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LAB2021-08-23 15:18:52
차세대 조커라 불리던 '배리 케오간'
아일랜드에서 피습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킬링 디어>에서 소름 끼치는 연기를 선보이며 차세대 히스 레저로 꼽히기도 했던 배우 '배리 케오간'이 <이터널스> 개봉을 앞두고 피습을 당했다고 할리우드 통신 "The wrap"이 전했습니다.
배리 케오간은 아일랜드의 서부 도시인 골웨이에 방문했다가 변을 당했는데요. 아일랜드 신문사인 “Sunday World”에 따르면, 케오간은 골웨이의 한 호텔 앞에서 얼굴에 심각한 부상을 입은 채 발견되어 병원으로 이송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곧바로 골웨이 대학병원으로 옮겨져 베인 상처 등을 치료한 뒤 퇴원했다고 전해지는데요. 할리우드 배우에게 치명적일 수 있는 얼굴 부상에도, 그는 사건에 대해 별다른 기소 없이 넘어간다고 밝혀 화제 되고 있습니다.
배리 케오간은 2017년,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덩케르크>와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킬링 디어>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펼치며 자신의 얼굴을 제대로 각인시켰는데요. 최근, 데이빗 로워리 감독의 A24 작품 <그린 나이트>에서 다시 한번 씬스틸러 면모를 제대로 보여주며 부활의 신호탄을 쏘았습니다.
케오간은 <그린 나이트> 이전까지 휴식기는 중요치 않다는 듯, 마블과 DC 영화에 동시에 캐스팅되며 큰 화제를 모았는데요. 그는 ‘클로이 자오’ 감독이 <노매드랜드>로 아카데미 감독상을 수상하며 더욱이 기대를 모으고 있는 MCU의 <이터널스>에서 드루이그 역을 맡아 ‘길가메쉬’ 역의 마동석 배우와 호흡을 맞출 예정이며, 10년 만에 돌아온 배트맨 실사 영화 <더 배트맨>에서는 스탠리 머클 역을 맡아 블록버스터 양대산맥에 모두 출연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배리 케오간 배우의 쾌유를 빌며,
오늘도 영화로운 하루 보내시기 바랍니다.
씨네랩 에디터 Cammie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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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곳적 복수 신화를 지금 소환하는 이유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서기 895년, 해외 정복을 마치고 자신의 왕국으로 돌아온 '아우반디르(에단 호크)' 왕은 왕비 '구드룬(니콜 키드먼)'과 어린 암레스 왕자와 재회한다. 그러나 막 성인식을 치른 아들에게 본격적인 후계자 수업을 해주기도 전에 그는 동생 '푤니르(클라에스 방)'의 반란으로 목숨을 잃는다. 푤니르는 구드룬 왕비와 왕국을 차지하고, 암레스는 바다 건너로 도망간다. 이후 세월이 흘러 바이킹의 일원이 된 '암레스(알렉산더 스카스가드)'는 왕국을 잃은 푤니르가 망명지인 아이슬란드에서 지내고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 이에 노예로 신분을 위장한 그는 노예선에서 만난 마녀 '올가(안야 테일러 조이)'의 도움을 받아 푤니르의 땅으로 들어가고, 아버지의 복수를 준비한다.
로버트 에거스 감독의 신작 <노스맨>은 바이킹 왕자 암레스의 사랑과 복수를 노래하는 영화로, 중세 시대극이자 근래 할리우드에서 보기 힘들었던 에픽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피비린내 나는 10세기 북유럽의 모습이 가장 먼저 눈을 사로잡는다. <그린 나이트>처럼 상징적이고 시각적인 방식으로 이야기를 끌어가며 신화적 영웅의 비현실적 여정을 압도적인 분위기와 미장센으로 녹여낸다. 주술사가 이끄는 암레스의 성인식이나 피 튀기는 바이킹의 전투 장면은 거칠고 잔혹하다. 폭풍이 몰아치는 북대서양의 거친 바다부터 아이슬란드의 화산에 이르는 웅장하면서도 잔인한 자연의 풍광이 더해지면 그 시대의 야만성이 눈앞에서 고스란히 되살아난다. 심심찮게 등장하는 절단 장면은 '이 정도로 잔인할 필요가 있나?'라는 의문을 자아낸다.
하지만 강렬한 영상에서 눈을 돌려 주인공 암레스의 여정에 빠져들다 보면 그 의문은 자연히 답을 찾는다. 특히 중세 스칸디나비아 전설 속 영웅인 암레스 왕자가 셰익스피어 비극의 주인공 햄릿의 원형이라는 점, 하지만 암레스와 햄릿의 이야기가 사뭇 다르다는 점에서 그 답은 더욱 명확해진다. 덴마크의 왕자인 햄릿은 삼촌이 아버지를 죽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그에게 복수하려는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분노와 슬픔을 다 풀어내지도 못한 채 예기치 못한 사건사고에 휘말린다. 혼란 속에서 그는 미친 듯 보이는 현실과 미쳐 가는 자아를 화해시키지 못하고, 복수마저도 온전히 끝내지 못한 채 죽는다.
햄릿의 복수는 허망하다. 복수심이 도리어 파국을 가져온다는 것을 복수가 결코 건강한 선택이 아니라고 이야기하는 듯 보인다. 사실 복수의 부정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작품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당장 <일리아스>만 해도 그렇다. 친구를 죽인 헥토르를 향한 아킬레우스의 분노로 시작한 <일리아스>는 헥토르의 아버지를 만난 후 그의 용기와 부성애에 감동한 아킬레우스를 비추며 헥토르의 장례식으로 끝난다. 분노에 가득 찬 야수였던 아킬레우스가 복수심을 버리고 사랑, 희생, 용기를 아는 고결한 인간으로 거듭나는 이야기인 것이다. 비록 그 끝은 조금 달라도 햄릿과 아킬레우스는 모두 복수의 무용함을 이야기한다.
<노스맨>과 암레스는 다르다. 영화는 햄릿, 아킬레우스와는 달리 복수의 완성을 통해 생명력을 되찾고 한 명의 인간으로 거듭나는 암레스를 보여준다. 복수와 삼촌의 죽음을 다짐하며 바다를 건넌 간 암레스는 바이킹의 배를 탄 채로 다시 등장한다. 배에서 내려 한 마을을 공격하는 바이킹들 사이에서 암레스는 다른 바이킹들과 전혀 다를 것이 없다. 그저 사람을 죽이는 데 몰두한다. 적군을 죽이고 그 몸을 입으로 물어뜯으며 울부짖는 그의 모습에서는 목적 없이 배회하는 한 마리의 외로운 늑대가 보일 뿐이다.
