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BBITGUMI2022-03-13 22:21:14
‘결과’보다 ‘과정’을 사랑한 사람들의 이야기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2022)
우리는 성장하면서 계속 특정한 목표를 가지고 있다.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고 또 도전하면서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 무척 애쓴다. 청소년 시절에 가장 중요한 목표는 바로 시험이다. 중간고사와 기말고사 그리고 궁극적으로 가장 큰 목표인 수학능력시험까지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좋은 시험 결과를 얻기 위해 무던히 애쓴다. 우리 교육 시스템 안에서 학교에 다니는 가장 큰 이유는 많은 것을 배우는 것에 있겠지만 결국에는 좋은 시험 결과를 얻기 위한 것이 가장 클 것이다. 그렇게 다양한 과목을 공부하고 또 시험을 보면서 누군가는 그 결과에 만족하고 또 한걸음 나아가겠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실망스러운 결과를 받아 든다.
삶의 많은 것이 그 시험의 결과에 의해 좌우된다. 현실이 그렇다. 수능 시험의 결과에 따라갈 수 있는 학교가 정해지고, 학교가 정해지만 그곳에서 다시 또 다른 시험 준비에 매달린다. 그리고 그 결과가 다시 직장의 질에 영향을 미친다. 한 사람의 삶 전체가 그것에 의해 결정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시험에서 좋은 결과를 얻기 위해 매달릴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시험에 매달리는 사람들은 한 편으로는 안쓰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저 알고 있는 지식이 어느 정도인지 파악하는 그 ‘시험’이라는 것이 우리 전체 삶을 흔들고 있기 때문이다.
기숙학교에 다니는 수포자 지우의 이야기
영화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는 수학 시험 성적 때문에 고민하는 지우(김동휘)의 이야기를 담는다. 지우는 현재 공부 잘하는 학생들이 다니는 기숙학교에 다니고 있다. 과거 사고로 아버지를 잃고 홀로 남은 어머니와 떨어져 살면서 최대한 어머니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노력하는 인물이다. 하지만 모든 과목 중에서 수학이 그를 가로막는다. 수학 성적은 하위권이고, 그것 때문에 그의 담임 선생님(박병은)은 일반학교로 전학을 권유한다. 그때 지우는 학교의 경비원이면서 숨은 수학천재 학성(최민식)을 만난다.
영화 속 학성은 개인사에 비밀을 가지고 있다. 늘 딸기우유를 먹는 그는 어느 날 수학 문제를 풀고 있는 모습을 지우에게 들킨다. 그리고 수학을 가르쳐달라는 지우의 부탁을 결국 받아들인다. 이렇게 둘은 스승과 제자 사이가 된다. 지우는 전형적으로 결과 중심적으로 생각하는 인물이다. 반면에 학성은 과정을 중시하는 인물이다. 이렇게 두 인물을 대비시키면서 이들 간의 긴장감이 만들어진다. 이 모습은 일반적으로 결과를 중시하는 사회 교육 시스템과 그에 반하는 학성이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럼 학성은 그저 과정에만 충실하라고 이야기하는 걸까. 아니다. 학성이 말하는 과정은 결국 좋은 결과를 만들기 위한 밑바탕을 만드는 것이다. 수학이라는 학문은 정확한 결과를 내는 학문이지만 그에 못지않게 그 결과를 내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치는지도 중요하다. 그 문제에 도전하는 과정에서 오는 도전정신과 희열감을 통해 숫자, 수식과 친해지는 과정이 있어야 원하는 결과까지 갈 수 있다는 것이다. 학성은 결과에만 집착하는 지우를 못마땅해하고 세세한 설명을 하지 않기도 하지만, 그런 태도가 지우에게 일종의 도전정신을 심어준다.
결과보다 과정을 중시하는 천재 수학자 학성
이 영화의 악역이라고 할 수 있는 담임 선생님 근호는 전형적인 나쁜 선생님의 모습을 하고 있다. 다른 영화들에서 그동안 봐왔던 아주 전형적인 선생님의 모습이라서 좀 평면적으로 보이는 인물인데, 영화는 이 근호라는 인물을 이용해 결과도 중요하지만 그 결과까지 가는 과정이 중요하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한다. 그러니까 학성이 풀고 있는 방정식에서 결과를 중시하는 일종의 상수로 그려진다. 워낙 학성과 지우가 중심인물이 되다 보니 주변의 다른 인물들에 대한 묘사는 근호와 같이 너무 평면적으로만 묘사되고 있다는 점이 아쉽다.
탈북자인 학성과 평범한 남한 학생 지우에게 접점이 없어 보이지만 영화는 그들 사이에 어떤 유사 부자의 감정을 넣었다. 아주 대표적인 장면이 둘이 앉아 된장찌개와 계란 프라이를 먹는 장면일 것이다. 밥 위에 계란을 얹어주는 학성의 모습과 그걸 받아서 맛있게 먹는 지우의 모습에서 그 둘이 현재 결핍된 아버지와 아들에 대한 사랑을 느끼게 해 준다. 이 영화가 따뜻하게 느껴지는 건, 이 둘 사이에 만들어진 신뢰와 챙기고 싶은 마음 때문일 것이다. 또한 과정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는 영화답게 이 두 사람의 관계가 좋은 결과를 맺기까지의 과정을 세심하게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학성 역을 맡은 배우 최민식은 <천문:하늘에 묻는다> 이후 오랜만에 좋은 연기를 보여준다. 힘을 뺀 연기로 부드러운 목소리를 들려주며 과거의 회한과 후회를 안고 살아가는 탈북 수학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지우 역을 맡은 배우 김동휘는 <탐정 홍길동:사라진 마을>과 <피터팬의 꿈> 같은 영화들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준 적이 있다. 이번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에서는 자신이 피해를 입더라도 자신의 목소리를 밖으로 내지 않고 힘든 일을 안고 가려는 조금은 소심하고 체념적인 지우를 잘 표현해냈다.
