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브2021-11-13 13:13:51
[넷플릭스] 더 체스트넛 맨 [The Chestnut Man] 덴마크 드라마
형사물 / 다크 / 소설 원작 / 살인 / 몰입도 높음 / 덴마크 드라마 / 청소년 관람불가 / 넷플릭스 드라마 /
잔인하게 살해당한 시신 근처에서 밤과 나무로 만든 인형인 체스트넛맨이 발견된다. 범인은 누구고, 왜 이토록 잔인한 살인을 이어가는 걸까?
형사이자 싱글맘인 툴린은 사이버 범죄부로 옮기기 전 마지막으로 이 사건을 배당받는다. 인력이 늘 부족한 경찰에서 잘릴지 말지 애매한 포지션의 유랑자 헤스를 파트너로 삼게 된 툴린. 사회성은 없지만 실력만은 출중한 헤스의 능력으로 사건에 조금씩 근접해 간다.
더 체스트넛 맨 [The Chestnut Man]은 총 6회차로 호흡이 짧은 편인 드라마이지만, 높은 몰입도와 울림이 있는 드라마다. 잔잔하게 조여오는 심리 스릴러 분야에서 탁월한 덴마크 드라마의 결이 그대로 살아있다.
시종일관 어둡지만 잔잔하고, 잔인하지만 과장되지 않은 형사물이자 스릴러. 학대, 입양, 방치. 사회의 어두운면을 긁어내며 진행되는 이야기가 불편하지만 흡입력 높게 진행된다.
보통 드라마보다는 짧고, 영화보다는 호흡이 긴 작품이 보고 싶다면.
넷플릭스에서 더 체스트넛 맨 [The Chestnut Man]을 스트리밍 하시길.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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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이애나의 ‘외로움’을 가득 담은 영화
외로움이라는 감정은 사람이 살면서 평생 안고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외로움은 찾아오고 긍정적인 일들이 주변에 많이 일어나도 어느 순간이 되면 갑자기 찾아온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랑'이라는 감정에 그렇게 매달리는 것인지 모른다. 사랑을 주고 또 받을 사람을 찾고, 꽤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결혼이라는 문으로 들어간다. 그런데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다고 해서 그 외로움이 찾아오지 않는 것은 아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그 사랑에도 익숙해질 즈음에 그 외로움은 또 찾아온다. 주변 가족이나 친구들과 만나며 그것을 해결하기도 하고, 그저 태어난 아이를 키우는데 더 집중하면서 그 외로움일 이겨내는 사람들이 있다. 그 외로움이라는 것은 그렇게 평생 우리 곁에 있고 그것을 받아들이고 해결하는 방법은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우리가 방송 프로그램이나 영화 같은 화면을 통해 접하는 연예인들도 외로움과 고독감을 느낀다. 화면 속 화려함과 팬들의 동경은 그들을 스타로 만들어주지만 개인의 삶 속에서 느끼는 외로움도 해결해주지는 못한다. 그래서 누군가는 스스로 목숨을 끊고 연예계에서 멀리 떨어지기도 한다. 그러니까 아무리 화려한 인기 속에 살고 있더라도 외로움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친구가 많아도 외로움은 찾아오고 각자만의 방식으로 달래가야만 한다. 어쩌면 그건 인간으로 태어나 평생 해결해야 할 숙제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다이애나 황태자비의 외로움을 담은 영화
영화 <스펜서>에는 외로움과 고독한 감정이 가득 담겨있는 영화다. 유명을 달리한 다이애나 황태자비(크리스틴 스튜어트)의 감정을 담는 영화는 그가 이혼하기 전 왕실에 있던 1990년대 초반 즈음의 크리스마스 3일을 다룬다. 실제 사건을 재구성했다기보다는 다이애나라는 인물의 감정을 압축해서 영상으로 옮겼다는 설명이 더 적합할 것 같다. 처음 별장에 가족들과 일하는 직원들이 모이는 모습을 보여주는 초반에 다이애나는 혼자 오픈 카를 운전하여 별장으로 향하고 있다. 그는 보조해주는 운전사도 없이 혼자 운전을 하는데 길을 잃고 제시간에 도착하지도 못하지만 계속 왕실의 사람들과 거리를 두려고 무척 애쓴다.
다이애나가 도착한 왕실의 별장은 그가 태어나고 자란 생가 근처에 있다. 영화 속 다이애나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의 생가에 가려고 하거나 과거 아버지가 농사지었던 땅의 허수아비를 찾아간다. 영화 속 '현재'에 다이애나는 고립되어 있다. 그래서 그는 자기 자신의 진짜 모습이 있던 ‘과거’의 장소로 회귀하려는 시도를 계속 반복한다. 얼굴엔 외로움이 가득하고 쓸쓸함이 느껴진다. 왕실에서 제공하는 음식을 먹은 그는 곧 그 음식을 다 비워낸다. 마치 왕실의 모든 것에 거부감을 느끼듯 속에 들어온 많은 것을 뱉어내려 애쓴다. 그의 주변에 그를 돕기 위해 파견된 도우미들이나 파티를 주관하여 총괄 관리하는 그레고리 소령(티모시 스폴)은 계속 그를 파티와 행사에 밀어 넣지만, 다이애나는 그걸 계속 밀어낸다. 그래서 가족 모임으로 다이애나를 끌어들이려는 그들이 영화 속에서 악당처럼 느껴지는 건 영화가 다이애나의 감정을 무척 잘 표현해냈기 때문에 가능했다. 다이애나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구성원들의 행위는 모두 적대감이 느껴진다.
다이애나가 마음을 열고 있는 왕실 사람은 두 아들과 의상 담당자 매기(셀리 호킨스)뿐이다. 두 아들은 그가 낳은 친족이기 때문에 좀 더 편하게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매기는 일하는 직원일 뿐이다. 그럼에도 매기는 다이애나의 이야기를 잘 들어준다. 답답하고 꽉 막힌 왕실 가족의 분위기에서 유일하게 다이애나가 편하게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고 이야기할 수 있는 인물이다. 영화를 다 보고 나서 생각해 보면, 매기라는 인물은 다이애나를 사랑했던 소수의 주변 인물과 일반 대중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매기의 말처럼 다이애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았다. 그 사실은 실제로 그가 불운한 죽음을 맞이한 이후에 추모의 분위기로 알 수 있다.
다이애나의 자유에 대한 의지
다이애나가 자신의 생가에 어렵게 방문하여 보게 되는 과거의 환영들에서 그는 자유로움을 느끼고 삶의 의지를 확인한다. 그 환영을 본 후 다시 별장에 돌아와 매기와 만나며 시간을 보내고 두 아들을 시외로 데리고 나가는 장면에서 다이애나의 모습은 숨 막히는 왕실의 압박과 분위기에서 벗어나 조금은 자유로운 얼굴을 보여준다. 켄터키 후라이드 치킨을 ‘스펜서’라는 결혼 전 자신의 성으로 주문하고, 길거리에서 먹는 모습 두 아들과 다이애나의 뒷모습에는 영화 속 어떤 모습보다 자유롭게 보인다.