그러나 마녀의 환시를 보고, 자신이 복수를 완수할 운명이라는 예언을 들은 후 그는 새롭게 태어난다. 삼촌의 땅인 아이슬란드로 향하기 위해 인간 대우도 받지 못하는 노예로 위장한 암레스는 가장 낮은 계급이지만 오히려 가장 살아있어 보인다. 집을 나가 떠돌던 외로운 늑대는 이제 무리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되찾기 위해 눈이 이글거린다. 복수를 통해 암레스의 인생이 죽음에서 삶으로 전환되는 이야기는 영화의 결말이 가장 단적으로 드러난다. 용암이 치솟는 화산에서 삼촌을 죽임으로써 마침내 꿈꾸던 복수를 하는 데 성공한 암레스. 그는 삼촌과의 결투에서 입은 상처로 인해 죽음을 피할 수 없다. 하지만 클로즈업되는 그의 표정은 환희와 평화로 가득하다. 그는 사랑하는 아내를 지켰고, 아버지와 자신의 왕통을 이을 아이들도 남겼으면, 응어리 진 분노도 온전히 터뜨린 후 해소하여 온전한 마음의 평화를 얻는다.
다른 인물들의 서사 역시 복수의 긍정적인 면을 드러내 보인다. 당장 푤니르만 하더라도 그는 단순히 복수의 목표물이 아니다. 왕의 배다른 동생이자 사생아인 그는 자신의 삶을 무시한 이복형에게 복수한 인물로, 비록 영지를 잃어버리기는 하지만 가족들과 따뜻한 삶을 영위한다. 그래서 암레스에게 가족을 한 명씩 잃어가는 그의 모습에서는 간악함보다는 인간적인 연민이 느껴진다. 그의 어머니인 구드룬 왕비가 마찬가지다. 삼촌 푤니르에 인해 강제로 결혼하여 비극적인 삶을 사는 것처럼 보였던 그녀는 알고 보니 푤니르를 추동한 만악의 근원으로 밝혀진다. 그녀는 노예로 팔려와 강제로 결혼하고 후사를 낳아야 했기에 증오 가득 찬 결혼 생활을 끊기 위한 복수를 감행한 것이다. 그래서 구드룬은 분노하는 암레스 앞에서 자신의 선택에 후회가 없었고 지금의 삶이 어느 때보다 행복하다고 일갈한다.
이에 더해 올가와의 관계도 흥미롭다. 일반적으로 신화 속 여성은 남성의 성장을 위한 도구로 활용되어 왔다. 여성과의 사랑을 통해 남성은 상처를 치유하고 질적으로 다른 인간으로 거듭나는 반면, 여성은 분기점 외의 특별한 역할을 맡지 못한 채 해피 엔딩 속에서 존재감을 잃는 경우가 많다. <노스맨>은 다르다. 암레스는 올가를 만나 사랑을 나눈다. 복수를 함에 있어서 적잖은 도움도 받고, 또 서로의 목숨도 구해준다. 하지만 올가는 암레스의 운명에 종속되지 않는다. 암레스는 사랑을 통해 복수심을 잊고 성숙한 인간이 되는 대신 목숨을 걸고 복수하는 늑대로 남을 운명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들의 사랑은 쌍둥이를 잉태한 채 그 관계가 끊어질 때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 암레스는 온전히 마음의 평화를 얻을 기회를 잡고, 올가는 노예에서 벗어나 위대한 왕통을 이어갈 새로운 미래를 개척해 나간다. 이처럼 <노스맨> 속 복수는 단지 과거의 망령에 사로잡힌 싸움이 아니라 바람직하고 정당하며 옳은 미래를 만들기 위해 피할 수 없는 싸움이다.
물론 혹자는 <노스맨>의 복수극이 그리 특별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햄릿과 암레스가 복수에 성공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의 차이를 제외하면 이 영화의 각본은 어디서 본 듯한 기시감을 떨쳐내지 못한다. 이는 2시간을 넘는 137분의 러닝타임 동안 느린 템포로 진행되기에 꽤나 지루한 인상이 남는 이유이기도 하다. 또 멋지게 복수하는 쾌락을 선사한다는 특징은 고전 중의 고전인 알렉상드르 뒤마의 <몽테크리스토 백작>만 봐도 알 수 있듯이 특출 난 게 아닐 수 있다.
이에 더해 신화 원전의 분위기를 재현하는데만 집중한 것도 비판의 여지가 있다. 일례로 작년에 개봉한 <오필리아>는 햄릿을 원작으로 하면서도 햄릿의 아내인 오필리아를 전면에 내세워 햄릿의 비극을 여성의 시선에서, 그간 주목받지 못했던 이들의 시선에서 재해석한 바 있다. 그에 반해 죽음과 폭력, 예언과 마법으로 가득한 <노스맨>의 세계는 굳이 이 신화를 지금 이 시점에 만나야 할 이유가 있는지 의문을 남긴다는 것이다.
하지만 암레스의 세계를 잘 살펴보면 <노스맨>에 숨겨진 시의성이 그 모습을 찬찬히 드러낸다. 화산을 배경으로 암레스는 복수를 위해 목숨을 바쳐도, 싸우다 죽어도 좋다는 마음가짐으로 마지막 결투에 임한다. 바이킹에게 정당한 복수를 위해 싸우다가 죽는 것은 그들의 천국인 발할라로 갈 수 있는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죽을힘을 다해 속에 가득한 울분을 온전히 표출하면, 전장에서 죽은 후 발할라에 들어가 라그나로크가 올 때 오딘의 옆에서 함께 싸우는 영광을 누릴 수 있다. 즉, 이 세계는 복수를 긍정하며, 오히려 되갚아주지 못하는 이들이 손해를 본다는 믿음이 지배적인 세상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노스맨>의 현대적 맥락을 볼 수 있다. 지금의 사회는 외관만 다를 뿐 암레스의 세상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SNS 상에서 오가는 설전, 리벤지 포르노의 등장,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정적을 제거하려는 정치인들과 지지자들의 모습까지. 일상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이 모든 현상은 잔혹하기 이를 데 없는 과거의 수많은 전쟁과 갈등의 변주일 따름이다. 범죄자들에 대한 형량을 강화하자는 목소리가 높아지는 엄벌주의에 대한 갈망 역시 국가나 사법 제도가 복수를 대신한다는 믿음이 약해졌음을 방증한다. 암레스처럼 직접 당한 만큼 돌려주고 정의를 바로잡는 복수의 욕구가 나날이 높아지는 것이다.
그래서 지나치게 충실한 재현 같아 보이는 <노스맨>의 접근법은 결코 과하지 않다. 태곳적 복수 신화를 성공적을 소환하는 심장 박동을 닮은 북소리와 극한의 현실 고증을 통해 신화에 설득력을 더하는 비주얼이 인상적이다. 암레스의 세계와 그의 행적이 가능한 사실적으로, 그리고 실감 나게 느껴질수록 관객 역시 영화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 현실에서 커져가지만 실천에 옮기기 어려운 욕망을 분출하는 공간을 경험할 수 있으므로.
