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하요2021-10-24 19:29:31
[원더우먼1984](2020) - 신발에 주목하라!
이건 거의 패티 젠킨스의 신발 페티쉬
최근 이하늬 주연의 SBS 드라마 [원더우먼](2021)이 큰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이 글은 드라마가 아닌 영화 이야기라는 것을 먼저 밝힙니다. 패티 젠킨스(女) 감독의 2번째 원더우먼 영화인 [원더우먼 1984](2020)는 일반적으로 아주 재밌다라고 느끼기 어렵습니다. 1편인 [원더우먼](2017)에서는 조연급의 갤 가돗을 전면으로 내세우고, 동시에 포텐이 터지면서 내세우며 재미를 봤었죠. [원더우먼]이 절대적으로 잘 만들었다기보다, DC 영화들 중에서 상대적으로 그나마 나았다고나 할까요? 하지만, 시리즈의 2번째에서, 너무나 빨리진짜 실력이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1편에서는 여러모로 운이 많이 작용했던 것이 확실해졌습니다.
[원더우먼 1984]에는, 신발에 클로즈업 되는 장면들을 모아봤습니다. 이것만으로도 스토리를 말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함께 한 번 보시죠.
[1] 여성슈즈
1. 아이언맨 시그니쳐 컬러를 가진 글래디에이터 타입 신발을 장착한 원더우먼 첫 등장
2. 나중에 빌런이 되는 바바라(크리스틴 위그) 첫 등장. 이 때는 단정한 신발.

3. 호피무늬 킬힐 (원더우먼): 이때부터, 신발에 집중하며 봤는데, 진짜 신발에 클로즈업을 많이 하더라구요. 이 신발을 보고, 바바라는 치타가 되기를 결심한 듯
4. 점점 화려해지는 스타일을 싡는 바바라. 민트색 오픈 토

5. 완전 각성한 바바라 (수수한 신발에서 화려한 발목 스트랩 금장 초고가 신발로)

6. 니하이 부츠 (바바라): 이 스타일은 정말 패피들도 평상시에 입고 다니기 힘듭니다.

[2] 남성슈즈
1. 남자 빌런인 맥스(페드로 파스칼)의 어린시절의 가난함을 찢어진 신발로 표현. 여기까지 신발이 등장하더라구요.
2. 마지막, 결정적인 순간, 맥스의 발목에 채찍을 휘감은 원더우먼. 역시 신발 부분. 이것을 위해서 시종일관 신발을 보여주었을지도 모릅니다.
[3] 나이키
1. 대 놓고 나이키 광고 : 나이키 운동화가 신기한 남우조연(크리스 파인).

2. 나이키(바바라)
정말 다양한 신발들이 많이 나오지 않습니까? 이미 보신 분이라면 신발에 주목하여 다시 한 번 보시고, 보실 분 역시 신발에 주목해 보세요!
전, 패티 젠킨스 감독이 신발에 의미를 부여했다고 확신합니다. 그런데 이거 뿐만 아니라 액션과 갤 가돗의 연기에도 신경을 썼었어야 했는데...
Relative contents
-
- 9월 5일 | 언론이 놓친 미덕을 비극으로부터 찾아내다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972년 뮌헨 올림픽을 현지 생중계 중이던 미국 ABC 방송국 스포츠팀. 어느 날 새벽, 올림픽 선수촌에 총성 여러 발이 울러 퍼진다. 팔레스타인 테러 단체 '검은 9월단'이 이스라엘 대표팀 숙소에 침입해 인질극을 벌인 것. 사건의 심각성을 깨달은 ABC 스포츠 사장 '룬 알리지'(피터 사스가드)는 본사 국제부 대신 스포츠팀이 뉴스를 보도하기로 결정한다.
이에 스포츠 운영 총괄자 '마빈'(밴 채플린)은 타 방송국과 위성 시간대를 바꾸는 협상에 돌입하고, PD '제프리'(존 마가로)도 독일인 통역사 '마리안네'(레오니 베네쉬) 도움을 받아 인력과 카메라를 새로 배치한다. 갑자기 시작된 인질극 단독 생중계에는 시청자 9억 명이 몰리며 대성공을 거둔다. 하지만 ABC 스포츠팀의 환호는 오래가지 못했다. 경찰의 진압작전이 시작된 순간, 테러범들도 자신들의 방송을 보고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
피할 수 없는 비극을 파헤치다
1972년 9월 5일. 뮌헨 올림픽이 한창이던 때에 팔레스타인 테러 단체인 '검은 9월단'이 비밀리에 올림픽 선수촌에 난입했다. 그들은 이스라엘 올림픽 대표팀 선수 5명, 심판 2명, 코칭스태프 4명, 총 11명을 인질로 잡고 이스라엘에 구금된 팔레스타인 포로 234명의 석방을 요구했다. 서독 경찰에 의해 범인들은 모두 사살 또는 체포되었지만 그 과정에서 경찰 한 명과 인질 전원도 사망했다.
'뮌헨 올림픽 참사'의 원인으로는 여러 요소가 지목된다. 서독 경찰의 경우 대규모의 조직적 민간인 인질극을 예상하지 못한 나머지 테러 진압 작전을 갖추지 못했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언론도 경찰 못지않게 비판받았다. 사건 당시 선수촌 상황이 TV로 생중계된 나머지 테러리스트들이 TV를 보면서 서독 경찰의 진압 작전을 실시간으로 파악한 후 대응할 수 있었기 때문.
물론 언론 입장에서도 변명거리는 있다. 대규모 테러 인질극 보도는 전례가 없었기에 발생한 실수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9월 5일: 위험한 특종> (이하 <9월 5일>)은 참사 당시 언론의 대응이 단순한 실수가 아니며, 그보다는 언론 내부의 메커니즘이 필연적으로 만들어낸 오류에 가깝다고 지적한다. <9월 5일>의 건조한 비판은 살이 아리듯 날카롭다. 반 세기가 지난 현재에도 유효한 메시지이기 때문이다.
언론의 내부만 들여다보다
<9월 5일>의 가장 큰 특징은 선택과 집중이다. 영화는 뮌헨 올림픽 참사를 다루고 있지만, 직접 묘사하지는 않는다. 테러리스트가 작전 계획을 짜고, 선수촌 내부로 진입하고, 인질을 사로잡고, 경찰과 대치하는 식의 이미지는 단 한 컷도 등장하지 않는다. 애초에 카메라는 ABC 올림픽 스튜디오 외부 광경 자체를 안 비춘다. 테러리스트와 인질이 탄 헬리콥터를 보기 위해 주인공들이 밖으로 나가는 장면 정도가 몇 안 되는 예외다.
