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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뜻밖에 트럼프와 한목소리로 MAGA를 외쳐버린
  • 6★/10★

    6★/10★

     

      거대한 우주선 아폴로 11호가 차근히 조립된다. 땅과 수평으로 놓인 우주선은 이내 발사를 위해 세워진다erect. 그리고 분출하듯ejaculate 솟아오른다. 아폴로 11호에 진심인 발사 책임자 남성 콜의 곁에는 그를 보조하며 천문학적인 예산 확보에 혁혁한 공을 세운 마케팅 전문가 여성 켈리가 있다. 긴 칼, 높게 솟은 건물은 남성성(남성 성기)의 오랜 은유다. 우주선은 이 연장에 놓일 자격이 차고 넘친다. 그렇다. 〈플라이 미 투 더 문〉은 한 여성이 진심을 가졌으나 영 숙맥인 남성(그리고 미국)의 시든 성기를 완벽하게 북돋고 위무해 다시 부풀어 오르게 하는 이야기다.      

     

      아폴로 1호 발사 실패 후 쪼그라든 콜과 미국의 상징적 성기는 아폴로 11호의 성공으로 다시 거대하고 단단한 위세를 과시한다. 절대적 거대함뿐 아니라 상대적 거대함까지 갖췄기 때문이다. 미국인과 소련인 중 누가 먼저 달에 발을 디딜 것인지가 체제 경쟁의 핵심으로 여겨지던 때, 아폴로 11호의 성공은 미국의 상징적 남성 성기가 소련의 것보다 우월하다는 의미다. 전 세계인을 대상으로 한 남성성 경쟁에서의 완승이다.     

     

    브런치 글 이미지 2

     

      콜은 자신의 책임으로 아폴로 1호가 실패해 사랑하는 동료 3명을 잃었다. 미국 역시 베트남 전쟁에 대한 여론 악화와 상대적으로 앞서 있던 소련의 우주 기술로 위축된 상태다. 아폴로 11호의 성공은 이 모든 좌절을 한 번에 뒤엎는다. 그리고 영화가 보여주듯, 이 과정에서 어쩌면 NASA 엔지니어보다 더 큰 공을 세운 게 켈리다. 연이은 발사 실패로 시큰둥해진 대중의 관심을 다시 아폴로 11호에 불러 모으고, 여러 기업의 후원을 끌어오고, 예산 지원에 미온적인 정치인들의 마음을 돌리는 데 켈리는 천부적인 재능을 발휘한다. 켈리는 콜과 미국의 비아그라다.     

     

      그러나 켈리가 비아그라여서는 안 된다. 축 처진 무언가를 바로 세워야 하지만 인위적, 인공적 힘이 개입해서는(혹은 개입한 것처럼 보여서는) 곤란하다. 누군가가 어르고 달래야만 딱딱해진다면, 그 강함은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 즉 ‘비아그라 발기’를 ‘자연 발기’로 바꿔야 한다. 능력 좋은 사기꾼이었던 켈리가 아폴로 11호를 향한 콜의 진심에 감화되어 자신의 과거를 뉘우치고 그의 여정에 몰입하는 서사는 콜이 발기력을 회복하는 데서 켈리가 담당한 역할을 슬그머니 사라지게 하는 역할을 맡는다. 아폴로 11호가 임무에 실패할까 두려워 별도의 세트장을 꾸린 후 거짓 달 착륙 영상 송출을 기획한 백악관의 음모를 켈리가 끝내 거부하는 것도 마찬가지의 효과를 낸다. 미국의 강함은 거짓 연출에 기댈 필요가 없다. 비아그라 없이 자연스럽게 우주선을 조립하고, 세우고erect, 발사ejaculate하면 된다.     

     

    브런치 글 이미지 3

     

      개별 남성과 국가의 위축을 아폴로 11호라는 역사상 가장 성공적이고 상징적인 이벤트로 다시금 곧추세우는 이 영화는 아마도 의도하지 않았을 방식으로 미국 공화당 대선 후보 도널드 트럼프의 구호 MAGA(Make America Great Again)와 공명한다. 유세 과정에서 총기 피습을 당한 후 푸른 하늘과 성조기를 배경으로 주먹을 치켜올리는 그의 사진은 아폴로 11호와 마찬가지로 전 세계인에게 하나의 잊지 못할 시대적 이미지로 각인되었다. 피습 후 곧바로 일어난 그가 수많은 다른 미국인의 마음속에 불꽃을 일으킨 것도 아폴로 11호와 닮았다. 차이가 있다면 분노, 좌절, 절망, 혐오를 동력으로 하며 이를 정치적 에너지로 폭발시키기 위해 가짜뉴스, 의회 폭거, 범죄 등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트럼프가 〈플라이 미 투 더 문〉이 설파하려는 ‘진짜’ 미국과는 다르다는 점이다. 오히려 트럼프는 가짜 달 영상을 송출하자는 음모를 기획한 영화 속 인물에 가깝다. 그러나 근본적인 차이는 아니다. 둘 다 쇠락한 남성/미국을 다시 발기시켜야 한다는 데는 똑같은 문제의식을 갖고 있다. 다만 ‘자연스럽게’, ‘진실되게’(즉 비아그라 없이) 할 것이냐 아니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이냐의 방법론 차이가 있을 뿐이다.     

     

      나의 질문은 이렇다. 자연 발기든, 비아그라든, 그 외 다른 방법이든 미국을 시든 남성 성기로 은유하고 여성을 이를 보드랍게 달래주는 타자로 활용하는 방식(사랑 앞에 눈물 흘리며 반성하는 켈리보다는 온갖 거짓말로 종횡무진 자본주의 한복판을 헤집는 초반부의 켈리가 훨씬 매력적이다), 그리고 이를 보며 개별 남성이 안도감을 얻을 수 있도록 사랑을 재현하는 방식이 ‘자연스러운’ 나라가 과연 진정 위대한가? 그들의 위대함은 어디를 향하는가? 애초에 그들이 위대한 적은 있었던가? 위대함의 은유와 계보에 대한 ‘대체 역사’ 구성이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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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에 빠진 날 달에다 데려다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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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은 우주선을 타고

     

     

     

    이 영화의 주인공은 마케팅 전문가 켈리(스칼렛 요한슨)다. 못 파는 건 없다. 아니 이야기로 못 만드는 건 없다. 이 세상 존재하는 어떤 것에도 사연을 만들어서 파는 켈리. 왠지 그동안의 과거가 묘연한 사람이지만 확실한 인싸들에겐 거칠 것이 없다. 어느 날. 어떤 남자가 켈리를 찾았다. 그 남자는 모 바커스(우디 해럴슨). 모 바커스는 이내 곧 자신을 소개한다. "왜 차 같은 거나 팔아요? 당신은 더 큰 걸 팔 수 있어요"라는 모. 모는 자신감 넘치는 말투로 켈리에게 '나사(NASA)에 취업하지 않겠냐'라고 묻는다. 제안만 하면 다행이다. 금세 켈리의 숨겨진 과거에 대해 이야기하며 스스로를 '나랏일 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한다. 상처 투성이의 과거를 숨겨주겠다는 모 바커스. 켈리가 나사(NASA)에 들어갈만한 이유는 충분하다. 그리고 그곳엔 듬직한 남자 콜 데이비스(채닝 테이텀)가 있었다. 한참 우주에 우주선을 보내려고 노력하고 있었던 미국 정부와 나사. 켈리는 마케팅 전문가로서 나사에 합류한다. 하지만 모의 제안이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미국과 세계가 놀랄만한 아이디어를 건네는 모 바커스. 속이거나, 사랑에 빠지거나, 우주에 도착하거나 셋 중 하나다. 

     

     

     

    샌드위치형 구조

     

     

     

    영화에서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야기의 구조다. 이 영화의 구조는 크게 두 갈래다. 첫째. 포스터에 대문짝 하게 걸려있는 채닝 테이텀과 스칼렛 요한슨이 펼치는 로맨스/코미디다. 마케팅 전문가인 여자와 NASA에서 근무하는 우주 전문가인 남자. 두 남자는 술집에서 우연히 만나 사랑을 시작한다. 이 두 사람이 사랑을 시작하는 장면이 아주 흥미롭다. 첫 장면. 여자가 카페에서 책을 읽고 있는데 그 책에 불이 붙는다. 이과생인 남자는 그 책에 '불이 붙는다'라고 지적한다. 하지만 여자는 일종의 수작이라고 생각한다. 남자는 진짜 책에 불이 붙어서 건넨 말이었다. 문과형 여자와 이과형 남자가 불에 대한 반응으로 성격을 보여준 예시가 될 것 같다. 이건 두 사람이 처음으로 마음을 고백할 때 보여주는 대사에서도 읽을 수 있다. 남자는 여자의 구역에 다가가려 용기 내 한 마디를 건넨다. 하지만 남자는 서투를지언정 솔직하게 나 자신을 보여준다. 반대로 여자는 능수능란하기'만'하다. 본인도 본인의 진짜 속내를 보여주는 대신 피상적인 것에만 신경 쓰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차이가 두 사람의 성격을 보여주는 것과 동시에 이 영화가 품고 있는 장르적인 속성을 한 방에 요약했다. 서투를 순 있어도 나 자신을 그대로 보여주는 남자. 사람을 대하는 것에서는 능수능란하지만 진짜 자신의 모습을 알 수 없는 여자가 그 장면에 그대로 나온 것이다. 이거야 말로 사랑 영화에서 기대하는 낭만적인 성격 그 자체 아니겠어? 서로의 결핍을 채우는 사랑을 바라기 때문에 (글쓴이 같은) 솔로들이 이런 장르물에 열광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이 작품에 그대로 나와 좋았다.

     

     

     

    다른 이야기는 영화가 다루고 있는 음모론이다. 음모론이 뭐야? ‘어떤 상황이 사실은 거짓말로 이루어져 있다!’라는 것이 음모론이다. 그럼 이 음모론을 둘러싼 세 가지 서스펜스가 일어난다. 1) 진짜 거짓말인지 아닌지 2) 거짓말이다 하더라도 이 거짓말이 들키지는 않을지 3) 영화의 주요 과제인 두 사람의 일이 이뤄질 수 있을지에 대한 여부가 영화에서 이야기를 끌고 가는 원동력이 된다. 선택과 집중이라는 말도 있잖아? 영화가 이야기의 동력을 하나로 유지하지  못하고 각자 주장이 강하면 난잡하게 느껴지지 않을까? 아니다. 이 영화가 이야기를 조립하는 데 있어 굉장히 정교했던 이유가 따로 있는데, 모 버커스(우디 해럴슨)를 등장시킨 것이 이야기의 밀도를 높인 좋은 선택이었다. 이 인물이 이 세 가지 서스펜스를 모두 끌고 가면서 동시에 모에 대한 캐릭터들의 반응을 다각화시켜 이야기의 패턴을 지루하지 않게 만들었다. 그리고 정말 중요한 것. 이 모 바커스라는 인물은 영화에서 여자 주인공 켈리라는 인물과 공통점을 가진다. 서스펜스와 로맨틱/코미디가 하나로 합쳐지는 지점이기도 한데, 이야기를 받아들이는 데 있어 관객들이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장치로 작동한다.

     

     

     

    '로맨틱'한 '영화'

     

     

     

     

     

    글쓴이가 이 영화를 다 보고 느꼈던 건 고전적인 할리우드의 향취가 느껴진다는 점이다. 결핍과 그에 따른 관계성을 가져왔다는 것이 그 고전적인 향의 근원인 듯하다. <아파트 열쇠를 빌려드립니다>라는 영화가 있다. 또 <쉘부르의 우산>이란 영화가 있다. 이 두 1960년대 영화의 공통점. 두 사람 간의 결핍을 영화의 중심 배경이 되는 공간을 바탕으로 정교하게 설정한다는 점이다. 실제로 <아파트 열쇠를 빌려드립니다>는 사랑하고 싶은 남자와 사랑받고 싶은 여자의 관계를 아파트와 열쇠라는 것에 비유한 영화다. 아파트, 그러니까 집은 인간사에 있어 꼭 필요한 것 중 하나다. 사랑이 아파트처럼 인간에게 꼭 필요하다는 비유를 영화에서 표현했다고 생각한다. <플라이 미 투 더 문>과의 공통점. 음모론의 성격과 사랑의 성격에 공통점을 찾아 낭만적인 속성을 강조했다는 것이다.  <쉘부르의 우산>이라는 영화는 소재를 통해서 사랑의 힘을 믿는 작품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소재를 둘러싼 캐릭터들의 리액션에는 인물들 간의 관계가 정말 중요하게 밑줄 그어져 있다. '이 사람을 대체할 수 없는 건 없다!'를 믿고 있는 영화라 후반부의 전개가 특히 감동적으로 느껴진다. 비슷한 맥락에서 <플라이 미 투 더 문>은 켈리의 비밀을 바탕으로 사랑의 힘을 전적으로 신뢰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켈리의 정체성이 모호하게 표현되는 영화임에도 두 사람의 사랑이 낭만적인 것처럼 느껴지는 것. 이 영화가 <쉘부르의 우산>같이 관계의 의미를 통해 한 사람의 존재를 믿었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또 이 <플라이 미 투 더 문>에는 현실과 영화 사이에 관한 견해가 담겨있기도 하다. 이 영화의 프로젝트를 총괄하고 있는 남자주인공 콜. 이 사람은 프로젝트를 운영하는 데 있어 정말 싫어하는 것이 있다. 바로 누군가가 개입하는 것이다. 있으면 있는 그대로가 좋지 마케터(켈리)가 붙고 영상으로 생중계를 하고 이런 거 다 거추장스럽다. 이 콜이 프로젝트를 바라보는 태도는 중후반부 찍고 어떤 인물이 무언가를 이끄는 것과 비슷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 인물은 어떤 공간의 세세한 특성까지 디테일하게 그려낸 인물이다. 사실적인 질감을 중요시했다는 점에서 어떤 상황을 묘사하는 일종의 태도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 두 묘사는 영화가 두 인물을 겹치게 보여주면서 어떤 것을 강조했다고 읽을 수 있다. 반대로 이 태도와 정반대에 있는 것이 켈리의 태도다. 켈리는 연출이 들어간 무언가가 있다 하더라도 이야기를 재미있게 만드는 것을 추구한다. NASA는 진지한 집단이다. 광고 가판대가 아니다. 하지만 이런 금기를 부수고 적극적으로 사람들을 끌여와 ‘각자의 NASA’를 만든 것이 이 영화가 보여주는 켈리의 활약이다. 이런 태도는 고전 영화사에서도 읽을 수 있다. 영화에 언급되는 큰 이름 스탠리 큐브릭은 인위적일지언정 그 안에서 풍기는 이미지의 매력으로 많은 사람들을 매혹시킨 영화감독이다. <배리 린든>이나 <닥터 스트레인지러브>에서 보여주는 압도적인 이미지는 영화라는 매체에 매혹될 수 있는 1차원적인 요소, 시각적인 것과 상상력의 힘을 집약시켰다고 생각한다. 이걸 카메라를 있는 그대로 담는, 테런스 멜릭스러운 사람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을까? 글쓴이는 대치된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이 사람(큐브릭)이 1960년대 이후 활동했던 전력을 보면 거진 다 원작이 있다. 원작 그대로가 아닌 변형을 추구한 켈리의 태도와 겹쳐지는 것이다. 이 두 태도는 사실 영화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라는 태도로 읽어도 아무 무리가 없다. 우리 한국영화에서도 홍상수와 박찬욱이 자연스러운 욕망의 발현 / 새로운 세계(특히 건물)의 발명이라는 점에서 대비되는 것처럼 말이다. 영화는 이 두 태도를 계속해서 비춰주면서 누구의 편을 별로 안 든다. 마무리가 훌륭해서 밸런스를 잘 지킨 것이다.

     

     

     

    깔끔한 마무리

     

     

     

    이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프닝과 엔딩이다. 특히 영화의 후반부 전개는 어색하지도 않고 걸리적거리는 것도 없이 깔끔했다. 어떤 점에서? 영화가 정치적으로 읽힐만한 여지를 주지를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이건 이 영화의 위험부담이기도 했다. 2차 대전 이후의 냉전을 시간적 배경으로 삼았고 그 긴장감이 영화 안에 틈입되기 때문에 그럴만한 여지가 충분하다. 선을 조금만 넘으면 이게 당시 미국이 추구했던 눈먼 경쟁을 풍자하고 싶었던 건지, 미국인들의 '국뽕' 영화인지, 로코물인지 뭔지 파악이 어려웠을 수도 있다. 실제로 영화가 다루는 사건이 부피가 점점 커지면서 어떻게 마무리 지으려나 우려가 되는 부분도 있었다.

     

     

     

      하지만 이 영화는 굉장히 영리하게 이야기를 마무리짓는다. 이 선택은 음모론이나 세계사 같은 거시적인 것은 저기 뒤로 치워두고 현실에 있는 것이 근간이 된다. 이게 만약 우연한 사고같이 인간이 초래한 무언가였다면 어색한 것이 많을 뻔했다. 왜? 그건 사랑영화에는 영 어울리지 않는다. 원래 사랑은 어디 갈지 모르고, 상대가 무슨 생각할지 몰라서 애가 타는 것 아니겠어? 엔딩의 이 존재는 하나로 규정되지도 않고 여기저기 잘 돌아다니면서 나름의 활약을 펼친다. 마치 어디로 향할지 그들 스스로도 모르는 사랑에 빠진 사람들처럼. 불처럼 불타면서 하나로 종잡을 수 없는 사랑의 두 속성을 시작과 끝으로 잘 요약한 선택이 돋보인다.

     

     

     

    예술가 타입

     

     

     

    스칼렛 요한슨은 현재의 할리우드에 있어 빠져서는 안 될 인물이다. '블랙 위도우'로서 전성기 MCU를 이끈 인물임과 동시에 <그녀>나 <결혼 이야기> 같은 영화에서 그 나름의 깊이를 보여줘 슈퍼스타라고 부르기에 모자람이 없는 배우다. 이 <플라이 미 투 더 문>은 그녀의 스타성만을 드러내는 영화는 아니었던 것 같다. 스칼렛 요한슨이 가진 브랜드 파워를 오롯이 보여준 것 같았다. 이 사람은 자신의 이미지를 너무나도 잘 아는 것 같다. 어떻게 하면 공허한 내면에 강조를 둘 수 있을지. 어떡하면 매혹적이고 섹시한 캐릭터를 유지할 수 있을지. 이 감정과 느낌 사이의 관계도 너무 잘 알고 있어서 둘이 모순되지 않는다. 상대역을 맡은 채닝 테이텀도 서투른 내면을 표현하는 데 있어 섬세했다. 그리고 기술적으로도 이 장면에서 '정말 중요한 것 같아!'라고 생각한 티가 난다. 

     

     

     

    무난하게 볼 수 있어

     

     

     

    비수기인 극장가. <인사이드 아웃 2>를 본 관객들 중 영화관에 걸려있는 것 중에 추천받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글쓴이는 이 <플라이 미 투 더 문>을 추천한다. 강한 템포로 콰콰쾅 몰아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잔잔하다고 느낄 관객이 있는 것도 알고 이야기가 얕다고 느낄 만한 여지가 충분하다는 것 역시 잘 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정말 시네마가 줄 수 있는 그 목적을 충실하게 이행한다는 점에서 많은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영화 그 자체라고 생각한다. 심지어 스칼렛 요한슨과 채닝 테이텀의 톡톡 튀는 로맨스/코미디도 관객을 을 빨아들이기에 충분하다. 개봉 2주차에 들어 상영관이 없긴 하지만, 그래도 주위에 관이 있다면 관람을 추천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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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실의 실체가 없는 진실게임
  • 중요한 건 진실이 아니다. 그 진실을 뒤덮은 댓글과 소설가 뺨치는 이들의 음모론들이다. 진실이란 먹잇감을 발견한 동시에 득달같이 달려드는 하이에나처럼 음지의 작가들이 만들어낸 썰과 밈은 진실을 아예 덮어버린다. 그리고 댓글창 또는 커뮤니티는 그 자체로 그들만의 놀이동산이 된다. 24시간 동안 불빛이 꺼지지 않는 그 놀이동산. <댓글부대>는 허영심 짙은 기자의 눈으로 그곳을 들여다보는 영화인 동시에 이런 사회문제를 넌지시 보여주는 블랙코미디 영화다. 

     

     

     

     


    눈은 좋은데, 허영심이 높은 사회부 기자 임상진(손석구)는 대차게 미끄러진다. 한 중소기업 사장의 폭로를 통해 대기업 비리를 고발하는 기사가 오보로 판명 났기 때문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취재원은 극단적 선택을 하고, 그 즉시 임상진은 기레기로 낙인찍히며 정직당한다. 6개월 후 복직은커녕 1년 넘게 죽은 듯이 사는 그는 다시 명예 회복을 위해 노력하지만, 어디 세상이 뜻대로 되나. 그러던 어느 날, 그에게 SNS로 메신저 하나가 도착한다. 그동안 자신이 온라인 여론조작을 해온 팀알렙의 멤버고, 그 문제의 기사가 오보가 아니라는 내용이었다. 그 즉시 만남을 가진 상진은 뜻밖의 진실을 듣게 된다.   

     


    <댓글부대>는 황정민 주연의 <모비딕>, 박해일 주연의 <제보자>처럼 사건을 향한 집념과 진실을 추적하는 과정이 중요한 작품은 아니다. 앞서 소개했듯, 영화 속 진실은 이야기의 얼개를 여는 역할로만 작용한다. 그 자리를 대신하는 건 음모론. 임상진 기자의 추리와 온라인 여론조작을 했다는 찻탓캇(김동휘)은 물론, 찡뻤킹(김성철), 팹택(홍경)의 이야기다. 실제 있을법한 온라인 여론전을 수면위로 올린 영화는 이들이 벌이는 작업 과정을 지켜본다. 마치 살아 숨 쉬는 생명체처럼 탄생과 성장, 행동, 그리고 그 결과까지 여론은 어떻게 만들어지고 퍼지며 소멸하는지를 관객 스스로 살펴보게 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름 모를 다방에서 만는 찻탓캇의 이야기는 임상진을 통해 관객에게 전해지는데, 그 자체로 있을 법한 일이라고 판단할 정도로 흡입력이 대단하다. 그만큼 흥미로운 이야기로 받아들여진다는 것.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탑 랭크된 글을 읽는 것 같은 기분인데, 임상진 또한 기자이지만 점점 찻탓캇의 이야기에 빠져들고, 이를 방증하는 증거를 수집하면서 그를 믿게 된다. 감독은 이런 임상진의 모습을 통해 100% 진실보다 거짓이 섞인 사실이 더욱 진짜처럼 여겨지는 세상, 그리고 진실을 탐문하는 기자들도 그 덫에 빠질 수밖에 없는 현실을 오롯이 보여준다. 

     

     

     

     


    영화의 흥미로운 지점은 무엇인 진실인지 거짓인지 가릴 수 없는 현실을 영화로 가져온 것에 있다. 극초반 임상진 기자가 취재한 기사가 진실인지 오보인지, 찻탓캇이 말한 팀알렙이 한 여론 작전들, 그리고 이들의 배후에 대기업 ‘만전’이 있다는 게 믿을 수 있는 것인지 그 모호함을 유지한다. 한 번쯤은 삐끗할 수도 있는 이 줄타기는 영화가 끝날 때까지 유지되는데, 이로 인해 극의 긴장감은 계속해서 유지되고, 더 나아가 무엇을 믿고 걸러야 하는지에 대한 의구심을 품게 한다.

