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예슬2021-11-29 21:50:57
길거리로 내몰린 아이들
<꿈의 제인> 영화리뷰
*해당 영화 감독은 과거 성범죄 전과가 있는 감독으로 감상할 때 주의하시길 바랍니다.
영화 '꿈의 제인'을 통해 가장 먼저 알게 된 것은 가출 청소년들이 그들만의 무리를 만들어 가족처럼 생활하는 '가출팸(가출 패밀리)'의 존재였다. 그러나 이들 중 대부분은 경제적으로 독립을 하기 어려운 상황이며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보호를 받지 못하기 때문에 거리에 나와 방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렇게 대안가족을 형성한 가출팸들은 생계를 꾸리기 위해 돈을 벌려고 하지만 아르바이트를 하기 힘든 상황이기 때문에 쉽게 범죄에 노출되고 비행을 겪기도 한다.
누구보다도 보호 받아야 되는 이들이 계속해서 위험에 노출 된다는 것과 이들을 구제하고 보호할 수 있는 방법이 별로 없다는 것이 안타까웠다. 보통 가출 청소년의 경우 집안에서 가정폭력을 겪거나 엄마 혹은 아빠의 부재로 인해 보호자와 갈등을 겪으며 충동적으로 집을 나오기도 하는데 문제는 안락한 주거공간이 없기 때문에 누군가의 보호가 절실하다는 점이다. 온라인 채팅 상에서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가장 대표적인데 이들을 보호해준다는 명목 하에 만남을 요구하다가 성폭행을 당하거나 성매매 카르텔에 빠지게 된다는 점이 가장 충격적이었다.
비록 영화 속에서는 그런 모습을 보여주지는 않았으나 주인공인 소현은 가출팸의 보호자 제인의 사망 후 거리를 전전하다 만난 가출팸 안에서 불안을 느끼며 끊임없이 유해한 환경에 노출되고 자신을 지켜주려던 지수의 죽음을 목격하는 등 비극을 겪는 것을 보게 된다. 영화를 통해 가출팸에 대해 더 자세히 알아보기 위해 자료조사를 하던 중 청소년의 성매매 혹은 청소년이 성범죄에 노출되는 가장 큰 수단이 랜덤채팅임을 알 수 있었는데 문제는 이 랜덤채팅을 이용하는 청소년의 수가 증가하며 연령은 낮아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시간으로 누군가가 이런 행위를 감시하지 않는 이상 청소년을 보호하는 것은 힘들 뿐더러 직접적인 범죄행위가 이루어지지 않는 이상 글이나 채팅으로는 범죄로 간주하지 않기 때문에 범죄가 발생하기 이전에 청소년을 구제하기 힘들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바로 이런 허점을 알고 있는 이들이 이점을 이용해 범죄를 저지르고 그 행위에 가담하는 사례가 발생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가출팸이 주목을 받는 경우는 이미 범죄가 이루어진 뒤 피해자가 발생한 상황, 피해자가 가해자가 된 경우다.
나는 이런 상황에서 청소년들이 성범죄 및 비행에 노출되지 않고 사회의 보호를 받으며 생활할 수 있도록 구제하는 시스템이 마련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가출팸은 군대처럼 위계조직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범죄나 비행에 있어서 쉽게 탈출하기 어렵다. 이렇게 생존만을 위해 산다면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 잊기 쉽고 결국 더 많은 범죄가 양산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우리 사회가 소위 가출팸이라고 불리는 이들이 윤리의식을 지키며 사회의 범주 안에서 안전하게 생활할 수 있도록 성인으로서, 책임이 있는 사람으로서 올바른 길로 인도해야 할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사회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범죄가 발생하는 것을 막고 피해자들을 보호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기술의 발달로 인해 다양한 형태의 범죄가 생기는 만큼 우리가 사용하는 인터넷, 이를 누릴 수 있게 만든 IT업계들이 책임감을 갖고 건전한 인터넷 문화를 형성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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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이는 것, 보이지 않는 것, 그리고 그 너머의 것
[다른 것으로 알려질 뿐이지] (2024)
감독: 조희영
시놉시스
당신은 무엇을 보는가
어느 날 갑자기 자취를 감춰버린 정호. 정호의 애인 수진. 정호를 짝사랑하는 인주. 정호의 옛 애인 유정. 수진은 정호 모르게 훈성과 비밀스런 만남을 이어가고, 인주는 시한부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정호에게 품은 마음을 고백하기로 한다. 유정은 정호의 자살 시도에 대한 죄책감으로 애인 우석과의 관계가 위태롭기만 하다. 그런데, 정호는 어디로 갔고 정호를 먼저 만난 건 누구인가? 그 정호는 정호가 맞는 걸까? 보이는 것과 믿는 것 그 사이 어딘가, 다른 것으로 알려질 이야기들.(출처: KMDb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어떤 것들은 깨지면서 수많은 파편을 남긴다.눈에 보이는 조각도 있지만, 보이지 않는 조각들도 있다.이쪽에 떨어졌을까, 저쪽으로 튕겨 나갔을까, 아니면 가루처럼 흩어져 버렸을까.한참이 지나 맞추려 할 땐 이미 사라져 버린 파편들을 찾을 수 없다.
영화 ‘다른 것으로 알려질 뿐이지’는 마치 오래전에 깨져 버린 무언가를 맞추려 흩어진 파편들을 찾아가는 것과 같았다. 인물들의 관계는 언제, 어디서 시작되어 어떻게 부서졌는지 - 혹은 부서졌는지 조차 선명하지 않다. 사건을 인과적으로 쌓아 올려 관계를 설명하지도 않는다. 대신 정호와 얽힌 세 인물의 사연과 이들의 기억 속 파편들을 하나씩 꺼내 보여준다. 그 속에서 드러나는 것은 명확한 진실이 아니라, 관계가 남긴 잔해와 흔적들이다.
정호는 극의 중심에 있으면서도 말수가 적고 자주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수진, 유정, 인주 — 세 인물은 모두 정호와의 깨진, 혹은 아직 끝나지 않은 관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수진은 훈성과 비밀스러운 만남을 이어가지만 행복하지 않다. 정호와의 풋풋하고 따뜻했던 기억은 현재를 더 괴롭게 만든다. 유정은 우석과 만나면서도 정호와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정호의 자살 시도에 대한 죄책감은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더라도 그녀의 독백과 행동 곳곳에 스며 있다. 인주는 언제부터 정호를 좋아하게 된걸까? 책 사이에 숨겨둔 편지처럼, 인주의 마음속 어딘가에 정호의 흔적은 숨어 있다.
이렇듯 정호는 부재 속에서도 수진의 기억에, 훈성의 글에, 유정의 불안에, 인주의 편지에 여전히 살아 있다. 단순히 하나의 인물 또는 주변 인물들의 기억이 아닌 ‘다른 것’으로 끊임없이 변주되어 각자의 내면 속에서 다른 얼굴로 모습을 드러낸다. 영화는 정호가 실제 어떤 사람인지, 왜 사라졌는지를 설명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관객에게 해석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사건의 전말이나 진실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기억되는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후반부로 갈수록 텐션이 고조되거나 사건이 명확하게 풀리지 않는다는 점은 호불호가 갈릴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오히려 그 모호함이야말로 영화가 던지고자 하는 주제와 닿아 있다. 인과의 불확실함, 시간이 흐르며 퇴색되는 진실을 보여주기에 가장 설득력 있고 인상 깊었던 전개 방식이었다.