안정적인 연기를 보여주는 배우 최민식과 김동휘
영화를 연출한 박동훈 감독은 많은 작품을 연출하지는 않았다. <전쟁영화>라는 단편 영화로 대한민국 영화대상 단편 영화상을 수상하기도 했지만 그 이후, <소녀 x소녀>, <계몽영화> 같은 작은 영화들을 간간히 연출했었고, 가장 최근에 연출한 작품이 이번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다. 이번 영화에서는 결과에만 집착하는 한국의 교육 시스템을 이야기하면서 그것을 따라갈 수밖에 없는 학생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학생들을 올바른 과정 속으로 끌어당기는 건 결국 과정이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는 깨어있는 어른의 목소리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현대사회에서는 결국 결과가 많은 것을 결정한다. 그것 자체를 피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것 못지않게 과정 역시 중요하다. 좋은 과정이 생략된 결과는 오래가지 못하고 머릿속에 남지 않고 증발되어 버린다. 영화 속 지우는 학성의 의도에 맞게 과정에서 얻을 수 있는 ‘재미’와 ‘희열’을 느낀다. 조금 느리지만 그가 원하는 시험 결과도 얻어낸다. 그 이후 그 학생과 시스템을 유지시키는 건, 결국 어른들의 몫이다. 영화는 다소 극적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수학’이라는 과목의 특성을 잘 활용하여 보는 관객들에게 과정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 모두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현실에서 쉽게 잊어버리게 되는 그 사실이 영화를 보는 내내 다시 전달된다. 무엇보다 그 모든 전달 과정이 지우와 학성의 따뜻한 관계를 통해 전달되고 있어, 영화를 다 보고 난 관객들은 기분 좋은 마음으로 극장을 나설 수 있을 것 같다.
*영화의 스틸컷은 [다음 영화]에서 가져왔으며, 저작권은 영화사에 있습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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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나 주인이 될 수 있는 곳, <뉴욕 라이브러리에서>
<뉴욕 라이브러리에서>에는 일반적인 설명적 다큐멘터리에서 흔히 등장하는 내레이션과 인터뷰가 사용되지 않는다. 설명적 다큐멘터리에서 내레이션은 보통 크게 두 가지 방식으로 나타난다. 첫 번째는 전지적 작가의 시점으로 이미지만으로 전달이 부족한 부분을 보충해 주거나 영상에 드러나지 않는 정보를 추가적으로 제시함으로써 관람자의 이해를 돕는 것이다. 이 경우 ‘나’가 화자로 등장하는 1인칭 시점의 내레이션보다 객관적인 관점을 가진다. 두 번째 방식은 ‘나’가 화자로 등장하는 1인칭 시점의 내레이션인데 이는 다시 관찰자 시점과 주인공 시점으로 나뉜다. 이 경우 ‘나’로 등장하는 화자가 ‘나’의 시점에서 바라보고 생각하는 것을 서술함으로써 전지적 시점보다 주관적이고 감독의 생각과 의견이 더 직접적으로 전달된다. 서술자의 위치가 어디인가에 따라 내레이션은 여러 시점으로 분류될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전지적 시점이든, ‘나’로 비롯되는 1인칭 시점이든 모든 내레이션은 영상 속 이미지를 바라보는 ’ 시점‘을 가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뉴욕 라이브러리에서>는 세 시간이 넘게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내레이션이 등장하지 않으며, 이는 곧 이들을 바라보는 ‘시점’, 즉 시선의 주인이 누군지가 드러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내레이션뿐 아니라 일반적인 설명적 다큐멘터리와 <어느 여름의 연대기>, <침묵>에서도 반복해서 등장했던 인터뷰의 형식 또한 사용하지 않았는데, 내레이션의 서술자와 질문을 던지는 인터뷰어가 모두 등장하지 않으며 영화 속 시선의 주인은 철저히 감춰진다.
이렇게 주인이 없는 시선은 뉴욕 시민들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뉴욕 라이브러리의 성격과 맞닿아 어우러진다. 영화에서 드러나는 뉴욕 라이브러리는 예술, 인문학, 디지털, 취업 등 다양한 분야를 경험하고 체득할 수 있는 기회가 열려 있는 공간이자 소통과 연대의 창구, 지역을 대표하는 랜드마크이기도 한 장소로, 단순히 책을 읽기 위한 공간으로만 나타나지 않는다. 어린아이부터 노년층까지 나이에 상관없이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기회가 열려있는 뉴욕 라이브러리의 성격은 특정한 시점이 정해져 있지 않은 영화의 형식과 만나 더욱 두드러지고, 누구나 도서관의 방문자이자 도서관에서 제공하는 기회를 얻을 주인이 될 수 있는 것처럼 <뉴욕 라이브러리에서>는 관람자 누구나 이들을 바라보는 시선의 주인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영화를 보는 동안 관람자는 도서관에서 진행되는 강연에 참여하는 청중이 될 수도, 도서관 총 운영 회의에 참여하는 위원진이 될 수도, 미술 교육과 디지털 교육에 참여한 시민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작가가 설명해 주었더라면 단순히 “이러한 공간이 있다” 라는 소개에서 그쳤을 <뉴욕 라이브러리에서>는 관객에게 단순한 공간 소개가 아닌 시선을 통한 간접 체험의 기회를 제공하여 카메라와 동일한 시선을 갖는 일차적 동일시를 불러일으키고, 관람자의 몰입도를 향상시킨다.
내레이션과 인터뷰를 사용하지 않은 것과 더불어 <뉴욕 라이브러리에서>에서 또 한 가지 인상 깊었던 점이 있다면 중간중간 반복해서 등장하는 회의 장면이다. 영화 속에는 뉴욕 각지에 있는 여러 뉴욕 라이브러리 지점과 그 안에서 진행되는 행사가 등장하며 자칫 서로 다른 공간이라는 인식을 줄 수 있는데, 영화는 여러 뉴욕 라이브러리의 지점과 각양각색의 프로그램을 조명함과 동시에 중간 중간 반복되는 회의 장면을 등장시킴으로써 영화에서 등장하는 다양한 공간과 프로그램은 모두 ‘뉴욕 라이브러리’라는 하나의 공간으로 수렴된다. 이를 통해 영화는 각 공간과 인물, 사건이 분리된 것이 아닌 하나의 공동체임을 강조한다.