그 대신 간접적인 수단을 활용해 상황을 연출한다. 선수촌에 몰래 잠입한 현장 기자들의 전화나 무전, 선수촌을 내려다보는 카메라에 잡힌 장면, 도청한 서독 경찰의 무전 및 경찰의 공식발표가 적힌 팩스 등. 이는 두 가지 효과를 가져다준다. 우선 등장인물도, 관객도 외부 상황을 알 수 없기에 매 순간 서스펜스가 극대화된다. 한편으로는 이미 유명한 사건보다는 사건을 다루는 언론에게만 집중하겠다는 선언처럼도 느껴진다.
흥미롭게도 <9월 5일>이 묘사하는 언론의 모습은 다른 영화에 등장한 언론과는 다르다. 언론을 다루는 영화는 대체로 기자 개개인의 취재 상황에 초점을 맞춘다. 예를 들어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은 <스포트라이트>는 '스포트라이트' 팀 기자들이 가톨릭 사제 아동 성추행 사건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 취재원과 접촉하고, 과거 자료를 분석하는 모습을 따라가는 구성을 취했다.
<9월 5일>은 다르다. 이 작품은 기자들이 어떻게 취재하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이 영화는 오로지 언론 내부의 의사결정 상황에 주목한다. 누가 선수촌으로 가고 앵커와 PD는 누가 맡을지, 경찰 소식은 어떻게 확인할 것이며, 스포츠팀이 테러 소식을 전할지 아니면 미국에 위치한 본사에서 이 뉴스를 담당할지 등. 뉴스 한 꼭지가 만들어지기까지 언론 내부에서 작동하는 메커니즘을 침착하게 따라간다.
신속함과 생생함이라는 허상
그 덕분에 <9월 5일>은 언론인을 혼란에 빠트리는 두 가지 딜레마를 포착할 수 있다. 주인공들은 매번 선택을 내려야 하는 분기점마다 현장감과 윤리, 신속함과 정확성 사이에서 고뇌한다. 무엇 하나 포기할 수 없는 중요한 언론의 가치이지만, 양립하기는 어렵기 때문. 결국 그들은 윤리보다는 현장감, 정확성보다는 신속함을 우선순위로 두기로 결정한다.
이 선택은 나비효과를 불러일으킨다. 일례로 제프리는 ABC 스튜디오가 선수촌 바로 옆에 위치했다는 이점을 살리기로 결정한다. 스튜디오 카메라 두 대를 밖으로 빼서 선수촌을 생중계하여 가장 생생한 그림을 시청자에게 보여주겠다는 것. 하지만 이는 상술했듯이 비극적 결과를 초래한다. 경찰의 선수촌 진입 작전을 테러리스트에게 일러바치는 꼴이 됐기 때문. 현장감을 살리려다가 뉴스 당사자들을 고려하지 못한 우를 범한 셈이다.
정확성보다 신속함을 우선순위에 둔 결과물도 처참하다. 경찰이 공항에서 테러범을 모두 사살하고 인질을 구출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제프리는 이를 곧장 속보로 내보낸다. 다른 방송사나 언론사보다 늦을 경우 ABC의 신뢰성과 지위가 손상될 수 있다고 걱정하면서. 그 결과 오보가 전 세계에 퍼져 나간다.
두 장면 모두 저널리즘의 본질적 약점을 보여준다. 다른 방송사, 언론사와의 경쟁 때문에 필연적으로 평가절하되는 가치와 우선시되는 가치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 다른 방송사보다 신속하게 생생한 현장을 보여줘야 대중의 눈길을 사로잡을 수 있으니까. 마빈처럼 현장감에 앞서서 윤리를, 신속함보다는 정확성을 고려하자는 의견은 최초, 단독, 속보라는 타이틀이 가장 중시되는 언론 생태 내에서는 무력할 수밖에 없다.
아날로그의 미덕
이 지점에서 주목할 만한 장면이 눈에 띈다. 바로 영화가 호흡을 고르는 컷들이다. <9월 5일>은 급박한 사건이 진행되는 와중에도 한 번씩 템포를 늦추면서 템포를 조절한다. 인질로 잡힌 이스라엘 선수와 코칭스태프 사진을 방송에 내보내기 위해 크기를 키우고, 생중계 화면에 자막을 삽입하기 위해 알파벳 모형을 재배치하며, 현장 기자가 찍은 영상 중 필요한 장면만 편집하는 모습을 비추는 식이다.
흥미롭게도 모든 작업은 아날로그로 이루어진다. 사진 크기를 키우려면 필름 카메라로 사진을 재촬영한 뒤 인화해야 한다. 알파벳 모형도 담당자가 손으로 배치하고, 필요한 영상도 전체에서 직접 잘라내야 한다. 현재 방송사의 디지털화된 뉴스 제작 방식에 비하면 일견 비효율적이다. 그러나 이처럼 품을 들이는 과정 덕분에 제프리와 그의 팀은 시청자에게 정보를 가장 정확하게 전달할 방법을 충분히 검토한 뒤 결정할 여유가 생긴다.
바로 이 지점에서 <9월 5일>의 의도는 명확해진다. 아무리 급박해도 언론은 한 템포 끊을 줄 아는 여유가 필요하다는 것. 실제로 룬과 마빈은 생중계 도중 인질이 살해당할 경우 뉴스를 끊어야 할지를 두고 대립한다. 하지만 그들이 뉴스 스튜디오 밖에서 한 박자 쉬어가자 제프리의 입에서 둘 모두 동의할 수 있는 절충안이 튀어나온다.
그와 반대로 단독과 속보 때문에 마음이 급해진 제프리는 인질 구출 소식을 크로스체크해야 한다는 마빈의 의견을 묵살한다. 그 순간 ABC는 제프리가 한 템포만 끊고 현장에 나간 마리안네의 연락만 기다렸어도 막을 수 있었던 희대의 오보를 내보내고 만다. 이 두 장면의 대조는 한 번 쉬어갈 줄 아는 미덕과 여유의 중요성을 강조해 준다.
반 세기 전 사건을 다시 보는 이유
이는 1972년에 발생한 사건을 2025년에 봐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사실 요즘 언론에게 신속한 정보 전달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언론이 다루는 것보다 더 많은 정보가 SNS에서 실시간으로 공유되는 시대이기 때문. 이러한 상황에서 언론의 뼈아픈 실수를 조명하는 <9월 5일>의 함의는 분명하다. 지금은 속보, 단독 경쟁이 아니라 한 호흡 쉬어가는 여유를 발현할 수 있는 새로운 보도 형태가 더 필요한 시점이라는 것.
과연 언론이 변화할지는 <9월 5일>도 명확히 답하지 못한다. 제프리는 자신이 오보를 책임지겠다며 자책한다. 하지만 룬은 다음 날을 위해 쉬라고 격려할 뿐 별다른 질책을 하지 않는다. 그렇게 풀 죽은 제프리가 룬의 사무실을 나설 때, 다른 동료는 잔뜩 흥분한 채로 룬에게 새로운 아이템을 제안한다. 총격전이 발생한 공항에 헬기를 비롯한 잔해가 남아 있을 테니 가장 먼저 그 현장을 찍어서 보여주자고.