암레스가 발할라에 들어가는 결말이 대표적이다. 화산에서 죽어가는 그의 앞에 하늘이 열리고, 발키리가 날개 달린 말을 타고 내려와 그를 발할라로 이끄는 모습은 누가 보더라도 환상이다. 하지만 이는 복수를 통해 평화를 찾은 암레스의 심정을 그 어떤 방식보다도 훌륭하게 반영하는 연출이기도 하다. 성인식부터 전설 속의 검을 얻는 장면에 이르기까지 복수에 미친 그가 다양한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모습을 이미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지나치게 재현적이고 현대적 맥락에서는 동 떨어져 있는 듯 보이는 <노스맨>에서는 원형적인 복수 신화를 통해 현대 사회를 반추하게 만드는, 단순한 영화적 재현 이상의 의미를 찾아볼 수 있다.
A(Acceptable, 무난함)
태곳적 복수 신화를 재소환하는 현대의 야만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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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가족 (Shoplifters, 2018)
- 어느 가족 (万引き家族, Shoplifters, 2018)
개봉일 : 2018.07.26. (한국 기준)
감독 : 고레에다 히로카즈
출연 : 릴리 프랭키, 안도 사쿠라, 마츠오카 마유, 키키 기린, 죠 카이리, 사사키 미유
‘서로를 선택한 진짜 가족의 이야기’
가족이란 무엇일까? 함께 밥을 먹는 사이? 아니면 한 집안에 사는 사이? 깊은 신뢰감을 가진 사이 또는 혈육을 말하는 걸까?
<바닷마을 다이어리>와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등 여러 작품을 발표하며, 가족과 인생에 대한 깊은 이야기를 서정적이고 아름답게 풀어내기로 유명한 ‘고레에다 히로카즈’감독은 <어느 가족>이라는 영화를 통해 또 다른 가족의 의미를 전한다.
제3자가 바라보기엔 불완전하고, ‘가족’이란 단어가 어울리지 않는 가족. 하지만 또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면 너무도 단란한 가족. 조금은 가난하고, 또 난잡한 집안이지만 가족들 사이엔 웃음이 끊이지 않는다. 아이들은 물건을 훔치고, 아빠는 일용직으로 근무하며, 엄마는 마트에서 근무한다. 노쇠한 할머니는 느릿하고 부드러운 손길로 아이들의 손을 어루만진다. 이 가족은 완전하진 않지만 행복하다.
행복해 보이는 이 가족엔 숨겨진 비밀이 있다. 사실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리고 가볍지도 않다. 그 비밀은 새로운 가족인 ‘유리’의 등장과 함께 조금씩 가족들에게 다가온다. 어깨가 움츠러들 만큼 추운 겨울밤, 어리고 가냘픈 아이 ‘유리’는 누군가를 기다리듯 길거리를 헤매고 있다. 그리고 오사무와 노부요, 아키, 하츠에, 쇼타는 작은 아이를 복작이는 집안에 앉히고 밥을 먹인다. 아직 겨울이 오진 않았지만, 찬바람이 부는 날 밤 따스한 국물 요리를 먹는듯한 포근한 느낌이 들 만큼, 이 가족의 분위기는 따스하다.
어느 가족 시놉시스
할머니의 연금과 물건을 훔쳐 생활하며 가난하지만 웃음이 끊이지 않는 어느 가족. 우연히 길 위에서 떨고 있는 한 소녀를 발견하고 집으로 데려와 가족처럼 함께 살게 된다. 그런데 뜻밖의 사건으로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게 되고 각자 품고 있던 비밀과 간절한 바람이 드러나게 되는데…
* 아래 내용부턴 스포가 있을 수 있습니다 *
마트에서 손발을 맞춰 음식을 훔치는 아이와 아빠로 보이는 남자. 두 사람은 아이의 가방에 먹을 것을 담고, 저녁으로 먹을 고로케를 사서 집으로 돌아간다. 따스한 집이 그리울 만큼 차가운 늦겨울 밤, 오사무는 며칠째 집 앞을 헤매고 있는 작은 소녀를 집안으로 들인다. 옹기종기 모여앉은 한 가족의 저녁상에 새로운 변화가 생긴다.
할머니 하츠에는 작은 아이를 살펴보던 중, 아이의 몸에 상처가 가득한 것을 발견한다. 아이의 이름은 ‘유리’. 오사무는 유리를 데려다주기 위해 유리를 업고 집을 나선다. 그렇게 도착한 집앞, 그리고 안에서 들려오는 부부 싸움 소리. 오사무와 노부요는 유리를 업은 채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오사무는 건설 일용직, 노부요는 마트 직원, 아키는 접대를 하고, 하츠에는 전 남편의 위자료와 연금으로 생활비를 충당한다. 집은 하츠에의 집인듯하다. 가난하고 불안정한 집안의 상태. 학교에 가야 할 나이인 쇼타는 학교에 다니지 않고, 마루에 걸터앉아 책을 읽는다.
“집에서 공부할 수 없는 애들이 학교에 가는 거야.”라며 발보다 큰 슬리퍼를 질질 끌고 걸어가는 쇼타의 모습이 의연해 보이면서도 짠하다. 오사무는 다 지어지지 않은 아파트의 문턱을 지나며 “나 왔어-”라고 말해본다. 평생 가져볼 일 없을듯한 번듯한 아파트. 이 가족은 가난하다. 그리고 사회의 끝에 간신히 걸쳐진 채 위태롭게 버티고 있다. 뜨거운 여름 날씨와 땀에 흠뻑 젖은 가족들의 티가 그들의 숨 가쁜 하루를 시각적으로 보여주는듯하다.
버거운 하루하루를 버티게 해주는 건 ‘가족’이라는 존재뿐이다. 오사무, 노부요, 아키, 하츠에, 쇼타, 그리고 유리. 6명으로 늘어난 만큼, 이 가족은 조금 더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하츠에와 쇼타는 밀개 떡을 좋아한다는 유리를 위해 음식을 양보하고, 오사무는 유리를 쇼타의 ‘여동생’이라고 말한다. 어딘가 어색하고 군데군데 구멍이 보이는듯하지만, 이들은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다.
이 가족은 전 부모에게서 고통받았을 ‘쥬리’를 ‘린’이라는 단발머리의 소녀로 만들어준다. 쥬리라는 이름의 소녀가 TV에 나온 날, 노부요는 유리의 머리를 잘라준다. 아키는 “언니도 다른 이름이 있어”라며 유리와 자신 사이의 유대감을 표시한다. 유리는 “린이 더 좋아.”라고 답하며 머리를 자른 자신의 모습과, 현재 가족들에 대한 만족감을 표시한다.
“부모는 선택할 수 없으니까,”
대부분의 ‘가족’들은 서로의 선택이 아닌, 혈육으로 이루어진다. “가족 같은 사이”라고 표하는 가까운 사이 말고, 사회적으로 인정하는 ‘진짜 가족’의 경우 말이다. 하지만 이 가족은 서로를 ‘선택’했고, 새로운 가족이 된다. 노부요는 유리가 처음 만나던 날 입고 있었던 옷을 불태우며 “사랑한다면 이렇게 하는 거야.”라고 말한다.
