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두codu2022-02-16 11:37:03
삶과 이야기의 공명, 이야기로 묻고 삶으로 답하다
하마구치 류스케 <드라이브 마이 카>
소통의 부재는 영혼의 부재
우리 집에는 네 명의 인간과 두 마리의 개가 함께 살고 있다.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같은 종의 동물이라도 각각 전혀 다른 소통방식을 구사한다. 이를테면, ‘네가 먹고 있는 것을 줘.’라고 표현하고 싶을 때도 “달라”라고 부탁하는 인간이 있고, 손으로 뺏어 먹는 인간이 있다. 개는 엎드려서 침을 흘리거나 양손(앞발)을 사람에게 올리기도 한다. 각각의 종은 서로 같은 언어 체계를 공유하지만, 같은 소통방식을 구사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손이 먼저 나가는 인간은 앞발을 올리는 개와 가까운 소통방식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개도 인간도 종과 언어를 막론하고 저마다 소통하는 방식을 가지고 있다. 누군가의 진정한 언어는 침묵일 수도 있고, 육체적 관계일 수도 있고, 운전 방식일 수도 있다. 어떻게 보면 한국어와 같은 언어 체계는 진정한 소통방식을 번역한 말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언어를 뛰어넘어 소통하기 위해서 우리는 각자의 진정한 소통방식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히로시마 연극제의 상주 예술가에게 배정되는 운전사 와타리 미사키(미우라 토코)는 말수가 적지만 차와 상대를 세심하게 배려한다. 그가 밟는 액셀과 브레이크 역시 하나의 소통 수단이다. 미사키는 이를 통해 차 안의 공기와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미사키의 운전은 중력도, 운전하는 사람도 잊게 할 정도로 부드럽다. 이 무저항의 운전은 미사키의 고향 가미주니타키무라에 내리는 눈송이처럼 고요하다. 자신의 존재를 지우며 상대를 편안하게 해 준다. 미사키가 배워야만 했던 소통방식은 그런 것이었다.
배우이자 연극 연출가인 가후쿠(니시지마 히데토시)는 자신의 진짜 마음을 숨기는 방식으로 소통한다. 그의 언어는 침묵 또는 회피라고 할 수 있다. 가후쿠와 드라마 각본가 오토(키리시마 레이카)는 이상적인 부부처럼 보인다. 블라디보스톡 연극제의 항공권 예약이 미뤄져 집으로 돌아간 가후쿠는 아내 오토의 외도를 목격하고 아무 말도 없이 뒤돌아 나간다. 가후쿠가 외면한 진실은 아내의 외도만이 아니다. 그들의 결혼 관계는 사실상 끝났고, 두 사람은 함께할 수 없다는 진실을 그는 끝끝내 마주하지 않는다. 그리고 오토의 죽음으로 가후쿠는 자신의 마음과 진실이 마주할 기회를 영영 잃어버렸다.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에는 단 한 번의 식사 장면이 등장한다. 히로시마 연극제 담당자 윤수(진대연)가 마련한 저녁 식사 자리에는 유나(박유림), 가후쿠, 미사키 그리고 래브라도 리트리버 한 마리가 함께한다. 이 식사 자리에서 이루어지는 대화는 대부분 번역된 말이다. 전혀 다른 언어들이 오가고 누군가의 입을 빌려 다시 변환되는 번거로운 과정을 거치지만, 영화의 어떤 장면보다도 따뜻하고, 안정적이며 소통과 공감이 느껴진다. 이 장면은 언어를 뛰어넘는 따뜻한 소통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우리가 소통의 부재를 겪는 것은 언어가 다르기 때문이 아니라 영혼이라 부르는 그것이 언어 안에 담겨 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언어와 텍스트의 관계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 언어와 텍스트는 닭과 달걀 같은 관계를 맺고 있다. 가후쿠 부부는 4살 딸을 폐렴으로 잃은 후로 관계를 통해 이야기를 잉태하기 시작한다. 오토의 음성에서 시작되는 이야기는 가후쿠의 번역을 거쳐 오토에게 전해진다. 다시 오토에게 돌아온 이야기의 잔상들은 각본, 즉 텍스트로 태어날 준비를 하게 된다. 이렇게 탄생한 이야기는 단순히 캐릭터와 플롯이 아니라 무의식과 욕망의 집합체와 같다. 오토의 음성과 그것을 양분 삼아 만들어진 이야기는 오토의 창조물이지만, 독립된 생명체처럼 타인에게 다른 모습으로 뿌리내리게 된다. 가후쿠에게 오토의 이야기는 진실이 드러나기 직전의 두려움과 불안의 기척을 품은 채 마무리되었지만, 다카츠키(오카다 마사키)에게 그 이야기는 불길한 고요함으로 가득 찬 세상의 모습이다.
각본으로 만들어진 텍스트는 결국 발화함으로써 완성된다. 그렇기에 오토는 자신의 이야기와 무의식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완성해줄 누군가를 찾았고, 그가 바로 다카츠키였다. 가후쿠의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보며 감동하고, 오토의 열렬한 팬인 다카츠키는 ‘바냐’라는 인물에는 쉽게 이입하지 못한다. 다카츠키는 체호프의 ‘바냐’보다 오토의 이야기 속 칠성장어의 전생을 가진 소녀를 닮은 인물이다. 그는 체호프의 성실하며 희망을 향해 나아가는 세계보다 무의미한 기다림과 충동과 욕망의 세계에 끌린다. 불가해하고 불길한 무언가로 가득한 오토의 텍스트야말로 다카츠키의 삶을 담을 텍스트다. 그는 오토와 같은 언어, 즉 같은 소통 방식을 공유하고 있는 인물이다. 다카츠키는 오토의 텍스트를 완성했으나 바냐가 되어 체호프의 텍스트를 완성하는 데에는 실패한다.
이와 반대로 이성적이며 통제적인 가후쿠는 오토의 텍스트를 똑바로 마주할 수 없다. 가후쿠가 오토에게서 듣는 것은 오직 이야기뿐이다. 자기 안의 진실을 마주하지 못한 가후쿠는 이야기 안의 오토를 외면한다. 가후쿠가 오토의 목소리로 듣는 또 하나의 이야기는 녹음된 ‘바냐 아저씨’의 대본이다. “대사를 입에 올리면 나 자신이 끌려 나와” 오토의 음성으로 울리는 체호프의 텍스트는 가후쿠에게 계속해서 진실보다 깊은 것을 묻는다. 가후쿠는 체호프와 오토가 자신에게 걸어오는 말을 애써 피하고 있다.
오토의 죽음으로부터 2년이 지난 후 히로시마 연극제에 초대된 가후쿠는 체호프의 희곡 ‘바냐 아저씨’의 연출을 맡는다. 가후쿠의 연극은 일본어, 중국어, 한국어 그리고 한국 수어까지 서로 다른 언어가 한데 어우러진다. 이 특별한 공연을 준비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다름 아닌 대본 리딩이다. 어떤 감정도 없이 아주 천천히 대본을 읽는 것이다. 배우들은 불완전한 언어를 뛰어넘어 소통하는 동시에 온몸으로 체호프의 텍스트를 체득해야 한다. 언뜻 이해하기 어렵고 지루한 이 과정을 가장 먼저 이해한 것은 수어를 사용하는 유나다. 자신의 언어가 타인에게 닿지 않는 것이 평범한 일인 그에게 보고 느끼며 공감함으로써 기능하는 연기는 몸에 잘 맞는 옷과 같다. “체호프의 글이 내 안에 들어와 움직이지 않던 몸을 움직이게 해 줘요” 체호프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유나와 소통하고 있다.
<드라이브 마이 카>는 하루키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만들어졌지만, 영화의 영혼은 체호프의 텍스트에 담겨있는 것처럼 보인다. 체호프의 희곡 ‘바냐 아저씨’는 ‘바냐’가 한때 누이동생의 남편이자 존경하는 학자였던 교수 세레브랴코프를 원망하고, 교수의 두 번째 부인 옐레나를 사모하게 되며 겪는 갈등을 다룬다. 체호프는 우리가 갈등과 절망, 적의와 증오를 넘어서 계속 살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현재의 고난과 슬픔보다 미래의 희망과 기쁨을 꿈꾼다. 체호프의 텍스트는 하마구치 류스케가 선택한 많은 인생을 담을 수 있는 넓은 그릇과 같다.
대본 리딩이 주를 이루는 연극 연습과 오토의 목소리로 녹음된 ‘바냐 아저씨’가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붉은색 사브 900을 오가며 영화는 체호프의 텍스트를 반복한다. 체호프의 텍스트는 대사뿐만 아니라 이야기로도 반복된다. 누이동생을 잃고, 존경하던 교수에게 실망을 거듭하며 바냐는 걷잡을 수 없는 분노에 휩싸인다. 바냐가 교수를 위해 바쳤던 청춘은 이미 흘러갔고 옐레나에 대한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며 소냐의 사랑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모든 것은 여전히 엉망이지만 바냐와 소냐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일을 계속한다. 딸과 아내를 잃은 상처를 마주하게 되는 가후쿠 뿐만 아니라 아이를 잃은 상실을 견뎌내고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게 된 유나와 애정과 증오의 대상이었던 엄마를 잃은 미사키의 삶 역시 체호프 텍스트의 또 다른 변주다.
<드라이브 마이 카>는 언어의 불완전함을 뛰어넘어 공명을 시도하는 이야기의 작동방식을 보여주는 영화다. 이는 일견 언어의 무용함을 말하는 듯 하나 각자의 언어와 이로 만들어진 텍스트는 호응하는 삶과 사람이 있다는 것에 가깝다. 감독은 언어의 가면을 쓴 이야기를 단지 텍스트가 아닌 독립된 생명체처럼 마주 보게 한다. 그렇게 언어와 텍스트는 계속해서 삶과 사람에게 호응을 시도하고 영화는 그 순간을 담아낸다.
