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필 K2022-03-26 03:03:06
레오스 카락스의 스타일 총집합, 황홀한 눈과 귀!
<아네트> REVIEW
필자는 레오 카락스 감독의 전작인 홀리 모터스를 본 사람인지라, 이 영화에서의 뮤지컬 씬을 알기에 "이 감독이 뮤지컬 영화를 만든다니 대체 어떤 걸 보여줄 생각이지?" 라는 기대감과 호기심을 가지고 아네트를 관람했다. 그렇게 처음 관람하는 아네트를 보면서 놀랐던 점은 영화가 상당히 대중적이었다는 점이다. 난해하거나 그런 부분이 특별히 없어 뮤지컬 영화 답게 누구나 노래와 함께 서사를 편하게 따라갈 수 있다. 연출들이 다양한 스타일로 나오는데, 여러 장르를 해온 레오스 카락스 감독이 지금까지 보여준 기교를 실험적으로 총집합한 느낌이 들었다. 필자가 개인적으로 최고작으로 뽑는 홀리 모터스 보다는 아니지만, 난 여전히 레오스 카락스 감독을 좋아하는 것 같다.
*이 글은 원글 없이 새로 작성된 글이며, 출처란에는 작성자의 인스타그램 주소를 기재하고 있습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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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택한 죽음일까, 강요된 죽음일까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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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국에서 안락사 도입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시점이다. '안락사' 자체는 내가 초등학생이던 시절부터 토론 주제로 도마에 올라 왔다. 안락사의 역사가 오래된 스위스를 필두로 북미와 유럽 국가들이 안락사를 허용하는 쪽으로 법을 개정하고 있다. 이 보편적 흐름에서 특이하게도 아시아만 동떨어져 있는데, 아마도 개인주의와 집단주의인 문화적 차이에서 기인할 것이다.
<플랜75>는 집단주의 그 자체인 일본 감독의 영화이다. 북미나 유럽에서 제작되었다면 큰 반향을 일으키지 않을지도 모르겠으나 아시아 국가에서 안락사를 주제로 하니 디스토피아적 판타지처럼 다가온다.
어느 정도 나이를 먹으면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청소년 때야 내가 영원히 늙지 않을 것 같지만, 이제는 거울을 보면서도 깜짝 놀랄 때가 있다. 한 해, 한 해 나이를 먹어갈 것이고, 언젠가는 죽음을 준비해야 한다.
희한하다. 내 마음과 정신상태는 20대 초반과 크게 다르지 않은데, 육체가 늙고 사회적으로 나이를 먹었다는 것이. 나는 사회가 규정한 정상 궤도의 삶을 살지도 않는데 이따금 나이를 생각해 보면 당황스러워지곤 한다. 누구라도 그럴 것 같다. 20대도, 30대도, 40대, 50대…. 90대인 우리 할머니도 그럴 것이다.
안락사 허용에 대한 관점은 지금도 첨예하게 대립한다. '죽을 권리'가 있다는 찬성과 윤리적인 측면의 반대다. 윤리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건 너무 추상적이라, 나는 그보다 '죽음을 강요'하므로 반대한다는 쪽에 힘을 싣는다. 안락사가 허용되면 아마도 죽고 싶지 않은데 죽어야 할 사람들이 늘어날 것이다. 지금도 노인복지가 개판인 우리나라에서, 왜 안 죽느냐는 핍박이 없을 리 없다. 나는 살고 싶은데 누가 죽으라고 한다면, 그보다 더 큰 비극이 있을까.
그럼에도 죽을 때 죽더라도 곱게 죽고 싶다. 겨우 연명만 하며 살고 싶지 않다. 치매에 걸린다거나 의료기기를 주렁주렁 매달고 살아야 한다면 그 또한 끔찍하다. 적당히 살고 죽을래, 라는 말을 죽어가면서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반대로, 75살에 고통없이 죽겠냐고 묻는다면 나는 바로 오케이 하고 죽을 준비를 할 수 있을지도 장담할 수 없다.
<플랜75>는 초고령사회에 접어 들면서, 청년층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75세 이상의 노인에게 안락사를 권하는 국가정책사업이다.
영화가 시작되고 몇 분간의 장면은 후에 이어지는 장면들과 매우 이질적인데, 한 청년이 집단주의적 선언을 하며 자결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 일본인들의 정서를 살짝 내비치는 것이다. 국가를 위해 죽음을 선택한다는, 가미가제식 자결을 보여 주는 건 감독이 일본인이어서일까? 썩 좋지 않았다.
아무튼 이후로는 호텔 청소부로 일하는 '미치'와 그의 친구들 이야기이다. 미치는 78세의 노인이지만 아직 경제활동을 한다. 젊은이들보다야 손이 느리기는 해도 아주 못할 만큼 늙지는 않았다고 믿는다. 플랜75 정책이 발표되고 나서 시청 직원인 '히로무'는 정신없이 바쁘다. 노인들에게 플랜75가 얼마나 좋은 정책인지 설명하고 신청을 받느라 여념없다. 일시금으로 지원금도 받고, 고통없이 죽을 수도 있으니 천국 아닌가.
그저 공무원으로서 나라에서 하는 일을 성실하게 하던 히로무는 삼촌의 등장으로 흔들리기 시작한다. 제 친척이 안락사를 신청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삼촌은 히로무의 부친과 사이가 좋지 않아 장례식에도 참여하지 않을 정도였다. 몇 년 만에 만난 삼촌은 늙고 비루하기만 하다.
각종 교량이나 도로 공사에 참여하며 지역에서 수도 없이 헌혈을 했던 헌혈증을 발견하면서, 삼촌에게도 젊고 반짝이던 시절이 있었음을 안다. 그 삼촌과 지금의 비루한 삼촌이 동일 인물일까. 개인의 연속성을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미치도 마찬가지, 젊은 시절의 미치와 지금의 미치는 동일한 인물일까. 플랜75에 관심이 없었으나 아파트 퇴거 명령이 떨어지고, 직장을 잃으면서 미치가 할 수 있는 선택은 오직 안락사뿐이다. 문자 그대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떠밀리듯 플랜75를 신청하고, 미치는 전담 콜센터 직원인 '요코'와 정기적으로 통화를 한다. 통화를 하면서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에 대하여, 지금의 감정에 대하여 털어 놓는다. 미치에게 결국 요코를 만나고 싶다는 욕망이 생기는데, 요코도 회사 몰래 미치를 만나기로 한다.
같이 볼링을 치는 순간들, 크림소다의 맛, 친구들과 모여 앉아 사과를 깎아 먹는 것, 해가 지는 노을이나 비가 오는 풍경. 그런 사소한 것들이 사람을 살게 만든다. <플랜75>에서는 일상적인 풍경들을 천천히 카메라에 담는다. 미치가 빨래를 걷고, 친구의 집에 놀러 가고, 삼촌이 조카에게 요리를 해 주고, 조카가 삼촌을 모시고 짧은 여행을 떠나는, 어쩌면 지극히도 평범한 일상의 풍경.
