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노라마 2021-11-07 21:26:49
베스트 키즈
제이든 스미스, 성룡 주연의 액션영화이다.
타지로 이사온 주인공 드레가 쿵후를 배운 또래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한 아저씨에게 쿵후를 배워 그 괴롭힌 아이와 쿵후 대회의 결승에서 붙게되고 이기는 성장, 액션영화이다.
일단 중국에 이민한 미국인이라는 소재가 처음에 신선하게 다가왔고, 주제를 중국의 문화로 잘 넘긴다. 그리고 대회를 준비하고 부터는 액션의 비중이 늘어나며 더 흥미로워 진다. 또한 이민인 꼬마가 쿵후를 배운다는 메인 스토리 라인뿐만 아니라 주인공의 사랑, 한 아저씨의 과거 가족사 등 여러 흥미로운 점을 계속 주어서 좋았지만 마지막에는 그런 것들을 이어붙이기 위해 원래 엄청나게 엄격한 주인공 여자친구의 아버지가 사과 편지 한번에 표정이 풀리면서 대회에 딸을 구경하러 보내는 것을 허락하거나, 한 아저씨의 과거 와이프와 말싸움을 하다가 차가 미끄러져 자신을 제외한 가족이 죽는다는 과거, 그 트라우마를 이겨내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그 스토리가 너무 이해하기 어렵고, 빠르게 진행된다는 단점이 있어서 아쉬웠다. 하지만 영화의 흥미를 위해 그럴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액션 또한 눈에 띄었다. 쿵후라는 특이한 무술의 액션을 카메라 무빙에 꽤 잘 담아낸 것 같았다. 특히 처음 한 아저씨가 드레를 괴롭히던 패거리를 상대할때 옷으로 다리를 빠르게 묶는 기술이나, 그런 연출들이 창의적이었고, 또한 서브스토리의 전개로 전체적인 액션의 완급조절이 아주 좋았다.
마지막에 웅장함을 더하면서 쿵후 대회를 이기고 영화가 끝나는 것 또한 깔끔했다고 생각한다.
출처 . 에디터_OREHFILL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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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블쟁이] 마블과 한국?! 마블이 한국을 사랑하는 이유는..??!?
안녕하세요! 마블쟁입니다.
그동안 모두 잘 지내셨나요? 정말 너무너무너무 오랜만에 영상을 올리게 되어서 너무 죄송합니다 ㅜㅜ 제가 최근에 본업에 너무너무 바빠서 영상을 만질 시간조차 없었습니다 ㅠㅠ 이제부터는 다시 영상에 집중 해보려고요~
제가 없는동안 제 영상들을 좋아해주시고 구독해주셔서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이번 영상은 우리 한국과 마블의 관계에 대해서 조금 다루어 보았습니다! 즐겁게 시청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의 여러 댓글이 초보 유튜버인 저에게 아주 큰 도움이 됩니다! 여러분들이 시청자로써 제가 개선 해야될 점이나, 원하는 영상, 원하시는 점, 여러의견들을 내주시면 제가 다 읽어보고 좀 더 나은 유튜버가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영상 재미있게 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2017. 10. 15 영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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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루터 : 태양의 몰락> 공식 예고편
《루터: 태양의 몰락》은 수상 경력을 자랑하는 TV 시리즈를 영화로 재구성하여 이야기를 이어간다. 잔인한 연쇄 살인마가 활개를 치고 있는 런던. 실력은 뛰어나지만 불명예스러운 상황에 처한 형사 존 루터(이드리스 엘바)는 철창 안에 갇혀 이를 지켜보고 있다. 사이버 사이코패스를 놓친 후 패배감에 고통받는 것도 모자라, 범인에게 조롱감이 된 루터는 감옥을 탈출하기로 결심한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못다 한 일을 끝내야 하기에. 신시아 에리보, 앤디 서키스가 출연하고, 더모트 크로울리가 마틴 솅크 역으로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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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여름의 판타지아 그리고 우드잡
2015년 어느 날, 좋은 영화라 같이 보고 싶다는 친구의 손에 이끌려 영화관으로 향했다. 그날은 상영 마지막 날이었고, 관객석은 꽉 차 있었다. 내가 한여름의 판타지아에 대해 알고 있는 단 하나의 정보는 배경이 일본이라는 것.
배우도 감독도 아무것도 모른 체 영화 관람이 시작되었다.
한여름의 판타지아는 1부와 2부로 나뉘어, 흑백에서 컬러로 전환되는 독특한 형식의 영화다. 흑백이라면 좀 답답할 것 같지만 몰입도가 높은 영화라 어느새 지금 보고 있는 화면이 흑백이라는 것도 잊을 정도였다. 그 중심엔 조감독 '미정'역의 김새벽 배우가 있었다. 영화감독 태훈과 새영화를 찍기 위해 일본의 지방 소도시 나라현을 방문한 미정. 그녀는 외지인임에도 자연스럽게 마을에 녹아 들어가 사람들을 인터뷰한다. 영화인지 다큐멘터리 필름인지 헷갈릴 정도로 자연스러웠던 그녀의 연기는 이후 두고두고 기억에 남았다.
흑백에서 컬러로 바뀌어서 그랬을까? 1부와 2부의 주인공이 같은 사람들인데, '배우가 바뀌었나?'하고 생각할 정도로 느낌이 달랐다. 남주인공인 ‘이와세 료’씨는 2부의 캐릭터를 연기하기 위해서 3일 동안 일부러 살을 까맣게 태웠다고 했고, 여주인공인 ‘김새벽’씨는 영화가 전환되는 시점에 머리를 풀고 나왔다. 참 신기하게 2부의 새벽씨는 다른 여자라고 느껴질 정도로 예뻤다.
영화는 큰 굴곡 없이 잔잔하지만 지루하지 않은 힐링 무비였다. 그리고 한여름의 판타지아가 끝나고 난 후, 고조라는 일본의 어느 지방으로 여행을 다녀온 듯 느껴졌다. 또 영화 내내 떠오르던 미우라 시온의 책 ‘가무사리 숲의 느긋한 나날’을 다시 읽고 싶어졌다.
이 책은 영화 '우드잡'으로 개봉했는데,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날 한여름의 판타지아와 함께 보기 좋은 영화다.
순서는 조금 더 자극적인 우드잡을 뒤로 해야 한다.
워낙 미우라 시온의 원작 소설 '가무사리 숲의 느긋한 나날'을 좋아해서 영화 '우드잡'을 보기 전에 기대와 불안감이 함께 있었다. 하지만 영화를 다 보고 난 후, 괜한 기우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도 모르게 "아, 좋다."라는 혼잣말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영화는 원작 소설과 약간 다르지만, 그 다른 점이 영화를 더 살렸다.
대학 시험에 떨어졌는데, 여친에게 차이기까지 한 우드잡의 주인공 히라노. 홍보 전단의 모델이 예쁘다는 단순한 이유로 산림관리 연수에 지원한다. 깊고 깊은 산속에서 나무를 다뤄야 하는 산림관리 연수 프로그램의 무서움을 모른 체, 모델만을 찾아 가무사리 마을에 떨어진 히라노. 휴대 전화도 터지지 않는 깊은 산속 마을에서 식객으로 산림관리 연수를 시작한 그. 고된 노동에 열두 번도 더 도망칠 기회를 노린다. 하지만 어느새 벌목과 산림관리에 익숙해져 가고, 그를 가무사리로 이끌었던 홍보 모델인 이시이 나오키를 실제로 만나게 된다.
따뜻하고 먹먹한 소설 '가무사리 숲의 나날'에 스윙걸즈의 감독인 야구치 시노부의 유쾌함을 덧입혀 탄생한 영화 우드잡. 장면 장면을 사진으로 소장하고 싶은 영화다. 눈이 편해지면서 마음도 편해지는 영화의 색감도 좋았지만, 그 무엇보다 남자 주인공 히라노 유키역의 소메타니 쇼타의 구부정한 어깨가 너무너무 사랑스러운 영화다.
소메타니 쇼타의 어벙한 표정은 우드잡의 별책부록.(귀여우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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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비정전 / Days Of Being Wild
/ 줄거리 /
어느 한 곳에 머무르지 못하며, 여러여자에게 마음을 주고 다니는 아비.
매표소에서 일하는 '수리진'에게 1960년 4월 16일 3시 1분 전
당신과 함께한 나를 당신은 평생 잊지 못할것이라고 말하며 떠난다.
그리고, 그 말대로 수리진은 아비를 잊지 못하게 된다.
이후 아비는 또다른 여인인 '루루'를 만나게 되고,
그를 사랑하게 된 루루 또한 아비에게 집착하게 된다.
그러나 그녀에게 말도 없이 떠나버린 아비.
결국 루루는 아비를 찾으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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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느낀점 /
왓챠에서 봤을때 아비정전 밑에
'재밌게 본 아이다호와 비슷해요'
라고 적혀 있었다.
그리고 이 말에 혹해서 보게 되었다.
근데 영화를 다 본 내가 느끼기엔 아이다호와 딱히 비슷한 점이
없는 것 같았다.
굳이 찾자면,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이라는점?
그리고 단지 그 시절의 불장난이라는점?
이정도인것 같다.
내가 느끼는 마음의 상처의 크기는 아이다호의 상처가 더 큰것 같다.
거기서는 스콧이 계속 확신에 찬 말들과 사랑을 주었으니까.
이 영화에서의 '아비'는
좋게 말하면, 어릴적부터 제대로 된 사랑을 받아 본 적이 없어서
누군가에게 사랑의 마음을 온전히 주는 방법을 모르는
안타까운 인물.
직설적으로 말하면, 그냥 남 마음가지고 장난치는 쓰레기이다.
그 얼굴을 하고 그런 멘트를 치면 안넘어갈 여자가 몇이나 될까?