삶과 사람을 담는 그릇
가후쿠와 미사키가 지나온 터널처럼 우리가 지나온 궤적을 이해하기 위한 이야기가 모두에게 필요하다. <드라이브 마이 카>는 이처럼 불완전한 언어와 불가해한 텍스트에 사람과 삶을 담음으로써 이야기에 힘을 불어넣는다. 언어와 텍스트가 사람과 삶을 만나는 순간 발생하는 에너지는 영화 안팎으로 퍼져나가 관객의 삶에도 영향을 미친다.
다카츠키와 가후쿠가 차의 뒷좌석에서 대화를 나누고 헤어진 후 가후쿠는 처음으로 미사키의 옆에 앉는다. 차 안에서 흡연을 피하던 가후쿠는 미사키에게도 담배를 권한다. 차 위를 향해 뻗은 두 사람의 손에서 담배 연기는 망자를 위한 향처럼 피어오른다. “넌 엄마를 죽였고, 난 아내를 죽였어” 오래된 죽음을 놓지 못하고 있던 두 사람은 도망치고 미뤄왔던 애도를 시작한다. 카메라는 나란히 피어오르는 연기에서 멀어져 익스트림 롱숏으로 이리저리 얽혀 있는 도로와 어찌 됐든 앞으로 나아가는 차들을 바라본다. 그 속에서 점처럼 작아진 사브 900도 앞으로 나아갈 거라고 믿으면서.
“바냐 아저씨, 우리 살아가도록 해요. 길고 긴 낮과 긴긴밤의 연속을 살아가는 거예요. 운명이 가져다주는 시련을 참고 견디며 마음의 평화가 없더라도, 지금 이 순간에도, 나이 든 후에도 다른 사람을 위해서. 그리고 언젠가 마지막이 오면 얌전히 죽는 거예요. 그리고 저세상에 가서 이야기해요. 우린 고통받았다고, 울었다고, 괴로웠다고요. 그러면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어여삐 여기시겠지요. 그러면 우린 기쁨에 넘쳐서 미소를 지으며, 지금 우리의 불행을 돌아볼 수 있을 거예요. 그렇게 우린 평온을 얻을 수 있을 거예요.”
소냐 역의 유나가 바냐 역의 가후쿠를 감싸 안고 수어로 전하는 연극의 마지막 장면은 연극을 보는 듯한 롱숏으로 길게 이어진다. 그리고 이를 응시하는 미사키의 곧은 정면 얼굴로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은 체호프의 텍스트에 대답한다. 체호프의 텍스트와 유나의 언어 그리고 미사키의 삶이 만난 이 장면 하나로 <드라이브 마이 카>는 그 역할을 다한 것이다. 감독이 전작 <해피 아워>(2015)에서 사람들이 서로에게 무게를 기대며 중심을 맞추는 소통에 집중했다면,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는 사람과 텍스트가, 이야기와 이야기가 마주하는 소통에 집중한다.
가후쿠가 히로시마로 향하는 도로 위에서 시작했던 영화는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고 있는 미사키의 뒷모습을 보며 끝난다. 도망치듯 떠나왔던 가미주니타키무라를 뒤로 하고, 멈춰 설 수밖에 없었던 히로시마를 벗어나 새로운 땅에서 미사키는 앞으로 향한다. 사브 900을 타고 한국 부산의 도로를 달리는 미사키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며 한결 가벼워진 표정으로 드라이브를 즐긴다. 끝없이 이어진 도로처럼 삶은 계속 이어지고, 언제나 또 다른 슬픔이 기다리고 있을 테지만 멈추지 않는다. <드라이브 마이 카>는 마침내 텍스트와 언어에 담긴 사람과 삶은 “길고 긴 낮과 긴긴밤의 연속을” 살아가게 하는 힘을 지니고 있음을 증명한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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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치 우리의 과거처럼
사람들은 어쩌다가 이렇게 비슷한 비극을 가지고 있어서, 이 이야기를 이렇게 고통스럽게 여겨야 할까?’ 하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죽음을 목격하게 될 수도 있지만, 그 전까지는 보사노바를 마음껏 즐기면 되겠지! 하는 기대와는 다르게 너무나 익숙한 비극을 마주하니 고통스러웠다. 마치 5월의 광주에서처럼, 제목에서 가리키는 ‘그들’이 피아노 연주자를 쏘아 죽인 데에는 아무 이유도 없었기 때문이다. 남은 것은 피아노 연주자의 공연이 아니라 다름 아닌 독재의 산물인 비극이다.
작가인 주인공은 우연히 한 보사노바 앨범을 발견하게 되고, 연주자를 찾아 나선다. 그는곧 피아노 연주자가 1960년대, 보사노바 장르의 인기 속에서 활동하던 테노리오 주니오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는 공연을 마친 어느 날 밤 실종되었고 지금까지 행적을 알 수 없다는 것까지. 관객에게 익숙할 만한 아티스트들, 엘라 피츠제럴드, 조빔, 빌 에반스 등의 이름을 언급하면서 영화는 보사노바 장르를 설명하고, 홀연히 사라진 테노리오의 이야기로 옮겨 간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피아노 연주자를 쐈다>는 그의 이야기가 예술과 유행, 특이한 행보에서 그치지 않고 정치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까지 알려 준다.
실종 당일 그의 행적과 그를 찾으려 노력한 가족, 친구들의 증언을 듣고 또 들으면서 영화는 그의 실종이 당시 남미를 집어삼킨 독재 정치와 연관되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점은 증언하는 모두가 입을 모아 테노리오가 실종 이전에는 정치와 전혀 관련 없는 사람이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에게는 가족이 있었고, 경제적 어려움이 있었고, 집과 피아노와 추구하는 장르가 있었고, 연인과 친구와 동료 예술가가 있었지만 독재자들이 경계할 만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고 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정치와는 무관한 피아노 연주자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관객은 독재 정치가 어떤 것인지 알게 된다. 단지 밤에 길거리를 걸어 다녀서, 예술가인 친구가 있어서 그들은 멋대로 사람을 납치하고 고문하고 죽였다. 그리고 끝내 책임지지 않는다.
수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리면서 죽어갔지만 숫자로만 기억되기에는 너무 많은 것이 함께 사라지게 된다는 것을 영화는 보여준다. 테노리오가 실종되면서 그에게는 어쩌면 앞으로 있었을지도 모를 수많은 공연과 찬사, 예술가로서의 세계가 통째로 사라졌다. 남편과 아버지로서의 삶, 그 안의 문제들을 해결할 기회도 전부 빼앗겼다. 영화는 그의 행적을 알아내려는 주인공의 여정과 여러 명의 증언, 애니메이션으로 재연한 화면을 통해서 관객이 그 사실에 천천히 당도하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피아노 연주자를 쐈다>는 마치 한국의 과거를 처음 배웠을 때의 심정처럼 관객에게 다가선다. 그것을 직면하고 나서야 마침내 보사노바를 즐길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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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알아가다,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
내 삶에서 조연 역할을 하는 것 같아.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 대사 중.
난 당신을 사랑해. 근데 사랑하지 않아.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 대사 중.
생각이 많은 듯 한 여자가 어딘가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다.
이는 영화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의 첫 시작 장면이다.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그녀의 이름은 율리에. 율리에는 하고 싶은 일은 참 많은데, 정작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는 정확히 모르며 살고 있다.
그래서인지 자신만의 뚜렷한 주관이 없어보이기도 하고, 행동 또한 산만하여 정신이 없다.
어떤 면에서는 굉장히 용감하고 추진력 있는 인물로 비추어질 수도?
성적을 잘 받으면 자신이 인정받는 기분이 들어 열심히 노력해서 들어간 의과 대학을 자신과는 맞지 않다며 바로 접질 않나, 육체가 아닌 정신 쪽 분야를 배우고 싶었다며 전과한 곳에서도 또 맞지 않다며 포기하질 않나, 이번에는 사진작가가 되겠다고 마음을 바꾸는 등 율리에는 수차례 이러한 일을 반복 거듭한다.
율리에는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고 바라는 게 무엇인지 깨닫기 위해 노력한다.
나였으면 어땠을까?
사실 율리에의 이러한 모습은 웃음을 자아낼 수 있는 포인트 중 하나이다.
하지만 나는 율리에의 거침없는 모습을 통해 웃음도 웃음이지만, 진지한 측면으로 굉장히 용감하고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율리에였다면?
원하는 것을 찾아 세상 밖으로 나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을 거라는 예감이 든다.
선뜻 용기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냥 지금 내가 하는 일에 만족한다며 스스로 합리화하고 변화는 꿈도 꾸지 못했겠지.
인생에서 주인공이 아닌 조연 역할만 하다가 끝났을 것이라는 거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고자 세상을 누비던 율리에, 그녀는 어느 파티에서 '악셀'이라는 만화가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만다.
율리에와 악셀은 나이 차이가 좀 있는데, 그래서인지 세대 차이 때문에 서로 갈등을 겪는 부분이 많아 힘들어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둘이 겪는 힘듦이 사랑의 힘을 무너뜨릴 정도는 아니었는지 서로를 사랑하며 지내는데...
역시 나이차를 생각할 수밖에 없는가 보다.
율리에와 결혼하여 아기를 가졌으면 하는 마음이 큰 40대 악셀과
아기보다는 아직 하고 싶은 일이 많기에 꿈을 포기할 수 없는 20대에서 30대로 넘어간 율리에.
이 둘의 서로 다른 생각과 가치관은 둘의 거리를 점점 멀어지도록 만든다.
비록 여성을 혐오하는 듯한 만화를 그리지만, 사람들에게 큰 인기를 얻어 유명한 만화가로 거듭난 악셀을 바라보는 율리에는 그의 모습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보며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을 것이다.