플랜75에 참가하는 노인들에게는 지원금이 지급되는데, 초반의 히로무는 그들에게 그 돈으로 여행이라도 다녀 오라고 권한다. 그러나 삼촌과 함께 여행을 하면서 히로무의 감정이 서서히 변한다. 미치를 만난 이후 요코의 감정도 요동친다. 그들이 낡으면 폐기되는 물건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기가 막히도록 당연한 사실을 깨닫기 때문이다.
미치가 플랜75에 사인한 것은 자발적 선택일까, 강요된 선택일까. 바꿔 말해 죽기로 선택했을까, 죽으라고 강요받았을까. 미치는 죽고 싶지 않았다. 옆 침대에서 약물을 투입받으며 죽어가는 남자를 보며 두려워했다.
인간에게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본능이 있다고 한다. 그럼에도 죽어야 할 만큼 삶이 더 두렵다면,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나에게 안락사를 선택하라고 하면 나는 할 수 있을까. 당연히 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것들, 예컨대 영원히 맑은 하늘을 서서히 붉게 물들이는 일몰을 볼 수 없다는 것,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영원히 못 듣는다는 것. 그런 사소한 것들이 마음에 걸린다. 하루만 더, 한 번만 더, 이런 미련이 질질 샐 것만 같다.
그런데 또 늙을 만큼 늙었고, 하루하루 살아가는 노인이 되었을 때 나에게 곱게 죽을 기회가 생긴다면 그 기회를 놓칠까 싶기도 하다.
영화 <미 비포 유>를 함께 보는 것도 좋겠다. 설정도 분위기도 완전히 다르지만 비슷한 주제를 이야기한다. <미 비포 유>에서 촉망받았던 젊은 사업가 윌에 대한 마음과, <플랜75>의 미치에 대한 마음이 완전히 달랐다. 어이없게도 나는 무엇을 응원했나 싶다. 내가 좀 쓰레기 같다는 생각을, 아주 잠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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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랜75(Plan 75)
감독: 하야카와 치에
출연: 바이쇼 치에코, 이소무라 하야토
러닝타임: 113분
개봉: 2024. 02.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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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랩에서 시사회에 초대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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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극과 안톤쉬거의 동전
예술은 꾸준히 변화해 왔다고 생각한다. 미술, 시, 소설, 건축, 조각 등 옛 과거부터 존재했던 예술들이 꾸준히 발전하고 시대에 맞게 변화하며 현대적인 예술들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가장 복합된 예술은 바로 영화라고 생각한다. 시각적인 미를 부여할 수도, 청각적인 미를 부여할 수도 있다. 극문학을 좀더 현실성있게 실감나게 만들 수도 있고, 대사 하나하나만으로도 인간의 감정을 표현 할 수 있다. 가장 복합적으로 감독이 의도함에 따라 많은 것들을 시사하고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영화라고 생각한다.
그림, 시, 극문학, 영화 등의 형태는 단지 예술을 표현하는 수단이라고 생각한다. 수단이 변한다고 해서 시대를 거슬러 일맥상통하는 '이야기'가 있다고 생각한다. 예술 속의 '이야기'는 그 예술이 만들어진 시대를 반영하고 그 시대의 흐름을 끌고 간다. 가장 강력한 형태의 이야기는 바로 '비극'이라고 생각한다. 비극은 대부분의 시대에 존재해 왔다. 위에서 말했듯이 시대를 거슬러 일맥상통하는 가장 강력한 이야기가 비극이라는 뜻이다. 디테일은 조금씩 다를지 몰라도 시대의 아픔과 불안함을 표현하는 방식이 비극이라고 생각한다.
수 많은 비극들이 뛰어난 평가를 받아왔다. 나는 그 중 '멕베스'를 가장 선호한다. 가장 고전적이고 통상적인 요소들을 가지면서도 인간의 심리들을 여러 캐릭터들이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에 가장 이상적인 비극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한다. 현대로 와서 가장 최근의 작품들 중 최고의 비극은 이제부터 이야기 할 코엔형제의 2007년도 작품,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라고 생각한다.
영화의 줄거리는 생각보다 단순하다.연쇄살인마 안톤 쉬거(하비에르 바르뎀)과 우연히 마약상들의 돈가방을 발견한 사냥꾼 르웰린 모스(조쉬 브롤린)의 돈가방을 향한 추격전과 그 흔적을 쫓으며 사건을 조사하는 보안관 에드 톰 벨(토미 리 존스)의 액션 스릴러 및 추격극 정도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단순한 상업적 목적의 추격극이 아니라는 것을 이 영화의 제목에서부터 그리고 영화의 첫 나레이션과 살해 장면에서 주는 압박감에서 부터 느낄 수 있다. 나는 이 영화를 사냥감과 사냥꾼의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안톤 쉬거는 동기없는 살인마이다. 그는 소 도축기와 비슷한 작동을 하는 공기총을 들고 자신만의 규칙에 맞춰서 자신의 길 앞에 놓인 사람들을 하나하나 살해해 나아간다. 그의 사냥감은 무작위로 자신의 앞에 놓이게 되고 그는 '동전 던지기'라는 자신만의 규칙 속에서 하나하나 사냥해 나아간다. 그렇기 때문에 안톤 쉬거 본인 또한 자신이 누구를 죽이게 될지 모르는 혼돈 속에서 산다. 반면, 르웰린 모스는 전통적인 사냥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수 많은 무리의 가젤 중 자신이 고른 한 마리만을 선택해서 사냥하고 그 사냥감을 놓쳤을 때도 피의 흔적을 따라서 끝까지 추적한다. 그는 영화의 초반 자신이 쫓던 사냥감을 따라가다가 마약상들의 전투 흔적을 보고 거기서 돈가방을 찾게 된뒤 한순간에 자신이 이제는 사냥감임을 직감했다. 르웰린은 과거 베트남 전쟁 참전 군인으로서의 경험들을 살려서 자신을 쫓는 누군가에게서 달아나기 위한 움직임들을 보인다. 그는 나름 변칙적이고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생각했지만 사실 쉬거에게 항상 추격을 당하고 있었다. 러닝 타임 두시간 동안 별것 없어보이지만 숨막히는 긴장감 속에서 고요한 추격전이 이어지고 우리는 충격적인 결말을 마주하게 된다.이 영화 최고의 장면을 뽑으라고 한다면 누구나 주유소에서의 쉬거와 한 노인의 대화와 동전던지기를 뽑을 것이다. 그 장면은 연출, 촬영 등등 정말 많은 부분에서 완벽하지만 가장 완벽한 부분은 대사라고 볼 수 있다. 단 한장면으로 안톤 쉬거가 어떠한 법칙에 따라서 행동하는 살인마인지를 소개해낸다. 그는 모든 것을 운에 맡긴다. 마치 영화 다크나이트 속의 투페이스가 던지는 동전과도 비슷하다. 