내가 볼 땐 아무도 없을 것 같다.
난 아비 자신이 자신의 장점을 너무나도 잘 알고
그것을 이용하는게 아니꼽게 보였고,
이런 생각이 아비에 대한 연민의 감정을 수그러뜨린 것 같다.
내가 생각하는 이 영화의 목적은
주인공의 상황을 보여주고 관객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게 아닌
'사랑'이라는게 무엇인지 보여주는 것이었던 것 같다.
나는 이 영화를 보며 주인공의 감정과 스토리보다는
사랑이라는 것에 집중하게 되었다.
자신을 잊지 못할거라고 말하며 수리진을 떠난 아비.
그런 아비를 좋아하는 수리진과의 대화를 잊지 못하는 경찰.
다른여자가 아비에게 버림 받은 상황을 보고서도 아비를 사랑하는 루루.
자신의 친구에게 매달리고, 자신을 매몰차게 걷어차는 루루를 좋아하는 아비친구.
누군가에게는 잊혀진 내가
누군가에게는 잊혀지지 않는 사람일 수 있다.
사랑이란 그런 것 같다.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게 사랑이다.
화살이 엇나가는게 사랑이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버림받는 감정이 잔인하다는 것을 안다면
나를 사랑하는 사람에게도 가혹하게 대하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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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짧은 순간에 겪은 일을
가장 길게 기억하게 하는 것.
그것이 사랑이다.
+
그리고 난 경찰관의 사랑법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상대방을 배려하는 가장 젠틀한 방법이었던 것 같다.
+
마지막에 나오는 양조위씬이 진짜 레전드이다.
(속편의 주인공이 양조위라서 끝나기 2분전에 등장시켰는데
아비정전의 폭망으로 2편이 엎어지면서
그냥 갑자기 등장한 양조위가 되어 버렸다나...)
++ 그래서 그 후편의 느낌으로 찍은게 '화양연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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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렉트릭 스테이트 | 장점을 놓친 루소 형제의 실패작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997년, 인류는 로봇 반란에서 힘겹게 승리를 거둔다. 전쟁 초기에는 로봇의 공세에 고전했지만, IT 기업 '센터'의 대표 '이선 스케이트'(스탠리 투치)가 인간의 정신과 기계를 연결시키는 뉴로캐스터를 개발하면서 전황이 180도 뒤바뀐다. 파일럿이 정신으로 드론을 조종함에 따라 로봇을 제압할 수 있었던 것. 전쟁은 미국 서부 외딴곳에 마련된 격리 구역에 로봇들을 가둔 후에야 완전히 종결됐다.
전후 뉴로캐스터의 영향력은 더욱 커졌다. 인간 활동 대부분이 뉴로캐스터를 통해 이루어졌기 때문. 하지만 뉴로캐스터의 위상은 갑작스레 무너진다. 천재적인 지능을 지닌 동생 '크리스'(우디 노먼)가 죽은 줄 알았던 '미셸'(밀리 바비 브라운)이 동생의 정신과 연결된 로봇 '코즈모'를 만난 뒤 뉴로캐스터의 실체를 의심하기 시작한 것. 동생을 찾아 나선 미셸은 밀수업자 '키츠'(크리스 프랫)와 로봇 '허먼'의 도움을 받아 로봇 격리 구역에 진입하고, 동생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깨닫는다.
장점을 저버린 루소 형제
<캡틴 아메리카: 윈터 솔져>로 MCU에 합류한 루소 형제. 그들은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와 <어벤져스: 엔드게임>에 이르기까지 비평과 흥행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아내며 스타덤에 올랐다. 그들의 가장 큰 장점은 스토리텔링이었다. 그들은 거대하고 추상적인 차원의 이야기를 일상적으로 와닿게 만들 줄 알았다.
일례로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에서 캡틴 아메리카와 아이언맨은 어벤져스의 통제를 둘러싸고 갈등을 빚었다. 자유를 중시하는 캡틴 아메리카는 UN의 통제를 거부했고, 아이언맨은 어벤져스가 초래했거나 앞으로 초래할 피해에 대한 책임을 지기 위해서 통제를 받아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자칫 추상적일 수 있는 '자유 대 책임'의 대립을 루소 형제는 두 주인공의 개인적인 영역에서 풀어냈다. 절친이자 윈터 솔져였던 버키가 아이언맨의 부모를 암살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두 주인공은 살벌하게 싸운다. 캡틴 아메리카는 세뇌당한 버키에게 자유의지가 없었다는 이유로 옹호한다. 분노한 아이언맨은 버키에게 복수하려 한다. 설령 세뇌당했어도 버키가 자기 행위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게 그의 일관된 논리였다.
그런데 루소 형제의 스토리텔링은 치명적인 단점이 하나 있다. 영화의 주제와 메시지와 직결되는 일상적인 서사와 캐릭터의 매력이 돋보이지 않을 경우, 영화의 구성 요소를 하나로 묶을 구심점과 재미가 사라짐에 따라 표면적인 메시지만 덩그러니 남을 수 있다는 것. 넷플릭스가 제작비 3억 2천만 달러를 투입해 루소 형제와 협업한 오리지널 영화 <일렉트릭 스테이트>가 바로 이 경우에 해당한다.
단절된 현실을 반영한 디스토피아
<일렉트릭 스테이트>의 큰 그림은 영화 말미에 등장하는 미셸의 연설 내용에서 확인할 수 있다. 미셸은 사람들이 서로 접촉하고, 연결되어 있는 세상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더 나아가 사람에게도, 로봇에게도 전기가 흐르고 있으니 사람과 로봇도 반목하지 말고 공존할 수 있어야 한다고 덧붙인다. 극 중 여러 설정을 고려하면 미셸의 마지막 당부는 미국 사회에 나타난 여러 형태의 단절을 겨냥하는 듯하다.
일례로 인간의 정신과 기계를 이을 수 있는 신기술인 뉴로캐스터는 SNS와 스마트폰에 대한 알레고리라고 할 수 있다. 미셸이 집 밖에 나왔을 때 거리는 적막하다. 몸은 집에 두고 정신에 연결된 드론만 다니기 때문. 이 대목은 각자 이어폰을 끼고 스마트폰 화면만 들여다보느라 조용한 버스나 지하철을 연상시킨다. 사람들과 오프라인에서 부딪히며 소통하기보다는 온라인에서의 소통이 갈수록 늘어나는 세태를 SF적으로 빗댄 셈이다.
한편 로봇 격리 구역은 서로 다른 공동체를 단절시킨 여러 경계선에 대한 비유처럼 보인다. 로봇들이 인간의 명령을 거부하고, 인간과 같은 권리를 요구하자 미국 정부는 전쟁 끝에 로봇들을 격리 구역에 가둔다. 로봇 격리 구역이 미국 서부에 있다는 점은 원주민 보호 구역을 연상시키고, 로봇과 인간 사회를 격리한 거대한 장벽은 트럼프 1기 이후로 추진되었던 미국-멕시코 국경 장벽 같기도 하다.
관계를 다시 잇는 남매와 친구
사회적 단절이라는 이슈를 여러 층위와 측면에서 제시한 뒤, <일렉트릭 스테이트>는 상황을 개선하려는 몇몇 개인을 조명한다. 미셸과 크리스의 플롯은 두 측면으로 나눠 볼 수 있다. 이별했던 남매의 재회는 그 자체로 오프라인에서의 접촉과 소통의 중요성을 일깨운다. 남동생이 교통사고로 죽은 줄만 알았던 미셸. 하지만 크리스의 정신이 담긴 로봇이 나타나고, 로봇과 모험을 떠나면서 그녀는 한때 단절되었던 남매 관계를 되찾는다.
미셸과 크리스 대 이선 스테이트의 대립도 관계의 중요성을 일깨운다. 어려서부터 어머니로부터 학대받았던 이선은 사람 간의 관계가 갖는 중요성을 잘 알지 못한다. 그래서 그는 설령 사람들이 뉴로캐스터 속 세계에 갇힌 나머지 적막해진 세계도 안정적이라며 칭송한다.
이에 더해 이선은 뉴로캐스터에 천재적인 계산력을 지닌 크리스의 뇌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멀쩡한 남매를 생이별시키까지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는 인간과 로봇의 형태로 재회한 남매가 동생의 뇌를 착취하는 뉴로캐스터 기술을 파괴하는 전개에는 여러 의미가 동시에 깃든다. 단순히 동생을 구출하려는 모험은 물론, 파괴되었던 사람들의 사회적 관계를 복구하려는 투쟁으로도 미셸의 서사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키츠와 허먼의 플롯은 또 다른 층위의 단절을 해소한다. 로봇 반란 중 죽을 위기에 처했던 키츠는 허먼의 도움 덕분에 목숨을 구한다. 종전 후 로봇 격리 구역이 생기자 키츠는 허먼과 함께 도망쳐서 밀수꾼이 된다. 이들의 관계는 마치 <그린 북> 속 '토니'(비고 모텐슨)와 '돈'(마허샬라 알리)의 우정 같다. 우정이 인종의 차이를 뛰어넘듯이, 개개인의 노력으로 사회적 경계와 구분을 충분히 넘어설 수 있다고 말하는 셈이다.
'왜'가 없는 이야기
하지만 <일렉트릭 스테이트>의 메시지는 공허하다. 거시적, 추상적 메시지를 일상적 경험으로 치환하는 캐릭터 각각의 플롯이 제 역할을 못하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는 미셸과 크리스, 키츠와 허먼의 관계에 내포된 의도를 구현해 내는 디테일이 부족하다.