그와 자신을 비교했을 수도 있고, 그러면서 자신에 대한 회의감과 정체성을 게속해서 돌아보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던 중 율리에는 도피하다시피 들어간 아무런 연관도 없는 파티에서 '에이빈드'라는 한 남자를 만나게 된다.
율리에와 에이빈드는 첫 만남에서 대화를 많이 나누며 알게 모르게 서로를 향한 호감을 가지게 되는데...
이 둘은 서로 끌리지만, 각자 자신의 연인이 있기에
우린 바람 안 피웠어요. 전혀요.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 대사 중.
라는 말을 하며 친구로 아쉽게 발걸음을 돌리며 헤어지게 된다.
그렇게 각자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을까.
어느 날, 서점 일을 하던 율리에는 우연히 에이빈드를 보게 된다.
에이빈드도 그녀를 알아보고 자신이 일하는 곳을 알려주고 떠나는데..
악셀과의 관계에 지치던 중 에이빈드를 만나 행복해하던 율리에는 그가 알려준 장소로 곧장 향하게 된다.
여기서 포인트! 영화 기법에 주목하라!
율리에가 에이빈드를 만나러 찾아갈 때 가장 인상 깊었던 점!
율리에가 스위치를 누르자 모든 것이 멈춰버리며 세상에 움직이는 거라곤 율리에와 에이빈드밖에 없는데..
모든 게 멈춰버리고 율리에와 에이빈드, 둘만 움직일 수 있도록 한 연출과 기법이 새로운 둘 사이의 관계를 집중하는 데 있어 큰 역할을 했다.
그 속에서 율리에가 그 순간 자신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엿볼 수가 있었고, 인생의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데 있어서 행복해하는 모습들이 단연 돋보였기 때문이다.
약간의 해방감이 엿보였다고 할까.
에이빈드를 통해 자기 인생의 다음 단계를 위해 향하는 모습이 이 연출과 기법으로 인해 돋보여지는 것 같아 가장 인상 깊고 매력적인 부분이라고 볼 수 있을 듯하다.
율리에와 에이빈드는 재차 서로의 호감과 사랑을 확인하게 되고, 둘은 각자 자신의 연인과 헤어질 준비를 하게 된다.
에이빈드와의 만남을 통해 확신과 깨달음을 얻게 된 율리에는 악셀과의 만남을 정리하려 한다.
난 너의 괴짜 같은 면이 좋았어.
악셀은 그런 율리에를 말리며 잡아보려고 애쓰지만, 생각이 굳어진 율리에는 자신의 말을 번복하지 않는다.
내 삶에서 조연 역할을 하는 것 같아.
당신을 사랑해. 근데 사랑하지 않아.
라고.
율리에와 에이빈드는 새로운 사랑을 찾게 되며 만남을 이어오고 있다.
그런데 그것도 잠시 율리에는 자신의 길을 찾고자 노력하던 중 덜컥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더불어 전남친인 악셀이 암에 걸려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는 소식을 듣게 되며 또 한 번 혼란을 겪게 된다.
그럼과 동시에 율리에는 에이빈드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조금씩 엇나가게 된다.
그러는 사이, 율리에는 악셀을 만나면서 그를 통해 과거에는 발견하지 못한 자신에 대해 알아가는 시간을 가지게 되는데..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
영화는 사랑을 통한 과정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도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찾아보게끔 고민하게 만든다.
사실 사랑도 사랑이지만, 한 여자가 자신의 한계를 이겨내고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에 더 집중해서 보면 또 다른 느낌의 깊이 있는 영화가 되지 않을까 싶다.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다양한 인간관계는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다.
아마 이 영화는 여러 인간관계를 통해 미처 알지 못했던 자기자신에 대해서도 깊게 고민해보고 자신이 무엇을 진정으로 원하는지 깨닫게 해주려는 의도로 만들어진 영화가 아닐까 하고 감히 생각해본다.
여러분도 이 영화를 통해 자기 자신에 대해 더 많이 알아가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
내 인생은 내 것이니까 되도록이면 내 인생의 주인공이 되자!
*가장 눈여겨 봤던 점!*
율리에의 성장 과정
2. 영화의 연출과 기법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서 참석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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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쩌니, 태어난 이상 너희들은 다 '가여운 것들'
<가여운 것들>의 강력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벨라 벡스터(엠마 스톤)이다. 한 여자가 벼랑 끝에 서 있다. 아니 배 위에 있다. 삶의 희망을 잃은 여자. 그 배 아래로 뛰어내린다. 여자를 다시 살린 건 독거노인 과학자 갓윈 백스터(윌렘 대포)다. 얼굴이 기괴한 과학자 갓윈. 외모를 보고 성격을 판단하면 안 된다. 하지만 갓윈 박사는 어림없다. 성격마저 괴팍한 갓윈. 그에게 같이 사는 여자가 있다고 하면 누가 믿을까? 하지만 그건 진실이다. 다시 태어난 여자 벨라 벡스터는 뭔가 특별하다.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벨라. 벨라는 마치 남자 어린아이처럼 행동하고 있다. 그건 죽어가는 여자의 뇌에 그녀가 임신 중이었던 아이의 뇌를 이식해서 살려냈기 때문이다. 벨라는 아이의 뇌로 다시 태어났다. 이 말은 즉슨 벨라가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왕성하다는 의미와 통한다. 이런 벨라에게 남자 한 명이 접근한다. 남자는 갓윈의 제자 맥스(레미 유세프)다. 벨라를 짝사랑하는 남자 맥스. 소심하게 고백하지만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듣게 된다. 바로 소심하게 청혼을 건넸던 벨라와 바람둥이 변호사 던컨(마크 러팔로)이 여행을 떠난다는 소식이었다. 눈 뜨고 코 베인 맥스. 카메라는 벨라와 함께 리스본 찍고 여기저기 모험담을 펼친다.
요르고스 란티모스는 기괴함이라는 정서에 있어 도가 튼 아티스트다. 스타일적으로 '뭔가 있어 보이기 위해' 추구하는 것은 아니다. 이를 위해 일반적으로 '란티모스'하면 떠오르는 장면부터 이야기해 보자. 굳이 마이너 한 예술영화의 세계까지 파지 않더라도 <킬링 디어>에서 배리 키오건이 파스타를 먹는 장면 정도는 오며 가며 사람들이 봤을 클립이다. 키오건이 훌륭한 연기자라는 사실에는 여지가 없다. 연기를 잘하니까 임팩트를 남기는 것이다. 하지만 그동안 할리우드를 주의 깊게 본 영화팬들이라면 '란티모스에게 이 장면만 있지 않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기괴함의 정점은 란티모스가 국제적으로 처음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영화 <송곳니>에서 확인할 수 있다. <송곳니>를 보면 신체 노출부터 시작해서 폭력묘사까지 이 세상 기괴함은 다 가져다 놨다. 갑자기 이 감독에서 봤던 그로테스크한 장면들이 더 떠오른다. <더 랍스터>에서 갑자기 총을 쏴서 직원을 죽이는 장면, <킬링 디어>에서 초반 심장 수술 장면, 니콜 키드먼이 맡은 안나가 길쭉하게 뻗어있는 모습이 그렇다. 이렇게 시각적으로 임팩트를 주는 방법을 아는 감독이기 때문에 그의 영화가 더 강렬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이면에 깔려있는 무언가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있다. 파스타를 징그럽게 먹는 것이나 <송곳니>에서의 가족에 대한 비유 같은 것들은 일상적인 것에서 조금 비틀어서 '인위적인 것'을 만든다는 것에 있다. 우리가 쉽게 다들 알고 있는 '불쾌한 골짜기'를 영화의 동력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그의 최고작이라고 볼 수 있는 <킬링 디어>와 <더 랍스터>에서 영화 이야기의 형식과도 이어진다. <킬링 디어>에서 영화는 어떤 대상을 관객에게 이해시키려는 생각 자체가 없는 듯하다. 그냥 알고도 당하라는, 전지적인 목적을 가지고 인물들과 관객들을 괴롭힌다. 실제로 카메라는 마치 누군가를 위에서 지켜보는 것처럼 부감 숏(천장에서 바닥으로) 찍는 것 같고 사운드는 관객을 내내 불편하게 만든다. 그냥 일반적인 카메라와 사운드로도 이 영화가 가진 인간의 굴레를 묘사할 수 있는데 내내 이야기를 인위적으로 비튼다. <더 랍스터>도 사랑에 실패하면 동물이 된다는 설정은 곧 '사랑이 억지로 되는 일인가'라는 의구심을 들게 만든다. 이것 역시 인위적으로 이야기를 만들었는데 이것은 영화가 인간이 어떻게 사랑에 빠질까?를 보여주기 위한 설정이다. '억지로' '근거를 들어서'사랑에 빠지지 않는 인간의 단면을 잘라서 제시하는 것이다. 이렇게 란티모스의 필모그래피를 종합해 보면 그는 인위적이라는 속성을 시각적으로, 또 플롯의 핵심으로, 장면 연출로 소화하는 아티스트라고 볼 수 있다. 이 <가여운 것들>은 그 모든 것들이 고농도로 함유되어 있는 영화다.