그 순간 제프리의 자책에서는 언론의 변화를 바라는 소망이, 다른 동료의 아이디어에서는 이전 관습을 되풀이하려는 언론에 대한 회의감이 동시에 느껴진다. 바로 이 장면 때문에 희망과 의구심이 순간적으로 교차되는 <9월 5일>의 결말은 특히 인상적이다. 관객에게 질문을 던지고 선택권을 넘기면서 균형성과 공정성이라는 저널리즘의 가치를 손수 실천하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다큐멘터리 같은 영화
물론 <9월 5일>에게도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캐릭터가 단순히 도구에 머무른다. 각 주인공의 개인사가 일절 언급되지 않다 보니 관객은 그들과 교감할 방법이 없다. 그들이 자기 결정에 대해 후회하고, 그 결과 때문에 좌절하더라도 감정적 동요가 온전히 전해지지 않는 셈이다. 그러다 보니 영화는 차분하고 침착한 수준을 넘어서서 건조해진다.
이는 비슷한 결의 작품인 <스포트라이트>와의 결정적인 차이다. <스포트라이트>는 가톨릭 교회와 연이 있는 기자들이 가톨릭 교회의 범죄를 파헤치는 과정에서 배신감, 회의감, 고뇌를 직간접적으로 녹여냈다. 이러한 감정선의 부재 때문에 <9월 5일> 마치 재연 다큐멘터리 같다. 언론 내부 사정에 관심이 없을 경우 급박한 상황 전개마저 지루하게 느껴질 가능성도 농후해진다. 역사가 곧 스포일러라서 모두가 결말을 알고 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 세기의 차이를 뛰어 넘어서 언론의 본질, 가능성과 한계를 꿰뚫어 보는 <9월 5일>의 통찰력만큼은 충분히 인상적이다. 이 작품이 왜 제97회 아카데미 시상식 각본상, 제82회 골든 글로브 시상식 작품상, 제30회 크리틱스 초이스 시상식 각본상, 편집상 후보로 이름을 올렸는지 실감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다. 2025년의 아카데미 시상식 시즌을 본격적으로 즐길 시작점으로서는 더할 나위 없다.
Exceeds Expectations 기대 이상
반 세기가 지나도 여전한 한계와 반 세기가 지났기에 기대하는 가능성의 공존
-
- 프레임을 걷어낸다면 더욱 감동적일 한 여성의 이야기, 영화 <82년생 김지영>
소설책을 원작으로 한 영화 <82년생 김지영>. 개봉 당시 이 작품이 페미니즘 작품이라고 프레임이 너무 씌여 있어서 솔직히 껄끄러웠던 작품이었다. 나는 솔직히 페미니즘이라고 언급하는 것 자체가 오히려 호명을 함으로써 차별을 종용하는 결과로도 이어지는 같아서 그 이념은 동의하지만 단어 자체를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그래서 영화 홍보가 너무 페미니즘이라는 틀로 이뤄져 있어서 조금 불편했는데 굳이 그렇게 홍보를 안했다고 하더라도 잘 됐을 너무나도 잘 만든 작품이었다.
영화 <82년생 김지영> 시놉시스
모두가 알지만 아무도 몰랐던 당신과 나의 이야기
1982년 봄에 태어나 누군가의 딸이자 아내, 동료이자 엄마로 2019년 오늘을 살아가는 지영. 때론 어딘가 갇힌 듯 답답하기도 하지만 남편 대현과 사랑스러운 딸, 그리고 자주 만나지 못해도 항상 든든한 가족들이 지영에겐 큰 힘이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말하는 지영. 대현은 아내가 상처 입을까 두려워 그 사실을 털어놓지 못하고 지영은 이런 대현에게 언제나 “괜찮다”라며 웃어 보이기만 한다.
*해당 내용은 네이버영화를 참고했습니다.
이 이후로는 영화 <82년생 김지영>에 대한 스포일러가 존재합니다.
여자의 이야기
<82년생 김지영>이라는 제목 답게 김지영이라는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면서 사회 속에서, 집안에서 여성이 겪는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한 번씩 겪는 부조리함이 자극적이지 않게 드러나고 있어서 평범하지만 충분히 그 부조리함을 캐치할 수 있게끔 거슬리지 않게끔 연출을 한 점이 인상적이었다. 그래서 그저 평범하다고 보여졌지만 그 속에서 발버둥 치는 모습들이 너무나도 안타깝게 느껴져서 중반부터 엄청 눈물을 쏟으면서 봤다.
남자의 이야기
여성 캐릭터가 타이틀롤이었지만 더 눈길이 갔던 부분은 남성캐릭터들이었다. 여성의 이야기라고만 홍보가 많이 돼서 남성 캐릭터의 역할이 아예 죽어있거나 정말 가부장적인 인물들만 등장하는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입체적이고 그 관계 속에서 고민을 하는 남성들의 이야기도 꽤나 많이 등장해서 개인적으로는 정말 좋았다.
그래서 왜 호보를 '여성'에 초점을 맞춰서 진행을 했는지 더욱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지연의 남편인 대편 캐릭터들의 경우 임신과 출산, 육아의 과정 속에서 전형적으로 '도와준다'는 접근을 하는 일반적인 남성을 그리고 있긴 하지만 '도와준다'가 아니라 '마땅히 자신이 해야할 일이다'라는 가치관의 변화를 잘 드러내고 있었고, 그 고민의 과정이 아내 김지영이라는 캐릭터에 묻히지 않아서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나 자신의 이야기
가장 펑펑 울었던 순간을 꼽자면 김지영이 스스로를 김지영이라고 부르는 장면이었다. 항상 다른 사람에게 '지영'이라고 호명을 당하더라도 그 안에는 아내로서, 딸로서, 엄마로서, 친구로서 호명을 당해왔었다. 자신을 지운 채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기대하는 모습대로 행동을 하다가 동생이 자신이 갖고 싶어했던 만년필에 '김지영'이라 각인을 하고 선물을 주자 그 만년필을 가지고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노트에 적으며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담담하게 자신의 이름을 쓰는 모습을 보면서 드디어 스스로 주체가 되는구나하는 느낌이 들어서 펑펑 눈물이 났다.
페미니즘이라는 프레이밍을 걷어낸다면 충분히 한 가족의 이야기,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로 볼 수 있었던 영화 <82년생 김지영>. 누구가 감동을 받고 그 속의 부조리함을 불편하지 않게 느낄 수 있도록 만들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
- 가장 추운 곳에서 따뜻함과 열정을 만나다
파주 출판 도시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내용이어서 시사회에 있다고 했을 때 의무감으로 신청한 영화 <위대한 계약: 파주, 책, 도시>. 다른 작품들은 재밌어 보인다는 단순한 이유로 시사회를 신청했었는데 이 작품은 현 직업이 북에디터다보니 북에디터인데 그래도 봐줘야 되는 거 아니겠어?하는 마음으로 시사회를 다녀왔다.