일상 속 순간들은 어떻게 기억되는가?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은 어떤 모습으로 남는가?때로는 의식조차 못 한 채 잔상이 되어 우리 안에 남아 있는지도 모른다.일상 속 무수히 많은 ‘다른 것’으로, 어쩌면 자신의 일부가 되어.*본 리뷰는 씨네랩 크리에이터로 시사회에 참석 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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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정말 사랑한 게 맞을까,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
"사랑했지만~ 그대를 사랑했지만~" 김광석의 노래 가사 중 일부다. 나의 어렸을 적 음악 취향은 김광석에 일부 있었다. 그것도 <사랑했지만>을 좋아했다. 왜 좋아했니?라고 물으면 팍 터지는 하이라이트 후렴부가 좋아서!라고 답할 것이다. 10대 때 '난 김광석이 좋아요'라고 말하곤 했었던 과거의 나. 이 말을 들은 많은 어른들은 '네가 김광석에 대해 뭘 아니?'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왜냐면 김광석은 시간이 지나면서 느껴지는 게 많은 아티스트였기 때문이다. 이 말은 즉슨 어린 친구가 나에게 '김광석이 좋아요'라고 했을 때 '네가 뭘 아느냐'식의 꼰대스러운 반응이 나올 수도 있다는 뜻을 의미한다. 물론 안 그래야겠지. 16살 중학생이 나보다 더 철들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잖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지나면서 느끼는 것이 달라진다는 말은 부정하기 힘들다. 사람이 나이를 들면서 성장이라고 하는 게 있으니 생각이 달라지는 건 뭐 당연한 말이다. 그런데 그 와중에도 우리의 인생에서 변하지 않는 것이 있는 것 같다. 남의 떡이 더 맛있어 보인다는 말처럼 새로운 것은 사람의 시선을 강탈하기에 충분하다. 내가 경험해보지 않은 게 참 멋져 보인다는 건 잘 알면서도 끊기가 어려운 것 같다. 물질적인 것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다. 책과 영화를 보는 이유도 새로운 재미를 찾고 싶어서 그런 것 같다. 알면 알수록 이것에 점점 질려오지만 이걸 채우려고 난 참 안간힘을 쓴다. 그리고 이 영화도 그 예외는 아니었다. 난 언제쯤 제대로 된 사랑을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자주 던지고 있던 즈음에 '새로운 것과 오래된 것'은 어떤 의미인지를 전달하는 영화가 나타났다. <우리도 사랑일까>다.
운명 같은 사랑이긴 한데
마고는 비행기를 탔다. 여행을 마무리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마고의 눈에 어떤 남자가 눈에 띈다. 이름은 다니엘. 이 남자 어디에서 몇 번 본 것 같다. 어디에서 봤지? 여행을 하다 마주친 적이 있었던 것 같다. 그래. 거기서 봤었지. 간통죄를 처벌하는 상황극에서 봤었다. 비행기에서 처음 대화를 하는 두 사람. 비행기도 우연히 옆자리에 앉았다. 시답지 않은 헛소리만 늘어놓는데 유머감각이 있어서 웃기긴 하다. 금세 친구라도 된 듯 대화를 하는 두 사람. 마고는 공항이 두렵다고 말하며 '중간에 붕 떠있는 게 두렵다'라고 말한다. 장면이 전환되고 두 사람은 비행기에서 하차한다. 엥. 알고 보니 두 사람은 사는 곳도 비슷하다. 집이 같은 방향이니 만큼 같은 택시를 타고 온 두 사람. 마고는 남자에게 '나 결혼했어요'라고 말한다. 자연스럽게 내가 유부녀라는 이유로, 잠깐 여행하다 만났다는 이유로 거리를 둘 수 있어 다행이다. 당연히 남편이 있으면 애인이 없어야 정상이잖아? 그런데, 이 막연한 바람은 의미가 없어졌다. 다니엘과 마고의 거주지가 단지 같은 방향이라 끝나는 수준이 아니다. 바로 옆 집에서 산다.
사실 살짝 비튼 각도에서 보면 운명적인 사랑이 맞다. 대화도 잘 통하고. 사는 곳도 비슷하고. 여행지에서 만날 정도로 취향도 비슷한 셈이다. 그리고 그에게는 뭔가 다른 느낌이 있다. 그냥 뭔가 다르다. 늘 같은 일상을 살던 마고에게 재미있는 무언가를 가져다주는 사람이다. 그런데 재미가 있고 나발이고 간에 마고는 새로운 사랑을 시작해선 안 된다. 나를 사랑하는 남편도 있고, 처가 식구들도 그렇게 나쁜 사람이 없다. 이런데도 마고는 새로운 무언가와 지금 갖고 있는 현재의 것들 사이에서 고민하기 시작한다. 영화는 이 새롭게 찾은 마고의 운명적인 사랑을 소재로 삼으며 '새로운 것과 예전 것의 차이점'에 대해 조명한다.
많은 경험으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것들
사랑의 경험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게 아닌가 싶다. 틀린 선택지를 한 번쯤 골라봐야 '어떤 것이 최선이었는가'를 답할 수 있으니까. 또 열렬하게 사랑해본 기억이 사람을 성장시켜 준 다는 것에는 여지가 없다. 그런데 그것과 무관하게 우리는 마음의 구멍 하나쯤은 품고 산다. 그 구멍 채우려고 바쁘게들 산다. 친구라는 이름도, 연인이라는 것도 그의 비슷한 맥락이다. 새로운 무언가를 안다는 것은 그만큼 신선한 재미를 안기게 해 준다. 가끔 우리는 이런 것들 덕에 외롭지 않다고 느끼는 것 같다. 천만에. 어림없다. 새로운 건 늘 나이 들기 마련이다. 잠깐 느낀 신선함이야 말로 사람을 더 외롭게 만든다.
영화는 이 절묘한 틈을 파고든다. 새로운 것과 갖고 있는 것의 차이를 미묘하게 보여준다. 마고가 하고자 하는 일을 유심하게 보시라. 또, 다니엘의 취미에 집중하시라. 이 둘은 분명히 다르지만 '표현한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이는 무언가를 아내에게 계속 시도하지만 눈치채지 못했던 마고의 처지와 대비된다. 철저한 연출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 극초 반부부터 제시하는 다니엘의 성격 특성을 집중해보자. 마고가 다니엘을 만나면 어떤 행동을 자주 하는지를 조명하면, 그와 현 남편 루와의 차이점을 알 수 있다. 단순하게 '새로운 것을 만나 그녀는 어떻게 변하는가'만 생각해봐도 영화의 깊이가 옅지 않다. 당연하지. 그게 소재인 영화인데. 그런데 그 새로운 것을 대면하며 반응하는 인물의 선택지가 '누구를 나쁜 인간으로 만드는가'를 잘 마무리지었다는 점에서 탁월했다고 본다.
꼼꼼한 연출
영화를 보면 잊히지 않는 장면이 몇 개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극초 반부에 마고가 요리를 하는 장면이 있다. '그냥 요리하는 장면 아닌가?'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장면이 왜 나에게 임팩트가 있었는지는 끝까지 보신 분들은 이해할 것이다. 또 'video kill the radio star'라는 노래 가사가 나오는 장면이 있는데, 이 음악의 활용도 탁월했다. 그리고 중반부에 조명을 왔다 갔다 하는 신이 있다. 이 장면은 두 번 반복해서 나타나는데, 색감을 활용한 방식이나 미셸 윌리엄스의 연기가 많은 것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연출에 대해 이야기할 때 절대로 빠져선 안 되는 장면이 있다. 하이라이트 신이다. 개인적으로는 '굳이 이 정도로?'싶었지만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엔딩이었다는 것에는 여지가 없다. 영화를 보며 관객이 느꼈을 감정을 그 찰나에 모두 압축시킨 훌륭한 장면이었다. 아. 이들과는 별개로 영화 자체의 색감이 잘 빠진 편이라 보기 편하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사랑 잘하는 데에 나이가 어디 있겠냐만은
뭐 나이 먹었다고 해서 똥차 만나지 말라는 법 있을까? 아마 아닐 것이다. 마찬가지로 정말 인격이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구린 사람 만나서 연애할 수도 있다. 그게 뭐 비단 누구의 탓으로 돌릴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명제들을 분명히 잘 알고 있지만 이 영화는 경험이 많은 이들에게 추천하고 싶다. 우리가 살다 보면 '이래야 하지 않았나'하는 미련을 마주하게 된다. 그때 그 사람과 헤어질 걸. 그 사람 잡았어야 했나. 경험이 많으면 많을수록 이런 아쉬움이 사람의 마음에 깊게 남아있다. 영화는 이 아쉬움을 갖고 있는 이들을 위한 큰 한방을 준비했다. 계속해서 반복되는 왈츠 속에 산다 하더라도 우리는 명심해야 할 게 있다. 지금 내가 서 있기 위해 어떤 것이 소비되고 있는지에 대해서다. 우리는 이 덕에 행복한데 이것을 잊고 살다 간 인생이 파는 같은 함정 속에서 놀아나는 꼴이 아닐까 싶다. 이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그러려니 잊어버린다면 계속해서 반복되는 삶의 루틴 속에 미친놈마냥 나이 들다 가는 거겠지.