가령 이 영화의 미술에 대한 부분이 그렇다. 이 영화의 세트장과 조명, 의상 같은 시각적 요소들은 란티모스가 인위적으로 만든 것들이다. 영화는 란티모스가 구축한 거푸집 아래에 이야기를 전개한다. 영화의 핵심을 전달하기 위해 응당 당연하게 골라야만 했던 선택지다. 그럼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무엇일까 따지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글쓴이는 이 영화가 다루고 싶어 하는 핵심을 '시스템'이라고 본다. 영화는 벨라와 그녀를 둘러싼 세상을 다룬 것이다. 기득권이 지배하는 세상을 다루고 싶어 하는 영화가 그 안의 세상을 통제하지 못하면 나사가 빠졌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반대측면에서 질서를 깨는 인물들의 모습을 스크린 안으로 갖고 오기에도 용이할 것이다. 이 인위성에 대한 부분은 배우들이 연기하는 방식과도 이어진다. 글쓴이는 영화를 보면서 후반부를 제외하고 다들 인형의 집처럼 뚝딱거린다고 느꼈다. 이것은 전적으로 의도가 있다. 누군가의 편의를 위해 만들어진 세상을 비판하는데 배우들이 자연스럽게 일상적인 문법으로 연기한다면 그 고지식함과 완고함이 체감이 안 될 수도 있다. 세계에 대한 인물의 대응을 자연스러움으로 표현해서 이질감을 키우는 선택지를 둔 것이다. 공간의 측면에서도 이 영화가 기괴한 동화로 연출한 이유가 분명하다. 왜 이 영화는 일종의 성에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을까? 영화가 이 영화의 세계를 좌지우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요르고스 란티모스가 연기의 톤으로 이 영화의 세계를 좌지우지한다는 걸 보여준 것처럼 공간과 미술로도 이 영화의 핵심을 드러낸 것이다. 이렇게 '세상을 움직이는 절대자의 속성이 전적으로 드러난다'는 측면에서 '뇌'가 직접적으로 등장하고, 섹스신이 적나라한 것은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니다. 인간의 실존을 드러내는 두 소재라는 것 역시 중요하지만 굳이 보여주지 않아도 되는 것들을 인위적으로 제시한다는 점에서 영화의 핵심에 닿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뇌와 섹스라는 소재는 이야기를 전개하는 데 있어 큰 차이가 느껴지는 부분이 아니다. 왜? '뇌'를 이식한 인간의 실험을 통해 새롭게 만들어지는 것은 새로운 생명체다. 매춘 그러니까 성관계를 통해 새롭게 만들어지는 것은 역시 생명체다. 마찬가지로 갓윈 박사의 실험체는 그 나름의 시스템을 만드는데 일조한다. 새로운 생명의 잉태는 내가 어떤 세상에 태어날지 고를 수 없다는 점에서 시스템에 일조하는 역할이 될 수도 있다. 두 소재가 이야기의 맥락에서 공통점을 가지는 것이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으로 이 영화의 벨라는 두 인위적인 행위를 직접 겪는 개체이기도 하다. 영화도 이 구분선을 일부러 흐린 것이다.
영화의 기술적인 부분에서도 시스템에 대해 표현한 부분이 보인다. 이 영화의 사운드 중 몇 음악은 거의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시그니처라고 볼 수 있는 것들이다. 이런 사소한 것부터 시작해서 광각렌즈를 활용한 촬영방식도 이 영화의 기괴하고 독특한 에너지만을 강조시키기 위한 것은 아니다. 시스템에 대항하는 영화가 기존의 영화 만들기 관습에 편승해서 제작된다면 뭔가 모순된 것이 아닐까? 하지만 촬영이나 사운드보다 이 영화에서 더 중요하게 시스템을 강조하는 것은 편집인 것 같다. 이 영화에서 섹스신이 들어가는 방식은 뭔가 이상하다. 구체적으로 흑백에서 컬러로 넘어갈 때 맥스가 "나는 벨라가 무사하길 바란다"라고 말하는 장면 바로 다음으로 덩컨과 벨라의 성관계 장면이 나온다. 이 장면은 영화 나름대로 블랙코미디를 구사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다른 장면들과 비교했을 때 위 두 가지 사운드와 촬영을 활용한 것과 공통점이 있다고 봤다. 전형적인 연출 방식을 거부하는 것이다. 실제로 이후 전개에서 영화는 편집을 통해 섹스신을 느닷없이 보여주거나, "뜨거운 뜀박질"이 대사에 전면으로 나오더라도 보여주지 않는다. 기억나는 장면이 벨라가 어디 잠깐 나갔다가 들어온 후의 장면이다. 이 장면에서 벨라가 덩컨에게 "우리 뜨거운 뜀박질을 해요!"라고 말한다. 그럼 이 <가여운 것들>이 이전에 수도 없는 섹스신을 보여줬기 때문에 이번에도 나오지 않을까? 싶지만 영화는 벨라가 신체를 노출하는 모습만 보여주고 이 부분을 생략해 버린다(편집에 대한 부분은 아니지만 이후 벨라가 매춘을 하는 장면에서도 벨라가 노숙자에게 "갑자기 들어가면 안 된다"식의 대사를 하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 이것은 영화가 이야기의 리듬을 섹스신을 활용해 변화를 준 것으로 읽을 수 있다. 기존 영화들이 유지해 온 흐름을 사운드와 편집, 촬영으로 부정한 것이다.
이 인위적으로 무언가를 거부하는 형태는 곧 영화의 플롯과도 이어진다. 영화는 일부러 두 명의 흑인 캐릭터를 등장시켰다. 왜? 이야기에서 벨라의 내적 성장을 이끄는 인물들이기도 하지만 이 인물들이 보여주는 행보도 영화에서 어떤 것들을 반박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첫째. 흑인 남자는 옆에 앉아있는 백인 아줌마에게 "섹스를 안 한 지 20년 됐다니 딱하네요"라고 대놓고 면박을 준다. 글쓴이는 이 대사가 가스라이팅이라고 느꼈다. 하지만 이후 이 흑인 남성 캐릭터가 하는 대사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에 대한 코멘트를 보고 이 영화가 다루고 싶어 하는 틀이 넓다는 걸 느꼈다. 영화가 표면적으로 보이는 것처럼 여성의 성적 자기 결정권을 다루며 정체성에 대해 다루지만 사실 이 틀을 이루는 것이 얼마나 허상인가를 보여주는 건지를 암시하는 설정이라고 봤다. 이것은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서 인물과 인물이 영화 안에서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가? 와도 관련이 있다. 영화를 보면서 생각난 건 '니체'에 대한 짧은 지식이었다. 니체가 인간의 몸을 조명했고 영화가 섹스를 다룸에도 이유가 있다. 하지만 가장 궁극적인 이유는 벨라 / 세상을 구분 짓는 구분선이 니체의 개체론이 연상됐기 때문이다. 이 세상을 구성하는 데 있어 정말 중요한 건 그 세계를 이루는 요소들이 내가 알고 있는 니체의 개체론이다. '신은 죽었다'라는 문장이 여기서 근거하지 않나? 다시 영화로 돌아와서 이 <가여운 것들>이 다루는 흑인 남성 캐릭터는 사실상 벨라의 세계를 대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타락에 대해 비판하면서 '섹스 20년 동안 못한 여성을 비웃는'것이 인간이고 이 세상인 것이다. 후반부에 등장하는 흑인 여성 캐릭터도 이 니체의 사상 하에 있는 캐릭터라고 생각했다. 흑인 여성 캐릭터는 벨라에게 공감한다. 바로 정서적인 유대를 나누는 듯하다. 하지만 이 인물 역시 벨라에게 성적 행동을 한다. 단순히 이 흑인 여성 캐릭터가 무슨 목적으로 벨라에게 접근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덩컨이나 매춘 노숙자들도 벨라와 성관계를 맺었다는 점에서 흑인 여성과 노숙자는 동격에 놓이는 듯하고, 이 흑인 여성 캐릭터 역시 이 영화의 세상을 이룬다고도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흑인 남성 캐릭터가 자본주의나 사회주의 같은 거시적인 개념을 건드렸다면 반대로 여성 캐릭터는 인간과 인간사이의 유대감과 기본적인 인간관계를 다룬 것이다. 이렇게 영화는 개체를 가지고 사회 시스템에 대해 다루는 과감한 시도를 보여줬다.
영화가 몇 소재를 인위성이라는 모티브와 함께 다뤘다는 것은 영화의 맥락과도 이어진다. 이 영화는 인위적으로 벨라의 분신을 만들어 여성 서사로서의 이야기도 포함하고 있다. 이 영화에는 벨라의 분신들이 여럿 등장한다. 동물과 동물을 이어 붙인 형태에 대한 부분이다. 개랑 닭을 이어 붙인 모습이나, 학과 얼룩말이 연결되어 있는 모습이 여러 장면에 등장했다. 이것은 벨라부터가 여성의 몸에 남자의 뇌를 결합한 인물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이런 분신들 중에 가장 중요한 건 펠리시티(마가렛 퀄리)다. 이 펠리시티가 이야기에서 큰 역할을 한다고 보긴 어렵다. 하지만 이 펠리시티는 영화의 핵심인 '시스템'을 보여주기 위해 중요하게 작동한다. 우선 돌연변이 동물들이나 펠리시티나 누가 만들었을까? 의 측면에서 그 근원을 따져야 한다. 이들을 만든 인물은 아마 갓윈으로 보인다. 갓윈은 영화 안에서 대놓고 '창조주'라 불리며 이 시스템을 만든 인물로 묘사된다. 남성 캐릭터가 세계관에서 새로운 생명체를 만들었는데 그 생명체가 주인공이다라는 점은 이 영화가 '페미니즘 영화'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충분한 근거를 갖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이 영화는 여성 영화이기도 하다. 벨라는 세상이 규정한 여성의 정의를 온몸으로 부수며 질주하는 캐릭터라는 점은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가여운 것들>이 인위성을 여성 영화로서의 맥락을 갖추기 위해서만 사용한 것은 아닌 것 같다. 이 영화에서 생명체를 만든 인물은 갓윈이고 남성이다. 그리고 영화에서 벨라는'상위 계층이 지켜야 할 윤리'에 전면으로 부딪히는 인물이다. 그럼 여성 해방 서사로 읽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성매매업자와 펠리시티, 그 옆의 하녀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성매매업자는 여성이다. 이 캐릭터는 벨라에게 "누구와 성매매를 할지 넌 고를 수 없다"라고 말한다. 비슷한 맥락에서 펠리시티와 하녀는 벨라에게 "몸 파는 여자"라며 극언을 입 밖에 낸다. 심지어 하녀는 벨라에 대해 안 좋은 이야기를 성 안의 사람들에게 한 것으로 보인다. 사실상 이 둘은 여성의 주체성을 방해하는 인물인 것이다. 여성의 자유를 방해하는 3의 시선을 공고히 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내가 영화를 연출하는 사람이다. 여성을 둘러싼 고압적인 시스템을 묘사하고 싶다. 그렇다면 이런 요소들을 영화에 넣지 않을 것 같다.