<뉴욕 라이브러리에서>를 통해 바라본 도서관은 시민 소통의 중심부이자 사회. 정치적으로도 큰 영향을 미치며 다양한 경험의 기회가 주어지는 열린 공간이다. 그에 비해 나의 머릿속에 있던 도서관의 이미지는 단순히 책을 읽고 집중할, 조용한 공간과 같이 닫힌 이미지였던 것 같아 아쉬웠고 도서관의 역할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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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장 다양한 인종의 배우들을 후보로 지명한 93회 아카데미 시상식
지난 15일(현지 기준), 총 9명의 유색인종 배우가 아카데미 시상식에 노미네이트 되면서 오스카가 다양성 측면에서 새로운 기록을 세웠다고 평가받고 있다. 이번 성과는 2015년과 2016년 시상식의 남우·여우주연상, 남우·여우조연상 후보가 모두 백인들로만 이루어진 사태를 계기로, 아카데미 측에서 다변화를 위해 수년간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인 데 따른 것이다. 지난해, 영화 <해리엇>에 출연한 신시아 에리보라는 단 한 명의 흑인 배우만 후보에 오르면서 다시 한번 논란이 되기도 했지만, 올해는 다행히도 완전히 다른 결과가 나오게 됐다.
영화 <미나리>에 출연한 스티븐 연이 아시아계 미국인으로서 최초로 남우주연상 후보에 지명됐으며, <사운드 오브 메탈>의 리즈 아메드 역시 파키스탄계 영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로 오르게 됐다. 또한, <미나리>의 윤여정 배우 또한 한국인 최초로 여우조연상 후보에 지명됐다. 채드윅 보스만이 속해 있는 남우주연상 후보에 백인이 과반수를 넘지 않은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다.
출처 : Variety
여우주연상의 후보로는 비올라 데이비스(<마 레이니, 그녀가 블루스>), 앤드라 데이(<더 유나이티드 스테이츠 vs. 빌리 홀리데이>), 바네사 커비(<그녀의 조각들>), 프란시스 맥도맨드(<노매드랜드>) 그리고 캐리 멀리건(<프라미싱 영 우먼>)이 있다.
국내에 ‘블랙 팬서’로 잘 알려진 고(故) 채드윅 보스만은 사후 남우주연상 후보에 오른 최초의 유색인종 배우가 됐다.
배우의 범주를 벗어나서도 ‘다양성’이 가득한 아카데미 시상식이 될 것 같다. 클로이 자오 감독(<노매드랜드>)은 에머랄드 판넬(<프라미싱 영 우먼>)과 함께 감독상 후보로 올라, 93년 아카데미 역사상 처음으로 두 명의 여성이 후보로 오르게 됐다. 작품상, 감독상, 각색상 그리고 편집상 총 4개 부문에 후보로 오른 클로이 자오는 4개의 후보에 이름을 남긴 최초의 여성이기도 하다. 미아 닐(Mia Neal)과 자미카 윌슨(Jamika Wilson)은 <마 레이니, 그녀가 블루스>를 통해 분장상 후보에 오른 최초의 흑인 여성이 되었다.
출처 : Variety
이번 아카데미 사상식의 후보자 명단은 지난 해 해외 누리꾼들이 ‘#BAFTAsSoWhite(BAFTA는 백인 중심적)’이라는 해시태그를 달며 비판했던 결과에 대한 피드백과 같다. 논란 이후, BAFTA(영국 영화 텔레비전 예술 아카데미, British Academy of Film and Television Arts)는 회원 자격 구성과 수상 투표 절차를 한 달 동안 검토한 후 120개에 해당하는 부분을 변경했다고 밝혔다.
또한 AMPAS(아카데미 심사 위원회)는 ‘#OscarsSoWhite(오스카는 백인 중심적)’라는 해시태그를 통해 비난받던 2015년과 2016년 이후, 2015년 25%에 불과했던 여성 회원을 2020년에는 33%까지 늘렸고, 2015년 10%를 차지한 소수민족 회원을 2020년에는 19%로 늘리는 자체적인 변화를 일으켰다.
출처 : Variety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의 후보가 다양해졌다고 하지만, 작품상 후보들은 아쉽게도 그렇지 않다. <마 레이니, 그녀가 블루스(Ma Rainey's Black Bottom)>와 <Da 5 블러드(Da 5 Bloods)> 그리고 <원 나이트 인 마이애미(One Night in Miami)>는 모두 흑인을 위주로 캐스팅 되었고, 미국 배우 조합상(SAG Awards) 영화부문 앙상블상 후보에도 모두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아카데미 작품상에는 진출하지 못했다.
아카데미 시상식이 2021년이 되어서야 이렇게 다양한 후보들을 인정했다는 사실은, 아카데미를 포함한 영화 산업 전체가 오랫동안 유색인종을 소외시켰다는 ‘깊이 뿌리내린 편견’이 존재했다는 점을 직접적으로 말해준다. 따라서, 아카데미는 이번이 ‘오직’의 해가 되지 않도록 노력을 계속할 필요가 있다.
씨네랩 에디터 M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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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대와 상상을 품은 마음에 피어난 기적
“당신은 산타를 몇 살까지 믿었나요?”
산타는 연말이 다가오면 한 번씩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주제이다. 이 흐뭇한 주제는 의외로 열띤 대화를 만든다. 산타를 기다리며 지새우던 밤에 대한 기억, 선물을 주던 부모님과 눈이 마주쳤던 기억, 산타에게 선물을 받기 위해 했던 착한 일에 대한 기억 등 ‘산타’라는 본 적도, 만난 적도 없는 존재가 자신에게 남긴 기억에 관해서 말이다.
우리가 이토록 이 주제에 대해 계속해서 이야기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산타가 아이들의 마음에 가져다주는 기대와 설렘, 이 모든 것을 함께 나누는 가치를 알고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다시 말해 아이의 상상력을 지키기 위한 선의, 순수함에 대한 애정, 돌아갈 수 없는 마음 그 자체에 대한 그리움, 이것을 모든 사람이 공통되게 공유하고 있다는 믿음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산타를 믿지 않게 된 어른이지만, 여전히 아이들에게는 최선을 다해 산타의 존재를 말한다.
“산타는 여러 사람에게 의미 있는 상징이오!”