미셸과 크리스는 우애가 깊은 남매다. 누나는 아인슈타인보다 뛰어난 뇌를 지닌 남동생을 자랑스러워하고, 남동생은 그런 누나에게 의지한다. 하지만 그들의 남매애는 '왜'가 없다. 남매 관계가 유달리 돈독할만한 사연, 사건, 계기 등은 거의 제시되지 않는다. 남매의 정을 실감하기 어렵다 보니 죽은 줄 알았던 크리스가 로봇 형태로 나타나도, 미셸이 대의를 위해 크리스를 희생해야만 하는 상황에 처해도 특별한 감흥을 느끼기 어렵다.
키츠와 허먼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시청자 입장에서는 그들이 친구가 된 이유를 납득하기 어렵다. 로봇과 인간이 전쟁까지 치른 디스토피아 세계관에서 인간과 로봇의 우정이 싹트는 계기와 과정을 대사 몇 줄로 넘기기 때문. 이유도, 디테일도 없다 보니 그들의 우정은 스토리 전개를 위한 도구로만 소비된다. 실제로 미셸이 그들의 도움을 받아 로봇 격리 구역에 들어간 이후로 키츠와 허먼은 영화 전개에 거의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이처럼 주인공 간의 관계가 편의적으로 묘사되다 보니 메시지도 얄팍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일렉트릭 스테이트>는 주인공들의 관계가 오프라인에서 단절된 관계, 사회적으로 분리된 공동체 간의 관계와 명확히 대조를 이룰 때 메시지에 힘이 실린다. 그런데 정작 남매, 친구 사이에 대한 묘사가 일차원적이니 그와 대비를 이루는 주제와 메시지도 뻔하고 식상해진다. 미셸의 입을 빌려 의도를 직접 드러내는 결말은 교조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한다. 막대한 제작비에도 불구하고 <일렉트릭 스테이트>가 아동용 영화 같은 결정적인 이유다.
보는 맛도 없다
더 나아가 <일렉트릭 스테이트>는 스토리텔링의 허점을 만회할 만한 특별한 매력도 갖추지 못했다. 80, 90년대 느낌이 나는 카세트 퓨처리즘 요소가 반영된 시각 디자인은 장점으로 꼽을 수 있다. 로봇 반란으로 인해 문명이 몰락한 1997년을 배경 삼아 현실과는 다른 방향으로 발전된 로봇 공학과 과학 기술의 디자인은 시청자의 눈길을 끌어당긴다.
그러나 독특한 디자인을 제대로 활용하지는 못했다. 특히 현실과는 다른 모습의 기술력을 강조할 수 있는 액션 연출이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 루소 형제의 명성에 다소 가려졌던 단점이 노출됐기 때문이다. 그간 루소 형제는 대규모 액션 시퀀스 연출을 버거워한다는 지적을 받았다.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 중 와칸다 전투만 봐도 히어로 개개인의 활약상을 비출 뿐, 와칸다 군과 타노스 군이 집단으로 맞부딪히는 장면은 많지 않았다.
상술한 단점은 <일렉트릭 스테이트>에서도 반복된다. '센터'의 본사 건물 앞에서 펼쳐지는 로봇 대 드론의 대규모 전투 시퀀스는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다. 그런데 정작 전투 장면은 일 대 일로 싸우는 드론과 로봇의 수를 늘려놓는 데서 그쳤고, 로봇과 드론이 한 집단으로서 대적하는 장면은 찾아보기 어렵다. 이에 더해 각 로봇의 개성이나 특징을 부각하지도 못했고, 로봇과 드론의 움직임이 너무 느린 나머지 박진감도 느껴지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일렉트릭 스테이트>는 OTT용 작품임을 감안해도 실망스럽다. 특히 감독의 명성에 비해 스토리텔링도 짜임새가 부족하고, 볼거리도 실속 없다. 루소 형제가 넷플릭스에서 제작에 참여한 <그레이 맨>, <익스트랙션>, <익스트랙션 2>와 비교해 보면 팝콘무비로서의 본분도 못하는 듯 보인다. 완성도만 놓고 봤을 때, 루소 형제의 필모그래피 중 가장 실패한 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Dreadful 끔찍한
생동감 없는 남매애와 우정으로 빚어낸 공허한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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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2021)> 리뷰
※ 스포일러 주의
하늘길이 막혀 국가 간 여행이 막혔다. 주변 환경을 완벽하게 바꾸어 일상을 잊는 게 그 어느때보다 어렵다. 그렇다면 화려한 액션으로 가득 찬 영화를 봐야 하는 게 아닐까. 많은 기대를 하지 않는다는 전제조건 하에서, 올해 개봉한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25번째 장편 영화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2021)》는 나쁘지 않은 오락 영화였다. 좋았으면 좋다고 하면 될 텐데 수식어가 괜히 길어진 까닭은, 이 영화에 대해 만듦새가 훌륭하다고 평하긴 어렵기 때문이다. 서사의 개연성이든, 연출면에서든. 하지만 흥미롭게 느껴지는 부분 역시 적지 않고, 이번 리뷰에선 내가 주목한 점에 대해 간단히 적어볼 생각이다.
출처: 다음영화포토
사진 출처: 다음 영화 포토웬우: 망가진 영웅
아마 신화에 대해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영웅 서사 구조의 원형을 분석한 조지프 캠벨(Joseph Campbell)이란 이름을 한 번쯤 들어보았을 것이다. 사실 이 영화는 캠벨의 서사구조를 전형적으로 따랐다고 보긴 어려운데(보글러 모델을 따랐다고 보는 편이 합당하다), 그럼에도 그의 이름을 꺼내온 것은 '빌런'으로 소개된 웬우(양조위)의 일대기가 캠벨의 서사 구조와 유사한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의 기원을 알 수 없는 데다가, 웬우는 텐 링즈라는 초자연적 아이템을 획득하여 영생을 누리는 자로, 평범한 인간이라기보단 신격화된 인물에 가깝다. 더군다나 그는 자신의 위대한 정복자로 자신만의 세계를 꾸린 후 잉리(진법랍)라는 신비스러운 여인과 결혼에 성공한다. 이 과정은 지극히 전형적인 영웅 서사의 한 장면이다. 과업의 달성과 신비스러운 여인과의 혼인 말이다. 물론 이런 의문이 생길 순 있다. 그가 이러한 대접을 받을 만한 인물인가?
그러나 이러한 의문을 깊게 파고들기 어려운 까닭은, 스크린 묘사된 웬우라는 인물의 천 년 지배는 너무도 짧은 대사로만 지나갔기에 그의 모든 결정이 악하기만 했는지를 파악하기 어렵다는 데에서 기인한다. 이밖에도 역사 속에서 우리는 정복자가 곧 영웅으로 떠받들여졌다는 것을, 정복의 과정이 피로 물들어 있었다 한들 치세가 안정적이었다면 역사서는 그를 위대한 전사로 서술한다는 사실을 안다. 그렇기에 파편화된 단서만으로 이 웬우라는 인물을 뼛속까지 사악한 악인으로 점찍는 것은 점차 어려워진다. 더군다나 결과론적으로 세상을 망가뜨리려 한 행동의 본질적 요소는 아내의 부활이자 가정의 회복이라는 것을 고려해보면 더더욱 그렇다. 물론 주인공인 샹치(시무 리우)가 결국 아버지의 공과 과를 모두 물려받아야만 하는 상황에서, 웬우를 완전한 악인으로 묘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기도 했겠지만.
그럼에도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은 웬우를 주인공인 샹치가 넘어서야만 하는 시련으로 규정한다. 이는 그저 웬우가 완전한 빌런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는 다만, 구시대에서 필요로 했던 타입의 영웅이었지 현대의 우리에게 어울리는 영웅이 아니기 때문이다. 웬우의 추락은 어찌 보면 운명적인 측면이 있다. 그는 천 년간 다양한 이름을 사용하며 분열된 정체성으로 시대를 부유하였음에도 늘 자신의 본명만큼은 잊지 않았고, 늘 자기 자신으로 회귀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러나 잉리가 나타난다. 그는 웬우를 웬우로 호명하며, 흩어진 그의 다면적인 모습을 본연의 자아로 고정시켰다. 홀로 자신을 잊지 않는 것과, 타인이 자신을 알아보고 이름을 불러주며 세상에 고정시키는 것은 질적으로 차이가 난다. 웬우라는 이름이 천 년의 고독 속에선 결코 획득할 수 없었던 정체성은 그러나 몇 년의 시간 후 사라진다. 결과는? 자아의 망각이다. 그는 잉리가 존재하기 전 자신이 규정했던 웬우로도, 잉리가 존재했던 시절의 웬우로도 완벽히 돌아갈 수 없다.