이 페미니즘 영화의 틀을 반쯤 탈피한 것은 엔딩에서 더 크게 강조된다. 엔딩을 보면 블레싱턴 장군의 몸에 동물의 뇌가 이식된다. 뭐 여성에게 고압적이었던 인물이 응당 맞이해야 할 벌을 받았다고도 볼 수 있겠으나 글쓴이는 살짝 다르게 봤다. 사실상 블레싱턴 장군과 벨라는 동격이 된 것이다. 벨라가 빅토리아일 때의 이야기를 영화가 보여주지 않아 그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알 수 없어 벨라가 훨-씬 아까운 사람이다. 하지만 이 자체만을 보면 '다른 개체의 뇌'가 이식됐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다. 여기에 더 나아가 벨라가 유사 아버지였던 갓윈의 직업을 물려받기까지 한다. 그렇다면 벨라는 새로운 생명체를 재창조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갓윈처럼 세계의 기득권이 될 수 있다. 또 다른 버전의 <가여운 것들>이 블레싱턴을 주인공 삼아 만들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이 점에 비추어 볼 때 이 영화가 단순히 1차원적인 페미니즘 영화라고 볼 수 있을까? 글쓴이는 아니라고 본다. 영화가 남근주의적인 시대상만 조롱하는 것이 아닌 인류의 역사를 거슬러올라가 '기득권에 서는 것'이 얼마나 따분한 짓인지를 강조한 것이다. 이렇게 두 종류의 인간(남/녀)의 구분선을 흐린 선택은 벨라의 가장 기본적인 속성을 따져봐도 다시 읽을 수 있는 맥락이다. 벨라는 자신의 몸을 팔았던 것, 그러니까 욕망에 직설적이었던 사실을 전혀 부정하지 않는다. 인물에서 더 나아가 영화도 이런 벨라를 부정하지 않는다. 벨라가 빅토리아일 때 어떤 인물인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연출부터 빅토리아보다 벨라의 편을 든 것이다. 이 연출에는 여성의 몸에 남성의 뇌가 이식된다 한들 이 사회를 이루는 시스템은 여전할 거라는 조소가 담겨있는 듯하다. 이는 가족이라는 소재로 당시 그리스의 기득권을 비판한 <송곳니>에서도 느껴졌던 서늘한 조롱이었고, '란티모스의 영화다!'라고 느낀 부분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영화에 단점처럼 느껴지는 부분이 있었다. 이 모든 이야기가 친절하지 않다는 점이다. 본인이 쓴 모든 글의 내용에 대해 '영화는 그런 게 아냐!'라고 비판하는 평자가 있다면 그 나름대로 맞는 말이다. 무슨 말이냐고? 홍상수의 영화들은 이 <가여운 것들>과 저 멀리 반대편에 있다고 볼 수 있는데 '자연스러운 것'을 우선순위로 두는 사람들에게 이 영화는 죄다 인위적인 것투성이다. 그리고 영화가 전면에 성적인 소재를 등장시키고 있어서 어떤 관점에 있어서는 '여성해방이 곧 모험이고 섹스냐'라는 비판도 합리적일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원작을 안 읽어서 이 문장에 확신을 담을 수는 없겠지만 후반부의 각색에 대해서는 원작 팬들이 할 말이 있을 것 같다. 이 광범위한 이야기를 펼친 것에 비해 후반부 문제를 해결하는 규모가 좀 작은 느낌이 있다.
하지만 글쓴이는 재밌었다. 이렇게 다층적이면서 선명하게 주제를 강조한 란티모스의 역량은 현재 최고의 폼을 구가하는 예술가 다웠다. 휘황찬란한 미장센에 눈이 즐겁고 기괴한 사운드에 청각적인 쾌감까지 느끼는데 이야기가 깊기까지 하니 보는 동안 '이 아침에 극장에 오길 잘했다' 싶었다. <추락의 해부>가 청각과 시각이라는 인지체계를 활용한 각본으로 우리에게 재미를 주고 <오펜하이머>에서 핵폭탄을 플롯처럼 만든 것 그리고 <바튼 아카데미>가 이야기를 고전적으로 만든 것처럼 연출과 이야기가 딱 맞아떨어지는 섹시한 영화가 탄생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각색상은 <오펜하이머> 여우주연은 <플라워 킬링 문>의 릴리 글래드스턴, 작품상은 <오펜하이머>가 받을 것 같다. 아마 상 받아도 미술상이나 의상상이 가능성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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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쩌면 가장 정의로운 선택일 마지막 선택, 심판(Aus dem Nichts, 2017)
우리는 언제나 예상치 못한 사건들을 맞이하고, 이를 해결해야 할 때 때론 법보다는 자신의 선택이 더욱 타당하다고 느끼는 순간들이 있다. 그렇기에 상황에 따른 딜레마에 빠지기도 하는데, 법이 내린 결정이 부당하다면, 내가 직접 심판을 내리는 것은 어떨까?
갑작스러운 상황을 나타내는 독일어 원제(Aus dem Nichts)와 같이, 영화는 약 2시간의 러닝타임 동안 어디로 튈지 모르는 긴장감을 구사한다. 사랑하는 가족과 행복한 나날을 보내던 카디아는 네오나치의 공격으로 한순간에 일상을 잃어버리게 된다. 폭발 사고로 남편과 아들이 곁에서 떠나는 안타까운 일이 벌어진 것이다. 영화 오프닝 신에서 이 모든 일이 발생하는데, 폭발음이 들린다던가 배경 음악이 깔리는 등의 장치적 요소는 등장하지 않는다. 그저 평범한 일상을 이어가던 중, 예고 없이 시작되는 비극을 제일 현실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아이를 데리러 다시 찾아온 건물은 무너져 있고, 앞에는 경찰차와 구급차가 즐비하게 늘어나 있다. 뒤이어 이어지는 절규를 시작으로 모든일이 벌어진다.
전체적인 화법은 사건 자체보다는 그 일을 기점으로 변화하는 증인이자 또 다른 직접적인 피해자인 카티아의 시선으로 올곧게 직진한다. 제일 소름이 돋았던 점은 남편이 일하는 건물 앞에서 잠시 이야기를 나눴던 여성이 용의자라는 사실. 여성이 건물 앞에 세운 자전거 안의 폭탄으로 가족은 처참하게 희생된 것이다. 수사 초반 남편은 마약 밀매를 했다는 오명을 받고 희망을 잃어버렸던 카티아는 좋지 않은 선택을 시도하지만, 어느덧 사건에 윤곽이 잡히며 다시 의지를 일으켜 본다. 이상적으로 모든 일이 일사천리에 해결되는 모습들보다는 실제 상황에 기반하여 끝없는 법정 공방을 보여준다. 관객에 입장에 서 있는 우리는 최대한 빠져나갈 구멍이 없도록 옥죄어 가는 변호사의 변론에 안도하면서도, 작은 꼬투리를 잡고 공격적으로 늘어지는 검사의 반론에 함께 분노하게 된다. 판이 점차 카티아의 승소로 기울어져 보이지만, 도무지 끝이 날 것 같지 않은 재판들은 지침과 새로운 불안감을 조성한다.
이렇게 생생한 현장감과 더불어 색다른 카메라 워킹은 영화의 또 다른 감각을 불어넣는다. 그동안 봐왔던 재판 현장을 다루는 영화들은 주로 발언이나 표정들을 강조하기 위해 인물들의 얼굴을 위주로 클로즈업하는데, 카티아가 증인석에서 발언석으로 이동하는 동선을 부감 샷(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샷)으로 잡는다. 상황을 생각지 못한 시점으로 내려다보면서 엄숙한 법정의 분위기에 더 집중하고, 압도당하게 된다. 또한 분명 유리하게 작용하던 재판이 예상치 못한 결과를 맞이했을 경우를 잘 보면 알프레드 히치콕의 현기증을 떠올리게 하는 카메라 기법(카메라를 뒤로 빼면서 렌즈를 줌인)을 사용한다. 이런 섬세한 연출들을 통해 인물의 복잡하고 절망적인 심리를 강조하면서 당시의 상황을 더욱 피부로 와닿게 표현한다.
무엇보다 가장 눈여겨볼 만한 것은 불도저같이 끝을 보는 카티아의 태도이다. 특히 가족을 다루는 경우에 종종 등장하는 신파 장면 없이, 가해자의 손을 들어준 법정과는 또 별개로 그는 자신만의 심판을 준비한다. 아마 이 장면이 가장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는 하이라이트가 아닐까 싶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방식으로 영화는 파격적인 엔딩을 맞이한다. 법이 정당하지 않은 판결을 내렸을 때 진정한 정의구현의 방식을 카티아 스스로 만들어감으로써 딜레마를 깨버리고, 가장 직접적으로 와닿는 해결 방식을 해낸다.