노부요와 유리가 함께 목욕을 하던 날, 노부요는 다리미에 데인 상처가 있는 유리의 팔을 보게 된다. 유리는 내게도 같은 상처가 있다며 노부요를 바라보고, 노부요의 상처를 말없이 쓰다듬는다. 노부요는 그런 유리를 바라보며 “괜찮아, (상처는) 다 나았어.”라고 말하지만, 유리는 아직 나은 게 아니라고 말한다. ‘아직 다 낫지 않은 건’ 노부요의 상처였을까, 아니면 유리의 마음이었을까?
노부요는 유리가 더 이상 상처받지 않으며 ‘린’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가족이 되고, 행복하길 바란다. 노부요가 처음 본 유리는 그저 집 앞에 앉아있던 어린 여자아이였지만, 이젠 딸과도 같은 소중한 존재가 된다. 노부요는 유리를 위해 직장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온다.
습한 여름날, 노부요와 오사무는 오랜만에 둘만의 시간을 보낸다. 직장을 잃었다는 노부요에게 오사무는 옛날처럼 술집을 하거나, 다른 일도 있다며 일부러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오사무의 이야기를 듣던 노부요는 “나 지쳐버렸어.”라는 한마디로 분위기를 무겁게 누른다. 그 순간 소나기가 내린다. 그 후, 노부요와 오사무는 평소와 다른 특별한 시간을 보낸다. 이 특별하고 행복하고, 또 평화로운 순간은 소나기처럼 순식간에 지나가버린다.
행복했던 마지막 바다 나들이. 하츠에는 손을 맞잡은 채 파도를 피하고 있는 다섯 명을 바라본다. 행복한 엄마 아빠와 3남매로 보이는 모습. 그녀는 평온한 표정으로 고마웠다고 속삭인 후, 조용한 죽음을 맞이한다. 하츠에는 오래된 집과 계좌 속 11만 6천엔, 보석함에 든 3만엔. 그리고 ‘어느 가족’의 존재를 남기고 세상을 떠난다. 하츠에가 떠난 후, 이 가족은 순식간에 흩어지기 시작한다.
쇼타가 경찰에 붙잡히고, 남은 가족들의 도주는 무산된다. 이 가족의 생활은 엽기적인 유괴와 살인 사건으로 세간에 소개된다. 전 남편을 죽이고 묻은 여자와 남자, 남편을 빼앗은 가족에게서 돈을 받은 할머니, 그리고 그 할머니와 살고 있던 남편을 빼앗은 가족의 딸. 유괴된 듯 보이는 어린아이 둘. 할머니는 집안에 묻힌 채 발견된다. 사람들은 그 누구도 이들을 하나의 가족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누군가가 버린 걸 주웠습니다.”
형사들은 하츠에의 시신을 유기한 것이라며 노부요를 몰아붙인다. 노부요는 형사에게 이렇게 답한다. 내가 유기한 것이 아닌, 누군가 버린 걸 주웠다고 말이다. 이건 사실이다. 오사무는 차 안에 버려진 쇼타를 ‘아들’처럼 키웠고, 집 앞을 헤매던 유리를 ‘딸’로 맞이한다. 그리고 전 남편과 그의 가족으로부터 버려져 혼자 살고 있는 하츠에와 아키의 가족이 된다. 누군가에게 버려지고, 사회가 외면하고 있는 인물들. 그들은 함께 모여 서로를 보듬고, 가짜 가족이 아닌 진짜 가족이 된다.
“두 아이는 당신을 뭐라고 불렀어요?”
오사무는 쇼타에게 자신을 ‘아빠’라고 불러보라고 말하고, 유리를 ‘여동생’이라고 불러보라고 한다. 하지만 쇼타는 ‘아빠’라는 말을 하지 못한다. 노부요는 고민하고 있는 쇼타에게 그 말이 중요한 건 아니라며 위로한다. 하지만 노부요도 ‘엄마’라는 말을 듣길 바랐을 것이다. 쇼타와 함께 시장을 걸어가며 “어머니, 저녁 반찬으로 고로케 어떠세요?”라고 묻는 상인의 말에 노부요는 웃음을 숨기지 못한다. 쇼타는 웃고 있는 노부요를 바라보며 “어머니라고 불리면 좋아요?”라고 묻는다. 불임으로 인해 아이를 낳지 못한 노부요에게 쇼타와 유리는 가슴으로 낳고, 사랑으로 키워낸 아이들이었다.
노부요는 남은 가족들을 지키기 위해 홀로 죄를 뒤집어쓴다. 모든 일은 혼자 꾸민것이며, 다른 이들은 몰랐다고 진술한 그녀는 5년형을 받게 된다. 그 후, 옷을 흠뻑 젖게 할 만큼 습한 여름이 지나고, 겨울이 찾아온다. 노부요는 더 이상 이 가족을 유지할 수 없음을 깨닫고, 우린 쇼타에게 역부족인 사람이라고 말한다. 눈이 잔뜩 쌓인 날 밤, 등을 기대고 누운 오사무와 쇼타는 ‘가족’이라는 관계를 깔끔하게 정리한다.
“아빠에서 아저씨로 돌아갈게.”
오사무는 더 이상 쇼타에게 아빠라는 말을 바랄 수 없음을 느낀다. 쇼타는 오사무의 집에서 하룻밤을 보낸 후, 버스를 타고 떠난다. 오사무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떠나는 버스를 따라 달린다. 버스는 멈추지 않았고, 둘 사이의 거리는 점점 벌어진다.
‘쇼타’는 끝까지 오사무를 ‘아빠’라고 부를 수 없었다. 오사무와 쇼타는 성장기인 쇼타의 고민을 공유하고, 위로하고, 또 함께 저녁 찬거리를 사들고 집으로 돌아오는, 여느 ‘부자’와 다르지 않은 일상을 보내지만 ‘사회적 통념’상 오사무는 쇼타의 아빠가 될 수 없었다. 오사무가 아빠이기를 포기한 마지막 순간, 쇼타는 오사무가 들을 수 없는 거리에서나마 ‘아빠’라는 단어를 소리 없이 읊어본 후, 입속으로 삼킨다.
그리고 뒤이어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간 유리의 모습이 나온다. 유리는 쇼타에게 배운 대로 삼 형제, 육개장.. 등을 함께 말하며 숫자를 세고 있다. 숫자 셈이 반복되고, 유리는 누군가를 다시 기다리듯, 계속해서 집 앞을 서성이고 있다. 유리는 오사무와 쇼타가 다시 자신의 앞에 나타나길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닐까
늦겨울에 서로의 손을 잡으며 만들어진 진짜 가족은 끈적한 공기와 뜨거운 햇살이 비치는 여름을 보내고, 다시 차가운 겨울을 맞이한다. 소나기처럼 짧았던 행복한 가족의 시간이 지나가고, 사회는 이들에게서 ‘가족’이라는 타이틀을 앗아간다. ‘아빠’ ‘엄마’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서로를 불러보기도 전에 끝나버린 ‘어느 가족’의 이야기였다.