영웅과 비영웅의 차이는 삶을 통해 목도하는 운명적인 순간에서 어떠한 선택을 할 수 있느냐의 문제일 것이다. 웬우는 자신의 세계가 일그러졌을 때, 즉 잉리를 잃고 평화를 상실한 시련의 순간에 단독자로서 복수를 하겠다는 구시대적이고 폭력적인 방법을 택했다. 새롭게 부여받은 아버지라는 정체성을 키워내지 못한 것, 그것이 그가 추락한 주요 원인이다. 영웅이 된다는 건 자신의 손에 누구도 넘보기 힘든 힘과 권위가 달려있을 때, 그것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지에 대해 마땅한 도덕의식을 흔들리지 않고 지닐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문제이기도 하지만, 그런 힘이 없더라도 가슴이 메일만큼 처참한 순간, 주변을 돌보며 일상을 유지할 수 있는지와 같은 요소조차 영웅의 조건일 수 있음을, 이 영화는 말하고 있다. 거대한 신분과 거대한 힘이 지배하는 세계는 벌써 백 년도 전에 무너졌다. 소박하지만 지겹고 질곡 많은 삶을 살아가야 하는 우리에게 필요한 물음이자, 영웅이 답해야 하는 질문은 어쩌면 이런 것들일 것이다. '살아가야만 하는 그 순간을 어떻게 살아 나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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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다음 영화 포토탈로: 완전하지 않은 별세계
웬우는 천 년을 산 인물이기에, 그는 그 자신이 스스로의 조상이자 고향인 하나의 세계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의 아내인 잉리의 고향 탈로는 조상으로부터 이어진 개인, 그리고 현재를 살아가는 각각의 타인을 하나로 묶는 거대한 공동체가 거주하는 특별한 장소이다. 하지만 웬우가 숲과 동굴을 통해 탈로에 수평적으로 진입할 수 있었다는 점을 미루어 알 수 있듯, 웬우와 탈로는 둘 사이에 위계가 존재하는 수직적인 세계가 아닌 평등한 세계관이다. 정복자라는 속성을 띈 웬우와 평화로운 별세계처럼 보이는 탈로는 색상을 비롯한 여러 테마에 있어서 지독히도 달라 보이나, 사실 비슷한 점 역시 무수히 많다. 탈로는 어둠의 드웰러를 봉인한 장소이자, 웬우라는 외부자를 철저히 배격하는(그의 변화 가능성을 믿지 않는) 폐쇄적이고 정체된 공간이기도 하다. 이곳이 진실로 평화롭기만 한 무릉도원이었다면 탈로에선 남녀가 평등하게 무술 훈련을 받을 이유도 없었을 것이며, 잉리가 성인이 된 자신의 자녀를 위해 갑주를 예비할 이유도 없었으리라. 언뜻 선인의 세계처럼 보일지언정, 탈로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위험을 품고 있는 아슬아슬한 세계다.
나는 위에서 웬우를 악인이라기보단 ‘비영웅’정도로 묘사했는데, 영화 내에서 파멸적인 악惡을 꼽아야 한다면 어둠의 드웰러로 봐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크리처 무리는 다른 생명의 영혼을 흡수하며 텐 링즈를 통해 아이템의 소유주를 홀릴 만큼의 지능과 마력을 지녔다. 언어 능력조차 없어 소통이 불가한 그들은 순수한 공포 그 자체이다. 흥미로운 건, 영화 내에서 가장 신화적인 장소에서 노골적으로 힘을 원하고, 사악한 크리처가 등장하였음에도 영화 내 인물들은 어둠의 드웰러를 맞서 싸워야 하는 상대로는 인식할지라도 증오나 원망 따위의 감정을 비추지 않는다는 점이다. 샹치와 샤링(장멍일), 케이티(아콰피나)는 외부인이라 그럴 수 있다 치더라도, 탈로 주민들 역시 그들의 시간과 장소를 모두 묶은 역사가 존재함에도 그 모든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인다. 이들이 원하는 것은 일종의 ‘현상유지’다. 탈로가 간신히 모면한 평화 위에 세워진 세계일지언정 불안한 진동을 감내한다.
이때 도달하는 것이 바로 웬우라는 외부인, 혹은 외부 세계다. 그는 자신의 절반을 찾기 위해 봉인된 문을 깨부숴야 하는 인물이다. 설령 그것이 날 눈멀게 한 거짓이라 하여도.
비슷하면서도 달랐던 탈로와 웬우의 충돌은 탈로의 승리로 막을 내린다. 영화가 탈로의 손을 들어준 이유는, 역시나 그들이 무작정 옳거나 신령한 용과 함께 하는 이들이기 때문이 아니라, 탈로가 공동의 시간과 지혜로 다듬어진 협력의 가치를 인정하는 장소이기 때문일 것이다. 탈로는 어둠의 드웰러들과 전쟁을 함으로써 조상 대대로 이어온 '봉인된 문의 수호'라는 목적성을 상실하였고, 이는 세계의 정체성이 크게 흔들릴 위기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탈로라는 세계를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웬우처럼 단독자가 아니며, 거주민 개개인은 서로에게 조력자가 되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샹치가 잉난(양자경)을 통해 쥐고 있던 손을 피게 되었듯, 탈로 세계의 인물들은 샹치 세계의 인물을 통해 문을 봉인과 위협에 시달릴 이유가 없어졌다. 그렇다, 끔찍한 사건이라 해도 오로지 나쁜 결과만 몰고 오진 않는다.
출처: 다음 영화 포토실패한 아버지조차 계승하는 영웅
유럽의 신화나 미국의 히어로 영화를 보다 보면 친부 살해 모티프나 주인공의 가족 관계가 단절된 설정을 흔하게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은 미국에서 제작된 히어로 영화임에도 빌런으로 묘사된 아버지 웬우와 차기 세대의 영웅인 샹치가 화해할 뻔한 장면이 있다. 샹치는 (영화 내에서 그가 다짐하기도 했지만) 기존의 다른 영웅들처럼 아버지를 살해하고, 그의 힘만을 취한다는 선택을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마지막 순간에도, 외친다. 우리에겐 당신이 필요하다고. 그리고 그는 자신의 손으로 아버지를 죽이지 않으며, 영화 말미엔 직접적으로 그를 추모하기까지 한다(그러나 완전한 용서인지는 알기 어렵다). 나에겐 영화의 이 지점이 가장 눈에 띄었던 것 같다. 21세기에 영웅이 될 수 없었던 아버지를 계승하는 젊은 영웅의 미래는 기대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아마 이 영화는 트릴로지의 첫 번째인 만큼, 샹치가 어떻게 텐 링즈를 물려받게 되었는지를 풀어나가는 일종의 프롤로그 부분에 해당할 것이라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즉, 샹치를 흔들어 놓을 진정한 모험이 시작된 순간은 아닐 것이라고.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 데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일단 모험을 통해 샹치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그는 케이티와 펍에서 술을 마시고, 웡과 노래방에 간다. 더 이상 호텔 직원은 아닐 수 있겠으나, 그저 그뿐이다. 특히 그가 지녔던 증오나 두려움은 일부 해소된 듯 보이나, 타의에 의해 제거된 것으로 완전한 극복이라 보기는 어렵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더더욱. 물론 샹치는 아버지의 텐 링즈를 물려받았고 어머니의 고향에서 용의 힘을 배웠다. 그러나 영웅이라는 정체성은 단순히 ‘힘’을 획득하여 악하게 쓰지 않거나, 최악의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 대항하는 순간에 얻어지는 이름이 아니다. 그보다는 자발적인 책임 혹은 신념을 자각하는 각성의 순간이 필요하다.
이런 이유로, 앞으로 펼쳐질 샹치 트릴로지에서 주인공은 션이 아닌 샹치라는 본래의 이름으로 회귀한 만큼 자신이 정녕 누구인지를 의식적으로 깨닫는 모습이 필요할 텐데, 이러한 서사를 기존 서구 영화 속 히어로와는 다른 결로 풀어나가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그는 열다섯에 달려 나오며 숨기고 잊었던 자신의 과거를 앞으로 결코 숨길 수 없을 것이며, 숨겨서도 안될 것이다. 한 인물의 공과를 우리는 선택적으로 수용할 수 없다. 샹치는 잉리는 물론, 웬우까지 포함하여 다채로운 모습을 모두 포용하되 더 나은 인물이 될 수 있도록 자신만의 서사를 구축해나가야 한다. 다면적인 선과 악 사이에서, 서양과 동양이라는 이분법이 더 이상 적용되지 않을 넓은 스펙트럼의 세상에서.
출처: 다음 영화 포토
어쩌면 이 영화에 대해 지금 왈가왈부하는 건 시기상조일지도 모른다. 아직 트릴로지가 종료된 시점은 아니니까. 그리고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로 시작한 영화의 트릴로지가 혼자 올곧게 서고자 하여도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라는 넓은 세계에서 샹치는 여러 캐릭터들과 뒤엉키게 될 운명인지라, 이 캐릭터의 일관성이 과연 유지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장담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인간적이었으나 정의로운 이는 아니었던 아버지의 공과를 물려받은 이가, 어떻게 자신을 영웅으로 정의하고 성장할 지에 대해선 정말이지 기대할 수밖에 없는 듯하다.
2021 여름이 저물었다는 내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는 양 무더위가 계속되는 요즈음이다. 하지만 타오르는 여름의 끝자락에서 시선을 바꾸어본다. 올 가을엔 여름의 발자국이 그 어느 때보다 짙게 남아있으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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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빛이라 상상하는 모든 것> 누군가에겐 귀환, 누군가에겐 자유
대도시와 이방인들이 만들어내는 만국공통어
프라바, 아누, 파르바티가 사는 도시, '뭄바이'는 인도에서 가장 큰 도시라고 한다. 이 영화는 각자의 꿈과 희망을 안고 대도시 뭄바이에서 맞딱드린 세 여자의 이야기이다. 수많은 행인, 밤 늦게까지 빛을 내는 아파트와 전철 사이에서 프라바는 간호사, 아누는 인포직원, 파르바티는 요리사로 한 병원에서 일하며 의지한다. 서울을 갈망하고 이주하는 우리를 미루어보면 '대도시에서 만나는 이방인의 서사',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내는 교감이 만국공통어인듯 하다.
인도의 결혼제도가 던지는 설움
결혼은 했지만 남편과 따로 사는 프라바는 그의 존재 없는 '존재감'으로 인해 새로운 인연을 만나지 못한다. 아누는 부모님의 반대와 종교적 금기를 무릅쓰고 몰래 사랑을 나눈다. 파르바티는 남편의 죽음 이후 도시에서 쫓겨날 위기에 처한다. 이처럼 이 영화에서 주요인물들이 겪는 갈등은 인도의 결혼제도와 관습이 던지는 설움들이라 생각해볼만 하다. 허물뿐인 남편, 사랑을 넘어서는 종교적 배척정신, 남편이 없는 여성에 대한 대우 등...