크링글은 산타의 가치를 지키고 싶어 한다. 산타를 믿지 않는 워커에게 산타라는 존재, 즉 스스로를 이렇게 설명한다. “인간 사회를 지배하는 이기심과 증오를 누를 수 있는 인간 능력을 상징하는 인물이죠.”
영화는 크링글의 입을 빌려 말했듯, 산타를 믿을 마음의 여유 한 줌 남기지 않은 사회는 이기심과 증오만 남긴다는 것을 보여준다.
수잔은 어른처럼 말하는 아이다. 크리스마스에 대한 설렘이 없는, 아이 같지 않은 아이. 그녀는 퍼레이드의 썰매 위 손을 흔들고 있는 남자가 엄마의 선택으로 고용된 남자라는 것을 알고, 원하는 선물은 해줄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엄마가 사준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어느 날 나타난 진짜 산타 같은 크링글은 계속해서 수잔에게 원하는 것을 묻는다. 수잔은 크링글이 자신이 진짜 원하는 것을 해줄 수 없다는 걸 알지만, 조금의 기대를 걸어보고 싶다는 마음을 갖기 시작한다.
산타는 그런 존재다. 사람들의 마음에 기대를 품게 하는. 그리고 기대는 사람들의 일상에 원하는 미래를 상상할 힘을 갖게 한다. 크리스마스에 트리 아래 놓인 선물을 기대하고, 이루어질 소원을 기대하는 일은 사람들의 마음에 피어나는 작은 여유이자, 기쁨일 것이다. 그렇기에 크링글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는 사람들의 믿음을 지키는 것이었다. 돈과 경쟁, 그 외의 현실은 그에게 부차적인 것일 뿐이다.
하지만 익스프레스 백화점 직원들은 본인이 진짜 산타라 주장하는 크링글을 믿지 않았다. 그저 연기할 뿐이라고 생각하며, 그를 미치광이 취급한다. 그러고는 산타를 보기 위해 모인 아이들에게 모인 아이들 앞에서 산타는 거짓이라 말하고, 폭행을 사주하는 시나리오를 만들어 크링글을 악으로 끌어내린다. 그 과정에서 아이들을 위한 마음은, 그가 보여준 미소를 사랑한 사람들을 위한 마음은 전혀 없다. 경쟁사를 끌어내리며 그를 발판 삼아 그 위로 올라가고자 하는 이기심과 증오, 경쟁과 대립뿐이다.
믿는다는 것
크링글의 재판에서 브라이언은 “웃음을 자아내는 거짓을 선택할 것인지, 눈물을 자아내는 진실을 선택할 것인지.” 판사에게 달려있다고 말한다. 그들에게 크리스 크링글이 산타인지 아닌지는 이제 중요하지 않다. ‘믿음’을 가진 마음이 그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안다.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를 통해 유약하고 보잘것없던 인간이 세상을 지배하게 된 힘은 바로 '상상력'이었다고 말한다.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일은 비웃음당할 일이 아니다. 그 자체로 살아갈 동력을 주는 일이다. 영화 속 산타를 믿지 않는 어른들은 자신이 진짜 산타라고 말하는 크링글을 비웃고, 미쳤다고 말하고, 심지어는 정신 병동에 가둔다. 하지만 그를 믿는 어른들과 아이들은 달랐다. 그를 믿고, 믿음이 실현되는지 기대하는 것이 전부였으며, 그를 응원하며 ‘I BELIEVE’라는 슬로건을 내 걸었다. 그래서인지 그들에게 드리운 표정은 매우 달랐다. 검사와, 익스프레스 사장의 얼굴에는 당장의 경쟁에서 지는 것에 대한 불안이 담겨있다. 하지만 그의 다정함을 증언하는 증인들, 응원하는 시민들의 얼굴에는 본인의 믿음에 대한 기대와 생동감이 담겨 있었다.
냉소는 현실을 보게 만든다. 하지만 미래로 나아가게 만들지는 못한다. 돈과 힘이 정의인 세상은 윤택한 삶을 보장할 수는 있을지 모른다. 비싼 옷을 입고 비싼 술을 사 먹을 수 있는 하루를. 하지만 그것이 삶의 전부가 되어버린다면 우리는 무엇을 상상하고, 무엇을 향해 나아갈 수 있을까? 24일 밤에 산타로부터 받을 선물을 기대하기 위해 1년을 감사하며 살아가는 행위가 가치를 잃는다면, 우리의 삶에 어떤 선(善)이 남아 있을 수 있을까. 동전과 명함만 남는 세상에는 온기가 없다.
하지만 믿는다는 것은 온기를 주는 행위다. 삶에서 혼자서만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혼자는 외로울 뿐이다. 부모들이 산타의 도움을 받았듯, 워커가 브라이언의 도움을 받았듯, 산타가 시민들의 도움을 받았듯, 타인을 믿는 다정함,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다정함은 선(善)이 다른 선(善)을 낳도록 도왔다.
믿음이 준 온기는 워커와 수잔에게도 역시 동일했다. 워커는 환상과 신화를 믿는 건 불행을 가져다줄 뿐이라며, 자신이 믿던 것들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불행해졌다고 말했다. 그녀는 처음부터 믿음이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도 어렸을 때는 산타를 믿었다. 하지만 살면서 믿음을 주었던 것으로부터 상처를 입었기에 그녀는 믿음을 지웠다.
수잔 역시 믿음을 지웠다. 그녀는 나이에 비해 너무 많은 것을 알아버렸다. 보이지 않는 것을 믿을 상상력의 공간을 지웠다. 워커의 방어기제가 만들어낸 산물이었지만 아버지가 없는 상처를 안은 아이의 방어기제이기도 했다. 진짜 갖고 싶은 것은 가질 수 없는, 엄마가 주는 ‘가능성’ 안에서만 마음을 키우는 편이 더 이상의 상처를 만들지 않는 일이었다.