영화 <위대한 계약> 시놉시스
책을 만들면 구속되던 시절, 책의 유토피아를 꿈꾸는 이들이 있엇다. 이들의 꿈에 새로운 도시를 희망한 건축가들이 동참했다. 위험한 계약이라 불리던 위대한 계약. 그 계약을 바탕으로 세계 어디에도 없던 도시가 파주에 탄생한다. 그리고 책에서 시작된 도시는 영상과 예술 문화의 허브로 발전했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또다른 새로운 미래를 꿈꿔나간다.
* 해당 내용은 네이버영화를 참고했습니다.
이 이후로는 영화 <위대한 계약>에 대한 스포일러가 존재합니다.
선(善)이 지속되다
영화 <위대한 계약>을 보면서 가장 먼저 들었던 생각은 '선'의 파급력이다. 건물들은 절대 4층 이상의 높이로 짓지 않는다, 자신 마음대로 건축가를 지정해 건물을 짓지 않는다 등 굉장히 공동체 정신이 강한 위대한 계약을 맺으면서 파주 출판 도시 1단계가 진행된다. 그리고 1단계에서 발생한 문제들을 2단계에서 짚고 넘어가고, 그와 동시에 1단계의 그 선한 정신을 이어받는 모습을 보면서 자본의 논리에 굴복했을 수도 있는데 그렇지 않고 자신들이 설정한 그 선한 영향력을 꾸준히 지키고 있다는 것에 경외심 마저 들었다.
공금을 사용할 수 있었음에도 투명하게 하기 위해 개인의 사비로 처리를 한다든지, 1단계 2단계 도시 계획에서 영감을 받아 3단계를 진행할 때 아직 건물을 살 수 있는 여력이 안되는 예술인들에게 반값으로 임대를 해준다든지. 그 선한 영향력이 해를 거듭할수록 더 커지고 넓어지고 있었다.
어찌보면 남한에서의 최북단 가장 추운 파주에서 생활하는 이들이 "파주 밖은 너무 춥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가장 추운 곳에서 가장 선한 영향력으로 도시에 따뜻함을 불어넣어주고 있는 공동체가 아닐까 싶었다.
이렇게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드러내다니
사실 북에디터로서 열정이 식어가고 있는 이 시점에서 영화 <위대한 계약>을 보면서 정말 신기했던 모습은 어쩜 저렇게 열정이 넘칠까?였다. 저는 파주출판도시가 정부에서 만들어낸 것인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출판인들이 모여서 정부와 싸우고, 군대를 설득해서 마련한 부지에 건축가들이 힘을 합세해서 만들어낸 도시였다. 그들의 열정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것일까?라는 생각이 들면서 굉장히 존경스러운 마음이 가득했다.
파주 출판 도시를 자랑하고 의의를 설명하는 다큐멘터리라고 볼 수 있는데, 이 작품에서는 이 도시를 건립하면서 출판인들과 건축가들의 실수를 스스로 설명한다. 이런 부분이 아쉬웠고, 저런 부분은 잘못됐고. 이렇게 스스로의 과오를 말하면서 이 도시를 조금 더 발전적으로 살릴 수 있는 방법을 아직까지도 모색하고 있었다. 아마 그들은 이 도시를 자신들이 세웠고, 출판과 예술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기에 자신의 과오를 직접 말하면서 더 발전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한 그들의 모습이 멋있었고,출판의 미래를 그리는 그들의 모습에 열정이 조금이나마 생겼던 작품이었다.
미래의 파주출판도시는 어떻게 변화할까?
책으로 시작한 파주출판도시는 이제 영화인을 비롯해서 예술인, 그리고 그들을 교육하는 학교까지 들어와 있다. 예술 전반으로 확장된 도시를 보면서 그리고 지난 날의 실수를 인정하고 이를 반복하지 않으려는 모습을 보면서 이 도시가 앞으로 어떻게 발전해 나갈 수 있을지 매우 궁금해졌습니다. 그리고 사실 사양산업이라고 일컫어지는 출판업의 미래도 파주에서는 조금 다르게 읽혀지고 있었다. 북한과 가장 가까운 도시 파주는 북한으로 통하는 가장 빠른 길목에 위치해 있다.
“통일이 되면 가장 먼저 교류되는 것은 활자와 영상매체다.”
이 말씀을 하신 도서출판 동녘의 이건복 대표. 굉장히 공감이 가는 말이었다. 물론 통일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꼭 통일이 아니더라도 북한과 남한의 문화교류가 자유롭게 이뤄지는 날이 온다면 아마 가장 빛을 발할 매체가 활자와 영상일 것이다. 이러한 부분까지 염두해두고 있다는 것을 보면서 굉장히 멀리까지 내다보는 확장된 시각에 사고가 넓혀지는 느낌이었다.
영화 <위대한 계약: 파주, 책, 도시>는 개인적으로 직업과 맞닿아 있는 부분이어서 더 인상깊게 볼 수 있었던 작품이었다.
-
- 존 오브 인터레스트 | 결코 남 일이 아닌 그들의 일상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책임자로 일하는 독일 장교 '루돌프 회스'(크리스티안 프리델)와 그의 아내 '헤트비히'(산드라 휠러). 그들은 귀여운 아들 둘, 예쁜 딸 둘과 함께 수용소 옆 관사에서 즐거운 일상을 보낸다. 주말이면 피크닉을 가고, 카누를 타며, 수영장 있는 정원을 즐기면서. 잡일은 유대인 하녀들에게 모두 맡겨둔 채로.
하지만 그들의 일상에는 균열이 생긴다. 아우슈비츠에 거대한 소각장을 들여놓은 후로 연신 흩날리는 잿가루가 회스 가족의 일상을 조금씩 방해하기 때문. 이에 더해 '최종 해결책' 시행을 앞두고 회스가 전근 명령을 받자 헤트비히는 이 일상과 관사를 떠나야 할까 두려움에 빠진다. 과연 회스와 헤트비히는 꿈이나 다름없이 행복한 그들의 삶을 지킬 수 있을까?
스크린 위에 펼쳐진 '악의 평범성'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그리고 '악의 평범성'. 세계사나 철학 같은 인문학에 관심이 있다면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봤을 이름, 책, 개념이다. 사실 '악의 평범성'은 유명세만큼 오해하기 쉽다. 이 개념은 흔히 모든 사람 마음속에 아이히만 같은 악마적인 무언가가 깃들어 있다는 성악설 비슷하게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아렌트는 모든 사람에게 악마가 있다고 설명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악이 얼마나 단순하게 탄생하는지 꼬집는다. 모든 사람은 역지사지의 능력을 바탕으로 선한 행동을 할 수 있다. 하지만 남의 입장에서 사유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악의 평범성'은 바로 그들이 악행을 저지른다고 지적하는 말이다.