누군가에겐 귀환, 누군가에겐 자유
보통의 주인공은 여행을 떠나고 귀환을 하는 여정에서 성장한다. 여기에 빗대 생각해보면 프라바, 아누, 파르바티의 관계가 만들어내는 앙상블이 더욱 흥미롭다. 결국 고향으로 향하는 파르바티를 프라바와 아누가 배웅하는데, 파르바티의 귀환을 통해 프라바와 아누의 여행이 시작된다. 파르바티의 고향에서 남편의 환영을 마주하는 프라바, 애인과 아낌없이 사랑을 나누는 아누는 파르바티의 귀환에서 자유해진다. 그리고 그들의 모습은 '빛'을 통해 잔상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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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안정한 걸음걸이를 가진 사람들에게
서로 다른 세계에서 사는 남자 ‘하오하오’와 여자 ‘비키’가 있다. 그 둘의 세계는 합일되지 못하고 끊임없이 부딪힌다. 그 과정에서 나온 감정의 부유물은 가라앉지 못하고 그들의 옥탑방을 돌아다닌다. 영화 <밀레니엄 맘보>는 텁텁하고 숨 막히는 부유물을 들이마시고 내쉬는 과정의 연속이다.
<밀레니엄 맘보>는 밀레니엄 시대에 살아가는 비키의 청춘을 한 덩이 잘라 내어 보여준다. 비키는 그 청춘의 이면을 때로는 불안정하고 외롭게, 때로는 당차게 걸어 나간다. 이는 유명한 첫 장면의 롱테이크로 표현하는데, 그저 긴 머리를 휘날리며 걸어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간간이 비치는 차가운 조명을 받으며 좁고 긴 길을 걸어가는 비키의 모습을 따라가다 보면 왠지 우리가 언젠가 겪었을 방황의 시기가 주마등처럼 스쳐 갈 것이다.
<밀레니엄 맘보>에서의 청춘은 마냥 밝지 않다. 밝은 건 비키가 자주 가는 클럽의 조명뿐, 영화는 언제 바스러져도 모를 비키의 불안정함을 보여준다. 내가 되지 못한 채, 타인의 말 한마디에 삶 전체가 흔들리고, 어디로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 모르는 답답함을 말이다. 하오하오의 그릇된 사랑(관계)을 뿌리치지 못한 채 그저 같은 공간에 있기에 관계를 지속하는 비키에게, 클럽과 그곳에서 만난 새로운 인연 잭은 의지할 만한 안식처가 되어준다. 그러나 이는 일시적인 대상이다. 이 공간과 관계는 또 다른 하오하오일 뿐,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불안정해질 것이다. 불완전하기에 불안할 수밖에 없다. 감정을 해소해 주는 대체제를 찾는 것은 나름의 방향이지만, 이내 나 자신이 나의 안식처가 되어주지 못한다면 이 과정은 결과적으로 원점(자아 상실)으로 돌아올 것이다. 결국 나를 진정시킬 수 있는 것은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밀레니엄 맘보>는 청춘에 국한되는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살면서 겪었을 모든 종류의 불안정함. 뚜렷한 해결책이 없는 문제들, 그럭저럭 살아져서 살아가는 인생에 대한 회의감, 최악을 경험하고 차악을 선택하는 나날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이 감정을 안고 살아가는 모든 이들의 단면을 보여주는 영화이다. 더 나아가 그들에게 비키의 모습은 같은 아픔을 겪었음에 건넬 수 있는 위로 혹은 자아를 찾아야 한다는 경각심이 되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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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블쟁이] 마블과 한국?! 마블이 한국을 사랑하는 이유는..??!?
안녕하세요! 마블쟁입니다.
그동안 모두 잘 지내셨나요? 정말 너무너무너무 오랜만에 영상을 올리게 되어서 너무 죄송합니다 ㅜㅜ 제가 최근에 본업에 너무너무 바빠서 영상을 만질 시간조차 없었습니다 ㅠㅠ 이제부터는 다시 영상에 집중 해보려고요~
제가 없는동안 제 영상들을 좋아해주시고 구독해주셔서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이번 영상은 우리 한국과 마블의 관계에 대해서 조금 다루어 보았습니다! 즐겁게 시청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의 여러 댓글이 초보 유튜버인 저에게 아주 큰 도움이 됩니다! 여러분들이 시청자로써 제가 개선 해야될 점이나, 원하는 영상, 원하시는 점, 여러의견들을 내주시면 제가 다 읽어보고 좀 더 나은 유튜버가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영상 재미있게 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2017. 10. 15 영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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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루터 : 태양의 몰락> 공식 예고편
《루터: 태양의 몰락》은 수상 경력을 자랑하는 TV 시리즈를 영화로 재구성하여 이야기를 이어간다. 잔인한 연쇄 살인마가 활개를 치고 있는 런던. 실력은 뛰어나지만 불명예스러운 상황에 처한 형사 존 루터(이드리스 엘바)는 철창 안에 갇혀 이를 지켜보고 있다. 사이버 사이코패스를 놓친 후 패배감에 고통받는 것도 모자라, 범인에게 조롱감이 된 루터는 감옥을 탈출하기로 결심한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못다 한 일을 끝내야 하기에. 신시아 에리보, 앤디 서키스가 출연하고, 더모트 크로울리가 마틴 솅크 역으로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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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여름의 판타지아 그리고 우드잡
2015년 어느 날, 좋은 영화라 같이 보고 싶다는 친구의 손에 이끌려 영화관으로 향했다. 그날은 상영 마지막 날이었고, 관객석은 꽉 차 있었다. 내가 한여름의 판타지아에 대해 알고 있는 단 하나의 정보는 배경이 일본이라는 것.
배우도 감독도 아무것도 모른 체 영화 관람이 시작되었다.
한여름의 판타지아는 1부와 2부로 나뉘어, 흑백에서 컬러로 전환되는 독특한 형식의 영화다. 흑백이라면 좀 답답할 것 같지만 몰입도가 높은 영화라 어느새 지금 보고 있는 화면이 흑백이라는 것도 잊을 정도였다. 그 중심엔 조감독 '미정'역의 김새벽 배우가 있었다. 영화감독 태훈과 새영화를 찍기 위해 일본의 지방 소도시 나라현을 방문한 미정. 그녀는 외지인임에도 자연스럽게 마을에 녹아 들어가 사람들을 인터뷰한다. 영화인지 다큐멘터리 필름인지 헷갈릴 정도로 자연스러웠던 그녀의 연기는 이후 두고두고 기억에 남았다.
흑백에서 컬러로 바뀌어서 그랬을까? 1부와 2부의 주인공이 같은 사람들인데, '배우가 바뀌었나?'하고 생각할 정도로 느낌이 달랐다. 남주인공인 ‘이와세 료’씨는 2부의 캐릭터를 연기하기 위해서 3일 동안 일부러 살을 까맣게 태웠다고 했고, 여주인공인 ‘김새벽’씨는 영화가 전환되는 시점에 머리를 풀고 나왔다. 참 신기하게 2부의 새벽씨는 다른 여자라고 느껴질 정도로 예뻤다.
영화는 큰 굴곡 없이 잔잔하지만 지루하지 않은 힐링 무비였다. 그리고 한여름의 판타지아가 끝나고 난 후, 고조라는 일본의 어느 지방으로 여행을 다녀온 듯 느껴졌다. 또 영화 내내 떠오르던 미우라 시온의 책 ‘가무사리 숲의 느긋한 나날’을 다시 읽고 싶어졌다.
이 책은 영화 '우드잡'으로 개봉했는데,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날 한여름의 판타지아와 함께 보기 좋은 영화다.
순서는 조금 더 자극적인 우드잡을 뒤로 해야 한다.
워낙 미우라 시온의 원작 소설 '가무사리 숲의 느긋한 나날'을 좋아해서 영화 '우드잡'을 보기 전에 기대와 불안감이 함께 있었다. 하지만 영화를 다 보고 난 후, 괜한 기우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도 모르게 "아, 좋다."라는 혼잣말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영화는 원작 소설과 약간 다르지만, 그 다른 점이 영화를 더 살렸다.
대학 시험에 떨어졌는데, 여친에게 차이기까지 한 우드잡의 주인공 히라노. 홍보 전단의 모델이 예쁘다는 단순한 이유로 산림관리 연수에 지원한다. 깊고 깊은 산속에서 나무를 다뤄야 하는 산림관리 연수 프로그램의 무서움을 모른 체, 모델만을 찾아 가무사리 마을에 떨어진 히라노. 휴대 전화도 터지지 않는 깊은 산속 마을에서 식객으로 산림관리 연수를 시작한 그. 고된 노동에 열두 번도 더 도망칠 기회를 노린다. 하지만 어느새 벌목과 산림관리에 익숙해져 가고, 그를 가무사리로 이끌었던 홍보 모델인 이시이 나오키를 실제로 만나게 된다.
따뜻하고 먹먹한 소설 '가무사리 숲의 나날'에 스윙걸즈의 감독인 야구치 시노부의 유쾌함을 덧입혀 탄생한 영화 우드잡. 장면 장면을 사진으로 소장하고 싶은 영화다. 눈이 편해지면서 마음도 편해지는 영화의 색감도 좋았지만, 그 무엇보다 남자 주인공 히라노 유키역의 소메타니 쇼타의 구부정한 어깨가 너무너무 사랑스러운 영화다.
소메타니 쇼타의 어벙한 표정은 우드잡의 별책부록.(귀여우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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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비정전 / Days Of Being Wild
/ 줄거리 /
어느 한 곳에 머무르지 못하며, 여러여자에게 마음을 주고 다니는 아비.
매표소에서 일하는 '수리진'에게 1960년 4월 16일 3시 1분 전
당신과 함께한 나를 당신은 평생 잊지 못할것이라고 말하며 떠난다.