     


    이는 영화가 끝까지 직접적인 개입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이 부분을 우직하게 밀고 나가 후반부 모호한 결말로 끝맺음을 내는 것에 호불호가 갈리지만, 영화 자체가 진실과 거짓, 선과 악을 극명하게 가르는 작품이 아니기에 충분히 이해되고, 장점으로까지 읽힌다. 

     

     

     

     


    이런 고도의 줄타기를 가능하게 한 건 손석구는 물론, 김동휘, 김성철, 홍경 등 주요 인물들의 연기 덕분이다. 손석구는 영화의 안내자인 동시에 댓글부대가 판치는 세상에 점점 빨려 들어가는 캐릭터를 자연스럽게 연기한다. 김동휘, 김성철, 홍경은 한 팀인 동시에 서로를 견제하는 인물처럼 보이지 않는 선과 거리를 두며 연기하는데, 그 자체로서 긴장감을 유발하며 멋진 앙상블을 이뤄낸다. 손석구는 말해 뭐하나. 김동휘, 김성철, 홍경은 앞날이 더 기대된다. 여기에 장강명 작가의 동명 소설을 각색하며 영상화한 안국진 감독은 영화가 가진 아무말 대잔치 격인 이야기를 정립하고 흥미롭게 잘 엮어내며 멋진 연출력을 선사한다. 억지로 매듭짓지 않고 열린 결말을 제시하며 판단을 관객에게 내미는 그 솜씨도 탁월하다. 

     

    “댓글부대를 절대 악으로 다루고 싶지 않았다.

     

    우리가 어떻게 그들을 소비하고 있는지, 어떤 식으로 불가피한 공생관계가 형성되는지 기자의 시선에서 조망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

     

     

     

     

     

     

    인터뷰를 통해 안국진 감독은 현시대의 세태를 오롯이 보여주고 싶었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이처럼, <댓글부대>는 뭐든 이슈가 되면 최고라는 탈진실 시대를 보여주는 것에 있다. 가짜 뉴스가 판치는 세상 속 누군가는 그것에 좌지우지되고, 누군가는 그것을 엔터테인먼트적으로 받아쳐 내는 요지경 같은 세상 속에서 영화는 시의성 있게 이 부분을 잘 담았다. 그리고 과연 우리는 무엇을 믿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이런 점에서 임상진 기자의 마지막 행동은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사진제공: (주)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평점: 3.5 / 5.0
    한줄평: 진실의 실체가 없는 진실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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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주하는 아이 도망가는 어른, <도주하는 아이>
  •  * 본 리뷰에는 영화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도주하는 아이> System Crasher , 2019 제작  

    독일 |  드라마 |  110분  

    감독: 노라 핑샤이트 

     

     

    도주하는 아이, 도망가는 어른

     

    출처: 영화 <도주하는 아이> 스틸컷

    여기 어느 누구도 보호해 줄 수 없는 아이가 있다. 

    핑크 공주 베니. 막대 사탕을 입에 물고 먹잇감을 노려보는 맹수처럼 세상을 바라보는 아이. 정신병원에는 너무 어려서 입원할 수 없고, 정부나 민간단체에서 운영하는 보호시설(기관)에서는 쫓겨나기 일쑤다. 어렵게 배정된 위탁가정에서도 아이를 향한 사랑 유통기한은 터무니없이 짧다. 초반부에 휘몰아치는 베니의 현실은 아이가 어른에게 사랑받을 수 없는 것인지, 어른이 아이에게 사랑을 줄 수 없는 것인지 확신할 수 없게 만든다. 그리하여 세상을 향한 베니의 거친 비명은 끝날 줄 모르고, 진행되는 모든 이야기는 매 순간 충격적이다.   

     

    핑크색 옷을 입은 작은 발이 첫 장면으로 등장하고, 이후 온몸에 의료기구를 달고 있는 베니의 무표정이 비친다. 아이의 무표정은 맹수가 사냥을 하기 전의 고요한 움직임이다. 누구를 물어뜯기 위함일까. 순간 등골이 오싹해질 때 그녀는 도끼 같은 눈을 한 채 고르지 못한 이빨을 드러낸다. 무표정의 베니가 사랑스러운 이빨을 내밀 때마다 <도주하는 아이>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 심지어 반복적이다. 리셋 버튼이 주인공의 폭력에 의해 눌러지는 아이러니한 상황 속에서 이야기는 멈추지 않고 숨 가쁘게 진행된다. 

     

    이 작품은 출구가 없는 베니의 비극적인 삶을 보여주기 위해 만들어졌다.  

     

    이성적이고 윤리적인 양반들이 머리를 맞대고 만든 시스템에도, 인간적이고 따뜻한 이웃에게도 베니의 존재는 미쳐버린 개와 같다. 베니는 그들이 인정하기 싫은 인간성과 딱 정해놓은 도덕성의 한계를 폭로한다. 그래서 그들은 "전 할 만큼 했어요. 제가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네요."란 말로 스스로를 정당화한다. 이미 초록불에 안전하게 횡단보도를 건넜기 때문에 매번, 불시에 빨간불에 뛰어드는 아이를 막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들의 입장에선 너무나도 당연한 항변인 셈이다. 이 얼마나 대단하고도 간단한 마음가짐인가. 

    선생님들 역시 베니를 감당하지 않으려 한다. 베니를 블랙리스트에 올려놓고, 베니와 거리를 둔다. 세상을 물어뜯는 아이는 착한 아이도, 착한 어른도 될 수 없으니까. 니를 보호할 수 있는 어른이 부재한 건, 아이의 탓일까. 모든 아이는 어른의 관심과 사랑을 선택적으로 받는 존재인가? '착한 아이' 프레임과 '착한 어른' 코스프레가 어떠한 검증 없이 무차별적으로 견고해지자, 베니는 더 처절하게 소리 지른다. "전부 다 싫어!"라고. 그리고 그들에게서 미친 듯이 도망친다.

    출처: 영화 <도주하는 아이> 스틸컷

    어렸을 때 기저귀로 얼굴을 눌린 후 트라우마를 갖게 된 베니는 엄마에게만 자신의 얼굴을 만질 수 있도록 허락했다. 엄마, 베니에게 엄마란 존재는 모든 것이다. 주체할 수 없는 분노 속에도 하루하루를 버티는 건 엄마와 다시 함께 살 수 있을 거란 희망 때문이니까. 베니는 자기를 만나러 오지 않는 엄마를 보고자, 보호소를 탈출한다. 도로 위에서 한참 동안 세워주지 않는 차에 쓰레기를 던지고 미친개처럼 왈왈 짖어대고 나서야 겨우 히치하이킹에 성공한다. 그렇게 어렵게 집에 온 베니를 맞이한 건, 낯선 아저씨. 사실 엄마도 딸을 자기 삶 밖으로 밀어내고 있었다. 베니가 또 폭력적으로 변해 자신을 때릴 거란 두려움과 작은 아들이 베니와 같은 행동을 학습해 학습해고 있다는 불안이 원인이었다. 충분히 베니를 다시 집에 데리고 올 수 있음에도 엄마는 직장을 구하지 못해 굶어 죽겠다는 말로 딸을 외면하고 있었다. 베니를 향한 엄마의 모성애에도 유통기한이 존재했다는 비극 앞에, 배니는 또다시 리셋, 리셋된다. 

     

    엄마의 등을 조각상으로 내리치며 "죽여버릴 거야!! 개년!!"이라 욕하고, 낯선 아저씨의 주먹에 얼굴을 몇 번 구타당한 후 바닥에 질질 끌려 장롱 속에 처넣어질 때까지 말이다. 베니는 광기를 내뿜으며 희망을 줬던 엄마를 향해 울부짖는다. 아이는 자신의 손을 물어뜯지 않고서는 분노를 표출할 수 없었고, 또 엄마는 도망치고 베니는 또 홀로 남는다. 반복되는 리셋, 사실 베니는 보호소 직원들에게 끌려갈 때마다 엄마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음을 깨달았다. 그 유통기한이 정말 다했음을 매번 온몸으로 받아들였음에도 또다시 엄마의 품이 그리워 몸을 잔뜩 웅크려왔다. 엄마와 함께 사는 꿈을 꾸고, 엄마가 좋아할 만한 가방을 가게에서 훔치고, 또 만나러 오지 않는 엄마에게 분노 대신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주던 딸이었다. 잔인하게도, 이것이 <도주하는 아아>가 주는 유일한 희망이다.

    출처: 영화 <도주하는 아이> 스틸컷

    다행스럽게도 엄마를 제외하고, 베니의 웃음을 유일하게 볼 수 있는 두 명의 어른이 존재한다. '비파네'와 '미하'.  두 사람은 베니의 얼굴을 만져도 되는 어른이다. 비파네는 베니에게 안전한 가정을 만들어주기 위해 노력하는 아동 보호사이고 미하는 비행청소년의 행동을 교정하는 일을 하는 전문가다. 이 두 사람만이 핑크 공주를 상처 입은 아이로만 바라본다. 함께 가슴 아파하고 안쓰러워하며 베니의 현실에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비파네는 베니를 끝까지 놓지 않는다. 어떻게든 아이를 위해 최선의 방법을 강구하려 한다. 베니에게 엄마가 결국 너를 버렸다는 말을 차마 하지 못하고, 대신 흐느끼는 그런 어른이다. 그래서 아이는 비파네만큼은 두 팔 벌려 안아주고, 함께 하고 싶어 한다. 비파네는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는 외적으론 무기력한 인간이지만, 베니에겐 아무런 조건 없이 자신을 품어주는 몇 안 되는 어른이니까. 

      

    미하는 온몸이 묶인 채 병실에서 분노를 삼키지 못하고 씩씩거리는 베니에게 마음을 빼앗긴다. 무엇이 저렇게 어린아이를 분노로 가득 차게 만들었을까. 겨우 아홉 살인 저 아이가, 얼마나 큰 고통과 슬픔을 품고 있는 걸까. 결국 그는 베니를 숲 속에 있는 자신의 오두막(상담소)에 3주 동안 데리고 있겠다고 자신 있게 선언한다. 그러나 베니를 경험한 자들은 미하를 믿지 않는다. '미하의 프로그램'이 아무리 효과적이어도 '베니의 리셋'은 막을 수 없음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안타깝지만, 그들의 말대로 미하는 실패한다. 시종일관 베니와 베니를  대하는 어른들의 자세를 확고하게 고수하던 <도주하는 아이>의 태도가 180도 바뀌는 순간이다. 영화는 이후부터 애매한 자세를 취한다. 일례로, 미하의 자발적인 포기가 정말 자의인지 아닌지 명확히 드러내지 않는다. 모두 관객의 몫으로 남긴다. 

     

    미하는 베니의 리셋을 통제할 수도, 치료할 수도 없는 사람이 됐다. 그가 베니에게 가족(아내와 자식)을 보여주고, 오두막이 아닌 자기 집에서 베니를 재워준 순간, 그렇게 결정됐다. 베니가 미하에게 사랑을 갈구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베니는 미하에게 아빠가 되어달라고 고집을 부리며 아무렇지 않게 얘기한다.  "부인과 아이를 죽이면요? 그럼 완전 제 것이 되는데?"라고. 오랫동안 느껴보지 않았고 어쩌면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따라서 어떡해서든 갖고 싶었던 사랑, 베니에겐 반드시 필요했다. 미하는 평생 지켜오던 직업과 가족을 무참히 파괴해 버릴 것 같은 베니에게 큰 두려움을 느끼고 결국 비파네에게 고백한다.  자신을 과대평가해서 베니에게 희망을 줬고, 그 결과 통제블능이 되어버렸다고. 그렇게 베니는 자신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를 잃고, 비파네와 미하는 본인들 역시 도망가는 어른임을 인정한다. 어른들은 베니를 정신과 치료가 가능한 케냐로 보내기로 결정한다. 케냐로  떠나야만 하는 베니의 상황, <도주하는 아이>가 남긴 마지막 말줄임표다.  

    출처: 영화 <도주하는 아이> 스틸컷

    베니는 버려지기 전에 반드시 도주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다시 도주할 수 있다. 잡히고, 또 잡히면서 크지 않으면 아이는 삶을 살아갈 수가 없다. 이제 베니는 누구도 믿지 않을 것이고, 더 쉽게 칼을 휘두를 것이고, 더 잔인하게 자신의 얼굴을 만진 이들에게 폭력을 가할 것이다. 그 아이가 어른이 될 수 있을지도 가늠할 수 없다. 반복되는 리셋에 스스로 폭주하는 일만 남았다는 것이 <도주하는 아이>가 처음부터 계속 보여줬던 명확한 진단이다. 

     

    아이를 포기한 어른의 탓인가. 어른도 포기하게 한 아이의 탓인가. 영화는 아이는 도주하고 어른은 도망간다는 결과만 내놓았다. 숲 속에서 베니를 향해 짖어대던 미친개만이 아이를 품어주는 장면이 오늘날 우리가 마주한 현실이겠지. 그래서 도주하는 베니의 얼굴에 띈 웃음이 가슴을 더 두근거리게 한다. 그 두근거림이 설렘이 아닌 두려움이란 사실을 <도주하는 아이>도, 우리도 모두 알고 있다. 또 한 명의, 도망가는 어른의 떨리는 두 눈을 봤을 테니까. 베니의 마지막 호소이자 세상을 향한 다신 없을 답변이 떠오른다.

     

    "웃기시네!"

    이제 베니의 얼굴을 만질 수 있는 사람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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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녀의 잉태가 결코 축복일 수 없는 이유!
  • 수녀가 임신했다. 과연 이 일은 축복인가? 저주인가? 판단은 누가 주체냐에 따라 갈릴 것이다.신부와 수녀들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라 축복하고, 임신을 맞닥뜨린 수녀는 저주처럼 느낄 것이다. 신이 내린 운명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어떻게 종교인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냐고 한다면 오해 마시라. <이매큘레이트>의 내용이다. 티 하나 없이 깔끔한 의미를 지닌 제목과 달리, 극 후반부는 피로 범벅된 주인공 수녀의 모습을 마주하며 그녀의 절규를 들을 수 있다. 그만큼 영화는 수녀의 수난사인 동시에 한 여성의 수난사를 보여준다.  

     

     

     

    수녀가 되기 위해 이탈리아로 건너온 미국 소녀 세실리아(시드니 스위니)는 테데스키 신부(알바로 모르테) 소개로 어느 수녀원에 도착한다. 언어의 장벽은 물론, 악몽에 시달리는 등 힘겨운 나날을 보내는 그녀는 조금씩 타지에서의 적응을 해 나간다. 그러던 어느 날, 영문 모를 구토를 한 세실리아는 추기경과 신부에게 수녀가 되기 전 성관계 유무를 했냐는 질문을 받는다. 불쾌할 겨를도 없이 자신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된 그녀. 신에게 선택받은 자로서 성당 모든이에게 축복을 받지만, 정작 본인은 행복하지 않다. 그리고 점점 이곳의 이상한 점을 알게 되고, 아무도 모르게 탈출을 감행한다.  

     

    <이매큘레이트>는 수녀의 임신이라는 소재를 차용했다는 점에서 올해 상반기 개봉한 <오멘: 저주의 시작>이 떠오른다. 미국인 수녀가 홀로 이탈리아의 한 수녀원으로 온 후, 영문 모를 임신을 하는 설정은 데칼코마니를 이룬다. 하지만 두 영화는 약속이나 한 듯 후반부에서 서로 각자의 길을 간다. <오멘: 저주의 시작>은 화자가 수녀이지만, 결국 시리즈의 악마 데미안의 실체를 찾아가는 여정이 중요하게 다뤄진다. 반대로 이 영화는 갑작스럽게 임신을 한 수녀의 당황스럽고 혼란스러운 심리적 여정을 주의 깊게 아니, 끈질기게 따라간다. 

     

     

     

     

    보통의 수녀에서 성녀가 된 그녀의 삶은 한순간에 뒤바뀌는데, 감독은 카메라를 통해 초반 로우 앵글로 신을 비춘 것과 동일하게 성녀가 된 세실리아를 보여준다. 하루아침에 신격화가 된 세실리아를 우러러보는 수녀들의 시선이 느껴지는 장면이다. 하지만 안개 속에 싸여 있는 것 같은 수녀원의 비밀이 하나씩 밝혀지면서 그녀는 신이 아닌 그릇된 믿음에 사로잡힌 이들이 누군가에게 바치는 재물처럼 여겨진다. 

     

    이후 세실리아가 겪는 고난의 과정이 그려지는데, 그 감정의 폭이 들쑥날쑥하다. 감독은 고난의 과정을 견고한 서사 흐름으로 보여주기보다는 그녀의 혼란스러운 심리 상태를 영상으로 오롯이 옮긴다. 마치 호아킨 피닉스 주연의 <너는 여기에 없었다>처럼 고통스런운 주인공의 내면을 따라가는 듯한 느낌을 준다. 

     

    서사가 아닌 심리의 방점을 둔 이야기 흐름 때문에 기본적인 정보 전달이 미흡하고, 각 인물의 행동 근거가 약하다. 특히 비밀을 감춘 채 그녀에게 접근하는 신부와 수녀들의 180도 다른 모습은 개연성이 부족하다. 넌스플로테이션(수녀들의 삶을 다룬 장르)을 차용해 장르적 재미를 살리려고 했지만, 점프 스케어와 피칠갑 장면에만 의존해 호러 장르의 재미를 십분 살리지는 못하는 건 아쉬운 대목이다. 

     

     

     

     

    그럼에도 이 작품의 공포가 남다른 건 현대 사회에서 여성들이 겪는 사회적 두려움을 잘 옮겼기 때문이다. 우리가 오랫동안 기억하는 공포 영화는 시대의 가장 어둡고 두려운 부분을 보여주는 거울 역할을 해왔던 게 사실. 그런 점에서 <이매큘레이트>는 현대 여성들이 가진 임신과 출산 자체의 공포, 자신의 의지가 아닌 결혼 후 당연히 임신해야 한다는 기성세대의 주장에 따른 현대 여성들의 잠재적 두려움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극 중 세실리아 임신의 궁극적인 목적은 예수의 재림인데, 이는 예로부터 전해진 종교의 원칙, 가족 윤리 등 굳어진 여성의 역할을 해내야 한다는 억압이 내포되어 있다. 이처럼 보이지 않는 압박은 극 중 세실리아의 마음에 불안과 고통을 심고, 임신의 궁극적 목적이 밝혀진 이후 억압된 감정이 싹을 틔우면서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폭주를 일으킨다. 그녀의 피칠갑은 이유가 있다. 

    더불어 영화는 지금도 미국에서 첨예한 대립을 겪고 있는 낙태 금지법에 대한 은유적 항의의 뉘앙스를 풍긴다. 스포일러라서 자세히 말할 수 없지만, 마지막 세실리아의 마지막 절규와 행동만 보더라도 이를 잘 나타낸다. 

     

     

     

    뭐니 뭐니해도 <이매큘레이트>의 가장 큰 매력은 핏빛 열연을 펼친 시드니 스위니다. 그녀는 불안, 당혹, 슬픔, 분노 등 세실리아의 다층적 감정선을 큰 눈망울과 세밀한 표정 연기, 그리고 떠나가라 지리는 목청으로 표현한다. 드라마 <유포리아>를 통해 눈도장을 찍은 후, 다수의 작품을 거쳐오면서 스펙트럼을 넓혀가고 있는 시드니 스위니에게 이 영화는 완성도를 떠나 그녀의 연기 인생에 두고두고 회자될 것으로 보인다. 무조건 후반부 시드니 고라니, 아니 시드니 스위니의 절규와 외침, 그리고 마지막 결단을 주목하길 바란다.  

     

     

    P/S: 참고로 시드니 스위니는 연기는 물론 제작에도 참여했다. 몇 년 전 오디션을 위해 읽은 스크립트가 준 강렬한 섬뜩함을 오래도록 잊지 못했던 그는 미공개로 남은 그 작품을 자신이 직접 제작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녀는 <유포리아> 시즌 2 이후, 이 작품의 시나리오 작업을 재게, 마이클 모한 감독에게 연출을 맡기고, 제작의 시작을 알렸다. 이 작품에 담긴 그녀의 애정을 알았다는 듯 <이매큘레이트>는 전세계 박스오피스에서 제작비 대비 4배 이상의 수익을 벌어드리며 흥행에 성공했다. 

     

    사진제공: ㈜엔케이컨텐츠 

     

    평점: 3.0 / 5.0

    한줄평: 시드니 스위니가 열고 닫는 여성 수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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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컬트를 빙자한 인상 깊은 여성 바디 호러
  • 2024년 상반기 국내 개봉 호러 영화 중 기억에 남는 작품 중 한 편을 꼽으라면 주저 없이 <오멘: 저주의 시작>을 선택할 것이다. 그 이유는 단순히 오컬트 장르의 기념비적인 영화인 <오멘> 시리즈의 프리퀄이라는 것에 있지 않다. 오리지널 시리즈의 명맥을 이어오면서도 그 안에서 장르적 변주를 가하고, 동시대 우리가 두려워하는 공포를 전했다는 점 때문이다. 오컬트를 빙자한 여성 바디 호러. 어쩌면 <오멘> 시리즈 중 가장 현실적인 공포를 그렸다고 볼 수 있다.  

     

     

     

    때는 1971년, 수녀가 되기 위해 이탈리아 로마에 도착한 마거릿(넬 타이거 프리)은 과거 보육원에서 연을 맺었던 로렌스 추기경(빌 나이)을 만난다. 그리고 이들은 한 보육원에 도착한다. 갈 곳 없는 아이들을 돌보는 이곳에서 마거릿은 외톨이로 지내는 한 소녀에 집중한다. 과거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놓인 이 소녀를 그냥 놔둘 수 없었던 것.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우연히 브레넌 신부(랠프 이네슨)를 만나고 그 소녀를 조심하라는 경고와 보육원의 어두운 실체도 알려주겠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오멘: 저주의 시작>은 프리퀄답게 <오멘>의 악령 데미안의 탄생 기원을 따라간다. 데미안은 어떻게 탄생했으며, 악령의 부활은 어떤 과정을 통해 가능했는지 등 영화는 놓인 운명에 겸허히 따라간다. 브래넌 신부가 말하는 보육원의 비밀, 즉 그 유명한 ‘666’ 표식이 있는 악마의 실체를 밝혀나가는 그 과정만 보더라도 영화는 시리즈의 자장 안에서 그 역할에 충실하다. 

     

     

     

    하지만 순수한 소년의 얼굴을 지닌 데미안처럼, 영화는 중반부 이후 장르를 달리 가져간다. 공포의 대상이 악마가 아닌 다른 목적으로서 적그리스도를 만드는 인간으로 바뀌면서 작품의 지향점은 달라진다. 이 부분에 있어 <오멘> 시리즈보단 로만 폴란스키의 <악마의 씨>와 유사해 보인다. 아르카샤 스티븐슨 감독은 여느 인터뷰에서 <악마의 씨>를 자주 언급했는데, 후반부 마거릿의 수난사는 <악마의 씨>의 로즈메리의 수난사와 오버랩된다. 광신도들의 잘못된 믿음, 정치적, 사회적 질서 및 권력 유지를 위해 여성의 신체에 폭력을 가하는 부분은 너무나 닮아있다. 

