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onymoushilarious2021-09-01 16:31:18
스스로를 의심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영화 프리가이 리뷰
현실 세계에서 가장 인기있는 게임인 Free city의 유저들에게 새로이 강자로 자리매김한 플레이어가 있다. 그의 ID는 블루 셔츠 가이. 그는 과도한 폭력성을 조장한다는 이유로 많은 이들에게 중2병 게임으로 치부되던 프리시티, 그리고 몸은 어른이지만 정신이 아직 성장하지 못한 어른이들에게 듣도보도 못한 새로운 캐릭터로 각인되어, 게임 규칙과는 달리, 선행으로 유명세를 타게 된다. 게임 유저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게 된 그는 게임 유저들 못지않게, 게임회사 직원들도 그의 정체에 대해 추적하는데, 알 길이 없다. 당연하다. 이 남자는 게임 유저가 아니기 때문이다. 프리시티의 배경 캐릭터 NPC이다.
게임 제작자들이 만들어준 세상에서 그들이 설정해놓은 행동 패턴으로 매일 쳇바퀴같은 삶을 살아가는데도 참 해맑게 살고 있는 이 남자, Guy. 이 남자의 정해진 루틴과도 같은 삶이 한 여자를 만나고 나서 균열이 생기게 된다. 그가 살고 있는 세상이 하나의 게임 세상임을 자각하고, 그가 프로그래밍된 언어와는 달리, 그의 행동에 자유 의지가 생겨나며, 게임 속 플레이어들과 대등하게 게임을 펼치면서 살아간다. 게임 제작자들도 예상하지 못한, 이 말도 안되는 상황 속에서 그에게 닥친 위기들을 헤쳐나갈 수 있을까?
1.사람이 아닌데, 사람 같은, 수많은 군종 속의 한 사람,guy.
자신의 행동과 말이 인간이 설정한 기계어에 의해 구성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로 가이는 자신의 행동의 진정성을 스스로 의심하게 된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우리의 삶은 가끔 누군가의 삶의 들러리가 될 때도 있고, 자신의 의지대로 결과가 녹록치 않게 나오는 경우도 있다. 그럴 때에 우리는 자기 자신의 쓸모없음에 필요 이상으로 절망하고, 자신의 한심한 모습에 끊임없이 파고들곤 한다. 그런 게임 캐릭터의 모습을 통해 자기 자신이 항상 주인공이 될 수 없음에 너무 절망하는 자존감이 현저히 낮은 현대인들을 떠올리게 되었다. 일개 npc를 통해 자존감이 낮은 사람들을 투영하게 되다니, 정말 기묘한 영화라고 생각했다.
가이가 하는 행동에는 자유의지가 있어서는 안된다. 인간이 창조해낸 캐릭터이고, 게임 세상에서 플레이어의 행동에 상관없이 특정 행동만 하도록 프로그래밍되어 있기 때문에 그의 인생은 결국 인간 손아귀에 의해 놀아날 뿐이다. 그에게 자유의지가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면, 짜임새있게 설계된 세상 속에서 그냥 생각없이 살아가도 행복했을 삶인데, 자유의지가 생기면, 자신의 의지와 현실 간의 간극을 이겨내야 하는 과제에 항상 직면해야 하기 때문에 그가 자신의 삶이 자신의 의지로 행해질 수 없음을 깨달았을 때, 느끼는 방황을 보면서 우리네 삶이 우리 의도대로 흘러가지 못해 좌절하는 무수한 청춘들이 눈에 그려졌다. 그렇다. 가이, 영어로 하면, Guy, 또다른 의로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기도 한 이 게임 캐릭터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속에서 찾을 수 없는 인물이지만 현실 속의 우리들을 반영하고 있는 캐릭터이기도 한 것이다.
2. 절망 속을 살고 있다면, 현재에 집중할 것.
난 여기 앉아서 내 절친이
힘든 시간을 이겨내게 돕고 있어
그게 진짜가 아니면 뭐가 진짜겠어?
하지만 자신의 현실이 가짜라는 사실에 충격받은 가이는 친구를 찾아가 조언을 구한다. 그 때, 친구가 한 말이그에게 경종을 울렸는데, 설사 자신의 현실이 가짜라는 사실이 맞을지언정, 자신이 지금 맞닥뜨린, 현재 상황까지 부정해버리면, 진짜 현실 세계는 그 어디에도 없음을 그에게 가르쳐 주었기 때문이다.
가이가 상황적인 요소이든, 내면적인 요소이든 절망적인 감정에 허우적대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이라면, 가이 친구의 대사는 당신이 만들어낸 성과가 허무하게도 의미없는 일이었음이 확실하게 증명되었을지라도 아직 우리에게는 현재의 삶이 남아있음을 잊지 않아야 함을 일깨워주었다. 그의 대사를 통해 자존감이 낮은 수많은 현실 속 Guy들은 너무 과거에 매여있지도 말고, 아직 다가오지도 않은, 미래에 대한 환상, 두려움에 대해 신경쓰지 말기를, 더불어, 당신에게 닥친 현실 속 퀘스트를 하나하나 뚫어가야 함을 깨닫게 될 수 있었다.
현실 속 우리들은 생각보다 겁이 많다. 나이가 하나하나 들어갈수록 도전하기를 두려워하고, 과거의 패기넘치던 모습에서 점점 남들의 말에 위축되기도 하는 내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도 있다. 끊임없이 남들과 비교하게 될 때,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보자.
"닥치고, 지금 해야하는 일이 뭐지? 나는 지금 누굴 신경써야 하지?"
그러면, 자신이 처한 현실이 가짜처럼 느껴질만큼 암울한 현실 속에서도 당신 옆에 있을 사람들은 계속 존재해 줄 것이고, 당신이 지금 당장 해내야 하는 일이 무엇인지 당신도 알고 있을 것이다. 어차피 나 하나 챙기면서 살기도 버거운 이 세상에서 우리 그냥 오지랖 넓은 소리들 다 개무시하고, 그냥 우리만의 속도로, 내 사람들이라도 철저히 챙겨가면서 그리고 조금만 덜 절망하면서 살아가자. 당신이 현재를 충실히 살아가는한 당신은 이미 주인공이니까.
3.총평
여태까지 나름 심각한 영화리뷰하는 것처럼 글을 썼지만 사실 이 영화는 오락 영화이다. 굉장히 오락 장르임을 대놓고 드러내는 아주 솔직한 영화이다. 그리고 조금 유치한 로맨스 영화이기도 하다(살짝 스포를 하자면, 이 영화에는 표면적인 로맨스와 영화를 끝까지 봐야만 알 수 있는 로맨스가 있다.) 하지만 이 영화가 대놓고 오락 영화라고 해서 작품성이 없는 영화라고 평하고 싶지는 않다. 비록 게임 속 캐릭터이긴 하지만 인간이라면 한 번 정도는 느껴봤을 법한 혼란을 이겨내고, 성장하는 가이의 모습을 통해 우리네의 모습을 되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될 만한 영화라고 본다. 또한, 게임을 이용하는 사람 그리고 게임을 만드는 사람 모두의 입장에서 게임 산업의 이면에 대해 고민해 볼 수 있는 흥미로운 장을 열어줄 영화가 탄생했다는 것에 의의를 두고 싶다. 오락성과 작품성 모두 평균 이상인 영화라고 평가한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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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2021년 9월 신작 공개예정
[WEEKEND CHOICE MOVIE] #넷플릭스#넷플릭스신작 #NETFLIX
#넷플릭스9월 #넷플릭스공개예정 #오징어게임 #나이트북 #밤의이야기꾼 #내부자들 #조선명탐정 #사라진놉의딸 #굿바이싱글
영화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https://blog.naver.com/rainbbox
@Weekend Choice Mov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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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 캡틴 / 레드 헐크와의 대결 / 캡틴 아메리카: 브레이브 뉴 월드 / 어벤져스 빌드 업
영화직관하는남자 홍큐의 "캡틴 아메리카: 브레이브 뉴 월드" 후기입니다.
*꼭 보아야 할 쿠키영상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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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당신은 믿지 않겠지만> 티저 예고편
서울에서 사업으로 잘나간다는 형 토오루(오다기리 죠)의 말만 믿고
아들을 데리고 무작정 한국으로 날아온 츠요시(이케마츠 소스케)는
동업자에게 사기를 당한 형 때문에 하루아침에 낯선 서울 길바닥에 나앉을 위기에 처한다.
그러자 토오루는 기발한 사업 아이템이 있다며 좌절한 츠요시를 꼬셔 강릉으로 향하고,
기차 안에서 우연히 사연이 가득해 보이는 삼 남매
솔(최희서), 봄(김예은), 정우(김민재)를 만나 동행하게 되는데…
불운만 가득했던 인생에 벌어진 우연 같은 운명!
기적이 간절할 때, 우리는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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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데이 시프트> 공식 예고편
《데이 시프트》, 넷플릭스에서 곧 공개 예정. 제이미 폭스가 영리한 딸을 부족함 없이 키우고자 열심히 일하는 아빠로 등장한다. 샌 페르난도 밸리에서 수영장 청소부로 일하는 이 남자. 성실하고 평범한 노동자처럼 보이지만 진짜 돈벌이로 하는 일은 따로 있었으니. ‘세계 뱀파이어 사냥꾼 연합’의 일원으로 뱀파이어를 사냥하고 죽이는 것이 바로 그의 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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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나리
미나리
미국 영화계는 왜 '미나리'에 깊은 관심을 보이는 걸까. '미나리'는 이미 수십 개의 영화상을 받았고, 평단의 찬사를 받고 있다. '미나리 현상'은 미국 영화계는 물론, 한국에서 미국의 한인 이민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을 잘 드러낸다. 말하자면, 낯익은 서사를 신선한 영화언어로 만들었기 때문에 미국 영화계가 주목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가 들어 있는 영화는 80년대를 배경으로 한다. 젊은 부부는 병아리 감별사 자격증을 갖고 미국으로 이민 온다. 캘리포니아에서 살던 가족은 중남부에 있는 아칸소주로 이주한다. 남편 제이콥이 이끈 땅은 비옥하고, 땅값이 싼 곳이어서 넓은 땅을 매입할 수 있었다. 아내 모니카는 이주가 달갑지 않지만, 아들 데이빗의 건강을 위해 동의한다.
캘리포니아의 대도시에서 병아리 감별사로 일하던 두 사람은 같은 일을 하면서도 제이콥이 농장을 일굴 수 있는 아칸소로 이주하는데, 가까운 마을을 가려해도 자동차로 한 시간이 걸리는 외진 곳이다. 아칸소주는 중남부에서 약간 동쪽에 있는 지역으로 바로 옆에 오클라호마주가 있다. 신기하게도, 아칸소주가 있는 경계로 남북으로 길게 왼쪽은 사막지역이고, 오른쪽은 비옥한 땅이 있는 지역이다.
부부에게는 딸 앤(지영)이 있고, 아들 데이빗이 있다. 두 아이는 미국에서 태어났고, 영어를 모국어로 하지만, 엄마, 아빠와 대화할 때는 한국어와 영어를 함께 사용하고, 한국말을 비교적 잘 알아듣는다. 남매끼리 대화할 때는 주로 영어로 대화한다. 이민 2세는 자연스럽게 미국 사회에 적응하는데, 그 첫 번째 현상이 언어의 사용이다.
부부가 함께 일하기 때문에 아이를 보살펴 줄 사람을 찾을 수 없자, 부부는 한국에 계신 모니카의 어머니를 초청한다. 한국에서 할머니가 도착하고, 할머니와 함께 도착한 짐에는 한국에서만 먹을 수 있었던 음식 재료들이 바리바리 들어 있다. 고향을 떠난 것은 젊은 부부 스스로의 선택이었으나, 이 시기 한국 상황은 전두환 군부독재가 지배하던 독재국가였고, 민주화 투쟁의 불길이 서서히 일어나고 있었다.