사랑일까? 묻지 마라. 삶은 그게 '사랑이 맞다'라고 진작에 답을 내렸다. 그리고 다 알고 한거잖아? 뭔가 새로울거라 생각해서.
#왓챠영화추천 #넷플릭스영화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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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IMFF 인터뷰] ‘배우’ 임현식의 포부, “언젠간 영화음악에도 도전해보고 싶어요”
‘더 영 맨 앤드 더 딥 씨’는 제20회 제천국제음악영화제 한국 경쟁 장편 상영작이다. 아이돌 그룹 비투비 멤버이자 솔로 아티스트인 임현식의 미니 2집 앨범의 제목이기도 하다. 개막식 다음 날인 6일, 예술의 전당에서 임현식 배우를 만났다. 그는 ‘배우’라는 호칭에 민망한 듯 웃었지만 인터뷰가 시작되자 진지하고 담담하게 자신의 음악 여정과 앞으로의 계획을 들려주었다. 바다를 닮아 깊고 푸른 그의 이야기는 내내 신중했지만 막힘이 없었다.
‘더 영 맨 앤드 더 딥 씨’가 영화제 예매 오픈과 동시에 매진되었다고 들었습니다. 임현식 배우님 어머님도 티케팅이 실패하셨다고요. (웃음)
어제 개막식 참여해 레드카펫 밟았는데 낯설지만 너무 기분이 좋았습니다. 개막식 자리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제가 영화인의 길에 발을 내딛은 느낌이라 설레고 감사했습니다. 팬분들께서도 많은 관심을 가져주셔서 너무 감사하고요. 어머니는 개막식만 보시고 다시 서울로 돌아가셨습니다. (웃음)
가수로서 영화제 참석이 쉽지만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저한테는 큰 도전이었습니다. 출품할 때 비경쟁 부문이라도 선정되기를 바랐는데 작품을 좋게 봐주셨는지 경쟁 부문까지 선정해주셔서 너무 감사한 마음입니다. 제가 차분하고 무뚝뚝한 편인데 감독님께 전화로 소식 듣고 오랜만에 ‘하이’한 상태가 될 정도로 기분이 좋았습니다. 믿기지가 않았어요. 출품 후 영화제 시작까지 굉장히 행복한 기다림의 시간이었습니다.
‘청년과 바다’의 느낌을 표현하고 싶었다
기절할 정도로 고생해 찍은 뮤직비디오, 모든 순간이 고비
헤밍웨이의 소설 ‘노인과 바다(The old man and the sea)’에서 영감을 받아 앨범, 영화 제목을 지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노인과 바다’를 읽고 노인이 멋있다고 느꼈어요. (웃음) 한 가지 일을 오랫동안 하는 게 너무 대단해 보였고, 혼자서 묵묵히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서 꿈을 좇는 모습이 참 좋았습니다. 저도 솔로 앨범을 준비하면서 더 빛나는 저를 위해, 한 단계 진보하기 위해 고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혼자 있는 시간을 많이 가지며 더 고독해지려고도 했고요. 그래서 헤밍웨이의 작품을 오마주해서 ‘청년과 바다’ ‘청년과 심해’의 느낌을 표현해보고 싶었습니다.
관객분들이 영화에서 집중해서 봐줬으면 하는 장면이나 포인트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많은 분이 뮤직비디오를 스튜디오에서 촬영하고 CG도 많이 썼다고 생각하시더라고요. 그런데 한 장면도 스튜디오에서 촬영하지 않았고 모든 수중 촬영을 바다에서 했어요. 이런 도전이 포인트인 것 같아요. 수중에서 촬영하다 보니 체력적, 정신적으로 힘든 부분이 정말 많았거든요. 그런데 영화에서 보면 제가 너무 행복하게만 보이지 않나 싶기도 해요. 정말 그때 ‘내가 미쳐 있었나 보다’, ‘어떻게 했지’ 싶은 장면이 많을 정도로 고난도의 촬영을 했는데, 이 부분을 잘 봐주시면 좋겠습니다. 뮤직비디오는 안 담겼는데, 영화에는 제가 정말 오래 숨을 참고 있는 장면이 나와요. 편집하면서 그 장면 볼 때 울컥했던 기억도 있습니다.
이 영화를 메이킹 필름의 형태로 공개하지 않고 영화로 제작한 이유가 궁금합니다.
음악을 직업으로 하고, 음악을 사랑하지만 저는 정말 다양한 예술을 사랑해요. 영화도 그중 하나고요. 어렸을 때부터 영화 보는 거 좋아했고 작업할 때도 영화에서 영감을 많이 받았거든요. 언젠가 영화음악에 도전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있어요. 같은 맥락에서 이 영화가 영화제까지 온 것도 하나의 도전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영화 음악에도 도전하신다면 어떤 장르의 영화 작업을 해보고 싶으신가요?
제가 엔니오 모리꼬네를 정말 좋아해요. 정말 다양한 장르의 영화음악을 하셨잖아요. 그중에서도 사랑스러운 곡들, 사랑스러운 분위기가 강조되는 곡을 좋아해요. 이번 앨범에는 제 이야기가 많이 담겼지만 언젠가는 두 연인의 로맨스를 담은 영화 음악도 해보고 싶어요.
배우님은 RESCUE 자격증이 있으실 정도로 다이빙을 즐기신다고 들었습니다. 그렇다 해도 장비 없이, 그것도 뮤직비디오 촬영을 바다에서 하는 건 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 같습니다.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 많은 일이 있었어요. 위험하니까 테스트를 정말 많이 했어요. 사전 답사 때 포인트들을 다녀봤지만 매일이 다르니까요. 몸이 뜨지 않기 위해 몸에 무게도 다양하게 달았고, 의상과 헤어도 쉽지 않았고, 표정도 그랬어요. 촬영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때는 몇 시간 동안 계속 눈을 뜨니까 안 보이는 느낌이 들던 때였어요. 눈도 못 뜨겠고, 떠도 안 보이더라고요. 눈이 잘못됐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요. 마지막 신이 물속에 가라앉는 신이었는데 몇 번 촬영하는 동안 코에도 물이 들어와서 뇌까지 바닷물이 차는 느낌이었어요. 앞은 안 보이고, 숨은 못 쉬겠고, 코로는 물에 들어가는 이러다가는 기절하겠구나 싶더라고요. 기절하면 누가 구해주겠지 하며 마지막 촬영을 했어요. (웃음)
영화를 보면, 날씨가 늘 변덕입니다. 예상보다 더 예쁜 날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날도 많았을 것 같아요. 배우님이 ‘재난영화급 날씨’라고 말한 날도 있었잖아요.