운명 그 자체를 동전의 양면에 비유하면서도 전혀 예측할 수 없음을 강조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다크나이트 속의 투페이스의 동전등 다른 영화 속 동전던지기에서는 사실 결과를 어느정도 예측이 가능하다. 상황의 맥락을 통해 자신의 무엇이 걸린 동전 던지기인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톤 쉬거의 동전은 다르다. 영화를 보는 우리와 쉬거 본인은 무엇이 걸린 동전 던지기인지 알지만, 게임에 참가하는 타인은 그 동전이 무엇때문에 돌고 있는 것인지 자신 인생에 중요한 무엇이 걸린 건지 전혀 알 수 없다. 감독은 이런 무작위성의 동전이야말로 정말 인생과 같다는 것을 말한다. 종종 운명은 무심결에 찾아온다고들 한다. 하지만 자신의 운명이 결정된 순간까지도 우리는 운명이 찾아왔는지 인지 못할 때가 있다. 아마 극중의 주유소 캐셔는 나중에 현상수배전단지에 찍힌 쉬거의 얼굴을 보고 자신이 던진 동전던지기가 자신의 목숨을 걸고 한 동전 던지기 였으며, 자신은 운명적으로 목숨을 건졌음을 그제서야 깨달을 것이다. 운명은 불규칙적으로 찾아온다. 안톤 쉬거 본인 자체가 동전 던지기와 같은 사람일 수도 있다. 불규칙적으로 행동하고 예측이 불가능한 그렇기에 르웰린, 에드 등 과거의 예측 가능한 범위의 범죄만을 생각하고 그 시대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은 쉬거를 쫓을 수 없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영화를 보는 내내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라는 제목의 의미를 쉽게 알아차리기가 쉽지 많은 않다. 내가 보기에 이 영화에서 노인이란 실제로 나이들고 나약한 노인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과거의 영광에만 젖어 시대를 따라오지 못하는 이들을 모두 뜻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영화는 과거 텍사스의 광활한 벌판을 혼자서도 통제하던 회상에 젖은 보안관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첫 살인 장면또한 불규칙적이고 신세대적인 살인 동기를 지닌 쉬거를 자신이 통제 가능하다고 믿은 한 보안관의 죽음이었다. 영화 속에서 수많은 노인들은 나태하고 나약하게 비춰진다. 과거 드넓은 황야에서 말한마리 타고 다니면서 강도 혹은 도둑을 잡던 시대와는 많이 달라졌다. 그 시대에 위대한 보안관들덕에 얻은 평화에 안주한채 늙어버린 노인들은 심지어 현역 보안관인 에드마저도 상황을 쫓으며 사건을 재구성할 수는 있지만 앞서가지도 이해하지도 못하며 그저 신세대의 희생양이 될 뿐이었다. 실제 노인이 아니더라도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 저격총으로 가젤 사냥을 즐기는 퇴역군인 르웰린 또한 구시대적인 미국의 추종자일 뿐이기에 영화의 끝에 그런 결말을 맞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박제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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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오리지널 <콜> 리뷰
이창동 감독의 '버닝'으로 혜성처럼 등장하며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전종서 배우.
그 배우는 차기작으로 넷플릭스 오리지널의 <콜>에서
박신혜 배우와 두톱으로 영화를 이끌어가야하는 책임감 또한 맡게 됐다.
물론 세 번째 작품으로 할리우드 진출작인 <모나리자와 블러드 문>이 국내외 영화제에서 공개되었으나,
국내 11월 24일 개봉 예정인 <연애 빠진 로맨스>(감독 정가영)가 전종서 배우를 세 번째로 만나볼 수 있게 되는 공식적인 작품이 되지 않을까 싶다.
오랜만에 다시 <콜>을 다시 보게됐고, 그에 대한 리뷰를 작성하게 됐다.
* 영화의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주의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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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초반부 서연(박신혜)은 병실에 계신 엄마(김성령)와의 짧은 면회(아버지는 20년전에 돌아가시고, 엄마와의 관계를 좋지 않음이 짐작된다)를 뒤로하고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온다. 집 안에서 우연히 낡은 무선전화기를 발견하고,
정체 모를 사람으로부터 전화를 받게 된다.
발신인인 영숙(전종서)은 서연이 알아듣지 못할 소리를 하곤 하는데 ,
결국은 과거의 20년전에 살고 있는 영숙과 20년후 현재의 서연이 같은 집에 살고있음을 깨닫게된다.
처음은 여느 젊은 또래마냥 소소하게 얘기를 나누고, 일상을 보내며 우정을 쌓아가는 듯하다가.
서연의 아버지(박호산)이 20년전에 화재로 돌아간 사실을 알고, 영숙이 자신이 과거를 바꿈으로써 아버지를 살릴 수 있지 않겠냐며 제안을 한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서연은 다시 화목한 일상을 찾는 듯하나 되려 서연의 화목함은
서연과 영숙의 유대감을 깨뜨린 듯 하다.
(서연과 영숙은 그들의 불안이나 불행이 둘 사이를 결속해주는 유대감인듯 하다)
영숙 또한 자신의 미래를 알고 있는 서연에게 자신의 미래를 바꿀 수 있는 위험한 요청을 하게되고,
급기야 위협을 하기 시작한다.
영화 <콜>의 Point.
1. 단편(몸값)에서 영화적 인정을 받은 신예감독(이충현 감독)의 장편 데뷔작
2. 두 여성인 배우를 전면으로 내세운 스릴러.
(많은 스릴러 영화들은 흔히 가해자는 남성, 피해자는 여성으로 설정하지만)/
<콜>에서는 조연으로 등장하는 남자배우들조차 모두 죽는다
3. 영화적 설정이나 장치의 최소화
4. 서연과 영숙의 캐릭터. 특히 이제껏 국내영화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영숙의 캐릭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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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정의 오류가 몇몇 보이는 영화이지만, 스릴러 장르의 세대변화 같은 것을 느꼈다고나 할까(젊어진 것 같다)
또한 군더더기 없어 보이는 세련되고 스타일리쉬한 한 편의 스릴러 영화처럼 느껴진다.
씨네랩 에디터 Hez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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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쿵푸팬더는 퀴어 영화인가?
여전히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등장으로 평가되는 1편, 매력적이고 유머러스한 빌런이나 주연들 간 깊어진 친밀감에 정들었던 2편. 그러나 많은 시리즈물이 그러하듯 <쿵푸팬더> 역시 편수가 늘수록 초기 영광을 따라잡지 못하는 듯하다.