젊은 부부의 이민이 이런 한국 정치상황과 직접 관련은 없다고 생각하지만, 한편으로 개인은 환경의 지배를 받는 동물의 보편적 속성을 가졌다는 점에서, 당시 한국의 숨막히는 독재 상황이 이들의 이민에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할 수 있다.
네 식구의 가정에 할머니 - 한국 할머니 - 의 등장은 잔잔한 소용돌이를 일으킨다. 데이빗은 외할머니를 낯설어 하고 '할머니 냄새'가 난다고 말한다. 할머니에게서 나는 냄새는 '한국' 냄새이며, 미국에서 태어난 데이빗은 한번도 가 본 적 없는 '조국'인 '한국'의 낯선 냄새이기도 하다.
하지만 할머니는 손녀와 손자에게 스스럼 없는 '한국 할머니'로 말하고 행동한다. 아이들은 저희들끼리 영어로 말하고, 할머니의 말은 알아 듣지만 한국어로 답하지 않는다. 아이들은 할머니를 불편하게 여기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할머니의 따뜻한 마음과 사랑을 느끼기 시작한다.
할머니는 데이빗과 함께 집 근처를 산책하다 작은 개울을 발견한다. 그리고 한국에서 가져온 미나리 씨를 그 개울 옆에 뿌린다. 할머니는 미나리가 어디에서든 잘 자라는 식물이라고 말한다.
제이콥이 아칸소주로 이사한 것은 농장을 꾸리기 위한 꿈이 있기 때문이다. 제이콥은 한국에서도 시골에서 태어나 어려서 부모가 농사 짓는 모습을 보며 자랐던 것이 부부의 대화에서 아주 잠깐 드러난다. 반면 모니카는 서울 또는 대도시에서 태어나 미국에 이민와서도 캘리포니아에 살았던 것을 좋아했고, 아칸소의 시골로 이주한 것이 달갑지 않은 상태였다. 모니카가 아칸소로 이주한 것에 동의한 이유는 데이빗이 갖고 있는 선천성 심장병에 자연 환경이 도움이 될 거라는 막연한 믿음 때문이었다.
제이콥은 낯선 곳에서 농사를 지으려 준비하면서 이웃들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데, 그는 미국인에 대한 불신을 갖고 있다. 그 선입견은 이방인이 갖는 공통의 심리이기도 하다. 낯선 곳, 낯선 사람을 만나게 되면 우선 경계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 태도는 자기와 가족을 지키려는 자연스러운 심리 상태이며, 생존을 위한 기본 심리이기도 하다.
제이콥은 농사를 짓기 위한 우물을 파야 하는데, 200달러를 달라는 업자의 요구를 거절하고 자기가 직접 우물을 판다. 중고 농기계를 구입하는 것도 마을 주민에게 싼 값으로 사는데, 그렇게 우연히 폴을 만난다. 폴은 백인이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스테레오 타입의 백인은 아니다. 그 역시 시골 촌놈이며,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인물이고, 아마도 혼자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며, 이상한 주문과 주술을 하는, 조금 이상한 사람처럼 보이는 인물이다.
하지만 제이콥은 폴에게 크고 작은 도움을 받는다. 폴 역시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기꺼이 제이콥을 돕는다. 폴은 일요일이면 십자가를 메고 도로를 걷는 고행을 하는데, 폴의 인생도 만만치 않다는 걸 보여주는 장면이다. 어쩌면 폴은 한국전쟁에 참전한 이후 PTSD로 고통받는 사람인지 모른다. 폴이 제이콥에게 친절한 것도 우연이지만 제이콥이 한국사람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물론, 폴은 외로운 사람이고, 누구든 가까이 지낼 사람이 필요했던 것일 수도 있다.
우여곡절을 겪으며 농사를 짓던 제이콥은 판매를 할 만큼의 농산물을 수확하고, 판로를 개척할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갑자기 할머니가 뇌졸증이 발병하면서 병원에 입원하고 모니카는 미래가 확실하지 않은 농장, 어머니의 발병으로 인한 간병과 경제적 문제, 아들 데이빗의 심장병 등 자신을 짓누르는 삶의 무게로 힘겨워한다.
모니카는 이웃에 사는 폴을 초대해 식사하면서 뇌졸증으로 쓰러진 어머니에게서 귀신을 쫓아내는 퇴마 의식을 치른다. 한국식으로 보면 무당을 불러 굿을 하는 것인데, 모니카 역시 이런 상황이 좋은 건 아니지만 답답한 마음을 풀기 위한 자기 위로라고 본다. 제이콥은 모니카가 주도하는 이런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고, 할머니는 딸과 사위, 손자들에게 짐이 되는 자신이 원망스럽기만 하다.
제이콥과 모니카는 데이빗을 데리고 도시의 병원으로 간다. 캘리포니아에 있을 때, 선천성 심장병 진단을 받았고, 숨차게 뛰는 것도 위험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터라, 시골로 이주한 뒤에도 데이빗이 뛰어다니지 못하도록 단속하고 있었다. 데이빗을 진단한 의사는 심장이 많이 좋아졌다고, 운이 좋은 경우라고 말한다.
시내 나온 김에 제이콥은 한국인이 운영하는 마트에 들러 자기가 재배한 채소를 납품할 수 있는지 상담하고 긍정적인 답을 얻는다. 제이콥은 아칸소 뿐 아니라 가까운 오클라호마에도 채소를 납품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갖는다.
가족이 모두 외출한 사이, 할머니는 혼자 쓰레기를 태운다. 몸이 자유롭지 않지만, 어떻게든 도움이 되려고 애쓰는 할머니의 모습이 안타깝다. 그러다 쓰레기에서 떨어진 불이 농작물 보관 창고에 옮겨 붙으면서 가족들이 도착할 때쯤 창고는 불길에 휩싸이고, 모두들 망연자실한다.
할머니는 자기의 잘못으로 제이콥의 농사를 망쳐서 절망하고 집을 떠난다. 이때 데이빗이 달려가 할머니를 가로 막고, 가족은 다시 트레일러로 돌아와 쓰러져 잠에 든다. 할머니는 죄책감으로 괴로워하지만, 사실 채소 저장소는 다시 지으면 되고, 채소는 계속 자라는 것이니 그것이 죽을 만큼 큰 절망은 아닐 것이다. 그보다 다행인 것은 데이빗의 심장이 거의 정상에 가깝게 좋아졌다는 것이고, 제이콥이 시내의 마트와 납품 계약을 맺었다는 사실, 그리고 한국에서 이민오는 사람들이 해마다 늘어나고 있어 한국 채소의 요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날 것이라는 희망이다.
채소 저장고의 화재는 제이콥 가족에게 한순간 절망스러운 사건이었지만, 오히려 그로 인해 제이콥과 모니카가 화해하고, 서로를 더 잘 이해하며, 새로운 마음으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분위기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제이콥은 데이빗과 함께 할머니가 심어 놓은 미나리밭을 찾아간다. 싱싱한 미나리를 뜯으며, 어디서나 잘 자라는 미나리처럼, 낯설고 물선 미국에서 힘겹지만 조금씩 뿌리 내리는 한국인 이민자의 삶이 희망적이라는 메시지를 보이며 영화는 끝난다.
영화의 시간과 정서는 1980년대를 나타낸다. 우리는 2020년에 이 영화를 보면서, 마치 한국의 1970년대를 떠올리는 기시감을 갖는다. 따뜻하고 살가운 할머니의 모습과 무한한 애정, 고생하면서 가족을 먹여살리고 가정을 지키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모습은 가난했던 우리 부모 세대의 모습이며, 미국의 초기 이민자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이 영화가 미국의 관객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그들 대부분이 이민자들이기 때문이며, 이민자들이 갖는 보편적 감성을 영화가 매우 잘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조국을 떠날 때의 낯설고 두려운 심정, 낯선 땅에서 먹고 살려고 발버둥을 쳐야 했던 자신들의 과거가 이 영화에 과정 없이 그려지고 있는 것이 반갑고, 무엇보다 과장하지 않고, 감상적이지 않으면서도 담담한 영화 언어로 이민자의 삶을 담아내고 있는 것이 장점이다.
자연이 드러내는 풍경, 바람소리, 물소리, 빗소리, 풀잎이 스치는 소리, 여기에 잔잔하게 흐르는 배경음악까지, 영화는 미국의 농촌 풍경을 낯설지 않게 보여준다. 사람 사는 곳이면 어디나 비슷하다는 것, 초보 이민자가 만나는 이웃들 역시 사람 사는 곳이면 어디에나 대부분의 사람은 친절하고, 다정하다는 걸 보여준다. 영화에 등장하는 제이콥과 모니카의 이웃들이 평범하고 선량한 사람이라는 건 실제로도 그렇겠지만, 영화에 필요 이상의 감정을 넣지 않으려는 감독의 의도도 있을 것이다. 누군가 나쁜 인물이 등장하면 그 인물과의 갈등으로 촉발하는 시선이 분산되기 때문이다.
영화는 약간의 희망을 보이면서 끝난다. 하지만 할머니는 뇌졸증으로 쓰러졌고, 제이콥이 하는 농사는 항상 수익이 난다고 보장하기 어렵다. 아칸소만 해도 한여름의 태풍이 엄청나서 태풍 피해를 입을 확률이 크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영화는 결말을 말하지 않는다. 이 가족의 삶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는 것만 확실하다. 사람은 힘들게든, 고통스럽게든 그렇게 한발 한발 땅을 디디며 살아갈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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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디에 있느냐’가 아닌 ‘어디를 택했느냐‘
아일랜드에서 태어났으나 운 좋게 브루클린으로 홀로 이주하게 된 에일리스의 이야기는 겉보기에 특별할 것 없는 이민자의 성장 서사다. 이방인으로서 느끼는 고독과 외로움, 그리움 속에서 미화되는 아일랜드의 풍경.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 집일까 새롭게 뿌리내리려 애쓴 곳이 진정한 집일까? 벗어나고 싶었으나 막상 떠나오니 그리워진 아일랜드와 새로운 땅 브루클린 사이에서의 고민은 두 남자와의 관계에서 갈등하는 에일리스로 그려지는데, 그녀는 아일랜드에서 벗어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해주는 (듯한) 토니, 곧 브루클린에 다시 돌아가며 영화는 막을 내린다.
이민자의 정체성 혼란과 ‘집’에 대한 고찰을 따뜻하게 그려냈다고 평하기 전에 두 가지 의문이 떠오른다. 첫째, 브루클린에서 혼자 성장했다는 이유만으로 그곳이 에일리스의 진정한 집이라 단정할 수 있을까? 둘째, 에일리스는 과연 한번이라도 온전히 ‘자기 자신’이었던 적이 있었을까? 자신이 속했던 환경과 맥락에서 완전히 자유로웠던 적이 있는가? 반대로, 규정되는 정체성에서 자유로워야만 비로소 ‘자기 자신’이라 말할 수 있는 걸까.
브루클린에서 만난 이탈리아 남자, 토니가 에일리스 그 자체를 사랑했다고 보기 어렵다. (각종 조건과 상황에서 자유로운 사랑만을 진정한 사랑이라 보는 것에 대한 반박은 논외로) 무의미한 가정이지만, 아마 아일랜드에서 둘이 만났다면 사랑은 차치하고 친구가 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에일리스에게 토니는 능동적으로 택한 사랑의 대상이라기보다 타지에서 너무 외로웠던 나머지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사람에 가까워보인다. 무엇보다 그녀는 지루한 아일랜드를 벗어나기 위해 대서양을 가로질러 왔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아일랜드인이라는 정체성은 그녀에게 더욱 선명해졌다. 아일랜드에선 똑똑하고 예쁜 언니의 그늘에 가려졌다면 브루클린에선 어디를 가도 무뚝뚝하나 심성은 착한 ‘아이리시’ 여자였다. 애초에 토니가 그녀에게 관심을 보였던 이유도 그녀가 ‘아일랜드’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차라리 아일랜드에 돌아가 만난 짐이 에일리스에게 더 어울리지 않나 생각했다. 언니의 죽음과 미지의 땅 미국에서 돌아왔다는 이유만으로 갑자기 주목을 받는 것 또한 썩 유쾌하진 않았으나 최소한 짐 앞에서의 에일리스는 더 이상 ‘아일랜드’ 여자로 보이진 않았으니까.