사전답사에서 장소 헌팅을 하다가 너무 말도 안 되는 파도를 만났어요. 살면서 본 파도 중에 가장 무서운 파도였고요. 그래서 가려던 포인트는 결국 못 가고 장소를 변경해서 갔는데 그 바다에서 정말 큰 만타를 만났어요. 그때 만타를 처음 봤어요. 촬영 전에 행운을 주는 느낌이었어요. 날씨가 안 좋을 때마다 감독님과 우리 계획대로 되지 않아도 더 좋은 결과가 있으려고 이러나 보다고 말했어요. 그래서 바로 받아들이고 촬영에 임했죠. 오히려 덕분에 더 고독해지지 않았나 싶어요. 팔라우가 참 아름다운 곳이지만 너무 화창하고 밝게만 나오면 덜 고독해 보이지 않았을까 싶어요.
나를 이해해주고 지지해주는 비투비 멤버,
제 음악으로 삶이 바뀌었다는 팬에게 감사하고 또 감사
영화 속 비투비 멤버 인터뷰를 보면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낸 사이인 만큼, 임현식 배우님이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지향해온 사람인지 잘 알고 있고 이를 전적으로 신뢰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멤버들을 초대해서 영화를 함께 볼 계획이에요. 영화관을 대관해서 멤버, 지인, 가족, 팬들을 초대하려고요. 저도 편집 과정에서 멤버 인터뷰를 봤는데 우리가 정말 오랜 시간 동안 잘 지내와서 멤버들이 나라는 사람을 잘 알고 있구나 싶어 너무 감사했어요. 멤버들이 영화를 보고 더 놀라지 않을까 싶어요. 뮤직비디오만 보고도 ‘미친 놈’ 소리를 듣긴 했는데 영화를 보면 ‘내가 알던 현식이보다 더 미친 놈이구나’ 하지 않을까 싶어요. (웃음)
‘고독한 바다(La Mar)’ 뮤직비디오 공개 후 팬들의 반응은 어땠나요.
제가 만든 음악을 듣고 그 음악에서 힘을 얻는 팬들의 반응이 제 삶의 원동력이에요. 제일 기분 좋은 말이에요. 힘든 일이 있었는데 음악을 듣고 힘을 얻었다는 반응을 들으면 큰 힘이 돼요. 팬분들이 저로 인해서 더 좋은 사람으로 변하고 있다는 말씀도 해주시는데, 너무 놀라워요. 더 책임감을 가지고 음악에 진지하게 임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아티스트이자 배우 임현식이 앞으로 걸어갈 길도 궁금합니다.
제 MBTI가 P이긴 한데요, (웃음) 장기적인 계획이 정말 많아요. 영화음악 작업도 해보고 싶고, 제가 팀으로서는 많은 곡을 발표했는데 솔로로서 임현식의 음악은 아직 못 보여드린 것 같아서 앨범도 내고 싶고요. 솔로에 대한 갈증이 커요. 당장 가까운 미래로는 정규 앨범을 내고 싶어요. 음악공부도 계속 하고 싶고요. 악기 레슨도 받고 있어요. 차근차근 쌓아가면서 영화음악까지 하게 된다면 좋겠네요. 계속 저 자신을 업그레이드하고 싶어요.
더 많은 분이 영화 볼 수 있도록 계획 중
언젠가는 영화음악에도 도전해보고 싶어
7일에 ‘원 썸머 나잇’ 공연도 예정되어 있는데요.
바다 주제 영화이다 보니 바다 관련 곡을 준비했어요. 기분이 좀 다를 거 같아요. 제가 출연한 영화가 출품된 영화제의 음악 무대에 선다는 게 상상만으로도 참 좋아요. 제가 제 입으로 배우라고 얘기하기는 그렇지만 (웃음) 가수이자 배우인 두 가지 모습을 가진 저로서 무대에 오르고 싶어요. 저는 고독해지려 했는데 결국 제가 빛나는 건 제 옆에서 저를 지지해주는 사람들로 인해서더라고요. 이번 앨범 작업에서 더 많이 느꼈어요.
영화제에서 관람하지 못한 분들을 위한 기회가 더 있을지 궁금합니다.
확정되진 않아서 말씀드리기 조심스럽긴 하지만 많은 분이 봤으면 좋겠어서 준비를 하고 있고요. 영화관 대관 상영이나 OTT쪽으로 생각을 하고 있어요. 팬분들뿐 아니라 다이버분들, 영화인들, 바다를 사랑하는 분들, 제임스 카메론 감독님처럼 수중 촬영에 관심 있는 분들도 영화를 많이 봐주시면 좋겠습니다. (웃음)
마지막으로 추후 영화를 만날 관객분들에게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감사드린단 말씀을 먼저 드리고 싶어요. 정말 죽을 각오로 촬영한 뮤직비디오고 영화이니까, 저의 진정성을 잘 봐주시고, 보시고 괜찮다 싶으시면 제 앞으로의 행보를 응원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영화제를 통해서 저는 더 빛나는 사람이 됐는데, 고독해지고 성장하는 과정을 반복할 저의 모습 기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무엇보다 영화 많이 봐주셨으면 좋겠어요. (웃음)
늘 성장을 갈망한다는 임현식 배우는 노인이 되어서도 어떤 형태로든 예술을 계속 하고 싶다고 말했다. 아이돌에서 솔로 아티스트, 배우로 자기 영역을 확장해나가는 그가 만들어갈 예술의 행로의 빛깔은 다채로울 것이다. 언젠가 그가 영화음악 감독으로 제천국제음악영화제를 다시 찾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한계와 경계를 넘나드는 아티스트 임현식이 만들어갈 길이 주목된다.
글: 하이스트레인저 박해민
사진: 하이스트레인저 김문숙, 김소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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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IWFF 데일리] 각자의 이야기에서 만나!
감독] 케이트 챙Kate TSANG
출연] Miya CECH, Rhea PERLMAN, Leonardo NAM, Paulina LULE, Kannon OMACHI
시놉시스] 반항아 새미와 쌀쌀맞은 마술사 마고가 친구가 된다. 마고는 마술을 통해 새미가 내면의 악마를 다스리고 가족 문제를 돌아볼 수 있게 한다. 뜻밖의 우정, 슬픔, 인생 최악의 시기에 찾는 희망에 관한 성장 코미디.* * *
상처를 잘 아는 사람이 만든 성장영화
얼핏 보면 익숙한 성장 영화처럼 보인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반항기를 겪던 열세 살 아이가 그 상실의 아픔을 딛고 어디로 나아가는지 가리키는 영화. 거칠게 요약하면 그런 느낌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마블러스 앤 더 블랙홀>은 생각보다 많은 사람의 상처와 공명할 수 있는 영화였다. 상처를 잘 아는 사람이 만든 성장 영화임을 느낄 수 있었다. 어떤 상처는 영원히 낫지 않는다는 걸 아는, 아물 수는 있어도 영영 그전과는 달라질 수밖에 없는 아픔을 아는 사람이 만든 성장 영화. 바로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이야기는 단순하다. 하루 종일 게임을 하며 킬킬거리는 언니, 재혼을 하겠다는 아빠, 그 사이에서 분노와 슬픔을 어쩌지 못하는 열세 살 아이가 있다. 그 시절이 아니라면 겪을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감정의 과잉 속에서 스스로를 감당하지 못하는 아이. 그 아이가 우연히 ‘위대한 마술사’ 마고를 알게 되면서, 얼핏 잔재주처럼 보이는 마술을 통해 위안을 느끼고, 마고와 친해지면서 조금씩 자신과도 친해져, 무수한 자기부정 끝에 마침내 작은 긍정에 이르는 이야기.