     

    오컬트 장르의 첫 문을 열어젖힌 <엑소시스트> 이후 등장한 <오멘>은 당시 미국인들의 심연에 자리 잡은 공포, 즉 선과 악이 공존하는 인간의 마음을 건드리며 큰 관심을 이끌었다. 이와 반대로 <오멘: 저주의 시작>은 그동안 사회적 약자로서 권력자들에게 배신, 이용만 당했던 여성들의 운명에 초점을 맞추고, 그에 따른 공포와 고통을 목도한다. 스포일러라서 자세히 설명하지 못하지만 후반부 적그리스도의 탄생 장면을 길게 보여주는 것 또한 이런 의미를 부각하기 위한 부분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어 영화는 과거 <오멘> 시리즈가 여성은 배제된 남성 중심적 서사 구조를 가져갔다는 걸 상기시킨다. 감독은 숙명처럼 시리즈 내 서사 구조의 성 역할을 전복시킨다. 오로지 남성은 주변인으로서 존재하고 이야기를 이끄는 건 선이 되었든 악이 되었든 여성들이 그 역할을 맡는다. 더불어 연대 또한 여성들의 몫이다. 그동안 오컬트를 포함한 호러 장르에서 피해자로서만 각인 되었던 여성들의 이야기가 이제야 수면 위로 올라온 느낌이다. 

     

    호러 영화로서 갖춰야 하는 기본 요소들은 충실한 편이다. 고어는 물론, 공포스러운 스코어와 음향 사운드, 그리고 점프 스케어는 관객에게 공포를 전한다. 이보다 더 극악스러운 공포는 후반부에 포진한다. 마거릿을 통해 보여주는 바디 호러 장면은 단순히 이 영화가 엔터테인먼트적인 공포에만 국한된 것이 아닌 실제 여성들이 가진 공포를 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장르적인 재미를 원했던 이들에게는 다소 심심할 수 있지만, 그 무게감은 기존 시리즈보다 더 무겁게 느껴진다.  

     

     

     

     

    <오멘: 저주의 시작>은 미국 연예 전문지 ‘버라이어티’에서 내놓은 2024년 상반기 호러 영화 TOP 10의 한 자리를 차지했다. 그만큼 북미에서도 이 작품이 가진 의의, 즉 예전이나 지금이나 이 사회에서 여성으로 살아가는 것 자체가 공포라는 점을 높이 평가한 듯하다. 과연 여성들은 무엇을 믿을 수 있는가? 그 답은 영화를 보며 찾아보길 바란다. 

     

    사진 제공: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제공


    평점: 3.5 / 5.0

    한줄평: 종교라는 권력에 짓밟힌 오컬트적 여성 수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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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완벽한 일상의 물리적 증명
  • 7★/10★7★/10★

     

      그림자는 물리적 존재를 환기한다. 실존하는 물질이 빛을 가로막을 물리적 질감을 가질 때만 그림자가 생긴다. 빔 벤더스의 〈퍼펙트 데이즈〉는 일상적 삶에도 물리적 질감이 있음을, 나아가 물리적 질감을 초과하는 서사와 의미가 깃들어 있음을 그림자의 이미지로 풀어낸다. 화장실 청소 일을 하는 주인공 히라야마는 일하는 중 벽에 비친 나무의 그림자만 봐도 웃음 짓는다. 화장실 통로 밖으로 나와 고개를 돌렸을 때 그곳에 무엇이 존재하는지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가 그림자로 포착하는 물질성은 물리적 사물을 넘어서기도 한다. 히라야마는 우연히 만난 삶에 낙담한 또래의 중년 남성과 그림자를 갖고 몇 가지 놀이를 한다. 먼저 두 개의 그림자가 겹치면 더 진해지는지를 실험해보고, 뒤이어 서로의 그림자를 좇는 술래잡기 놀이를 한다. 상대 남자는 두 개의 그림자가 겹쳐도 더 짙어지는 것 같지는 않는다고 말하지만, 히라야마는 그렇지 않다고 답한다. 분명 더 진해졌다는 것이다. 히라야마는 ‘알고’ 있다. 그림자는 분명 어떤 물질의 실존과 그 실존에 깃든 서사, 의미를 대변하기 때문에 포개진 그림자는 보이는 것과 상관없이 더 짙어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그림자 술래잡기를 하는 두 사람의 해맑은 표정은 그림자가 증거하는 삶을 소환한다. 그림자가 물질로서의 인간의 몸뿐 아니라 그 몸에 담긴 삶 역시 담아낸다는 (히라야마가 남자에게 알려준) 사실이 두 사람을 즐겁게 한다.     

     

      그러나 그림자만으로는 물질의 구체적 형상을 그려낼 수 없다. 물질을 비추는 빛의 각도와 주변 환경에 따라 같은 물질이라도 여러 모양과 밝기의 그림자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히라야마가 화장실 벽의 나무와 중년 남자의 그림자에서 물질 그 이상을 감각하고 웃음 지을 수 있는 이유는 그가 일상을 살아내는 태도에서 나온다.     

     

    브런치 글 이미지 2

     

      영화는 매일 비슷하게 반복되는 히라야마의 하루를 반복해서 보여준다. 이웃 할머니의 빗자루 소리에 잠에서 깬다, 이부자리를 정리한다, 양치와 면도, 세수를 한다, 직접 분재한 화분에 정성스레 물을 준다, 작업복을 입는다, 신발장 선반에 차례로 정리된 물건들을 챙긴다, 집 앞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는다, 작은 봉고차를 타고 출근하며 음악을 듣는다, 동료에게 ‘왜 이렇게까지’라는 물음을 들을 정도로 깔끔하게 화장실을 청소한다, 퇴근 후에는 목욕탕에 들러 씻고 단골 식당에서 식사한다, 쉬는 날이면 필름 카메라로 촬영한 사진을 인화하고, 헌책방에 들르며, 단골 술집에서 피로를 푼다.     

     

      아무것도 특별한 것 없는 일상이다. 기사가 운전하는 고급 승용차를 타고 온, 오랜만에 만난 여동생이 정말 화장실 청소 일을 하느냐고 묻는 것을 보아 히라야마가 지금 하는 일이 그의 과거 ‘사회적 신분’과는 잘 맞지 않는 일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때문에 괴로움, 열패감이 그가 느껴야 할 더 적절한 감정으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히라야마는 그러지 않는다. 눈을 뜰 때마다, 일하기 위해 집 밖으로 나설 때마다 조용히 미소 짓는다. 마치 오랫동안 오늘을, 지금 이 순간을 기다려왔다는 듯이.     

     

    브런치 글 이미지 3

     

      가만히 웃음 짓는 히라야마의 얼굴은 그림자에 구체적 물질성과 그 너머의 의미, 서사를 상상하는 통로다. 영화는 히라야마에게 어떤 과거가 있는지, 그가 어떤 마음가짐으로 일하는지를 알려주지 않는다. 히라야마의 표정이 이 설명을 대신한다. 별로 가치 없다고 여겨지는 일을 하며 종종 천대받아도 일터에서 스스로 세운 기준을 충족하려 노력하고 매일 얼굴을 마주하는 사람들에게 적당한 애정을 가질 때 나오는 표정으로 말이다. 여기서 빚어지는 단단함은 히라야마의 직업관과 과거에 대한 구구절절한 설명에 대한 조급증을 종식시키며 소박한 차이의 평온한 반복이라는 히라야마의 현재에 온전히 집중하게 해준다. 피곤한 날도, 기분 좋은 날도, 슬픈 날도, 예기치 못한 일이 있던 날도 히라야마는 같은 표정으로 일어날 것이고 하늘을 바라볼 것이며 화장실 벽에 비친 그림자를 바라볼 것이다. 이렇게 히라야마는 일상을 살아가는 동시대인이 잃어버린 표정을 복원한다. 하루를 마감하는 히라야마가 그날을 복기하며 꾸는 꿈속에서는 그저 불분명한 회색빛 형체였던 것들이 어느새 그가 서랍 속에 엄격하게 선별해 모아둔 사진처럼 분명한 형태의 물질성과 그에 담긴 서사, 의미로 확장된다.      

     

      그러나 이 아름다운 영화가 그려내는 히라야마 캐릭터에 남성 판타지가 층층이 깃들어 있다는 점은 해소되지 않는 찜찜한 의구심을 남긴다. 조카, 점심을 먹을 때마다 벤치에서 만나는 여성, 동료의 애인, 술집 사장 등 영화의 여성 인물들은 히라야마가 구축한 일상이 매력적이고 살 만한 것임을 증명하고 보증하는 역할을 맡는다. 주체의 확립을 위한 여성 타자 없이는 완벽한 일상(perfect days)의 물리적 증명은 불가능한 것일까? 야큐쇼 코지가 놀라운 연기로 형상화한 아름다운 일상의 물질성 앞에서, 이 머뭇거림을 함께 마주할 수밖에 없는 당혹감을 ‘떨쳐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영화 속 그림자 이미지가 증명하는 ‘순수한 아름다움’은 아직 온전히 펼쳐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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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로젝트 사일런스'보다 부실한 것 같은 기획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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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중 추돌사고

     

    이 영화의 주인공은 청와대 행정관 차정원(이선균)이다. 딸(김수안)과 함께 사는 싱글파더 정원. 직장이 청와대인 탓에 위에서도 어깨가 무겁지만 그의 입장에 더 중요한 과제가 있다. 바로 딸이 랩(힙합)을 하고 싶다는 것이다. 궁여지책으로 낸 해결방식은 호주로 유학을 보내는 것이다. 운전 중인 정원. 그전에 이상한 양아치 조박(주지훈)와 말다툼이 있던 것은 아무래도 중요하지 않다. 한참 운전에 집중하고 있는데 사건이 벌어진다. 콰콰쾅하는 소리가 난다. 앞에서 확인하니 수많은 차량이 추돌사고를 일으켰다. 어수선한 도로. 군인들이 모여 도로를 정리하는 것 같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난다. 개 한 마리가 혼자서 돌아다니더니, 이내 곧 군견들이 사람들을 공격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당황하는 사람들. 골프선수 유라(박주현), 병학과 순옥(문성근/예수정), 과학자(김희원) 역시 뾰족한 수가 있는 건 아니었다. 생지옥이 된 도로. 과연 탈출할 수 있을까?

     

     

     

     

     

    재난에'만' 집중하다

     

    사실 이 <탈출 : 프로젝트 사일런스>는 재난영화라는 근본을 충실히 쫓아간다고 볼 수 있다. 재난영화의 근본이 뭐야? 기본적으로 현 사회 시스템에 대해 다룬 영화라고 볼 수 있다. 재난이 벌어진다. 그럼 그 재난을 수습하려면 어떤 상황이 벌어지겠지? 그 상황에 대해 이상적인 대처를 보여주나(<비상선언>, <볼케이노>) 한 사회의 시스템에 대해 비판하거나(봉준호 감독의 <괴물>) 정부차원이 아니더라도 시민들이 연대해서 극복하는 줄거리(<칠드런 오브 맨>)거나 시민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저열한 인간군상극(<부산행>)이 나올 수 있다. 이 <탈출 : 프로젝트 사일런스>는 이 특성 중 하나를 그대로 가져왔다. 바로 <괴물>의 사례다. 이것을 잘 살리는 주인공 차정원은 청와대 안보실 행정관에서 근무하는 인물이다. 그럼 청와대의 인물들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다. 어떤 인물이랑 연결됐을까? 바로 유력한 대권후보 정현백(김태우)이다. 이 설정은 이 영화가 한국사회에 대해 비판할 때 중요한 연결고리가 된다. 또 영화가 하이라이트에서 강조하는 무언가가 있다. 이 무언가가 (합을 맞춘 티가 날 지언정) 이 차정원이라는 인물이 이 역할을 맡아 이 이야기를 끌고 가고 이 상황을 맞이해야 하는지를 명확하게 설명해 주는 근거가 된다. 영화가 인물 설정을 통해 무언가를 노리고 이 작품을 기획했는지가 드러나는 셈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영화가 장르를 공간으로 설정한 방식 역시 돋보인다. 이 영화는 도로에서 모든 사건이 벌어지는데, 그 이유는 두 가지인 것으로 보인다. 첫째는 장르적인 토대를 만들고 싶어서. 자동차가 30중으로 추돌사고가 일어나 그 여파로 크리쳐들이 풀려난다. 크리쳐들이 풀려나는 계기가 도로에서 벌어지는 일에만 국한 짓는 것이다. 뭐 바닷물에 오염수를 뿌렸다던가 하는 일이 일어난다고 가정해 보자. 그럼 <괴물>이 생각난다. 또 그 오염수라는 것에 변수가 좀 있다. 그 안의 생태계라던가 환경단체의 감시 같은 것들이 세계를 이루는 데 있어 빼놓을 수 있을까?라는 걸 생각해 보면 2020년대에 이런 접근은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나름 영화가 독자적인 노선을 고른 것이다. 

     

     

     

    그리고 글쓴이는 이 영화가 도로라는 공간적 배경을 선택한 이유가 인물들의 소시민적인 특성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도로가 뭘까? 기본적으로 양 방향에서 오며 가며 이동하는 것이 도로다. 이 도로에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차에 탑승한 인물들로 구성되어 있다. 일단 차에 있다. 겉으로 이 안에 있는 사람이 대통령이건 국무총리건 알 수 없다. 차만 보인다. 인물들 간의 수평적인 관계가 공간을 구성하는 것이다. 영화는 이 특성을 동력으로 삼았다. 이 영화는 실제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 사회 안의 계급을 활용하지 않는다. 플롯에는 기능적일지언정 이야기 안의 문제 해결에는 인물들이 자기 몫 다 한다. 또 자기들끼리 직간접적으로 소통하는 모습도 적지 않게 보인다. 골프선수와 호주 유학 가려는 10대 여학생이 대화할만한 일이 그렇게 많지는 않겠지? 그리고 서로 아이디어를 내는 데에 있어서도 누가 높고 낮다 이런 게 없다. 각자 캐릭터들이 도로라는 공간적 배경 하에 하나로 집결시킨 것이다. 둘째로 이 영화는 도로의 공간적인 특성이 플롯 안에 새겨놓은 흔적까지 보인다. 도로는 두 방향에서 서로 오고 가는 것이다. 만약 이 것의 한 방향을 자른다면? 한 방향 안에서만 머무를 수밖에 없다. 그럼 돌아가야 한다. 도로를 통제하는 사람들이 아니라면 그냥 그 도로 안에 갇힐 수도 있다. 여기서 이 영화가 던지는 윤리적인 문제와도 닿는데, 만약 이 도로를 이용하는 이용객 중 하나가 도로를 관리하는 입장이라면 그게 공정한 것일까? 이 질문을 영화가 도로라는 공간적 배경으로 구현한다. 극후반부를 보면 인물들이 도로를 둘러싼 리액션을 보여준다. 이 리액션이 사실상 영화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는데, 공간적 배경이 ‘도로’가 아니었다면 이 구도가 나오지 못했다는 점에서 공간이 영화의 핵심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부분이다. 

     

     

    사라진 서스펜스

     

     

     

    이 영화의 가장 치명적인 단점이라고 하면 긴장감이 없다는 것이다. 이 영화에 있어 실질적인 재난에 해당하는 것들은 군견이다. 군견은 적군을 학살하는 것에 있어 프로그래밍되어 있다. 전적으로 일반적인 군견 같지 않다. 근육이라던가 감각이라던가 기동력이라던가 굉장히 뛰어난 애들이 이 군견들이다. 그리고 다른 설정. 영화가 안개가 자욱하다는 것이다. 그럼 어떤 서스펜스가 생기겠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보이는 곳으로 들이닥치는 서스펜스가 있겠지? 영화가 이 서스펜스를 잡았을까?  아니오. 그럼 어떻게 잡았어야 했을까? 바로 청각적인 쾌감을 잡는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이걸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조박(주지훈)이 받아야 할 돈만 중요하게 생각하거나 기능적으로 소비되는 네 캐릭터만 반복적으로 보여줄 뿐이다. 아니면 정원 부녀의 관계를 보여준다. 이게 영화가 프리미어를 가졌던 칸 영화제와는 다른 분량이라서 애매하게 된 지점이 있는데, 부녀관계가 더 깊숙해야 하는데 매가리가 없기 때문에 차라리 이 부분을 조금 덜 가져가더라도 장르적인 이해도에 주안점을 찍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영화에서 크리쳐에 해당하는 군견들도 이야기의 흐름에서 굳이? 싶은 점이 많다. 가장 큰 이유. 이 크리쳐들이 개일 이유가 있었을까? 이것은 영화에서 양 박사 캐릭터에게 설명이 부족했다는 과도 이어진다. 영화 안에서 양 박사는 군견들을 탄생시킨 프로젝트의 책임 연구원이다. 그럼 이 프로젝트를 굉장히 잘 알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 이면을 설명하는 방법 중 하나는 개의 특성을 영화 안에서 핵심 소재로 설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군견들의 단점을 어떻게 활용할지에 대한 서스펜스가 생길 수도 있다. 필요한 물건이 있을 것이고, 그 조건이 발휘되거나 그렇지 않는다라는 경우가 있으니까. 하지만 영화는 이것에 관해 그냥 1차원적으로 활용하고 끝낸다. ‘개코’라는 관용어구가 있는 만큼 냄새로 인물들을 추적한다던가 하는 방식이 영화 안에서 중요하게 작동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탈출 : 프로젝트 사일런스>는 근육질의 강아지만 보여주는 선에서 상상력을 피지 못한다. 솔직히 이 영화의 재난이 <미스트>처럼 못생긴 괴물이면 어땠을까? 그건 차라리 비주얼이 무섭기라도 해서 '쟤한테 걸리면 끝장나겠다' 겁이 나기라도 한다. 이 영화의 강아지 묘사라면 호랑이, 고양이, 늑대, 하다못해 모기나 파리 같은 곤충들이었어도 큰 문제가 없다. 영화가 서스펜스에 중요한 것들을 놓친 셈이다.

     

     

     

    만화가가 꿈이어도 되는 거 아닌가

     

    이 영화의 캐릭터들이 이야기를 구성하는 데 있어 100% 적합하지는 못했다. 대표적으로 유라라는 캐릭터가 그렇다. 이 인물은 <부산행>의 마동석 배우 캐릭터 같은 느낌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무기를 활용해서 크리쳐들을 활용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아내로 나온 정유미 배우의 캐릭터가 임산부인 것을 활용해 이동이나 보고 듣는 것에 제약이 생기지 않을까?라는 기대감이 생기는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골프선수라는 직업적 떡밥(?)을 해결하는 방식을 보면 조악하다. 사실 유라가 사격선수라면? 군인 출신이었다면? 골프선수보다 후반부의 전제조건에 더 깔끔하게 호응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둘째. 영화에서 중요하다고 볼 수 있는 정현백이라는 인물물과 군인들이 가진 현실적인 능력 묘사가 이 영화와 적합했는지는 의문이다. 영화 후반부까지 다 보고 나서 드는 의문이기도 한데, 청와대 조직을 글쓴이 같은 20대 남성이 알 리는 없기는 하다. 하지만 분명하게 말하고 싶은 것. 이게 특정 누군가가 이 모든 상황을 컨트롤했다기엔 반론거리가 많을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노부부 병학(문성근)과 순옥(예수정)은 이 영화가 둔 가장 큰 패착이다. 이야기를 납작하게 만들 거라는 걸 예측하는 것과 동시에 전 국민이 보고 즐길 오락영화와는 전적으로 다른 장면이 나온다.

     

     

     

    의문스러운 기획

     

    전체적으로 영화가 노리는 바는 있었지만 그것을 이루는 토대가 부실했다고 말할 수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 <탈출 : 프로젝트 사일런스>다. 스릴러물로서의 서스펜스? 그렇다기엔 긴장감을 잡으려는 시도가 크리쳐 디자인 말고는 잘 느껴지지 않았다. 동시에 이야기의 힘으로 플롯을 끌고 가기엔 인물들이 차정원을 제외하고 극을 이끄는 데 있어 적합하지 못하다. 허점이 너무 많은 것이다. 이걸 총합하면 얕은 영화라는 평이 가능하다. 인물도 다 예상되고. 영화의 핵심 사건도 다 예상되고. 캐릭터들을 기발하게 활용한 것도 아니고. 한국사회의 정치판을 비판하기엔 조직 내부의 알력다툼에 무심하고. 과연 이게 어떤 생각을 가지고 이 영화를 만들었는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덱스터 스튜디오의 CG 기술력만 느껴진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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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변하지 않는 애정의 끈기
  • PROGRAM NOTE. 

    1980년대 홍콩은 세계적 경제 대국으로 발돋움하는 동시에 이로 인해 수많은 화교들이 해외로부터 흘러들면서 사회, 경제적으로 혼돈의 시대를 보내고 있었다. 그런 홍콩에서 가장 위험하고 불가사의한 무법지대가 바로 구룡성채였다. 그 무렵 홍콩으로 흘러들어와 힘겹게 살아가고 있던 찬 록쿤은 악명 높은 미스터 빅이 이끄는 갱단에게 쫓기게 되고 우연히 구룡성채로 몸을 피한다. 구룡성채를 지배하는 사이클론의 도움으로 구룡성채에서의 삶에 적응하던 찬 록쿤. 그러나 찬 록쿤과 구룡성채를 향한 악당들의 위협은 점점 거세진다.

    1993년에 철거되어 지금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 홍콩의 씬 시티, 구룡성채. 기괴하고 미로 같은 공간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사나이들의 이야기가 가슴을 울린다. 시대적 배경과 절묘하게 포개어지는 공간적 배경과 더불어 인물들의 다양한 사연과 관계를 통해 그 당시 홍콩의 모습을 절로 떠오르게 한다. 90년대 홍콩 영화 전성기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화려한 액션 역시 놓칠 수 없는 매력 포인트. 제77회 칸 영화제 공식 초청작으로 첫 공개 당시 이미 극찬을 받은 바 있다. (이정엽 / 20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POINT.

    ✔️ 홍콩 영화를 좋아하세요? 그러면 일단 보세요!

    ✔️ 고천락, 홍금보, 곽부성, 임현제... 홍콩 영화의 기라성 같은 이름들과 함께 유준겸, 오윤룡, 료자여 등 샛별 같은 이름들이 함께 놓여있습니다. 명배우 파티!

    ✔️ 하반기 개봉 예정이라고 합니다.

     

     

      이번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폐막작 제목이 '구룡성채'라는 거다. 아무 정보도 보지 않고, 제목만 보고, 이걸 봐야겠다 생각했다. 구룡성채라니. 홍콩의 씬 시티(sin city)로 불리던 고층 슬럼. 불법 증축으로 거대하게 올라선 굴속 같은 곳. 지금은 철거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진 곳. 당시에도 위생이나 치안 측면에서 좋은 거주지라 할 수는 없는 곳이었지만, 철거되지 않았어도 들어가볼 수는 없었을 곳. 그럼에도 워낙 독특하여 자꾸 궁금해지는 곳이 아닌가. 다들 좋아하잖아?

     

      아니나 다를까 재빨리 매진되어, 취소 표를 겨우 구했다. 그리고 나서야 영화 정보를 확인해 보니... 범죄 스릴러 액션... 홍금보? 아니 왜 나는 구룡성채의 역사를 담은 다큐멘터리일 거라 생각했지? 내 편협한 영화 취향 표에 범죄, 스릴러, 액션은 들어가 있지 않으며 홍금보는... 그가 나오는 영화를 본 적이 없다. 괜찮을까 걱정 반 기대 반으로 보러 갔다가, 만족해서 나왔다. 하, 이게 바로 홍콩영화의 맛이지!