생각해보면 쿵푸팬더 시리즈의 전략은 언제나 간단하고 명확했다. 주인공만큼이나 매력적인 빌런들에게 주인공이 해내지 못하는 걸 죄다 맡겨버리는 식으로 균형을 맞추는 것.
주인공 포에게 극단적으로 발랄한 성장 서사를 부여해 기존의 성장형/먼치킨 히어로 영화들과 사뭇 다른 분위기를 냈지만, 그 부작용으로 무거운 원숙미가 극단적으로 부족해진다. 포는 입양아라는 사실도 생각 외로 잘 받아들이고 새로 찾은 친아빠와도 1초 만에 친해지는, 사실상 대디 이슈가 없어 더 드문 남성형 히어로다. 포를 대신해 타이렁과 솅 공작의 애증 어리고 가슴 아픈 개인사가 그 무게를 짊어진다. ‘기’를 운운하며 이야기를 포의 뿌리가 되는 팬더 마을과 영계까지 끌고 간 3편부터 약간 길을 잃은 느낌이긴 했지만 그나마 우그웨이 대사부의 숙적인 카이를 등장시켜 ‘사연 많은 빌런’의 명맥을 이어갔다.
그러니 4편의 가장 큰 문제는 빌런의 존재감이 너무나 약하다는 점이란 데에는 반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카멜레온의 속성을 차용한 디자인까지는 기존의 맹수들과 달랐던 2편의 우아한 솅 공작을 떠올리게 해 기대가 컸지만, 구멍이 많아도 너무 많은 카멜레온의 백그라운드 탓에 관객은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다.
카멜레온은 한미하고 천한 출신과 여자라는 점, 그리고 ‘작은 몸집’ 때문에 쿵푸 수련원들이 자신을 받아주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마스터 시푸와 오인방의 맨티스가 있는데 정말로 작은 몸집이 문제가 될 수 있는가? 타이그리스와 바이퍼가 있는데 (물론 성비는 또 당연하게 구색 맞추는 척만 했지만) 여성으로서 쿵푸에 도전하지 못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
게다가 그가 영계에서 불러낸 전작의 빌런들 중에는 분명 의미없이 소진된 캐릭터들이 있다. 일찍이 제 입으로 “쿵푸 실력으론 대적할 수 없다”는 걸 인정하고 부족한 화력을 메꾸기 위해 제국주의 시작점의 상징인 대포를 택했던 솅 공작이나, 포와의 마지막 싸움으로 말미암아 영혼_삭제_진짜삭제_휴지통에서삭제 된 줄 알았던 카이가 ‘빌런 쿵푸 마스터’로 재등장하는 건 의아함만을 남긴다.
‘동아시아계’ 감독을 기용해 시리즈 자체의 전제가 내포한 오리엔탈리즘의 한계를 극복하려던 노력도 무화되고, 포의 새로운 여정은 마치 바이킹처럼 배를 타고 먼 이국으로 나아가는 침범의 궤적을 따른다. 심지어 항구에서의 출항이 가능할 것인지 아닌지를 두고 쉽게 납득되지 않을 정도로 긴 러닝타임을 할애하는데, 이 이야기 구조는 전형적인 호메로스식 오디세이의 전통을 따른다(아가멤논은 딸 이피게네이아를, 오디세우스는 젊음 20년을 바치고서야 ‘출항’할 수 있었다).
그간 할리우드에서 뒤늦게 주목받기 시작한 아시안 배우들이 대거 기용되어 주연 자리에 앉긴 했지만, 결국 4편의 전반적인 얼개는 앵글로 아메리칸 관객들에게 가장 익숙한 설화로 ‘회귀’한 것이다.
아쉽고 부족한 개연성을 채워주는 건 이 영화를 퀴어 애니메이션 영화로 읽어볼 수 있다는 상상이다. 어쩌면 1편부터 차근차근 전개되어 온 퀴어 코드는 4편에서 포의 두 아버지들 - 양부 국수 장인 거위 핑과 살찐 판다 친부 리 아저씨 -의 기이한 동행으로써 드디어 만개하는데, 이들의 ‘함께 함’에 대한 포의 자연스러운 수용은 어쩐지 게이 부부가 사랑으로 키운 아들의 반응을 연상시킨다.
생각해보면 쿵푸팬더엔 처음부터 애들 보는 영웅 애니메이션과 사뭇 다른 무언가가 존재했다. 시작점에선 나 역시 자각 없는 초등 꼬꼬마였기에 ‘여전사’ 타이그리스에 기이할 정도로 끌리고 동일시하려는 나 자신을 좀 민망하게 생각했던 것도 같지만. 16년 지나 추억의 애니메이션에서 ‘동족의 흔적‘을 비로소 발견했다고 느낀 퀴어 당사자로서 기쁘게 읽어낸 네 가지 증거들로 이 시리즈의 퀴어함을 논증해보고 싶다.
1. 쿵푸팬더에는 명시적 러브라인이 없다.
아픔을 딛고 성장해 마을, 국가, 세계의 영웅으로 차츰 몸집을 불려나가는 영웅의 서사엔 언제나 그의 애인(들)이 있다. 순애보거나 아니거나의 차이만 존재할 뿐. 에반게리온에도 이누야샤에도 배트맨에도 있는 사근사근하지만 강단 있는 여성 애인과 결정적일 때 터프한 남성 영웅의 조합이 <쿵푸팬더>엔 없다. 오히려 시종일관 터프한 타이그리스와 순둥하고 멍청한 포의 역전적 조합이 있긴 하지만, 2편에서 크레인의 입을 떡 벌어지게 한 그 둘의 포옹을 ‘사랑의 시작점’으로 해석하기엔 무리가 있다. 이 포옹은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다고 오해되던 타이그리스가 ‘도무지 진지할 수 없’는 조증 같던 포의 성장과 우정을 그리기 위한 장치이기 때문이다. 포의 슬픔과 고뇌를 타이그리스가 진심을 담아 위로하며 서로의 영혼을 제대로 응시하기 시작한 장면이지, 안젤리나 졸리와 잭 블랙이 탈 쓰고 연기하는 동물들이 서로의 페로몬을 감지한 장면이 아니다.