단순하지만 힘이 없을 수가 없다. 몇 번이고 무너지고 슬퍼하고, 어쩌지 못해 괴로웠던 마음들이 아주 조금씩 화해를 이루어가는 여정은, 감동적일 수밖에 없다. 이 말에 동의한다면 당신의 마술, 아니 이야기의 힘을 아는 사람이다.
이야기의 힘을 아는 사람이 쓴 이야기
아기자기한 소품과 함께 펼쳐진 마고의 시간은 모두 다정하고 따뜻했지만, 마고가 유치원 아이들 앞에서 마술을 펼치면서, “이제 이야기를 들려줄 테니 모여봐” 말하는 장면이 특히나 좋았다. 여기서 모이다(huddle)는 단어는 펭귄들이 추위를 피해 옹기종기 모일 때와 같은 단어다. <마틸다>의 그 차가운 엄마 얼굴은 어디 갔는지, 배우 레아 펄만은 자신을 감싼 햇빛과 꼭 닮은 미소를 지으며 아이들을 모은다. 기대감에 찬 얼굴로 모이는 아이들의 얼굴은, 어쩌면 극장에 모이는 우리 마음과 닮아 있을 것이다.
이 영화 속에서 마술은 단순히 손으로 부리는 기교 그 이상이다. 기교를 배우되, 자기 이야기가 없으면 결코 완성되지 않는 것이다. 마고 또한 이야기로 꽃을 피워내는 사람이기에, 새미가 끌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새미에게는 엄마가 녹음해 준 이야기 테이프로 가득 찬 어린 시절이 있으니까.
이야기로 아이들을 모으고, 웃게 하고, 꽃을 피운 마고의 마술처럼, 이야기는 모두의 상처를 끝내 덮고도 남는다. 실제로 이 영화의 케이트 챙 감독은 유년기 홍콩과 미국 사이의 문화 장벽과 여러 상처들을 할아버지가 들려준 이야기로 치유받으며 자랐다고 한다. 이 영화가 그의 첫 장편임을 생각하면, 이야기의 힘에 대한 신뢰는 그의 깊은 곳에 박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우리 (각자의 이야기)에서 만나!
엄마가 돌아가신 아픔을 새미가 이야기할 때, 마고는 그건 “극복할 수 없는” 상처라고 말한다. 이 사실은 너무 쉽게 잊힌다. 일상적인 딸들의 모습을 보고 싶어 한 아빠의 마음, 노력의 방향과 색깔이 똑같기를 기대하는 마음은 설령 딸들을 위한 것이라 해도 욕심일 뿐이다. 누군가가 떠나간 세상은 이전과 달라질 수밖에 없고, 그 상실의 자리는 영구히 메워지지 않는다. 다만 각자 자기만의 방식으로 감정을 쏟아내거나 외면하거나 숨기거나 다스리며 살아갈 뿐이다.
<마블러스 앤 더 블랙홀>이 좋았던 것은, 어떤 정해진 답으로 관객을 내몰지 않았다는 것이다. 엉망진창인 동그라미를 계속 그린 끝에 완벽한 동그라미를 그려내는 사람도 있지만, 무수한 엑스를 그리며 자기 부정과 괴로움에 발버둥 치다 겨우 동그라미를 그려내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가끔 노력하는 웃음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아릴 때가 있는 것이다.
케이트 챙 감독은 자기만의 방식으로 성장담 하나를 갈무리했다. 그 가운데는 마술 책을 뒤적이다가 “까만 가발과 황색 메이크업을 하면 더 효과가 좋다”는 오래된 ‘오리엔탈’ 마술사들에 대한 대목을 굳이 콕 짚어 읽으며 그 기묘한 차별의 선을 넌지시 드러내는 장면도 있다. 아시아계 감독이기 때문에 가능했던 장면일 것이다. 각자 자기만의 방식으로 하는 이야기가 얼마나 세상에 더 필요한지 새삼 느낀 장면이기도 했다.
새미가 듣던 테이프 속 이야기에는 달로 추방된 황후가 나온다. 달까지 올라가 영영 고립될 위기에 처했을 때 달에 착륙한 토끼처럼, 어디서든 새로운 만남은 찾아온다. 우리는 또 어디서 어떤 이야기를 만나게 될까? 아직 들려주지 못한, 자기만의 이야기들이 어디서 얼마나 태동되고 있을까? 그 이야기들은 또 우리에게 얼마나 힘이 되어 줄까? 기대감을 안고 서울국제여성영화제의 올해 슬로건을 다시 들여다본다. 우리 ( )에서 만나! 이제 새로 괄호를 채우는 건 각자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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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국제여성영화제2022. 08. 25 ~ 2022. 09. 01<마블러스 앤 더 블랙홀> 상영 일정2022. 08. 26 13:30 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 7관2022. 08. 28. 10:30 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 1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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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 번 때리기만 하는 세상에게 어퍼컷 한 방
웩. 몸에 이상한 냄새가 나는 것 같다. 땀이 잘 나는 체질이라 그런가? 오늘 스웻셔츠 하나만 입고 돌아다녔는데 이런 냄새가 나는 건 좀 그랬다. 또 몸에 거북한 느낌이 있다. 위산이 역류하는 따가움이 싫었다. 그래도 책은 읽고 싶어서 도서관에서 꾸역꾸역 읽는다. 이 책을 읽는 이유는 오늘 비상금을 털어서다. 이렇게라도 오늘을 보내지 않으면 완벽한 잉여의 삶이 될 것 같았다. 어찌어찌 곳간을 털어서 3만 원을 갖고 왔다. 밖에 외출하기 위한 보람이 있다. 날씨도 때마침 좋았다. 비상금을 털어 버스를 탔다. 계속 방구석에 박혀서 아무것도 안 하기엔 인생이 아쉬웠다. 모처럼 게임 파일들도 다 지워 하나만 남겨놨다. 좋아. 다시 하나에 집중해보자고. 내가 살아온 갓생이 대학생이라는 허울 아래서만 가능했다면 여러모로 자존심이 상하다. 원래 내 인생은 내가 개척해야 하는 거잖아? 아무도 동의 안 할지도 모르지만 난 그동안 이기고 있는 삶을 걸어왔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이 내가 탄 버스도 승자의 여유 같은 느낌이다. 뭐랄까, 내 또래에 책 읽는 사람 없는 것 같거든.
그럴 리가 있나. 갑자기 오늘 돈이 없어했던 행동들이 떠올랐다. 위에 썼던 곳간은 게임 머니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아끼는 여동생의 생일선물도 없어 '카톡 메시지면 충분하겠지' 싶은 나의 정신승리가 오늘 일상의 발단이 됐다. 금세 하는 게임에 눈이 갔다. 모여있는 게임머니가 눈에 들어왔다. 이거 팔까? 어차피 모아봤자 디지털 쪼가린 거 이럴 때 써야 의미가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7개월 차 사회복무요원 생활. 이제까지는 어찌어찌 버틸 수 있었지만 컴활 예약부터 영화 예매까지 돈 쓸 일이 많아 생활고에 직면했다. 이제는 팔 스니커즈들도 없다. 950원짜리 컵라면으로 끼니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까지 와버렸다. 와. 그렇게 좋아하는 친한 여동생에게 생일 선물도 못 줘 안달복달하는 하루라니. 금세 내 삶이 불쌍해지기 시작했다. 열심히 살아 모아놨던 돈이 없는 게 이렇게 돌아왔다. 그러니까 군것질 좀 적당히 쳐하면 될 일인데 역시 나는 모지리가 맞다. 여자 친구도, 넓은 인간관계도, 술과 담배도 하지 않거나 없는데 이럴 때 돈이 없어서 밖으로 못 나가는 처지다. 이기고 살았던 갓생을 산 사람 치고는 과연 궁색하기 그지없다. 아. 내 또래 중에 책 안 읽는다는 생각도 그냥 나의 생각이다. 주위를 들여다봤을 때 책 많이 읽는 사람이 충분히 있을 수도 있다. 에휴. 그럼 그렇지. 내가 만든 나의 기대를 내가 부숴버렸다. 나는 3만 원에 울고 웃는, 그 정도짜리 인간이다. 이런 나의 한 구석도 웃음으로 마무리 짓고 싶은데 말이지. 어떤 노래 가사처럼 지면서 배우는 게 삶이라지만 난 세상에게 너무 자주 지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내가 만든 세상은 참으로 광활해서 현실로 나가려면 긴 시간이 걸린다. 젠장. 언제 한번쯤 이길 수 있을까? 늘 세상에게 지고만 사는 것 같다. 미생의 삶으로 그렇게 가다 끝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든다. 근데 이런 나에게, 또 지루한 일상을 버티는 우리에게 아마추어 복싱 선수가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고 한다. 딱 100엔짜리의 이야기라고 하는데, 실상 까 보면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왓챠에 절찬 스트리밍 중인 <백 엔의 사랑>이다.