     

     

    아는 맛이 제일 무섭다

      영화의 스토리라인은 매우 간단하다. 그리고 익숙하다. 미리 알아둘 것도 없다. 구룡성채를 둘러싸고 싸우는 이야기구나 정도로만 파악해 두면, 영화가 시작되고 얼마 되지 않아 눈앞에 마치 아침 드라마처럼 익숙한 공식이 펼쳐질 것이다. 시작과 동시에 '옛날 옛적에' 느낌으로 구구절절 펼쳐지는 텍스트부터 전개되는 방식까지 어느 하나 어렵게 소화되는 것이 없다.

     

      그러나 원래 아는 맛이 제일 무섭다. 다른 나라에서 만든 영화였으면 이게 무슨 허무맹랑한 소리야! 하고 실망했을 것들도, 홍콩 액션 영화에서 펼쳐지니 익숙한 장르의 문법에 편승해 그냥 즐기게 된다.

     

      자고로 홍콩 영화의 맛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끈덕진 의리 아닌가. 의리를 끝까지 지키려는 주인공 무리와, 그 의리를 손쉽게 배반하는 악의 무리 사이의 갈등. 요즘 같은 세상에 우스울 정도로 올바른 주제를 이렇게 고수하는데 어떻게 매력이 없을 수가 있냐고. 게다가 이토록 바른 주제의식을 이렇게 폭력적인 장면에 끼워 넣는 얼얼한 홍콩 스타일. 폭력적이다 못해 헛웃음이 나오는 무협의 경지에까지 이르는 액션. 아는 맛은 정말 무섭다. 헤어날 수 없게 만든다. 나도 이런데 홍콩 액션 영화를 유년기와 청소년기에 정통으로 맞은 사람들에겐 이 영화가 얼마나 만족스러울까.

     

     

    패가 없어도 마작은 계속된다

      사실 나는 홍콩 영화를 많이 보지 않았다. 애초에 홍콩 영화에 익숙한 세대는 아니어서, 뒤늦게 왕가위 영화를 몇 편 보면서 마치 영화사 따라가듯 홍콩 영화도 좀 봐야지 의식적으로 본 정도. 무의식적으로 홍콩 영화를 이미 꿀꺽꿀꺽 받아 마신 나의 앞 세대와는 감각이 다를 수밖에 없다. 홍콩 영화를 대표하는 얼굴 또한 내겐 홍금보 쪽보다는 왕가위 영화로 수렴되는 양조위와 장국영의 얼굴 쪽이 가깝다.

      그럼에도 고천락, 임현제, 곽부성 같은 배우들은 어쩜 그렇게 멋있는지. 자신들이 수호하는 의리와 인정을 품은 채 우아하게 나이 든 '형님'들의 모습이 보기 좋았고, 그 아래 각자 있는 대로 멋을 부리고 의리를 받드는 다음 세대의 모습도 보기 좋았다. 무엇보다 세대를 이어가겠다는 의지 같은 것이 결연하게 느껴져서 좋았다.

     

     

      세대 교체란 건 일면 서글프기도 하다. 당장 구룡성채는 몇 년 후 철거될 것임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고, '형님' 세대는 마치 구룡성채처럼 과거 영광의 기록이 되어 떠나갈 것이다. 홍콩 영화가 아시아 일대를 씹어 먹던 시절은 끝난 것 같다는 말조차 무색해진 지 오래다.

     

      그러나 패가 하나 없어도 마작은 계속된다. 몸의 일부를 다치고 잃어도 싸움은 계속된다. 아무튼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이 가치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어떤 선언처럼 느껴지는 이 마음. 그 올곧음조차 촌스럽게 치부되는 시대에, 여전히 홍콩 영화를, 홍콩 액션 영화를 고수하는 건 정말 뜨끈뜨끈한 마음이다. 홍콩의 여름 습도만큼이나 끈적끈적하게 마음에 눌어 붙는다.

     

     

    애정이 묻어날 때 가장 강하다

     구룡성채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보고 싶었던 내가 꽤나 만족했을 만큼, 이 영화는 사진으로 보던 구룡성채의 면면을 성실하게 재현했다. 빛도 들지 않는 굴속같은 건물 안쪽에서 구멍가게를 내고, 잡은 돼지를 염장하고, 만두를 빚고, 생선을 토막 내고... 하며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 공동 수도 앞에 줄은 길고 물은 모자라며 전깃줄은 언제 화재가 나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복잡하게 꼬여 있다.

     

     그러나 이 영화는 구룡성채의 외양만 구현하고 싶었던 것 같지 않다. 외양을 성실하게 재현하는 동시에, 구룡성채 거주민 사이의 인정까지 그려낸다. 마약과 매음과 폭력 조직 등 각종 범죄만 있는 곳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끈끈한 관계가 존재했던 삶의 현장이었다는 사실도 담아내고자 한 마음이 느껴진다.

     

     홍콩 영화는 늘 홍콩을 정말 사랑한다. 반환이 결정되고 실제 반환이 이루어지면서 홍콩이 겪은 혼란의 상처는 홍콩 사람들에게 선명하게 남았지만, 깊고 눅진한 애정으로 승화되었다. 홍콩 영화마다 혼란과 방황 사이로 그 애정이 깊이 느껴진다.

     

     이 영화 또한 홍콩에, 홍콩 사람들에, 홍콩 영화에, 홍콩 액션 영화에 깊은 애정을 품고 있는 게 느껴진다. 그리고 난 누군가 이토록 깊은 애정을 품은 시선을 보면 흐물흐물 녹아내린다. 이 애정에 거스르는 방법 같은 건 도무지 모르겠다.

     

     

     이 영화의 단점이 없지는 않다. (없을 리가...) 영화의 액션은 중간에 좀 과해지면서 무협의 경지에까지 이르고, 아무리 홍콩 맛이라지만 어디까지 가나... 하는 생각이 분명히 든다. 그리고 옛날옛적 액션 영화 답게, 필요 이상으로 남성 중심적이어서 여성과 아동 캐릭터는 소모적으로 표현되는 면이 있다. 구룡성채에서 가장 다부진 눈빛을 하고 있는 (터치드 보컬 윤민 닮았다) 만두집 여성의 경우에도 더 좋은 서사를 부여해줄 수 있었을 것 같다. 시대의 변화에 맞추어 더 발전하지 못한 것은 분명히 아쉬운 구석이다.

     

     그렇지만 홍콩 영화는, 홍콩 영화를 둘러싼 애정은 지금도 변치 않고 여전히 그 자리에 건재함을 빛내는 좋은 작품이었다. 개봉 후 아빠 보여줘야지 싶은 작품도 참 오랜만이다. 깊은 애정을 받은 것들은 시간이 가도 은은히 빛난다. 부디 그 빛을 더 갈고 닦으며 시대에 발맞추어 더 오래오래 빛나 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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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리실라 | 별의 중력에서 벗어나 자기만의 궤도를 찾다
  •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군인 아버지를 따라 서독에서 학교를 다니는 평범한 고등학생 소녀 ‘프리실라 볼리외’(케일리 스패니). 그녀는 우연한 기회로 서독 미군 기지의 파티에 참석하게 되고, 당대 최고의 팝스타인 ‘엘비스 프레슬리’(제이콥 엘로디)를 만난다. 군 복무에 치이고, 어머니와도 사별해 스트레스를 받던 엘비스는 평범하게 자기만 바라봐주는 프리실라와 대화를 나눌수록 점차 마음을 뺏긴다. 

     

    결국 나이 차이도, 부모님의 반대도 극복하고 엘비스와 연인이 된 프리실라. 전역한 뒤 미국으로 돌아간 엘비스와의 장거리 연애에 만족할 수 없었던 그녀는 성인이 되기도 전에 엘비스의 집에서 살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부터 프리실라의 인생은 전혀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엘비스에게 프리실라는 '오직 자신만 바라보고 기다려야 하는' 소중한 여자친구였으니까. 

     

    브런치 글 이미지 1

     

    유명인의 아내에 주목하라

    여성 서사의 핵심은 제도의 모순과 비합리성의 부각이다. 시대와 사회의 한계 안에서 바스러진 여성들의 비극을 보여주며 변화를 촉구해야 하니까. 그런데 최근 여성 서사 영화에서는 한 가지 색다른 트렌드를 볼 수 있다. 단순히 여성 주인공을 내세우는 대신, '유명인의 아내'를 주인공으로 선택한 작품이 많아졌다. <마에스트로 번스타인> 속 펠리시아, <차이콥스키의 아내>의 안토니나 등이 대표적이다. 

     

    이 작품들의 접근법은 기존 작품과는 다소 다르다. 관음증적 욕구를 적극 활용한다. 마치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대중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 연예인의 가십을 생산하듯이 유명인의 개인적이고 은밀한 이야기를 먼저 내세우며 관객의 시선을 끈다. 그 후에야 비로소 유명인의 아내가 겪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아이러니하게도 유명인의 아내가 겪은 비극을 소비하기 쉽게 만들어 메시지의 파급력을 높이려는 시도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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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이 아닌 관계에 주목하다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와 <매혹당한 사람들>을 연출한 소피아 코폴라 감독의 신작 <프리실라>도 이 조류를 타고 있다. 작년에 개봉한 <엘비스>가 엘비스 프래슬리의 음악 세계와 영향력을 펼쳐 보였다면, <프리실라>는 그 대척점에 있다. 엘비스의 아내 프리실라가 직접 쓴 회고록을 바탕으로 여성을 옭아맨 일방향적인 관계를 드러내려 한다. 그 이야기가 설령 현실과는 다소 다른 모습이더라도 개의치 않은 채로.  

     

    <프리실라>는 구성부터 그 의도를 숨기지 않는다. 영화는 로맨스로 시작한다. 최고의 팝스타 엘비스 프레슬리를 동경하는 소녀 프리실라. 그녀가 서독에서 군복무 중이던 엘비스를 어떻게 만나고, 연애를 시작하고, 사랑을 키워 나가는지를 훑는다. 인간 소녀 벨라가 뱀파이어 에드워드를 만나 사랑을 키워나간 <트와일라잇>을 연상시키는 하이틴 로맨스다. 

     

    하지만 <프리실라>가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는 프리실라가 미국으로 건너간 다음부터다. 엘비스의 명성을 빌리되 정작 아내의 이야기가 중심이듯이, 달달한 로맨스로 관객의 눈과 귀를 사로잡은 후 본론으로 넘어간다. 로맨스와 멜로의 외양을 취했지만, <프리실라>를 정작 로맨스나 멜로 영화라고 볼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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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작부터 어긋난 관계

    그래서 <프리실라>는 프레슬리 부부가 서로에게 느끼는 감정 자체를 묘사하기보다는 두 사람의 관계 변화에 주목한다. 사랑이라는 관점보다는 한 여성이 결혼 생활에서 겪은 여러 풍파와 심리적 변화에 초점을 맞춘다. 누가 힘을 갖고 우위를 점하는지를 드라마틱한 사건 대신에 미묘한 변화를 통해 드러낸다. 그 끝에서 영화는 두 사람의 일방향적인 관계를 폭로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엘비스는 프리실라를 철저히 통제했고, 그 과정에서 프리실라는 서서히 자신을 잃어간다. 어찌 보면 시작부터 어긋난 관계였다. 타국 땅에서 군복무 중에 어머니를 잃은 엘비스는 마음의 평화가 필요했다. 때마침 앞에 등장한 평범한 여학생 프리실라는 바로 그 쉼터였다. 온갖 소문에 시달리고, 팬들의 기대치를 충족시킬 커리어를 쌓기 어려운 가운데 자기만 바라봐주는 프리실라와 함께하면 안식을 누릴 수 있으니까. 

     

    그래서 그는 그녀를 자기가 원하는 이미지에 가둬버렸다. 아르바이트도 하지 못하고, 친구를 사귀거나 초대하지도 못하도록. 그러면서 정작 프리실라가 필요로 하는 것은 주지 않았다. 평범한 부부 생활도, 데이트도, 일상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저 자기를 위해 대기하고 자기 욕구에 맞춰주기를 바랐다. 때로는 폭력적이고 강압적인 행동과 언사, 다른 여자 연예인과의 스캔들까지도 묵묵히 견뎌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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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꼬리에 꼬리를 무는 관계

    이러한 비대칭적 관계는 그들의 부부 생활에만 국한되지 않아서 더 흥미롭다. 왜냐하면 프리실라를 통제하는 엘비스 역시 통제받고 있었으니까. 엘비스가 매니저인 파커 대령과 통화할 때 그의 요구를 거부하지 못하는 장면처럼. 프리실라를 시작으로 연쇄적인 통제와 일방향적 관계를 드러내는 이 대목은 감독 본인의 자전적인 경험을 투영한 대목 같기도 하다. 소피아 코폴라는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명문가, 코폴라 가문의 일원이니까. 

     

    그러면서도 <프리실라>는 중심을 잃지 않는다. 사유를 확장할 수 있는 암시와 복선을 제공하면서도 스포트라이트를 언제나 프리실라에게 맞추기 위해 명확히 선을 긋는다. 의도적으로 인간 엘비스만을 부각해 프리실라의 비극에 더 힘을 주려 한다.  

     

    그 일환으로 <프리실라>는 엘비스의 화려한 무대 매너나 공연을 딱 한 시퀀스에서만 등장시켰다. 엘비스의 음악도 철저히 외면했다. OST로도 활용하지 않는다. 스타 엘비스가 등장하면 그의 이야기에 더 힘이 생기고, 당대 엔터테인먼트 산업에 대한 이야기로 가지가 더 뻗어 나갈 테니 그 싹부터 자르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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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하지 않고 보여주기

    이에 더해 <프리실라>는 이야기를 애써 극적으로 꾸미지 않는다. 등장인물의 명성에 비해 영화의 톤은 의외로 건조하다. 프리실라가 이혼을 결심하는 순간까지의 감정 변화는 직접 드러나지 않는다. 대신 엘비스의 가스라이팅 속에서 주체성을 잃어가는 프리실라의 모습을 외양의 변화만으로 보여준다.

     

    패션이 대표적이다. 프리실라의 옷은 엘비스의 취향대로 나날이 화려해진다. 화장도 진해지고, 머리에도 힘이 잔뜩 들어간다. 하지만 그럴수록 그녀의 모습은 갑갑해진다. 철저히 엘비스에게 맞춰진 채로 그의 허락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무기력함과 공허함만이 강해진다. 반면에 청바지에 흰 티를 자연스럽게 입은 그녀는 엘비스에게 이혼을 당당히 요구한다. 스타의 화려함을 벗어던지자 마침내 자기만의 궤도를 찾은 셈이다. 

     

    또 감독 특유의 세련된 연출을 적재적소에 활용해 ‘프리실라 프레슬리’가 아닌 ‘프리실라 볼리외’가 되겠다는 그녀의 선택에 힘을 실어준다. 엘비스와의 행복한 한때를 보여줄 때는 옛날 필름 효과를 활용하고, 라스베이거스 여행 장면은 감독의 전작인 <블링 링>을 순간 연상시킬 만큼 화려하다. 하지만 이 장면들은 매번 창살 없는 감옥이나 다름없는 엘비스의 저택과 대조를 이루면서 프리실라의 심경을 시각적으로 전달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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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 순간 드는 의문

    다만 부작용도 있다. 우선 극적인 사건이 많지 않고, 프리실라의 불안이 점진적으로 누적되는 과정을 다루다 보니 영화가 전반적으로 심심하다. 미묘한 감정선을 잠시라도 따라가지 못하면 전개가 급하다는 느낌도 받을 수 있다. 그들의 결혼이 본격적으로 삐걱거리는 대목이 후반부에 집중되어 있으니까. 영화를 보고 나면 미끼여야 할 두 사람의 연애시절이 본론보다 뇌리에 더 많이 각인될 정도다. 

     

    무엇보다 <프리실라>가 프리실라를 활용하는 방식 역시 의문이다. <프리실라>는 의도적으로 현실의 맥락을 외면한다. 프리실라의 일생 중 비대칭적 관계, 일방향적 관계라는 모티브에 충실한 장면만 취사선택했다. 일례로 프리실라도 이혼 전에 바람을 피웠다는 사실은 누락됐다. 이혼 후에도 엘비스 프레슬리의 자산을 활용해 회사를 경영했다는 점 역시 마찬가지다.

     

    이 대목은 양날의 검이다. 명확한 주제를 보여줄 수 있어서 장점이지만, 그로 인해 영화의 메시지와 화법이 충돌할 수 있으니 문제다. 엘비스가 프리실라를 자기가 원하던 여자친구와 아내의 이미지에 가두었듯이, <프리실라> 역시 실제 프리실라를 보여주는 대신 가상의 프리실라 안에 그녀를 가둔 것은 아닌가 싶기 때문이다.  

     

    이는 후반부를 다소 성급하게 전개한 이유로도 볼 수 있다. 그녀와 엘비스의 관계에서 이혼은 온점이 아니라 쉼표였는데, 영화는 쉼표 다음의 이야기를 안 보여주려고 일부러 페이지를 빠르게 넘겨버린 셈이다. 만약 이혼 후 프리실라가 엘비스와의 관계를 영리하게 활용하는 에피소드가 있었다면 엘비스의 새장에서 벗어난 그녀의 주체성을 더욱 강조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형식과 내용의 충돌 가능성 또한 없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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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cceptable 무난함

    첫사랑에 유명인을 더한 대인관계심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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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퓨리오사가 지켜낸 희망의 씨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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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나 자신만의 희망이 있다. 자신이 진짜 원하는 것, 언젠가 자신을 구원해 줄 그 희망은 삶을 이어나갈 수 있는 힘을 준다. 몇 번이나 찾아오는 절망적인 상황은 삶을 더 이어나갈 힘을 빼놓는다. 더 나아갈 힘이 없다고 느끼는 그 순간, 마지막까지 감추어두었던 희망은 꺼내어들 수 있는 마지막 무기다. 그 희망을 생각하면서 다시 앞으로 나아갈 힘을 조금씩 되찾아간다. 만약 희망조차 없다면 그 삶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있을까. 먹고 자는 문제만 간단히 해결할 뿐, 나쁜 상황만이 앞에 있다고 생각한다면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 것이다.

     

    2015년에 개봉했던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는 희망을 무기로 꺼내든 이들이 앞으로 나아가는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의 퓨리오사(샤를리스 테론)는 자신이 알고 있는 생명의 땅으로 가기 위해 임모탄(휴 키스번)에게 갇혀있던 여성들을 모두 데리고 탈출을 감행한다. 퓨리오사는 모든 여성들의 희망이었고, 그 희망의 여정에 맥스(톰 하디)가 우연하게 끼어들게 되면서 다각도로  전개되는 추격전이 펼쳐졌었다.

     

    이번에 개봉한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는 전편에서 희망의 전사였던 퓨리오사의 성장 서사를 다룬다. 사실 성장 서사라기보다는 그녀가 겪었던 모든 절망들을 보여주면서 그런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던 과정을 보여준다. 모든 이야기를 다 보고 나면 이 영화의 퓨리오사(안야 테일러 조이)에게 행복한 순간은 어린 시절 밖에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짧은 행복의 기억 때문에 그녀가 수많은 어려움을 견딜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럼 이 영화는 그녀의 어떤 감정들을 전달하면서, 그가 겪었던 수만은 절망들을 보여주고 있을까.

     

    [첫 번째 감정] 퓨리오사의 절망

     

     

    영화의 대부분은 절망으로 가득 차있다. 핵전쟁으로 황폐화된 지구는 끝없는 사막으로 바뀌었고, 그 안에 살아남은 사람들은 살기 위해 누군가의 물과 식량을 탈취한다. 그야말로 약육강식의 시대, 이 시기에 아직 푸르름을 간직한 공간이 있었다. 바로 퓨리오사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 그런 곳이다. 이곳의 사람들은 외부인을 강력하게 경계하지만 그 안에서 자급자족하며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다.

     

    퓨리오사가 외부 침입자들을 발견하고 그들에게 납치되면서 그녀의 절망이 시작되었다. 영화 초반 퓨리오사의 엄마가 납치된 퓨리오사의 뒤를 따라가는 길고 긴 추격장면은 절망을 맞이하지 않게 하려는 몸부림이다. 여기엔 두 가지 절망이 섞여 있다. 유일하게 존재하던 푸른 지상 낙원이 외부에 노출되어 버렸다는 것과 그곳 출신 아이인 퓨리오사가 납치되었다는 것이다. 엄마는 끝까지 퓨리오사를 찾기 위해 추적하지만 결국 그 집단의 우두머리인 디멘투스(크리스 햄스워스)에게 붙잡히고 만다. 퓨리오사는 바로 앞에서 엄마가 죽임을 당하는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게 된다. 퓨리오사는 행복의 상징인 낙원에서 멀어졌고, 점점 더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그녀의 고통은 커진다. 초반의 긴 추격장면은 긴 안전끈이 늘어나가 끊어져버리는 것처럼 느껴진다. 

     

    엄마가 죽임을 당한 후 십여 년이 지난 후, 성인이 된 퓨리오사는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존재였던 잭(톰 버크)을 눈앞에서 잃게 된다. 그 역시 디멘투스에게 죽임을 당하게 된 것이다. 퓨리오사에게 가장 큰 절망을 선사한 디멘투스는 그저 자신을 귀찮게 한 존재를 하찮게 보고 그저 자신의 재미를 위해 제거해 버렸을 뿐이다. 그렇게 퓨리오사의 절망은 더욱 커지고, 그 절망을 준 존재를 향한 복수심은 더욱 커져만 간다. 영화 내내 디멘투스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압도적인 자동차들로 퓨리오사와 일행을 누르고 파괴한다. 영화는 거대한 디멘투스의 차량이 퓨리오사의 자동차를 짓밟는 모습을 담으며 퓨리오사의 절망을 처절한 액션 장면에 담고 있다. 

     

    [두 번째 감정] 퓨리오사의 분노와 복수

     

     

    절망은 당연하게 분노의 감정으로 바뀐다. 퓨리오사는 임모탄이 지배하고 있는 시타델에 숨어 살면서 분노를 표출할 수 있는 기회를 찾는다.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는 퓨리오사의 분노가 조금씩 쌓여가는 과정을 점진적으로 보여준다. 그 과정은 십여 년이 넘는 기간 동안 진행된 것이어서 단번에 폭발적으로 쌓인 것은 아니다. 퓨리오사는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에 복수를 하기 위해서는 꽤 긴 시간이 필요했고, 자기 자신을 단련하고 성장하지 않는다면 복수의 기회조차 가질 수 없었을 것이다.

     

    자연스럽게 말도 극단적으로 줄일 수밖에 없다. 자신의 정체를 최대한 숨기고 시타델의 시스템 속에서 조용히 지내면서 탈출의 기회를 엿볼 수 있는 위치를 노렸다. 결국 수송 트럭으로 탈출을 감행하려 하지만 마음대로 되지는 않는다. 그 과정에서 만난 잭은 <매드맥스> 시리즈의 모든 남자 가운데 가장 믿을만한 인물이다. 그는 퓨리오사 내면에 숨어있는 분노를 발견해 내고, 그것을 적절히 조절하면서 살아가는 방법을 무심하게 알려주는 인물이다. 

     

    영화 중반부에 잭과 퓨리오사가 무기 농장에서 디멘투스 일행에게 습격을 받는 장면이 있다. 무기 농장의 거대한 탑이 무너지는 가운데 두 사람은 서로를 의지해 그 상황을 겨우 벗어나지만, 그 액션 장면처럼 그 두 사람은 붕괴되고 있었다. 완전히 붕괴되어 버린 퓨리오사는 결국 마음속에 복수만이 가득한 상태가 되어버린다.