영화 <스펜서>에는 다이애나의 고독과 외로움이 가득 담겨있다. 무엇보다 다이애나 역을 맡은 배우 크리스틴 스튜어트는 외모부터 실제 다이애나 황태자비와 비슷해 보인다. 거기에 목소리 톤까지 그에 맞추면서 더욱 실제 다이애나가 눈앞에 서있는 듯한 착각을 준다. 그리고 과거 다이애나가 겪었을 감정적 외로움과 고독이 배우의 얼굴로 세세하게 표현한다. 거대한 왠지 위압적인 별장의 모습과 그에 비해 너무나 작아 보이는 다이애나의 모습이 잘 대비된다. 또한 연신 음식을 토해내는 모습은 그가 가진 왕실에 대한 거부감이 그대로 드러난다.
<스펜서>는 실제 사건을 요약하여 제시하는 영화라기보단 그 당시의 인물이 가졌던 감정을 함축적으로 제시하는 영화다. 그런 의미에서 과거 영화 <스티브 잡스>를 떠올리게 한다. <스티브 잡스>는 실제 사건을 다룬다기보다 무대 뒤에서 스티브 잡스(마이클 패스벤더)가 만나는 사람들과의 대화를 통해 그가 가졌던 사람들과의 관계의 문제점이나 감정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진행된 영화다. 그러니까 주인공의 감정이나 있었던 일에 대한 반응을 이야기에 함축하고 배우의 표정으로 표현해낸다는 측면에서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는 영화라고 볼 수 있다.
영화를 연출한 파블로 라라인 감독은 과거에도 퍼스트레이디인 재클린 케네디의 이야기를 다룬 <재키>나 칠레의 민중 영웅 파블로 네루다의 이야기를 다룬 <네루다>를 연출한 경험에 있다. 이번 <스펜서>에서도 실존인물인 다이애나 황태자비가 가졌던 감정을 두 시간의 영상으로 함축하여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다이애나는 영화가 담긴 시기 이후 이혼을 하고 독립적인 생활을 한다. 어쩌면 이혼 후의 시간에서는 영화를 가득 채웠던 외로움과 고독감을 조금은 덜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늘 억압되고 고독했던 다이애나를 이제 대중들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그런 다이애나의 외로움에 담긴 영화 <스펜서>는 정적인 스타일의 영화지만 다이애나의 표정을 통해 보는 사람의 감정을 크게 움직이는 영화다.
*영화의 스틸컷은 [다음 영화]에서 가져왔으며, 저작권은 영화사에 있습니다.
[간단한 리뷰가 포함된 movielog를 제 유튜브 채널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
주로 말 위주로 전달되기 때문에 라디오처럼 들어주셔도 좋을 것 같아요.]
유튜브 Rabbitgumi 채널 구독과 좋아요도 부탁드립니다!
<스펜서>
https://www.youtube.com/watch?v=O2fcOhrEb-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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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침없이 돌아가는 혐오, 옹호, 풍자의 트라이앵글
서브스턴스 (THE SUBSTANCE, 2024)
거침없이 돌아가는 혐오, 옹호, 풍자의 트라이앵글
개봉일 : 2024.12.11.
관람등급 : 청소년 관람불가
장르 : 스릴러, 고어
러닝타임 : 141분
감독 : 코랄리 파르쟈
출연 : 데미 무어, 마가렛 퀄리, 데니스 퀘이드
개인적인 평점 : 3.5 / 5
쿠키 영상 : 없음
보통 예리한 칼을 다룰 땐 조심스러워지기 마련인데 이 영화는 다르다. <서브스턴스>는 여성을 향한 혐오(일부 남성의 눈으로 담아낸 불쾌한 장면들이 있음)와 옹호, 사회 풍자라는 세 개의 날카로운 칼을 손에 쥐고 정말 거침없이 휘둘러댄다. 처음부터 끝까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심장을 자극하는 음악과 눈 돌릴 틈을 주지 않는 화면, 귀를 지나 손끝까지 생생히 촉감을 전달하는 음향. 이제 끝인가 싶을 때 한걸음 더 나아가는 파격적인 흐름. ‘이만하면 뭘 말하는지 지나가는 강아지도 다 알아듣겠어!’싶은데.. 그럼에도 이 영화는 브레이크가 고장 난 트럭, 아니 탱크처럼 미친 듯이 밀고 나간다.
<서브스턴스>의 주인공 엘리자베스는 한때 아카데미상을 2번이나 받고 명예의 거리에 입성할 만큼 사랑받는 대스타였다. 별 안에 박힌 ‘엘리자베스 스파클’이라는 이름. 엘리자베스는 별, 스타라는 칭호가 어색하지 않은 빛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대중들의 관심이 줄어들고 그는 이제 영화 속 캐릭터가 아닌 에어로빅 쇼 진행자로만 간간이 카메라에 얼굴을 비치는 신세로 전락한다.
엘리자베스가 50살이 되던 날, 그는 쇼의 프로듀서 하비에게 해고 통보를 받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차 사고까지 당한다. 꽃다발, 케이크 하나 없이 가볍게 흩어지는 초라한 생일 축하로도 모자라 50살이 되었다는 이유로 해고까지 되다니. 최악의 생일이다. 엘리자베스는 환자복을 입은 채 눈물을 터트린다. 그때 그를 지켜보던 젊은 남성 간호사가 엘리자베스에게 인생을 바꿔줄 약물을 권유하고 엘리자베스는 그 약물을 통해 아름답고 젊은 여성 ‘수’의 삶을 새롭게 시작한다.
<서브스턴스>는 아름다움과 사랑이라는 목줄에 묶인 중년 여성 엘리자베스와 당연하게 그 목줄을 쥐고 있는 남성들. 그리고 그 남성들을 움직이는 유일한 존재, 생생하고 아름다운 여성 수(SUE)의 기묘하고 질긴 관계성을 그린다. 엘리자베스는 남성에 의해 스타가 되었다가 남성에 의해 버림받고 수가 되어 다시 남성들의 위로 올라탄다. 엘리자베스는 언젠가는 그들에게 버림받고 다시 추락할 거란 걸, 자신이 망가지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이 위험한 기회를 놓지 못한다.
영화는 서서히 깨지며 분열하는 엘리자베스의 삶을 속도감 있게 담아낸다. 카메라에 담긴 조각난 엘리자베스와 수의 모습은 매혹적이면서 역겹고 눈물겹다. 금이 가버린 별과 그 위로 쏟아지는 수많은 오물들. 나에겐 그것들을 자연히 받아들일 무던함이 모자라다.