결국 에일리스는 아일랜드에서뿐 아니라 브루클린에서도 주어진 환경과 맥락 속에서 자유로웠던 적이 없다. 그렇기에 영화에서처럼 브루클린이 에일리스의 진정한 고향이라 결론 짓기도 애매하다. 영화는 브루클린이 에일리스의 삶에서 ‘정답’이자 일련의 사건들을 끝으로 에일리스가 골라낸 최종적인 해답인 마냥 결말을 지으나 사실 그 어느 곳도 그녀에게 정답이 되어줄 수 없다. 다시 말해 이주민에게 ‘진정한 집’이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집’이라 선택할 수 있는 무수한 가능성들 사이에서 고른 곳이 그 순간 나의 ‘집’이 될 뿐, 있지도 않은 정답을 고르기 위해 끙끙댈 필요는 없다.
곧 에일리스는 아일랜드와 달리 브루클린에서 더 자유로웠기 때문에 브루클린으로 돌아간 게 아니다. 오히려 브루클린을 선택함으로써 자신을 규정하는 각종 정체성과 맥락으로부터 진정 자유로워졌다. 에일리스의 주체적인 선택 이후로 타인이 규정하는 그녀의 정체성은 더 이상 유의미하지 않다. 고로 영화 <브루클린>의 핵심을 진정한 집의 의미가 아닌 에일리스 개인의 ‘선택’으로 해석하고자 한다. 에일리스가 ‘어디에 있느냐’는 부차적인 문제일 뿐, ‘어디를 택했느냐’가 그녀를 더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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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침질과 미봉책 사이
이 글은 영화 [외계+인]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선구자의 길은 언제나 멀고도 험하다.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두려움과 알 수 없는 미래, 혹은 결과에 대한 책임도 함께 짊어진 채 주위를 아무리 둘러봐도 아무도 없는 그 길을 담담히 걸어야만 한다.
사람들은 때로는 무모하다고 하고 또는 하던 것이나 제대로 하라는 말로 손쉽게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기도 한다. 다 너를 위한 말이라는 쓸데없는 포장지를 잔뜩 써서.
그러나 용기란 것은 언제나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에도 불구하고라고 했다. 이미 수많은 히트작으로 입지가 굳건한 최동훈 감독은 신작 [외계+인]으로 자신의 용기를 시험해 보기로 했다.
한국에서는 본격적으로 시도된 적이 없는 시공간의 크로스 오버 속에서 펼쳐지는 이야기가 낯설기는 하지만. 묘하게 끌리는 구석이 있는 이번 영화로, 감독은 다시 한번 자신이 낸 용기의 크기만큼이나 어깨 위에 신뢰를 얹을 수 있을지 주목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게 되네...;한국 CG,몰라줘서 미안하다
사진출처:다음 영화
CG라는 산은 한국 영화에 고질병처럼 등장하는 신파만큼이나 넘기 어려운 숙제 중 하나였다. 게다가 “기술의 발전”을 작품보다 앞세워 마케팅했던 많은 선배 영화들의 끝은, 고된 CG 작업 후 꺼진 컴퓨터처럼 짠하고 고된 채로 쓸쓸히 사라지곤 했다.
한낱 부속품이 주인인 것처럼 행세하고서도 제대로 된 책임을 지지 않았던 전례들 덕에. 한국 영화 속 존재하는 컴퓨터 그래픽들이 저평가 받은 것은 사실이었다. 노력한 만큼의 성과도 인정받지 못하고 왜 마블처럼 스토리도, 그래픽도 제대로 만들지 못하냐는 두 배의 잔소리만 덩그러니 숙제로 남은 채로.
그러나 이번 작품은 좀 다르다.
대도시 한복판에서 우주선이 건물을 부수다 땅에 처박혀 아스팔트를 긁다 못해 까뒤집는 장면들은 이미 다른 영화들을 통해 눈에 익을 만큼 봐 왔건만. 현재 내가 보고 있는 장면들이 소위 말하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가 아닌 한국 영화 속 한 장면이라는 사실이 만나는 그 순간에. 가슴이 마구 뛰는 경험을 하게 된다.
와 이게 되는구나.라는 말이 절로 새어 나올 정도로 정교하고 “티 나지”않는 장면들이 꽤 많다. 우리가 그토록 원하는 마블”처럼”까지는 아니더라도. 중요한 장면들에서는 예전 영화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 부분만 톡 튀어 보이는 일은 거의 없다.
덕분에 고려 시대와 현재를 오고 가는 혼잡한 설정 속에서도, CG로 인해 생기는 위화감이나 피로감은 그다지 크지 않다. 충분히 다듬어진 장면들을 보며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날이 왔음에 다시 한번 미소가 지어진다.
마블의 자수는 튼튼하다;시침질인가 미봉책인가
사진출처:다음 영화
애초에 2부로 나눠 개봉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이 영화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전반부가 뿌리는 떡밥과 떡밥 회수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영화에 대한 자신만의 분석을 하고. 그 분석을 토대로 답안지가 공개되었을 때 확인하는 재미 또한 모든 것이 결정되는 후속편을 기다리는 재미이기 때문이다.
관객과의 약속이자. 자신들이 정교하게 그려 놓은 도안에 따른 떡밥이라는 시침질을 매우 정확하고 적절하게 한 케이스는. 애석하게도 현재 [외계+인]이 마케팅의 일환으로 삼고 있는 마블이다.
물론 천하의 마블조차 한 땀 한 땀 완벽한 수를 놓지는 못했고. 최근의 작품들은 아예 도안이 없나?라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그럼에도 명성만큼은 아직 건재한 마블이 여태 해 온 관객과의 바느질 티키타카를 보았을 때. 적어도 이 영화는 비교 대상을 잘못 잡았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다.
영화가 떡하니 시침질을 해 놓은 자리는 관객들이 보기에 잘라내도 되겠다는 마음에 자꾸 시선이 머무는 곳이 되어버린다. 그런 관객의 눈길을 애써 돌리려는 듯, 영화 속 인물들은 그것이 과거이건 미래이건 상관없이 중심 축을 잡지 않고 관객의 양쪽에 늘어서서 내 말을 들어보라며 자신들의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그 결과, 영화가 복잡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지만.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다고 느끼는 경우가 종종 생긴다.
후반부 30분 정도부터는 그 속도를 올려 모든 숙제를 몰아 해치우듯 성급하게, 인물들이 직접 시침핀이 되어 영화라는 천 위를 숨 가쁘게 오고 가지만. 그런 노력에 비해 캐릭터 자체가 갖는 매력은 매우 떨어지는 편이다. 또한 영화의 중간중간에는 컷 편집에 있어 문외한인 나조차도 갸웃거릴법한 장면들도 보여, 영화의 완성도, 혹은 신뢰도는 수직 하락한다.
매우 용감했고 대담한 시도였음에는 틀림이 없다. 분명 영화를 보며 묘한 쾌감이 드는 순간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과연 이 바느질들이 정확한 시침질이 될 것인지. 아니면 미봉책으로 남을 것인지에 대해서는 후자에 가깝다는 우려가 슬그머니 들어찬다.
영화에도 휴롬이 필요해;너무 많은 재료는 모든 것을 망친다
사진출처:다음 영화
충무로 최고의 혹부리 영감답게. 최동훈 감독은 이번 영화에서도 할 말이 많아 보인다.
이번 작품은 기본적으로 전작인 [전우치]의 틀 위에 어울릴법한 전래동화나 시조에서 따온 모티브를 얹었다. 눈에 익은 몇몇 영화들에 대한 오마주와 자신의 전작에 대한 예우도 잊지 않는다. 그리고 섭섭하지 않게 마블의 세계관도 고루 둘러 넣었다.
문제는 재료들이 같거나 비슷한 크기로 갈려 목 넘김이 좋은 스무디가 되어야 했지만. 들어간 재료들이 한 번씩은 식도 벽을 툭툭 건드리며 넘어간다는 것에 있다. 하나하나 돌아보면 이야깃 거리가 될 수 있을 만큼 익숙한 재료들이 영화에 가득하지만. 거기서 오는 안전함까지 확보하지는 못했다. 껄끄럽고 성가시며. 때로는 무엇이 제대로 갈리지 못한 것인가? 하는 의문을 품게 한다.
그중 결국 삼키지 못하고 뱉어야 할 만큼 가장 큰 덩어리는 무륵(류준열)에게 자격을 묻는 장면이었다. (물론 이 장면에서 무륵은 기가 막히게 멋있었다.)
뽑지 못할 것만 같던 검을 뽑는 장면에서는 쉽게 엑스칼리버나 묠니르를 떠올릴 수 있다. 그런 모티브 자체가 쓰이는 것에 대한 반감은 없다. 하지만 그에 상응하는 자격을 주기 위해 겪어야 하는 과정은 생략되어 있다. 촉매에 대한 설명도 존재하지 않는다.
2부에서 말해주겠지.라고 속 편하게 생각하고 넘기기에는 1부에서 했어야 할 숙제까지 떠안아야 할 내일의 2부가 이미 힘겨워 보인다.
마치면서
웨하스 같은 영화다.
먹을 땐 맛있지만. 부스러기가 너무 심하게 남는다. 먹고 나서 엄마의 등짝 스매싱 생각에 순간 아찔해진다.
과자 자체의 맛이 너무 뛰어나서 잔소리를 견뎌내고 청소를 감행할 정도라면 모르겠지만. 웨하스를 생각함과 동시에 내 멘탈만큼이나 흩날릴 가루들을 생각하면 다음번의 간식으로 간택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분명 일정 부분의 재미도 있고. 감탄할 부분이 있는 것은 맞지만. 곱씹을수록 어딘가 찜찜하다.
이 시리즈의 끝이 어떻게 될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설령 우려했던 결말이라 해도, 나는 여전히 이 수다스러운 혹부리 영감 같은 감독을 좋아할 것이다. 단지 이번 옛날이야기가 나와 맞지 않았다며 넘기고 다음 이야기를 해달라며 조를 테니까.
[이 글의 TMI]
1. 그 누가 뭐래도 딱복이 최고야.
2. 딱복 2만원치가 일주일만에 순삭되는 마법이란.
3. 체리도 곁들여 먹으면 맛있징.
4. 다음 글은 아마도 독일어 근황이 될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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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계속 걸어가겠지만
내게 <러브레터>는 겨울날 아득히 보이는 오두막, 불 밝힌 창문 같은 영화다. 보는 것만으로도 추운 밤의 마음이 따뜻해지는,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어주는 이야기다. 인물들을 따뜻하게 감싸주었다고 느껴서 그렇다. 이츠키에게는 언젠가 반짝이는 사랑을 받았던 기억, 히로코에게는 있는 힘껏 후회 없이 사랑한 기억. 그 힘을 이따금 떠올리며 잘 살아갈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내 마음도 그런 힘을 찾고 싶어 자꾸 들여다보는 건지도 모르겠다. 찬 바람 불면 한번 보고, 겨울 깊어가면 또 보고, 겨울 다 가기 전에 아쉽다고 본다. 더운 여름 날도 눈발 내리는 풍경이 그립다고 보고, 문득 떠올리면 아무 때나 본다. 그 버릇이 10년도 넘었다. 이제는 너무 많이 봐서, 아는 사람들의 옛 사진 앨범을 보는 기분이 든다. 가본 적 없는 공간임에도 가본 듯이 그려보게 되고, 만져본 적 없는 옷의 촉감까지 생생하다. 동시에 딱 그만큼 멀기도 하다. 성에 낀 유리창 너머 들여다보이는 오두막 내부 풍경은 결코 닿지 않듯이. 내쉬는 내 숨결에 성에만 더 짙어지듯이.