     

     

    [세 번째 감정] 모두의 희망이 된 퓨리오사의 희망

     

     

    영화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의 마지막 하이라이트 액션 장면은 영화의 처음과 비슷한 추격장면이다. 이 추격을 하기 위해 퓨리오사는 바퀴가 하나 없는 자동차를 타고 가게 된다. 마치 팔 하나가 없는 퓨리오사의 모습과 흡사해 보인다. 그렇게 추격을 시작한 퓨리오사는 영화의 초반 자신의 엄마가 끝까지 자신을 추적해 왔던 것처럼 끝까지 디멘투스를 추격해 낸다. 그리고 자신의 엄마 그리고 유일한 믿음을 주었던 잭의 복수를 하기 위해 애쓴다. 

     

    사실 이런 복수의 전체 과정에서 퓨리오사는 희망을 잃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어머니가 준 복숭아나무 씨앗 하나를 잊지 않았다. 그녀가 입안에 넣어 보호하는 그 작은 씨앗은 그녀가 지켜야 할 최후의 희망이다. 이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 이야기 직후에 벌어지는 내용을 다루는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까지 이어서 보고 나면 퓨리오사가 지켜냈던 그 희망이 영화 속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의 희망이 되어가는 과정을 볼 수 있다. 퓨리오사는 그 희망을 지켜냈고, 많은 사람들에게 그 희망의 동력을 나눠주었다. 

     

    영화 속 빌런인 디멘투스의 희망은 무엇이었을까. 사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디멘투스는 희망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인물이다. 또 다른 빌런인 임모탄은 정상적인 아들을 낳을 수 있다는 희망을 따라가는 인물이다. 그래서 그는 엄청난 독재력으로 대중을 사로잡아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낸다. 하지만 디멘투스에겐 그런 희망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재미있는 것만 추구하며 삶을 이어온 인물이다. 그가 잭을 죽이는 장면에서 혼잣말로 재미없다고 웅얼거리는 장면에서 그의 그런 태도를 엿볼 수 있다. 퓨리오사는 자신의 희망으로 무작위성, 혼란, 무계획의 대표적인 인물인 디멘투스에게 일종의 형벌을 내린 셈이다. 

     

     

     

    퓨리오사의 서사는 이번 영화로 완성되었다. 앞으로 <매드맥스> 시리즈가 더 이어질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2015년부터 시작된 <매드맥스 사가>에서 가장 매력적이고 궁금한 인물이었던 퓨리오사에겐 숨겨진 이야기가 남아있지 않게 되었다. 

     

    전작과 마찬가지로 이번 영화에도 다양한 액션 장면들이 담겨있고, 한 액션 시퀀스가 꽤 길게 이어진다. 전작을 좋아했던 관객이라면 충분히 만족할만한 프리퀄 영화다. 전작이 액션으로 서사를 완성했다면, 이번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에서는 액션과 음악 그리고 퓨리오사의 성장이야기로 길게 서사를 이어 완성했다. 전편이 직렬로 이어진 영화라면, 이번 영화는 병렬로 펼쳐 다각도로 퓨리오사의 경험과 생각을 전달한다.  퓨리오사의 희망이 어떤 식으로 펼쳐지는지 끝까지 시선을 잡아두는 영화다. 

     

       

    *영화의 스틸컷은 [왓챠]에서 다운로드하였으며, 저작권은 영화사에 있습니다.

     


    https://www.notion.so/Rabbitgumi-s-links-abbcc49e7c484d2aa727b6f4ccdb9e03?pvs=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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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천벽력

     

    이 영화의 주인공은 승무원 정인(배수지)이다. 멀지 않은 미래. 끔찍한 사고가 있기 전까지 정인은 누구보다 행복한 사람이었다. 사랑하던 남자친구 태주(박보검)가 사고가 일어난다. 뜨겁게 사랑했던 두 사람. 혼자가 됐다는 외로움에 정인은 '원더랜드' 서비스를 알아본다. 원더랜드 서비스는 간단하다. 일종의 멀티버스에 사랑하는 사람을 구현시켜 그 인물과의 영상통화를 제공하는 것이다. 이 서비스를 관리하는 사람은 (정유미)와 (최우식)이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은 고고학자 바이리(탕웨이)를 모니터링하고 있다. 딸을 잃은 바이리. 바이리는 딸이 살아있다는 일념 하에 원더랜드의 서비스를 이용하고 있었다. 간절한 그리움에 있는 사람들.

     

     

     

    SF적 상상력으로 만들다

     

    이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이라고 볼 수 있는 건 질문이다. 어떤 질문? 이 영화가 나누는 세 가지 챕터에 따라 각기 다르다. 첫 번째 질문은 정인과 태주의 서사에서 읽을 수 있다. 기본적인 설정. 정인과 태주는 서로 알콩달콩 예쁜 연애 중이었다. 하지만 사고가 나 태주가 식물인간이 된다. 정인이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다는 상실감에 원더랜드를 통해 가짜 태주를 만든다. 이 말은 곧 ‘사랑하는 사람을 같은 존재로 대체하겠다’라는 말처럼 들린다. ‘사랑이 다른 사랑으로 잊히네’ 같은 노래가사 같은 사랑이 아니다. 그 사람의 빈자리를 그 사람으로 메울 수 있을까?라는 사랑의 난제에 도전한 것이다. 이 <원더랜드>는 전적으로 영화 같은 정인의 사랑에 대해 질문한다. 글쓴이 생각엔 이 질문 던지기가 어느 정도는 성공한 것 같다. 왜? 이 질문이 정인의 입장에서 딜레마가 되는 데 있어 SF적 상상력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이 상상력으로 만들어 낸 진짜/가짜 태주 사이의 갈등은 (보통의 sf가 다루는) 철학적인 문제임과 동시에 ‘뭐가 진짜 사랑이야?’라는 로맨스적인 요소가 된다. 이것은 영화가 갖고 있는 윤리적인 문제가 로맨스, SF장르 모두를 꿰뚫는 좋은 수가 됐다. 인간을 복제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와 사랑을 같은 사랑으로 대체할 수 있는가?를 동시에 고민하게 되는 것이다. 이 덕에 <원더랜드>는 이 장르를 고른 당위성을 어느 정도는 챙겼다.

     

     

     

    두 번째 질문. 이 원더랜드를 운영하는 해리와 현수의 서사로 읽을 수 있는 질문이다. 이 두 인물은 이 영화에서 돋보여야만 하는 캐릭터다. 왜? 이 두 사람의 속성 때문에. 이 인물들을 거칠게 말하면 '복제인간을 만드는 사람들'이다. 이 설정은 해리와 현수가 영화 안의 인물들의 위에 있다는 걸 보여주는 설정이다. 실제로 영화 안에서 원더랜드 안의 사람들이 말썽을 일으키면 두 캐릭터가 해결책을 고심하는 장면이 있고, 이 부분은 두 사람의 서사에서 중요한 것으로 묘사된다. 영화는 이 두 사람의 이런 행보가 윤리적으로 옳은가?라고 질문한다. 또 인간이 인간에게 개입할 수 있는 선이 실재하는가?라고도 묻는다고 볼 수 있다. 이 질문을 구현하는 것이 할머니와 손자에 관한 이야기다.  이 두 사람이 연애하는 것을 그릴 수도 있고 원더랜드를 운영하는 애로사항에 대해서도 다룰 수 있다. 하지만 두 사람은 굳이 이 사건을 골랐다. 할머니와 손자 간의 사건에 개입하는지를 고민하는 모습을 중요하게 보여준다. 이 고민은 영화 안에서 강조되다 해리와 현수가 후반부에 고른 선택과 직접적으로 이어지는데, 가상의 세계를 만들어 인간의 내면에 도전하는 난제를 구현했다는 점에서 장르를 잘 골랐다고 볼 수 있는 부분이다.

     

     

     

    세 번째 질문. 바이리의 서사에서 읽을 수 있는 질문은 '이렇게 만들어진 인공지능을 정말 사람이라고 인식해도 될까?'에 대한 부분이다. 바이리는 죽은 사람이다. 해리와 현수가 프로그래밍을 통해 만든 가상의 인물이다. 하지만 이 사람은 가상세계를 뒤흔드는 인물로 설정되어 있다. 이 뒤흔든다는 것 자체도 중요하지만 영화가 정말 중요하게 밑줄 그은 부분은 딸 바이지아의 리액션이다. 바이리만 일방적으로 뒤흔들지 않는다. 바이지아도 이 행보에 호응하는 형식으로 플롯이 짜여 있다. 두 사람이 선을 직접 넘어드려고 노력한다는 것. 이 의미는 영화가 이 선에 대해 응시하고 싶었다는 의미기도 하다. 더 나아가 바이리와 함께 등장하는 성준(공유)의 캐릭터는 이 선 그 자체를 암시하는 인물이다. 후반부에 이 인물의 정체를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있는데, 이 인물의 동선으로 현실세계와 가상세계를 가로지르며 이야기를 연결하고 있다. 이 SF의 장르적인 특성을 살린 선택은 두 번째 질문과 마찬가지로 영화의 가족드라마적 특성과도 이어지는 부분이 있다. 바이리라는 인물이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SF적 상상력으로 구현하면서, 장르가 가진 윤리적인 부분도 건드리는 것이다.

     

     

     

    맥 빠지는 전개 

     

    하지만 영화의 축을 이루고 있는 세 이야기 전부 뒷심을 보여주지 못한다. 첫째. 태주와 정인의 로맨스와 관련된 부분에는 각본 상 결함이 많은 것으로 보인다. 우선 태주가 오랜 시간 동안 식물인간이었다고 하는 건 충분히 납득할만한 설정이다. 하지만 이 설정에 지나치게 기대 영화의 무리수로 돌아오는 장면이 몇 있다. 가령 영화 안에서 정말 태주의 행동인지 아닌지 관객에게 묻는 장면이 있다. 이 장면은 태주라는 인물의 추후 행보가 가능한가?라는 점에서도 의문이고 이게 두 사람의 사랑과 뭔 관련이 있는가?라는 점에서도 단점으로 돌아온다. 정인의 내면 역시 마찬가지다. 이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보여줌과 동시에 더 나아지는 것을 애초에 포기한 캐릭터처럼 보인다. 인물의 방향성을 초반부터 딱 정해놓고 외부가 끼치는 영향을 전부 차단했기 때문에, 정인이는 옛사랑을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된 인물인 것처럼 묘사된다. 두 사람의 로맨스가 여운을 만들며 사랑영화가 가진 힘을 보여줘야 하는데 '쟤 왜 저래'만 남는 것이다. 로맨스와 SF의 공존에 대해서만 연구하고 정작 자세한 부분을 채우지 못한 패착이 느껴졌다.

     

     

     

    둘째. 바이리와 현수/해리의 서사에 관한 부분이다. 두 서사는 결합하지 못하고 서로 붕 떴다. 이 부분은 다양한 예를 들어 쓸 수 있겠지만 글쓴이는 바이리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싶다. 시놉시스에도 언급됐듯이 바이리는 복제인간이다. 실제 인간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 캐릭터가 실제 인간과 차이점을 더 부각하는 연출이 이 영화의 핵심과도 이어진다는 의미다. 왜? 실존이라는 조건이 아니더라도 가족의 유대감을 ai가 구현할 수 있다면 의미가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토의를 자유롭게 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글쓴이는 이 영화가 굉장히 적극적으로 '이 캐릭터는 인간과 다를 바 없어요'라고 강조하고 있는 듯했다. 이건 두 사람 현수/해리에게 몰입하는 것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다. 왜? 이 연출은 영화가 가진 모순을 스스로 자백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AI로 만든 세상이라고 공언했는데 이 인물이 이렇게 행동하는 게 가능한 일일까? 프로그래머가 만든 프로그램을 통제하지 못하는 게 현실성이 있을까? 글쓴이가 이런 의문이 든 이유는 감독이 '바이리의 서사를 중요하게 생각해서'라고 생각한다. 그 무엇보다 바이리의 숭고한 무언가를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이 선택이 오히려 현수와 해리의 개성을 납작하게 만드는 악수처럼 느껴졌다. 프로그램을 실질적으로 운영하는 

     

     

     

    윗문단의 연장선상에서 성준, 해리, 현수의 캐릭터 세팅은 끝마무리가 이상하다는 점에서 과연 기획의도를 잘 살렸을까? 의문이 들게 만든다. 우선 해리와 현수는 사이좋은 선후배 관계다. 영화 안에서 뭐 이렇다 할 그게 없다. 큰 문제는 '이렇다 할 그게 없다'는 점에서 온다. 이 둘은 가족이 원더랜드와 관련이 있다는 공통점을 가진다. 이 부분은 굉장히 중요한 것 같다. 실제로 분량도 크다. 하지만 이 사건은 나열에서 그치고 플롯의 선후관계에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후반까지 가면 이 무의미한 설정들이 더 크게 다가오는데, 영화 안에서 의미를 보여주지 못하고 캐릭터를 기능적으로 남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 이 <원더랜드>는 그걸 스스로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이상한 대사를 넣기도 했다. '우리 잠깐만 사귈래요'같은 대사가 있었는데 이 문장이 이후에 두 사람 간의 관계에 유효타를 끼치지도 못했으며 현수와 해리 사이의 로맨스의 ㄹ자도 없었다는 것이 부실한 서사를 더 돋보이게 만드는 악수였다. 

     

     

     

    글쓴이가 이 영화의 가장 강력한 단점으로 생각하는 부분은 성준 서사다. 이 영화에서 성준이가 왜 필요했을까? 글쓴이는 단지 바이리의 존재를 부각하기 위해서 단지 바이리의 존재만을 부각하기 위한 것 말고는 의미를 찾기 어려웠다. 왜? 성준이 바이리에게 그 어떤 존재도 되지 못한다. 대신 다른 주인공과의 공통점은 있는데, 이 공통점도 이야기에서 핵심을 드러낸다거나 하는 설정이 아니다. 이런 이유로 인물이 겉돈다. <가족의 탄생>에선 1인 2역으로 구현하던 캐릭터의 생동감이 본작 <원더랜드>에선 죽은 것이다.

     

     

     

    조악한 시각화

     

    이야기에서 몰입감을 잡지 못하다 보니 CG의 상태에 대해 눈을 돌릴 수밖에 없다. 사실 극후반부 전까지는 시각화를 따지는 것이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다. 이 영화는 윤리적인 문제를 장르적인 특성과 결합시켜서 관객에게 던지는 영화다. 이 영화에 대해 비판하고 싶다면 작품이 던지는 화두에 대해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었다'라고 맞는 게 적절하다고 볼 수 있지 않겠어? 영화가 그 부분은 나름대로 제 구실을 하고 있으니 최무성 배우의 캐릭터가 속해있는 세계가 풍기는 이질감이나 가짜 태주가 있는 우주의 어색함을 일일이 따지지 않는다면 보는데 큰 문제는 없다.

     

     

     

    하지만 이 시각화의 퀄리티가 영화의 엔딩에게 칼끝을 겨누고 있다는 점은 치명적이다. 글쓴이가 이 영화의 엔딩을 보고 든 생각. <가족의 탄생>과 지나치게 대비된다는 점이다. <가족의 탄생>의 엔딩을 생각해 본다. 그 영화의 이야기 구조는 <가족의 탄생>이 그린 가족 구성원과 유사하게 닮아있다. 그리고 엔딩에서 벌어지는 사건도 그 영화의 플롯 그 자체라고 볼 수 있다. 탐탁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정을 주고받는 가족의 속성을 보여준 것이다. 이 <원더랜드>는 뭘 추구했을까? SF와 가족드라마의 접합을 시도했다. 어떻게? <가족의 탄생>을 어설프게 따라 했다. 핵심은 '어설프게'라는 점이다. 이야기의 구조를 엔딩에서 집약시킨 것도 아니고, 어설픈 VFX로 시각적인 설득력을 보여준 것도 아니며 가족영화로서의 감동도 잡지 못했다. 그렇다고 엔딩에서의 사건이 치밀한 핍진성을 통해 구현된 것인가?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1차원적으로 보면 그 사건 자체는 합리적이지만 인물의 내면을 촘촘하게 묘사하지는 못했다는 점과 성준의 동선이 꼬인다는 점에서 마무리를 잘 짓지 못했다. 반대로 바이리가 그 장면에서 특정 사건이 벌어졌다고 해서 영화가 핍진성이 무너진다는 보장이 있을까? 글쓴이는 아닌 것 같다. 영화 전체적인 아이디어 '결핍을 SF적 상상력으로 채운다'라는 것을 해치지도 않는 것 같다. 어차피 이 '원더랜드' 서비스가 영원히 지속될 것이 아니니까. 그런데 이 영화는 그 어떤 것도 건드리지 못한 채 진부한 방식으로 마무리짓는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 부분까지 도달하는 과정을 시각화하는 방식은 극의 몰입을 깬다. 전반부야 그럴 수 있다지만 후반부에서는 확실하게 힘을 줬어야 하는 것 아닐까? 기억에 남는 건 바이리 역의 탕웨이 배우가 보여주는 연기다. 

     

     

     

    적당히 잘 만든걸 기대할리가

     

    어떤 관점에선 볼만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스크린에서 오랜만에 보는 박보검 배우의 해사함이나 이제 베테랑이 된 배수지 배우의 경험치를 보는 것만으로도 관람에는 무리가 없다. 하지만 이 김태용이라는 이름이 한국영화에 <만추>와 <가족의 탄생>이라는 선물을 두고 갔던 것 치고는 너무나도 부실한 결과물이다. 솔직히 감독 이름 가리고 냈으면 누군가의 입봉작일 거라고 생각할 것 같기도 한 것이 이 <원더랜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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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이재킹 | 역사와 상상 사이에서 항로를 지켜내는 뚝심
  •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969년, 동해 상공을 비행하던 공군 파일럿 '태인'(하정우)은 비상사태를 맞이한다. 남파 간첩이 납치한 한국 민항기가 휴전선을 넘기 직전이 되자 민항기를 사격해 엔진을 멈추라는 명령이 떨어지는 것. 하지만 그는 전역한 자기 사수가 파일럿임을 확인한 후, 승무원과 승객의 안전을 우려해 상부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 결국 비행기는 그대로 북한에 억류되고, 태인은 군복을 벗는다. 

     

    2년 후 민항기 부기장이 된 태인'(하정우)은 기장 '규식'(성동일)과 함께 속초 공항에서 김포행 비행에 나선다. 승무원 '옥순'(채수빈)의 안내에 따라 승객들이 탑승한 후 이륙한 비행기. 그러나 '용대'(여진구)가 사제폭탄을 터뜨리자 기내는 아수라장이 되고, 용대는 조종실을 장악한 후 북으로 기수를 돌리라 협박한다. 폭발 충격으로 규식마저 한쪽 시력을 잃은 가운데, 태인은 비행기와 승객을 지키기 위한 사투를 시작한다. 

     

     

    과거의 힘을 살린 항공영화

    하이재킹. 운항 중인 항공기를 불법으로 납치하는 행위. 미 연방항공청에 따르면 하이재킹은 1968년부터 1972년까지 유난히 자주 발생했다. 5년간 325건에 달할 정도. <1987>의 김경찬 작가가 각본을 맡고, 당시 조감독이었던 김성한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영화 <하이재킹>은 바로 그 시기에 발생한 '대한항공 F27기 납북 미수 사건'을 바탕으로 제작됐다. 

     

    1971년 1월, 속초공항발 김포공항행 여객기가 이륙 30분 만에 홍천 상공에서 납치범 김상태에게 납치당했고, 이강흔 기장과 전명세 조종사는 협박범의 요구대로 기수를 북쪽으로 돌렸다. 하지만 비행기는 강원도 고성 바닷가에 무사히 비상착륙했고, 승객도 전원 생존했다. 이강흔 기장이 대한민국 공군 전투기를 북한의 미그기라고 속이는 기지를 발휘하고, 전명세 조종사가 폭탄을 몸으로 덮는 희생정신을 보여준 결과였다. 

     

    <하이재킹>의 가장 큰 특징이라면 <1987> 느낌이 물씬 나는 역사적 상상력이다. 사람보다 이념이 우선시되던 시대의 그림자와 과거라서 오히려 신선한 당시 시대상을 버무려 기존 항공 영화의 한계를 피하려 했다. 과하지 않게 감정선을 살짝 '넛지(Nudge)'하는 화법도 관객을 승객 중 하나로 만드는데 탁월한 효과를 발휘했다. 그 덕분에 <하이재킹>은 난기류를 만나고도 목적지까지 비행하는 데 성공했다. 

     

     

    역사의 것은 역사에게, 상상의 것은 상상에게

    실화 사건을 다룬 작품의 관건은 각색의 정도와 방향성이다. 상상과 왜곡은 한 끗 차이니까. 그런데 <하이재킹>은 그 어려운 일을 비교적 잘 해냈다. 역사적 사실을 부각하는 대목과 상상력을 발휘할 대목을 철저히 분리한 선택이 장르적인 측면과 스토리텔링 양쪽에서 득이 됐다.  

     

    사실 항공 영화는 상상력이 끼어들 여지가 많지 않다. 시간대가 현재에 가까워질수록 더욱 그렇다. 숱한 사고를 겪으면서 보안 규정이 나날이 철저해졌기 때문. 한재림 감독의 <비상선언>만 해도 '류진석'(임시완)이 비행기 표를 사는 첫 장면부터 기내에서 범죄를 저지를 때까지 전개가 어색하다는 평가를 피하지 못했다. 

     

    <하이재킹>은 오히려 과거로 돌아가 함정을 피했다. 항공 보안 관련 규정이 미비했던 70년대를 배경 삼아 자칫 억지스러울 상황을 납득시켰다. 선착순으로 비행기 자리를 고르거나 용대가 보안 검사를 뚫고 폭탄을 반입하는 장면은 신선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면서도 역사의 빈틈은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실제로는 없었던 민항기 격추 명령, 알려진 바 없는 범인의 범행 동기 등을 잘 짜 맞춰서 태인과 용대 사이에 진한 감정선을 불어넣었다. 그 덕분에 다큐멘터리가 될 수 있었던 이야기에서는 생동감이 느껴진다. 이는 '이한열'(강동원) 열사와 '이연희'(김태리) 사이의 가상 로맨스를 활용해 6월 민주 항쟁을 피부로 느낄 수 있게 한 <1987>의 장점과도 유사하다. 

     

     

    피해자 VS 피해자

    그 덕분에 <하이재킹>은 단순한 항공기 납치 스릴러 이상의 이야기를 보여줄 수 있다. 전혀 접점이 없는 태인과 용대의 이야기는 대조될 때 함의가 드러나기 때문. 용대는 가해자가 된 피해자의 전형이다. 6.25 전쟁 때 북한 인민군 장교가 된 형 때문에 반공분자로 몰려서 감옥에 들어갔다 나왔다. 그 사이에 어머니까지 죽은 그는 2년 전 납북 사건 주동자가 북한에서 영웅 대우를 받는다는 소식에 착안해 하이재킹 범죄를 저질렀다. 

     

    반면에 태인은 피해자이지만 가해자는 되지 않았다. 그는 2년 전 휴전선을 넘어가는 민항기의 엔진을 쏴서 착륙시키라는 명령을 거부했다. 군에서 사수였던 파일럿과 승무원, 승객 모두가 죽을 수도 있으니까. 그 대가로 강제전역 당한 후에도 그는 군복을 벗긴 휴머니즘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전투기 사격을 피하고, 한쪽 손만으로 비상착륙을 시도하면서 2년 전과는 달리 승객도, 승무원도, 자기 부사수도 지켜냈다.  