<심판>은 지금까지 봐왔던 법정 공방을 다루는 영화 중에서도 진솔함이 잘 묻어나고 피해자 위주의 입장을 유지한다는 점에서 윤리와 정의를 구현하려는 진중한 시도가 돋보인다. 게다가 독기 어린 시선을 끝까지 지켜내는 다니앤 크루거의 눈빛을 보고 있자면, 복수만큼 용서를 재촉하는 것은 없다는 말이 떠오른다. 카티아는 자신을 파멸로 이끌면서까지도 결국엔 법 앞에 승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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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엇이 장애인을 ‘장애인’이게 하는가
7★/10★
장애등급제는 장애인들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한다는 목적으로 1998년에 제정되었다. 이후 장애인은 장애 정도에 따라 1~3급(중증), 4~6급(경증)으로 나뉘어 차등 지원을 받았다.* 그러나 수많은 장애의 양상이 고작 여섯 개의 등급에 완전히 들어맞을 리 없다. 존재를 등급으로 나누어 차등하는 일은 언제나 딱 맞지 않는, 경계에 있는 존재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영화 〈복지식당〉은 장애등급제가 어떻게 제정 목적과는 정반대의 효과를 야기하는지를 고발한다. 주인공은 “누가 봐도 1급”인데 장애등급 심사에서 5급 판정을 받은 재기다. 재기는 교통사고로 ‘중증’ 장애를 입었으나, 팔을 들어 올릴 수 있고 몇 미터나마 걸을 수 있다는 이유로 ‘5급’ 판정을 받는다. 결과는 재앙이다. ‘5급’은 사사건건 재기의 발목을 잡는다. 활동보조를 신청할 수도, 장애인 콜택시를 지원받을 수도 없다. 모두 ‘중증’ 장애인에게만 제공되는 복지 혜택이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전동휠체어 구입 지원을 알아보려 건강보험공단에 문의하지만 공단 직원은 장애인 단체에 가서 상담을 해보라고만 말한다. 장애등급을 재지정받기 위한 행정심판을 알아보는 재기에게 ‘업무 방해’ 운운하며 짜증을 내는 공무원도 있다. “왜 진작 5급이라고 말 안 해서 사람 헷갈리게 해요?”라는 수모는 그에게 일상이다. 즉, 재기에게 장애 등급을 부여한 국가는 있지만 재기의 권리를 보장하는 국가는 없다. 국가는 멍에만 줄 뿐 그 무엇도 책임지지 않는다. 제도와 인간의 뒤바뀐 위계에 권위를 부여하여 장애인을 수치심과 좌절의 영역에 방치할 뿐이다.
취업도 마찬가지다. 재기는 민관이 함께 마련한 장애인 취업 면접에 참여한다. 그러나 면접관은 ‘제대로 걷고 물건도 들 수 있는 사람(경증 장애인)’만 채용한다고 말한다. “제대로 걷고 물건도 들 수 있으면 그게 장애인인가요? 비장애인이지”라는 재기의 대꾸에는 깊은 분노와 좌절이 담겼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가닿지 못하고 공허히 흩어진다. 그렇다고 중증 장애인을 채용하는 회사에 취직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재기가 ‘5급’이기 때문이다. 모든 게 이런 식이다. 지팡이를 지원받을 때, 행정심판 비용 마련을 위해 은행에 대출받을 때도 등급이 문제다. 현실과 등급의 불일치는 재기가 가는 모든 곳을 끈덕지게 따라다니며 그를 괴롭힌다.
〈복지식당〉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재기는 복지 제도의 모순과 공백을 영악하게 이용하는 장애인에게도 소외당한다. 병호는 재기가 병원에 있을 때 만난 지체 장애인으로 어려움에 처한 재기에게 행정심판을 위한 변호사 소개, 장애인 콜택시 지원, 장애인 스포츠 선수 등록 등 여러 호의를 제공한다. 막다른 골목에 몰린 재기에게 병호의 호의는 큰 도움이 되고 둘은 금세 서로 호형호제하며 가까워진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병호의 호의가 재기 삶에 대한 통제로 변하기 시작한다. 자신의 영향력이 확대되자, 병호는 이를 위력으로 전환해 금전적‧감정적 착취를 일삼는다. 심지어 홀로 아들을 키우는 재기의 사촌누나에게도 자신이 재기의 안위를 손에 쥐고 있다고 뻐기며 치근덕거린다. 병호는 제도의 허점을 파고들어 단단한 카르텔을 형성하여 위력을 획득했다. 재기뿐만 아니라 장애인 지원센터, 활동보조인 모두가 병호의 위력 아래 있다. 병호가 동료 장애인을 데리고 장애인 활동지원 센터를 옮기면 그 센터는 망하고, 병호에게 밉보이면 활동보조로 일하기가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병호는 장애등급제의 허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장애를 가진 채 태어나 가족에게 버림받고 시설에 들어갔다가 18살에 나온 그는 제도의 틈새에서 자신의 ‘살 자리’를 찾았다. 장애인에게는 ‘집단 내 밥그릇 싸움이 유일한 생존 수단’이라는 감독의 말**은 병호의 주도면밀한 ‘악랄함’이 어떻게 가능해졌는지를 가늠케 한다. 요컨대 병호는 장애인에게 주어지는 제도적 수혜의 최대치를 활용하는 데 능숙하다. 이는 병호에게 이용당하다 버림받은 재기가 끝내 가지지 못한 것이다.
병호에게 굽신거리기를 거부하는 재기가 그에게 맞는 등급을 부여받아 필요한 지원을 받을 수 있을까? 복지제도의 은유인 ‘식당 메뉴판’은 과연 모든 장애인이 누려 마땅한 권리를 알기 쉽게 전달하는 언어로 다시 쓰일 수 있을까? “부디 제가 자립해서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장애 등급을 재지정해달라는 판사를 향한 재기의 호소는 제대로 응답받을 수 있을까? 그리하여 마침내 복지 제도는 ‘인간다운 삶’을 보장한다는 본래의 목적에 더 가까워질 수 있을까?
이 질문들은 ‘무엇이 장애인을 장애인이게 하는가’라는 근본적 물음으로 나아간다. 재기는 단 한 번도 장애 그 자체 때문에 좌절하지 않는다. 장애가 곧 불행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재기가 등급과 상관없이 활동보조와 장애인 콜택시를 이용할 수 있었다면, 경제 활동을 할 수 있었다면, 공적 권력이 자신의 책임을 다해 병호에게 의지할 필요가 없었다면, 애초에 인간에 ‘등급’을 매겨 차등 지원하는 폭력적 발상이 없었다면……. 꼬리에 꼬리를 무는 가정(假定)들은 늘 재기를 배반하는 방식으로 귀결되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재기를 ‘불행’하게 만든다. 병호의 호의로 잠시나마 긍정적인 미래를 그릴 수 있었을 때, 재기가 행복한 표정으로 웃는 장면 역시 그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 장애 그 자체가 아님을 짐작케 한다.
2022년, 장애인 이동권 시위로 생긴 큰 ‘소란’이 해가 바뀐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장애인은 다른 소수자에 비해 상대적으로 대중에게 더 큰 ‘온정적’ 시선을 받는다. 하지만 이들에게 필요한 건 호의가 아닌 권리 보장이다. 장애인이 자신에게 허락된 선을 넘은 결과는 처참했다. 재기가 행복할 가능성을 배반한 여러 가정이 그러했듯, 섬세하고 꼼꼼하게 질문되어야 할 문제들은 비장애인들의 ‘불편함’과 대립하는 구도에 갇혀 이번에도 제대로 논의되지 못하고 있다. 〈복지식당〉은 권리 보장을 외치는 장애인의 몸과 말을 꼼짝 못하게 만드는 사회에 대한 영화적 개입이다. 재기가 묻는다. 무엇이 장애인을 ‘장애인’이게 하는가.
*진보적 장애인 단체는 장애등급제를 폐지하기 위해 오랫동안 싸워왔다. 이들의 주장은 일부 수용되어 현재는 장애가 중증과 경증의 두 단계로 나뉜다. 그러나 장애인 단체의 요구는 장애등급제의 ‘완전한’ 폐지다.
**김소미, “‘복지식당’과 함께 장애인 권리 투쟁의 현실을 돌아보다”, 〈씨네21〉, 2022.04.21.
★이 영화는 시리즈온, 티빙, 웨이브, 쿠팡 플레이, 왓챠 등에서 다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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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정
중국6세대 감독인 지아장커 감독의 연출작품. 이 작품이 중국에서 살아남아 세계에 널리 공개되었다는 게 신기할 만큼, 이 작품은 중국 내부의 문제를 날카롭게 보여주고 있다. 힘 있는 영화의 공통점은 '보여주되 설명하지 않는다'로 특징할 수 있는데, 이 영화도 그렇다. 관객은 주인공들이 놓여 있는 상황을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주인공들이 하는 언행을 통해 그가 놓여 있는 사회적 위치와 사람들과의 관계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주인공들은 모두 사회에서 밀려난 가장자리 인물이다. 그들은 빠르게 변화, 발전하는 중국 사회를 따라가지 못하거나 그럴 능력을 가지지 못해 어쩔 수 없이 강요된 삶을 살아야 한다. 이들의 모습이 온전한 자본주의 체제에서라면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원칙에 따라 밑바닥 삶을 살아가는 도시빈민으로 규정되고, 자본주의의 소모품으로 전락하는 것을 당연히(!) 여기겠지만, 중국은 사회주의 체제를 유지하면서도 경제 분야에서만 자본주의 방식을 채택하고 있는 이중성 때문에 인민의 삶은 사회적으로 통제 받으면서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적 노동자로 규정되는 모순의 존재가 되었다.
이 모순은 곧 중국이라는 거대한 집단 체제의 모순이자, 개인에게 강요되는 구조적 모순이다. 이렇게 이해할 수 없는 사회적 모순 속에서 살아가는 '개인'은 선택을 강요당한다. 자본주의적으로 살아갈 것인가, 사회주의적으로 살아갈 것인가. 영화는 이 질문을 받은 네 명의 평범한 중국 인민이 어떻게 대답하는가를 보여준다.
영화에서 거의 드러나지 않고, 관객들이 쉽게 알아보기 어렵지만, 영화 속 풍경은 매우 의미 깊은 배경이다. 중국은 땅이 넓은 만큼, 세계적으로 아름다운 풍경도 많아서, 중국의 자연을 보기 위해서라도 일부러 관광을 오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보이는 풍경은 회색 도시와 재개발 현장의 살벌한 풍경이다.