<어느 가족>을 보면서 아빠, 엄마, 가족이라는 존재는 정확히 어떠한 한 단어로 정의할 수 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상처로 가득한 6명이 함께 모여 만든 이 가족 또한 ‘진짜 가족’이다. 전 남편에게서 도망쳐온 노부요와 노부요를 사랑하는 오사무. 자해를 일삼던 소녀 아키, 전남편과 가족에게서 버림받은 노인 하츠에, 도박장 앞에 버려진 아이 쇼타, 학대와 방치를 일삼던 부모에게서 버려진 유리. 사람들은 이 가족을 보며 ‘가족’이라는 단어를 떠올리지 않는다. 뉴스를 보는 이들에게 하츠에는 희생된 할머니, 노부요와 오사무는 유괴범, 아키와 쇼타, 유리는 아무것도 모른 채 붙잡힌 아이들이다.
하지만 이들은 함께해서 행복했다. 서로에게 숨기고 있는 비밀이 있었을지라도 말이다. 함께 저녁을 먹으며 서로를 바라보고, 손발의 따스함으로 당신의 하루가 어땠을지 짐작해보고, 미워하기도 하고 서로를 의지하기도 하는 이들은 진짜 가족이다.
* 본 콘텐츠는 블로거 Kyung film 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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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민자의 시선에서 바라본 ‘우리는 인연일까?’
선택은 하나를 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를 버리는 것이라고 누군가 말했다. 인생을 살며 다양한 선택을 하는 삶 속에서 우리는 수많은 것을 버리거나 두고 온다. 때때로 미련이라는 게 남아 스스로 제쳐놨던 것들을 떠올리고, ‘만약’이라는 마법을 통해 상상으로 그 삶을 소환한다. <패스트 라이브즈>는 인연이라는 소재로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삶과 그 안에 자리 잡은 인물과 관계를 마주하며,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의 삶을 돌아본다. 그리고 다중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이민자들을 마음을 대변한다.
나영이자 노라(그레타 리)는 12살에 한국에서 캐나다로 이민을 간다. 한국에서의 삶, 그 안에서 꽃피울 미래, 그리고 좋아하는 같은 반 친구 해성(유태오)을 놔두고. 12년 후, 노라는 연극 극작가의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던 중 우연히 페이스북을 통해 해성의 메시지를 확인한다. 화상채팅으로 재회한 이들은 마치 어제 만난 친구처럼, 때론 연인처럼 연락을 주고받으며 가까워진다. 하지만 각자 처한 상황과 꿈이 달랐기에 이들은 잠시 연락을 멈춘다. 이후 노라는 예술인 레지던시에서 만난 유대인 남자 아서(존 마가로)와 가까워지고, 해성은 상하이 어학연수 중 만난 여성과 사랑에 빠진다. 그로부터 12년 후, 아서와 결혼을 한 노라는 자신을 만나기 위해 뉴욕으로 건너온 해성을 만난다.| 선택하지 않은 삶을 마주하다!
12살 때 그녀가 캐나다로 이민을 가지 않았더라면, 꿈을 잠시 멈추고 해성을 보기 위해 한국으로 갔더라면, 해성에게 자신의 진솔한 마음을 고백했더라면 어떤 삶이 펼쳐졌을까? <패스트 라이브즈>는 노라가 선택한 삶보다 선택하지 않은 삶에 더 집중한다. 감독은 ‘만약’을 대동한 가능성의 문을 여는데, 이 의도는 첫 장면에서부터 잘 나타난다. 어느 바에 앉은 한 커플은 맞은편에 앉아 있는 노라와 해성, 그리고 아서를 보고 이야기를 나눈다. 노라와 해성을 남매로 보거나, 이들이 부부고 아서가 현지 가이드라고 말하는 등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마치 노라가 가지 않은 길을 대신 가는 것처럼 말이다.
이들을 바라보는 시선에 따라 그 모습은 달라지는데, 영화는 모든 만남과 헤어짐이 전생의 인연에서 비롯된다는 동양 사상을 가져와 느슨하지만 운명적인 관계를 만든다. 인연은 꼭 다시 만난다는 말처럼 24년 만에 만난 첫사랑 노라와 해성은 그 자체로 애틋한 사랑의 감정을 주고받는다. 미국으로 와 극작가의 꿈을 키우고 결혼을 선택한 노라에게 지금은 잊힌 ‘나영’이라는 이름을 부르며 12살 시절의 순수한 감정을 지닌 해성은 그 자체로 순수했던 자신의 감정이자 과거를 향한 향수다. 자신이 선택하지 않았기에 더 궁금하고 가까이하고 싶을 터. 감독은 자연스럽게 이 감정을 사랑의 동력으로 치환해 둘의 감정을 점진적으로 고조시키고, 선택에 따른 관계에 대한 생각을 깊게 가져간다.| 인연이 불러온 이별, 성숙한 성장
통속적인 멜로를 거부하듯 극 중 인연이란 카테고리는 노라와 해성은 물론 아서까지 확장한다. 이들을 옆에서 지켜보는 그는 미묘한 감정에 휩싸인다. 아서는 해성과의 만남 또한 몇백, 몇천 겁(劫, 헤아릴 수 없는 무한히 긴 시간)의 선한 인연이 쌓였기에 이뤄졌다는 생각을 하고, 노라와 해성의 해후를 받아들인다. 이처럼 ‘인연’이라는 개념은 기존 멜로 장르와의 차별화 포인트인 동시에 동서양을 막론하고 이 관계를 이해시키는 신비로운 힘으로 작용한다.
노라와 해성의 관계는 닿을 듯 말 듯한 이들의 거리만큼이나 절제와 담백, 여백의 미가 담겨 있다. 서로 현재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은 언제나 한 발은 자신의 세계에 걸쳐놓는 것처럼, 감정에 매몰되지 않는다. 감정을 표출하기보다는 절제하고, 많은 말을 뱉기보다는 침묵이란 여백을 택한다. 그래서 더 애틋하면서도 아련한 감정이 밀려오는데, 특히 마지막 이별 장면은 극에 달한다. 그동안 끊어졌던 연이 다시 이어질 듯 하면서도 이어지지 않는 장면은 안타까움과 슬픔을 동시에 가져온다. 현재의 삶을 위해 아름다운 과거의 시간을 부여잡지 않고 떠나보내는 그 순간의 감정은 나라와 인종을 넘어 누구나 살면서 한 번쯤 경험했던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한 걸음 더 성숙한 성장을 꾀한 세 사람의 모습은 깊은 여운을 남긴다.| 다중 정체성을 갖는 이민자의 고민
<패스트 라이브즈>는 심심하면서도 담백한 멜로 드라마이지만, 그 안엔 매번 자신의 정체성에 혼란을 겪고 있는 이민자의 삶이 녹아져 있다. 연출과 각본을 맡은 셀린 송은 <넘버 3>의 송능한 감독 친딸로, 한국계 캐나다인이다. 실제 이민자의 삶에 대한 생각과 고민을 이 작품에 녹여낸 감독은 노라로 하여금 코리안 디아스포라 이야기를 담는다. 영화 <미나리> 시리즈 <파친코> <성난 사람들> 등 다수의 코리안 디아스포라 작품이 나온 상황에서, 셀린 송은 이 작품들보다 이민자 개인의 깊은 내면적 고민을 다룬다.