새우처럼 탈피하는 엘리자베스와 새우를 게걸스레 먹는 하비
여성의 삶을 좀먹는 남성들
50살이 된 엘리자베스는 남성들이 원하는 사회적인 여성성을 모두 잃은 사람이다. 촬영을 마친 엘리자베스가 긴 복도를 따라 화장실로 향하는 장면, 엘리자베스가 들어가려던 여성 화장실에 사용 불가 안내문이 붙어있다. 그는 눈치를 보고 남성 화장실로 향한다. 사용 불가가 된 여성 화장실은 남성들의 눈엔 더 이상 소비할 여성성이 남아있지 않은 엘리자베스의 처지를 보여주는 듯하다.
어쩔 수 없이 들어간 남성 화장실, 엘리자베스는 충격적인 하비의 통화 내용을 듣는다. 여자는 어려야 해, 섹시해야 해, 25세부터 임신 가능성이 줄어든대, 새로운 애 구해! 온갖 더러운 말을 쏟아내는 하비의 뒤에서 엘리자베스는 숨죽인 채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엘리자베스는 여배우, 여성으로서의 인생이 끝났음을 실감한다. 이제 그가 받을 수 있는 꽃다발은 프로그램에서 정리되었음을 알리는 꽃다발뿐이고 오랜만에 만난 중학교 동창은 콜레스테롤 수치가 장난 아닌 중년의 남성이 됐다. 반짝반짝했던 명예의 거리 속 별 모양 타일은 금이 갔고 다시는 촬영장의 조명을 맛볼 일은 없을 것 같다. 이제 남은 건 늙어가는 것뿐인, 다시는 주목받지 못할 공허한 중년의 인생. 엘리자베스는 현실을 받아들이기 어렵다.
- 아래 내용부터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그래서 엘리자베스는 헛소리라고 생각하면서도 USB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건다. 약물을 받아온 엘리자베스는 욕실에 서서 활성제를 주사한다. 이내 바닥에 쓰러져 고통을 호소하던 그는 몸을 구부린 채 움직임을 멈춘다. 이후 그의 척추를 따라 피부가 갈라지며 새로운 여성 수가 나타난다.
이는 새우의 탈피를 떠올리게 만든다. 새우는 성장하며 낡은 껍데기를 벗고 새 갑각으로 탈피하는데, 엘리자베스는 성장하는 새우처럼 낡은 중년 여성의 껍데기를 벗고 새로운 갑각인 젊은 여성의 몸으로 탈피한다.
엘리자베스는 수가 되어 거실에서 스트레칭을 한다. 엘리자베스의 오래된 액자가 보이고 몸을 숙였던 수의 상체가 올라오며 액자 위에 겹쳐진다. 이때 컴퓨터의 부팅 소리 같은 효과음이 삽입되며 엘리자베스의 인생이 새롭게 재부팅됐음을 알린다.
하지만 이 탈피를 마친 생생한 새우를 노리는 이들이 있었으니, 바로 극 중에 등장하는 모든 남성 캐릭터다. 대표적인 인물은 에어로빅쇼의 프로듀서 ‘하비’. 그는 엘리자베스에게 해고를 통보하는 자리에서 나이 든 여성에 대해 말하며 게걸스레 새우를 먹어치운다. 하비가 떠난 자리에 남은 수많은 새우 껍질들은 그가 남성으로서 얼마나 많은 여성의 삶을 뜯어먹었을지 생각해 보게 만든다.
이 외에도 하비는 자신의 여성 비서 이사벨라의 이름을 신디로 바꾸면서 이게 더 부르기 편하다고 우기고 아무렇지 않게 쇼에 출연했던 여성들의 액자를 싹 갈아치우면서 자신의 권력을 자랑한다.
처음엔 본때를 보여주겠다는 마음으로 오디션에 찾아간 수는 스케줄 따위는 상관없이 너를 원한다는 둥.. 하비에게 온갖 칭송을 받으며 행복한 나날을 보내지만 결국은 하비가 만들어준 ‘새해 전야쇼’라는 목표에 휘둘리며 무너져가는 몸에 다시 활성제를 주사한다.
하비 외에도 극 중엔 여러 추한 남성 캐릭터와 그들의 시선을 암시하는 연출이 나온다. 이름보다 신체, 나이를 먼저 물어보며 이상한 품평을 하는 쇼의 심사위원들, 스파클 씨인 줄 알았다며 문을 쾅쾅 두드리다가 수를 보자마자 추파를 던지는 이웃, 수에겐 친절하고 엘리자베스에겐 위협을 가하던 트로이(수가 파티에서 데려온 남성), 새해 전야쇼에서 헐벗은 여성 댄서들을 반기는 하비와 백발의 남성들. 그리고 수의 가슴과 엉덩이만을 찍으며 열심히 화각을 조정하는 펌프 잇 업 쇼의 카메라 렌즈 움직임은 수축과 확장을 반복하는 사람의 동공을, 수의 몸을 탐내는 남성들의 시선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나마 동창 ‘프레드’는 극 중에서 가장 친절한 남성으로 표현되긴 하지만 그가 처음 엘리자베스를 만났을 때 한 칭찬마저 “여전히 세상에서 제일 예쁜 사람이구나.”라는 점에서 그의 친절이 진심으로 따뜻하게 다가오진 않는다.
수의 생생한 빛깔을 따라할 수 없었던 엘리자베스
엘리자베스가 수를 놓지 못했던 이유
엘리자베스가 더 나은 내가 되고 싶은 이유는 단 하나다. 사람들에게 사랑받기 위해서다. 영화는 이 슬픈 욕망 중 일부인 ‘남성에게 사랑받고자 하는’ 마음을 매우 확대해 보여준다.
7일, 7일. 이 밸런스가 무너진 건 수가 첫 쇼를 녹화한 후 파티장에서 트로이와 함께 집으로 돌아온 날이었다. 수는 남성과 하룻밤을 보내기 위해 몸 교체를 미룬다. 수의 남성을 향한 욕망은 ‘7일마다 교체 예외 없음’이라는 문장에서 ‘예외’라는 단어에 집중하게 만들고 그는 정해진 양 이상의 안정제를 뽑아낸다. 다시 안정을 찾고 돌아온 수의 엉덩이를 감싸는 트로이의 손길이 화면 가득 채운다. 그것은 악마의 손길처럼 압도적이고 위협적으로 느껴지며 그 손길 한 번의 대가는 고스란히 엘리자베스의 손가락으로 돌아온다.
깨어난 엘리자베스는 불안감을 느끼면서도 리필을 받으러 창고로 향한다. 그리고 무언가에 쫓기며 들어간 카페에서 자신에게 약을 권한 젊은 간호사의 원래 몸을 만나면서 뭔가 잘못됐음을 느끼고 고민한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오래된 물건’ 박스를 엎어 오래된 엘리자베스의 몸으로 받았던 프레드의 쪽지를 찾는다. 흙탕물로 오염된 너저분한 쪽지. 엘리자베스는 그것을 가슴에 폭 안으며 안도한다.