그러던 차에 또 한 번 그에게서 편지가 왔다. 이번에는 <라스트 레터>다. 다시 한번, 편지의 마법에 걸리고 만다.
제목에서 예상되듯이 이 영화는 편지를 타고 흘러간다. 언니 미사키의 장례식을 마치고, 유리는 조카 아유미에게 편지봉투 하나를 건네받는다. 동창회 초대장이다. 언니의 부고를 알리려고 참석한 동창회 자리에서 동문들은 유리를 미사키로 착각한다. 그 시절 모두가 사랑했던 미사키, 오랫동안 보지 못한 미사키를 모두가 반가워한다. 유리는 차마 언니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못한다. 곧 철거될 학교 건물 사진을 보고, 정리하다 발견했다는 테이프 속에서 졸업생 대표 인사를 읊는 미사키 목소리를 들으며 유리는 먼저 자리를 뜬다.
그런데 동창회 장소에서 누군가 유리를 따라 나온다. 유리가 좋아했던, 미사키를 좋아했던 쿄시로. 자신을 미사키로 알고 있을 쿄시로에게 유리는 편지를 한 장 남기고, 두 사람은 편지로 재회를 이어간다. 그러던 중 편지 하나가 미사키의 딸 아유미에게 닿으면서, 이들 모두는 편지를 통해 지금은 죽고 없는 미사키를, 그리고 그 시절의 마음들을, 각자의 오늘을 훑기 시작한다.
잘못 전달된 편지로 이야기가 시작된다는 시놉시스만 보아도 <러브레터> 냄새가 난다. 감독은 아예 이 영화가 <러브레터>의 쌍둥이 영화라고 직접 밝혔는데, 곳곳에서 데칼코마니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다. 한겨울 눈밭의 추도식으로 시작하는 <러브레터>와 빛 고운 여름날 장례식으로 시작하는 <라스트 레터>, 학교의 사진을 찍는 장면, <러브레터>의 이츠키처럼 <라스트 레터>의 유리도 도서관에서 일한다는 점 등등. 편지가 잘못 닿는 오래된 집의 분위기도 비슷하고, 교복 입은 회상 장면과 현재가 교차한다는 점도 겹친다.
<러브레터>뿐이 아니다. 소위 '화이트 이와이'로 대변되는 영화를 모조리 담은 종합 선물세트 느낌이다. <4월 이야기>에서 선배가 좋아 '사랑의 기적'을 만들었던, 배우 마츠 다카코가 유리 역을 맡았다. 도서관에서 일하며 선배를 좋아했던 과거를 회상하는 얼굴에서, 서점을 서성이다 빨간 우산 아래 말갛게 웃던 얼굴이 절로 떠오른다. 유리의 딸 사야카와 미사키의 딸 아유미가 함께 있는 모습에서는 어쩐지 <하나와 앨리스> 느낌도 난다. 연락처를 주고받는 SNS는 <립반윙클의 신부>에서 사용된 가상 SNS 플래닛이다.
다만 <러브레터>에서 한 발짝 달라진 점은, 오타루까지 가서 이츠키를 만나지 못하고 뒤돌아섰던 히로코와 달리 쿄시로가 로드무비 느낌이 들 만큼 적극적으로 움직인다는 것이다. 그는 여러 모로 히로코와 다르다. 끝의 끝까지 사랑에 최선을 다했던 히로코와 달리, 미사키와의 관계에서 일찌감치 물러나야 하는 입장이었다. 이츠키의 기억을 편지로 받았다가 되돌려준 히로코와 달리, 그는 미사키의 기억을 아예 <미사키>라는 제목의 소설로 펴내기도 했다.
오랜 세월이 지났어도 첫사랑에 매여있다는 점에서 남자 이츠키를 떠올리게도 한다. 어떻게 보면 남자 이츠키의 순정은 그의 죽음으로 박제되고 완성된 것이기도 하기에, 처음에는 쿄시로가 미사키의 기억을 되짚어가는 과정을 의구심으로 바라보았다. 그가 <미사키> 이후 어떤 소설도 더 쓰지 못한 소설가라서 더욱 그랬다. 자신의 이야기를 위해 미사키를 찾는다면 그 또한 사랑일까? 더 이상 손 닿을 수 없는 사랑을 찾아다니는 그의 마음은 사랑일까 아니면 소재에 대한 집착일까?
영화를 보는 내내 그의 마음만큼이나 내 비뚜름한 시선도 흔들렸으나, 끝내 미사키의 영전에 선 그와 함께 눈물을 떨굴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25년이나 지난 지금도 사랑하고 있다면 믿겠느냐는 질문은 미사키가 아니라 관객에게 던진 것인지도 모른다. 순정이라는 마음은 변하지 않는다. 누군가가 순정을 더 믿지 않게 될 뿐이다. 십대 때 이와이 슌지가 '영원한 십대들의 내부자'라는 말을 어디선가 읽고 고개를 끄덕인 적이 있는데, 시간이 흐르고 십대들의 내부자가 아니게 되어버린 나는 이제 오랜 사랑 앞에 의구심부터 던진다. 하지만 그는 변치 않았다.
단순하지만 잔잔하게 마음을 파고드는 피아노 선율에, 어쩐지 눈물 날 듯 아름다운 빛. 이전과 똑같은 도구들로 이와이 슌지는 순정을 말한다. 늘 그랬듯 마음을 선물처럼 곱게 담아 전한다. 마음을 담은 상자가 편지일 때도, SNS일 때도 있지만 도구가 어떻든 늘 순정을 간직한 채다. 오랜 세월이 흐르고 상자의 모양이 바뀌어도, 그 안의 것들은 세파에 좀먹지 않고 아스라이 빛난다. 그래서 그의 편지에는 여전히 힘이 있다.
그의 순정에는 한 세월이 묻어 있다. 그의 영화 속 십대들이 애틋한 이유다. 지금 이 마음으로 열심히 살아가겠다고 말갛게 웃는 그들이 어떤 삶을 살게 될지 아는 우리로서는 애틋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다. 순간의 설렘, 사소한 일상 뒤에서도 삶과 죽음은 아른거리고 있다는 진실을, 우리가 모두 알고 있지만 잊고 사는 사실을 일깨우기에. 이런 점에서 <라스트 레터>는 분명 그의 전작들에서 직선으로 이어진 연장선이다.
그 연장선에서 뜻밖의 한 걸음을 내딛는다. 이후의 이와이 월드가 어떤 색깔로 펼쳐질지 기대하게 만드는 지점이다. <러브레터>에서 이츠키/히로코와 아키바를 각각 맡았던 나카야마 미호와 토요카와 에츠시가 출연하는데, 한때 이야기의 중심에 있던 인물들의 얼굴을 빌어서 하는 말이 의미심장하다.
잠시 눈을 의심해야 할 만큼 폭삭 늙은 토요카와 에츠시의 얼굴로, 조금은 지치고 피로한 나카야마 미호의 표정으로, 두 사람은 말한다. 이야기는 이야기고 현실은 현실임을. 인간은 현실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피아노 선율과 고운 빛으로 구성된 세계에서 가장 먼 이야기를, 온갖 세파에 지치고 닳아버린 얼굴로 건넨다.
그래서 내게는 이 작품이 소위 '화이트 이와이'로 분류되던 영화들에게 안녕을 고하는 작품처럼 느껴진다. 오래 전의 그들에게 인사를 건넬 기회를 준 느낌. 과거가 아닌 앞을 보고 나아가기 위해 가장 아름답게 인사를 나눌 수 있도록, 하나하나 기억을 포개 놓은 느낌이다. 그렇게 그 자리를 떠나라고 다정하게 말하는 느낌이다. 미사키의 기억을 되찾은 쿄시로에게, 비로소 엄마를 떠나보낼 준비를 한 아유미에게, 그의 영화를 내내 돌아보며 살아온 관객인 내게도.
영화가 시키는 대로 조심스럽게 인사를 건넨다. 지금은 잃어버린, 만날 수 없게 되어버린 소중한 사람들을 향한 기억을 고이 갈무리한다. 이제 그 자리를 과거에 내어주고 현실을 하루하루 살아갈 수 있도록. 오랜 세월 꾹꾹 담아둔 향기로운 마음이라고 해도, 불가능에 가까운 순정을 누군가의 죽음으로 얼려 잡아두었다 해도, 그 마음은 오래된 편지처럼 접어두어야 할 것이다. 나는 오늘을 뚜벅뚜벅 살아가야 할 것이다. 잘 알고 있는데 여전히 그의 순정은 다정한 유리창처럼, 자꾸 돌아보고 싶게 만든다. 기억의 시공간은 돌아봐도 잡히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우리는 계속 걸어가겠지만, 또 계속 돌아볼 것이다. 아직은 떠올릴 때마다 눈물이 날 것 같지만, 슬프고 두렵지만은 않다. 사랑의 잔상은 여전히 어딘가에서 따뜻하게 불 밝힌 유리창으로 존재할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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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WIFF 데일리] 여성 시인이 짊어진 삶과 예술의 무게
잉게보르크 바흐만: 사막으로의 여행/Ingeborg Bachmann-Journey into the Desert
마가레타 폰 트로타/스위스, 독일, 룩셈부르크, 오스트리아/2023/114min/‘새로운 물결’ 세션
비범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시인 잉게보르크 바흐만은 자신의 시로 남성 지배적인 독일 문학계를 사로잡는다. 경력이 절정에 달했을 때, 바흐만은 유명한 극작가 막스 프리슈와 사랑에 빠진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열정적이었으나 일에서도 개인적으로도 끝없이 부딪힌다. 지친 바흐만은 친구들과 사막으로 여행을 떠난다. 자기 자신, 무엇보다 자신의 시를 되찾기 위해.(서울국제여성영화제)
잉게보르크 바흐만의 《삼십세》를 읽은 기억이 강렬하게 남아 있다. 〈잉게보르크 바흐만: 사막으로의 여행〉의 한 장면에서 그녀가 ‘독일 유일의 여성 순수 시인’이라 소개받는 데서도 알 수 있듯, 잉게보르크는 언어의 순수성과 관념성을 탐구한 시인이었다. 그 순수함에 대한 탐구는 그녀가 《삼십세》에서 보여주었듯, ‘순수’ 언어가 젠더화되어 있다는 깨달음과 연동되어 있다. 즉, 잉게보르크는 순수/보편/초월이 젠더 권력을 감추는 익숙하고도 권위 있는 개념임을 알고 있었다. 여성 시인이라는 정체성은 이 깨달음을 위한 토대였다.
영화는 그런 그녀의 삶‧사랑‧시 궤적을 좇는다. 특히 잉게보르크와 4년간 연애한 저명한 극작가 막스 프리쉬와의 관계에 주목한다. 그들은 금세 사랑에 빠지고 함께 창작욕을 불태웠다. 그러나 잉게보르크는 이내 막스에게 ‘연인/뮤즈/가사노동자’의 역할을 요구받는다. 애초에 꿈꿨던 ‘연인/동반자/동료’의 이상은 점점 흐릿해진다. 오히려 잉게보르크의 명성이 쌓여갈수록 막스는 질투를 느끼며 그녀를 더욱 옥죄려 든다. 영화에는 잉게보르크가 막스와의 관계에서 쇠잔해가는 과정과 막스와의 관계가 종결된 후 그녀가 다른 친구와 함께 사막에서 친밀성과 시, 무엇보다도 자기 인생을 되찾아가는 과정이 교차하여 등장한다. 사막으로의 여행은 잉게보르크에게 인간 존재의 본질적 고독을 수용하는 법을 가르쳐줌으로써 그녀에게 구원을 선사했다.