하지만 믿었던 것들로부터 상처받고, 주변을 돌아볼 정신이 없던 워커는 크링글을 통해 잊었던 미소를 되찾는다. 너무 많은 것들을 알게 되어 믿고 싶은 것을 믿지 못하게 된 수잔 역시 어린아이의 마음을 되찾았다. 크링글이 그들의 얼어붙은 마음에 심은 기대의 씨앗이 믿음이라는 온기를 품고 자라난 것이다. ‘크리스마스에 원하는 게 뭐니?’라는 단순한 질문에서 시작해 원하는 것을 생각할 틈을, 그것을 기대하는 마음을 키워준 것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들은 우리에게 상처를 주고, 믿었던 것들은 우리를 배신한다. 하지만 그 사랑과 믿음이 우리에게 주는 것은 자명하다. 사랑하고 믿는 동안 나를 채우는 행복, 그리고 나를 사랑하는 또 다른 것을 사랑하고 믿을 용기. 이것이면 충분하지 않은가? 충만한 삶을 만들기에는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영화의 엔딩. 수잔이 원했던 집과 워커와 브라이언이 함께하는 소원이 이뤄진 모습을 보며, 기적을 만드는 연금술은 사실 무척 간단한 일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조금의 상상력과 그것을 믿을 용기, 이 두 가지를 통해 우리는 우리가 상상한 미래 앞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Editor. Hann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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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월 1주 차 개봉작 추천, 공개 예정작 추천
안녕하세요!
영화/OTT 콘텐츠 큐레이션 웹 매거진 '씨네랩'입니다.
톱스타와 매니저의 삶이 뒤바뀐 <스위치>의 개봉부터
새롭게 탄생한 레전드 농구 만화 '슬램덩크'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개봉까지!
그럼 1월 첫째 주에는 어떤 영화가 기다리고 있을지!
더 자세히 한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극장 개봉 영화
스위치
ⓒ 네이버 영화
개요: 코미디 | 한국 | 113분
감독: 마대윤
출연: 권상우, 오정세, 이민정 등
개봉: 2022.01.04
배급: 롯데엔터테인먼트줄거리
돈 많고 개념 없는 안하무인 톱스타와 그의 뒤처리를 전담하는 극한직업 매니저, 가깝고도 먼
두 남자의 인생이 하룻밤 사이에 180도 스위치 된다.
관전 포인트
1인 2색 캐릭터로 출연하는 권상우, 오정세, 이민정 배우 주연의 영화 <스위치>. 극과 극의
매력을 선사하는 배우들의 연기와 환상적인 케미로 관객들의 웃음을 선사할 예정이다.
장화신은 고양이: 끝내주는 모험
ⓒ 네이버 영화
개요: 애니메이션 | 미국 | 102분
감독: 조엘 크로포드
출연: 안토니오 반데라스, 셀마 헤이엑 등
개봉: 2022.01.04배급: 유니버설 픽쳐스
줄거리
9개의 목숨 중 단 하나의 목숨만 남은 마성의 히어로 ‘장화신은 고양이’가 잃어버린 목숨을
찾기 위해 소원별을 찾아 떠난다.
관전 포인트
로튼토마토 관객지수 98%, 신선도지수 97%를 기록한 영화 <장화신은 고양이: 끝내주는
모험>은 개봉한 25개국 중 17개국에서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하며 흥행에 성공했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
ⓒ 네이버 영화
개요: 애니메이션| 일본 | 124분
감독: 이노우에 다케히코개봉: 2022.01.04
배급: (주)NEW줄거리
전국 제패를 꿈꾸는 북산고 농구부 5인방의 꿈과 열정, 멈추지 않는 도전을 그린 영화
관전 포인트
1억 2천만 부 베스트셀러 '슬램덩크'의 새로운 영화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원작자 이노우에
다케히코가 직접 각본과 감독에 참여해 기대를 모으고 있다.
패닉 런
ⓒ 네이버 영화
개요: 스릴러 | 미국 | 84분
연출: 필립 노이스배우: 나오미 왓츠, 제이슨 클락 등
개봉: 2022.01.04
배급: (주)원더 스튜디오줄거리
학교에서 총격 테러가 발생하자 스마트폰만 의지한 채, 아들을 구하기 위해 달려야만 하는 한
여자의 사투를 그린 리얼 타임 서스펜스이다.
관전 포인트
연출력과 흥행력을 동시에 인정받은 거장 <솔트> 필립 노이스 감독이 연출을 맡고, 할리우드
섭외 1순위 천재 작가 <베리드> 크리스 스파링 작가 각본을 맡아 기대를 모은 작품이다.
강남좀비
ⓒ 네이버 영화
개요: 드라마 | 한국 | 81분
연출: 이수성배우: 지일주, 지연 등
개봉: 2022.01.05
배급: 와이드 릴리즈(주), (주)제이앤씨미디어그룹줄거리
원인불명의 증세를 보이는 사람들이 출몰하면서 혼돈의 중심이 된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강남,
그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목숨을 건 사람들의 사투를 담았다.
관전 포인트
북미를 비롯해 독일, 태국, 일본 등 134개국에 판매되며 한국 콘텐츠의 영향력을 보여주었다.
서울의 강남을 배경으로 B급 코믹 좀비 액션을 선보이며 색다른 재미를 제공한다.
씨네랩 에디터 Hiz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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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사회] 얼어붙은 마음들이 모여서
개봉 | 2025.06.04.
등급 | 15세 이상 관람가
장르 | 멜로/로맨스
국가 | 중국, 싱가포르
러닝타임 | 100분
배급 | ㈜디스테이션
시놉시스 |
연길에서 가이드 일을 하고 있는 나나(주동우)는 휴대폰을 잃어 홀로 고립된 여행객 하오펑(류호연)을 샤오(굴초소)와의 저녁 식사 자리에 초대한다. 다음 날 상하이로 향하는 비행기를 놓친 하오펑은 나나, 샤오와 함께 어울리기 시작하고 그들이 함께한 7일 동안 단단하게 얼어붙었던 세 사람의 세계에 조금씩 균열이 일어난다.
지난 15일, 씨네랩 크리에이터로 <브레이킹 아이스> 시사회를 다녀왔습니다! <바닷마을 다이어리>, <괴물> 등의 감독을 맡았던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이 영화를 무척 좋아한다고 밝히기도 했는데요, 어떤 영화였는지 소개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스노볼을 흔들면 문득
약속들 반짝이며 흩어졌다 눈송이처럼 가라앉는다
그 시간을 한 생이라 부르지 말자
이은규, <스노볼*>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에 기대어 쓰다.
영화를 보고 떠오른 시 구절입니다.