게다가 ‘접촉’을 ‘독점적 연애’의 시작점으로 보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인 헤테로-모노아모리-이성애적 세계관이 <쿵푸팬더>의 길거리엔 부재한다. 아이를 데리고 다니는 부부는 가끔 목격되지만 그들 사이 손잡거나 입 맞추는 애정행각이 단 한 번도 없고, 젊은/미혼의 커플로 보이는 이들이 없고, 실수로 서로를 터치했다가 얼굴 붉히며 가까워지는 클리셰적 썸의 단계가 없단 뜻이다. 아주 친밀해 보이는 동종의 동물 주민들의 젠더는 대부분 판별되지 않는다. 일단 크기부터 그들이 어른인지 아이인지 구분할 수 없고 서넛 이상의 친구 혹은 파트너들이 군집을 이뤄 몰려다니는 경우도 많다. 이처럼 여러 ‘분류’를 위한 경계는 의도적으로 흐려져있다. 반대로 모든 성애적 관계가 너무 표백된 탓에 이 풍경을 거의 무성적/무성애적 마을이라고 멋대로 희망회로 돌려 해석해도 좋을 지경이다.
헤테로 이성애 외의 모든 것을 비가시화시키는 미국발 애니메이션의 전통에 빗대어보자면 1편부터 꾸준히 모든 성애를 비가시화시켜온 쿵푸팬더의 때이른 시도는 가히 혁명적이다. 2024년에 이르자 4편까지 나온 장수 시리즈는 도리어 ‘가장 PC한’ 그림을 ‘미리’ 준비해둔 선구안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 것만 같다.
2. ‘커플’의 부재에 비해, ‘아빠들’ 사이의 퀴어한 동거/동행은 점점 더 도드라진다.
거위 핑과 팬더 리의 관계는 3편 막바지의 화해를 이룰 때부터 조금 묘했고, 4편 등장부터 본격적으로 묘해지기 시작한다. 먼저 포는 양부와 친부를 통틀어 ’dads’라고 애정을 함뿍 담아 부르는데, 영미권 영상 콘텐츠에 익숙한 이라면 이 복수형 호칭이 그간 지칭해온 시트콤 속 나이 든 게이 커플을 즉각 세 쌍 이상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한번 흠칫하고 이들이 영위하는 일상이 좀 과하게 노부부 바이브라는 데에서 두 번 흠칫하게 된다. 핑은 여느 때처럼 국수를 만들어 팔고, 리는 이걸 조금 돕긴 돕는데 철없고 느려 큰 도움은 되지 못하는 듯하고. 핑은 리를 면박주고 불안해하며 포를 걱정하고, 리는 핑의 호들갑을 유들유들 달래며 별일 없을 거라 하고. 당연히 스킨십은 없지만, 왜인지 길거리의 토끼 혹은 돼지 커플이 훨씬 더 담백해 보일 정도로 핑과 리 사이 거리감이 박살나있다.
슬슬 대놓고 장르 전환을 시도하겠다는 건가 아니면 내가 이제 너무 썩어버린 동성애꾼인가 눈을 의심케 하는 평화로운 국수 가게 시퀀스가 지나고 나면 ‘아빠들’은 점점 더 의뭉스러운 결정을 내린다. 바로 다 큰 아들을 여전히 공동 걱정, 공동 양육, 공동 구원하기 위해 멀고 위험한 여정을 떠난다는 것. 길 위에서 그들은 서로를 구해주고 투닥대며 오롯이 둘만의 시간을 쌓아간다. 포에 대한 애정으로 결속된 대안 가족이지만 이제는 포 없이도 포를 생각하며 즐거운 2인 관계를 유지하는 아빠들. 항구 위 벼랑의 술집에서도, 주니퍼 랜드의 위험천만한 성벽 위에서도 아빠들은 아들만큼이나 서로를 챙기는데, 역시 최소 50년을 함께 한 파트너 같은 신뢰와 과감함으로 빚은 액션이 반복된다.
포와 젠만큼이나 핑과 리의 버디무비가 이번 영화의 주요한 플롯이고, 두 아빠에게 주어진 스포트라이트와 할애된 시간이 주인공 못지않다는 걸 생각하면, 혹시 이 둘의 (변화해가는) 관계성에 관객이 그만큼 주목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닐지?! ㅎㅎ(제발요)
3. 영화의 사제 관계는 언제나 사제 이상의 내밀함과 애틋함을 내포한다.
누구나 1편의 최고 명장면으로 꼽을 만한, 타이렁과 시푸의 벼락으로 시작해 마지막 일격으로 끝나는 비극적 재회. 그 시퀀스에서 타이렁은 몇십 년간 지하 감옥에 묶여 저주했다던 스승을 때리며 거의 눈으로 핥고 있고, 시푸는 갓난아기부터 먹이고 키운 ‘그 애’를 힘껏 사랑했던(하는) 기억을 떨칠 수 없어 치명타를 모조리 맞아주며 애달파한다. 쓰러진 시푸가 후회를 말하자 타이렁은 아주 크게 흔들리고, 바로 다음 순간 타자의 개입이 없었다면 시푸를 거의 용서할 뻔한다.
유서 깊은 중국 무협지들이 웬만한 BL 뺨을 후드려갈기는 남남 간의 우정 아닌 사랑 같은 우정을 얼마나 고전적으로 묘사했는지, 그 명맥을 이은 근현대 작가들 역시 예술적으로 섹슈얼하고 질척이는 동성의 나이차 많은 사제 관계를 놓지 않고 무협BL이란 혼종까지 만들어낸다. 그리스에 사제-스폰서-유사 부자 관계를 맺는 미소년과 중년 남성이 있었다면 중국에는 무협 게이가 있었던 셈인데, 쿵푸팬더의 요상하게 질척이는 사제/유사 부모 관계는 이 두 갈래 문화의 영향을 모두 받았기 때문일 거라고 혼자만의 사교적 해석을 해본다.
카멜레온과 젠, 젠과 한의 삼각관계 역시 만만치 않다. 스토리텔러의 역량이나 시간 배분에 조금 부족함이 있었을 뿐 두 스승 역시 ‘악한 짓을 영원히 같이 해줄 줄 알았던 너’에 대한 집착을 놓지 못하고 제자 젠에게 못마땅함을 표한다. 젠은 둘 다에게 죄책감을 포함한 복잡시러운 감정을 품고 있고 그래서 자주 머뭇거린다. 첫 편에서 시푸와 타이렁이 보여준 아주 끈적하고 집착적인 애증이 4편에선 카멜레온과 젠과 한을 통해 재연된 것이다.
특히 카멜레온과 젠을 통해, 몇천 년 간 남성 중심적이었던 무술 세계와 그에 대한 문헌/미디어 묘사에서 한 발자국 나아가, 또한 남남 간 호모섹슈얼한 우정의 배타성과 상투성에서 벗어나, 여성과 여성의 상호 협력/배신/질시와 애착을 다루려 했다는 점을 조금 더 높이 쳐주고 싶다. 16년 된 시리즈가 업데이트를 멈추지 않고 (남의 나라 거 죄다 베껴왔으니 응당 그래야겠지만) 최선을 다해 올바른 트렌디함까지 챙긴 모범 사례로 볼 수 있겠다.
4. 한이라는 젠더뉴트럴한 캐릭터가 등장한다.