영화가 끝난 후 진행된 라운드테이블에서 이경미 연극평론가는 영화가 잉게보르크에게 선물한 ‘구원’이 실제 그녀의 삶과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막스는 잉게보르크과 결별한 후 그들의 관계를 소재로 작품을 썼고, 그 안에서 잉게보르크를 모욕적으로 묘사했다. 잉게보르크는 막스와 헤어진 후 오랜 기간 트라우마와 약물 등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다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했다. 잉게보르크의 말마따나 “결혼은 일하는 여성(예술하는 여성)에게 불가능한 제도”였다.
예술가인 동시에 뮤즈여야만 했던 그녀 삶의 모순은 여성이 예술을 한다는 것의 의미를 질문케 한다. 우리는 비극적으로 삶을 마감한 그녀가 남긴 작품과 그녀 삶을 토대로 제작된 영화를 통해서만 그녀의 고통을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녀의 삶과 예술적 문제의식은 죽지 않고 살아남아 다른 누군가의 외로움을 달래주고, ‘순수’ 언어에 도전하는 역할을 기꺼이 떠맡는다. 감독이 영화를 통해 잉게보르크에게 사막에서의 구원을 선물했듯, 우리는 그녀의 작품을 통해 그녀와 우리 자신에게 구원을 선물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 전문 웹진 〈씨네랩〉을 통해 기자로 초청받아 작성한 글입니다.
*제25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는 8월 24일부터 8월 30일까지 진행됩니다. 영화 상영 시간표와 상영작 정보는 아래의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제25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는 8월 24일부터 8월 30일까지 진행됩니다. 영화 상영 시간표와 상영작 정보는 영화제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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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유를 갈망하는 목소리,
본 게시물은 스포일러를 담고 있습니다.
출처: (왼)네이버 영화, (오)왓챠피디아
<케이팝 데몬 헌터스>, 꽤 직관적인 제목과 다소 유치해 보일 수 있는 그래픽을 넘어서는 완성도를 지니고 있는 수작이다. 오랜만에 접하는 새로운 장르이기도 하다. 이제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만큼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케이팝’과 한국적인 오컬트가 적절하게 섞여 있다. 그리고 한국인으로서 어디에서도 느껴보지 못했던 형태의 감상을 안겨 준다. ‘작호도’를 기반으로 한 귀여운 동물의 조합과 한국적인 요소를 작품 내 세계관에 철저하게 고증한, 완벽한 레퍼런스로 도약하는 캐릭터들의 매력이 상당하다. 물론 제한된 시간에 많은 서사를 표현하기 위해 다소 극적으로 연출된 부분도 존재하지만, 위 이유들만으로도 감상할 가치가 충분하고도 넘친다고 생각한다.
루미, 그는 왜 조이와 미라가 아닌 진우에게 안정감을 얻었을까
출처: 왓챠피디아
주인공 ‘루미’는 헌터이자 악령이다. 아니, 헌터이기 이전에 악령이다. 잘못된 운명으로 태어난 루미는 그 사실을 감추고 수백년간 이어진 헌터의 명맥을 지켜왔다. 엄마 대신 자신을 보살펴온 ‘셀린’에게는 언제나 결점을 감추고 아무 일 없다는 듯 행동하라는 일관된 조언만 들어 왔다. 넘치는 사명감에 셀린의 말을 정답이라고 믿고 자신의 분명한 일부를 감추며 살아온 루미는, 세상을 지키기 위해, ‘혼문’을 만들기 위해 악령들을 해치우면서 스스로를 셀 수 없이 돌아봤을 것이다. 친구들과 함께 그토록 혐오하고 증오해 마지 않았던 악령들은 자신과 같은 문양을 몸에 지녔다. 눈에 보이지 않게 옷으로 가리고, 옷으로 가릴 수 없다면 상황을 피해버리는 방법만으로 절대 지울 수 없는 선명한 문양들. 스스로를 죽이며 루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도 죽어야 마땅한 존재인 걸까?
악령의 존재를 없애고 혼란을 잠재우는 혼문이 곧 완성되는 시점에서 루미의 앞에 ‘진우’가 나타난다. 오로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대의를 방해하러 온 인물, 진우. 그를 비롯한 5인조의 ‘사자보이즈’로 인해 견고해 보였던 혼문이 점점 망가진다. 적색 경보가 켜진 서울 도처를 바라보며 루미는 조급해지지만 목이 따라주지 않는다. 마음이 흐트러진다. 혼문만 완성하면 ‘헌터’ 자체의 목적을 완성하고 세상을 구하는 건데, 자신이 무엇을 바라 왔는지 무엇을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해온 건지 흐릿해진다. 그리고 진우에게 들킨다. 악령만이 가지고 있는 몸의 문양을 진우가 발견하지만 그는 루미의 흠이 친구들에게 발각될 위기에서 구해준다. 단숨에 신뢰를 내주게 된 그와 대화를 나누며 애써 부정해왔던 악령으로서의 자신과 분명하게 나눠 두었던 악령과의 경계선이 진우로 인해 부서진다.
진우 또한 그렇다. 자신의 안위를 위해 가족을 버리고 호의호식하며 완전한 악령이 되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늘 이기적으로 살아 왔다. 루미가 정의한 악령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긴 시간 스스로를 혐오하며 ‘악령답게‘ 지내 왔던 진우는 루미의 문양을 보고 새로운 시야가 열린다. 악령이 헌터의 의무를 다 하고 있다. 태초부터 선한 자들의 위치라고 생각했던 헌터가 나와 같은 문양을 가지고 있다. 죄책감, 슬픔, 고뇌 등 아직 남아 있는 인간성조차 악령이 된 채로는 그저 알량한 위선일 뿐이라고 치부해 왔던 자신에 대한 평가를 재고하게 된다.
루미는 진우를 보며, 진우는 루미를 통해 내 안의 ‘악령‘을 다시 정의하게 된다.
자유를 갈망하는 목소리, 그 종착점은 서글픔
We can’t fix it if we never face it
루미와 진우가 혼문의 완성을 앞두고 함께 부르는 노래 'Free'의 가사이다. 이 노래가 흘러 나오는 장면으로 말미암아, 루미는 진우가 악령임에도 사유할 줄 알고 후회할 줄 알며 무언가를 느낄 수 있음을 인정하게 된다. 동시에 자신도 잘못된 존재가 아닐 수 있다는 희망을 찾는다. 루미가 악령이라는 사실에 더 의문을 가지지 않고 온전히 이해하고 인정해주는 진우에게서 안정감을 찾는다. 동질감을 느낀다.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전혀 좋은 방법이 아니다. 내가 나를 인정해줘야 한다. 누군가가 대신해준다고 해서 전적으로 의지하게 되면, 그 존재가 사라진 후 필연적으로 다시금 흔들리게 되기 마련이다. 이 부분을 가사에서 정확하게 짚어낸다. ‘직접 마주하지 않으면 절대 바로잡을 수 없어’.
때때로 지극히 판타지스러운 작품이 오히려 현실을 정확하게 짚어내기도 한다. 바로 <케이팝 데몬 헌터스>가 그렇다. 루미와 조이, 미라는 셀린의 충고를 다시금, 그리고 또 상기시킨다. ‘결점을 숨기고 괜찮은 척 해라’,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과 매우 동일하다. 부정적인 감정은 나누지 말고, 약점은 되도록 드러내지 마라. 긍정적이고 멀쩡한 내 모습만 나누어야 한다. 무릇 인간이란, 힘듦을 견뎌내기 어려워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부족함도 외면하고 고치려 노력하는 자들이 어떻게 타인의 어려움을 제대로 바라봐줄 것인가? 루미가 가장 믿고 의지하는 둘에게 오히려 터놓지 못하고 진우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동질감 외에도 언제나 강한 모습만 보여주고 이끌어 주어야 하는 내가 그 누구보다도 잘못된 운명을 타고났고 위태롭게 버티고 있었음을 결코 고백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옳음을 추구하며 삶을 구성한다. 잘못된 것을 부정하며 죽음까지 떳떳하기를 원한다. 진우는 바로 그런 인물이었기에 우리의 마음을 울리는지도 모른다. 인간답게 잘못을 저지르고 뉘우친다. 외력에 흔들리고 이익을 좇지만 올바른 일에 희생할 만큼 강직하다. 매순간 과거를 후회하고 잔재하는 온전한 영혼을 갈구하며 휘몰아쳤을 그의 내면은 비로소 마지막에 안정을 찾는다. 노래의 가사와 멜로디로 만들어질 뿐인 목소리에 어떤 감정이 담겨 있을지는 결국 듣는 관객들의 감상이 투영되며 완성될 것이라 생각한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은 본인의 삶에 어떤 마음으로 임하고 있는가? 아, 질문의 순서가 잘못됐다. 과연 '나'는 이번 삶에 어떤 각오로 임하고 있는가? 나는 두 인물의 목소리가 서글프게 느껴진다. 그들의 목소리를 매개체로 내 감정을 느끼게 된다. 그들을 얽매이게 하고 고통스럽게 했던 건 허구 속의 ‘귀마’로부터 비롯되었지만, 나를 얽매이게 만드는 건 인간으로서의 삶, 지켜야 할 신념, 죽음을 위해 달려가는 치열한 과정들이다. 목적어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자유로워지고 싶다는 느낌은 과연 어디를 향하고 있을까, 이젠 내가 나를 마주해야 할 차례다.
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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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2021년 9월 신작 공개예정
[WEEKEND CHOICE MOVIE] #넷플릭스#넷플릭스신작 #NETFLIX
#넷플릭스9월 #넷플릭스공개예정 #오징어게임 #나이트북 #밤의이야기꾼 #내부자들 #조선명탐정 #사라진놉의딸 #굿바이싱글
영화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https://blog.naver.com/rainbbox
@Weekend Choice Mov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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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 캡틴 / 레드 헐크와의 대결 / 캡틴 아메리카: 브레이브 뉴 월드 / 어벤져스 빌드 업
영화직관하는남자 홍큐의 "캡틴 아메리카: 브레이브 뉴 월드" 후기입니다.
*꼭 보아야 할 쿠키영상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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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당신은 믿지 않겠지만> 티저 예고편
서울에서 사업으로 잘나간다는 형 토오루(오다기리 죠)의 말만 믿고
아들을 데리고 무작정 한국으로 날아온 츠요시(이케마츠 소스케)는
동업자에게 사기를 당한 형 때문에 하루아침에 낯선 서울 길바닥에 나앉을 위기에 처한다.
그러자 토오루는 기발한 사업 아이템이 있다며 좌절한 츠요시를 꼬셔 강릉으로 향하고,
기차 안에서 우연히 사연이 가득해 보이는 삼 남매
솔(최희서), 봄(김예은), 정우(김민재)를 만나 동행하게 되는데…
불운만 가득했던 인생에 벌어진 우연 같은 운명!