엘리자베스는 어떻게든 수가 아닌 엘리자베스가 사랑받을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 했다. 그는 갈라진 척추의 상처를 다시 봉합하듯이 척추를 따라 이어지는 원피스의 지퍼를 올리며 프레드를 만나러 갈 준비를 한다. 그런데 준비를 모두 마치고 수가 누워있는 욕실 벽을 닫고 나가려는 찰나, 생기 가득한 분홍빛 수의 입술이, 아름다운 수의 가슴이 눈에 들어온다.
아무것도 바르지 않아도 아름다운 분홍빛의 수의 입술과 새빨갛게 칠해진 텁텁해 보이는 엘리자베스의 입술. 분홍 바디 슈트 사이로 보이는 탄력 있는 수의 가슴과 빨간 원피스 아래 크게 눈길이 가지 않는 엘리자베스의 가슴. 엘리자베스는 다시 거울 앞에 서서 치크와 립글로스로 생기를 덧칠하고 스카프를 덮으며 가슴을 가린다. 과도한 화장으로 얼굴은 점점 부자연스러워지고 시간은 속절없이 흐른다. 자연스럽고 사랑스러운 젊은이의 분홍빛을 아무리 따라 해보려 해도 진한 붉은빛을 가진 중년은 그 빛깔을 따라갈 재간이 없다.
엘리자베스는 생생한 여성이 되어 사랑받고 싶다. “They are going to love you. 모두가 당신을 사랑할 거예요.” 수에게 배달된 꽃다발 속 한마디. 그는 종료 주사를 손에 들고도 그 한마디에 흔들려 수를 죽이지 못한다.
욕심이 늘어가며 분리되는 두 사람
척추에서 안정제를 뽑는 이유
7일, 7일. 이 밸런스가 깨지기 전 엘리자베스와 수는 한 사람 같았다. 처음 쇼 오디션을 보러 갈 땐 엘리자베스가 수의 몸으로 하비에게 복수를 하러 가는 느낌이었고, 수는 엘리자베스의 또 다른 슈트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밸런스가 깨지고 점점 욕심이 늘어갈수록 원형인 엘리자베스는 수에게 잡아먹히게 된다. 카페에서 만난 남성 간호사의 원형은 엘리자베스에게 묻는다. “그쪽도 시작했나요? 당신을 먹어치우는 것.”
앞서 엘리자베스-수의 변화를 새우의 탈피에 비유했었다. 이 탈피 이후 엘리자베스의 척추를 따라 남은 검은 흉터는 새우 등에 있는 검은 내장과 비슷해 보인다. 수는 자신의 원형이 되는 엘리자베스의 척추, 즉 그의 내장에 주사기를 꽂고 한도 끝도 없이 안정제를 뽑아낸다. 속부터 점점 망가지기 시작한 엘리자베스의 몸은 조금씩 썩고 굽어간다.
굽은 몸으로 TV를 보던 엘리자베스는 당장이라도 부서질듯한 다리를 겨우 펴고 하비가 준 퇴사 선물을 꺼내본다. “시간 보내기 딱 좋은 걸 샀어요.” 하비의 목소리와 함께 프랑스 요리책이 모습을 드러낸다. 엘리자베스는 이를 악물고 요리를 한다. 네 바람대로 빨리 시간을 보내고 남성들에게, 수에게 복수를 하러 가겠다는 듯이.
피순대, 칠면조, 송아지 뇌 조림… 의미심장한 요리들이 지나가고 TV에서 혜성처럼 등장한 신인이라는 타이틀을 단 수의 모습이 나온다. 분노한 엘리자베스는 수의 말들을 하나하나 비난하며 거칠게 칠면조 내장을 손질한다. 이때 영화는 칠면조와 수의 신체 부위를 번갈아 보여주는 편집을 통해 엘리자베스의 분노를 살벌하게 표현한다. 엘리자베스가 당장이라도 수의 내장을 뜯어 죽일 준비가 되어있는 것처럼.
외부가 아닌 내부로 향한 분노
누군가에겐 케첩과 다르지 않을 엘리자베스의 피
하나였던 엘리자베스와 수는 서서히 분열되며 서로를 죽이기에 이른다. 엘리자베스와 수를 망친 건 그들을 ‘남성에게 사랑받는 여성’이라는 상품으로 길들인 남성들의 권력이지만 엘리자베스와 수는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이 사태의 책임을 남성이 아닌 서로에게 돌린다.
엘리자베스는 수가 자신의 시간과 생명을 뺏어가는 게 싫고 수는 굳어가는 엘리자베스가 가만히 앉아서 시간을 죽이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 엘리자베스와 수는 서로를 타인처럼 지칭하며 비난한다. 이들의 갈등은 동일인의 내면의 갈등이 아닌 타인 간의 갈등, 세대 갈등을 보는 듯한 느낌도 든다.
엘리자베스는 생명을 뺏어가는 수에게, 수는 종료 주사를 꽂으려 하는 엘리자베스에게 위협을 느낀다. 그래서 두 사람은 하나라는 충고를 잊고 서로를 죽이려 달려든다. 수는 엘리자베스를 죽이고 수도 엘리자베스가 죽은 후 서서히 망가진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수는 다시 한번 몸에 활성제를 투여해 엘리자베스와 수가 합쳐진 몬스트로 수로 부활한다. 그는 한껏 치장한 채 새해 전야쇼에 서지만 남성들은 그를 죽이려 한다. 이 세계에서 아름답지 않은 여성을 사랑해 줄 남성은 없다.
아름다웠던 여성의 절규와 피가 전방위로 뿌려진다. 그리고 더 이상 스튜디오에 설 수 없는, 스타로서의 생명을 다한 왕년의 대스타는 길거리에서 산산조각 나버린다. 마지막까지 남은 엘리자베스의 얼굴은 자신의 이름이 적힌 별 타일 위에 안착한다. 그리고 별이 가득한 하늘에 닿지 못한 3그루의 나무를 바라보며 그 자리에서 녹아내린다.
엘리자베스가 남긴 피는 영화의 초반부, 누군가 떨어트린 햄버거의 케첩과 비슷하게 표현되고 다음날, 아무렇지 않게 청소차에 의해 닦인다. 이는 사랑받기 위해 모든 걸 다 바친 여배우의 역겹고 눈물겨운 마지막 흔적이지만 하비와 같은 누군가에겐 길바닥에 엎어진 빨간 케첩과 다를 바 없는 더러운 오염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 영화도 누군가에겐 새로운 충격이 누군가에겐 그저 뜻 모를 B급 호러 무비 정도로 평가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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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크린 너머 세계 속으로...스웨덴] 영화의 페르소나를 벗겨내는 영화, <페르소나>
잉그마르 베르히만의 <페르소나>는 필름이나 영사기 등의 장치들을 보여주거나, 오프닝 시퀀스에서 제작자의 이름이 적힌 흰 바탕의 화면과 인물의 얼굴, 사물의 클로즈업을 교차해 배치함으로써 관객이 지금 보고 있는 것이 ‘영화’이며 현실이 아니라는 것을 관객에게 일깨워 준다. 대사 없이 소년을 따라 이어지는 영화의 다음 장면을 기대하며 집중하고 있던 관객은 인물과 사물 사이 갑작스럽게 등장한 필름 인서트에, 영사기가 돌아가는 모습에 다시 자신의 위치를 자각하고 이것이 필름에 기록되어 영사기를 통해 상영되고 있는 영화임을 깨닫게 된다.