한국이자 캐나다인, 그리고 미국인인 노라의 경우, 현재의 삶은 미국인이다. 한국, 캐나다의 삶은 자신의 선택에 의해 놓고 온 인생(또는 전생)이다. 노라가 해성을 만나 겪는 일련의 내면적 갈등은 자신이 미국인의 삶을 살기로 선택했지만, 그럼에도 서양 문화권에서 아웃사이더로 사는 한국인, 더 나아가 동양인들의 정체성 고민과 아픔이 녹아 있다.
“네가 기억하는 나영이는 여기에 존재하지 않아. 근데 그 어린애는 존재했어. 네 앞에 앉아 있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없는 건 아니야.”
셀린 송 감독은 해성에게 말하는 노라의 이 대사에 그 복잡한 심경을 내비친다. 그리고 슬프고도 힘겹게 해성과의 성숙한 이별로 마음속 존재했던 나영이와 작별을 고한다. 어느 인터뷰를 통해 감독은 자신은 캐나다인이라고 밝힌 것처럼, 노라 또한 더 이상 한국인이 아닌 미국인으로 살아갈 것이다.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지 않고 현생의 삶에 최선을 다하기 위해.문어체 대사와 언어의 문제에 봉착하며, 섬세한 연기와 감정선이 종종 일탈하지만, 그럼에도 인연으로 묶인 이들의 관계는 섬세하고 아름답게 그려진다.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삶을 가슴에 묻고 각자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주인공들. 억겁의 시간이 지난 후 이들은 재회할 것이다. 이번 생은 선한 인연 중 하나였으니까.
사진제공: CJ ENM
평점: 3.5 / 5.0
한줄평: 이민자의 시선에서 바라본 ‘우리는 인연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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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괴상한 퀴어 로맨스'로 사랑의 조건을 질문하다
7★/10★
1972년 독일 쾰른. 칸영화제에서 수상하는 등 국제적으로 저명한 영화감독 피터가 귀찮은 듯 침대에서 일어난다. 무언가 만족스럽지 않은 표정이다. 새로운 영화의 제작이 결정되었는데도 그렇다. 곧 그 이유가 밝혀진다. 피터의 영화로 데뷔한 후 지금은 할리우드 스타가 된 친구 시도니와 대화하며, 피터는 얼마 전 동성 애인과 헤어진 후 상실감에 시달리고 있다고 고백한다. 영화의 예술성에 심취하여 세상의 모든 속물을 비웃는 피터는 자신의 사랑 역시 영화와 같아야 한다고 믿는다. 즉, 피터는 지금 ‘비련의 여주인공’ 상태다.
시도니는 그런 피터에게 호주에서 온 배우 아미르를 소개한다. 노동계급 출신으로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잘 풀리지 않는 결혼 생활에서 벗어나 유럽으로 건너온 아미르는 단숨에 피터를 사로잡는다. 복잡한 사연과 그로 인한 깊은 슬픔. 무엇보다 아름다운 육체와 매혹적인 얼굴. 아미르는 피터의 외로움을 달래줄 최적의 인물로 보인다.
피터는 곧바로 작업을 건다. 물론, ‘작업’은 제삼자의 용어다. 피터는 언제나 사랑에 진심이기에 그가 자기감정을 ‘작업’과 같은 경박한 언어로 부를 일은 없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영향력 있는 영화감독이 배우 지망생에게 끈적한 눈빛을 보내며 ‘너는 재능이 있어. 내가 꽃피워줄게’라고 말한다면, 이건 사랑이 아닌 거래 제안에 가깝다. 나의 영향력과 너의 매력을 교환하자는 거래 말이다. 하지만 ‘사랑에 진심’인 피터는 이를 인식하지 못한다. 자신과 아미르가 그 모든 걸 초월해 진정한 사랑에 다다를 수 있다고 확신한다.
둘은 곧 연인이 된다. 하지만 피터 마음대로 되는 건 여기까지다. 아미르는 영리하고 영악하다. 자신과 피터의 관계가 사랑의 외피를 두른 거래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는 항상 자기 곁에 있어 달라는 피터의 구걸에 가까운 친밀성 요구에 적당히 거리를 두며 늘 피터를 불안하게 한다. 피터는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아미르 때문에 미칠 지경이다. 그러나 매번 불평하면서도 아미르를 떠날 수는 없다. 10대 청년마냥 사랑의 열병에 몸과 마음이 잔뜩 달은 피터가 아미르에게 완벽히 종속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피터 본 칸트〉는 사랑에 관한 성찰과 질문을 던진다. 먼저 두 사람이 마주한 조건을 보자. 사회적 영향력을 가진 나이 든 남자와 매력 자본을 지닌 젊은 여자의 이성애 관계는 젠더에 따라 권력이 불균등하게 배분된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랑’의 형태다. 이러한 교환 관계는 공정하지 않다. 남자는 나이가 들수록 돈과 명예를 얻기가 쉽지만, 여성이 가진 자원(매력 자본)은 그 반대여서다. 교환하는 자원의 불균등한 가치와 지속성으로 인해, 남자는 여자의 매력 자본을 양껏 소진시킨 후 새로운 대상을 물색하러 떠난다. 때문에 사랑의 불안증에 시달리는 건 대개 여성이다.* 더 젊고 예쁜 여성이 나타나 자기 자리를 뺏어버릴까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러나 〈피터 본 칸트〉에서는 반대다. 돈 많고 영향력 있는 피터가 대개 이성애 관계에서 여성의 몫이었던 비련을 떠맡는다. 퀴어적 비틀기로 인해 가능한 일이다. 중년의 배 나온 백인이자 업계에서 큰 성공을 거둔 남자가 상실의 우울감에 젖어 손에 술잔을 들고 슬픈 음악에 맞춰 홀로 느릿느릿 춤을 추는 장면은 압권이다. 피터는 아미르와 자기 사이에 놓인 관계의 조건을 성찰하지 못하고 자기감정을 사랑이라 부른다. 영화는 시종일관 이런 피터의 감정에 초점을 맞추면서도 피터가 얼마나 많은 것을 가졌는지를 종종 일깨워줌으로써 적당한 거리감을 유지한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풍자의 재미가 생겨난다. 상대를 권력관계에 따른 조건의 교환물로만 ‘소유’하고자 하면서도 이를 진정한 사랑이라고 부르는 무능한 존재/관념에 대한 풍자 말이다. 영원히 사랑과 비련의 주인공으로 남고자 하는 피터는 끝내 자신의 사랑 관념을 성찰하는 데 실패한다. 그리하여 권력관계에 기인한 친밀성 교환을 사랑이라 착각하는 어리석고 딱한 사람의 표상으로 박제된다. 폭주 후 엄마 품에 안겨 자장가를 들으며 잠자는 피터의 모습에서 알 수 있듯, 이는 유아기적 퇴행이다. 우리 중 몇이나 여기서 자유로울까?