<쿵푸팬더>의 주연급 동물들은 대체로 성별이 잘 구분되는 외모/목소리 지표를 가졌지만, 젠의 길거리 스승이자 좀도둑 소굴의 왕인 아르마딜로 한은 도통 성별을 패싱할 수 없는 외관이다. 때문에 목소리나 젠과 맺는 관계를 보고 여성 인물로 어림짐작했다. 이 캐릭터의 성우가 키호이콴이라는 사실을 읽기 전까지는… 영화 보는 동안엔 아주 잠깐의 혼란 끝에 그를 중년 여성으로 추측하곤 카멜레온-젠 다음 하나의 지렛대를 더 끼워 넣어 레즈비언 삼각관계;로 냠냠쩝쩝 해독할 결심에 신나 있었는데 이럴 수가… 하지만 결론적으론 키호이콴의 높고 짹짹대는 목소리가 한이라는 캐릭터의, 이 영화의 (조금은 허술한) 텍스트를 풍부히 하는 데에 무척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시리즈를 통틀어 가장 수수께끼 같은 젠더/섹슈얼리티의 소유자인 한은 1편부터 꾸준히 거슬렸던 몇몇 여성 캐릭터의 디자인에 대한 아쉬움을 어느 정도 상쇄해준다. 바이퍼의 속눈썹과 머리 꽃 장식, 케이트 허드슨이 연기한 3편 팬더 마을의 메이메이의 전형적인 꾸밈이나 ‘여성스러운’ 모션들, 이번 4편의 젠이 보여준 - 어느 정도 <주토피아>의 닉&주디를 반분해 섞은 듯한, 그러나 - 허리만은 잘록하다거나 역시 속눈썹은 길다든가 하는 전형적인 여성 신체 이미지의 재현. 더 나아간다면 루시 리우와 안젤리나 졸리라는 할리우드의 대표적 아이콘들이 그간 고수해온/기대받아온 이미지(그들이 이 시리즈에 0순위로 캐스팅된 이유기도 한)를 조심스럽게 파쇄하는 가능성으로 이 젠더플루이드적 존재를 받아들일 수도 있겠다. 한의 종잡을 수 없는 매력적인 목소리는 아콰피나가 녹음한 젠의 허스키하고 낮은 목소리와 퍽 잘 어울리기도 한다.
물론 <쿵푸팬더> 시리즈가 대놓고 ‘퀴어를 긍정’한다거나 정치적으로 정교하고 선명한 의도를 가진 영화는 아니다. 다만 이 시리즈는 (마치 일틱이란 ‘칭찬’ 들으면 어쩔 도리 없이 안도하는 퀴어들처럼) 은은하게 또 자연스럽게, 퀴어를 퀴어같지 않게, 그냥 섞여든 존재로 보이게 만드는 데에 열심이라고 느꼈다. 정신 산만하게 만드는 말재주와 푸짐하게 스크린 반 이상을 채우는 비주얼이 장점인 포가 제공하는 화려한 액션에 넋놓다 보면, 달리는 포 옆에서 손잡고 걸어가다 깜짝 놀라는 선량한 돼지 주민 1&2가 둘 다 남자로 패싱되는 차림새든 말든, 내가 얼마나 잘해줬는데 네가 날 버렸녜 어쨌녜 서로 지지고 볶고 울고 짜는 젠더리스한 조연들이 연인보다 훨씬 점성 높은 애착을 주고받든 말든 별 상관이 없어지는 것이다.
그건 정말로 별일이 아니라는 아주 은근한 암시. 이 시리즈의 역할은 어쩌면 딱 거기까지인 것 같다. ‘쿵푸’와 ‘기’라는 중국사적으로도 소중하고 두께가 엄청나기도 한 문화적 정신적 유산을 그냥 할리우드식 ‘귀여운’ B급 성장형 히어로 클리셰 액션 뽕빨물로 한데 섞어버린 것처럼, 퀴어 역시 적절한 농도의 - 우정 그리고 (공동) 양육과 거의 구분할 수 없는 - 당연한 사랑과 애착으로 자리 잡고 ‘일반’과 함께 한데 섞여 있다.
혹은, 머나먼 이국에서의 문제/악당을 처리하고 ‘내 영토’로 돌아와 새로 찾은 완전한 이방인인 후계자에게 권좌를 물려준다는 4편의 작법을 고려한다면, 이 이야기의 퀴어함은 20세기 반역적 퀴어함 혹은 21세기 힙하고 소비적인 퀴어함보다는 그리스 신화 시기의 남성애에 여전히 더 가까울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이건 내게는 다같이 끓여먹는 은은한 퀴어 단추수프(특: 뭐가 들어갔는지 넣은 사람도 모름)... 은은하게 주입하는 퀴어 조기교육처럼 느껴지는 애니메이션이었다. 그래서 허술하더라도 곱씹을수록 더 귀엽게 생각되는 면이 있었다. 쿵푸팬더 5는 제작이 불분명하다고 하고 아직까지 공식적으로나 희망적으로나 결정된 건 아무것도 없다고들 한다. 오래된 시리즈의 오래된 팬으로서 이제 여기서 그만해도 좋겠다는 간절한 바람을 - 실은 3편부터 - 계속 품고 있기는 하지만. 만약에 이 모든 추측, 자기최면, 설득, 착즙이 단 5%라도 사실과 맞닿아있다면, 이 말썽쟁이 시리즈가 덜그럭덜그럭 순조롭게 진행돼서 속편을 가져와줬으면 좋겠기도 하다. 유소년기 퀴어에게 혁신이었고 어쩌면 자각의 출발점 중 하나였던 영화가 생명력을 쥐어짜내서 나아가는 ‘진짜 끝’을 좀 더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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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잔인한 인력과 다정한 척력
어렸을 때는 엄마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다.
엄마의 희생, 헌신, 모성애... 같은 단어들은 문자 그대로 단어로만 존재했다. 수업 시간에 문학 작품의 주제 의식과 소재가 무엇이라도 딱 못박아 배우듯, 그런 단어들을 나는 교과서적으로 배웠다. 이유는 단 하나다. 내게는 너무 당연했기 때문이다. 산소를 의식하면서 숨 쉬는 사람은 없듯이, 엄마가 주는 사랑에 둘러싸인 세상에서만 살아본 내게 '모성애'라는 말은 마치 산소의 원소 기호 같았다.
엄마 자신이 태어날 때부터 엄마였던 건 아니라는 걸, 생각해본 적이 없다. 내가 태어날 때부터 엄마는 엄마였으니까. 엄마, 하고 부를 때 언제나 손 닿는 거리에 있는 존재로 살아간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엄마는 늘 응, 하고 다정하게 대답했으니까.