그리고, 그 말대로 수리진은 아비를 잊지 못하게 된다.
이후 아비는 또다른 여인인 '루루'를 만나게 되고,
그를 사랑하게 된 루루 또한 아비에게 집착하게 된다.
그러나 그녀에게 말도 없이 떠나버린 아비.
결국 루루는 아비를 찾으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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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느낀점 /
왓챠에서 봤을때 아비정전 밑에
'재밌게 본 아이다호와 비슷해요'
라고 적혀 있었다.
그리고 이 말에 혹해서 보게 되었다.
근데 영화를 다 본 내가 느끼기엔 아이다호와 딱히 비슷한 점이
없는 것 같았다.
굳이 찾자면,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이라는점?
그리고 단지 그 시절의 불장난이라는점?
이정도인것 같다.
내가 느끼는 마음의 상처의 크기는 아이다호의 상처가 더 큰것 같다.
거기서는 스콧이 계속 확신에 찬 말들과 사랑을 주었으니까.
이 영화에서의 '아비'는
좋게 말하면, 어릴적부터 제대로 된 사랑을 받아 본 적이 없어서
누군가에게 사랑의 마음을 온전히 주는 방법을 모르는
안타까운 인물.
직설적으로 말하면, 그냥 남 마음가지고 장난치는 쓰레기이다.
그 얼굴을 하고 그런 멘트를 치면 안넘어갈 여자가 몇이나 될까?
내가 볼 땐 아무도 없을 것 같다.
난 아비 자신이 자신의 장점을 너무나도 잘 알고
그것을 이용하는게 아니꼽게 보였고,
이런 생각이 아비에 대한 연민의 감정을 수그러뜨린 것 같다.
내가 생각하는 이 영화의 목적은
주인공의 상황을 보여주고 관객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게 아닌
'사랑'이라는게 무엇인지 보여주는 것이었던 것 같다.
나는 이 영화를 보며 주인공의 감정과 스토리보다는
사랑이라는 것에 집중하게 되었다.
자신을 잊지 못할거라고 말하며 수리진을 떠난 아비.
그런 아비를 좋아하는 수리진과의 대화를 잊지 못하는 경찰.
다른여자가 아비에게 버림 받은 상황을 보고서도 아비를 사랑하는 루루.
자신의 친구에게 매달리고, 자신을 매몰차게 걷어차는 루루를 좋아하는 아비친구.
누군가에게는 잊혀진 내가
누군가에게는 잊혀지지 않는 사람일 수 있다.
사랑이란 그런 것 같다.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게 사랑이다.
화살이 엇나가는게 사랑이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버림받는 감정이 잔인하다는 것을 안다면
나를 사랑하는 사람에게도 가혹하게 대하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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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짧은 순간에 겪은 일을
가장 길게 기억하게 하는 것.
그것이 사랑이다.
+
그리고 난 경찰관의 사랑법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상대방을 배려하는 가장 젠틀한 방법이었던 것 같다.
+
마지막에 나오는 양조위씬이 진짜 레전드이다.
(속편의 주인공이 양조위라서 끝나기 2분전에 등장시켰는데
아비정전의 폭망으로 2편이 엎어지면서
그냥 갑자기 등장한 양조위가 되어 버렸다나...)
++ 그래서 그 후편의 느낌으로 찍은게 '화양연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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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렉트릭 스테이트 | 장점을 놓친 루소 형제의 실패작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997년, 인류는 로봇 반란에서 힘겹게 승리를 거둔다. 전쟁 초기에는 로봇의 공세에 고전했지만, IT 기업 '센터'의 대표 '이선 스케이트'(스탠리 투치)가 인간의 정신과 기계를 연결시키는 뉴로캐스터를 개발하면서 전황이 180도 뒤바뀐다. 파일럿이 정신으로 드론을 조종함에 따라 로봇을 제압할 수 있었던 것. 전쟁은 미국 서부 외딴곳에 마련된 격리 구역에 로봇들을 가둔 후에야 완전히 종결됐다.
전후 뉴로캐스터의 영향력은 더욱 커졌다. 인간 활동 대부분이 뉴로캐스터를 통해 이루어졌기 때문. 하지만 뉴로캐스터의 위상은 갑작스레 무너진다. 천재적인 지능을 지닌 동생 '크리스'(우디 노먼)가 죽은 줄 알았던 '미셸'(밀리 바비 브라운)이 동생의 정신과 연결된 로봇 '코즈모'를 만난 뒤 뉴로캐스터의 실체를 의심하기 시작한 것. 동생을 찾아 나선 미셸은 밀수업자 '키츠'(크리스 프랫)와 로봇 '허먼'의 도움을 받아 로봇 격리 구역에 진입하고, 동생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깨닫는다.
장점을 저버린 루소 형제
<캡틴 아메리카: 윈터 솔져>로 MCU에 합류한 루소 형제. 그들은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와 <어벤져스: 엔드게임>에 이르기까지 비평과 흥행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아내며 스타덤에 올랐다. 그들의 가장 큰 장점은 스토리텔링이었다. 그들은 거대하고 추상적인 차원의 이야기를 일상적으로 와닿게 만들 줄 알았다.
일례로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에서 캡틴 아메리카와 아이언맨은 어벤져스의 통제를 둘러싸고 갈등을 빚었다. 자유를 중시하는 캡틴 아메리카는 UN의 통제를 거부했고, 아이언맨은 어벤져스가 초래했거나 앞으로 초래할 피해에 대한 책임을 지기 위해서 통제를 받아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자칫 추상적일 수 있는 '자유 대 책임'의 대립을 루소 형제는 두 주인공의 개인적인 영역에서 풀어냈다. 절친이자 윈터 솔져였던 버키가 아이언맨의 부모를 암살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두 주인공은 살벌하게 싸운다. 캡틴 아메리카는 세뇌당한 버키에게 자유의지가 없었다는 이유로 옹호한다. 분노한 아이언맨은 버키에게 복수하려 한다. 설령 세뇌당했어도 버키가 자기 행위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게 그의 일관된 논리였다.
그런데 루소 형제의 스토리텔링은 치명적인 단점이 하나 있다. 영화의 주제와 메시지와 직결되는 일상적인 서사와 캐릭터의 매력이 돋보이지 않을 경우, 영화의 구성 요소를 하나로 묶을 구심점과 재미가 사라짐에 따라 표면적인 메시지만 덩그러니 남을 수 있다는 것. 넷플릭스가 제작비 3억 2천만 달러를 투입해 루소 형제와 협업한 오리지널 영화 <일렉트릭 스테이트>가 바로 이 경우에 해당한다.
단절된 현실을 반영한 디스토피아
<일렉트릭 스테이트>의 큰 그림은 영화 말미에 등장하는 미셸의 연설 내용에서 확인할 수 있다. 미셸은 사람들이 서로 접촉하고, 연결되어 있는 세상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더 나아가 사람에게도, 로봇에게도 전기가 흐르고 있으니 사람과 로봇도 반목하지 말고 공존할 수 있어야 한다고 덧붙인다. 극 중 여러 설정을 고려하면 미셸의 마지막 당부는 미국 사회에 나타난 여러 형태의 단절을 겨냥하는 듯하다.
일례로 인간의 정신과 기계를 이을 수 있는 신기술인 뉴로캐스터는 SNS와 스마트폰에 대한 알레고리라고 할 수 있다. 미셸이 집 밖에 나왔을 때 거리는 적막하다. 몸은 집에 두고 정신에 연결된 드론만 다니기 때문. 이 대목은 각자 이어폰을 끼고 스마트폰 화면만 들여다보느라 조용한 버스나 지하철을 연상시킨다. 사람들과 오프라인에서 부딪히며 소통하기보다는 온라인에서의 소통이 갈수록 늘어나는 세태를 SF적으로 빗댄 셈이다.
한편 로봇 격리 구역은 서로 다른 공동체를 단절시킨 여러 경계선에 대한 비유처럼 보인다. 로봇들이 인간의 명령을 거부하고, 인간과 같은 권리를 요구하자 미국 정부는 전쟁 끝에 로봇들을 격리 구역에 가둔다. 로봇 격리 구역이 미국 서부에 있다는 점은 원주민 보호 구역을 연상시키고, 로봇과 인간 사회를 격리한 거대한 장벽은 트럼프 1기 이후로 추진되었던 미국-멕시코 국경 장벽 같기도 하다.
관계를 다시 잇는 남매와 친구
사회적 단절이라는 이슈를 여러 층위와 측면에서 제시한 뒤, <일렉트릭 스테이트>는 상황을 개선하려는 몇몇 개인을 조명한다. 미셸과 크리스의 플롯은 두 측면으로 나눠 볼 수 있다. 이별했던 남매의 재회는 그 자체로 오프라인에서의 접촉과 소통의 중요성을 일깨운다. 남동생이 교통사고로 죽은 줄만 알았던 미셸. 하지만 크리스의 정신이 담긴 로봇이 나타나고, 로봇과 모험을 떠나면서 그녀는 한때 단절되었던 남매 관계를 되찾는다.
미셸과 크리스 대 이선 스테이트의 대립도 관계의 중요성을 일깨운다. 어려서부터 어머니로부터 학대받았던 이선은 사람 간의 관계가 갖는 중요성을 잘 알지 못한다. 그래서 그는 설령 사람들이 뉴로캐스터 속 세계에 갇힌 나머지 적막해진 세계도 안정적이라며 칭송한다.