친밀성을 물질과 별개인 ‘순수한 것’으로 보는 통념은 경계해야 한다. 현실에서 친밀성이 작동하는 방식은 그보다 훨씬 정교하고 복잡하다. 하지만 불평등한 자원의 교환을 ‘사랑’이라 부르는 형태 또한 경계해야 마땅하다. 〈피터 본 칸트〉는 평등한 사랑이란 무엇인가를 질문하기 위해 젠더/섹슈얼리티를 비튼 시도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물론 예외도 있다. 여성의 매력이 압도적으로 강렬한 경우가 그렇다. 그러나 남성이 세월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레 사회구조적으로 사랑에서 유리한 위치에 자리하는 것과 달리, 여성은 개인의 매력으로만 이 구도를 반전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이는 여전히 문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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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0회 서울국제어린이영화제 추천작 ] 어린이와 애니메이션에 대하여
서울국제어린이영화제만의 특별한 프로그램, 바로 씨네키즈 플러스 입니다!
씨네키즈 플러스 뒤에 붙은 번호는 연령별로 차이가 있는 아이들의 특성을 반영해서 5,10,14 로 나누어져 구성됩니다.
제가 본 씨네키즈 플러스 10은 규칙과 질서의 세계에 적응해가는 아이들을 위해 다른 각도로 세상을 바라보거나, 예술적 상상력이 돋보이는 작품으로 선별했다고 합니다. (자세한 설명은 서울국제어린이영화제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첫번째 상영 영화는 "피벗" 입니다.
* 여성다움과 남성다움은 지양해야 하는 표현이지만, 애니메이션의 주제 상 구분하여 적겠습니다.
영화 피벗의 주인공은 농구를 좋아하고 여성스러운 옷들 (드레스나 원피스) 보다는 캐쥬얼한 옷들을 좋아합니다. 화장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주인공의 어머니는 자꾸 화장품과 원피스들을 건네주는데요, 그 사이에서 주인공은 어머니의 말을 들을 것인지, 아니면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을 얘기할 것인지 갈등하는 내용을 담은 애니메이션입니다. 원피스의 꽃들이 눈을 달린 몬스터처럼 변하는 연출 방식이 좋았습니다!
두번째 상영 영화는 "여름눈"입니다.
영화의 제목이 여름눈인 이유는 여름과 눈은 공존할 수 없는, 일어나면 안되는 일이기 때문에 이 애니메이션의 상황이 벌어나질 않기 위해서 라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해녀가 돌고래를 만나 구해주는 모습이 애니메이션 적으로 감각적으로 표현되어 눈이 즐거웠던 애니메이션이었습니다.
환경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해볼 수 있는 애니메이션 작품이었습니다!
세번째 영화는 "돼지공은주" 입니다.
돼지공은주는 보면서 동화책을 토대로 제작되었다는게 느껴졌다. 어린이 동화에서 느껴질만한 상상력이어서 그런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시놉시스는 평범한 5학년 공은주가 자신을 짝사랑하던 남자애로부터 돼지공주라는 별명을 얻게 된 이후, 집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반지를 받게 되고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은 영화입니다.
반지라는 소재는 좋았지만, 반지를 발견하게 되는 계기도 개연성이 높지는 않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사랑해주는 남자를 만난다는 것이 다른 영상들에서 많이 나왔던 반전요소이기에 조금 아쉽게 느껴졌습니다. 엄마의 대사를 통해서 모든 설정과 얘기를 말해준 것도 아쉬운 부분이었습니다. 하지만 전하려는 메세지는 좋았습니다!
네번째 영화는 하회, 허! 이다.
이 작품은 중간에 랩이 들어가서 신선하다고 느껴졌던 애니메이션이다. 전통적인 느낌과 노래를 섞어서 신명나게 표현한 점이 좋았습니다.
다섯번째 영화는 "내 이름은 말룸" 입니다.
말룸은 자신의 이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담은 애니메이션이다. 말룸이 자신의 이름을 알게 된 후 세상이 변하는 모습을 노래와 함께 너무 아름답게 잘 표현한 영화였습니다.
씨네키즈 플러스 10은 제가 가장 처음으로 본 애니메이션들이었는데요! 다양한 영화를 한번에 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또, 장편과 달리 단편, 애니메이션들은 영화제가 아니면 따로 찾아보기 어렵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영화제에 오시면 단편과 애니메이션에 대해서 더 관심을 가져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영화제에서만 누릴 수 있어요!!! 아이들과 손잡고 와서 보기 너무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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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호한 희망에서 초록빛 진실로
델핀(마리 리비에르)은 휴가 기간 동안 몇 차례 눈물을 흘린다. 사람들 속에서 오히려 소외감을 느끼는 탓이다. 친구와의 휴가 계획이 무산되고 혼자 긴 여름휴가를 보내야 하는 상황에서 델핀은 막막함을 느낀다. 어디에서 누구와 시간을 보내야 할지 알 수 없다. 델핀은 그저 삶의 지겨움과 무료함을 벗어나고 싶을 뿐이다.
델핀의 우울이 내성적이고 소극적인 성격 탓 만은 아니다. 확고한 이상을 지니고 매사에 진지한 사람은 환영받기 어렵다. 채식을 하고, 가볍게 다가오는 남자들을 거부하며 종종 울적함에 눈물을 흘리는 여자를 골치 아프게 바라보는 시선은 델핀을 위축시킨다. 테이블 위를 오가는 수많은 대화 속에서 델핀은 고립된 섬처럼 동떨어져 있거나 위태로운 배처럼 흔들린다. 델핀은 언제나 자신의 입장을 증명하거나 태도를 지적받는 상황에 놓인다. 나는 당신과 다르다. 이 당연한 명제는 ‘우리가 서로 다르다’라는 관용이 아닌 ‘너는 우리와 다르다’라는 분리의 의미로 쓰인다. 왜 남자를 가볍게 만나지 않고, 적극적인 행동을 하지 않는지 그리고 왜 고기를 먹지 않는지에 대한 논쟁은 모두 분절적인 ‘다르다’로 끝난다. 델핀은 갈 곳이 없다고 아무 곳이나 가고 싶지 않고, 만날 사람이 없다고 아무나 만나고 싶지 않다. ‘귀찮은 녀석’이 아닌, 낭만적인 남자와의 만남을 원한다. 타협하지 않는 신념을 가진 완고한 델핀은 어찌해야 할지 모를 긴 휴가기간 동안 내면의 우울을 마주하게 된다.