엄마가 된다는 것에 대해서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
아니 막연하게 그려본 것들은 있다. 그러나 출산과 육아가 준다고 하는 기쁨도 고통도 내겐 상상 너머의 영역에만 존재한다. 어림잡아 보는 걸로는 근처에도 다다를 수 없는 깊은 감정일 거라 생각한다. 기쁨 쪽이든, 고통 쪽이든. 다만 기쁨 쪽이 더 깊고 거대하게 사람을 채운다면, 고통 쪽은 너무 사소해서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운 것들이 바늘처럼 콕콕 찌를 거라, 빈도와 방식의 차이는 있을 거라고 상상해볼 따름이다.
<로스트 도터>는 '엄마가 된다는 것'을 상상만 해본 사람들이 갈 수 있는 가장 먼 데까지, 실제의 언저리까지 사람을 데려간다. 성녀 같은 어머니도, 폭군 같은 어머니도 아닌, 다면적이고 보편적인 감정을 가진 인간들이 어머니가 된다는 사실을, 사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자명한 사실을 깨닫게 한다.
<로스트 도터>는 <잃어버린 사랑>이라는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다. 원작 소설과 이야기의 얼개는 거의 비슷하나, 얼핏 작고 사소해 보이는 몇 가지 차이가 있다. 그리고 그 차이들이, 원작 소설과는 다른 방향성으로 이 영화를 데려간다.
이야기의 주축은 40대 여성인 레다. 문학을 가르치는 대학 교수이자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해변가에는 휴가 차 왔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휴가 차 왔지만, 제법 지역 유지에 속하는 가족 전체가 우르르 몰려와서 레다와는 다소 다른 휴가를 보내는 사람들 사이, 이야기의 다른 주축 '니나'가 있다. 니나는 여섯 살쯤 된 작은 딸 엘레나와, 엘레나가 목숨처럼 끼고 다니는 인형까지 함께, 부산스럽고 자못 당당한 가족들과 약간의 거리를 두고 조용하게 있다. 마치 딸과 자신만이 이 세계에 존재하는 듯이 정성스럽게 딸을 돌보면서. 두 사람은 이따금 눈이 마주친다.
그러면서 레다는 이따금 자신의 기억을 돌아보게 된다. 두 딸을 기르면서 육아에 지쳤던 시간을. 끊임없이 약해지기도 하고, 작은 아이에게 미친 듯이 분노하기도 하고, 옳지 않음을 알면서도 감정이 폭발하기도 하고, 정말 괜찮은 걸까 의구심을 품기도 하고.
그런 레다를 니나도 바라본다. 이미 아이들을 다 키우고, 자기 일에서도 뚜렷한 성취를 했고, 지적이고 우아한 모습으로 해변에서 혼자만의 휴가를 즐기고 있는 레다를 보며, 니나는 애쓰고 버티다가 흘러나온 진심을 레다 앞에서는 털어놓는다. 지금 무어라 말로 표현하기도 어려운 이 마음이, 지나가기는 하는 것인지 궁금해 하며.
얼핏 보면 이미 육아를 마친 여성과, 육아의 한복판에 놓인 여성의 다정한 대화 같지만. 육아에 지친 얼굴, 도망칠 곳을 찾는 마음, 그런 것들이 젊은 시절의 레다와 니나 사이의 공통점으로 작용할 수도 있겠지만. 두 사람의 대화는 두 사람은 자신이 가진 것에 대해 훈훈하게 풀어놓는 대화가 아닌, 자신이 잃어버린lost 것에 대한 대화가 된다. 레다는 어느 날 갑자기 아이들을 두고 떠났던 날의 이야기를, 그래서 자신을 찾은 듯한 느낌에 행복했던 이야기를, 그러나 아이들 곁으로 돌아가게 된 이야기를 한다.
니나는 레다가 아이들 곁으로 돌아갔다는 결론에서 안심할 지푸라기를 계속 잡으려 하지만, 죽고 못 사는 아름다운 사랑만이 모성의 얼굴이 아니라는 것을, 레다는 이미 알고 있다.
이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은 그 모성의 다양한 얼굴을 너무나도 예리하게 구현해 냈다는 데 있을 것이다. 제시 버클리가 연기하는 젊은 레다가 너무 지쳐서 영혼마저 없는 상태의 엄마를 연기하는 힘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끊임없이 종알거리면서 말하고 놀고 움직이는 아이들의 존재는 육아 경험이 없는 사람들까지 그 공기를 맡을 수 있을 만큼 선명하게 전달된다. 아이들은 단순하게 "엄마의 손길을 기다리는 천사"가 아니라는 것. 육아는 단순히 아이들과 "노는" 게 아니라는 걸. 육아 속에서 왜 사람의 에너지가 그토록 빠져나가는지 누구라도 느낄 수 있을 만큼 명확하게 펼쳐낸다.
그 안에는 아이를 사랑하면서, 아이와 자신만의 언어를 구현하면서, 다정한 시간을 보내고 따뜻한 눈빛을 주고받는 엄마의 모습도 있지만. 갑자기 아이가 머리카락을 삐죽 당길 때 자기도 모르게 비명이 나와 버리는 순간도 있다. 아꼈던 인형을 아이에게 주었는데 아이가 조금도 소중히 여기지 않으면서 자기 거라고는 주장할 때, 그 작은 아이가 너무나 못됐다는 생각이 솟아오르고 순간적인 분노가 폭발해 인형을 집어던지게 되는 모습도 있다.
이 영화에서 드러내는 날것의 모성은, 호수처럼 잔잔하게 반짝이는 물보다 파도에 가깝다. 다정하기엔 너무 잔인한 인력과, 잔인하기엔 너무 다정한 척력이 동시에 작용하는 공간. 모순적인 감정들이 수도 없이 오가는 해변가의 파도 같은 것. 그 파도에 몸을 담그다 이따금 서로를 바라보는 레다와 니나 같은 존재들이 엄마라는 이름으로 세상 곳곳에 존재한다.
그러나 현실에서 모성은 모 아니면 도 식의 거친 프레임에 갇힌다. 피붙이에 대해 한없이 끌리는 인력 혹은 '모체를 뜯어먹는 악마'에 대한 척력. 그 안에서 여성은 숭배의 대상 혹은 혐오의 대상 자리에 쉽사리 내쳐진다. 사실 파도의 같은 감정들이, 다양한 인력과 척력에 이리저리 밀리고 있는데. 일방향의 말로 정리할 수 없는 감정들인데. 한없이 사랑하지만, 함께 있을 때 더없이 행복하지만, 이따금 모든 걸 벗어던지고 도망치고 싶다는 말도 거짓은 아닌데.