이에 더해 이선은 뉴로캐스터에 천재적인 계산력을 지닌 크리스의 뇌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멀쩡한 남매를 생이별시키까지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는 인간과 로봇의 형태로 재회한 남매가 동생의 뇌를 착취하는 뉴로캐스터 기술을 파괴하는 전개에는 여러 의미가 동시에 깃든다. 단순히 동생을 구출하려는 모험은 물론, 파괴되었던 사람들의 사회적 관계를 복구하려는 투쟁으로도 미셸의 서사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키츠와 허먼의 플롯은 또 다른 층위의 단절을 해소한다. 로봇 반란 중 죽을 위기에 처했던 키츠는 허먼의 도움 덕분에 목숨을 구한다. 종전 후 로봇 격리 구역이 생기자 키츠는 허먼과 함께 도망쳐서 밀수꾼이 된다. 이들의 관계는 마치 <그린 북> 속 '토니'(비고 모텐슨)와 '돈'(마허샬라 알리)의 우정 같다. 우정이 인종의 차이를 뛰어넘듯이, 개개인의 노력으로 사회적 경계와 구분을 충분히 넘어설 수 있다고 말하는 셈이다.
'왜'가 없는 이야기
하지만 <일렉트릭 스테이트>의 메시지는 공허하다. 거시적, 추상적 메시지를 일상적 경험으로 치환하는 캐릭터 각각의 플롯이 제 역할을 못하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는 미셸과 크리스, 키츠와 허먼의 관계에 내포된 의도를 구현해 내는 디테일이 부족하다.
미셸과 크리스는 우애가 깊은 남매다. 누나는 아인슈타인보다 뛰어난 뇌를 지닌 남동생을 자랑스러워하고, 남동생은 그런 누나에게 의지한다. 하지만 그들의 남매애는 '왜'가 없다. 남매 관계가 유달리 돈독할만한 사연, 사건, 계기 등은 거의 제시되지 않는다. 남매의 정을 실감하기 어렵다 보니 죽은 줄 알았던 크리스가 로봇 형태로 나타나도, 미셸이 대의를 위해 크리스를 희생해야만 하는 상황에 처해도 특별한 감흥을 느끼기 어렵다.
키츠와 허먼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시청자 입장에서는 그들이 친구가 된 이유를 납득하기 어렵다. 로봇과 인간이 전쟁까지 치른 디스토피아 세계관에서 인간과 로봇의 우정이 싹트는 계기와 과정을 대사 몇 줄로 넘기기 때문. 이유도, 디테일도 없다 보니 그들의 우정은 스토리 전개를 위한 도구로만 소비된다. 실제로 미셸이 그들의 도움을 받아 로봇 격리 구역에 들어간 이후로 키츠와 허먼은 영화 전개에 거의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이처럼 주인공 간의 관계가 편의적으로 묘사되다 보니 메시지도 얄팍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일렉트릭 스테이트>는 주인공들의 관계가 오프라인에서 단절된 관계, 사회적으로 분리된 공동체 간의 관계와 명확히 대조를 이룰 때 메시지에 힘이 실린다. 그런데 정작 남매, 친구 사이에 대한 묘사가 일차원적이니 그와 대비를 이루는 주제와 메시지도 뻔하고 식상해진다. 미셸의 입을 빌려 의도를 직접 드러내는 결말은 교조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한다. 막대한 제작비에도 불구하고 <일렉트릭 스테이트>가 아동용 영화 같은 결정적인 이유다.
보는 맛도 없다
더 나아가 <일렉트릭 스테이트>는 스토리텔링의 허점을 만회할 만한 특별한 매력도 갖추지 못했다. 80, 90년대 느낌이 나는 카세트 퓨처리즘 요소가 반영된 시각 디자인은 장점으로 꼽을 수 있다. 로봇 반란으로 인해 문명이 몰락한 1997년을 배경 삼아 현실과는 다른 방향으로 발전된 로봇 공학과 과학 기술의 디자인은 시청자의 눈길을 끌어당긴다.
그러나 독특한 디자인을 제대로 활용하지는 못했다. 특히 현실과는 다른 모습의 기술력을 강조할 수 있는 액션 연출이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 루소 형제의 명성에 다소 가려졌던 단점이 노출됐기 때문이다. 그간 루소 형제는 대규모 액션 시퀀스 연출을 버거워한다는 지적을 받았다.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 중 와칸다 전투만 봐도 히어로 개개인의 활약상을 비출 뿐, 와칸다 군과 타노스 군이 집단으로 맞부딪히는 장면은 많지 않았다.
상술한 단점은 <일렉트릭 스테이트>에서도 반복된다. '센터'의 본사 건물 앞에서 펼쳐지는 로봇 대 드론의 대규모 전투 시퀀스는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다. 그런데 정작 전투 장면은 일 대 일로 싸우는 드론과 로봇의 수를 늘려놓는 데서 그쳤고, 로봇과 드론이 한 집단으로서 대적하는 장면은 찾아보기 어렵다. 이에 더해 각 로봇의 개성이나 특징을 부각하지도 못했고, 로봇과 드론의 움직임이 너무 느린 나머지 박진감도 느껴지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일렉트릭 스테이트>는 OTT용 작품임을 감안해도 실망스럽다. 특히 감독의 명성에 비해 스토리텔링도 짜임새가 부족하고, 볼거리도 실속 없다. 루소 형제가 넷플릭스에서 제작에 참여한 <그레이 맨>, <익스트랙션>, <익스트랙션 2>와 비교해 보면 팝콘무비로서의 본분도 못하는 듯 보인다. 완성도만 놓고 봤을 때, 루소 형제의 필모그래피 중 가장 실패한 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Dreadful 끔찍한
생동감 없는 남매애와 우정으로 빚어낸 공허한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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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2021)> 리뷰
※ 스포일러 주의
하늘길이 막혀 국가 간 여행이 막혔다. 주변 환경을 완벽하게 바꾸어 일상을 잊는 게 그 어느때보다 어렵다. 그렇다면 화려한 액션으로 가득 찬 영화를 봐야 하는 게 아닐까. 많은 기대를 하지 않는다는 전제조건 하에서, 올해 개봉한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25번째 장편 영화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2021)》는 나쁘지 않은 오락 영화였다. 좋았으면 좋다고 하면 될 텐데 수식어가 괜히 길어진 까닭은, 이 영화에 대해 만듦새가 훌륭하다고 평하긴 어렵기 때문이다. 서사의 개연성이든, 연출면에서든. 하지만 흥미롭게 느껴지는 부분 역시 적지 않고, 이번 리뷰에선 내가 주목한 점에 대해 간단히 적어볼 생각이다.
출처: 다음영화포토
사진 출처: 다음 영화 포토웬우: 망가진 영웅
아마 신화에 대해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영웅 서사 구조의 원형을 분석한 조지프 캠벨(Joseph Campbell)이란 이름을 한 번쯤 들어보았을 것이다. 사실 이 영화는 캠벨의 서사구조를 전형적으로 따랐다고 보긴 어려운데(보글러 모델을 따랐다고 보는 편이 합당하다), 그럼에도 그의 이름을 꺼내온 것은 '빌런'으로 소개된 웬우(양조위)의 일대기가 캠벨의 서사 구조와 유사한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의 기원을 알 수 없는 데다가, 웬우는 텐 링즈라는 초자연적 아이템을 획득하여 영생을 누리는 자로, 평범한 인간이라기보단 신격화된 인물에 가깝다. 더군다나 그는 자신의 위대한 정복자로 자신만의 세계를 꾸린 후 잉리(진법랍)라는 신비스러운 여인과 결혼에 성공한다. 이 과정은 지극히 전형적인 영웅 서사의 한 장면이다. 과업의 달성과 신비스러운 여인과의 혼인 말이다. 물론 이런 의문이 생길 순 있다. 그가 이러한 대접을 받을 만한 인물인가?
그러나 이러한 의문을 깊게 파고들기 어려운 까닭은, 스크린 묘사된 웬우라는 인물의 천 년 지배는 너무도 짧은 대사로만 지나갔기에 그의 모든 결정이 악하기만 했는지를 파악하기 어렵다는 데에서 기인한다. 이밖에도 역사 속에서 우리는 정복자가 곧 영웅으로 떠받들여졌다는 것을, 정복의 과정이 피로 물들어 있었다 한들 치세가 안정적이었다면 역사서는 그를 위대한 전사로 서술한다는 사실을 안다. 그렇기에 파편화된 단서만으로 이 웬우라는 인물을 뼛속까지 사악한 악인으로 점찍는 것은 점차 어려워진다. 더군다나 결과론적으로 세상을 망가뜨리려 한 행동의 본질적 요소는 아내의 부활이자 가정의 회복이라는 것을 고려해보면 더더욱 그렇다. 물론 주인공인 샹치(시무 리우)가 결국 아버지의 공과 과를 모두 물려받아야만 하는 상황에서, 웬우를 완전한 악인으로 묘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기도 했겠지만.
그럼에도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은 웬우를 주인공인 샹치가 넘어서야만 하는 시련으로 규정한다. 이는 그저 웬우가 완전한 빌런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는 다만, 구시대에서 필요로 했던 타입의 영웅이었지 현대의 우리에게 어울리는 영웅이 아니기 때문이다. 웬우의 추락은 어찌 보면 운명적인 측면이 있다. 그는 천 년간 다양한 이름을 사용하며 분열된 정체성으로 시대를 부유하였음에도 늘 자신의 본명만큼은 잊지 않았고, 늘 자기 자신으로 회귀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러나 잉리가 나타난다. 그는 웬우를 웬우로 호명하며, 흩어진 그의 다면적인 모습을 본연의 자아로 고정시켰다. 홀로 자신을 잊지 않는 것과, 타인이 자신을 알아보고 이름을 불러주며 세상에 고정시키는 것은 질적으로 차이가 난다. 웬우라는 이름이 천 년의 고독 속에선 결코 획득할 수 없었던 정체성은 그러나 몇 년의 시간 후 사라진다. 결과는? 자아의 망각이다. 그는 잉리가 존재하기 전 자신이 규정했던 웬우로도, 잉리가 존재했던 시절의 웬우로도 완벽히 돌아갈 수 없다.