기적이 간절할 때, 우리는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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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데이 시프트> 공식 예고편
《데이 시프트》, 넷플릭스에서 곧 공개 예정. 제이미 폭스가 영리한 딸을 부족함 없이 키우고자 열심히 일하는 아빠로 등장한다. 샌 페르난도 밸리에서 수영장 청소부로 일하는 이 남자. 성실하고 평범한 노동자처럼 보이지만 진짜 돈벌이로 하는 일은 따로 있었으니. ‘세계 뱀파이어 사냥꾼 연합’의 일원으로 뱀파이어를 사냥하고 죽이는 것이 바로 그의 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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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나리
미나리
미국 영화계는 왜 '미나리'에 깊은 관심을 보이는 걸까. '미나리'는 이미 수십 개의 영화상을 받았고, 평단의 찬사를 받고 있다. '미나리 현상'은 미국 영화계는 물론, 한국에서 미국의 한인 이민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을 잘 드러낸다. 말하자면, 낯익은 서사를 신선한 영화언어로 만들었기 때문에 미국 영화계가 주목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가 들어 있는 영화는 80년대를 배경으로 한다. 젊은 부부는 병아리 감별사 자격증을 갖고 미국으로 이민 온다. 캘리포니아에서 살던 가족은 중남부에 있는 아칸소주로 이주한다. 남편 제이콥이 이끈 땅은 비옥하고, 땅값이 싼 곳이어서 넓은 땅을 매입할 수 있었다. 아내 모니카는 이주가 달갑지 않지만, 아들 데이빗의 건강을 위해 동의한다.
캘리포니아의 대도시에서 병아리 감별사로 일하던 두 사람은 같은 일을 하면서도 제이콥이 농장을 일굴 수 있는 아칸소로 이주하는데, 가까운 마을을 가려해도 자동차로 한 시간이 걸리는 외진 곳이다. 아칸소주는 중남부에서 약간 동쪽에 있는 지역으로 바로 옆에 오클라호마주가 있다. 신기하게도, 아칸소주가 있는 경계로 남북으로 길게 왼쪽은 사막지역이고, 오른쪽은 비옥한 땅이 있는 지역이다.
부부에게는 딸 앤(지영)이 있고, 아들 데이빗이 있다. 두 아이는 미국에서 태어났고, 영어를 모국어로 하지만, 엄마, 아빠와 대화할 때는 한국어와 영어를 함께 사용하고, 한국말을 비교적 잘 알아듣는다. 남매끼리 대화할 때는 주로 영어로 대화한다. 이민 2세는 자연스럽게 미국 사회에 적응하는데, 그 첫 번째 현상이 언어의 사용이다.
부부가 함께 일하기 때문에 아이를 보살펴 줄 사람을 찾을 수 없자, 부부는 한국에 계신 모니카의 어머니를 초청한다. 한국에서 할머니가 도착하고, 할머니와 함께 도착한 짐에는 한국에서만 먹을 수 있었던 음식 재료들이 바리바리 들어 있다. 고향을 떠난 것은 젊은 부부 스스로의 선택이었으나, 이 시기 한국 상황은 전두환 군부독재가 지배하던 독재국가였고, 민주화 투쟁의 불길이 서서히 일어나고 있었다.
젊은 부부의 이민이 이런 한국 정치상황과 직접 관련은 없다고 생각하지만, 한편으로 개인은 환경의 지배를 받는 동물의 보편적 속성을 가졌다는 점에서, 당시 한국의 숨막히는 독재 상황이 이들의 이민에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할 수 있다.
네 식구의 가정에 할머니 - 한국 할머니 - 의 등장은 잔잔한 소용돌이를 일으킨다. 데이빗은 외할머니를 낯설어 하고 '할머니 냄새'가 난다고 말한다. 할머니에게서 나는 냄새는 '한국' 냄새이며, 미국에서 태어난 데이빗은 한번도 가 본 적 없는 '조국'인 '한국'의 낯선 냄새이기도 하다.
하지만 할머니는 손녀와 손자에게 스스럼 없는 '한국 할머니'로 말하고 행동한다. 아이들은 저희들끼리 영어로 말하고, 할머니의 말은 알아 듣지만 한국어로 답하지 않는다. 아이들은 할머니를 불편하게 여기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할머니의 따뜻한 마음과 사랑을 느끼기 시작한다.
할머니는 데이빗과 함께 집 근처를 산책하다 작은 개울을 발견한다. 그리고 한국에서 가져온 미나리 씨를 그 개울 옆에 뿌린다. 할머니는 미나리가 어디에서든 잘 자라는 식물이라고 말한다.
제이콥이 아칸소주로 이사한 것은 농장을 꾸리기 위한 꿈이 있기 때문이다. 제이콥은 한국에서도 시골에서 태어나 어려서 부모가 농사 짓는 모습을 보며 자랐던 것이 부부의 대화에서 아주 잠깐 드러난다. 반면 모니카는 서울 또는 대도시에서 태어나 미국에 이민와서도 캘리포니아에 살았던 것을 좋아했고, 아칸소의 시골로 이주한 것이 달갑지 않은 상태였다. 모니카가 아칸소로 이주한 것에 동의한 이유는 데이빗이 갖고 있는 선천성 심장병에 자연 환경이 도움이 될 거라는 막연한 믿음 때문이었다.
제이콥은 낯선 곳에서 농사를 지으려 준비하면서 이웃들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데, 그는 미국인에 대한 불신을 갖고 있다. 그 선입견은 이방인이 갖는 공통의 심리이기도 하다. 낯선 곳, 낯선 사람을 만나게 되면 우선 경계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 태도는 자기와 가족을 지키려는 자연스러운 심리 상태이며, 생존을 위한 기본 심리이기도 하다.
제이콥은 농사를 짓기 위한 우물을 파야 하는데, 200달러를 달라는 업자의 요구를 거절하고 자기가 직접 우물을 판다. 중고 농기계를 구입하는 것도 마을 주민에게 싼 값으로 사는데, 그렇게 우연히 폴을 만난다. 폴은 백인이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스테레오 타입의 백인은 아니다. 그 역시 시골 촌놈이며,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인물이고, 아마도 혼자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며, 이상한 주문과 주술을 하는, 조금 이상한 사람처럼 보이는 인물이다.
하지만 제이콥은 폴에게 크고 작은 도움을 받는다. 폴 역시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기꺼이 제이콥을 돕는다. 폴은 일요일이면 십자가를 메고 도로를 걷는 고행을 하는데, 폴의 인생도 만만치 않다는 걸 보여주는 장면이다. 어쩌면 폴은 한국전쟁에 참전한 이후 PTSD로 고통받는 사람인지 모른다. 폴이 제이콥에게 친절한 것도 우연이지만 제이콥이 한국사람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물론, 폴은 외로운 사람이고, 누구든 가까이 지낼 사람이 필요했던 것일 수도 있다.
우여곡절을 겪으며 농사를 짓던 제이콥은 판매를 할 만큼의 농산물을 수확하고, 판로를 개척할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갑자기 할머니가 뇌졸증이 발병하면서 병원에 입원하고 모니카는 미래가 확실하지 않은 농장, 어머니의 발병으로 인한 간병과 경제적 문제, 아들 데이빗의 심장병 등 자신을 짓누르는 삶의 무게로 힘겨워한다.
모니카는 이웃에 사는 폴을 초대해 식사하면서 뇌졸증으로 쓰러진 어머니에게서 귀신을 쫓아내는 퇴마 의식을 치른다. 한국식으로 보면 무당을 불러 굿을 하는 것인데, 모니카 역시 이런 상황이 좋은 건 아니지만 답답한 마음을 풀기 위한 자기 위로라고 본다. 제이콥은 모니카가 주도하는 이런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고, 할머니는 딸과 사위, 손자들에게 짐이 되는 자신이 원망스럽기만 하다.
제이콥과 모니카는 데이빗을 데리고 도시의 병원으로 간다. 캘리포니아에 있을 때, 선천성 심장병 진단을 받았고, 숨차게 뛰는 것도 위험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터라, 시골로 이주한 뒤에도 데이빗이 뛰어다니지 못하도록 단속하고 있었다. 데이빗을 진단한 의사는 심장이 많이 좋아졌다고, 운이 좋은 경우라고 말한다.
시내 나온 김에 제이콥은 한국인이 운영하는 마트에 들러 자기가 재배한 채소를 납품할 수 있는지 상담하고 긍정적인 답을 얻는다. 제이콥은 아칸소 뿐 아니라 가까운 오클라호마에도 채소를 납품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갖는다.
가족이 모두 외출한 사이, 할머니는 혼자 쓰레기를 태운다. 몸이 자유롭지 않지만, 어떻게든 도움이 되려고 애쓰는 할머니의 모습이 안타깝다. 그러다 쓰레기에서 떨어진 불이 농작물 보관 창고에 옮겨 붙으면서 가족들이 도착할 때쯤 창고는 불길에 휩싸이고, 모두들 망연자실한다.
할머니는 자기의 잘못으로 제이콥의 농사를 망쳐서 절망하고 집을 떠난다. 이때 데이빗이 달려가 할머니를 가로 막고, 가족은 다시 트레일러로 돌아와 쓰러져 잠에 든다. 할머니는 죄책감으로 괴로워하지만, 사실 채소 저장소는 다시 지으면 되고, 채소는 계속 자라는 것이니 그것이 죽을 만큼 큰 절망은 아닐 것이다. 그보다 다행인 것은 데이빗의 심장이 거의 정상에 가깝게 좋아졌다는 것이고, 제이콥이 시내의 마트와 납품 계약을 맺었다는 사실, 그리고 한국에서 이민오는 사람들이 해마다 늘어나고 있어 한국 채소의 요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날 것이라는 희망이다.
채소 저장고의 화재는 제이콥 가족에게 한순간 절망스러운 사건이었지만, 오히려 그로 인해 제이콥과 모니카가 화해하고, 서로를 더 잘 이해하며, 새로운 마음으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분위기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제이콥은 데이빗과 함께 할머니가 심어 놓은 미나리밭을 찾아간다. 싱싱한 미나리를 뜯으며, 어디서나 잘 자라는 미나리처럼, 낯설고 물선 미국에서 힘겹지만 조금씩 뿌리 내리는 한국인 이민자의 삶이 희망적이라는 메시지를 보이며 영화는 끝난다.
영화의 시간과 정서는 1980년대를 나타낸다. 우리는 2020년에 이 영화를 보면서, 마치 한국의 1970년대를 떠올리는 기시감을 갖는다. 따뜻하고 살가운 할머니의 모습과 무한한 애정, 고생하면서 가족을 먹여살리고 가정을 지키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모습은 가난했던 우리 부모 세대의 모습이며, 미국의 초기 이민자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이 영화가 미국의 관객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그들 대부분이 이민자들이기 때문이며, 이민자들이 갖는 보편적 감성을 영화가 매우 잘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조국을 떠날 때의 낯설고 두려운 심정, 낯선 땅에서 먹고 살려고 발버둥을 쳐야 했던 자신들의 과거가 이 영화에 과정 없이 그려지고 있는 것이 반갑고, 무엇보다 과장하지 않고, 감상적이지 않으면서도 담담한 영화 언어로 이민자의 삶을 담아내고 있는 것이 장점이다.
자연이 드러내는 풍경, 바람소리, 물소리, 빗소리, 풀잎이 스치는 소리, 여기에 잔잔하게 흐르는 배경음악까지, 영화는 미국의 농촌 풍경을 낯설지 않게 보여준다. 사람 사는 곳이면 어디나 비슷하다는 것, 초보 이민자가 만나는 이웃들 역시 사람 사는 곳이면 어디에나 대부분의 사람은 친절하고, 다정하다는 걸 보여준다. 영화에 등장하는 제이콥과 모니카의 이웃들이 평범하고 선량한 사람이라는 건 실제로도 그렇겠지만, 영화에 필요 이상의 감정을 넣지 않으려는 감독의 의도도 있을 것이다. 누군가 나쁜 인물이 등장하면 그 인물과의 갈등으로 촉발하는 시선이 분산되기 때문이다.