낯선 타인과 진심으로 교감할 수 있을까? 문제는 마음에 달렸지만 조심스러운 델핀에게는 쉽지 않다. 델핀은 누구에게도 쉽게 답하지 않는다. 아이들과 잘 어울리지만 그저 호기심 많은 아이의 질문도 재차 의심한다. 사람들을 향한 무관심한 태도는 이런 예민함에서 비롯된다. 외부의 자극과 내면의 감정에 예민한 델핀은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가질 틈이 없다. 델핀은 온몸으로 ‘나를 내버려 둬’라고 외치는 동시에 자신의 인생에 누군가가 다가와 주기를 바란다. ‘녹색 광선’은 델핀의 낭만이다. 관계 속에서 느끼는 소외감과 타인과 진심으로 교감할 수 없는 현실을 벗어날 수 있다는 소망이다. 우리가 아주 잠깐이라도 타인의 진심을 알 수 있다면 복잡한 관계 속 외로움이 한층 덜어질 것이다. 타인의 진심을 알 수 있다는 미신을 믿어보는 것은 델핀 자신이 타인에게 진실로 대하기 때문이다. 해변에서 만난 친구 엘레나처럼 관심 없고 싫은데도 좋은 척, 관심 있는 척 가벼운 관계를 즐길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델핀은 자신이라는 모습 외에 꾸며낼 가면이 없기 때문에 “보여줄 모습이 없다”. 델핀은 자신의 믿음밖에 보여줄 것이 없다. 스스로를 속여 가며 관계를 맺으려 하지 않는 델핀은 상대방 역시 그러하길 바라나, 타인은 나와 다르다.
녹색 광선은 쉽게 볼 수 없으며 찰나의 순간 빛났다가 사라진다. 델핀은 역에서 우연히 마주친 남자와 녹색 광선을 기다린다. 인생에 무언가 찾아오길 바라지만 그게 무엇인지도 모르고 기다리던 델핀은 이제 선명한 녹색 빛을 기다린다. 낭만은 기다리는 사람에게 찾아오는 걸까? 그러나 델핀이 무작정 기다리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동안 자신만의 미신을 따라 특별한 표시들을 찾아왔다. 직감이 이끄는 대로 뭔가를 예고하는 듯한 녹색 카드를 줍고 온갖 녹색의 단서들을 마음에 담았다. 델핀의 마음을 이끄는 것은 이 작은 미신적 단서들이다. 몇 개의 카드와 전단지, 상점의 간판이다. 에릭 로메르는 이 미신적 단서들을 갑작스러운 클로즈업과 의뭉스러운 음악과 함께 비춘다. 한 걸음 떨어져 델핀을 관찰하던 카메라가 그의 내면을 포착하는 순간이다. 미신적인 내면의 시점은 델핀에게 이입하는 것을 방해한다. 델핀에게 이입하지 않고 믿지 않을수록 희망의 모호함은 두드러진다. 델핀의 내면에서 모호한 희망이 확신으로 변하고 있음을 우리는 알지 못한다.
별 것 아닌 카드도 녹색이라는 이유로 의미 있는 물건이 된다. 델핀은 누군가가 자신을 선택하기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미신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기준으로 선택을 내린다. “녹색이 행운의 색깔“이라는 미신은 세상을 보는 하나의 관점이다. 타인이 아닌 자신의 기준으로 세상을 보는 관점을 정하고 해석한다. ‘녹색 광선’이라는 희망은 현실적으로도 영화적으로도 허구처럼 보인다. 아무도 모르고 믿지 않을지라도 델핀은 내면의 나침반을 따른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희망은 내면의 상태다. 녹색광선이 진짜이든 아니든, 그것이 정말 진심을 알게 해주는 힘을 지녔든 아니든 그것을 보는 순간 타인의 진심을 헤아릴 틈이 생긴다. “오! 시간이 되니 심장이 뛰는구나” 영화가 시작하기 앞서 등장한 랭보의 시 한 구절은 논리적이지 않은 내면의 희망을 확신에 찬 어조로 노래한다. 영화적 거짓이든, 미신이든 상관없이 델핀은 초록빛의 진심을 보았다. 우리는 델핀의 진심을 보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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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탑건이 해군? 당신이 모를 수 있는 5가지 사실들ㅣ탑건:매버릭ㅣ탑건2ㅣ탑건 매버릭ㅣ톰 크루즈ㅣ
'탑건2'는 2019년 7월 12일 개봉 예정이었으나
톰 크루즈가 직접 전투기를 몰기 위해서
촬영까지 중단하고 2020년으로 개봉을 연기했다고 합니다영화 역사상 최초로
배우가 직접 전투기를 몰게 되는데...
진짜 이 정도면 이 형은 기네스북은 물론이고
인간문화재에도 등재되어야 할 수준지금의 톰 크루즈를 있게 한 그 영화가
34년 만에 속편 "탑건:매버릭"으로 돌아옵니다
톰 크루즈가 34년 동안 최고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기에 가능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제작진 및 출연진
감독: 조셉 코신스키
제작: 제리 브룩하이머, 데이빗 앨리슨, 톰 크루즈, 데이나 골드버그, 돈 그레인저
각본: 크리스토퍼 맥쿼리, 피터 크레이그, 저스틴 마크스, 에릭 워렌 싱어
출연: 톰 크루즈, 마일스 텔러 외
장르: 군사, 액션, 드라마
제작사: 제리 브룩하이머 필름, 스카이댄스 미디어, TC 프로덕션, 텐센트 픽처스
배급사: 파라마운트 픽처스
개봉일: 2020년 6월
촬영 기간: 2018년 5월 30일 ~ 2019년 4월 15일
음악: 해롤드 팔터마이어, 한스 짐머#탑건2 #탑건매버릭 #탑건예고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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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보리] 리뷰:청각장애를 넘어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메세지를 전달하는 따뜻한 영화
#나는보리#영화리뷰#청각장애인
청각장애인에 대한 인식과 장애로 인한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인식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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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댓글부대> 메인 예고편
'어디부터 진실이고 어디까지 거짓인가' 아슬아슬하게 오가는 진실과 거짓 사이 임상진VS팀알렙, 진정한 승자는?!? [댓글부대] 메인 예고편 전격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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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공조2 : 인터내셔날> 메인 예고편
"올 추석, 짜릿한 공조가 시작된다!" 헬로 헬로 익스큐즈미! 웃음 X 액션 X 케미 터뜨릴 공조 이즈 백! #많관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