영웅과 비영웅의 차이는 삶을 통해 목도하는 운명적인 순간에서 어떠한 선택을 할 수 있느냐의 문제일 것이다. 웬우는 자신의 세계가 일그러졌을 때, 즉 잉리를 잃고 평화를 상실한 시련의 순간에 단독자로서 복수를 하겠다는 구시대적이고 폭력적인 방법을 택했다. 새롭게 부여받은 아버지라는 정체성을 키워내지 못한 것, 그것이 그가 추락한 주요 원인이다. 영웅이 된다는 건 자신의 손에 누구도 넘보기 힘든 힘과 권위가 달려있을 때, 그것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지에 대해 마땅한 도덕의식을 흔들리지 않고 지닐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문제이기도 하지만, 그런 힘이 없더라도 가슴이 메일만큼 처참한 순간, 주변을 돌보며 일상을 유지할 수 있는지와 같은 요소조차 영웅의 조건일 수 있음을, 이 영화는 말하고 있다. 거대한 신분과 거대한 힘이 지배하는 세계는 벌써 백 년도 전에 무너졌다. 소박하지만 지겹고 질곡 많은 삶을 살아가야 하는 우리에게 필요한 물음이자, 영웅이 답해야 하는 질문은 어쩌면 이런 것들일 것이다. '살아가야만 하는 그 순간을 어떻게 살아 나갈 것인가.'
출처: 다음 영화 포토
사진 출처: 다음 영화 포토탈로: 완전하지 않은 별세계
웬우는 천 년을 산 인물이기에, 그는 그 자신이 스스로의 조상이자 고향인 하나의 세계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의 아내인 잉리의 고향 탈로는 조상으로부터 이어진 개인, 그리고 현재를 살아가는 각각의 타인을 하나로 묶는 거대한 공동체가 거주하는 특별한 장소이다. 하지만 웬우가 숲과 동굴을 통해 탈로에 수평적으로 진입할 수 있었다는 점을 미루어 알 수 있듯, 웬우와 탈로는 둘 사이에 위계가 존재하는 수직적인 세계가 아닌 평등한 세계관이다. 정복자라는 속성을 띈 웬우와 평화로운 별세계처럼 보이는 탈로는 색상을 비롯한 여러 테마에 있어서 지독히도 달라 보이나, 사실 비슷한 점 역시 무수히 많다. 탈로는 어둠의 드웰러를 봉인한 장소이자, 웬우라는 외부자를 철저히 배격하는(그의 변화 가능성을 믿지 않는) 폐쇄적이고 정체된 공간이기도 하다. 이곳이 진실로 평화롭기만 한 무릉도원이었다면 탈로에선 남녀가 평등하게 무술 훈련을 받을 이유도 없었을 것이며, 잉리가 성인이 된 자신의 자녀를 위해 갑주를 예비할 이유도 없었으리라. 언뜻 선인의 세계처럼 보일지언정, 탈로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위험을 품고 있는 아슬아슬한 세계다.
나는 위에서 웬우를 악인이라기보단 ‘비영웅’정도로 묘사했는데, 영화 내에서 파멸적인 악惡을 꼽아야 한다면 어둠의 드웰러로 봐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크리처 무리는 다른 생명의 영혼을 흡수하며 텐 링즈를 통해 아이템의 소유주를 홀릴 만큼의 지능과 마력을 지녔다. 언어 능력조차 없어 소통이 불가한 그들은 순수한 공포 그 자체이다. 흥미로운 건, 영화 내에서 가장 신화적인 장소에서 노골적으로 힘을 원하고, 사악한 크리처가 등장하였음에도 영화 내 인물들은 어둠의 드웰러를 맞서 싸워야 하는 상대로는 인식할지라도 증오나 원망 따위의 감정을 비추지 않는다는 점이다. 샹치와 샤링(장멍일), 케이티(아콰피나)는 외부인이라 그럴 수 있다 치더라도, 탈로 주민들 역시 그들의 시간과 장소를 모두 묶은 역사가 존재함에도 그 모든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인다. 이들이 원하는 것은 일종의 ‘현상유지’다. 탈로가 간신히 모면한 평화 위에 세워진 세계일지언정 불안한 진동을 감내한다.
이때 도달하는 것이 바로 웬우라는 외부인, 혹은 외부 세계다. 그는 자신의 절반을 찾기 위해 봉인된 문을 깨부숴야 하는 인물이다. 설령 그것이 날 눈멀게 한 거짓이라 하여도.
비슷하면서도 달랐던 탈로와 웬우의 충돌은 탈로의 승리로 막을 내린다. 영화가 탈로의 손을 들어준 이유는, 역시나 그들이 무작정 옳거나 신령한 용과 함께 하는 이들이기 때문이 아니라, 탈로가 공동의 시간과 지혜로 다듬어진 협력의 가치를 인정하는 장소이기 때문일 것이다. 탈로는 어둠의 드웰러들과 전쟁을 함으로써 조상 대대로 이어온 '봉인된 문의 수호'라는 목적성을 상실하였고, 이는 세계의 정체성이 크게 흔들릴 위기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탈로라는 세계를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웬우처럼 단독자가 아니며, 거주민 개개인은 서로에게 조력자가 되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샹치가 잉난(양자경)을 통해 쥐고 있던 손을 피게 되었듯, 탈로 세계의 인물들은 샹치 세계의 인물을 통해 문을 봉인과 위협에 시달릴 이유가 없어졌다. 그렇다, 끔찍한 사건이라 해도 오로지 나쁜 결과만 몰고 오진 않는다.
출처: 다음 영화 포토실패한 아버지조차 계승하는 영웅
유럽의 신화나 미국의 히어로 영화를 보다 보면 친부 살해 모티프나 주인공의 가족 관계가 단절된 설정을 흔하게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은 미국에서 제작된 히어로 영화임에도 빌런으로 묘사된 아버지 웬우와 차기 세대의 영웅인 샹치가 화해할 뻔한 장면이 있다. 샹치는 (영화 내에서 그가 다짐하기도 했지만) 기존의 다른 영웅들처럼 아버지를 살해하고, 그의 힘만을 취한다는 선택을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마지막 순간에도, 외친다. 우리에겐 당신이 필요하다고. 그리고 그는 자신의 손으로 아버지를 죽이지 않으며, 영화 말미엔 직접적으로 그를 추모하기까지 한다(그러나 완전한 용서인지는 알기 어렵다). 나에겐 영화의 이 지점이 가장 눈에 띄었던 것 같다. 21세기에 영웅이 될 수 없었던 아버지를 계승하는 젊은 영웅의 미래는 기대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아마 이 영화는 트릴로지의 첫 번째인 만큼, 샹치가 어떻게 텐 링즈를 물려받게 되었는지를 풀어나가는 일종의 프롤로그 부분에 해당할 것이라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즉, 샹치를 흔들어 놓을 진정한 모험이 시작된 순간은 아닐 것이라고.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 데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일단 모험을 통해 샹치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그는 케이티와 펍에서 술을 마시고, 웡과 노래방에 간다. 더 이상 호텔 직원은 아닐 수 있겠으나, 그저 그뿐이다. 특히 그가 지녔던 증오나 두려움은 일부 해소된 듯 보이나, 타의에 의해 제거된 것으로 완전한 극복이라 보기는 어렵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더더욱. 물론 샹치는 아버지의 텐 링즈를 물려받았고 어머니의 고향에서 용의 힘을 배웠다. 그러나 영웅이라는 정체성은 단순히 ‘힘’을 획득하여 악하게 쓰지 않거나, 최악의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 대항하는 순간에 얻어지는 이름이 아니다. 그보다는 자발적인 책임 혹은 신념을 자각하는 각성의 순간이 필요하다.
이런 이유로, 앞으로 펼쳐질 샹치 트릴로지에서 주인공은 션이 아닌 샹치라는 본래의 이름으로 회귀한 만큼 자신이 정녕 누구인지를 의식적으로 깨닫는 모습이 필요할 텐데, 이러한 서사를 기존 서구 영화 속 히어로와는 다른 결로 풀어나가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그는 열다섯에 달려 나오며 숨기고 잊었던 자신의 과거를 앞으로 결코 숨길 수 없을 것이며, 숨겨서도 안될 것이다. 한 인물의 공과를 우리는 선택적으로 수용할 수 없다. 샹치는 잉리는 물론, 웬우까지 포함하여 다채로운 모습을 모두 포용하되 더 나은 인물이 될 수 있도록 자신만의 서사를 구축해나가야 한다. 다면적인 선과 악 사이에서, 서양과 동양이라는 이분법이 더 이상 적용되지 않을 넓은 스펙트럼의 세상에서.
출처: 다음 영화 포토
어쩌면 이 영화에 대해 지금 왈가왈부하는 건 시기상조일지도 모른다. 아직 트릴로지가 종료된 시점은 아니니까. 그리고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로 시작한 영화의 트릴로지가 혼자 올곧게 서고자 하여도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라는 넓은 세계에서 샹치는 여러 캐릭터들과 뒤엉키게 될 운명인지라, 이 캐릭터의 일관성이 과연 유지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장담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인간적이었으나 정의로운 이는 아니었던 아버지의 공과를 물려받은 이가, 어떻게 자신을 영웅으로 정의하고 성장할 지에 대해선 정말이지 기대할 수밖에 없는 듯하다.
2021 여름이 저물었다는 내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는 양 무더위가 계속되는 요즈음이다. 하지만 타오르는 여름의 끝자락에서 시선을 바꾸어본다. 올 가을엔 여름의 발자국이 그 어느 때보다 짙게 남아있으리라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