영화는 약간의 희망을 보이면서 끝난다. 하지만 할머니는 뇌졸증으로 쓰러졌고, 제이콥이 하는 농사는 항상 수익이 난다고 보장하기 어렵다. 아칸소만 해도 한여름의 태풍이 엄청나서 태풍 피해를 입을 확률이 크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영화는 결말을 말하지 않는다. 이 가족의 삶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는 것만 확실하다. 사람은 힘들게든, 고통스럽게든 그렇게 한발 한발 땅을 디디며 살아갈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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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디에 있느냐’가 아닌 ‘어디를 택했느냐‘
아일랜드에서 태어났으나 운 좋게 브루클린으로 홀로 이주하게 된 에일리스의 이야기는 겉보기에 특별할 것 없는 이민자의 성장 서사다. 이방인으로서 느끼는 고독과 외로움, 그리움 속에서 미화되는 아일랜드의 풍경.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 집일까 새롭게 뿌리내리려 애쓴 곳이 진정한 집일까? 벗어나고 싶었으나 막상 떠나오니 그리워진 아일랜드와 새로운 땅 브루클린 사이에서의 고민은 두 남자와의 관계에서 갈등하는 에일리스로 그려지는데, 그녀는 아일랜드에서 벗어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해주는 (듯한) 토니, 곧 브루클린에 다시 돌아가며 영화는 막을 내린다.
이민자의 정체성 혼란과 ‘집’에 대한 고찰을 따뜻하게 그려냈다고 평하기 전에 두 가지 의문이 떠오른다. 첫째, 브루클린에서 혼자 성장했다는 이유만으로 그곳이 에일리스의 진정한 집이라 단정할 수 있을까? 둘째, 에일리스는 과연 한번이라도 온전히 ‘자기 자신’이었던 적이 있었을까? 자신이 속했던 환경과 맥락에서 완전히 자유로웠던 적이 있는가? 반대로, 규정되는 정체성에서 자유로워야만 비로소 ‘자기 자신’이라 말할 수 있는 걸까.
브루클린에서 만난 이탈리아 남자, 토니가 에일리스 그 자체를 사랑했다고 보기 어렵다. (각종 조건과 상황에서 자유로운 사랑만을 진정한 사랑이라 보는 것에 대한 반박은 논외로) 무의미한 가정이지만, 아마 아일랜드에서 둘이 만났다면 사랑은 차치하고 친구가 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에일리스에게 토니는 능동적으로 택한 사랑의 대상이라기보다 타지에서 너무 외로웠던 나머지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사람에 가까워보인다. 무엇보다 그녀는 지루한 아일랜드를 벗어나기 위해 대서양을 가로질러 왔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아일랜드인이라는 정체성은 그녀에게 더욱 선명해졌다. 아일랜드에선 똑똑하고 예쁜 언니의 그늘에 가려졌다면 브루클린에선 어디를 가도 무뚝뚝하나 심성은 착한 ‘아이리시’ 여자였다. 애초에 토니가 그녀에게 관심을 보였던 이유도 그녀가 ‘아일랜드’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차라리 아일랜드에 돌아가 만난 짐이 에일리스에게 더 어울리지 않나 생각했다. 언니의 죽음과 미지의 땅 미국에서 돌아왔다는 이유만으로 갑자기 주목을 받는 것 또한 썩 유쾌하진 않았으나 최소한 짐 앞에서의 에일리스는 더 이상 ‘아일랜드’ 여자로 보이진 않았으니까.
결국 에일리스는 아일랜드에서뿐 아니라 브루클린에서도 주어진 환경과 맥락 속에서 자유로웠던 적이 없다. 그렇기에 영화에서처럼 브루클린이 에일리스의 진정한 고향이라 결론 짓기도 애매하다. 영화는 브루클린이 에일리스의 삶에서 ‘정답’이자 일련의 사건들을 끝으로 에일리스가 골라낸 최종적인 해답인 마냥 결말을 지으나 사실 그 어느 곳도 그녀에게 정답이 되어줄 수 없다. 다시 말해 이주민에게 ‘진정한 집’이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집’이라 선택할 수 있는 무수한 가능성들 사이에서 고른 곳이 그 순간 나의 ‘집’이 될 뿐, 있지도 않은 정답을 고르기 위해 끙끙댈 필요는 없다.
곧 에일리스는 아일랜드와 달리 브루클린에서 더 자유로웠기 때문에 브루클린으로 돌아간 게 아니다. 오히려 브루클린을 선택함으로써 자신을 규정하는 각종 정체성과 맥락으로부터 진정 자유로워졌다. 에일리스의 주체적인 선택 이후로 타인이 규정하는 그녀의 정체성은 더 이상 유의미하지 않다. 고로 영화 <브루클린>의 핵심을 진정한 집의 의미가 아닌 에일리스 개인의 ‘선택’으로 해석하고자 한다. 에일리스가 ‘어디에 있느냐’는 부차적인 문제일 뿐, ‘어디를 택했느냐’가 그녀를 더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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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침질과 미봉책 사이
이 글은 영화 [외계+인]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선구자의 길은 언제나 멀고도 험하다.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두려움과 알 수 없는 미래, 혹은 결과에 대한 책임도 함께 짊어진 채 주위를 아무리 둘러봐도 아무도 없는 그 길을 담담히 걸어야만 한다.
사람들은 때로는 무모하다고 하고 또는 하던 것이나 제대로 하라는 말로 손쉽게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기도 한다. 다 너를 위한 말이라는 쓸데없는 포장지를 잔뜩 써서.
그러나 용기란 것은 언제나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에도 불구하고라고 했다. 이미 수많은 히트작으로 입지가 굳건한 최동훈 감독은 신작 [외계+인]으로 자신의 용기를 시험해 보기로 했다.
한국에서는 본격적으로 시도된 적이 없는 시공간의 크로스 오버 속에서 펼쳐지는 이야기가 낯설기는 하지만. 묘하게 끌리는 구석이 있는 이번 영화로, 감독은 다시 한번 자신이 낸 용기의 크기만큼이나 어깨 위에 신뢰를 얹을 수 있을지 주목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게 되네...;한국 CG,몰라줘서 미안하다
사진출처:다음 영화
CG라는 산은 한국 영화에 고질병처럼 등장하는 신파만큼이나 넘기 어려운 숙제 중 하나였다. 게다가 “기술의 발전”을 작품보다 앞세워 마케팅했던 많은 선배 영화들의 끝은, 고된 CG 작업 후 꺼진 컴퓨터처럼 짠하고 고된 채로 쓸쓸히 사라지곤 했다.
한낱 부속품이 주인인 것처럼 행세하고서도 제대로 된 책임을 지지 않았던 전례들 덕에. 한국 영화 속 존재하는 컴퓨터 그래픽들이 저평가 받은 것은 사실이었다. 노력한 만큼의 성과도 인정받지 못하고 왜 마블처럼 스토리도, 그래픽도 제대로 만들지 못하냐는 두 배의 잔소리만 덩그러니 숙제로 남은 채로.
그러나 이번 작품은 좀 다르다.
대도시 한복판에서 우주선이 건물을 부수다 땅에 처박혀 아스팔트를 긁다 못해 까뒤집는 장면들은 이미 다른 영화들을 통해 눈에 익을 만큼 봐 왔건만. 현재 내가 보고 있는 장면들이 소위 말하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가 아닌 한국 영화 속 한 장면이라는 사실이 만나는 그 순간에. 가슴이 마구 뛰는 경험을 하게 된다.
와 이게 되는구나.라는 말이 절로 새어 나올 정도로 정교하고 “티 나지”않는 장면들이 꽤 많다. 우리가 그토록 원하는 마블”처럼”까지는 아니더라도. 중요한 장면들에서는 예전 영화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 부분만 톡 튀어 보이는 일은 거의 없다.
덕분에 고려 시대와 현재를 오고 가는 혼잡한 설정 속에서도, CG로 인해 생기는 위화감이나 피로감은 그다지 크지 않다. 충분히 다듬어진 장면들을 보며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날이 왔음에 다시 한번 미소가 지어진다.
마블의 자수는 튼튼하다;시침질인가 미봉책인가
사진출처:다음 영화
애초에 2부로 나눠 개봉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이 영화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전반부가 뿌리는 떡밥과 떡밥 회수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영화에 대한 자신만의 분석을 하고. 그 분석을 토대로 답안지가 공개되었을 때 확인하는 재미 또한 모든 것이 결정되는 후속편을 기다리는 재미이기 때문이다.
관객과의 약속이자. 자신들이 정교하게 그려 놓은 도안에 따른 떡밥이라는 시침질을 매우 정확하고 적절하게 한 케이스는. 애석하게도 현재 [외계+인]이 마케팅의 일환으로 삼고 있는 마블이다.
물론 천하의 마블조차 한 땀 한 땀 완벽한 수를 놓지는 못했고. 최근의 작품들은 아예 도안이 없나?라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그럼에도 명성만큼은 아직 건재한 마블이 여태 해 온 관객과의 바느질 티키타카를 보았을 때. 적어도 이 영화는 비교 대상을 잘못 잡았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다.
영화가 떡하니 시침질을 해 놓은 자리는 관객들이 보기에 잘라내도 되겠다는 마음에 자꾸 시선이 머무는 곳이 되어버린다. 그런 관객의 눈길을 애써 돌리려는 듯, 영화 속 인물들은 그것이 과거이건 미래이건 상관없이 중심 축을 잡지 않고 관객의 양쪽에 늘어서서 내 말을 들어보라며 자신들의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그 결과, 영화가 복잡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지만.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다고 느끼는 경우가 종종 생긴다.
후반부 30분 정도부터는 그 속도를 올려 모든 숙제를 몰아 해치우듯 성급하게, 인물들이 직접 시침핀이 되어 영화라는 천 위를 숨 가쁘게 오고 가지만. 그런 노력에 비해 캐릭터 자체가 갖는 매력은 매우 떨어지는 편이다. 또한 영화의 중간중간에는 컷 편집에 있어 문외한인 나조차도 갸웃거릴법한 장면들도 보여, 영화의 완성도, 혹은 신뢰도는 수직 하락한다.
매우 용감했고 대담한 시도였음에는 틀림이 없다. 분명 영화를 보며 묘한 쾌감이 드는 순간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과연 이 바느질들이 정확한 시침질이 될 것인지. 아니면 미봉책으로 남을 것인지에 대해서는 후자에 가깝다는 우려가 슬그머니 들어찬다.
영화에도 휴롬이 필요해;너무 많은 재료는 모든 것을 망친다
사진출처:다음 영화
충무로 최고의 혹부리 영감답게. 최동훈 감독은 이번 영화에서도 할 말이 많아 보인다.
이번 작품은 기본적으로 전작인 [전우치]의 틀 위에 어울릴법한 전래동화나 시조에서 따온 모티브를 얹었다. 눈에 익은 몇몇 영화들에 대한 오마주와 자신의 전작에 대한 예우도 잊지 않는다. 그리고 섭섭하지 않게 마블의 세계관도 고루 둘러 넣었다.
문제는 재료들이 같거나 비슷한 크기로 갈려 목 넘김이 좋은 스무디가 되어야 했지만. 들어간 재료들이 한 번씩은 식도 벽을 툭툭 건드리며 넘어간다는 것에 있다. 하나하나 돌아보면 이야깃 거리가 될 수 있을 만큼 익숙한 재료들이 영화에 가득하지만. 거기서 오는 안전함까지 확보하지는 못했다. 껄끄럽고 성가시며. 때로는 무엇이 제대로 갈리지 못한 것인가? 하는 의문을 품게 한다.
그중 결국 삼키지 못하고 뱉어야 할 만큼 가장 큰 덩어리는 무륵(류준열)에게 자격을 묻는 장면이었다. (물론 이 장면에서 무륵은 기가 막히게 멋있었다.)
뽑지 못할 것만 같던 검을 뽑는 장면에서는 쉽게 엑스칼리버나 묠니르를 떠올릴 수 있다. 그런 모티브 자체가 쓰이는 것에 대한 반감은 없다. 하지만 그에 상응하는 자격을 주기 위해 겪어야 하는 과정은 생략되어 있다. 촉매에 대한 설명도 존재하지 않는다.