오래된 주거지가 파괴되어 사라지고, 멀리 고층 아파트가 옥수수처럼 솟아오르며, 길은 파헤쳐지고, 보이는 모든 곳에서 공사가 벌어지고 있다. 중국은 '근대화'하고 있다고 말하지만, 그 근대화가 과연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근대화인지 회색빛 암울한 풍경은 중국 인민의 불투명한 미래를 상징한다.
영화는 강렬한 이미지로 시작한다. 사과를 실은 큰 트럭이 옆으로 넘어져 있고, 붉은 사과가 거리에 쏟아진 채 있다. 그 옆에 몇 사람이 어쩔줄 모르고, 한 사람(따하이)이 오토바이에 앉아 사과 한 개를 손으로 굴리며 그 풍경을 바라본다.
이 첫 장면은 영화 전체의 의미를 상징하는 메타포다. 무수히 많은 과일(중국의 부)이 아무렇게나 널렸지만, 그것은 임자(중국 공산당과 자본가)가 있기 때문에 건드려서는 안 된다. 그것을 무단으로 가져가는 것은 반당 행위이며, 자본가의 재산을 훔치는 절도가 된다. 즉, 중국 인민은 겉으로 보이는 풍요로움을 누리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것은 처음부터 그들, 인민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뒤이어, 포장이 안 된 자갈길을 달리는 오토바이. 그를 둘러싼 사내들의 손에는 손도끼가 들려 있다. 산적이다. 지나가는 사람에게서 돈을 뺐고 살해하는 산적이 옛날 이야기에나 나오는 줄 알았지만, '현대' 중국에는 아직도 산적이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오토바이를 탄 사내는 그러나 놀라지 않는다. 그는 침착하게 품속에서 권총을 꺼내 세 명을 사살한다. 도끼를 든 산적에게 총을 쏘는 건 범죄가 아니다.
따하이는 우진산 마을 촌장과 학교 동창이자 친구인 쟈오셩리에게 불만이 많다. 그는 베이징에 있는 공산당 기율위원회에 촌장과 쟈오셩리를 고발할 생각이다. 그는 고발장을 써서 우체국에 가지만, 우체국 직원은 주소를 똑바로 쓰지 않으면 보낼 수 없다고 말한다.
따하이는 많이 배운 사람이 아니다. 그는 무식한 사람이고, 평생 노동자로 살았다. 그의 친구이자 지금은 촌장처럼 똑똑하지도, 말을 잘 하지도 못한다. 또한 친구였던 쟈오셩리는 자가용 비행기를 타고 다닐 정도로 성공한 재벌이 되었지만, 촌장이나 재벌 친구는 그들이 마을 주민을 등처먹고 부자가 된 것을 알고 있기에 잘못된 것을 바로 잡으려 한다.
우진산 마을에 있는 탄광은 국가 소유로, 마을 주민들이 공동으로 운영하던 곳이었지만, 개방화 이후 탄광을 개인에게 임대할 수 있도록 법이 개정되었다. 마을 촌장은 친구인 쟈오셩리에게 탄광을 임대하면서, 탄광에서 나오는 수익의 일부분을 마을 주민에게 배당할 것이라고 약속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배당금은 나오지 않았고, 쟈오셩리는 자가용 비행기를 타고 다닐 정도로 부자가 되었지만, 마을 주민은 여전히 가난할 뿐이다. 따하이는 이것이 분명 촌장과 쟈오셩리가 마을 주민을 속이고 있다고 생각하고, 당 기율위원회에 고발하는 한편, 마을 주민들에게도 알리려 한다. 하지만 마을주민들은 수동적이고, 촌장이나 쟈오셩리에게 잘못보이면 그나마 생계도 더 어려워질 것이어서 따하이를 멀리 한다.
쟈오셩리가 마을에 돌아오는 날, 마을은 온통 난리가 난다. 환영회에 참석하는 사람에게는 밀가루 한 포를 준다는 말에 마을 주민들이 동원되고, 따하이도 따라간다. 쟈오셩리를 위해 만든 개인 비행장으로 자가용 비행기가 내려 앉고, 최고급 옷으로 치장한 쟈오셩리 부부가 내린다. 아이들이 꽃을 바치고, 악단이 동원되어 악기를 치며 연주하고, 마을 주민들은 목소리를 높여 '쟈오셩리 회장님을 환영합니다'라고 외친다.
이런 극진한 대접은 중국공산당 고위 관료가 아니면 받을 수 없는 융숭한 대접이지만, 이제 중국 자본가는 중국공산당 고위 관료와 같은 대접을 받는다. 공산당과 자본가의 이종교배인 셈이다.
쟈오셩리가 도도하게 마을 주민들과 아는 척을 하며 걸어올 때, 따하이가 앞으로 나서서 배당금 이야기를 하지만, 무시당한다. 사람들이 모두 떠나고, 따하이는 쟈오셩리의 부하에게 폭행당하고 머리가 깨져 피가 흐른다. 병원에서 머리를 감싸고 있는 따하이에게 쟈오셩리의 부하가 찾아와 돈다발을 던지며 이걸로 끝내자고 비웃으며 말한다. 따하이는 골똘히 생각에 잠긴다.
따하이는 병원에서 나와 누나를 찾아간다. 누나는 셋집에 살고 있고, 여전히 가난하다. 동생 따하이가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고 사는 것이 소원이지만 따하이는 이제 반백의 늙은이로, 더 살고 싶은 마음도 없다고 말한다. 그가 누나를 찾아갈 때의 심정은 복잡하다. 더 이상 말로는 문제가 해결될 것 같지 않고, 희망도 없어 보인다. 자기가 하는 말이 마을 주민을 위한 것이지만, 마을 주민들도 나 몰라라 하고, 돈과 권력을 가진 촌장이나 쟈오셩리 같은 갑부는 이제 더 이상 마을 주민을 위해 일하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따하이는 집으로 돌아와 벽장에서 총을 꺼낸다. 그는 호랑이가 그려진 헝겊으로 총을 둘둘 말고, 거리로 나선다. 그는 먼저 마을회계사 리우의 집으로 간다. 마을 기금과 공동 재산에 관해 그가 가장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따하이는 리우에게 회계 비리를 스스로 밝히라고 말하지만, 평소 사람 좋고, 조금 멍청해 보이는 따하이를 보며 리우는 총을 쏠테면 쏘라고 말한다. 마을에서 함께 자란 사이라 설마 죽이기야 하겠느냐는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따하이는 가차없이 방아쇠를 당긴다. 그때 문을 열고 들어오던 리우의 아내도 사살한다.
마을 사무실로 촌장을 찾아가는 따하이. 평소 자기를 업신여기고 촌장의 충실한 부아인 직원 리우리우를 살해하고, 촌장이 있다는 절을 찾아간다. 마을 큰길을 지날 때, 주민들이 모여 있고, 총을 메고 가는 따하이에게 어디 가느냐고 묻는다. 따하이는 '짐승 잡으러 간다'고 말한다. 그에게 촌장이나 자본가 쟈오셩리는 인간이 아닌 '짐승'인 것이다. 마침 절 앞으로 나오던 촌장과 맞닥뜨린 따하이는 가차 없이 촌장을 살해한다. 그리고 다시 마을로 돌아오는 길에 말을 학대하는 남자를 사살하고, 마지막으로 쟈오셩리를 찾아간다. 공사장 가운데 전혀 어울리지 않는 외제차 마세라티가 서 있다. 마을 주민 대부분은 가난에 허덕이고 있지만, 이 자본가는 자가용 비행기에 고급 외제차 마세라티를 몰고 다닌다. 그가 번 돈의 많은 부분은 원래 마을 주민에게 돌아가야 할 몫이었지만, 촌장을 비롯한 몇몇이 마을의 부를 빼돌려 자기 배를 채운 것이다.
따하이는 열려 있는 마세라티의 뒷자석에 앉아 쟈오셩리가 오길 기다린다. 그리고 차에 타는 쟈오셩리의 뒤통수에 총구를 들이대는 따하이. 쟈오셩리는 따하이에게 원하는 건 모두 들어주겠다고 말한다. 따하이는 그 말이 거짓말이라는 걸 잘 알고 있고, 그래서 아무런 거리낌없이 방아쇠를 당긴다.
조우산은 기차를 타고 충칭에서 내린다. 그는 영화 첫 장면에서 도끼를 든 세 명의 산적을 죽인 남자다. 오랜만에 고향을 찾아오지만, 고향은 피폐하다. 가까운 곳에 거대한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고, 마을 주위는 공사를 하느라 어수선한 풍경이다.
그는 어머니 칠순잔치에 참석하느라 어렵게 먼 길을 왔다. 아내와 아들이 있지만 오래도록 만나지 못해서인지 어색하다. 아내는 남편이 무슨 일을 하는지 알고 있는 듯하다. 돈을 보내지만, 그 돈은 받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아무리 가난해도 떳떳하지 않은 돈으로 생활하기는 싫다는 조우산의 아내는 순진하고 어리석지만 정직한 중국 인민의 전형이다. 조우산의 형도 같은 유형이다. 어머니 칠순 잔치를 치르고 축의금을 결산하면서, 약간의 돈이 남았고, 그 돈을 정확히 네등분으로 나눠 갖기로 한다. 조우산은 자기 몫은 어머니를 드리라고 말한다.
조우산은 쫓기고 있고, 어디론가 떠나야 하는데, 광저우, 이창, 난닝으로 가는 표를 구입한다. 어디로 갈지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 그는 집을 나서 시내로 들어가 일꾼 행색으로 변장하고 은행 앞에서 기다린다. 돈이 많을 것 같고, 돈을 많이 찾아 나오는 부자를 물색하는 중이다. 한 부부가 눈에 들어왔고, 그는 대낮 거리에서 두 사람을 쏘고 돈가방을 들고 유유히 그 자리를 빠져나간다.