     

    이렇게 보면 두 주인공의 공통점과 차이는 분명하다. 국가 권력의 횡포로 인해 피해자가 됐지만 전혀 다른 답을 볼 수 있으니까. 용대는 피해의식과 정부를 향한 불신에 사로잡혀 자기 인생은 물론 무고한 이들의 인생까지 파괴하려 든다. 반면에 태인은 그 불이익을 오롯이 감내하면서 자기 신념을 증명해 보인다. 북한에서 송환을 거부한 파일럿 사수의 가족을 자기 자족처럼 돌보고, 부기장으로서의 임무에 충실하면서. 

     

    그래서일까? 두 주인공이 마지막으로 대면하는 순간은 <하이재킹>에서 볼 거라 예상한 장면과는 거리가 멀다. 자기처럼 피해자로서 고통받은 이를 마주한 후에야 가해자가 된 피해자는 마침내 자기 잘못을 깨닫는다. 누구의 말도 듣지 않던 용대는 자기처럼 무고한 피해자는 없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태인의 설득에 비로소 흔들린다. 여기에 다소 잔인한 과감한 연출이 더해지면 둘의 관계는 의외로 가슴 아리게 다가온다. 

     

     

    압축과 절제의 미학

    다른 길로 빠지지 않고 사건에만 집중하는 구성도 두 주인공의 이야기에 담긴 감흥을 극대화한다. <하이재킹>은 압축과 절제의 미학을 살려 이야기를 러닝타임 100분 안에 눌러 담고, 빠른 템포로 전개하면서 사건과 주인공 둘에게만 시선이 쏠리게 한다.  

     

    사실 <하이재킹>의 구성은 자칫 익숙한 신파로 빠지기 십상이었다. 갑작스레 납치된 승객 하나하나의 사연을 풀어놓으면 눈물을 짜내는 게 어렵지도 않았다. 신혼여행 가는 부부, 아픈 딸 병간호를 위해 서울로 올라가는 할머니 등. 하지만 영화는 승객에게 그다지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대신 필요한 타이밍마다 장면 하나하나를 알뜰하게 활용하면서 분위기를 고조한다. 

     

    감정을 강요하는 대신, 관객이 그들에게 공감할 수 있는 상황만 조성하고 뒤로 물러나는 셈이다. 사법고시 붙은 아들과 어머니가 대표적이다. 검사가 된 아들이 자랑스러운 어머니와 수화 쓰는 어머니를 창피해하는 아들. 납북을 대비해 신분증을 파괴해야 상황에서 아들은 차마 검사 신분증을 버리지 못한다. 그러자 어머니는 오히려 신분증을 찢으려 하고, 잘 찢어지지 않자 아예 삼켜 버린다. 

     

     

    부메랑이 된 상상력

    다만 이야기를 풍성하게 만든 상상력은 부메랑이 되기도 한다. 특히 과욕처럼 보이는 볼거리가 적지 않다. 물론 인상적인 대목도 있다. 용대가 폭탄을 터뜨려 조종실을 장악하는 장면은 마치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2> 속 뉴욕 타임스 스퀘어 장면을 연상시키는 슬로 모션 효과로 시선을 사로잡는다. 비록 같은 퀄리티는 아닐지언정 한계를 극복하려는 대담한 시도 자체는 놀랍다. 

     

    하지만 비행 시퀀스로 서스펜스를 쌓는 장면은 다소 무리수처럼 보이는 게 사실이다. 기체에 구멍이 나서 비행기가 급낙하 할 때나, 한국 공군이 민항기를 사격하고 이를 피하는 장면이나, 여객기가 배면비행을 보여주는 것까지. 영화적으로는 긴장감을 극대화하지만, 잠깐이라도 현실성을 따지는 순간에는 맥이 뚝 끊길 수 있는 상황이다. 마치 <비상선언>에서 항공자위대가 민항기에 위협사격을 가하는 순간처럼. 

     

    또 비행기 내부 전개에서는 한계가 명확하다. 승객들이 용대를 덮치고, 부기장이 휴전선을 넘은 척 용대를 속이고, 어떻게든 난기류를 이용해 보려는 식으로 여러 사건을 만들어내고자 애쓴다. 하지만 결국 큰 틀에서는 겁에 질린 승객과 난폭한 납치범이라는 구도를 벗어날 변곡점이나 제3의 인물을 만들지는 못한다. 그러다 보니 중반부는 같은 장면이 반복되어서 비교적 지루할 수 있다.  

     

     

    배우들의 퍼포먼스도 기대에는 미치지 못한다. 그나마 하정우와 성동일만이 이름값을 해냈다. 배우만의 문제는 아니다. 그보다는 극본의 한계가 드러난 지점에 가깝다. 여진구가 맡은 용대의 경우 태인과 대조되는 사연만 돋보일 뿐, 악역으로서의 카리스마나 매력은 크게 느껴지지 않는다. 채수빈이 연기한 옥순은 단순히 시나리오의 도구에 불과하다. 없어도 이야기 전개에 문제가 없을 정도다. 

     

    이에 더해 <하이재킹>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기술적인 아쉬움도 크다. 대사가 잘 안 들리는 한국 영화의 고질병을 피하지 못했다. 특히 비행기 외부 소음과 대사가 섞이거나 파일럿끼리 무전을 할 때는 OTT 자막 기능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국내 배급사가 아닌 컬럼비아 픽처스가 직접 배급하는 작품인데도 고쳐지지 않은 문제라 더욱 안타깝다.     

     

     

    Acceptable 무난함 

    실화에 상상을 더해 어찌어찌 목적지에는 착륙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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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느새 71세가 된 조반니 “난니” 모레티 감독의 최신작 <찬란한 내일로>는 그의 대단한 필모그래피를 고려하면 일견 수수해보인다. 난니 모레티는 본명과 직업이 같은 주인공을 직접 연기하며, 나이든 감독이 평생 잘 굴려왔다고 믿은 영화와 가족 양측에서 내쳐지고 비로소 얻은 깨달음과 후회를 코믹하게 펼쳐둔다.

    <아들의 방>과 <악어> 시절부터 모레티와 오랫동안 합을 맞춘 마르게리타 부이, 실비오 올랜도 등 반가운 배우들이 극중 조반니의 오래된 동료나 부인으로 분하더니, 크레딧 롤을 대신하는 듯한 마지막 행진 장면에서는 아예 지금껏 협업한 배우들을 카메오로 불러내 클로즈업하기도 한다. 알바 로르바케르(일층 이층 삼층), 자스민 트린카(아들의 방), 다리오 칸타렐리(미사는 끝났다/아들의 방/악어/우리에겐 교황이 있다 등등), 줄리아 라짜리니(나의 어머니), 안나 보나이토(악어)와 리나 사스트리(에체 봄보)까지. 송경원 평론가의 말마따나, 그야말로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대행진‘이다. 

     

    거장이 된 창작자가 자기 ‘사단’을 불러다놓고 (그동안 지겹도록 말해진) ‘영화 만드는 일의 기쁨과 슬픔’을 우회적으로 논하는 자전적 작품은 생각보다 드물지 않다. 특히 코로나 팬데믹을 지나오면서 거장들은 자꾸만 일생의 마지막 정리를 하는 듯한 작품을 만들어왔는데, 그런 영화들은 종종 긴 세월의 노고를 함께 해준 ‘이너 서클’에 대한 우애나 자기 자신의 좋았던 시절에 대한 애틋한 치하를 필연적으로 담지하고 있어 관객인 내게 애수와 함께 아주 미약한 피로감을 불러일으킬 때도 있었다.

     

    가장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는 게 반드시 사변적이라거나 습작적이라는 의미는 아니지만 ‘확률상’ 그런 루프에 빠지기 쉬운 것도 사실인데, 노장의 자전적 필모그래피란 그런 습작성을 가릴 만큼의 노련함까지 갖추고 있어 소위 ‘흐름’을 타지 못하면 영화 내내 홀로 축제에 합류하지 못한 찝찝한 기분으로 뒤에 남겨지기 일쑤였다. 서사성의 결여, 자기애적 회고에 대한 반발감 때문에 만듦새를 돌아볼 새가 없어지고 그 무엇보다도 ‘감독의 리듬과 나의 리듬이 잘 맞는가’가 가장 중요해지고 마는 아쉬움. 굳이 꼽자면 내겐 스필버그의 <파벨만스>나 빅토르 에리셰의 <클로즈 유어 아이즈>가 그런 작품이었다.

     

     

    그런데 앞서 말한 모든 조건에 부합하는 사적인 영화, 우회하지도 않고 그 어떤 서사적 덧붙임도 없이 본연의 ‘일 이야기‘로 직행하는 난니 모레티의 <찬란한 내일로>는 왜 아무런 거부감 없이 만점짜리 영화로 마음에 안착할 수 있었을까. 왜 이 화려하고 친밀한 출연진과 훌륭한 이탈리안 코미디로서의 연출과 노련한 ‘리듬감’을 보고도 이 영화가 편안하고 충만한, ‘자신과 너무 먼 나를 받아들이는’ 영화라고 이해할 수 있었을까. 가장 큰 이유는 이 영화가 궁극적으로 영화적 야심의 충족 대신 환대와 허용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거장들(보다도 그들의 맹목적 추종자들)이 숱하게 저지르는 실수와 달리 난니 모레티는 ‘영화를 마음대로 해석해주는’ 관객에 대한 불만을 전연 느끼지 않고 오히려 모두의 즐거움을 보장하는 따스한 경청의 태도를 취한다. 영화도 그렇거니와 영화 바깥의 태도 역시 그러하다. 한국 관객들과의 씨네토크에서 그는 특정 장면의 ‘의도’가 헤집어질 때 “그냥 그렇게 하고 싶어서” 연출했다고 말하고, 가장 좋아하는 장면을 물을 때 “영화는 크로스워드 퍼즐이 아니기 때문에 정답은 없고, 여러분도 몇 년 후 다시 보면 감상이 또 달라질 것”이라며 웃는다. 영화 속 조반니가 그의 영화를 맡게 된 낯선 한국 제작자들의 “사랑과 정치, 예술과 공산주의의 죽음”이라는 어마어마한 해석에 그저 “네, 맞아요”라고 수긍한 것처럼 그는 타인의 의견에 (그것이 폭력과 비윤리를 미화하지 않는 한) 절대적으로 열려있(게 된)다. 그렇기에 그의 영화는 저 먼 한국에서 와서 소주로 건배를 권하는 제작자를 생경하게 생각지 않은 조반니처럼 ‘나를 따돌리지 않는’ 영화다.

     

     

    극중 조반니가 처음부터 모든 종류의 충돌에 관대한 인물이었냐 하면 물론 아니다. 난니는 페르소나인 조반니를 상당히 짜증스럽고 고압적이기도 한 연출자로 그려내는데, 편집증에 가까운 그의 강박은 애꿎은 젊은 스탭들을 괴롭게 하고 ’우리(부부) 얘기만 빼고 다‘ 하는 그의 일방적 수다는 상대적으로 온화한 부인 파올라가 이혼을 결심케 만든다. 조반니는 혼자만의 의식에 집착하고 “단어 하나만 달라져도 의미가 완전히 달라지는” 것이 영화라면서 제작진과 배우들을 몰아세운다. “20테이크 정도만 더 찍자”는 조반니의 예사로운 말에 스탭들이 몰래 한숨을 쉬고, 스포트라이트나 즉흥 연기를 바라는 배우들은 “그 친구 클로즈업 안 해요”라든가 “카사베츠는 카사베츠고 이건 내 영화”라는 조반니의 단언에 허물어진다.

    이런 조반니가 5년만에 찍고 있는 영화의 정체는 1956년 헝가리 혁명을 배경으로, 소련의 헝가리 침공에 따른 이탈리아의 평범한 공산주의자들의 혼란을 담은 작품이다. 마을에 방문한 헝가리 서커스 단원들과의 심정적 연대, 정치적 노선을 확실히 해야 한다는 압박에 처한 지부 사람들은 고뇌하며 갈등한다. 조반니와 함께 전동 킥보드를 타던 프랑스 제작자 피에르는 고전적인 영화를 두고 이렇게 상찬한다:

     

    서커스는 현대 영화의 은유잖아요. 줄 하나에 매달릴 뿐 앞일을 전혀 모르니까요.

    감독님 영화는 체제 전복적이에요.

    조반니는 손사래 치면서도 내심 뿌듯한 표정을 짓지만, 그로부터 며칠 후 집 나간 부인의 행방을 찾다 외동딸에게 동음이의의 잔인한 선고를 듣기도 한다:

     

     

    아빠랑 있으면 늘 외줄 타는 기분이긴 해요.

     

    40년간 13편의 영화를 공동 제작한 동업자이자 부인 파올라가 새 영화를 제작하는 현장에서 유망한 신진 감독 주세페를 밤새도록 가르치는 조반니를 보고 있노라면 이 ’외줄 타는 기분‘을 곧장 추체험할 수 있다. 스콜세지에게 무턱대고 전화를 걸고 온갖 인맥을 동원해 그 영화의 폭력성이 왜 정당하지 않은지 연출적으로 어떻게 부족한지를 설파하는, 그 누구도 원하지 않았던 완고한 침입자.

     

    자기 영화 현장에서도 조반니는 마찬가지로 자기 ’원칙‘에 따라 소품, 의상, 촬영 감독과 캐스팅 디렉터들을 차례로 당황시킨다. 1950년대 물 상표부터 낡은 옷깃 표현까지 하나하나 간섭하는 그의 원칙이란 ’실제가 어떠했는지‘에 사활을 거는 척하면서도 결국 실제가 아닌 자신만의 고집에 복무하기에 허구적이다. “스탈린 포스터를 실제로 걸었더라도 내 영화에선 아냐”라든가, ”당시 실제 기사예요“라는 미술감독의 항변에 ”그건 상관없어요“라며 기사 캡션을 줄여 (자기 마음에 들게) 다시 제작해오라는 지시에서 이 원칙의 자의성과 이중성이 낱낱이 드러난다.

     

     

    하지만 “영화는 미학도 있지만 윤리도 중요”하다는 조반니-난니 모레티의 철학은, 넷플릭스-액션-(자칭)네오리얼리즘으로 요약되는 차세대 감독 주세페와 충돌하는 바로 그 장면에서 명료해진다. 키에슬로프스키를 거론하며 “따라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들지 않는” 폭력 외의 다른 묘사는 전부 폭력에 대한 미화고 옹호라는 조반니의 지론은 넷플릭스식 액션에 익숙해지고 폭력에 매료된 현대 사회 관객에게도 경종을 울린다. 물론 젊은 영화 연출가는 ‘최면에 걸렸다 깨어나서 우는 날’이 올 거라는 경고를 거부하고, 밤새워 강의하며 제작진 수십 명을 대기시킨 조반니는 파올라에 의해 현장에서 쫓겨난다.

     

    “사악함밖에 없는 영화잖아. 당신까지 그러면 안 되지. 안 그러더니 변했다”는 말로 파올라의 분노를 산 것만큼 심각한 문제는,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가는 노감독의 뒤로 그 매혹적인 폭력의 묘사가 배우들에 의해 간단히 재연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조반니는 그를 무시하고 흘러가는 - 점점 더 빠르게,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 세상의 속도로부터 완전히 유리되고 있다.

     

     

     

    몇십 년간의 영화/결혼 생활 동안 상대를 돌아보지 않는 그의 완고함은 주변에 생채기를 내어왔다. “새 영화를 들어가서 상담을 줄일” 정도의 책임감으로 임하고 있고, “촬영장을 못 떠나겠어요”라며 기실 조반니를 떠나지 못했던 이유까지 자신도 모르게 설명한 파올라의 영화에 대한 (조반니 못지않은) 열정을 조반니만 우습게 알고 있다. 제작자 피에르가 사기 혐의로 붙잡혀 가면서 투자받기 어려워졌고, 못내 경멸하던 넷플릭스 투자를 꿈꿔봤지만 ‘왓더퍽’하는 모먼트가 없단 이유로 수정 요청을 받으면서 촬영은 점점 더 난항이 되어간다. 독일과 프랑스에서 데려온 코끼리들은 싸움이 나고, 스페인 곰은 탈주해 숲으로 숨어들어가는 난장판이 프로덕션을 어지럽힌다. 오래 협업한 주연 배우 엔니오가 우물쭈물 의견을 밝히지 못하는 사이, 또다른 주연 배우 베라는 조반니가 싫어하는 뮬을 신고 “제게 연기란 재즈처럼 배우가 대본을 변주하는 일”이라거나 “누가 요즘 정치물 봐요? 이건 사랑 얘기예요. 모르시겠지만 그래요”라고 주장하며 대들지만 조반니에겐 그를 다른 ‘고분고분한’ 배우로 교체할 권위도 잃었고 사실 명분도 없다.

     

    조반니는 자신만의 룰로 세상을 주물러왔지만 더이상 세상은 그의 틀에 만만히 잡혀줄 정도로 ‘고분고분하지 않다’. 아빠보다도 나이가 많은 폴란드 대사 예르치와 사랑에 빠진 딸처럼, 영화 속 의도되지 않았던 로맨스 서사를 쟁취하더니 현실에서도 결국 커플이 된 배우 베라와 엔니오처럼, 조반니와 같이 과거에 매이지 않은 채 살아가는 사람들은 생생히 역동하고 반응하며 조반니는 외로이 그 생기를 억누르려 하지만 번번이 실패한다. 그러니 어쩔 것인가. 이제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타협하든가 잊혀지든가 둘 중 하나뿐이다.

     

     

     

    만일 조반니가 묵묵함이라고 일컬어지던 불통, 장인정신이라고 오해되던 고집을 계속 발휘한다면 그의 영화도 삶도 그다지 행복하지 않은 결말을 맞이했을 것이다. 엔니오와 조반니의 다이얼로그가 암시하듯이.

     

    “(주인공의 자살이) 영웅적이지 않나요?”

    “과한 면이 없지 않죠. … 사실 영화 마지막 장면부터 떠올라서 나머지 대본을 썼어요.”

    “언젠가는 하실 줄 알았어요. 주인공의 자살로 끝나는 작품을요. 감독님다워요.”

    ‘감독님답다’는 말에 멍해진 조반니는 “당신이 묻어있는 인물이 자살하는 결말인게 왠지 불길해”라던 파올라의 염려가 어떤 예지였는지 갑자기 깨닫는다. 혼자 사는 삶은 삶이라 부를 수 없다는 당연한 진리도 그를 찾아든다. 그래서 그는 세트장을 횡단이동해 옆방으로 건너가 (즉 그가 ‘원칙’에 충실하느라 앞만 보고 달렸을 때 미처 바라보지 못했던 ‘옆’으로 나아간다) 침묵 속에 잠긴다. 

     

    결국 한국 제작자들까지 모두 모인 폴란드 대사관의 다국적 식탁에서 “결말을 완전히 바꿔야겠어요”라고 조반니가 운을 떼는 순간 모두의 대사들이 생생히 터져나온다. 연출적 감동을 자아내는 이 극적인 소란 속 조반니는 독백한다. “삶에는 ‘만약에’가 없다. 하지만 나는 바로 그 ‘만약에’로 영화를 만들고 싶다.”

     

    그가 바란 ‘만약에’란 소련의 압제에서 스스로를 해방시키고 헝가리와 연대하며 폭력에 순응하는 대신 용기 내어 윤리를 선택한 1956년의 이탈리아이며(‘이탈리아 공산당은 이후 소비에트 연방과 결별하고 맑스, 엥겔스의 정신을 독자적으로 실현했다.’), 타인의 영향력이 자신을 침범하도록 놔두지 않고 자연스럽게 웃고 춤추고 노래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풍경이다(‘우리는 지금도 행복하다’).

     

     

     

     

    찬란한 내일로 난니 모레티 감독 GV

    with 씨네큐브 X 에무시네마 (에무필름) X 송경원 평론가 


    Q. 전쟁을 직접적으로 다룬 영화가 작년 칸에 둘 있었다. 감독님의 <찬란한 내일로>와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Fallen Leaves. 56년 헝가리 혁명이 배경이 된 이유는 무엇인가?

    A. 두 가지 이유인데 첫째로는 근현대 이탈리아에서 공산주의가 갖던 의미를 다루고 싶었다. 또 그때 이탈리아인들이 소련의 영향에서 해방될 기회를 놓친 때이기 때문이다.


    Q. 중간부터 극 중 극과 별개로 젊은 연인들이 등장한다. 그들의 싸움이나 대사들은 마치 단막극처럼 느껴진다. 이렇게 연출한 이유는?

    A. 원래 겹겹의 구조를 좋아하는 편이다.


    Q. 최근의 이탈리아 영화 제작 환경은 어떤 편인가? 극중 촬영과 실제 촬영 현장은 얼마나 다른가?

    A. 다른 감독의 촬영을 멈추는 취미는 없고(ㅎㅎ) 춤도 안 춘다ㅎㅎㅎㅎ 예전의 나는 실제로 즉흥 연기를 반대하는 사람이었지만, 이제는 많이 누그러졌다. 조반니의 나머지 면과 나는 상당히 비슷하다.

     

    Q. 감독님이 제일 애정하는 씬은 무엇인지? (송평은 이탈리아에 공산당이 있었냐고 배우가 맹하게 묻는 대본 리딩 장면부터 ‘아 내가 좋아할 영화다, 너무 재미있는 코미디겠구나’ 하고 확 끌렸다고)

    A. 글쎄… 영화는 크로스워드 퍼즐이 아니기 때문에 정답이나 해답이 없다. 여러분들도 2년 후 다시 보면 또 감상이 다를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이탈리아 노래가 나오는 모든 씬, 그리고 그 젊은 커플이 나오는 장면을 좋아한다. 예전부터 50년간 함께 하는 커플을 (다큐멘터리처럼) 50년간 찍는 작업으로서 다루려고 시도했었는데, 이번 작품에서 그 숙원을 풀게 되었다. 또 커플 중 여자 쪽의 대사는 나의 개인적인 노트에서 가져와서 대본에 없는 대사다. 내 일기, 노트의 글들을 대사로 넣기 위해 연출한 것이기도 하다. 즉흥적인 결정이기도 했기 때문에 여배우는 당연히 대사를 다 외우지 못했고, 내가 카메라 옆에서 직접 말해준 장면도 있다.


    Q. 극중 조반니의 촬영 현장을 구하는 한국인 제작자들이 나온다. 통역 격인 유선희 배우를 작년 칸에서 운좋게 만나뵀는데, 감독님에 대해 “20번 넘는 테이크를 찍는 완벽주의자”라고 하면서도 동시에 “수십 번 리허설한 대사를 현장에서 바꾸는 분”이라고 표현했다.

    A. 감독은 자기가 좋아하는 연기, 음악, 변칙 등 상세한 요소들을 모두 알고 있어야 한다. 71세가 된 대감독인 저라도 (현장에 따라 즉흥성을 발휘하는) 이 정도의 반항심은 있어야 한다는 거다. 동시에 그런 (일관된) 연출을 위해, 배우들이 좀 지름길로 가고 싶어할 때가 있으면 내가 단호하게 멈추기도 했다.