100엔짜리 인생
주인공 이치코는 일본 어느 곳에 사는 32세 여성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쭉 백수인 이치코. 어린 조카가 한 명 있다. 조카는 허구한 날 괴롭힘이나 당한다. 이모가 돼서 이런 조카와 같이 운동을 한다거나 자신감, 자존감을 키워주면 좋겠지만 이치코에게 그런 건 없다. 하는 일이라곤 조카와 게임을 하는 게 전부인 이치코. 맨날 '나 언니처럼 되면 어떡하지'식의 시비 걸기가 전부인 동생과 크게 싸우게 된다. 머리에 케첩을 붓고 식탁을 엎은 꼴에 어머니는 폭발해 이치코에게 독립을 권유한다. 그렇게 반강제로 집에서 쫓겨난 이치코. 다행히 어머니와 절연하거나 그런 건 아니다. 임대주택으로 거처를 옮긴 이치코, 평소에 자주 가던 100엔 숍에 취직하게 된다. 이왕 일자리 구한 거 좋은 곳에 들어갔으면 좋았을 걸 그거랑은 거리가 멀다. 가게 점장은 우울증 환자다. 또 동료직원 노마는 띠동갑인 주제에 이치코에게 치근덕대는 게 일쑤다. 또 말도 더럽게 많아서 여러모로 사람을 귀찮게 한다. 게다가 도둑질을 해서 잘렸던 한 할머니는 유통기한이 지난 도시락이나 가락국수를 지맘대로 가져가곤 한다. 역시 사회생활에 쉬운 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을 다니는 이치코. 뭔가 큰 임팩트가 있는 사건 없이 그렇게 일상이 흘러갈 것 같았다.
그런데, 한 남자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 남자는 100엔 숍의 단골쯤 되는 사람이다. 스윽 나타나서 바나나만 사 가는 사람이라 '바나나맨'이라는 별명을 붙였다. 바나나맨은 말투부터 표정까지 건조한 사람이다. 웃지도 않고 말투도 그렇게 예의가 바른 사람이 아니라 영 까칠해 보인다. 그런데 그 남자가 어쩐지 이치코에게 데이트를 신청한다. 32년의 인생 동안 연애를 해본 적이 없는 이치코. 바나나맨의 정체는 알고 보니 전직 복서였다. 바나나맨과 사랑에 빠진 이치코. 바나나맨이 선수로 뛰었던 복싱 운동장에 등록해 뭐라도 부딪혀보기로 한다. 영화는 잘하는 것도, 재미있는 것도 없었던 이치코가 사랑을 만나 성장하는 이야기를 담았다.
영원히 지고 사는 거니까
당연한 이야기지만 영원한 건 없다. 이는 사람이 있으면 지는 사람도 있기 마련이다. 그 뜻은 패자가 되는 일을 피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냥 피하기만 어려우면 그나마 다행인데 이런 경험들은 사람의 마음속에 축적된다. 이런 과정을 안 거치고 싶지만 사실 절대 그럴 수 없다. 그렇게 스스로를 미워하게 된다. 패배자. 루저. 뭐 그런 생각을 스스로에게 품게 된다. 가끔은 '이런 말로도 이 상황의 위로가 될까'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있다. 점점 사람이 외로워지는 이유도, 그런 실패의 경험을 타인이 짐작할 수도 없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럴 때 사람에게 뭔가 색다른 위로가 필요하다. 단순히 '그냥 잘 될 거야'식의 위로가 아닌 새로운 시각의 무언가가 있으면 참 좋을 것이다. 그래서 연애를 하는 사람도 많은 것 같다. 내가 사랑하면서 날 아끼는 이에게 기대면 행복해진다. 근데 매 순간 연인에게 기댈 수 없는 노릇이다. 그/그녀가 도라에몽이 아니니까. 항상 내가 원하는 걸 가져다주지 않을 것이다. 이 영화는 이 '색다른 위로'에 관한 영화다. 영화는 여주인공을 가만히 두지 않는다. 온갖 방식으로 괴롭힌다. 특히 동료였던 노마 캐릭터는 진짜 한 대 때려버리고 싶은 첫인상을 끝까지 유지한다. 또 바나나맨이나 복싱같이 이치코가 사랑했던 대상들도 한 방씩은 먹인다. 그렇지만 이것들 덕에 그녀가 웃는 날이 몇 번은 오는데, 이게 '이치코가 어떤 걸 바쳐서 이 결과들을 얻었나'를 생각해보면 영화가 하려는 말이 이런 게 아니었을까 생각이 들 것이다.
솔직히 좀 과하긴 해
극을 보면서 느껴지는 단점은 살짝 과하다는 점이다. 물론 이게 영화를 보는 입장에서 크게 지장이 가는 정도는 아닐 것이지만 작위적인 설정이 있기는 했다. 일례로 주인공의 100엔 숍에서 유통기한 지난 도시락을 가져가던 아주머니 묘사가 그렇다. 아무리 영화라지만 이 사람이 굳이 이럴필요가 있나? 싶은 구석이 있다. 인물의 귀결을 안 내도 되는데 급 마무리한 느낌? 또 노마 캐릭터도 보면서? 싶은 구석이 있다. 이 사람의 패고 싶은 캐릭터성은 그 값을 충분히 하지만 벌인 일에 책임을 안 지는 느낌이다. 이 둘의 인물 설정이 영화니까! 실제가 아니니까!라고 하면 딱히 할 말은 없다. 그러나 극의 주제를 전달하기 위해 좀 기능적으로만 이야기가 전개된다는 느낌은 지울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물의 설정이 어느 정도는 작위적임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좋은 편이다. 일단 바나나맨과 이치코의 캐릭터 설정이 좋았다. 바나나맨이 좀 나쁜 놈이긴 해도 이치코에게 동기부여를 심어주는 역할을 제대로 했다. 적당히 나쁜 놈이라 거리감에서 오는 그 매력이 딱 잘 느껴졌다. 자기 이야기라곤 도통 안 하는 바나나맨. 바나나맨에게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그가 복싱선수였다는 점이다. 인물 설정과 여주인공의 각성 계기가 연관이 있어 이 부분의 개연성이 딱딱 맞아떨어졌다고 볼 수 있다. 또, 남주인공에게 관심이 생기고 이와 나서도 비슷하다. 복싱이라는 스포츠는 상대방을 주먹으로 때리는 스포츠다. 근데 이치코는 처음 여동생과 싸우고 집에서 쫓겨난다. 개싸움으로는 케첩도 붓고 별의별 짓을 다하지만 이치코는 복싱에 문외한이다. -물론 복싱을 하나둘 씩 배워 엔딩신에서 결투를 벌인다.- 난 비유라고 생각한다. 현실에서 힘을 영 못쓰는 우리 세대에 대한 이야기를 에둘러 말하는 것이다. 사람이 무슨 기계도 아니고 늘 잘할 수는 없다. 언제는 한 대 쥐어박고 싶은 애가 됐다가 내일 성숙해지는 게 우리 사람이다. 마찬가지로 복싱(실전)에는 약해도 내 만만한 선에서(가족)는 여포가 되는 우리 모습이다. 보통 이런 내 모습을 알게 되면 자괴감이 쓰나미처럼 몰려온다. 챔피언이 될 수는 없어도 100엔짜리 개싸움은 가능한 여주인공.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인물은 더 나은 선택지를 위해 미친 듯이 산다. 이렇게 감정적으로 이 사람에게 이입이 가능하게끔 극본이 인물 간의 연출과 사건 배치를 잘한 편이다. 즉 영화를 주인공의 매력 하나만으로 재미있게 볼 수 있다는 말씀! 미운 오리 새끼가 되어 백조로 날아오르는 이치코에게 뭔가 정이 간다.