당장 아이히만도 상투적인 나치의 명령과 말에 안주했을 뿐이다. 그는 유대인이 처한 현실에 대해서는 깊게 생각하지 않았고, 자기 행동이 어떻게 유대인의 대학살로 이어졌는지조차 깨닫지 못했다. 즉, 타인의 현실에 대해 놀라울 정도로 무관심한 그의 무사유가 홀로코스트를 만들어낸 셈이다.
조나단 글레이저의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악의 평범성'이 지닌 진정한 의미를 스크린 위에 펼쳐 보인다. 한 독일 가족의 평범한 일상을 통해 그들이 어떻게 사유하지 않고 자기 이익만 챙겼는지를 꼬집는다. 이 비판은 직설적이지 않아서 되려 더 날카롭다. 익숙한 비판에서 한 발 더 나아가는 결말은 심란하다. '과연 나는 저들과 다른가?'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일상을 반추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들의 일상이 메스꺼운 이유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남부러울 것 없고, 흠잡을 데 없는 회스 가족의 일상을 보여주면서 시작한다. 직장에서 수많은 부하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아버지. 하인들의 도움을 받아 하루종일 바쁘게 일하며 집과 가족을 챙기는 어머니. 아버지는 두 딸이 잠들 때까지 동화책을 읽어줄 정도로 가정적이고, 그 덕분에 4남매는 싸우지 않고 사이좋게 지낸다.
그들의 행복한 집도 감탄을 자아낸다. 큰 주택 옆에 딸린 숲과 강은 한적한 오후마다 피크닉을 즐기기에 최적이다. 집 앞 널찍한 마당에는 각이 딱 맞는 모습이 인상적인 수영장과 정원도 있다. 그래서인지 회스 가족의 일상은 <사운드 오브 뮤직> 속 트랩 대령 가족마저 부러워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아름답다. 주인공들이 노래만 부르지 않을 뿐이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회스 가족의 일상은 보기 메스껍다. 그들의 일상을 지탱하는 퍼즐 조각이 하나씩 밝혀지기 때문. 그들의 옷, 화장품, 장난감은 모두 아우슈비츠에 끌려온 유대인의 유품이다. 저택은 아우슈비츠 바로 옆에 위치한 관사이고, 헤트비히를 돕는 충실한 하녀도 유대인이며, 정원에 뿌려지는 거름은 유대인 체를 태운 잿가루다. 회스가 몰두 중인 프로젝트마저 나치의 '최종 해결책'으로 밝혀진다.
무관심을 먹고 자란 일상
그런데 이 퍼즐 조각을 더 끔찍하게 만드는 주체는 따로 있다. 바로 회스 가족의 태도다. 그들은 놀라울 정도로 무관심하다. 헤트비히는 새로 받은 코트 주머니에서 립스틱을 꺼내더니 아무런 망설임 없이 입술에 바른다. 그 주인이 바로 옆 수용소에서 어떤 일을 당하는지는 전혀 생각이 안 든다는 듯이.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첫째 아들은 무심하게 금이빨을 가지고 논다. 막내아들 '한스'는 처형 명령을 받은 유대인의 비명을 듣고도 아무렇지 않게 "다시는 그러지 마"라고 말한다. 이들 중 그 누구도 정원을 가로막은 벽 너머에서 벌어지는 일을 신경 쓰지 않는다. 왜 거대한 굴뚝에서 낮에는 연기가, 밤에는 불길이 피어오르는 지도 궁금해하지도 않는다.
회스 가족의 무관심은 음향 효과 덕분에 더욱 극대화된다. 평화로운 일상이 이어지는 와중에도 영화는 유대인들의 아우성, 독일군의 명령, 발포음을 배경에 깔아 둔다. 하지만 회스 가족은 이 소리를 전혀 듣지 않는다. 새 울음소리와 비명이 같이 나도 그들은 새소리만 듣는다. 귀가 멀지 않은 이상 그들도 소리는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너무나도 무관심한 나머지, 그들은 그 소리에 대해 고민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다소 독특한 영화의 시작과 끝도 이 맥락 안에서 이해할 수 있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제목을 보여준 후에 약 2분 정도 기묘한 음악으로 가득한 검은 화면을 보여준다. 또 엔딩 크레디트는 배경에 깔려 있던 아우성이 터져 나오는 듯한 사운드로 가득하다. 이는 관객에게 보내는 신호이자, 신호를 제대로 받았는지 확인하는 절차처럼 보인다. 회스 가족의 선택적 노이즈 캔슬링에 주목해 보라는 암시처럼 들리기 때문.
선택한 무관심
이에 더해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회스 가족이 단순히 무관심한 게 아니라, 무관심을 의도적으로 선택했다고 지적한다. 그들은 수용소 안에서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고 있다. 회스가 유대인 여성을 성노예로 쓰고, 헤트비히가 하녀를 수용소 안으로 보내서 죽일 수도 있다며 기분풀이용으로 협박하는 모습이 그 방증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자기 일상을 누리고 지키려고 한다. 아렌트의 말마따나 현실의 모순에 대해서는 철저한 무사유로 일관한다. 회스가 전근 나갈 예정이라고 아내에게 말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헤트비히는 지금 집에서의 유복한 삶을 지속하지 못할까 봐 격렬히 화낸다. 이에 회스는 가족들을 관사 남겨두고 혼자 숙소로 떠난다. 그 집 옆에서 벌어지는 일은 이번에도 고려 대상조차 되지 못한다.
다른 인물과 대조하면 회스 가족의 문제점은 더 명확해진다. 바로 헤트비히의 친정 엄마 '리나'다. 딸을 만나기 위해 여행 온 그녀. 헤트비히는 하녀들을 동원해 가장 맛있는 식사를 대접하고, 수영장과 정원에 핀 꽃을 자랑한다. 하지만 정작 리나의 시선은 다른 곳에 향한다. 그녀는 딸에게 묻는다. 정원을 막은 벽 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냐고. 헤트비히는 그 질문을 무시한 채 자기 자랑을 이어가기 바쁘다.
이 차이는 모녀의 결별로 이어진다. 아빠랑 카누를 탄 아이들이 수용소 발(發) 잿가루를 뒤집어쓰자 헤트비히는 그들을 씻기기 바쁘다. 리나는 다르다. 밤새 굴뚝을 빛내는 불길과 떨어지는 잿가루를 목격한 그녀는 전날 오후 광경을 떠올린다. 해 지는 수영장을 청소하는 유대인 하녀들과 그 뒤에서 연기를 뿜는 굴뚝을. 아침이 되자 리나는 곧장 헤트비히의 집을 떠난다. 딸과 달리 그녀는 최소한 인간적으로 사유할 줄 아니까.
뺄셈의 미학으로 완성한 영화적 논박
더 나아가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혹시 모를 변명까지도 철저히 논박해 버린다. 아이히만 같은 범죄자들은 다음 같이 변명하기도 한다. 그저 명령을 따른 직장인이었을 뿐이라고. 자기들도 또 다른 피해자라고. 하지만 <존 오브 인터레스트> 지극히 영화적인 방법으로 그들이 결코 나치의 전쟁 범죄로부터 윤리적으로 무관하거나 자유로울 수 없음을 보여준다.