    Q. 아까 언급한 주세페의 영화에 끼어들던 장면. 거기서 “영화의 윤리”라는 게 언급되는데, 오늘날의 영화의 윤리란 무엇이라 생각하나.

    A. 반복할 수밖에 없는 말이다. 오늘날의 영화 제작진들은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 잘 모르고 있다. 폭력을 우대하고 미화하고 있는 것이다.

    Q. 이 영화가 그런 현상에 대한 해독제라든가 반작용이 될 것을 의도했는지?

    A. 그런 것을 특별히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관객을 만족시키려는 목적에 충실했기 때문에 나 역시 만족스럽다.

     

    Q. 프랑스와 한국 제작자, 폴란드 대사 등 각국의 많은 사람들이 등장한다. 이유는?

    A. 먼저 프랑스 출신의 제작자들과는 친분이 두텁다. 내게 프랑스는 거의 제2의 고향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가까운 곳이다. 폴란드 대사 예르치는 오로지 그 배우를 위한 역으로 만들어넣었다(배우분 본명도 예르치). 오래된 친구이자 동료였고, 그를 위한 역할이 하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한국 제작자들에 대해서라면, 이탈리아 사람이 재깍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멀리에서 온 사람들, 하나부터 열까지 다 다른 사람들이 영화를 살리고 영화를 마음대로/좋게 상상하고 해석해주는 부분이 재미있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국의 영화 산업이 얼마나 활발하고 독특한지는 잘 알고 있어 원래도 관심이 컸다.

    (송평: 그 ‘마음대로 해석해준다’는 부분과 관련해서, 이 영화가 그런 접근을 너그러이 허용해주는 영화라고 느껴져서 아주 따뜻하게 다가온다. 그런 지점이 가장 좋았다)


    Q. 마지막 장면의 행진이랄까 축제 같은 장면에서 처음에는 작게 사람들을 잡다가 점점 행렬 규모가 커지고 영화에 등장하지 않았던 배우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알바 로르와케르 등 감독님의 다른 작품에 나오는 배우들이었는데, 이런 연출의 이유는 무엇인지.

    A. 주조연 배우들과 1회차 촬영을 했는데, 갑자기 공산당 리더로 엔딩에 잠깐 나온 엑스트라 배우라든가, 작가들, 조감독들, 그리고 한국 제작진들까지 이 영화와 연관된 모든 인물들이 포함되면 좋을 것 같아서 2회차 촬영을 했다. 그런데 편집을 끝낼 때쯤 10~30년 전의 내 영화에 등장한 배우들까지도 다 나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해서 다시 3회차 촬영으로 마무리했다.

    (송평: 정말 대단원의 대행진이라 할 만하다…)

     


    Q. (플로어 질문) 차 속에서 노래를 틀고, 다같이 따라 부르는 씬이나, 조반니가 혼자 축구공을 위로 뻥뻥 차올리는 씬 등 전 영화들의 오마주로 보이는 부분들이 있었는데 의도된 것인지?

    A. 사실 그런 장면들은 하나도 의도되지 않았다. 45년 간의 커리어를 이어오다 보니 우연히 겹쳤을 것이다ㅎㅎ 촬영 들어가기 전 다같이 노래하는 장면은… “그냥” 그러고 싶었다! 아무 뜻도 없다. 

     

    Q. (플로어 질문) 페데리코 펠리니의 <8과 1/2>나, <롤라>, <라 돌체 비타> 등등… 서커스라는 모티브도 그렇고 이탈리아 영화들에 대한 존경의 오마주도 있었던 것 같은데. 난니 모레티 감독에게 페데리코 펠리니란?

     

    A. 씨네마 그 자체. 덧붙여 한 가지 꼭 말씀드리고 싶은 건, 내 초기작에서 언급된 영화들은 사실 비판적 거리감을 유지하면서 인용한 영화들이었는데 이제는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때 언급한 영화들을 비판받을 수 있는 자리에 놨다면 이제는 내가 좋아하는 영화들을 보여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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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플루언서는 유명세의 주인일 수 없다
  • 7★/10★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한 글입니다.     

      ‘무색무취’의 여성이 우연히 SNS에서 관심을 끈 후 여기서 느낀 쾌락을 극단적으로 추구하는 과정을 그린 〈해시태그 시그네〉는 무척 인상적인 영화다. 이 영화는 SNS 관심경제 시대에 ‘관종’이 어떻게 탄생하는지를 짚는다. SNS 팔로워, 조회수, ‘좋아요’ 등의 숫자가 개인의 매력과 동일하게 여겨지는 사회에서 이들 숫자는 자연히 자존감으로 이어진다. 자존감의 사전 정의가 ‘스스로 품위를 지키고 자기를 존중하는 마음’이라는 점을 상기하면 기이한 일이지만, 어쨌든 우리는 남들의 인정에서 스스로를 존중하는 마음을 길어올 수밖에 없는 사회를 살고 있다. 그러나 매력 자본을 갖지 못한 사람은 이 경쟁에서 뒤처지기 쉽다. 관종은 바로 여기서 등장한다. 그의 자극적인 행위가 매력 자본의 공백을 메우는 것이다.   

      〈해시태그 시그네〉에서 관종 탄생의 일그러진 메커니즘을 보여준 크리스토퍼 보글리 감독이 〈드림 시나리오〉로 돌아왔다. 영화는 이번에도 우리 시대에 ‘유명세’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시니컬하게 질문한다. 폴은 따분한 남자다. 그뿐 아니라 소심하고 평범한 남자다. 늘 우유부단하고 의기소침한 목소리와 말투다. 눈을 부릅뜨고 찾아봐도 매력을 발견하기가 영 쉽지 않다. 그런 그가 하루아침에 화제의 중심에 선다. 동시다발적으로, 불특정 다수의 꿈속에 폴이 나타났다는 증언이 잇따른 것이다. 인기 없는 진화생물학 교수인 그의 강의실에 학생들이 가득 찬다. 인터뷰 요청이 쇄도한다. 늘 자신에게 시큰둥하던 두 딸도 친구들에게 아빠 이야기를 하고 다니고 아내도 남편의 유명세를 계기로 직장에서 원하던 프로젝트에 들어간다. 늘 끼고 싶어 했던 사교 모임에도 초청받는다. 유명 음료 회사의 광고 제안, 버락 오바마 딸과의 만남 등이 추진된다.     

      그리고 이 모든 게 또다시 하루아침에 뒤바뀐다. 폴이 사람들의 꿈속에 처음 등장했을 때 그는 방관자였다. 딸이 하늘로 붕 떠올라도, 누군가가 괴물에게 잡아먹혀도, 교통사고로 길가에 쓰러진 사람을 봤을 때도 폴은 태연자약한 표정으로 멀뚱히 그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즉, 첫 번째 꿈에서 폴은 선한 남자는 아니었을지언정 무해한 남자였다. 사람들이 기꺼이, 적당히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는 그런 인물 말이다.   

      폴이 모두의 꿈에 두 번째 등장했을 때, 그는 더 이상 무해한 남자가 아니었다. 해로운 남자였다. 그것도 압도적으로. 제자의 꿈에 나타나 강간하려 들고, 또 다른 학생의 꿈에서는 둔기로 그를 내리친다. 첫 번째 꿈에서 그랬듯 이번에도 증언이 쏟아진다. 다만 그 내용은 천양지차다. 사람들은 꿈속 트라우마로 폴의 얼굴을 쳐다보는 것조차 힘들어한다. 학교는 폴의 등장으로 ‘피해를 당한’ 학생들을 위한 심리상담을 제공한다. 두 딸과 아내는 학교와 직장에서 곤란을 겪는다. 폴이 기대하던 유명인과의 만남은 취소되고 취소 문화를 조롱‧비난하는 극우 방송인의 섭외만 줄 잇는다.     

      유명세의 본질이 이렇다. 긍정적일 때든, 부정적일 때든 폴은 단 한 번도 유명세의 주인인 적이 없었다. 그는 내내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유명세의 수동적 객체였다. 그의 유명세에 자신의 의지가 개입될 여지는 없었다. 첫 번째 꿈 이후, 폴은 이 기회에 전공 관련 책을 집필해 동료에 대한 열등감을 떨쳐내려 한다. 하지만 매니지먼트 회사는 시큰둥하다. 사람들이 그에게 원하는 것은 진화생물학 책이 아니기 때문이다. 폴은 그저 이해할 수 없는 신기하고 재밌는 일로 소비되는 일에 기꺼이 ‘동의’할 때만 유명세를 유지할 수 있다. 그가 ‘흉악범’이 된 후에도 마찬가지다. 영화의 마지막, 폴은 원하는 대로 책을 내긴 하지만 그의 책은 진지한 학문적 연구가 아닌 기괴한 사연의 남자가 쓴 책으로만 여겨진다. 폴도 마지못해 이를 수용한다. 이제는 유명세가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하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는 대중들이 그를 기억하고 소비하는 동안 그들의 요구에 맞춰 자기 욕망을 숨기고 대중이 원하는 것을 제공해야 한다는 사실을 안다. 아주 가끔, 그 사이로 자기 욕망을 약간이나마 드러내고 만족하는 것이 최선임이라는 점 또한.     

      〈해시태그 시그네〉가 유명세를 갈구하는 우리의 욕망을 대변한다면, 〈드림 시나리오〉는 시그네가 삶이 파괴되는 일도 불사하고 갈구한 유명세의 본질이 텅 비어 있다는 점을 들춘다. 그리고 바로 그 텅 비어 있음으로 인해 유명세는 다시금 욕망의 대상이 된다. 내가 그 빈 곳을 채울 수 있다는 착각 혹은 잠시나마 그 공간에 안착해 유명세의 달콤함을 맛보겠다는 전략적 접근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어찌 됐든 우리가 유명세의 주인일 수 없다는 점은 마찬가지다. 그저 잠식되거나 편승할 수 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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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극T AI와 극F 로맨스의 도킹
  • 영화 '만추' 이후 13년 만에 스크린으로 돌아온 김태용 감독의 선택은 AI(인공지능)이다. 전작들에게서 섬세하게 그려냈던 감성과 정반대 느낌이 강한 AI는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신작 '원더랜드'가 어떤 느낌인지 대중에게 공개되기 전까지 호기심을 유발했다.  

     

    스펙터클을 연상케 하는 AI 소재는 '원더랜드'를 만나면서 따스한 느낌을 준다. 김태용 감독의 영화답게 진솔함과 정교함, 그리고 감성적이면서 지적인 느낌이다. 전작인 '가족의 탄생', '만추'로 담아낸 감수성은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죽은 사람 혹은 죽음에 준하는 사람을 인공지능으로 복원하는 영상통화 서비스 '원더랜드'를 통해 사랑하는 사람과 다시 만나는 이야기가 이 영화의 큰 줄거리다. 이에 따라 어린 딸 지아에게 자신의 죽음을 숨긴 바이리(탕웨이), 깨어나지 못하는 남자친구 태주(박보검)를 복원해 행복한 일상을 보내는 정인(수지), '원더랜드' 서비스 플래너 해리(정유미)와 현수(최우식) 세 갈래로 갈라진다.

     

    '원더랜드'는 각기 다른 에피소드를 병렬한 뒤 '가족'을 통해 인간과 관계를 탐구했던 '가족의 탄생'처럼 3개의 에피소드를 전하면서 AI에 스며든 인간과 관계를 들여다본다. 그러면서 죽음이 무엇이고, 죽음은 인간관계를 종결시키는 것인지, 가상으로 유지되는 관계도 진짜인지, 관계는 어떻게 정의해야 하는지 등 다양한 질문을 던진다.

     

     

    다양한 주제를 담아내고 있어 철학적인 내용일까 생각되지만 '원더랜드'의 기본 바탕은 로맨스, 바로 사랑이다.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냈지만 계속 사랑하고 싶은 마음에 대해 말한다. 엄마와 딸, 연인 등 인위적으로 이어가는 사랑을 표현하다가 발생하는 혼란, 혼란 속에서 피어난 사랑의 개념, 이를 통해 발견한 새로운 사랑의 방식, 마음 한편에는 여전히 남아있는 공허함, 그렇게 왜곡되는 사랑이다. 단순하게 에피소드를 늘어놓는 것이 아닌, 각 이야기 속 캐릭터가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 된다. 상당히 디테일하게 설정해 놓은 것이다.

     

    '원더랜드'는 AI 소재로 만들었던 명작들의 영향을 받았는지 군데군데 비슷한 느낌을 준다. 결국 이 영화는 멜로로 다가오면서 생각할 거리를 생성한다. MBTI로 표현하자면, 극T와 극F가 적절하게 섞였다. 치밀하게 설계한 김태용 감독의 연출력이 돋보인다.

     

    하지만 '원더랜드'는 관람하는 관객의 성향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것이다. 감수성이 풍부하다면 영화가 전하는 사랑의 온기에 쉽게 동기화되겠지만,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이들에겐 '원더랜드'를 보고 난 뒤, 실망할 수도 있다.

     

    또 다른 아쉬운 점은 '원더랜드'의 공개 시점이다. 원래 개봉 시점이었던 2021년이나 2022년에 공개됐다면 매우 신선하게 다가왔겠지만, 코로나 팬데믹 이후 AI 기술이 급성장하는 2024년에 공개하기엔 타이밍이 늦은 감이 있다. 그리고 깊이감보다는 넓은 폭을 선택해서인지 러닝타임 113분 안에 다 담아내다 보니 관객들을 강하게 끌어당기는 동력이 부족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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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나 아렌트가 자랑스럽게 생각할 '존 오브 인터레스트'
  •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강력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독일인 부부 루돌프 회스(크리스티안 프리에델)와 헤트비히 헤스(산드라 휠러)다. 세계 2차 대전 중이다. 일에 충실하는 루돌프 회스. 아예 집 옆에 일터가 있을 정도로 일에 진심이다. 조용한 일상. 아내와 귀여운 아이들과 함께 사니 두려울 것이 없다. 다만 본능적으로 거부하는 것이 있을 뿐이다. 사는 집 옆에 있는 것이 아우슈비츠 수용소고, 루돌프는 히틀러의 명령에 따라 유대인들을 학살하는 임무를 받았다는 것이다.

     

     

     

    우선 이 영화를 보고 가장 먼저 생각난 건 가까스로 다 읽은 한나 아렌트의 책 두 권이다. 영화나 드라마를 보다 보면 한나 아렌트가 제시한 개념 ‘악의 평범성’에 대해 손쉽게 접할 수 있다. ‘악의 평범성’은 평범한 사람에게도 누구나 악한 본성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기도 하지만 더 본질적인 함의를 품고 있다. 바로 누구나 악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떻게? 가 중요한데, 생각하거나 관심 갖지 않고 그냥 흘러가는 대로 살아가다 보면 악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 그녀가 제시한 ‘악의 평범성’이다. 한나 아렌트는 이 성격을 설명하기 위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책에서 한 남자를 조명한다. 바로 아돌프 아이히만이다. 아이히만은 재판 중에서 당당하게 “나는 조직이 시키는 일을 했을 뿐”이라고 답했다고 한다. 이 남자의 궤변에 격분한다. 하지만 서서히 관찰하면 관찰할수록 아이히만이 우리 평범한 사람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는 걸 깨닫는다. 발상의 전환이 일어난 한나 아렌트. 한나 아렌트는 이 아이히만의 모습을 포착하며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타인의 입장에 대한 무사유(Thougtlessness) 하나만으로도 평범한 직장인이 역사에 남는 전쟁범죄자가 된 것이다. 

     

    이 ‘악의 평범성’을 제시한 것은 후대에 엄청난 파급력을 낳는다. 당연하다. 원래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하잖아? 이긴 자들은 승자의 입장에서 상대방, 그러니까 악의 근원을 “이 집단이 이래서 문제야!”로 퉁칠 수 있다. 아니면 인간이란 원래 그런 존재라고 규정하면 쉽다. 잔다르크가 마녀로 지목당해 화형 당하는 과정을 생각해 보면 종교라는 잣대가 명확하다. 또 서양의 기독교나 동양의 맹자가 인간에겐 원죄/악한 본성이 있다고 해석한 것도 악이라는 개념이 특정한 상황 하에 만들어진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그리고 그게 되게 대단한 거라고 생각할 수 있다. 우리 인류 역사상 히틀러 같은 존재는 흔하지 않다. 이런 측면을 고려해 보면 악은 특정한 무언가에 의해 결정되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한나 아렌트는 이를 전적으로 거부한다. 특정한 무언가가 있기에 대단하다던가 굉장히 특이한 게 아니다. 그냥 전적으로 평범한 사람일 뿐, 생각 없이 산 것의 총합체라고 정의한 것이다. 물론 한나 아렌트 이전의 역사가들이 악에 대해 이렇게 규명한 것은 나름대로 합리적인 것처럼 보인다. 이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서도 그 악의 형태가 구현되고 있다. 가령 영화에서 온갖 비명소리가 들리는데도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하는 회스 부부의 모습은 분명한 악이다. 아니면 유대인의 코트를 빼앗아 입는 헤트비히의 모습 역시 분명한 악이다. 하지만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한나 아렌트가 제시한 ‘무사유’의 과정을 두 측면에서 보여준다. 어떻게?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의 아이히만이 보여주듯, 조직에 흘러가는 남자(루돌프)와 타인에게 무관심한 여자(헤르비히)를 통해서. 또  <인간의 조건>에서 한나 아렌트가 역설하듯 인간과 인간사이의 관계에서 중요한 것을 강조한 방식을 그대로 계승하면서다. 

     

     

    가장 먼저 탐구해야 할 인물은 루돌프 회스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루돌프 회스가 조직 내에 꽉 박혀있는 인물이라는 것을 영화 연출을 통해 보여준다. 이 연출은 꼭 필요했다. 왜? 루돌프 회스가 실존인물이기 때문에. 한나 아렌트가 제시한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역사적인 상황과 결부시켜 강조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래야 이 영화가 비판하고자 하는 악의 속성이 더 설득력을 얻는다. 영화는 이를 위해 건조하게 그의 직장인으로서의 일상을 보여준다. 가령 외부 협력업체가 와서 회스에게 뭔가를 설명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이 장면 속 두 남자는 그냥 대표자들끼리의 대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 장면을 기점으로 영화는 그가 직장인으로 얼마나 자기 하는 일에 투신하는지를 묘사한다. 좀 필요 없어 보이는 전화 장면이 여러 번 들어간 이유는 여기에 있다. 여기에 특별한 설정이 영화에서 빛을 발한다. 아우슈비츠 옆에 사무실이 있고 거기서 산다는 특징은 가정적이면서도 열심히 일하는 루돌프 회스의 모습을 보여주기 쉽다. 열심히 일하고 난 다음 아이들에게 동화를 읽어주는 아버지 회스의 모습은 지극히 평범한 악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만든다.

     

    하지만 이 루돌프라는 인물에게 가장 첫 번째로 수행해야 하는 과제는 직장인으로서의 업무나 가정의 안녕이 아니다. 나치라는 조직이다. 나치의 일원으로서 소속됐다는 한 가지 사실이 이 사람 인생에서 제일 중요하다. 왜? 초반부터 영화가 이 인물의 내면을 이미지로 강조하고 있다. 루돌프 회스가 누군가에게 축하받는다. 그런데 그 축하를 해주는 사람들이 나치 조직원들이다. 얼핏 보면 회색 옷 입은 사람이 떼거지로 몰려들어 누가 누구인지 구분이 안 된다(심지어 배경도 회색 저택이다). 영화가 고의적으로 카메라를 멀리 떨어트려서 누가 루돌프 회스인지 알 수 없게끔 묘사하는 것이다. 축하받는 사람과 하는 대상이 구분되지 않는다는 것. 이것은 명백하게 수신자와 발신자가 정해진 행동을 흐려놓겠다는 감독의 의도를 읽을 수 있는 부분이다. 개인보다 조직을 강조한 것이다.

     

     또 이 인물이 직장인으로서의 활동반경과 쉴 수 있는 집의 바운더리가 그렇게 선명하지 않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옆에 산다는 것도 이상한데 거기서 일을 한다는 건 더 기괴하다. 자연인으로서의 모습이 조직에 잡아먹힌 루돌프의 모습을 보여주는 설정이 되는 것이다. 영화 후반부에 루돌프가 전출을 가니 마니 하는 설정이 들어간 것도 흥미롭다. 사실 이 에피소드 자체가 굳이 영화에서 중요하지 않다. 어쨌든 안 간 거라서 굳이 알 필요도 없고, 갈등이 격정적이지도 않다. 영화의 기-승-전-결이 이 전출 여부를 두고 쌓아 올린, 소위 ‘빌드업’ 한 것도 아니라 맥 빠지게 느껴진다. 하지만 이 일이 이 가족에게 끼친 영향이 중요하다. 조직이 루돌프 회스의 가족공동체를 해체시킬 정도로 주인공(회스)에게 절대적이었다는 의미다. 나치와 히틀러의 말이라면 뭐든 다 줄 수 있는 사람이다. 엔딩신에서 헛구역질이 날 정도로 내면의 무언가를 갖고 있지만 결국 어둠 속으로 걸어가는 그의 모습 역시 인물의 이런 부분을 설명하고 있다. 그의 무의식이 영화의 플롯에 그대로 나타난 것이다. 이렇게 루돌프의 내면을 보여주는 연출은 후반부에서 다시 반복된다. 초반 루돌프가 축하받는 장면과 후반부 나치 조직원들끼리 회의하는 장면은 수미상관처럼 반복된 것 같다. 왜? 회의를 주체하는 장면을 가장 첫 신에선 보여주지 않는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찍는 부감 숏으로 화자를 숨긴 것이다. 이다음 장면을 보면 영화 안의 회의 주제에는 회스가 제시한 근거가 중요하게 설정되어 있다. 다음 장면은 회스가 자기 의견을 역설하는 장면을 넣으면서 회의의 끝을 분명하게 보여주지도 않는다. 루돌프 회스가 회의에서 중요하다는 것만 묘사하고 그 안의 내용을 보여주지 않는 것이다. 루돌프 회스가 이 당시 나치라는 조직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컸기 때문에도 근거를 찾을 수 있으나, 영화 초반부를 생각해 보면 수미상관처럼 조직 안의 루돌프 회스를 강조하기 위함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단지 사운드의 힘만 믿은 게 아닌 비주얼의 힘이 조직에 휩쓸리는 루돌프의 모습을 보여줬다. 악의 평범성을 드러내는 연출인 것이다.