영화는 때로 어두운 영화관 속에서 스크린의 경계를 흐리게 함으로써 보여주고 있는 것들이 마치 실제 현실인 것 같은 인상을 주기도 한다. 영화를 보는 동안 관객은 무의식적으로 인물 혹은 카메라의 시선에 동일시 되어 디제시스에 몰입하게 되는데, 비록 소문일 뿐이라고 알려졌지만, 뤼미에르 형제의 <열차의 도착>이 처음으로 다수의 관객 앞에서 상영되었을 당시 관객이 실제로 자신에게 기차가 달려오는 줄 알고 놀라서 뛰쳐나갔다는 이야기를 통해서도 그 효과를 유추해 볼 수 있다. 즉, 영화는 이처럼 때로는 허구의 세계를 현실처럼 보여주어 관객에게 실제와 같은 인상과 감각을 제공하는 페르소나를 갖는다. 잉마르 베리만의 <페르소나>는 이러한 영화가 가진 페르소나를 벗겨주는 영화이며, 그것을 통해 관객이 인물에게 몰입하고, 동일시된다기보다, 엘리자베스와 알마 두 여성이 점점 겹쳐지는 과정과 그 이면을 제대로 관찰하게 해준다.
흐릿한 여자의 초상화를 쓰다듬는 남자아이가 등장하고 엘리자베스 보글러와 알마라는 두 인물이 등장하며 본격적인 서사가 시작되는데, 이때 알마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장면으로 시작되는 부분은 마치 관객인 우리가 문을 열고 스크린의 경계를 넘어 영화 속 세상으로 들어간 듯한 인상을 준다. 알마를 지켜보는 시선에 몰입하려던 찰나, 그녀의 앞에 있던 카메라는 그녀의 뒤통수와 옆모습을 단절된 컷으로 비추는데, 이로써 그녀는 보이는 대상이 되고 관객은 극 중 인물에게 동일시되기보다는 그녀를 바라보는 관찰자로서의 위치를 가진다. <페르소나>에서는 인물의 클로즈업과 시점 쇼트가 빈번히 활용되는데, 덕분에 관객은 두 인물이 가지고 있는 서로에 관한 생각에 공감할 수 있으며 함께 가까워지고, 때로는 인물과 대화하고 있는 듯한 인상도 받게 된다. 그러나 영화의 후반부, 서로의 내면을 바라봄으로써 자신의 죄의식을 떠올리고 자신의 정체성을 혼동하며 동일화되어 가는 두 사람의 클로즈업 샷이 점점 섞여가다가 마침내 반반으로 합쳐져 한 사람의 얼굴이 된 결정적인 순간, 두 사람의 모습을 담은 하나의 얼굴은 일시적으로 사진처럼 정지한다. 이는 아녜스 바르다의 <행복>의 후반부에서 등장했던 인물들의 단체 사진과도 유사한 효과를 불러일으키는데, 두 사람의 클로즈업으로 만들어진 정지된 얼굴은, 인물로부터 한 발짝 떨어져 그 누구의 시선도 아닌 객관적인 시선으로 그들을 응시하게 만들며, 관객에게 하나의 얼굴로 합쳐져 이제 누가 누구인지 제대로 분간하기도 어려워진 상태에서 두 인물에 대해 사유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영화가 진행되어 오는 동안 몰입하고 동일시해왔던 인물들로부터 일시적으로 거리를 두게 되며, 스크린의 경계를 넘어 현실적인 인상을 주는 영화의 페르소나를 벗기고 영화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된다.
두 여인의 서사가 마무리되고 오프닝에 등장했던 소년이 다시 등장하는데, 소년이 쓰다듬던 초상화 속 여인이 엘리자베스라는 것이 드러나고, 이를 통해 그 소년은 엘리자베스의 아들임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스크린을 통해 엘리자베스와 알마의 이야기를 보고 있었던 것처럼 그 또한 역시 2차원의 화면을 통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이로써 우리가 ‘스크린을 보고 있었다’는 행위를 뚜렷하게 자각하게 된다. 또한 영화의 마지막 부분, 초상화의 정체와 소년이 드러남과 더불어 촬영 현장에 놓여있는 듯한 촬영용 카메라들과 앞서 보았던 영사기, 그리고 끝이 거의 보이는 다 풀려가는 필름이 등장하는데, 이를 통해 ‘영화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재차 인식하게 함과 동시에 영화가 끝을 맺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영화 <페르소나>는 엘리자베스와 알마라는 두 여인을 통해 인간의 깊은 심연과 이면, 죄의식 그리고 다양한 모습으로서의 삶을 보여줌과 동시에 영화가 가진 페르소나를 드러내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착각을 인지하게 해주며 관객이 인물들에 동일시되지 않고 인물 간의 관계에 집중할 수 있게 만든다. 그리고 우리가 영화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계속해서 깨우쳐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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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혼자만 성장하는 성장영화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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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을 잘 짓는 것은 정말 어렵다. 어찌 보면 가장 어려운 일이다. 내용은 잊혀도 제목만은 끈질긴 생명력을 가져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오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의 제목은 사람들의 마음을 끄는 셀링 포인트가 될 것이다.
서두에 밝히자면, 이 영화는 제목만 좋았다.
<태어나길 잘했어>는 다한증이 있는 박춘희의 성장 이야기다. 박춘희를 위한, 박춘희에 의한, 박춘희만의 이야기. 박춘희의 주변인물과 배경과 사건들은 파편처럼 흩어져 저 멀리로 사라지고, 광활한 우주에 박춘희 혼자 남겨진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나.
너무 많은 어려움들
춘희는 중학생 때 부모가 죽는 바람에 외삼촌 집에서 더부살이를 하게 된다. 왜 죽었는지는 끝내 밝혀지지 않는데, 아무튼 부모가 죽어 혼자 남겨진 춘희는 외삼촌 부부와 외할머니와 함께 살게 된다. 그 누구도 춘희를 환영하지 않고, 여분의 방이 있는데도 굳이 다락방을 내어준다. 검은 머리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라지만 방금 부모상을 치른 아이에게 참으로 불친절한 외삼촌네 가족이다.
