의 서사는 완성도의 깊이에 있어서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 <전부 애거사 짓이야> 속의 다양성이 절반 가량은 공허하게 느껴지는 이유다.
세계관도 챙기는 일석이조
그렇지만 <전부 애거사 짓이야>는 여전히 멀티버스 사가에서 오랜만에 접한 성공작이다. 본편에서 등장했던 주인공의 과거사와 후일담, 새로운 캐릭터의 성장 서사를 한 묶음으로 유려하게 풀어냈으니 그 자격은 충분하다. 이에 더해 MCU의 미래를 기대케 하는 여러 암시도 효과적으로 보여줬기에 이번 성공은 더 뜻깊다.
우선 빌리의 본격적인 데뷔는 캐시 랭, 케이트 비숍, 미즈 마블 등이 모일 <영 어벤져스>로 나아가는 중간 단계라고 할 수 있다. '데스'의 등장도 인상적이다. 초월적 존재로 묘사된 그녀는 <어벤져스> 쿠키 영상에서는 대사로,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와 <토르: 러브 앤 썬더> 등에서는 배경으로 등장한 바 있다. 그런 그녀가 전면에 나서면서 <이터널스>처럼 더 초월적인 존재가 엮이는 큰 스케일의 이야기의 발판도 마련된 듯 보인다.
마지막으로 MCU 작품이나 세계관 외적으로도 기대할 만한 변화도 흥미롭다. 사실 MCU는 <전부 애거사 짓이야>를 시작으로 마블 스튜디오에서 제작하는 모든 실사 드라마에 '마블 텔레비전'이라는 별도 레이블을 사용할 예정이다. 과연 이러한 변화가 수년간 만족감이 낮아진 팬들의 기대를 충족시켜 줄 수 있을지 지켜보는 새로운 재미가 생긴 셈이다. 확실한 것은 <전부 애거사 짓이야>가 그 초석을 단단히 다졌다는 사실이다.
Exceeds Expectations 기대 이상
닥터 스트레인지의 멀티버스보다 흥미롭고 애절한 마녀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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