<브레이킹 아이스>는 중국 북부의 국경 도시 연길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연길은 몹시 추운 지역이고, 상하이로 가는 비행기도 무척 뜸하죠. 친구의 결혼식 참석을 위해 연길을 찾았던 하오펑은 휴대폰을 잃어버리는 바람에 나나, 샤오와 함께 연길에 며칠간 머물게 됩니다. 셋의 관계는 우정과 사랑을 넘나들며 엉키기 시작하죠. 셋은 각자만의 결핍을 안고 있습니다. 하오펑은 정신과에서 걸려오는 상담 전화를 회피하고 있었고, 나나는 과거 피겨스케이팅 선수였으나 부상으로 꿈을 접었으며, 샤오는 자신의 재능을 발휘하지 못한 채 일상에 지쳐 있습니다. 아름다운 겨울의 풍경 속에서 이들은 위로와 회복을 경험합니다.
영화는 세 인물의 내면적 고립과 상호 작용을 통해 현대 청년들의 정체성과 소외감을 섬세하게 묘사합니다. 이들이 머무는 아름다운 겨울의 풍경은 이들의 이야기에 깊이를 더하죠. 앤서니 첸 감독은 이번 작품에서 즉흥성과 감정의 흐름에 집중하여, 인물들의 미묘한 감정을 자연스럽게 풀어냅니다. 싱가포르 출신의 앤서니 첸 감독은 더운 나라에서 살았기 때문인지 추운 날씨에 대해 풀어보고 싶었다고 배경 설정에 대한 언급을 하기도 했죠.
사실, 영화에서 이야기의 짜임새나 캐릭터의 입체성을 중시하는 분은 이 영화를 통해 큰 울림을 느끼기 어려울지도 모르겠습니다. 영화를 관람하는 내내 스토리가 촘촘하다고 느낀다든지, 인물들이 가진 이야기들에 공감이 간다든지 하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정동”으로 일컬을 수 있는, 인물들이 감정을 느끼고 공유하는 과정에서 인물들 사이에 흐르는 정서가 이 영화에선 가장 중요한 지점입니다. 이 감정은 인물들 사이에서 전염되고, 유영하며 관객들에게까지 서서히 번집니다. 이러한 감정의 이동은 배우들의 명연기가 있었기에 가능하기도 합니다.
<브레이킹 아이스>는 “얼음”이라는 메타포를 통해 현대 청년들의 내면적 고립을 그려냅니다. 그리고 상호 작용을 통해 삶의 의미와 연결의 중요성을 알아가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저는 해당 영화가 섬세한 연출을 통해 관객에게 깊은 감동을 전달할 수 있는 작품이라고 느꼈습니다.
이 영화는 2023년 칸 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초청되었으며, 싱가포르의 2024년 아카데미 국제 장편영화 부문 공식 출품작으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서사보다는 인물들의 감정 그 자체에 깊이 몰입해보고 싶은 분들께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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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씬 레드 라인 the thin led line - 테렌스 멜릭
씬 레드 라인 the thin led line - 테렌스 멜릭
'천국의 나날들'을 연출하고 무려 20년의 시간이 지나서 맬릭 감독은 새로운 영화 '씬 레드 라인'을 공개했다.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의 감동이 아직도 생생한데, 이후 서너 번을 더 봤다. 처음 보고 쓴 리뷰는 아래 있으니, 이번에 새로 보면서 느낀 부분을 정리해보자.
영화에서 '물'은 매우 중요한 상징이다. 물은 곧 '생명'이다. 영화의 시작, 중간 부분의 전투, 영화의 끝에서 물이 등장한다. 처음과 끝에 등장하는 바다는 만물의 생명이 탄생하는 근원으로 보인다. 평화로운 남태평양의 섬에 주민들이 살아가고, 아이들은 천진난만하게 물에서 헤엄치며 행복하게 놀고 있다. 이 평화 속에서 군인인 주인공은 주민들이 군인을 무서워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평화로운 바다에서 나와 숲속으로 들어가면서 전투가 벌어지고, 병사들은 물이 부족해 힘들어 한다. 고지를 점령하기 전에도, 고지를 점령하고도 지휘관은 계속 물을 보급해야 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물'은 갈증을 해갈하는 물질로써의 '물'이기도 하지만, '물' 그 자체가 생명을 상징한다.
여러 명의 주인공 시점으로 발화하는 나레이션은 그 상황에 맞는 철학적 질문을 던진다. 주인공들의 독백처럼 들리는 이 나레이션은 영화를 끌어가는 힘이기도 하다. 주인공 각자가 놓여 있는 상황에서 자신의 내면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객관적 상황 - 전과의 전투 - 속에서 이질적이지만 근본적인 질문들이다.
이 영화가 다른 전쟁, 전투영화와 다른 점은, 전투를 '액션'으로 소비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전쟁, 전투'라는 소재를 다루면서 멜릭 감독은 이 영화가 '전쟁 액션, 전투 액션' 영화가 되지 않도록 의도한다. 그렇다고 전투 장면이 적거나 대충 찍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어떤 전투 영화보다 뛰어난 장면들이 많고, 생생하며, 실감나는 전투 장면은 관객이 몰입하게 되는 힘이 있다.
그럼에도 전투의 사실성을 드러내면서도 관념화 하지 않으려는 장치를 곳곳에 넣고 있다. 총이나 폭탄에 맞아 죽거나 다치는 병사들의 비명이 거의 들리지 않고, 하반신이 사라진 군인의 처참한 모습을 외면하지 않고 똑바로 바라보며, 전투에서 패배한 일본군의 모습을 희화화하지 않고 있다.