설상가상으로 춘희에게는 다한증까지 있다. 다한증 때문에 친구를 사귀기도 어렵다. 하필이면 학교에서 폴카댄스를 춰야 하는 상황인데, 손을 잡고 춤을 출 파트너를 구하기도 쉽지 않다. 선생조차 불쾌해 한다. 명상센터에서 '저는 쩔어 있어요, 땀에.'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춘희. 땀은 인생의 모든 고난과 역경에 쩔어있는 춘희의 메타포이자 상징이다.
춘희는 어른이 된 이후 외삼촌네 식구들과 함께 살던 집에서 혼자 산다. 외삼촌네 식구들은 고등학생이 된 춘희만 내버려두고 새 아파트로 이사가버렸기 때문이다. 춘희는 혼자 살아도 조그만 다락방에서 지내고, 다한증을 수술할 돈을 모으기 위해 매일 마늘을 깐다. 끼니도 오직 컵라면뿐이다.
중학생 정도의 아이에게 조실부모도 엄청난 충격일 테니 이후 발생하는 모든 사건은 사실 조실부모와 눈칫밥 먹는 것, 이후 버려진 집에서 버려진 채로 살아가야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납득이 간다. 왜 굳이 다한증까지 설정했는지에 대한 의문이 든다. 혹은 다한증 하나로도 충분하다. 부모를 잃거나 잃지 않거나, 평범한 가정이거나 그렇지 않거나 다한증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풀어나갈 만한 이야기이다. 달리 말하면 주인공의 캐릭터가 그렇게까지 입체적이지 않다. 춘희는 그저 딱한 아이이다.
우리나라는 국가보장시스템이 있는 나라이고, 생활고로 힘들 때는 각 동 주민센터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그런 핍진한 이야기는 차치하자. 이 영화는 불쌍한 춘희 이야기이니까.
춘희와 NPC들
외삼촌네 딸, 춘희의 외사촌 유라는 춘희를 너무 싫어한다. 유라는 충분히 춘희를 싫어할 만하다. 그러지 않아도 예민한 사춘기에 갑자기 사촌이 우리집에서 살게 된다니. 더군다나 같은 학교이기까지. 영화에서 보여지는 유라는 성질머리가 보통이 아니다. 여자들은 원수의 자식에게도 생리대는 빌려준다는데, 생리대를 가져가는 춘희를 도둑년이라고 욕하는 개인적인 악행에서 나아가 수학여행에 술을 챙겨가고 담배를 피우는 불량학생이기까지. 춘희를 선량한 희생자로 만들기 위해 유라가 꼭 못되처먹은 아이가 되어야 했나?
유라의 오빠이자 춘희의 사촌오빠는 식당을 운영한다. 춘희는 그 식당에서 쓸 마늘을 까주고 3만 원씩 받는다. 그 오빠란 사람은 대학생 때 학생운동을 했다. "혁명에도 실패하고 사랑에도 실패"했다며 술 마시고 징징거린다. 도대체 왜 학생운동을 했는지 이유도 명분도 없고, 왜 하필 춘희에게 마늘까는 일을 주는지 모를 일이며(홀서빙직을 제안하기는 하지만), 왜 이혼위기에 처했는지 모를 일이다. 오빠를 설명하는 일련의 사실들은 그의 캐릭터를 형성하지 못한다. 혹시 춘희가 마늘을 까는 알바를 하기 위해 오빠가 있어야 했나?
춘희와 잠깐 사랑에 빠지는 주황이라는 캐릭터를 보자. 스토리상 남자주인공에 가깝다. 주황은 말을 더듬는데, 어릴 때 폭력적인 아버지 때문에 말을 더듬게 되었다고 한다. 거기까진 좋다.
그런데 주황의 역할은 춘희를 갑자기 사랑하고, 춘희가 돈이 없으니 돈 주겠다고 말하고, 춘희에게 차이는 것뿐이다. 춘희에게 잠깐의 행복을 맛보게 하기 위해 굳이 말을 더듬는 남자가 있어야 했나?
가장 골때리는 인물은 노숙자이다. 단순한 도식으로 보았을 때 집이 없다는 점에서 노숙자는 춘희보다 불쌍하다. 춘희는 집에 가는 길에 여자 노숙자를 발견하고, 노숙자가 맨발인 걸 보고 사촌오빠에게 받은 마사이족 신발을 준다.
이 노숙자는 총 세 번 등장한다. 춘희가 신발기부를 하기 위해 등장, 번개맞은 춘희를 살려주기 위해 등장, 춘희에게 마사이족 명언도 아닌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는 말을 해주기 위해 등장. 춘희에게 자기보다 불쌍한 사람을 돕는 경험을 하게 만들기 위해 노숙자가 나와야 했나? 굳이 마사이족 신발이었어야 했나?
그 외 외할머니, 외삼촌, 외숙모, 기타 등등 모든 영화 속 인물들은 춘희의 성장을 돕기 위한 NPC에 불과하다. 심지어 춘희에게 꽤 중요한 인물이었던 외할머니의 죽음도 외숙모의 입을 통해 간접적으로 전해진다. 그때 춘희가 문상을 갔는지, 울었는지, 절망에 빠졌는지, 무감정했는지 궁금하다. 외할머니는 유일한 춘희 편이었으니까.
갑자기 들이닥친 이방인에게 부모를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유라의 불안, 혁명도, 사랑도, 이도저도 해내지 못한 사촌오빠의 좌절감, 비록 말을 더듬지만 처음으로 누군가가 자기를 좋아해주는 것을 경험하고, 세상 밖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게 될 주황의 성장, 춘희가 선물해준 신발을 신고 새로운 삶을 향해 걸어나가게 될 노숙자의 변화는 춘희에게 하등 중요하지 않다.
따라서 이 영화는 오직 춘희의 성장만을 위해 전개된다. 반대로 말하자면 춘희 외에는 그 누구도 성장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세계는 전혀 넓어지지 않고 오직 춘희의 자아만 부풀어오른다.
내면의 상처받은 아이 만나기
다시 말하지만 춘희는 '불쌍한' 사람이다. 어린 시절에 조실부모와 천대와 왕따 등등을 모조리 경험했다. 작은 다락방에 갇혀 살았던 춘희는 어른이 되어도 전혀 성장하지 못하고 다락방 같은 안전기지에 갇힌다.
그런 춘희가 우연히 책을 기부하려다 명상센터를 알게 되고 거기에서 주황을 만나 타인과 관계를 맺어보고, 사기도 당해보고, 자기보다 불쌍한 사람을 도움으로써 춘희는 조금씩 성장한다.
이야기 초반에 춘희는 번개를 맞고 쓰러진다. 우리는 번개를 맞은 춘희의 앞에 중대한 변화가 나타날 것을 예상하게 되는데, 그 변화란 어린 춘희의 등장이다.