안도 사쿠라의 격이 다른 루저 연기
안도 사쿠라라는 이름은 전부터 알고 있었다. <어느 가족>에서 우는 연기가 칸에서 엄청 극찬을 받았다고 알고 있다. 이 사람이 연기하는 건 이번에 처음 봤다. 뭐랄까, 처음에 덩치가 좀 있게 나올 때는 이렇게 미련해 보일 수가 없다. 그냥 눈빛이랑 뒤태만으로도 둔해 보인다. 또 극 중반에 고기를 먹는 신이 있는데 젓가락질도 서투른 사람이다. 아니 젓가락질을 서투른 연기를 하려면 뭘 어떻게 해야 할까? 극도로 섬세한 사람이 아니면 이런 디테일을 포착하지 못할 것 같다. 또 바나나맨에게 지나치게 순종적인 여자 친구 역할도 잘 수행해낸다. 자칫 보면 지 가족에겐 나빠도 남자 친구에겐 착한 이중적인 모습이 밉상으로 보일 수도 있는데 선을 잘 탄 느낌이다. 이 영화에서도 사랑의 힘을 받아 변하기는 했다. 그런데 안도 벚꽃은 세상 어디에도 없는 찌질이 연기를 하면서도 하이라이트의 당당한 모습을 2시간 내내 유지한다. 뭐 루저였던 사람의 성장 서사는 다른 영화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이 사람은 뭔가 느낌이 다르다. 이런 말 하긴 좀 그렇지만 자기가 루저였던 시기가 있지 않고 나서 이런 게 가능할까? 싶은 연기다. 일본식 찐따 코미디로도 괜찮은 작품이다.
이게 전부는 아닐 거야 웃는 날 꼭 올 거야
이 영화는 잔인한 현실을 담고 있기도 하다. 사실 이치코의 삶과 우리는 그렇게 다르지 않다. 인생은 원래 지면서 배우는 거라지만 어째 가슴속에 패배 소식이 너무나도 많이 쌓였다. 그러다 보면 이 세상에 난 어울릴 수 없는 걸까, 루저가 되는 기분이다. 이치코도 마찬가지다. 37살에 복싱 시합에 나가 두들겨 맞았던 바나나맨처럼 삶에서 피동적이었던 이치코. 이치코는 마음이 자라 이제 세상에게 반격을 준비한다. 우리 모두 이치코가 하려고 했던 이 '반격'의 한 갈래 안에서 살고 있다. 1인분의 삶을 하고 싶어서가 열심히들 사는 이유 아닌가. 그렇게 세상에게 피투성이가 되도록 맞더라도 뭐라도 미친 듯이 부딪히는 게 우리 모습이다. 영화는 이런 우리에게 글러브 하나를 건네준다. 싸우라는 것이다. 어차피 이 삶에서 이기고 살 수는 없다. 그러려면 이왕에 다 걸어서 뭐라도 얻고 끝내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감독이 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래야 엔딩처럼 좋은 시간이 올 테니까. 다들 잘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피투성이가 되야 세상이 우리에게 잠깐의 시간을 주곤 했으니 앞으로도 그러지 않을까?
#왓챠영화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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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영화에 괴인은 없다
영화 <괴인> 시사회장에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는 재미로 사는 산만 한 덩치의 분홍색 곰돌이 '벨리곰'이 깜짝 등장했습니다. '벨리곰'을 만든 제작자가 바로 영화 <괴인>을 만든 프로듀서라고 하는데요. 정현중 프로듀서는 <괴인>의 이정홍 감독이 '벨리곰'을 디자인한 장본인이고, '벨리곰'으로 벌어들인 수익을 투자한 작품이 바로 <괴인>이라고 밝혔습니다.
한없이 귀여운 분홍색 곰돌이와 수염이 덥수룩하게 난 남자의 조합이라, 참으로 기이했습니다. 동시에 묘한 기대감이 차올랐습니다. '이 영화'와 '저 곰'을 만든 사람이 같다는 것만으로 "당신도 나처럼 이상하잖아요"라는 포스터 속 카피가 단번에 이해되어 버렸달까요? 무대인사에서부터 이상하고 알 수 없는 기운이 폴폴 풍겼던 영화 <괴인>을 관람했습니다.
※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은 <괴인> 시사회를 통해 영화를 감상했습니다. <괴인>은 2023년 11월 8일 국내 개봉했습니다.
괴인
a Wild Roomer
<괴인>은 어느 날 자동차 지붕이 찌그러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 '기홍'과 그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입니다. 블랙박스를 돌려 보다가 누군가가 건물에서 뛰어내리는 바람에 차가 망가졌다는 것을 알아차린 '기홍'은 사건에 관심을 보이는 집주인 '정환'과 함께 범인 찾기에 나섭니다.
이렇게만 설명하면 <괴인>이 사소한 일에서 촉발된 거대한 미스터리를 해결하는 추리극 같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찌그러진 자동차 지붕에서 시작한 영화는 '기홍'의 하루하루를 천천히 뒤쫓습니다. 그 과정에서 그가 세 들어 사는 '정환'과 '현정' 부부의 집은 주된 배경이 되고, '정환'과 '현정' 역시 주요한 주변 인물이 되죠. 영화는 '기홍'을 멀찌감치에서 관찰하다가도 일순간 내밀한 심정을 들추어내기를 반복하며 '기홍'과 주변 인물들의 관계를 그려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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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의 주 무대인 '정환'과 '현정'의 집은 분리와 연결을 테마로 하는 디귿(ㄷ) 형태의 공간입니다. 현관문은 두 개로 나뉘어 있으나, 실은 하나로 연결된 집이죠. 그들의 집은 영화가 담고 있는 메시지와 일맥상통하는 구조적 특징을 가졌습니다. 분리와 연결은 정반대의 단어입니다. 즉, 분리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모순인 셈입니다. 하지만 '정환'과 '현정'의 집은 그렇게 지어졌고, 실은 우리의 삶도 그렇습니다. 정합되는 것 없이 늘 어긋나곤 하죠. 그리고 <괴인>은 이러한 삶의 모습을 '기홍'과 주변 캐릭터들을 통해 묘사합니다.
주인공 '기홍'은 가장 많은 모순이 드러나는 인물입니다. 그는 동료들에겐 무례하고, 집주인에겐 예의가 바릅니다. 회사를 그만두고 주체적으로 일하는 목수가 되었지만, 늘 누군가의 의뢰 없이는 돈을 벌지 못하는 의존적인 상황에 처합니다. 돈 많고 젊은 집주인 부부가 불편하면서도 술자리, 범인 찾기, 취미 생활 등 사사로운 일들을 자주 함께합니다. 남의 가게에서 잠을 청하다가 자신의 차를 망가뜨린 '하나'가 이해되지 않지만, 결국 거처를 잃은 그녀가 마음에 쓰입니다. 한 번 꼬셔보려는 여자들은 죄다 싫은 티를 팍팍 내는데, 꼬실 여자 후보에도 없었던 '현정'과는 미묘한 사이가 됩니다. 이러한 어긋남은 다른 캐릭터들에게서도 나타납니다. 세상만사 관심 없다는 느긋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기홍'에게 관심이 많아도 너무 많은 '정환', 남편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좋은 아내가 되겠다는 '현정', 차를 망가뜨리고 도망간 홈리스이면서 누구보다 빚지기를 싫어하는 '하나'까지. 모두 모순 투성이입니다.