오토바이를 타고 도로를 달리는 조우산 앞에 소를 실은 트럭이 간다. 그 소는 자기 운명을 모르는 채 죽음을 향해 가는 조우산 자신이자, 중국 인민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는 시외버스를 타고 가다 정류장이 아닌 곳에 내려달라고 말한다. 그렇게 조우산은 사라진다. 그리고 그 버스에는 요우량이 타고 있다.
요우량은 버스터미널에서 샤오위를 만난다. 두 사람은 불륜이다. 요우량은 아내가 있고, 샤오위와 만나지만 아내와 헤어진다는 확신을 갖지 못한다. 샤오위는 둘이 광저우로 가서 새롭게 살자고 말하지만, 요우량의 태도는 어정쩡하다. 태도를 분명하게 하라며 다그치는 샤오위. 두 사람은 기차역에서 헤어지고, 샤오위는 요우량이 가지고 있던 칼을 손에 넣는다.
샤오위가 근무하는 사우나에 도착하자 요우량의 아내가 어떻게 알고 찾아와 행패를 부린다. 샤오위는 일단 그 자리를 피해 엄마에게 간다. 엄마는 공항을 짓는 공사장에서 밥집을 하고 있는데, 곧 공사가 끝나면 일꾼들이 떠날 거라고 말한다. 이 공항 공사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에게 통행세를 받는 사람들이 있다. 엄연한 불법이지만, 불법을 통제하지 않는 사회의 단면을 보여준다. 통행세에 항의하는 공사장 노동자를 폭행하는 이들은 지역의 조직폭력배들로 보인다.
샤오위는 다시 사우나에서 일하는데, 이 사우나는 사우나도 하지만, 성매매도 하는 곳이다. 그는 사우나의 카운터를 보는 직원일 뿐인데, 남자 손님(낮에 봤던 공사장 입구에서 통행세를 받던 두 남자)들이 와서 샤오위에게 성매매를 하라고 강요한다. 샤오위는 그냥 직원일 뿐이며, 자기는 안마도 잘 못하고, 성매매는 하지 않는다고 강하게 말한다. 그러자 샤오위를 돈다발로 때리며 샤오위를 모욕한다. 참을 수 없던 샤오위는 칼을 꺼내 남자를 찔러 죽인다.
요우량은 공장 사장이었다. 그가 운영하는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 샤오후이는 동료와 이야기를 하다 동료가 다치게 되면서, 일을 방해한 책임으로 몇 달치 임금을 그 동료에게 주어야 한다는 말을 듣는다. 그 말을 듣고 공장에서 도망쳐 친구가 일하는 동관으로 간다. 친구는 큰 공장에서 일하는데, 돈을 더 많이 벌고 싶은 샤오후이는 친구의 소개로 클럽 웨이터로 일한다.
시골에서 살던 샤오후이에게 클럽은 믿기 어려울 정도로 화려하고, 번쩍거리는 첨단의 문물이었다. 예쁜 여성들이 수백 명이나 되고, 같은 웨이터 남성들도 수십 명이 넘는 거대한 클럽은 돈이 흘러넘치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같은 후난성 출신인 여직원 리엔룽을 만난다. 웨이터는 팁으로 받는 돈이 공장에서 일할 때와는 비교가 안 되게 많았고, 몸도 힘들지 않았다.
하지만 사랑하는 줄 알았던 리엔룽은 돈을 벌어야 한다며 클럽에서 남자들의 온갖 더러운 요구를 따라야 하고, 그걸 본 샤오후이는 환멸을 느끼고 다시 친구가 일하는 공장으로 돌아온다. 월급은 적은데, 집에서 엄마는 돈을 더 보내라고 독촉하고, 예전 다니던 공장에서 손을 다친 동료가 찾아와 돈을 내 놓으라고 협박한다. 궁지에 몰려 어떻게도 할 수 없는 샤오후이는 공장 기숙사 건물에서 뛰어내린다.
샤오위는 셩리그룹에 면접을 보러 간다. 그곳에서 쟈오셩리의 아내에게 면접을 본다. 두 사람 모두 후베이 출신이고, 셩리의 아내는 어디선가 샤오위를 본 적이 있는 것 같다고 말한다. 아마 신문에 살인사건이 실렸을 것이고, 샤오위는 정당방위라도 짧게는 감옥에 있다 나왔을 것으로 추측된다.
샤오위는 따하이가 살던 후베이로 간다. 그곳에서 경극을 보는 마을 주민들과 함께 경극을 본다. 경극 무대를 바라보는 마을 주민들의 수많은 얼굴이 보이고, 영화는 끝난다.
중국 인민이 묻는다. 과연 지금 중국은 올바른 길을 가고 있는가. 중국은 인민의 행복을 위해 공산주의를 일정부분 포기하고,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도입했고, 실제 중국의 부는 급격하게 늘어나 배고픔에서 벗어난 인민이 많지만, 자본주의 경제로 인해 중국 인민 대부분은 노예로 전락하고, 공장의 소모품이 되었으며, 빈부의 격차는 더 커졌다.
중국은 공산당 일당독재를 하면서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용인하는 한편, 공산당원이 권력을 사용해 부를 독점하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인민의 대부분이 가난으로 시달리지만, '기본소득제' 같은 공산주의 사회에서 당연히 해야 하는 정책도 펼치지 않고 있다.
중국의 현실은 인민의 고통과 피땀의 결실로 벌어들인 막대한 부를 바탕으로 공산당과 자본가(그들 대부분이 공산당원이다)들이 배를 불리고, 그렇게 벌어 들인 돈으로 군비를 확장해 중국은 패권국가, 제국주의 국가로 변신하려 한다. 이제 중국에는 공산주의 철학과 사상은 볼 수 없고, 마르크스, 레닌의 가르침도 사라졌다.
마오쩌둥은 여전히 우상이지만, 마오쩌둥 시대에 벌어졌던 무수한 인민 학살과 굶주림으로 죽은 인민에 대한 이야기는 금기이며, 문화대혁명으로 동포를 학살하고, 중국의 오랜 문화와 역사를 말살한 사건은 덮어두고 있다.
중국 인민의 삶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으며, 자본주의 경제체제에서 그 격차는 더욱 커지고, 절대적, 상대적 빈곤과 인간의 노예화, 인간의 소모품화는 공산주의 체제일 때보다 더 극심하다. 인민을 돌보지 않는 정부는 신뢰를 잃고, 인민 위에 군림하려는 권력은 타도의 대상이 될 뿐이다. 영화는 인민이 사용하는 폭력을 정당화한다. 인민을 무시하고 돈과 권력을 차지하는 촌장과 자본가, 돈으로 가난한 여성노동자를 폭행하는 돈 많은 건달은 인민의 총과 칼에 죽어도 싸다.
빈곤에 허덕이는 젊은 노동자가 자살하는 것은, 중국의 미래를 상징한다. 중국이 인민의 삶을 보장하지 않으면, 인민은 희망을 잃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처럼, 중국의 미래를 포기할 거라는 예언이다.
애둘러 말하지 않고,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지아장커 감독의 이 작품은, 중국 내부의 체제와 계급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이자 예언이다. 인민의 삶을 보장하라. 그렇지 않으면 권력은 무너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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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랑종」리뷰ㅣ쫄보기자들과 바이럴에 낚였습니다...ㅣ랑종 후기ㅣ
? "랑종" 리뷰(*스포없음)
- 랑종 정보
장르: 공포, 미스터리, 스릴러, 드라마, 페이크 다큐멘터리, 오컬트
감독: 반종 피산다나쿤
각본: 나홍진, 반종 피산다나쿤
제작: 나홍진, 반종 피산다나쿤
원안: 최차원, 나홍진
- 랑종 스토리 시놉시스
태국 북동부 ‘이산’ 지역 낯선 시골 마을.
집 안, 숲, 산, 나무, 논밭까지,
이 곳의 사람들은
모든 것에 혼이 깃들어 있다고 믿는다.가문의 대를 이어 조상신 ‘바얀 신’을 모시는 랑종(무당) ‘님’은
조카 ‘밍’의 상태가 심상치 않음을 직감한다.
날이 갈수록 이상 증세가 점점 심각해지는 ‘밍’.
무당을 취재하기 위해 ‘님’과 동행했던 촬영팀은
신내림이 대물림되는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밍’과 ‘님’, 그리고 가족에게 벌어지는 미스터리한 현상을 카메라에 담기 시작한다.신내림이 대물림되는 무당 가문
피에 관한 세 달간의 기록
#랑종 #랑종리뷰 #랑종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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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리볼버> 공식 2차 예고편
"약속한 돈을 받는데 무슨 각오가 필요해” 꿈에 그리던 새 아파트 입주를 기다리던 경찰 수영은 뜻하지 않은 비리에 엮이면서 모든 죄를 뒤집어쓰면 큰 보상을 해준다는 제안을 받고 이를 받아들인다. 2년 후 수영의 출소일, 교도소 앞 그녀를 찾아온 사람은 생전 처음 보는 윤선 뿐 수영은 일이 잘못되었다고 직감한다. 잃어버린 모든 것을 되찾기 위해 보상을 약속한 앤디를 찾아 나선 수영은 그 뒤에 있는 더 크고 위험한 세력을 마주하게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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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강릉> 30초 예고편
강릉 최대 조직의 ‘길석’
평화와 의리를 중요시하며 질서 있게 살아가던 그의 앞에
강릉 최대 리조트 소유권을 노린 남자 ‘민석’이 나타난다
첫 만남부터 서늘한 분위기가 감도는 둘,
‘민석’이 자신의 목표를 위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두 조직 사이에는 겉잡을 수 없는 전쟁이 시작되는데..
거친 운명 앞에 놓인 두 남자
그들의 이야기가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