'최종 해결책'을 입안한 회스는 작전에 자기 이름이 붙었다면서 기뻐한다. 그는 조직 내에서 인정받았다는 사실에 주목할 뿐, 자기 작전의 파급력에 대해서는 조금도 고민하지 않는다. 물론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사실은 내심 깨닫는다. 축하 파티가 끝난 뒤 사무실에서 퇴근할 때 극심한 구역질에 시달리기 때문. 이때 영화는 박물관이 된 현재 시점의 아우슈비츠와 잔뜩 쌓여 있는 유대인 희생자들의 의복과 신발을 비춘다.
이 몽타주는 회스가 내심 자기 작전이 얼마나 비인간적이고, 폭압적인지 마음 한편에서는 알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하지만 그는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다. 분명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걸 알지만 그는 전혀 바로잡으려 하지 않는다. 그저 계단을 다시 내려가며 마지막까지 철저히 무관심하기를 선택한다.
이렇게 서로 다른 시간대를 이어 붙인 편집은 뺄셈의 미학을 제대로 보여준다. 홀로코스트를 다룬 영화는 유대인의 피, 땀, 눈물을 직접 보여주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쉬운 길을 가지 않고도 홀로코스트의 '평범했던' 뒷사정을 보여준다. 그 어떤 작품보다도 나치의 책임을 명확히 못 박는 데도 성공했다. 전쟁 영화 중에 <덩케르크>가 있다면, 홀로코스트 영화 중에는 <존 오브 인터레스트>가 있는 셈이다.
우리의 일상은 다를까?
마지막으로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화살은 나치 부역자들이 아닌 관객에게 향한다. 아우슈비츠 박물관이 등장할 때, 영화는 직원들도 함께 보여준다. 그들은 매일 청소하고 방문객을 맞이할 준비를 한다. 그런데 그들에게서는 아무런 감흥도 느껴지지 않는다. 홀로코스트와 가장 맞닿은 곳에서 일하지만, 그들에게 홀로코스트는 그저 일상의 구성 요소 중 하나일 뿐이니까.
흥미롭게도 그들의 모습은 낯설지 않다. 영화를 본 뒤 우리가 돌아갈 일상도 마찬가지로 비극에 무감각하기 때문.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중국의 위구르족 탄압 등에서 자행된 비인간적 행위는 더 이상 놀랍지 않다. 한국군 내에서 사고가 터져도 군대는 원래 그런 곳이라며 무관심한 경우도 적지 않다. 이렇게 보면 비명을 무시하는 회스 가족과, 아우슈비츠를 청소하는 직원과, 비극을 접하고도 반응하지 않는 우리는 다를 바 없다.
그래서 극 중 사과를 놓는 소녀가 유독 인상적이다. 사실 그녀는 뜬금없는 인물이다. 다른 주인공과의 접점도 없고, 이름도 나오지 않는다. 등장마다 열화상 카메라로 보여주는 연출도 독특하다. 하지만 그녀는 뜬금없기에 중요하다. 그녀는 수용소에 끌려간 유대인들과도 아무 접점이 없다. 그 덕분에 그들이 집어갈 수 있도록 수용소 주변 곳곳에 사과를 두는 선의는 오히려 더 빛난다. 회스 가족의 무관심과 대척점에 서서.
이는 <존 오브 인터레스트>가 진정으로 당부하는 말이기도 하다. 나와 상관없다고 여겨지는 일에, 내 관심사와 이익과 직결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비인간적인 일에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지를 묻는다. 그러한 반성과 성찰이 없다면 누구든 회스 가족이 될 수 있다고 거듭 일깨워주면서. 그 결과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분명 걸작이지만, 그 미학과 완성도에 그저 마음 편히 박수 보낼 수 있는 영화는 아닌 듯하다.
Outstanding 특출남
400 페이지짜리 필설을 담고도 남은 105분
-
- 이별을 받아들이는 마지막 간이역
영화 <만 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게 있어>를 보러 가서 광고로 접한 영화 <역으로 가는 길을 알려줘>. 홍보 티저 영상 속에서는 한 아이가 왕따를 당하는 듯한 모습이 보여서 이와 관련된 이야기인가 싶었는데 이별과 성장을 다룬 굉장히 감동적인 작품이었다.
영화 <역으로 가는 길을 알려줘> 시놉시스
소중한 건 기다리는 게 아니야, 찾으러 떠나는 거야!
새로운 세상을 알려주는 루가 봄과 함께 사야카 곁을 떠났다. 사야카를 처음 겪는 이별이 낯설기만 하다. 오래 전 아들을 잃은 할아버지 후세와 함께 헤어진 이들을 찾기 위한 여행을 떠나려 한다. 사랑하는 존재들과 이별한 사람들의 이야기. 그들은 한 역에서 이별을 받아들이고 다시 새로운 삶을 향해 나아간다.
*해당 내용은 네이버영화를 참고했습니다.
이 이후로는 영화 <역으로 가는 길을 알려줘>에 대한 스포일러가 존재합니다.
아름답게 풀어낸 추억의 한 장면
영화 <역으로 가는 길을 알려줘>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을 꼽는다면 사야카와 루가 행복하게 초원을 뛰오는 장면이다. 어찌보면 무미건조할 수 있는 장면이지만 슬로우 모션과 클로즈업을 활용해서 둘 사이의 행복감이 그대로 전해질 수 있는 미장센을 선보였다. 상당히 긴 시간을 사야카와 루의 행복한 모습을 담아내는데 쓰고 있었다. 대사 없이 장면으로만 쭉 이어지는 전환들이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었을텐데 오히려 그 행복한 장면들을 계속해서 보고 싶게끔 만들었던 연출에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아마 누구나 어렸을 때 티없이 행복해하며 뛰놀았던 시절이 있기에 자연스럽게 회상을 하게되면서 그 장면을 흐믓하게 바라볼 수 있지 않았나 싶다.
공허함을 표현하다
편견일수도 있겠지만 사실 나는 어린 배우가 공허함을 표현하기에는 그 감정의 폭이 얕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사야카 역을 맡은 닛츠 치세의 연기는 정말 대단했다. 현장학습을 다녀온 사이 세상을 떠난 루를 잃은 사야카는 루와 함께 놀았던 비밀기지, 함께 기차를 보았던 기차역, 그리고 루가 있었던 동물병원을 혼자 돌아다니면서 루의 흔적을 찾고, 추억에 잠긴다. 그리고 동물병원에서 루가 죽었다는 말을 다시금 들으면서 클로즈업 된 사아캬의 눈에는 정말 한순간에 사랑하는 존재를 잃은 사람의 공허한 눈빛이 담겨있었다. 어떻게 어린 소녀가 그 공허함을 표현할 수 있었을까?