정리해 보면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이 괴상합니다. 그런데 괴상하다는 것은 '보통과 다르게 이상한 것'을 말하지요. 따라서 모든 인물이 괴상한 것은 모순입니다. 모든 인물이 괴상하다는 것은 그것이 곧 보통이라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괴상하다는 것은 모순적이게도 평범하다는 것이고, 그렇기에 이 영화 속에는 단 한 명의 괴인도 없습니다. 오직 범인들 뿐이죠.
실제로 영화를 보다 보면 낯설게 느껴졌던 모든 괴인들이 낯설지 않아지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모순적인 면면은 누구에게나 있기 마련이고, 어긋남의 순간은 어느 삶에나 생깁니다. 모든 인간은 매 순간 조금씩 죽어가고 있음에도 이를 '살아간다'라고 표현한다는 면에서 인간의 삶 자체가 모순 덩어리입니다. 살아가는 중이기도, 죽어가는 중이기도 한 우리는 모순이라는 평범함 속에서 하루하루를 괴상하게 살아갑니다. 인생이 따뜻하면서도 씁쓸하고, 씁쓸하면서도 따뜻한 것은 삶이 이런 어긋남들로 점철되어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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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뼈대가 엉성하면 아무리 훌륭한 배우들이 출연해도 좋은 작품이 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중요한 철근 몇 개를 빼고 영화의 뼈대를 세웠는데도 배우의 인지도라는 콘크리트가 영화 전체를 지탱해 주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럴 때면 이런 생각이 듭니다. '과연 무명 배우가 연기했더라도 이 영화는 이렇게 알려졌을까?' 이처럼 이름난 배우의 후광은 특별한 점 하나 없는 영화에 매력을 더해주곤 합니다. 그 말인즉슨 영화가 매력이 있는지 없는지를 알아보려면 배우의 후광을 없애보면 된다는 뜻이기도 하죠.
<괴인>은 배우의 후광을 모조리 제거한 작품입니다. 먼 훗 날, 톱스타가 된 어느 배우의 과거 작품으로 <괴인>이 매체에 오르내릴 가능성도 희박합니다. <괴인>에서 열연한 배우들은 모두 연기 경험이 없는 비전문 배우이기 때문이죠. '기홍' 역의 박기홍 님은 이정홍 감독의 30년 지기 친구이자 실제 목수이고, '정환' 역의 안주민 님은 이탈리안 셰프입니다. 이렇듯 아는 배우가 전혀 나오지 않다 보니 영화 전반부에는 이 작품이 심지어 다큐멘터리로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괴인>은 관객의 시선을 붙잡는 흡인력과 매력이 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는 그들이 낯선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완전히 극에 몰입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연기를 이만큼 하는 비전문 배우를 캐스팅하기 위해 감독과 제작진이 꽤나 고생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흠씬 들었습니다만, 그보다도 영화의 매력인 '보여주기'를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인 것이 더 많이 느껴졌습니다. 장면장면이 매끄럽게 이어지지 않는 거친 흐름의 영화인데도 모든 장면의 색감, 구도, 심도 등을 섬세하게 연출하려는 열정이 느껴졌죠. 특히 프레임 인 프레임 구성으로 집중력을 확 끌어올렸던 인트로 장면은 아직도 머릿속에 선명합니다.
영화의 본질에 다가서기 위해 유명 배우라는 치트키를 쓰지 않은 것, 이마저도 어떠한 종류의 모순으로 보인다면 제가 영화에 너무 깊이 빠져버린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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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립할 수 없는 수많은 것들을 하나의 영화 안에서 선보인 <괴인>이 이 세상에 나올 수 있도록 해준... '벨리곰'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삶의 복잡다단함을 담아낸 <괴인>의 탄생에 경의를 표하기 위해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는 단순한 재미로 사는 '벨리곰'에게 감사를 전해야 한다는 사실마저 모순적이네요.
Summary
운전을 하던 목수 ‘기홍’은 자신의 차 지붕이 찌그러진 걸 우연히 발견한다. 공사 중인 학원 앞에 세워 둔 차 위로 누군가 뛰어내린 사실을 알게 된 ‘기홍’은 범인을 찾자는 집주인 ‘정환’의 부추김에 늦은 밤 학원으로 향하고, 신원 미상의 인물이 창밖으로 도망치는 것을 목격하는데… (출처: 씨네21)
Cast
감독: 이정홍
출연: 박기홍, 안주민, 전길, 이기쁨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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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그래비티에 담긴 주제와 흥미로운 이야기들 #8
환몽(幻夢) CINE 리뷰 8화_ 영화 그래비티 해석
** 영상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 이번엔 왓챠 회원님들의 멋진 한줄평과 함께 했습니다!
이전까지 이런 우주영화가 없었기에, 개봉했을 당시 평단의 극찬이 엄청났었는데요.
있는 그대로 느끼고 체험해도 엄청나면서, 숨겨진 비유와 상징, 알고 보면 재미난 이야기까지 모두 준비해봤습니다.- 화려한 이력을 가진 '그래비티'
- 압도적인 오프닝
- 영화의 주제 : 중력과 삶의 의지에 관하여
- 영화 속 비유와 상징
- 알쓸신잡 : 과학적 고증 오류와 아닌강(?)
- 우리가 꼽은 명장면
- 환줄평 / 몽줄평영화 '그래비티'를 보고 마구 생각하고, 마구 떠들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 준비했습니다.
#그래비티 #그래비티해석 #알폰소쿠아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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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 영화 후기 / 최민식이 다했나? / 감동이 살아있음 / 바흐의 무반주 첼로 연주곡 / 파이송이 뭐지?
영화직관하는남자 영직남의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 후기입니다.
쿠키영상은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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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예스, 노 또는 반반> 메인 예고편
모두가 좋아하는 인기 절정의 아나운서 구니에다 케이.
낮에는 누구보다 완벽한 아나운서로
밤에는 말과 행동에 자유로운 백수로 이중생활 중이다.
애니메이션 작가 츠즈키 우시오를 취재하던 구니에다는
어느 밤, 우연히 동네에서 무방비한 차림으로 그와 마주친다.
하지만 평소와는 너무도 다른 모습에 구니에다를 알아채지 못하는 우시오.
구니에다 때문에 우시오는 팔을 다쳐 일을 못하게 되고
그런 우시오에게 자신을 오와리라고 소개한 구니에다는
어쩔 수 없이 오와리의 모습으로 그의 일을 돕기 시작한다.
낮에는 구니에다, 밤에는 오와리와 일하게 된 우시오는
점점 그 둘을 향한 자신의 감정 때문에 혼란스워지는데…
신분을 숨기고 시작된 묘한 삼각관계의 끝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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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레이징 파이어> 티저 예고편
강력 범죄 수사대에서 함께 믿고 일하던
베테랑 경찰 ‘장충방’과 그의 후배 ‘추강아오’.
어느 날 같은 임무를 맡은 두 사람은
돌이킬 수 없는 사건으로 인해
한순간에 운명이 뒤바뀌게 되고
동료에서 적이 되어버린다.
서로가 서로의 표적이 된 그들은
피할 수 없는 대결을 시작하게 되는데….
둘 중 하나는 죽어야 끝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