전투에서 이긴 쪽이나 진 쪽 모두 피해를 입었으며, 미군이나 일본군이나 군인의 생명은 다르지 않고, 누군가의 총과 폭탄에 죽어가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지, 그것이 정의인지 묻는다. 이 회의적 태도는 전쟁을 객관으로 바라보려는 것이며, 개인에게 생명은 오로지 단 한 번이라는 것에서, 전쟁이 인간을 소모품으로 다루고 있다는 것을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고든 대령은 이 전투에서 공을 세워 장군이 되고자 하는 욕망을 가진 인물이다. 그는 병사들의 죽음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고지를 점령하는 것이 유일한 목적인 직업군인이다. 제임스 대위는 중대장으로서 자기 중대의 병사들이 적군의 총탄에 죽는 것을 최대한 막으려 하고, 고든 대령과 대립한다. 이때 군인으로서 논리적인 주장은 고든 대령이 승리한다. 결국 눈앞에 있는 적과 싸워야 하고, 고지를 점령해야 하는 지상 목표가 있기 때문이다. 다만 터무니없는 공격 명령에는 따를 수 없다는 것이 제임스 대위의 생각이었다. 전투가 벌어지는 전쟁터에서 지휘관들의 생각과 사고방식이 어떤가를 보여줌으로써, 전쟁 또는 전투를 지휘하는 고위 장교들의 본질을 드러낸다. 그들은 승진에 관심을 두고, 병사의 죽음을 외면하며, 위에서 내려오는 명령에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고 믿는다. 여기에 반발하거나 회의하는 지휘관은 제임스 대위처럼 중간에 군복을 벗어야 한다.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위트 일병은 6년 동안 군인으로 복무하고 있음에도 계급은 일병이다. 그는 여러 번 근무지 이탈을 했고, 징계를 받아 진급이 안 되고 있는 것이다. 위트 일병의 태도는 관조적이고 집착과 욕망을 버린 초탈한 인물이다. 무엇이 그를 무심한 인간으로 만들었을까. 오랜 전투를 통해 위트는 삶과 죽음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걸 깨달았을 수 있다. 그는 전쟁을 싫어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이지만, 전투에서 가장 위험한 임무를 자청한다. 그는 자신이 살아돌아 갈 수 없다는 걸 알고 있거나, 살아남는 걸 포기했는지 모른다. 그는 가장 위험한 전투에서 살아남았지만, 정찰을 나가서 일본군에게 포위되어 사살당한다.
위트 일병의 죽음으로 이 영화가 '영웅'을 만들 의지가 없다는 걸 분명히 하고 있다. 전쟁에서는 누구나 죽을 수 있으며, 살아남는 것은 오로지 '운'이 좋기 때문이라는 뜻이다. 즉, 전쟁, 전투에서 총알이나 폭탄은 우연한 작용이며, 그것은 개인의 의지, 희망, 계획 따위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이, 그 시간에 그 자리에 있다는 것만으로 삶과 죽음이 결정된다는 뜻이다.
이것은 곧 인간의 의지가 얼마나 의미 없는가를 말한다. 인간의 주관적 의지는 마치 바다의 물방울처럼 거대한 파도의 한 부분일 뿐이어서, 외부의 조건 즉, 시대와 역사, 시간과 공간의 어느 순간에 놓여 있는 인간은 그 한계를 절대 뛰어넘을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제목이 늘 궁금했다. '씬 레드 라인'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무슨 뜻일까. 얇고 붉은 선이라니.
'나무위키'에서 설명한 것을 보니, '크림 전쟁' 때 영국군의 붉은 군복을 빗댄 별명이라고 한다. 러시아군과의 전투에서 영국군은 두줄로 가늘고 길게 늘어서 승리를 했고, 이 전투를 본 종군기자가 "A thin red streak tipped with a line of steel"이라고 쓴 데서 이 단어가 나왔다고 한다.
이 영화에서 사용된 제목의 의미는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일 수도 있고, '이성과 광기의 경계선'을 상징할 수도 있다고 설명한다. 테렌스 멜릭 감독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상징하지 않았을까? 이 영화는 매우 잘 만든 전쟁영화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전쟁을 통한 인간의 광기와 성찰을 위한 영화이기도 하다.
원작이 있는 책을 바탕으로 주인공의 의식의 흐름과 주인공이 전쟁을 바라보는 관점을 느리지만 깊이 있게 보여주는 이 영화는, 지금까지 만들어진 어떤 전쟁영화와 비교해도 결이 다르다.
주인공과 그의 전우들, 중대장 스타로스 대위, 연대장 고든 대령으로 대표되는 인물은 이 전쟁을 바라보는 중요한 시각을 반영한다. 실제 전쟁의 상황으로만 봐도 미군이 과달카날 섬을 점령하지 않고, 지속적인 함포사격과 비행기 폭격만으로도 얼마든지 일본군을 전멸시킬 수 있었던 상황이었다.
일본은 진주만 공격으로 미국에게 선제 공격을 했지만, 그것이 미국을 이기겠다는 전술이 아니었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일본은 미국을 상대로 지기위한 전쟁을 시작한 것이다. 유럽에서는 독일이 유럽연합군에 의해 패퇴를 하고 있었고, 무엇보다 쏘련과 독일의 전쟁으로 이미 승패는 어느 정도 결정된 상황이었다.
독일과 일본은 추축국이었지만 그들끼리 연합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지리적으로 연합이 불가능했고, 미국이 초기에는 전쟁 군수물자를 엄청나게 유럽으로 보내면서, 초기에 독일에게 밀리던 유럽의 연합국은 군수품의 압도적인 우위로 인해 독일을 밀어내기 시작한다.
좀 의아하겠지만, 미국은 쏘련에도 군수물자를 퍼부어 주었다. 미군이 비행기로 떨어뜨린 많은 군수물자가 독일군 진영으로 떨어지는 웃지 못할 일도 많이 발생했지만, 어떻든 쏘련군은 미국이 보내 준 다양한 군수품으로 인해 전투 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었고, 병력 손실도 상당부분 막을 수 있었다.
과달카날 전투에서 미군은 제2차 세계대전의 전투 가운데 사상 최대의 피해를 입는다. 이 영화에서도 미군의 피해가 막대하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그 원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지휘관의 무능과 탐욕이었다는 것을 감독은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여기서는 고든 대령이 자신의 진급을 위해 끊임없이 중대장을 몰아부치지만, 사실 지휘부는 고든 대령 위에 있는 똥별들이다.
그들에게 병사들은 그저 소모품에 불과할 뿐이다. 그들은 애국심을 내세우지만, 정작 자신들은 가장 안전한 곳에서 지도 위에 빨간선을 그리는 것으로 전쟁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 실제 전쟁터는 참혹한 장면들 뿐이고, 똥별과 똑같은 생명이 죽어가고 있지만, 전쟁의 논리는 지배자의 논리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것이다.