1.조실부모한 고아 / 2.다한증 / 3.눈칫밥 먹는 더부살이 / 4.매일 컵라면 먹기 / 5.평생 마늘까기 / 이 정도의 설정도 너무 많은데, 6.번개맞기 / 7.어린 춘희 만나기가 추가된다.
어린 춘희를 등장시키기 위해 번개를 때리는 게 뜬금없지만, 아무튼간 어린 춘희를 만난다는 것은 위로받지 못했던 내면의 어린아이와 마주하는 일이다. 차마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던 그 시절의 불쌍하고 어린 나를 어른인 내가 안아주는 것, 그렇게 상처받은 마음을 위로하고 앞으로 나가가는 것. 그러므로 너는 쓸모없는 아이가 아니라 태어나길 잘한 아이라는 것. 그것이 영화가 주는 메시지이다.
결국 춘희는 그 집을 떠난다. 자발적으로 떠났으면 좋았으련만, 사촌오빠가 투룸 정도 얻을 수 있는 돈이라며 봉투를 내밀고, 사촌오빠에게 갑자기 왜 그랬냐고 화를 내며, 라면이 아닌 고기를 사먹고 나서 이사간다. 이사를 가도 여전히 마늘을 깐다.
어른 춘희가 몇 살이나 되었는지는 불명확하다. 다만 춘희는 이제 다락방이라는 안전기지와 상처받은 어린아이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삶을 살아가기로 했다. 영화에서는 보여주지도, 다루지도 않더라도 외삼촌네 식구나 주황, 노숙자도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곳에서 성장하고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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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의 다른 영화들을 다 보려고 한다. 다른 작품들이 좋더라도 이 작품을 좋아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건 어쩔 수 없다. 내가 좋아하는 감독들의 영화들 중에서도 절망적인 영화들이 한두 편씩은 있으니까.
어린 시절의 상처를 직면하고 과거와 화해하는 일은 정말 어렵다. 분명 지금의 나에게 영향을 미치지만 똑바로 바라보는 건 너무 무섭고, 그 시절로 돌아가 다시 한 번 상처받을 것 같다. 상처받은 어린이는 마음 속 어딘가에 꼭꼭 숨어있다 별안간 툭 튀어나온다. 우리에게 번개가 떨어질 일은 극히 드무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상처투성이 불쌍한 어린이를 잘 위로하고 달래주어서 마음 속 감옥에서 풀어주는 수밖에.
반드시 누군가에게는 이 영화가 춘희에게 떨어진 번개처럼, 커다란 위로가 될 것이다.
어쨌거나 우리는 모두 태어나길 잘했다.
*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아 시사회에 참석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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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계성’에 관한 잊히지 않을 인장
두 장면이 있다. 여고생 ‘아사’와 친구 ‘에미리’가 텅 빈 학교 체육관에 둘이서만 있다. 두 사람은 넓은 체육관에서 때로는 가까이 앉아, 때로는 뛰어다니며 대화를 나눈다. 에미리는 아사에게 자신이 레즈비언이라는 점을 알려주려는 참이고, 아사는 그런 에미리에게 실례가 될 수도 있는 반응과 질문을 던져 종종 민망해한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에 불편한 긴장은 없다. 이 장면의 주요한 정서는 두 사람이 적당한 거리를 둔 채 가까워지기도 하고 멀어지기도 하면서 안전하고 편안한 거리감으로 신뢰와 애정의 관계를 형성하는 데서 나온다. 텅 빈 체육관에서 두 사람을 방해할 요소는 없다. 오롯이 둘만 마주해 말과 감정을 주고받을 수 있는 공간이다. ‘완벽한 접속’은 불가능할 테지만 상관없다. 타자를 완벽히 내 것으로 하는 관계는 공감이라기보다는 폭력이기 때문이다. 거리는 있지만 결코 멀지는 않고, 서로를 온전히 믿을 수 있는 두 사람의 관계성. 텅 빈 체육관의 두 소녀는 안전하고 신뢰할 수 있는 관계, 애정이 깃든 관계의 모델이 무엇인지를 가늠케 해준다.
두 번째 장면도 그렇다. 이번에는 아사와 그의 이모 ‘마키오’다. 두 사람은 탁 트인 바닷가의 한적한 계단에 앉아 있다. 이번에도 딱 달라붙어 있는 대신 위아래로 몇 칸의 간격을 둔 상태다. 아사와 에미리가 그러했듯, 두 사람은 때로는 앉아서 때로는 일어서서 움직이며 말과 감정을 나눈다. 닫힌 공간인 체육관의 폐쇄성이 커밍아웃하는 에미리에게 안전하다는 감각을 주었다면, 탁 트인 바닷가는 뜻밖에 한 가족이 된 조카와 이모가 앞으로 만들어갈 관계의 양상이 무한히 깊고 푸르리라는 점을 암시한다. 하나가 될 필요 없는, 적당한 거리를 조정해가며 서로의 곁에 있는 관계의 모델이 다시 한번 아름다운 이미지로 재현된다.
〈위국일기〉는 관계성에 관한 영화다. 가장 주요하게 다뤄지는 건 아사와 마키오의 관계다. 하루아침에 교통사고로 부모님을 잃은 아사는 자신의 엄마와 십수 년 전에 절연한 이모 마키오와 한 가족을 이룬다. 장례식장에서 사람들이 아사를 두고 내뱉는 무심하고 무례한 말에 분노해 홧김에 자신이 아사를 데려가겠다고 선언해버린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이 조율해야 할 것은 무수히 많다. 서로 다른 생활 습관, 성격은 당연하고 돌봄을 어떻게 주고받을지도 협상해야 한다. 비혼 여성 마키오는 갑자기 생긴 조카를 돌보고 보호하는 일에 동반되는 책임감이 생경하면서도 때로는 부담스럽고, 아사 역시 자기 엄마를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면서도 그 이유는 절대 말해주지 않는 마키오와의 관계가 쉽지만은 않다.
영화는 두 사람이 차이를 조율하며 일상을 맞추고, 새로운 관계 모델을 학습하며, 죽은 아사의 부모님을 애도하는 과정, 나아가 억압적인 엄마(아사)/언니(마키오)에게 받은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을 담아낸다. 그러나 이뿐만이 아니다. 아사는 결혼하지 않는 여성 어른이 맺는 친구/연애 관계에서도 지금껏 모르고 지낸 관계의 가능성을 확인하고, 마키오 역시 아사를 돌보며 기존의 자기 관계망에 더욱 깊이를 더해나간다.
크든 작든 모든 등장인물의 관계성을 세심히 그려내는 〈위국일기〉는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건강하고 행복한 관계, 서로를 북돋는 관계는 완벽한 이해와 공감이 아니라 적당한 거리를 두고 서로를 존중하며 곁에 머무를 때 나온다고.