극 중에서 닛츠 치세는 크게 울지 않는다. 눈에 눈물이 차올라도 펑펑 우는 장면은 없다. 눈물을 참아내면서 사랑하는 존재를 떠나보낸 분노, 우울함, 외로움, 공허함과 같이 있었던 순간을 생각하며 스쳐지나가는 즐거움, 행복, 따뜻함이라는 감정을 눈에 오롯이 표현해낸다. 그 모습을 보면서 오히려 감정이 배가 되어 전달됐고 관객이었던 나는 펑펑 울 수밖에 없었다.
이별을 받아들이는 소녀의 이야기
영화 <역으로 가는 길을 알려줘> 초반에는 도대체 영화 이름이 왜 역으로 가는 길을 알려줘 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행복한 사야카와 루, 그리고 루를 떠나보낸 외로운 사야카의 모습만이 비쳐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 초반 이상할 정도로 사야카와 루가 열중해서 땅을 파는 장면을 길게 보여준다. 철길과 같은 곳을 열심히 파고 결국에는 이 철길이 무엇인지는 밝혀내지 못한다.
루가 죽고 나서야 비로소 이 철길이 무엇인지 밝혀진다. 바로 죽은 사람들의 영혼을 태워가는 간이역이었다. 이 곳에서 사야카는 루를 떠나보낸다. 그 사이 재즈바 할아버지와 친구를 맺고 함께 여행을 가서 각각 자신들을 떠난 루와 아들을 맘나면서 이별을 받아들일 준비를 했고, 할아버지 마저 병환을 돌아가신다. 사야카는 자신의 친구였던 루와 할아버지를 이곳에서 다시 만나고 마지막 인사를 건네면서 이별을 받아들인다. 그리소 루스라는 새로운 강아지를 만나 현실을 살아간다. 이별 후 직면하는 다양한 감정들을 고스란히 느끼며 진정으로 이별을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존재를 보내주는 그 과정을 굉장히 담담하게 잘 풀어낸 작품이었다.
영화 <역으로 가는 길을 알려줘>는 8살 소녀가 갑자기 찾아온 이별을 경험하면서 그 감정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한층 성장하는 모습을 잘 담아낸 작품이었다. 담담하게 풀어낸 이야기가 꽤 오랫동안 심금을 울렸다. 간만에 감성적으로 촉촉하게 젖을 수 있던 시간이었다.
-
- [Watcha Exclusive] 리틀 드러머 걸 : 감독판 - 관객들도 속이려는 야심찬 작품
드라마 <리틀 드러머 걸 : 감독판>의 포스터
2016년에 국내에 개봉한 <아가씨>는 4,288,750명을 동원하는 등 흥행을 비롯하여 해외에서도 꽤나 뜨거운 반응을 보여주었습니다.
당시 "아카데미"에서 "미술상"은 유력한 후보였으며, "외국어 영화상"도 후보에는 이름을 올리지는 않을까 예측들도 오갔습니다.
하지만 정작, 후보에는 이름을 올리지 못했는데 놀라운 것은 국내보다는 해외 팬들이 이에 대해서 크게 반발했다는 것이죠. (물론, 시카고와 LA 비평가에서 "외국어 영화상", 영국에서도 "최우수 외국어 영화상"을 수상했습니다.)
어찌 보면, 정점을 찍은 그의 다음 작품이 궁금했는데 놀랍게도 그의 다음 작품은 "영화"가 아니라 "드라마"였습니다.
그것도 "존 르 카레"의 원작을 가지고 왔으니 이들의 협업에 궁금했습니다.
총성과 화려한 모습과 다르게, "존 르 카레"의 작품은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모스트 원티드 맨>으로 알 수 있듯이 고요하니까요.
'과연, 어떤 작품이었는지?' - 드라마 <리틀 드러머 걸>의 감상을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드라마 <리틀 드러머 걸>의 장면
본작품은 갑작스러운 폭탄 테러로 아이를 잃은 피해자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의 앞에 서는 남자는 자신을 "마티"로 소개하며, 이번 일이 일어난 경위부터 조사하기 시작합니다.
바로, 다음으로 이 일에는 자신들이 오랫동안 쫓아다녔던 그가 있음을 알게 된 "마티"는 팀원들을 꾸리게 되는데요.
하지만 이 일에 참여하는 "찰리"만큼은 다릅니다.
그녀는 정보국에 일하는 요원도 아닌 일반인으로 "배우"로 이번 일에 참여하게 되는데....
“
"존 르 카레"를 잘 보시나요?
1. 심리를 잘 읽어야만 합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리틀 드러머 걸>은 "존 르 카레"의 원작으로 만들어진 작품입니다.
이미, 그의 이름만으로도 이 작품이 어떤 작품인지를 아는 사람들은 본 관람을 택하거나 포기할 텐데요.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모스트 원티드 맨>만 보더라도 그의 작품은 <007>의 "제임스 본드"와는 거리가 먼 작품입니다.
화려한 액션은 둘째치고, 예쁜 여성들과의 접점은 없고, "파티션"으로 내 책상을 구분하여 종이만 붙잡는 것이 그의 영화입니다.
이에 익숙지 않는 분들은 <리틀 드러머 걸>은 업무의 연장선상으로 느껴지실 겁니다.
그렇기에 <리틀 드러머 걸>은 도대체, 어떤 재미를 보는 건지 혼동도 오실 텐데 그만큼 이 작품에 특화된 것이 있습니다.
“
눈알 굴러가는 소리 다 들린다.
바로, 심리에 대한 부분입니다.
해당 작품은 각 캐릭터들을 얼굴들을 "클로즈업"을 하여 감정을 보다 많이 보여주는데 초점을 맞춥니다.
"정보"의 격차로 이를 보는 시청자들의 재미도 격차가 있듯이 이런 장르는 얼마나 많은 정보를 얻어내느냐에 흥미도 달라집니다.
그렇기에 <리틀 드러머 걸>은 각 캐릭터들의 심리를 반영한듯한 색깔들을 보여줍니다.
예를 들면, "빨강"이 돌고 있는 피를 뜻하는 것처럼 활기를 띠는 감정을 의미한다면 "초록"은 썩어버린 물처럼 멈춰진 감정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주황과 노랑은 "신호등"에서 빨강과 초록 사이에 있는 것처럼 "중립"에 서있는 "찰리"를 대변하는 것처럼 보이더군요.
이처럼 각 주인공들이 어떤 색의 옷을 입었는지를 살펴보면, 이들의 심리를 읽어내는데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드라마 <리틀 드러머 걸>의 장면
2. 작품의 벽을 깨지 말아 주세요.
하지만 본 작품은 가장 중요한 사실은 마지막 화에서 보여줍니다.
해당 작품을 살펴보면, 쓰이는 갈등이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분쟁임을 넌지시 밝혀옵니다.
그렇다면, 이에 대한 궁금증이 생깁니다. - "왜, 작품은 처음부터 이를 정확하게 소개해 주지 않았는지?"에 대해서 말이죠.