주인공 위트 일병은 전쟁터에 나온 군인이지만 그는 종종 무단으로 병영을 뛰쳐나와 혼자 돌아다니거나 원주민들과 어울린다. 보통의 경우 이런 병사는 당연히 군법회의에 회부되고 영창에 가게 되지만, 그를 이해하는 웰쉬 상사 덕분에 큰 문제 없이 군대생활을 하고 있다. 다만 진급을 못하는 것이 유일한 벌이다.
하지만 위트가 바라보는 전쟁터는 총탄과 대포가 날아다니고 군인의 몸이 갈기갈기 찢기거나 터져나가는 참혹한 현장이 아니라, 아름다운 풍경과 싱그러운 바람과 구름과 따가운 햇살과 아름다운 원주민들과 고요한 바다가 있는 곳이었다. 그는 전쟁터의 가운데에서 오히려 평화와 고요를 느끼며 시간을 보낸다. 역설적이다.
전쟁영화 가운데 가장 뛰어난 장면이라고 생각하는 전투장면이 있는데, 처음 이 장면을 볼 때, 내 심장 박동이 쿵쿵거리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마치 실제 전투 현장에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테렌스 멜릭 감독의 연출은 탁월하다. 이 장면만으로도 이 영화는 전쟁영화의 걸작으로 남을 수 있을 테지만, 이 영화를 빛내는 장면들은 전투 장면보다는 전투와 전투 사이에 보여주는 위트 일병의 일탈과 풍경들이다.
역시 전쟁영화 가운데 명장면의 하나인 '서부전선 이상없다'에서 마지막 장면이 평화로운 새소리와 함께 소리 없이 날아 온 총탄이었음을 떠올린다면,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보여주는 남태평양의 아름다운 풍경은 전투를 겪는 군인이 가장 원하는 평화로운 풍경이며, 그것은 살아서는 만날 수 없는 비현실의 풍경이라는 점에서 위트 일병의 환상일 수 있다.
과달카날 전투는 많은 미군이 사망한 격렬한 전투였고, 이 섬을 탈환하면서 남태평양에서 일본까지의 제공권과 제해권을 미군이 장악하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영화에서는 미군의 희생도 중요하게 다루지만, 적군인 일본군의 참혹한 상태도 보여주고 있다. 적군이니까 당연히 죽여도 좋다는 심리적 동조를 테렌스 멜릭 감독은 분명히 거부하고 있다.
일본군의 악명은 당대에도 이미 유명했지만, 그들 역시 전쟁의 피해자이자 소모품으로 전락한 불쌍한 존재라는 것을 참혹한 장면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일본군은 미군에게 포로로 잡히기 전에 자살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었다. 또한 참호에서 기관총을 난사하는 일본군의 발목에는 족쇄가 채워져 있었다.
이것은 일본군 개개인을 세뇌하고 강제한 일본 군국주의의 힘이 얼마나 강력한가를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또한 그들이 미군에게 포로로 잡혔을 때, 예상보다 훨씬 강렬하게 저항하는 것은, 미군들이 포로가 된 일본군의 피부를 산 채로 벗긴다는 말을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일본군인 개개인의 전쟁범죄 책임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일본 군국주의의 강제였든, 세뇌였든, 빗나간 애국심이었든 자유로운 개인이 판단하고 결정해야 하는 책임을 방기한 것은 분명 잘못한 것이다. 그 당시 많은 일본 군인들은 잘못된 애국심으로 군국주의를 받아들였고, 군국주의의 체제를 내면화했다. 그것은 히틀러를 선택한 독일 국민의 정서와 결코 다르지 않으며, 국가의 범죄에 동조하고, 힘을 실어주었다는 점에서 단죄를 면할 수 없는 심각한 범죄행위임에 틀림없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군국주의, 집단체제에 맞서는 개인의 의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미군과 일본의 군대 조직은 개인의 의지를 용납하지 않는다. 위트 일병의 일탈은 이런 집단에 맞서는 개인의 항의이며, 폭력을 만들어 내는 집단(그것이 미군이든 일본이든 상관 없다)에 대한 거부이기도 하다. 위트 일병이 보았던 아름다운 풍경과 평화로운 사람들은 그가 바라던 세상의 모습이었지만, 그 꿈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음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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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폭행 피해자, 아줌마지만 당당하게 자신의 길을 걸어간다.
지난 20회 전주 국제 영화제에서 공동 대상을 수상한 영화 갈매기가 개봉을 앞두고 있습니다.
씨네랩의 초청으로 개봉 전 시사회에 참석하고 왔는데요.
김미조 감독의 첫 장편 데뷔작인데 인디 영화임에도 매우 흥미롭게 본 영화입니다.
한 중년 여성이 가까운 사람에게 성폭행을 당하게 되고, 그 이후에 피해자의 심리와 행동을 세심히 보여주는데요.
피해를 당하는 모습은 영상에 담지 않고 오로지 피해자의 모습을 통해 모든걸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줌마라고 불리는 시장에서 생선을 파는 중년 여성이라서 그의 피해사실을 주변에 알리기 어려워하는 장면도 나오는데요.
결국 꿋꿋히 자신의 길을 걸어가려고 하는 그의 모습이 꽤 인상적이었습니다.
영화를 보고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요. 특히 우리가 흔히 아줌마라고 부르는 존재들에 대해 생각이 많이 했습니다.
자세한 리뷰는 영상을 참고 하세요!
영화는 7월 28일에 개봉을 앞두고 있습니다!Rabbitgumi 채널 구독과 좋아요 부탁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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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쿵푸팬더 : 용의 기사> 공식 예고편
수상한 족제비 한 쌍이 위험천만한 네 개의 무기를 노리자, 포는 집을 떠나 지구를 누비는 여정에 나선다. 구원과 정의를 위해! 그 와중에 고지식한 영국 기사 '방랑자 블레이드'와 파트너가 되는 포.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두 전사는 마법의 무기를 찾아 위험에 빠진 세상을 구하는 대모험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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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애프터썬> 2차 예고편
“오랫동안 이 영화의 햇볕에 그을리고 싶다” - ?????? 영원히 흔적으로 남은 그해 여름의 기억 [애프터썬] 2차 예고편 공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