공감과 이해라는 말이 너무 쉽게 쓰인다는 느낌을 곧잘 받는다. 그러나 자신만의 고유한 결을 축적해온 타자는 결코 누군가가 ‘완벽’하게 포착해 이해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이 일이 가능하려면 타자는 생동하는 존재이기를 멈춰야 한다. 완벽한 이해는 타자가 주체이기를 멈추고 타인을 위해 자신을 오롯이 희생해 내놓을 때만 가능하다. 심지어 이마저도 ‘해부학적’ 이해에 그친다. 죽은 동물과 곤충의 박제에서 우리가 그들이 무엇을 느끼고 어떻게 행동하고 생각하는지는 알 수 없듯이 말이다. 우리에게는 누군가를 장악하듯 이해하려 하지 않고 적당한 거리감으로 은은하게 보듬는 관계의 모델이 필요하다.
〈위국일기〉가 공들여 보여주고자 하는 건 바로 이러한 관계성이다. 극적인 전개나 자극적인 요소로 관심을 끌지는 않지만, 자신뿐 아니라 서로의 일상을 지탱하며 함께 나아가는 건강한 관계의 양상은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위국일기〉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관계가 그렇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두 장면은 영화가 그려내는 여러 인상적인 관계를 아름답게 재현하며 잊히지 않을 인장을 남긴다. 체육관과 바닷가. 서로 다른 속성을 지닌 공간에서 펼쳐지는 이미지화된 관계성은 ‘선을 넘는’ 관계에 지친 사람들에게 은은한 위로로 다가갈 것이다.
*영화 매체 〈씨네랩〉에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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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빠의 31살은 어땠을까, 나의 31살은 어떨까 - 영화<애프터썬>
아주 아껴두던 영화를 보았다
사실은 너무 미루다가 그만 귀찮아져서, 이제서야 본 게 맞겠다.
영화를 보고 난 후에 조용히 베개를 휴지삼아 뚝뚝 흐르는 눈물을 닦느라 여념이 없었고 영화를 깨나 봤어도, 울어본 적은 정말 손에 꼽기도 하고 나조차도 놀랄정도로 많이 울어버렸기에 대체 이 영화의 무엇이 그렇게 날 슬프게 했는지 알고 싶었다.
필자는 상실의 아픔을 아직 제대로 알지 못한다. 정말 사랑하는 이를 잃어본 경험이 있냐하면, 아직은 없다가 맞다. 물론, 정말 마음 쓰고 좋아했던 사람을 계속 보고, 전처럼 따뜻하게 연락을 주고 받을 수 없게 되버렸던 경험은 있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건 사실 사랑도, 상실도 아니었다. 한때는 이에 대한 기준이 너무 높지 않나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적어도 필자가 생각하는 사랑은 그런게 아니다. 그리고 이 생각을 증명하는 순간들이 눈에 보일 때, 다시 말해서 필자가 사랑하고 애정하는 그를 , 또 그녀를 볼 때 마음 속에 드는 마음과 감정을 밖으로 꺼내서 살펴본다면 이건 그다지 믿기 어려운 말도 아닐거다.
영화를 보면서 그런 의문이 들었다.
캘럼은 이번이 소피와의 마지막 시간이라는 마음을 먹고 온걸까, 아니면 겨우내 여행을 하면서 서버린 결심인 것일까? 장면 곳곳에서 캘럼의 고통스러운 몸부림이 그대로 느껴졌다. 소피와 대화를 하며 양치를 하다 거울에 양칫물을 툭하고 뱉는 장면부터, 화장실에서 혼자 깁스를 풀며 소피와 대화하는 씬 등 우울은 그 근원을 찾을 수도 없게끔 나를 잠식시키고 명상과 태극권, 그 어떤 방법을 통해 안정을 찾으려해도 결국 그걸 이겨내지 못하는 스스로를 발견하는 게 더 절망적임을 말이다.
자신을 우울에서 꺼내기 위해서 스스로가 해야하는 일은 대체 무엇일까? 할 수 있는 일이 있긴 할까?
어쩌면 영화<애프터썬>은 사랑하는 존재를 잃는 것이 현재로 하여금 얼마나 고통스럽고, 또 그 존재와의 과거 수많은 순간 속에서 후회만을 떠오르게 하는지. 그 사람의 마음과 생각을 이해하고 싶어도, 결국 지금의 나는 다 알 수 없고 그저 그리울 뿐이라는 것을 말하는 영화 아닐까.
필자가 영화를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나조차도 명확히 정의내리지 못했던 그 모호한 감정과 생각들을
영화 속 여러 인물들의 서사를 통해 제3자로서 보기 시작해서, 결국엔 온전히 내 안에서 찾게 된다는 점인 것 같다
영화 속 소피와 캘럼의 모습에서 필자는 스스로의 어떤 모습을 본걸까?
사실 어쩌면 알 것 같기도 하다.
돌고돌아 결국 하고 싶었던 말은 애프터썬은 참 좋은 영화라는 거다. 지금의 필자에게 애프터썬이 어떤 의미로 다가왔는지 그냥 한 번 남겨보고 싶었다.
또 메스칼이 얼마나 대단한 배우인지도 말이다. 노멀피플때도 느꼈지만 그의 담백하면서도 섬세한 감정이 좋다. 그렇게 꾸밈없고 서글서글한 사람이 좋다. 겉으로 하는 치장보다 단단한 내실, 건강한 몸과 마음을 가꾸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뼈저리게 느끼는 요즘이기 때문이다.
메스칼이 연기하는 유약하지만 불안한 청춘이, 결국 그 모든 감정을 겪는 것이 건강한 젊음이라는 것을,
필자는 그의 연기를 통해, 그의 눈을 통해 다시금 깨닫는다.
31살의 소피는 31살에서 멈춰버린 아빠 칼럼을 다시 한 번 꼭 껴안고자 한다.
영화를 보는 내내 필자도 마찬가지였다. 칼럼을 안아주고 싶었고, 또 나의 아빠를 안아주고 싶었다.
이미 지나버린 아빠의 31살은 어땠을까, 아직 오지 않은 나의 31살은 어떨까.
31살이 되면, 그때의 아빠를 이해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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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듄(DUNE)' 영화 속 세계관 역사 요약정리
- 베네 게세리트, 초암공사- 영화 정보
장르: 스페이스 오페라
감독: 드니 빌뇌브
각본: 에릭 로스, 존 스페이츠, 드니 빌뇌브
원작: 프랭크 허버트의 듄(1965)
제작: 드니 빌뇌브, 케일 보이터. 메리 페어런트,조 카라치올로 주니어
주연: 티모시 샬라메, 제이슨 모모아 외
촬영: 그레이그 프레이저
음악: 한스 짐머
촬영 기간: 2019년 3월 18일 ~ 2019년 7월 26일
제작사: 레전더리 엔터테인먼트,워너브라더스
수입사: 워너 브라더스 코리아
개봉일: 2020년 12월 18일#듄 #듄영화리뷰 #듄예고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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