     

     

    두 번째로 이야기할 수 있는 인물은 루돌프의 아내 헤트비히 회스다. 이 인물이 이 영화에 차지하는 물리적 비중은 굉장히 많다. 하지만 그 비중치고 영화 안에서 유효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인물은 아니다. 오히려 이 인물은 플롯 전면이 아닌 영화가 만들어지기 이전의 이야기를 담당한 캐릭터처럼 보인다. 근거는 간단하다. “내가 이 집을 가지려고 17년 동안 고민해 왔다!”라는 대사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시에 강조하고 싶은 것. 이 인물의 동선이다. 이 인물은 집 밖에 멀리 나가지 않는다. 루돌프가 타 지역으로 나가거나 헤트비히  어머니가 그녀의 집으로 도착한 것과는 대비된다. 전업 가정주부인 것으로 보이는 헤트비히. 남편 루돌프에게 ‘아우슈비츠의 여왕’이라는 말을 듣는다. 후반부 루돌프와의 갈등에서도 이 사람은 집 밖에 나가기 싫다. 남편을 속여서라도, 유대인들 고용해서라도 만든 집이니 만큼 애착이 강한 것이다. 이렇게 집에 박혀있는 헤트비히. ‘아우슈비츠의 여왕’이면 자기 집 안에 일어나는 것들에 대해 능통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이 영화가 이 인물을 어떻게 그리고 있는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인물은 집안사정에 그렇게 밝은 인물이 아니다. 오히려 관심이 짧은 것처럼 느껴진다. 첫 번째 근거. 이 사람이 집 안에 일어나는 상황을 통제하지 못한다는 증거는 대놓고 드러난다. 이 영화의 사운드 지분 중 크다고 볼 수 있는 아기의 울음소리도 그 예시 중 하나다. 그냥 ‘왜 이렇게 울까?’ 한 마디면 엄마로서의 역할이 끝나나? 후반부에 남자 형제들끼리 비닐하우스 같은 곳에서 다투다 형이 동생을 장난으로 가두는 상황이 벌어진다. 여기서 동생이 울고불고 소리 지르지만 어머니 헤트비히는 알아채지 못한다. 중후반부 폴란드 소녀가 사과를 수용소 근처에 묻는 장면이 있다. 그때도 이 헤트비히는 인기척을 느끼지만 구체적으로 알려고 하지 않는다. 강가에 재가 떠다니는 것도 헤트비히가 아이들을 씻는 장면은 있지만 원인을 예방한 다 던가 하는 진단이 없다. 어머니로서의 역할에 취해있기만 하지 실질적으로 ‘일 잘한다’라는 말을 듣기엔 어려운 것이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으로 영화 후반부에 묘사되는 루돌프 회스의 불륜은 이 인물(헤트비히)의 무능력함을 암시하는 대표적인 사건이다. 어디 다른 곳에서 바람을 피우는 것이 아니다. 루돌프의 집 근처에 있는 사무실에서 불륜이 이어진다. 루돌프의 아이가 “아빠 땀 냄새나!”라고 말할 정도로 이 남자의 불륜은 이 가정과 분리된 것이 아니다. 철저하게 남편이 속였기 때문에 불륜을 저지른 것 아니냐?라고 생각할 수 있다. 물론 루돌프 회스는 실제로도 가정적이지 않은 인간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헤트비히 의 대사 “오래전에 (전출이) 결정 난 것으로 보이는데 왜 말하지 않았냐”라는 말은 과연 그녀가 남편에게 어떤 존재였을까? 생각하게 만든다. 이 집안이 화기애애하다는 시각적인 만족감에 도취되어 가정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자각하지 못한다는 건 그녀의 분명한 패착이다. 마치 나치 독일과 히틀러가 집권하고 난 다음의 모습이 1차 대전 전후의 독일을 재건하고 있다고 믿었을 독일인들처럼 말이다. 글쓴이가 헤트비히가 2차 대전 당시의 독일인들을 비유하고 있다는 건 여기에서 온다. 나의 행동이 독일의 재건을 위해서라는 자기기만, 가정에 착실한 어머니라는 자기기만이 나치당의 지지자들과 헤트비히에 중요하게 작동하는 것이다. 이 비유에 의미를 부여하니 영화 안의 두 대사가 더 와닿는다. 유대인 학살이 기본적으로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은 채, “너희들(유대인)은 나 덕에 편하게 사는 거야”라며 남편이 널 재로 만들어버릴 수 있다고 폭언을 하는 것. 그녀가 가진 모순을 이 영화가 폭넓게 묘사하는 것이다. 또 후반부에 루돌프가 헤르비히에게 “우리의 성과”라는 식으로 “우리”를 강조하는 것이 흥미롭다. 당연하다. 자국민들을 속인 나치의 군인들도 당연히 문제가 있지만, 심정적 동조자로서 학살에 ‘무관심’과 ‘자기기만’으로 참여한 당시 독일인들도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그냥 단지 일상만 보여주는 줄 알았는데 그 이면에 담긴 의미가 무시무시한 좋은 각본의 힘이다.

     

     

    두 캐릭터 말고 이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 중요한 것은 카메라와 사운드다. 우선 카메라. 이 영화가 카메라로 일상을 담는 방식이 특별하다. 그냥 일상적인 걸 담으면 모르겠는데 어디에서 훔쳐보는 것처럼 화면을 담았다. 실제로 검색해 보면 어렵지 않게 이 영화의 촬영 기법을 찾을 수 있다. 세트장을 만들고 카메라를 많이 설치한다. 대신 카메라가 어디에 있는지 말해주지 않는다. 이건 중요하다. 억지로 드라마를 배격했기 때문이다. 카메라가 대놓고 있다. 그럼 그건 대놓고 영화다. 배우들이 서로 얼굴 보면서 연기한다. 감정의 이입을 유발하고 곡진한 무언가를 탐구한다는 것. 이건 한나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에 대치되는 부분이다. 관심을 떼는 것이다. 그리고 이야기의 응집성을 위해서라도 감정이입을 유발하면 하고 싶은 걸 보여주기 어렵다. ‘얘 나쁘지?’가 되는 순간, 인물의 표정이 보이는 순간 비명의 의미가 옅어진다. 영화가 그은 선을 스스로 넘는 것이다. 촬영 구도만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를 명확하게 만드는 연출이었다.

     

    하지만 이 카메라를 활용한 연출 중에 정말 중요한 것은 뭐니 뭐니 해도 시각적인 것으로 사방이 막힌 이미지를 강조한 것이다. 모든 샷에서 벽이 강조되는 건 아니다. 그런데 벽이 필요하지 않은 장면에서 굳이 벽을 보여준다는 게 핵심이다. 중후반부에 어떤 남자가 벽 너머의 풀숲에 어떤 것을 뿌리는 장면이 있다. 일반적인 카메라워킹이라면 벽을 등지고 찍는 게 맞다. 그런데 굳이 이 장면에서 벽과 남자, 풀숲이 같이 등장한다. 벽을 보여주고 싶었던 감독의 의도가 읽힌다. 더 나아가 청각적인 요소는 벽과 충돌하며 영화에 균열을 낸다. 남자가 숲에 무언가를 뿌리는 장면에서 들리는 소리. 어떤 남자가 비명인지 절규인지 질문인지 모를 소리를 지른다. 곧바로 총성이 들린다. 카메라는 여기서 총에 맞는 사람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벽만 보여준다. 마치 소리가 벽에 부딪힌 것처럼. 그 대신 관객들은 상상력이라는 게 있어서 벽과 소리만 보여줘도 이 상황이 어떤 일인지 대충 예상할 수 있다. 굳이 이렇게까지 사운드를 강조하는 이유? 아니 그 이전에 사운드를 어떻게 강조했을까? 벽의 이미지를 강하게 보여줘서 이 영화 안에 쳐져있는 벽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사실 이 영화를 본 사람에게 벽의 의미는 간단하다. 무관심이라는 벽이다. 계속해서 안에 있는 야채니 꽃이니 라일락이니 수영장이니 하는 것들을 보여주지만 무관심이라는 벽이 인물의 상황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벽의 의미는 앞에서 언급한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과 닿고 있다. 악의 평범성을 이 영화가 사운드와 카메라의 존재로 보여준 것이다. 이 벽의 존재 덕에 카메라는 무엇을 찍을지에 대한 고민도 끝냈다. 분명한 악에 대해서는 카메라로 찍고 희생자들은 사운드를 통해 표현한다. 이 영화의 인물들은 악에 익숙한 악인이 되는 셈이다. 이 맥락에서 열 카메라로 표현한 소녀를 설명할 수 있다. 악이 아닌 무언가의 존재, 그러니까 유대인에게 사과를 주는 따뜻한 마음이 이 영화의 카메라에 담기지 못한 선의가 된다. 사운드만 부각되는 것이 아닌 촬영에 의한 연출이 영화의 주제를 강조했다. 

     

     

    이 영화의 사운드는 영화의 핵심을 담는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단란한 가족들의 일상 속 비명이 틈입한다. 이 비명이 가지는 임팩트는 영화를 본 모든 사람이 다 같은 의견을 말할 것 같다. 비명도 비명 나름이다. 어떻게 기괴한 소리만 다 골라서 삽입했는지 이런 요소들도 다 감독의 감각이 크게 주요한 것으로 보인다. 전작 <언더 더 스킨>에서 외계인(스칼렛 요한슨)이 지구인들과의 교감을 표현하는 방식이 이 영화에서 사운드로 치환된 셈이다. 이 선택은 아주 좋았다. 학살의 진상을 원초적인 방식으로 다가가게 한다. 원초적인 기억으로 남았다? 우리 일상 속에서 비슷한 것만 보면 생각난다는 의미다. 이 의미는 중요하다. <헤어질 결심>에서 감정적인 임팩트로 관객에게 큰 효과를 낸 것과는 다르게 신기한 방식으로 관객에게 영향을 준다는 점에서 청각을 아주 잘 활용했다. 이 영화 예술의 근본에는 무성영화라는 게 있다. 이 말은 즉슨 영화라는 예술 자체가 시각적인 걸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 인지심리학에서 인류는 시각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연구도 있다. 이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영화라는 예술이 가진 두 특징을 과감하게 무시하며 청각적인 요소를 강조한다. 

     

    하지만 영화가 청각적인 것을 활용하는 방식의 화룡점정은 오프닝과 엔딩에 있다. 이 영화의 청각적인 요소에는 뭐가 담겨 있을까? 비명이다. 유대인들의 절규가 담겨있다. 오프닝을 본다. 오프닝은 검은색 화면인 채로 음악을 크게 틀어놓는다. 첫 장면부터 청각적인 것이 중요하다고 힘을 꽉 주는 것이다. 이 기점으로 영화의 청각적인 것에 대해 연이어 생각해 보면 이후에 비명소리가 들린다. 대신 시각적인 부분이 청각적인 장면과 먼저 시작하지 않는다. 그럼 비명소리가 이 이야기의 이전에 깔려있다는 의미처럼 들리기도 했다. 그리고 영화의 엔딩으로 날아간다. 루돌프가 헛구역질을 한다. 현대의 박물관 노동자가 건물을 닦는다. 닦는 소리가 부스럭거린다. 그리고 다시 영화의 시점으로 돌아와 루돌프 회스가 어둠으로 걸어간다. 시점이 세계 2차 대전 한가운데로 돌아간 것이다. 그다음이 엔딩이다. 이 영화의 엔딩은 오프닝처럼 청각적인 요소만 부각한다. 영화 후반과 초반이 비명소리로 이루어져 있고 그 중간이 직선으로 흘러가는 일상이다. 이 영화는 일종의 타임라인인 것이다. 영화의 과거와 미래, 오프닝과 엔딩이 청각적인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 영화 안에서 비명소리가 청각적인 요소로 강조된다는 것. 그렇다면 영화의 과거와 미래를 이 감독이 어떻게 해석했는지에 대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홀로코스트는 곧 비명과도 같았다는 의미처럼 들렸다. 악인들이 시선을 돌리지 않아 만든 비극이 홀로코스트라고 말한 셈이다.

     

     

    괴물 같은 영화다. 음향, 촬영, 각본, 연출 모든 부분에서 한 부분의 극점에 다다른 능력을 보여줬다. 심지어 산드라 휠러를 위시로 한 배우들의 연기도 굉장히 뛰어나기까지 하니 무결점의 영화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굳이 꼽자면 극의 재미를 부각한 영화가 아니라서 누군가는 지루하다고 느낄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런 위험부담(?)에도 글쓴이가 장점으로 확신하는 것이 있다. 정말 필요한 인간의 조건이 무엇인지 묻는 것이라는 점이다. 사실 이 영화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만큼 징글징글하고 강박적으로 관객에게 질문한다. 사실 이 사람들이 왜 인간 근처도 가지 못하는지는 영화가 쉽게 설명하고 있다. 이 설명하는 부분은 곧 한나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과도 이어진다. 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이라는 책에서 인간의 관계성에 대해 언급했다. 정치적인 행위부터 시작해 불멸하게 남는 여러 기록까지, 또 공/사적인 공간의 필요성까지 이 세상을 이루는 모든 것들이 다 함께 살아가는 것에서 온다고 역설했다. 이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이 <인간의 조건>에 대한 깊은 통찰을 아주 속 깊게 우려낸 사골국처럼 느껴진다. 이 영화에서 대화하는 사소한 것들, 공간들, 하녀의 움직임부터 루돌프 회스의 동선과 공간까지 이 모든 것이 <인간의 조건>의 목차처럼 느껴진다. 충격적인 영화다. <액트 오브 킬링>과 함께 과거의 비극이 단지 과거에만 국한될 것이 아닌, 날카롭고 깊은 인사이트를 보여주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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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의존하는 삶의 공포를 뒤로한 마지막 인사!
  • “신세(身世) 지기 싫다!” 나이 들면 자식들이나 손아랫사람에게 하는 말이다. 형식적으로 내뱉는 경우도 있지만, 이 말은 아직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이니 걱정 안 해도 된다는 의미도 내포되어 있다. 시니어들이 가진 공포 중 하나는 바로 누군가에게 의존하는 삶일 것이다. 더 이상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그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것에 대한 열패감과 두려움은 아래 세대가 생각하는 것 이상이다. 어떻게 단정 짓냐고? <소풍>을 보면 안다. 극 중 주인공들은 이 두려움과 싸우며, 마지막 결단을 내리기 때문. 영화는 신세 지기 싫어하는 노인들의 마지막 몸부림과 그 선택을 따라간다.

     

     

     

     


    요즘 은심(나문희)은 걱정이 많다. 파킨슨병이 날로 심해지고, 현실인지 꿈인지 돌아가신 엄마가 자꾸 눈앞에 보인다. 이런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하나밖에 없는 아들 해웅(류승수)은 돈 문제로 속을 썩인다. 이때 고향 절친이자 사돈인 금순(김영옥)이 집에 찾아오고, 이들은 오랜만에 고향인 남해로 향한다. 부모의 죽음 이후 고향을 떠난 지 오래된 은심은 하나둘씩 이곳의 추억을 음미하던 중, 과거 자신을 짝사랑하던 태호(박근형)를 만난다. 

     

     

     

     


    <소풍>은 제목이 갖고 있는 중의적인 의미를 그대로 옮긴 듯하다. 천상병 시인의 ‘귀천’ 중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이란 소절처럼, 이들의 고향 나들이는 그 자체로서의 오랜만에 떠나는 소풍이자, 생의 마지막을 함께하는 소풍이다. 젊은 시절 열심히 살아온 후, 노년이 되어서야 누리는 이 소풍의 분위기는 오랜만에 느끼는 설렘과 즐거움, 따뜻함이 가득한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부분이 부각되는 건 생의 마지막이라는 지점에 있다. 

     


    영화는 명랑한 분위기 속에서도 노인이 겪는 신체적 아픔을 즉시 한다. 파킨슨병에 의한 손 떨림은 물론, 허리가 아파 거동 자체를 못하는 모습, 뇌종양 등 질병으로 인한 고충 등을 가감 없이 전한다. 특히 금순이 허리가 아파 움직이지 못하고 소변을 실례하는 장면은 적지 않은 충격을 전한다. 이처럼 노인들의 치부를 전시하는 측면도 없지 않지만, 이들의 아름답고도 행복한 짧은 여행이 곧 마무리될 예정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신세 지는 일 없이 누군가에게 의존하지 않고, 삶을 마감하겠다는 이들의 다짐을 굳건하게 하는 계기가 된다. 

     

     

     

     


    존엄사라는 뜨거운 감자를 수면위로 올려놓은 영화는 윤리적인 잣대가 아닌 당사자들의 고통과 공포를 먼저 살펴봐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감독은 중반부에 은심과 금순의 미래를 보여준다. 자식이 걱정할까봐 병을 숨기고 살아온 친구의 죽음은 은심의 미래를, 요양병원에서 정신이 온전치 못한 친구가 죽은 듯 사는 모습은 금순의 미래를 보는 듯하다. 이 장면은 현시대를 살아가는 노인들의 모습이기도 하면서 노인들이 가진 고통과 공포다. 두 친구는 이런 공포에 휘감겨 살다가 가느니, 차라리 존엄을 택한 것. 후반부는 이들의 존엄 투쟁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다소 아쉬운 지점은 이 문제의식이 개인만의 문제로 그친다는 점이다. 고령화 사회에 접어드는 시점에서 노인들이 겪는 다수의 문제를 개인이 감내하고 존엄으로서 해결하는 과정에서 시각 자체가 이들에게만 국한된다. 같은 시기에 개봉한 <플랜 75>의 경우 고령화 사회 문제를 사회적 시각으로 넓혔던 것에 비해, <소풍>은 그 부분이 다소 약하다. 물론, 은심과 해웅 사이에 빚어진 중산층 가족의 민낯, 리조트 개발 위기에 놓인 시골 마을 등 가족 및 사회로 눈을 돌리긴 했지만, 이 부분마저 두 주인공이 처한 상황을 부가적으로 설명하는 구실로만 작용한다. 더불어 특별함 보단 안전함을 택한 듯 너무나 밉지만 그럼에도 도와주는 어미의 모습, 그 모든 게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귀결되는 이야기는 기시감을 느끼게 한다. 

     

     

     

     


    그럼에도 이 작품을 지켜보게 하는 건 나문희, 김영옥, 박근형 등 노배우들의 연기다. 자신의 이름을 지우고 실제 은심, 금순, 태호로 살아온 것처럼 느껴지는 이들의 존재감은 영화의 빈 공간을 채우고도 남는다. 특히 세 배우는 현시대를 살아가는 80대 노인들의 고통과 아픔을 연기로 승화시킨다. 여기에 요양병원에 갇혀 사는 이들의 친구 청자 역에 최선자, 은심을 질투하는 맹희 역에 이용이, 마을 터줏대감 영배 역에 한태일 등 스테레오 타입의 역할이지만 각자 자신이 맡은 연기를 수행하는 노배우들의 연기 또한 영화에 힘을 싣는다. 

     

     

     

     


    배우들의 연기만큼이나 큰 힘을 발휘하는 건 임영웅의 ‘모래 알갱이’다. 영화를 위해 만든 곡은 아니지만, 마치 이 영화를 위해 탄생한 곡처럼 은심과 금순의 이야기에 잘 스며든다. “나는 작은 바람에도 흩어질 / 나는 가벼운 모래 알갱이 / 그대 이 모래에 작은 발걸음을 내어요 / 깊게 패이지 않을 만큼 가볍게” 아등바등 가열차게 살아온 삶을 돌아보며, 누군가에게 신세 지지 않고 의존하지 않고, 모래 알갱이처럼 홀연히 떠나며 건네는 이들의 인사. 이 노래와 함께 마주해보길 바란다.  

     

     

     

    사진 제공: 롯데엔터테인먼트 

     

     

     

    평점: 3.0 /5.0
    한줄평: 의존하는 삶의 공포를 뒤로한 마지막 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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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울메이트>는 왜 소설이 아닌 그림을 선택했을까?
  • 반가웠다. 그리고 궁금했다. <소울메이트>가 원작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의 어떤 부분을 이어받았고, 어떤 부분을 달리 가져갔을까? 그 답을 찾듯 민용근 감독이 연출을 맡고 김다미, 전소니가 출연한 <소울메이트>를 확인했다. 제주도를 배경으로 풋풋하고 싱그러운 그 시절 소녀들의 사랑과 우정이 가슴에 와닿았다. 그리고 원작에는 없는 사진 같은 그림에 마음을 빼앗겼다. 감독은 왜 그림을 선택했을까? 

     

     

     

     

    1988년생 두 소녀 미소(김다미)와 하은(전소니). 서로 성격은 다르지만 곁에 없으면 안 될 둘도 없는 친구다. 하지만 이들에게도 영원이란 건 없나 보다. 하은이에게 첫사랑 진우(변우석)가 생기면서 이들은 서서히 다른 길을 간다. 자유분방한 성격의 미소는 제주도를 떠나 도시로 나가 살고, 차분한 성격의 하은은 고향에 남아 안정된 삶을 꾸린다. 성인이 되어 오랜만에 만난 이들은 함께 여행을 가게 되는데, 그곳에서 너무 달라진 서로의 모습을 확인하고, 기약 없는 이별을 한다.

     

     

     

    태생적으로 <소울메이트>는 원작과 비교될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녔다. 민용근 감독도 이를 의식했는지 원작과 다른 방식으로 첫 포문을 여는데, 바로 그림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극사실주의 초상화다. 원작은 출판사 직원이 칠월(마사순)이 쓴 인터넷 소설 판권을 구매하기 안생(주동우)을 만나 이야기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소울메이트> 또한 인터넷 소설이 아닌 초상화로 변경해 같은 맥락으로 진행한다. 두 영화 모두 연락이 안 된다는 이유로 각각 안생과 미소를 만나지만 당사자를 모른다는 답변만 오간다.

     

    소설과 그림 모두 이들의 추억 여행을 떠나게 하는 매개체로 사용된다. 다른 부분이 있다면 원작은 소설처럼 우리가 몰랐던 칠월과 안생의 지난한 인생 스토리를 들려주고, <소울메이트>는 이들의 숨겨진 이야기를 마주하되, 그림처럼 찬란하고 순수했던 이들의 순간과 감정을 전한다. 감독은 이젠 사라진 과거의 모습과 이미지를 복원시키는 것에 초점을 맞추며, 사랑과 우정 사이에 놓인 이들의 청춘을 되살아나게 한다.  

     

     

     

     

    이런 의미에서 영화 초반, 미소와 하은의 빛나는 10대 시절은 청춘을 떠올리게 하는 영상미로 가득하다. 청춘을 상징하는 여름이란 계절, 푸른 바다, 돌담길, 숲길 등 제주도를 배경으로 청량미 가득한 영상들이 수를 놓는다. 옛 추억을 상기시키는 펌프, 캔모아 카페, MP3, 디카 등등 2000년대 초반을 떠올리게 하는 소품들도 등장하며 감성을 톡 건드린다. 

     

    후반부로 넘어가며 내용상 밀도가 떨어지는 부분이 있지만, 이를 상쇄시키는 건 그림이다. 친구이기 때문에 말하지 못한 열등감이나 질투, 원망 등의 감정을 텍스트가 아닌 그림으로 표현한다. 스케치북, 캔버스뿐만 아니라 벽지에도 그림을 그리며 각 상황에 처한 감정을 전하는데, 이는 원작에서 느끼지 못했던 부분이라 새롭게 다가온다. 

     

     

     

     

    감독이 그린 스케치에 각기 다른 색을 덧칠하며 이 영화를 빛나게 하는 건 역시나 김다미와 전소니다. 이들은 서로 다른 매력을 보여주며 사랑과 우정 사이에서 갈등하는 이들의 모습을 잘 그려낸다. 청춘영화답게 그 시절 아름다운 10대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것은 물론, 미묘하고 위태로운 감정선을 눈빛과 표정으로 잘 보여준다. 동굴에 다녀온 후, 미묘한 감정의 기류가 느껴지는 장면, 부산 여행 저녁 식사 장면, 후반부 욕실 장면 등은 두 배우의 시너지가 빛을 발한다. 특히 너무나 가까워서 너무 잘 아는 친구일수록 상대방을 무너지게 하는 비밀을 알고 있는데, 부산 여행 식사 장면에서 그 부분을 건드리며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모습, 그리고 호텔 엘리베이터를 문을 사이에 두고 헤어지는 모습 등은 이들 사이에 벌어지는 애증의 관계를 감정적으로 잘 전달한다. 

     

     

     

    시작을 그림으로 했듯이 영화의 마지막 또한 딸과 함께 자신이 그려진 초상화를 미소의 모습으로 마무리한다. 미소는 이 초상화를 보고 어떤 생각을 했을까? 과거 “똑같이 그리다 보면 마음이 보여”라는 말을 곱씹으며 사진처럼 그림을 그리는 하은이의 마음을 이해했을까? 아니면 삶에서 가장 빛났던 그 때 그 시절을 추억했을까? 그 답은 알 수 없지만 미소는 제주도를 떠나 더 넓은 세상을 여행하는 하은이가 행복했으면 하는 바람일 것이다. 관객 또한 이들의 사랑과 우정을 보며 과거 찬란했던 순간을 함께 했던 친구들을 떠올리며 그들의 행복을 바라지 않을까?

     

    사진 제공: NEW

     

    평점: 3.0 /5.0

    한줄평: 너와 나의 찬란했던 순간, 한 폭의 그림이 되어 돌아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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