2부에서 말해주겠지.라고 속 편하게 생각하고 넘기기에는 1부에서 했어야 할 숙제까지 떠안아야 할 내일의 2부가 이미 힘겨워 보인다.
마치면서
웨하스 같은 영화다.
먹을 땐 맛있지만. 부스러기가 너무 심하게 남는다. 먹고 나서 엄마의 등짝 스매싱 생각에 순간 아찔해진다.
과자 자체의 맛이 너무 뛰어나서 잔소리를 견뎌내고 청소를 감행할 정도라면 모르겠지만. 웨하스를 생각함과 동시에 내 멘탈만큼이나 흩날릴 가루들을 생각하면 다음번의 간식으로 간택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분명 일정 부분의 재미도 있고. 감탄할 부분이 있는 것은 맞지만. 곱씹을수록 어딘가 찜찜하다.
이 시리즈의 끝이 어떻게 될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설령 우려했던 결말이라 해도, 나는 여전히 이 수다스러운 혹부리 영감 같은 감독을 좋아할 것이다. 단지 이번 옛날이야기가 나와 맞지 않았다며 넘기고 다음 이야기를 해달라며 조를 테니까.
[이 글의 TMI]
1. 그 누가 뭐래도 딱복이 최고야.
2. 딱복 2만원치가 일주일만에 순삭되는 마법이란.
3. 체리도 곁들여 먹으면 맛있징.
4. 다음 글은 아마도 독일어 근황이 될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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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계속 걸어가겠지만
내게 <러브레터>는 겨울날 아득히 보이는 오두막, 불 밝힌 창문 같은 영화다. 보는 것만으로도 추운 밤의 마음이 따뜻해지는,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어주는 이야기다. 인물들을 따뜻하게 감싸주었다고 느껴서 그렇다. 이츠키에게는 언젠가 반짝이는 사랑을 받았던 기억, 히로코에게는 있는 힘껏 후회 없이 사랑한 기억. 그 힘을 이따금 떠올리며 잘 살아갈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내 마음도 그런 힘을 찾고 싶어 자꾸 들여다보는 건지도 모르겠다. 찬 바람 불면 한번 보고, 겨울 깊어가면 또 보고, 겨울 다 가기 전에 아쉽다고 본다. 더운 여름 날도 눈발 내리는 풍경이 그립다고 보고, 문득 떠올리면 아무 때나 본다. 그 버릇이 10년도 넘었다. 이제는 너무 많이 봐서, 아는 사람들의 옛 사진 앨범을 보는 기분이 든다. 가본 적 없는 공간임에도 가본 듯이 그려보게 되고, 만져본 적 없는 옷의 촉감까지 생생하다. 동시에 딱 그만큼 멀기도 하다. 성에 낀 유리창 너머 들여다보이는 오두막 내부 풍경은 결코 닿지 않듯이. 내쉬는 내 숨결에 성에만 더 짙어지듯이.
그러던 차에 또 한 번 그에게서 편지가 왔다. 이번에는 <라스트 레터>다. 다시 한번, 편지의 마법에 걸리고 만다.
제목에서 예상되듯이 이 영화는 편지를 타고 흘러간다. 언니 미사키의 장례식을 마치고, 유리는 조카 아유미에게 편지봉투 하나를 건네받는다. 동창회 초대장이다. 언니의 부고를 알리려고 참석한 동창회 자리에서 동문들은 유리를 미사키로 착각한다. 그 시절 모두가 사랑했던 미사키, 오랫동안 보지 못한 미사키를 모두가 반가워한다. 유리는 차마 언니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못한다. 곧 철거될 학교 건물 사진을 보고, 정리하다 발견했다는 테이프 속에서 졸업생 대표 인사를 읊는 미사키 목소리를 들으며 유리는 먼저 자리를 뜬다.
그런데 동창회 장소에서 누군가 유리를 따라 나온다. 유리가 좋아했던, 미사키를 좋아했던 쿄시로. 자신을 미사키로 알고 있을 쿄시로에게 유리는 편지를 한 장 남기고, 두 사람은 편지로 재회를 이어간다. 그러던 중 편지 하나가 미사키의 딸 아유미에게 닿으면서, 이들 모두는 편지를 통해 지금은 죽고 없는 미사키를, 그리고 그 시절의 마음들을, 각자의 오늘을 훑기 시작한다.
잘못 전달된 편지로 이야기가 시작된다는 시놉시스만 보아도 <러브레터> 냄새가 난다. 감독은 아예 이 영화가 <러브레터>의 쌍둥이 영화라고 직접 밝혔는데, 곳곳에서 데칼코마니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다. 한겨울 눈밭의 추도식으로 시작하는 <러브레터>와 빛 고운 여름날 장례식으로 시작하는 <라스트 레터>, 학교의 사진을 찍는 장면, <러브레터>의 이츠키처럼 <라스트 레터>의 유리도 도서관에서 일한다는 점 등등. 편지가 잘못 닿는 오래된 집의 분위기도 비슷하고, 교복 입은 회상 장면과 현재가 교차한다는 점도 겹친다.
<러브레터>뿐이 아니다. 소위 '화이트 이와이'로 대변되는 영화를 모조리 담은 종합 선물세트 느낌이다. <4월 이야기>에서 선배가 좋아 '사랑의 기적'을 만들었던, 배우 마츠 다카코가 유리 역을 맡았다. 도서관에서 일하며 선배를 좋아했던 과거를 회상하는 얼굴에서, 서점을 서성이다 빨간 우산 아래 말갛게 웃던 얼굴이 절로 떠오른다. 유리의 딸 사야카와 미사키의 딸 아유미가 함께 있는 모습에서는 어쩐지 <하나와 앨리스> 느낌도 난다. 연락처를 주고받는 SNS는 <립반윙클의 신부>에서 사용된 가상 SNS 플래닛이다.
다만 <러브레터>에서 한 발짝 달라진 점은, 오타루까지 가서 이츠키를 만나지 못하고 뒤돌아섰던 히로코와 달리 쿄시로가 로드무비 느낌이 들 만큼 적극적으로 움직인다는 것이다. 그는 여러 모로 히로코와 다르다. 끝의 끝까지 사랑에 최선을 다했던 히로코와 달리, 미사키와의 관계에서 일찌감치 물러나야 하는 입장이었다. 이츠키의 기억을 편지로 받았다가 되돌려준 히로코와 달리, 그는 미사키의 기억을 아예 <미사키>라는 제목의 소설로 펴내기도 했다.
오랜 세월이 지났어도 첫사랑에 매여있다는 점에서 남자 이츠키를 떠올리게도 한다. 어떻게 보면 남자 이츠키의 순정은 그의 죽음으로 박제되고 완성된 것이기도 하기에, 처음에는 쿄시로가 미사키의 기억을 되짚어가는 과정을 의구심으로 바라보았다. 그가 <미사키> 이후 어떤 소설도 더 쓰지 못한 소설가라서 더욱 그랬다. 자신의 이야기를 위해 미사키를 찾는다면 그 또한 사랑일까? 더 이상 손 닿을 수 없는 사랑을 찾아다니는 그의 마음은 사랑일까 아니면 소재에 대한 집착일까?
영화를 보는 내내 그의 마음만큼이나 내 비뚜름한 시선도 흔들렸으나, 끝내 미사키의 영전에 선 그와 함께 눈물을 떨굴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25년이나 지난 지금도 사랑하고 있다면 믿겠느냐는 질문은 미사키가 아니라 관객에게 던진 것인지도 모른다. 순정이라는 마음은 변하지 않는다. 누군가가 순정을 더 믿지 않게 될 뿐이다. 십대 때 이와이 슌지가 '영원한 십대들의 내부자'라는 말을 어디선가 읽고 고개를 끄덕인 적이 있는데, 시간이 흐르고 십대들의 내부자가 아니게 되어버린 나는 이제 오랜 사랑 앞에 의구심부터 던진다. 하지만 그는 변치 않았다.
단순하지만 잔잔하게 마음을 파고드는 피아노 선율에, 어쩐지 눈물 날 듯 아름다운 빛. 이전과 똑같은 도구들로 이와이 슌지는 순정을 말한다. 늘 그랬듯 마음을 선물처럼 곱게 담아 전한다. 마음을 담은 상자가 편지일 때도, SNS일 때도 있지만 도구가 어떻든 늘 순정을 간직한 채다. 오랜 세월이 흐르고 상자의 모양이 바뀌어도, 그 안의 것들은 세파에 좀먹지 않고 아스라이 빛난다. 그래서 그의 편지에는 여전히 힘이 있다.
그의 순정에는 한 세월이 묻어 있다. 그의 영화 속 십대들이 애틋한 이유다. 지금 이 마음으로 열심히 살아가겠다고 말갛게 웃는 그들이 어떤 삶을 살게 될지 아는 우리로서는 애틋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다. 순간의 설렘, 사소한 일상 뒤에서도 삶과 죽음은 아른거리고 있다는 진실을, 우리가 모두 알고 있지만 잊고 사는 사실을 일깨우기에. 이런 점에서 <라스트 레터>는 분명 그의 전작들에서 직선으로 이어진 연장선이다.
그 연장선에서 뜻밖의 한 걸음을 내딛는다. 이후의 이와이 월드가 어떤 색깔로 펼쳐질지 기대하게 만드는 지점이다. <러브레터>에서 이츠키/히로코와 아키바를 각각 맡았던 나카야마 미호와 토요카와 에츠시가 출연하는데, 한때 이야기의 중심에 있던 인물들의 얼굴을 빌어서 하는 말이 의미심장하다.
잠시 눈을 의심해야 할 만큼 폭삭 늙은 토요카와 에츠시의 얼굴로, 조금은 지치고 피로한 나카야마 미호의 표정으로, 두 사람은 말한다. 이야기는 이야기고 현실은 현실임을. 인간은 현실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피아노 선율과 고운 빛으로 구성된 세계에서 가장 먼 이야기를, 온갖 세파에 지치고 닳아버린 얼굴로 건넨다.
그래서 내게는 이 작품이 소위 '화이트 이와이'로 분류되던 영화들에게 안녕을 고하는 작품처럼 느껴진다. 오래 전의 그들에게 인사를 건넬 기회를 준 느낌. 과거가 아닌 앞을 보고 나아가기 위해 가장 아름답게 인사를 나눌 수 있도록, 하나하나 기억을 포개 놓은 느낌이다. 그렇게 그 자리를 떠나라고 다정하게 말하는 느낌이다. 미사키의 기억을 되찾은 쿄시로에게, 비로소 엄마를 떠나보낼 준비를 한 아유미에게, 그의 영화를 내내 돌아보며 살아온 관객인 내게도.
영화가 시키는 대로 조심스럽게 인사를 건넨다. 지금은 잃어버린, 만날 수 없게 되어버린 소중한 사람들을 향한 기억을 고이 갈무리한다. 이제 그 자리를 과거에 내어주고 현실을 하루하루 살아갈 수 있도록. 오랜 세월 꾹꾹 담아둔 향기로운 마음이라고 해도, 불가능에 가까운 순정을 누군가의 죽음으로 얼려 잡아두었다 해도, 그 마음은 오래된 편지처럼 접어두어야 할 것이다. 나는 오늘을 뚜벅뚜벅 살아가야 할 것이다. 잘 알고 있는데 여전히 그의 순정은 다정한 유리창처럼, 자꾸 돌아보고 싶게 만든다. 기억의 시공간은 돌아봐도 잡히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우리는 계속 걸어가겠지만, 또 계속 돌아볼 것이다. 아직은 떠올릴 때마다 눈물이 날 것 같지만, 슬프고 두렵지만은 않다. 사랑의 잔상은 여전히 어딘가에서 따뜻하게 불 밝힌 유리창으로 존재할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