이런 이유에는 관객들의 편향된 해석을 방지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를 소개한다면, 작품 외적의 정보로 해당 작품이 전달하려는 메시지가 달리 왜곡되거나 해석되니 변질될 테니까요.
그러니 해당 작품은 과감한 생략을 하여 극의 신비함까지 챙기는 똑똑한 전개를 보여주기까지 하는데 성공합니다.
“
다양한 해석도 좋지만, 과대 해석은 안돼!
무엇보다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 "찰리"는 이를 보는 시청자들과 동일하게 가져오는데요.
극에서 해당 배역에 충실하려는 인물인데, 이는 이를 보고 있는 시청자들과 크게 다를 것이 없습니다.
문제는 이를 겪어가면서 "왜, 싸우는가?"에 대한 동기와 이유를 알면서 점차, 감정에 노출되는 인물로 그려지는데요.
이를 통해서, 관객들도 "찰리"에 점점 이입되어 이야기에 몰입되고 작품 외적의 정보는 전혀 개입되지 않으니 아무리 어려운 이야기라고 한들 쉽게 느껴질 겁니다.
이는 이 작품이 가면 갈수록 몸이 풀린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고요.
드라마 <리틀 드러머 걸>의 장면
3. 알고서 입장에 서실래요?
그런 점에서 마지막 장면에서 "신념도 없이 역할에만 충실했다"라는 말은 "찰리"뿐만 아니라 "찰리"에 빙의된 시청자들에게 비수로 꽂히고 맙니다.
이런 이유에는 최근 특정 누군가를 비난하는 우리들의 모습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최근 출소한 "조두순"만 보더라도, 알 수 있을 겁니다.
조두순 당사자뿐만 아니라 이를 이용하여 자신의 욕심을 채우거나 그를 보호하는 경찰이나 이를 재판한 당시 판사, 그리고 그 일대를 살아가는 동네 사람들에게 피해가 간다는 것입니다.
마치, 하나의 시도로 뒤따라오는 무수한 펭귄들처럼 이에 편승하여 너도 나도 이를 따라 하는 요즘의 트렌드를 역사적 갈등으로 빗대어 말합니다.
“
혹시, 나도 너도?
재밌는 것은 해당 작품은 지난 5화 동안 단, 한 번의 총성도 들려주지 않다가 마지막 6화 그것도 마지막 부분에 다다라서야 총소리를 들려줍니다.
그러면서, 하나둘씩 쓰러지는 캐릭터들 사이로 "누가 옳고 그른지?"에 대한 기준을 더 잡지를 못하게 만듭니다.
<리틀 드러머 걸>의 목적은 단순히, "테러리스트"를 잡아 "선과 악"을 가려내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이들이 어떤 상황에 직면하고 있는지를 보여줄 뿐인데 그 누구도 이번 일의 원인을 찾으려 하지 않습니다.
원인이 있어서 오늘날의 결과가 있는 것인데, 애써 외면하려는 그 시작에는 무엇이 있는 건지 작품 외적으로 궁금해지네요.
* 본 콘텐츠는 블로거 파천황 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원 게시글은 아래 출처 링크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 탑건이 해군? 당신이 모를 수 있는 5가지 사실들ㅣ탑건:매버릭ㅣ탑건2ㅣ탑건 매버릭ㅣ톰 크루즈ㅣ
'탑건2'는 2019년 7월 12일 개봉 예정이었으나
톰 크루즈가 직접 전투기를 몰기 위해서
촬영까지 중단하고 2020년으로 개봉을 연기했다고 합니다영화 역사상 최초로
배우가 직접 전투기를 몰게 되는데...
진짜 이 정도면 이 형은 기네스북은 물론이고
인간문화재에도 등재되어야 할 수준지금의 톰 크루즈를 있게 한 그 영화가
34년 만에 속편 "탑건:매버릭"으로 돌아옵니다
톰 크루즈가 34년 동안 최고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기에 가능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제작진 및 출연진
감독: 조셉 코신스키
제작: 제리 브룩하이머, 데이빗 앨리슨, 톰 크루즈, 데이나 골드버그, 돈 그레인저
각본: 크리스토퍼 맥쿼리, 피터 크레이그, 저스틴 마크스, 에릭 워렌 싱어
출연: 톰 크루즈, 마일스 텔러 외
장르: 군사, 액션, 드라마
제작사: 제리 브룩하이머 필름, 스카이댄스 미디어, TC 프로덕션, 텐센트 픽처스
배급사: 파라마운트 픽처스
개봉일: 2020년 6월
촬영 기간: 2018년 5월 30일 ~ 2019년 4월 15일
음악: 해롤드 팔터마이어, 한스 짐머#탑건2 #탑건매버릭 #탑건예고편
-
-
- 넷플릭스 <오징어 게임 시즌2> 공개일 발표
진짜 게임이 시작된다. 《오징어 게임》 시즌2, 12월 26일 공개 그리고 마지막 시즌 2025년 공개 오직 넷플릭스에서 황동혁 감독의 편지 : "진짜 게임이 시작됩니다. 시즌 1으로 큰 사랑을 받고 믿기지 않았던 많은 일들이 벌어진 지도 벌써 3년이 다 되어 갑니다. 그리고 지금 여러분께 시즌 2의 공개 일정과 시즌 3 제작 소식까지 알리는 편지를 쓸 수 있게 되어 너무나 기쁘고 설렙니다. 시즌 2 첫 촬영 날, '와, 내가 다시 오징어 게임의 세계로 들어와 이걸 찍고 있다니' 하는 생각에 다소 비현실적인 느낌이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3년 만에 다시 만나는 오징어 게임의 세계가 여러분께는 어떤 느낌일지 궁금하네요. 시즌 1 엔딩에서 복수를 예고했던 성기훈은 다시 돌아와 게임에 참가합니다. 과연 그는 자신의 말대로 복수에 성공할 수 있을까요? 그를 맞이하는 프론트맨 역시 이번에도 만만치 않을 듯 합니다. 이들이 보여줄 치열한 대결은 내년 공개될 시즌 3, 그 대망의 피날레까지 이어질 예정입니다. 새로운 오징어 게임의 여정을 구상하며 싹 틔웠던 아이디어의 씨앗을 시즌 3까지 이어지는 이야기를 통해 펼치고 비로소 완결할 수 있어 진심으로 기쁘게 생각합니다. 멋진 모습으로 여러분을 만나기 위해 남은 작업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부디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려 주시기를 바랍니다. 항상 감사합니다. 곧 만나요 여러분" ‘오징어 게임'의 제작자, 작가, 감독 황동혁
-
- 영화 <로스트 시티> 대환장 어드벤처 예고편
자고 일어났더니 나도 모르는 곳의 보물을 찾는 열쇠가 나?? ? 리치 빌런이라는 페어팩스는 또 누구? ? 정말 대환장 그 자체! 난리났네~난리났어! 보물을 향한 이 어드벤처의 끝이 궁금하다면! 지금 바로 예매하러 달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