수많은 이들이 느끼는 감정임에도, 거친 프레임에 갇혀 있는 세밀한 감정들을 터놓고 이야기할 광장 하나가 없다. 니나는 모든 것을 벗어던지고 도망치고 싶다는 말을 풀어놓는 것조차 어렵사리 해내고, 레다는 도망쳤지만 아주 도망치지 못해 그 감정의 편린을 여전히 안고 있다. 이들은 여전히 광장을 찾지 못하고, 인력과 척력에 이리저리 휘몰린다.
그러나 영화는 광장으로 가는 문을 열어둔다. 영화의 첫 장면으로 다시 이어지는 마지막 장면은, 마지막 대사는, 원작 소설에서 가장 크게 각색된 부분이 아닐까 싶다. 올리비아 콜먼의 놀라운 표정과 파도 소리와 함께 쏟아지는 한 마디 말을 통해, 이 영화는 규정에 갇히지 않고 대화할 수 있는 공간을 향한다.
그곳에서 파도 소리가 편안하게 들려온다. 이 잔인한 인력과 다정한 척력 속에서, 새로운 소통의 소리가 들려온다.
*온라인 무비 매거진 씨네랩을 통해 시사회에 초대받아 감상한 후 작성하였습니다.
*<로스트 도터>는 7월 12일부터 극장에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다소 뒤쪽에서 감상하시길 추천 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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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스로 조커가 된 것일까? 사회가 만든 것일까?
사실 다크나이크를 보지 않았기에 조커라는 세계관에 대한 이해가 없어서 영화 <조커>를 보는 것이 많이 망설였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조커라는 캐릭터를 이해하기에 무리가 없었던 한 편의 다큐와 같았던 작품이었다.
영화 <조커> 시놉시스
“내 인생이 비극인줄 알았는데, 코미디였어”
이제껏 본 적 없는 진짜 ‘조커’를 만나라!고담시의 광대 아서 플렉은 코미디언을 꿈꾸는 남자. 하지만 모두가 미쳐가는 코미디 같은 세상에서 맨 정신으로는 그가 설 자리가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해당 내용은 네이버영화를 참고했습니다.
이 이후로는 영화 <조커>에 대한 스포일러가 존재합니다 :)
스펙타클보다는 한 편의 다큐같았던 작품
매력적인 악당 조커. 악당을 주인공으로 한 작품이어서 솔직히 굉장히 스펙타클이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한 편의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한 느낌에 가까웠다. 아서 플렉이라는 인물이 어째서 사회적인 제도라는 틀 속에서 악당으로 분류될 수밖에 없었는지를 세밀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그래서 조커라는 인물 자체에 궁금증이 많았던 사람들이라면 분명 좋아할 작품이지 않을까 싶다.
인물의 감정을 따라가다보니 집중이 잘 됐던 것은 사실이나 단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은 설명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일일이 다 설명을 해주다보니 굳이..? 이런 감정이 불쑥불쑥 튀어나오곤 했다. 특히, 소피와의 관계가 플렉의 환상이었다는 점은 소피의 표정과 태도를 통해서도 바로 알 수 있었음에도 구디 화면에서 소피를 지우는 방식으로 아주 친절하게 설명을 해줘서 나름 반전이었는데 그 효과가 상쇄하는 느낌이어서 안타까웠다.
결국 개인의 탓인가?
아서 플렉이 조커가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 영화는 전반적으로 두 가지의 시각을 보여주고 있다. 개인의 문제 혹은 사회 구조의 문제 둘 중 무엇인가?를 계속 생각하면서 영화를 봤던 것 같다. 물론 이렇게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는 것은 좋지 않지만 그 경계를 계속 생각하게 만들엇던 작품이었다.
영화는 고담시의 상황이 굉장히 좋지 않다는 것을 뉴스로 보여주며 시작한다. 그리고 광대가 되어 일을 하지만 불량배드이 판치는 고담시에서 아서 플렉은 그들에게 된통 당하고 만다. 이렇듯 초반에는 사회구조적으로 문제가 많은 고담시를 조명하면서 구조의 영향에 무게를 실어주는 듯했다. 그러나 영화가 진행이 될수록 아서 플렉이 앓고 있는 정신질환과 어머니로부터 학대를 받았던 어린시절을 보여주면서 고담시의 구조적 문제는 배경으로 밀려나고 초점을 개인의 트라우마로 옮겨간다. 그렇게 개인의 트라우마로 조커가 된 아서 플렉이 시위가 판치는 고담시에서 영웅으로 추앙되면서 다시 사회 구조 속으로 편입된다.
뮤지컬 넘버의 차용
조커를 보다가 눈이 한 순간에 커졌던 장면은 지하철에서 3명의 술주정뱅이들이 아서 플렉을 향해 ‘어릿광대를 보내주오’ 뮤지컬 넘버를 부르는 장면이었다. ‘어릿광대를 보내주오’는 사실 내요이 남을 조롱하고자 하는 내용이 아니다. 뮤지컬 <Little night music>에서 여주인공이 20년 전 배우로서의 경력을 위해 헤어졌던 남자 주인공과 재회하면서 다시 사랑을 이어가고 싶지만 벽에 부딪히면서 부르는 넘버다. 자신을 조롱하면서도 상대방에게 의지하고 싶은 감정이 낭낭한 이 넘버가 영화 조커에서 남을 조롱할 때 가장 먼저 쓰인다.
이 역설에 귀가 트였고, 아서 플렉이 조커 분장을 한 채 그들의 노래를 따라부를 때는 뮤지컬 속 여자주인공처럼 자조적으로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뮤지컬에서는 현시에 없는 어릿광대라는 존재가 이 문제를 해결해주길 바라지만 영화 조커에서는 아서 플렉이 실제 광대가 되면서 스스로 그 문제를 해결할 주체가 된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영화 <조커>는 사회와 개인의 관계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할 수 있게끔 만들었던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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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컴패니언> 2차 예고편
붉은 피로 가득한 러브 스토리❤️ 피 튀기는 통제 불가 로맨스가 시작된다! #컴패니언 2차 예고편 공개🩸 #COMPANION #3월19일극장대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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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싱크홀> 1차 예고편
사.상.초.유! 도심 속 초대형 재난 발생!
서울 입성과 함께 내 집 마련의 꿈을 이룬 가장 ‘동원(김성균)’
이사 첫날부터 프로 참견러 ‘만수’(차승원)와 사사건건 부딪힌다.
‘동원’은 자가취득을 기념하며 직장 동료들을 집들이에 초대하지만
행복한 단꿈도 잠시, 순식간에 빌라 전체가 땅 속으로 떨어지고 만다.
마주치기만 하면 투닥거리는 빌라 주민 ‘만수’와 ‘동원’
‘동원’의 집들이에 왔던 ‘김대리’(이광수)와 인턴사원 ‘은주’(김혜준)까지!
지하 500m 싱크홀 속으로 떨어진 이들은 과연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을까?
“한 500m 정도는 떨어진 것 같아”
“우리… 나갈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